10. 초순선미(初巡鮮味) 재즉감순(再則甘醇)
이른 봄 연두 빛 산색이다. 상긋하여 신묘스런 향이다. 입안의 맑은 찻물 흘러 가슴으로 내리는 소리가 퍼지는 듯도 하다. 연 초록 안개가 몸 안으로 서려온다. 가까운 이웃에서 만난 차나무에서 어린 찻잎을 한웅큼 채취하는 행운을 얻어 즐거웠다. 이미 잎이 다 피어나서 작설(雀舌)이 아니라 펴오르는 날개 같지만 첫 잎이어서 야드레하다. 다소(茶疏)의 저자인 허차서(許次 ))의 말대로 해보기로 한다. 어떤 스님이 청발효차를 만들면 신선한 향과 빛을 즐길 수 있다 하였다. 차의 경전으로는 다경(茶經)을 치지만 다경은 당나라 사람 육우가 지었고, 그 때는 오늘과 같은 잎차보다 단차와 덩이차를 애용하여 오늘의 잎차와는 거리가 멀어서 참고할 사항이 많지 않다. 다소는 명나라 때의 차생활에 대한 글이므로 오늘날과 같은 잎차가 성행하는 때에 맞는 차의 고전으로 그 근원을 살피기에 알맞다. 청발효차는 섭씨 60도쯤 되는 온도의 솥에 천천히 오래 덖으면 서서히 익으면서 발효가 약간 되고 청빛이 살아 있다고 했다. 다소의 글대로라면, "한 솥에는 겨우 넉냥(150그램)을 수용한다. 먼저 문화(文火), 여린 불,을 써서 부드럽게 덖고, 다음에 무화(武火), 센 불,을 써서 재촉한다. 손에는 나무손을 쥐고 급급히 뒤집어 익히는데, 반 익은 정도에서 조금 기다려 향기가 발하면 이 징후일 때가 마땅하다." 이번에 나는 처음 열을 약간 올린 솥에 찻잎을 넣고 향기가 나는 징후가 발할 때까지 서서히 덖었다. 차 익는 향이 솥에서 밖으로 피어오를 때 익은 찻잎을 꺼내어서 면綿 보자기에서 한 번 비벼서 털었다. 다시 솥에 넣고 사분히 덖었다. 찻잎이 익어갈 때마다 솥에서도 비벼가면서 덖었다. 알맞은 향기가 될 때 덖기를 그치고 차 솥이 식을 때까지 비빈 것을 밤 새워 두고 다음 날 다시 더운 솥에서 마무리를 했다. 차 잎이 익어가며 향을 발할 때의 맛 때문에 차를 만든다. 바로 그 과정의 맛 때문에! 불발효차든 발효차든 그 익어 가는 향기는 그 무엇에도 비길 수가 없는 맛이다. 그 향기로 인하여 한 해의 차를 다 마신 듯도 하고 한 해의 정기를 모두는 기분이 든다. 다음 날 고요히 그 차를 우려 보았더니, 바로 허차서의 말 대로였다.
초순선미(初巡鮮味) 재즉감순(再則甘醇) 오늘에 와서야 중국(中國)의 글자인 한자에 목마를 줄이야! 우리는 한글 세대여서 학창시절에 한자는 소홀히 하고 영어 공부에 온 정열을 다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어를 해야 먹고살기 쉬웠으니 늙으면 서양 할머니가 될게다 고 내 언니가 말했었다. 그러면서도 이웃의 나라말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늦게야 중국말에 갈증을 느끼게 된 것은 차(茶)의 고전이 모두 중국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인이 모두 중국에 유학하였기 때문에 또한 한자로 책을 썼기 때문이다. 나의 조상을 따져보아도 '주자가례'의 성현 '주희'의 주씨 성을 이어받는 어머니 성에다, 아버지의 성씨는 조나라 조(趙)였으니, 원 고향은 중국이 아니던가. 왜 이제야 중국말에 초점이 꽂히는가 한탄스럽다. 사실 문자명이 한자일 뿐이지 갑골문 6000자는 동이족이 만들고 그 이후는 여러 민족에 의해서 발전시켜온 동반 공유문자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 맞다. 특히 우리조상이 3000년 이상을 우리 글로 써온 문자인 것을. 시대를 탓하랴, 누구를 탓하랴!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가져본다. 한문을 공부했으면 원어가 지닌 맛을 더 깊히 느낄 수 있을 터인데….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한글공부였고, 그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새롭게 하는 일이었다. 그렇듯 언어 그 자체는 그 나라의 정신이요 문화의 집결이 아니던가. 차로 인하여 중국의 말과 문화에 더 주의가 높아진다. 중국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근간을 함께 이해하고 우리의 고유성을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어찌됐던 번역의 말로라면, 첫잔은 맛이 선(鮮)선(仙), 둘째 잔은 달금순박하며, 셋째 잔은 의욕을 다하게 한다. 즉 삼순의욕진의(三巡意慾盡矣) 이다. 흔히 차를 처음 대하는 자들이 듣는 차의 맛을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있다. 첫 잔은 십오륙세의 아릿따운 맛이요, 둘 째는 익은 여인의 맛이며, 셋 째 이상은 늙은 맛이란 말이다. 이 말들은 허차서의 다소에서 비롯된 말인 듯하다. 허차서에게는 명(明) 당대의 사람으로 시문에 능했고 은퇴 후에 여러 서실을 운영했다는 풍개지란 친구가 있었다. 풍개지와 차를 살펴들며 농담하는 말로, "이초순위정정(以初巡爲停停), 뇨뇨십삼여 ( 十三女), 재순위벽옥파과년(再巡爲碧玉破瓜年), 삼순이래,록엽성음의(三巡以來),(綠葉成陰矣)" 라 한 것이다. 번역된 글로는, "첫 잔의 차는 아리땁고 여리고 부드러운 열 세 살이오, (정정뇨뇨( )라는 속자가 있는데 그 뜻이 아리땁고 여리고 부드러움의 뜻이란다. 계집 녀 변이 붙은 글자가 재미있다.) 언제 저런 한문 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내 가 차(茶)를 가까이 하지 않았던들…. 둘째 잔은 벽옥같은 15-16세요, 경도가 시작되는 과기(瓜期)의 '과' 자는 8자가 두 개이니 2, 8이 16이 된다는 말이 또한 재미있지 않은가. 남자들끼리라면 차 잔의 맛을 겨루어 그런 농을 능히 주고받을 만 했겠다. 풍개지는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단다. 그러하니 차관을 작게 하여 두 순배로 끝내고 차라리 남은 향기는 오히려 찻잎에 머물게 하였다가 오직 밥 먹은 뒤에 입가심 용도로 제공됨이 마땅함으로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 또한 차를 다룰 때 집에서 그렇게 하고 있으며, 여러 번 덖은 차는 몇 잔이라도 좋은 맛을 내니 네 째 잔 이상도 목마름을 달래는 데도 쓰고 다른 용도로도 쓴다. 과연 그렇다 굳이 차 맛을 뭐라 알맞은 말을 찾을 일이 없다. 옛 차인들의 말 그대로라, 차 맛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지만, 요즘 낭자들이 옛사람이 말한 그런 차 맛에 비유될 낭자들이 있을까. 현대 문명의 맛이 덧칠해진 요즘 처녀들은 어떤 맛에 비유해야 할 지.
우리의 어여쁜 손주들이 어릴 때부터 차를 다루고 차 맛에 길들여져서 그 청순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할 일이다. 그 초순과 재순의 맛을 지니도록 차의 맛과 품성을 배우면 좋으리라. 차가 익어가며 향기를 발하는 것처럼 자라고 성숙해 감에 따라 발효차가 내는 풍미처럼 깊은 맛을 지니는 여인으로, 어머니로 할머니로 되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옛 차인들이 노래한 차 경전과 다소와 다부들의 글귀가 새삼 가슴에 스며든다. 허공에 잔을 받쳐 올리고 차 노래를 읊조리며 차 한 순배 두 순배를 나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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