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몽정산촉아주산야(夢頂山蜀雅州山也)
급할 때는 돌아가라 했지. 지금 세상 안팎은 들끓고 있다. 지구촌이 실감나는 오늘날이다. 바로 옆집 중국의 사천성에 불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지난 12일의 대지진으로 쓰촨성 내 문화재 가운데 중국 중앙정부가 관리해오던 65개소의 문화재와 쓰촨성 성정부가 관리해오던 119개소의 문화재, 그리고 각 지역 박물관에 보관해오던 문화재 841건이 파괴되거나 훼손됐다. 또 나라 안은 고(高)유가(油價)에 물가도 오르고 소고기 수입에 대한 새정부의 외교정책을 두고 촛불시위가 집회로 번져서 날마다 시끄럽다. 마치 민주화를 부르짖던 데모대들을 연상하게 한다. 네티즌의 실시간 방송으로 인하여 국민의 여론은 삽시간에 퍼진다. 세계의 소들도 귀가 시끄러울 것이다. 안절부절하는 소들도 또한 데모를 하게 되지나 않을까. 사람들 마음이 끓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아무리 급해도 차를 먼저 마시고 본다고 했다. 싸우는 사람이 있으면 붙들어다 차부터 마시게 한다나. 그러면 자연히 마음이 가라앉게 되기 때문이겠다. 요즘도 그러한 지 모르지만 차 한 잔 값으로 하루 종일 다방에서 차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니 말이다. 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바로 사천성의 청성산이다. 장구한 역사에 걸맞게 차의 전설이 살아 있는 그리운 옛 차인들의 고향, 허차서의 고향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청성산은 무림검법으로 유명한 청성파의 본거지로 무당산, 용호산과 함께 3대 도교 성지로 꼽힌다. 우리의 다성(茶聖) 이목 어른은 그의 다부(茶賦)에서 차의 공덕을 말할 때 청성산의 도인들을 언급했다. "차의 맛이 뛰어나고 신묘하니 그 공을 논하지 않을 수 없노라." 옛 선비들이 만 권 서적을 독파하고 잠시도 쉬지 않아 당나라 사람인 동생(董生)이 입술이 썩고 한유(韓愈)는 이가 빠졌다는데 차(茶)가 아니면 누가 그 목마름 풀어 주었으랴! 그 공을 첫째로 들었다. 정치적 상황에 얽혀 모함을 받아 감옥에서 상소를 올리매, 그 모습은 깡마르고 안색은 초췌하며 창자가 하루 아홉 번이나 뒤틀려 답답한 가슴이 불타오를 때 차(茶)가 아니면 누가 그 울분을 풀어 주었으랴! 그 공을 둘째라 하였다. 천태산 선인들과 청성산 우객(羽客)이 바위 모퉁이에서 토납(吐納)을 행하고 솔뿌리의 정기를 연단하여 신선의 비법으로 시험할 때, 불현듯 뱃속에서 꿈틀대며 치밀어 오를 때 차(茶)가 아니면 삼욕(三欲)을 어떻게 무찔렀으랴! 또 하나의 공을 들었다.
청성산은 한(漢)대(代)에도 삼천여 개의 동굴이 있어 많은 선인들이 있었고 지금까지 도를 닦는 곳. 도교의 발상지이자, 중국 최초로 국가급 중점 풍경명승지로 지정된 청성산 정상 부근의 노군각이 지진으로 무너진 것이다. 이곳의 한 도사는 “칭청산은 항상 온통 푸른 산이었는데 저렇게 황톳빛 땅이 드러난 모습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주변 상가들도 무너져, 대부분 철시했다. 주변은 난민촌으로 변했다. 노군각 아래에 있는 상청궁과 텐스동(천사동) 등 도교 사원들도 기왓장이 무너져 내리고 벽이 파손되는 등 심한 상처를 입었다. 톈스동의 한 도사는 “수천 년을 이어온 이 청정 도장이 이처럼 허무하게 파손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동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장에 있는 듯 처참했다. 도인들이 차를 마시면서 삼욕을 다스렸던 청성산의 토굴이야기를 다부에서 읽은 것만으로도 그리운 곳이 무너졌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것이련만!
명나라 이전에는 사천성과 운남성은 명차의 고장이었다. 허차서가 밝혔다. "옛사람이 차를 논평하기를 반드시 몽정차를 으뜸이라 했는데, 몽정이란 산은 사천성(촉) 아주의 산이다. 지난날에는 항상 생산되었으나 지금은 다시 나지 않는다. 지금 사람들은 산동성에서 석이버섯 같은 것을 가져와 망녕되이 몽산차라 한다." 명차의 이름을 빌어 진짜 차가 아닌 것을 속이고 파는 것을 지적했다. 우리의 차 산업도 지금쯤은 정착이 되어서 명차의 생산에 고심하여야 할 것이다. 어찌됐건 사실대로 투명하였으면 좋겠다. 차나무의 성품대로 차를 제대로 한다면 차 산업만큼은 제대로 맑게 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나 남의 나라나 사람들은 다 마찬가지다. 이익을 얻기 위하여 상품화하고 판매하는 과정에서 속이고 속는다. 아직도 사대사상에 젖어 외국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 차만 해도 중국에 가서 속아서 비싼 값으로 사오는 것이 허다하다. 사실 중국의 차 상인들이 우리 관광객들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가 이제 미국으로부터 소고기를 수입하는 데 있어 말썽이 많다. 국민이 먹을 소가 생산되는 과정을 몰라서야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을까. 풀만 먹어야 하는 소에게 어찌 자기 동족이 도축되고 남은 같은 종의 뼈와 그 찌꺼기를 다시 먹여 광우병을 일으키는 소로 만드는 것인가. 진실은 따로 있으나 사람이 행하게 되면 다른 모습으로 변형된다. 상거래의 진실을 소비자가 제대로 알 수 없게 하는 함정은 요소 요소에 숨어 있기 마련이다. 이제 국민들이 똑똑해져서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촛불의 홍수가 뉴스마다 물결치고 있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일은 본래대로 되돌려져야 한다. 얼마나 우리는 본래 자연에서 멀리 와 있는 것인지. 사람 마음에 깔려 있는 삼욕(三欲)을 다스리지 못함인가 싶다.
몽정차가 생산되던 그 산봉우리들도 무너졌을 것이다. 산이 뒤집혀 강을 막아 호수가 되고 땅이 골짜기에 뒤범벅이 돼버렸다. 한 도시의 주민들이 통째로 이주해야할 판이란다. 그 어디쯤 명월협(明月峽)이 있는지, 안 보아도 눈에 선연한 것 같다. 그 명월협도 파괴가 되었을지. 도소헌이 명월협에 가보고서야 하차서가 차를 즐기던 것을 비로소 알게 되어 애틋해 했던 것이다. 허차서의 친구인 도소헌은 허차서가 죽은 후 다소를 발간하면서 서문을 썼다. " ... 연명 (허차서의 자)은 차의 가장 정미한 이치를 깨닫고 돌아가 '다소(茶疏)' 한 책을 저술했으나, 나는 알지 못했다. 연명이 죽고 3년 무렵이다. 나는 차 그릇을 잡을 때마다, 때없이 솟는 감회를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러던 중 정미년 봄에 허재보가 연명의 다소를 가져와 보여주었고, 또 한 꿈에 '연명' 이 드러내기를, '연명 생존시 매우 풍부했던 저술의, 유독 깨끗한 일을 옛 친구에게 부탁했다' 한, 어찌 그리도 정성을 쏟은 바이랴!
언제나 그 첫 맛이다. 처음 내가 그 신선한 첫 잔의 색과 향 맛 본지 근 삼십여 년 가까이 되지만, 오늘 무심히 청발효차 맛보며 늘 그리운 그 첫 맛처럼 옛 차인들도 그립다. 하늘에 먼저 가신 모든 다성들이 우리들의 애통함을 굽어살피시리라. 생명의 위급함과 거리의 혼란 앞에서 어찌 한가롭게 차 이야기를 읊조리는가 할까만,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은 정신을 차려야 하는 소이가 차 한 잔에는 충분히 녹아 있다. 그럴수록 차 한 잔의 여유를 내야 하리라. 차 맛을 알아주어 같이 차를 살피던 다우들이 생각나는 날이다. 내가 죽은 후 내가 쓰다만 차 이야기를 누가 마무리 해줄 자 있을까? 허차서의 친구 도소헌처럼 말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사람에겐 희망이 있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진실의 칼은 냉엄할 것이다. 시끄러워야 본래의 모습은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곳곳에는 언제나 본래의 자리를 지키는 이가 있기에. 힘든 때일 수록 한 잔의 차부터 마셔야겠다. 정신 차려 고요한 마음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챙기는 일부터다. 신선한 그 첫 맛을 잃지 않는 차(茶)의 품성을 지니고자…. (2008/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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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모양 없는 차 그릇
오랜 동안 간직하던 차관을 한 순간의 실수로 깨고 말았다. 너무나 익숙하게 잘 다루던 내 솜씨를 믿고 주의를 소홀히 했다. 아니 너무나 몸에 붙어 있어 소중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 있었지 싶다. 미련 없이 쓰레기장에 버렸다. 근데 자꾸 아까웠다. 원래 그 차관은 안정감은 있었지만 물구멍이 너무 세밀하여 물이 잘 흐르지 않았던 것을 요즘 출장 다회 때 사용하기 위해서 손수 물구멍을 정교하게 뚫었다. 손에 익어 막 쓰기에 편리했던 것이다. 물이 흐르는 주둥이 끝도 조금 깨져 있어 함부로 했던 것일까. 집에서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텐데 운반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차의 아홉 가지 어려움 중의 하나가 찻그릇이다.
일본의 국보 중의 하나인 찻사발에 대한 일화를 떠올린다. 조선의 막사발을 우리는 '조선찻사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의 국보가 우리의 막사발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본인들이 우리의 생활 도자기들에 혈안이 되었었다. 일본 차인들은 우리의 막사발을 극찬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임진 때 많은 도자기 장인들이 일본에 끌려가서 마을을 이루고 살며 일본의 도자기 역사를 만든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기도 하다. 일본 천하 3대 이도다완으로 불리는 '쓰쓰이쓰쓰'라는 찻사발이 있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본전국의 패자로 떠올랐다. 그의 승리를 본 아마토고요리야마성의 성주 쓰쓰이케이는 자신의 목숨과 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이도요시 히로가 소장하고 있던 '이도다완'을 도요토미에게 헌납했다. 비천한 출신을 다도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던 도요토미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도요토미는 그 사발에 '쓰쓰이쓰쓰이도'라는 이름을 붙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제일의 찻사발이라고 극찬하고 아꼈던 '이도다완', '쓰쓰이쓰쓰이도'. 어느 날 차를 시중들던 시동이 실수로 그 다완을 떨어뜨려 다섯조각을 내고 말았다. 쓰쓰이이도를 아깝게 여긴 도요토미는 당시 자신의 차두(茶頭)였던 일본의 다성(茶聖) 센리큐에게 수리를 맡겼다. 센리큐는 그 다완을 이틀에 걸쳐 수리했다. 그리고 그 다완의 우주적인 심미감에 사로잡힌 센리큐는 도요토미도 모르게 찻사발에 차 한잔을 했다. 그러나 그같은 사실을 도요토미에게 들켜 엄청난 분노를 사게됐다. 센리큐에게 수리되어 쓰쓰이이도는 일본말로 다섯조각의 이도라는 뜻으로 '쓰쓰이쓰쓰이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쓰쓰이쓰쓰이도 찻사발은 현재 일본의 보물로 지정되어 가나자와현의 사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찻잔의 이름은 용도와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로 말한다. 일반적으로 녹차 잔이 되는 것으로 작고 위아래가 거의 같은 것을 찻종이라 부른다. 다완 모양의 작은 것을 찻잔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막사발에 해당하는 다완은 말차(末茶)잔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말하는 차(茶)라 하면 주로 말차를 말한다. 넓은 사발(다완)에 찻가루를 뜨거운 물로 개어서 다선(찻솔)로 거품을 내어 마시는 것을 말한다. 고려 때 만든 우리의 국보인 청자 사발에 말차를 저어서 거품이 올라오는 모습은 설록이 피는 것 같을 것이다. 설록차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오래 같이 지냈던 사람도 한 둘 떠나고 보내기도 하고, 오래 지닌 것들도 이렇게 나에게서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있다. 사람만큼이나 소중한 것들 중의 하나였다. 진품명품이 아니라도 오랫동안 같이 했던 세월의 정이 담긴 것은 그 어떤 명품보다 명품이 되는 것이 아닌가. 다섯 조각으로 깨졌다면 나도 붙여볼 궁리로 도자기 조각들을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빨리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 그릇이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요즈음 자주 쓰는 차관(차 우리는 주전자)은 주둥이도 상처가 나고 손잡이도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러나 역할을 해내기에는 손색이 없다. 깨어진 것이기에 더 소중히 아껴 쓰고 있다. 이 그릇은 친구 집에서 가져온 것이다. 깨어져서 쓰지 않는 것을 나는 요긴하게 쓰고 있다. 누군가 쓰던 것이어서 정감이 묻어나서 더 소중하게 사용한다. 차 그릇을 파는 집에서 나는 주인이 사용하여 찻물이 베인 차관을 새 것 대신에 사온 적도 있다. 발효차 전용으로 쓰기에는 그 손잡이가 없는 것이 귀하게 보여 뜨거울 때는 수건을 받치고 쓰기도 한다. 그 차관보다 훌륭한 청백자 다관을 깬 것이다. 센리큐처럼 수리할 여지가 남았다면 안타까움은 더했을 것이다. 미련을 가질 수도 없을 정도로 박살났으니 어쩔 수 없다. 센리큐 뿐 아니라 모든 다인들에게 다도(茶道)는 인격의 완성에 이르는 길이었다. 군자는 불기(不器)라 하지 않던가, 생전에 군자에 이르기는 글렀는데, 아직은 그릇을 다루면서 그릇을 넘는 경지에 닿아야 할 것인데…. 이제는 그렇게 가진 마음도 그릇도 놓으라는 말인 것 같다. 어차피 나도 상처 나고 흠집이 많은 그릇인 것을…. 내가 어떤 그릇이 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무엇이든 담고 비우기를 무시로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필의 장르는 바다와 같아야 한다고 하여 바다는 해불양수(海不讓水)여야 한다고……. 그렇다. 형상에 연연할 것 없다. 모양 없는 다관에다 부피 없는 차를 넣고 흐르지 않아 소리도 없는 물을 부어 알맞게 우려진 차는 어떤 맛으로 이름 지어야 할까. 그렇게 우린 차를 가없는 |
오랜 동안 간직하던 차관을 한 순간의 실수로 깨고 말았다. 너무나 익숙하게 잘 다루던 내 솜씨를 믿고 주의를 소홀히 했다. 아니 너무나 몸에 붙어 있어 소중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 있었지 싶다. 미련 없이 쓰레기장에 버렸다. 근데 자꾸 아까웠다. 원래 그 차관은 안정감은 있었지만 물구멍이 너무 세밀하여 물이 잘 흐르지 않았던 것을 요즘 출장 다회 때 사용하기 위해서 손수 물구멍을 정교하게 뚫었다. 손에 익어 막 쓰기에 편리했던 것이다. 물이 흐르는 주둥이 끝도 조금 깨져 있어 함부로 했던 것일까. 집에서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텐데 운반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차의 아홉 가지 어려움 중의 하나가 찻그릇이다.
일본의 국보 중의 하나인 찻사발에 대한 일화를 떠올린다. 조선의 막사발을 우리는 '조선찻사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의 국보가 우리의 막사발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본인들이 우리의 생활 도자기들에 혈안이 되었었다. 일본 차인들은 우리의 막사발을 극찬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임진 때 많은 도자기 장인들이 일본에 끌려가서 마을을 이루고 살며 일본의 도자기 역사를 만든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기도 하다. 일본 천하 3대 이도다완으로 불리는 '쓰쓰이쓰쓰'라는 찻사발이 있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본전국의 패자로 떠올랐다. 그의 승리를 본 아마토고요리야마성의 성주 쓰쓰이케이는 자신의 목숨과 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이도요시 히로가 소장하고 있던 '이도다완'을 도요토미에게 헌납했다. 비천한 출신을 다도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던 도요토미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도요토미는 그 사발에 '쓰쓰이쓰쓰이도'라는 이름을 붙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제일의 찻사발이라고 극찬하고 아꼈던 '이도다완', '쓰쓰이쓰쓰이도'. 어느 날 차를 시중들던 시동이 실수로 그 다완을 떨어뜨려 다섯조각을 내고 말았다. 쓰쓰이이도를 아깝게 여긴 도요토미는 당시 자신의 차두(茶頭)였던 일본의 다성(茶聖) 센리큐에게 수리를 맡겼다. 센리큐는 그 다완을 이틀에 걸쳐 수리했다. 그리고 그 다완의 우주적인 심미감에 사로잡힌 센리큐는 도요토미도 모르게 찻사발에 차 한잔을 했다. 그러나 그같은 사실을 도요토미에게 들켜 엄청난 분노를 사게됐다. 센리큐에게 수리되어 쓰쓰이이도는 일본말로 다섯조각의 이도라는 뜻으로 '쓰쓰이쓰쓰이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쓰쓰이쓰쓰이도 찻사발은 현재 일본의 보물로 지정되어 가나자와현의 사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찻잔의 이름은 용도와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로 말한다. 일반적으로 녹차 잔이 되는 것으로 작고 위아래가 거의 같은 것을 찻종이라 부른다. 다완 모양의 작은 것을 찻잔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막사발에 해당하는 다완은 말차(末茶)잔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말하는 차(茶)라 하면 주로 말차를 말한다. 넓은 사발(다완)에 찻가루를 뜨거운 물로 개어서 다선(찻솔)로 거품을 내어 마시는 것을 말한다. 고려 때 만든 우리의 국보인 청자 사발에 말차를 저어서 거품이 올라오는 모습은 설록이 피는 것 같을 것이다. 설록차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오래 같이 지냈던 사람도 한 둘 떠나고 보내기도 하고, 오래 지닌 것들도 이렇게 나에게서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있다. 사람만큼이나 소중한 것들 중의 하나였다. 진품명품이 아니라도 오랫동안 같이 했던 세월의 정이 담긴 것은 그 어떤 명품보다 명품이 되는 것이 아닌가. 다섯 조각으로 깨졌다면 나도 붙여볼 궁리로 도자기 조각들을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빨리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 그릇이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요즈음 자주 쓰는 차관(차 우리는 주전자)은 주둥이도 상처가 나고 손잡이도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러나 역할을 해내기에는 손색이 없다. 깨어진 것이기에 더 소중히 아껴 쓰고 있다. 이 그릇은 친구 집에서 가져온 것이다. 깨어져서 쓰지 않는 것을 나는 요긴하게 쓰고 있다. 누군가 쓰던 것이어서 정감이 묻어나서 더 소중하게 사용한다. 차 그릇을 파는 집에서 나는 주인이 사용하여 찻물이 베인 차관을 새 것 대신에 사온 적도 있다. 발효차 전용으로 쓰기에는 그 손잡이가 없는 것이 귀하게 보여 뜨거울 때는 수건을 받치고 쓰기도 한다. 그 차관보다 훌륭한 청백자 다관을 깬 것이다. 센리큐처럼 수리할 여지가 남았다면 안타까움은 더했을 것이다. 미련을 가질 수도 없을 정도로 박살났으니 어쩔 수 없다. 센리큐 뿐 아니라 모든 다인들에게 다도(茶道)는 인격의 완성에 이르는 길이었다. 군자는 불기(不器)라 하지 않던가, 생전에 군자에 이르기는 글렀는데, 아직은 그릇을 다루면서 그릇을 넘는 경지에 닿아야 할 것인데…. 이제는 그렇게 가진 마음도 그릇도 놓으라는 말인 것 같다. 어차피 나도 상처 나고 흠집이 많은 그릇인 것을…. 내가 어떤 그릇이 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무엇이든 담고 비우기를 무시로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필의 장르는 바다와 같아야 한다고 하여 바다는 해불양수(海不讓水)여야 한다고……. 그렇다. 형상에 연연할 것 없다. 모양 없는 다관에다 부피 없는 차를 넣고 흐르지 않아 소리도 없는 물을 부어 알맞게 우려진 차는 어떤 맛으로 이름 지어야 할까. 그렇게 우린 차를 가없는 |
오랜 동안 간직하던 차관을 한 순간의 실수로 깨고 말았다. 너무나 익숙하게 잘 다루던 내 솜씨를 믿고 주의를 소홀히 했다. 아니 너무나 몸에 붙어 있어 소중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 있었지 싶다. 미련 없이 쓰레기장에 버렸다. 근데 자꾸 아까웠다. 원래 그 차관은 안정감은 있었지만 물구멍이 너무 세밀하여 물이 잘 흐르지 않았던 것을 요즘 출장 다회 때 사용하기 위해서 손수 물구멍을 정교하게 뚫었다. 손에 익어 막 쓰기에 편리했던 것이다. 물이 흐르는 주둥이 끝도 조금 깨져 있어 함부로 했던 것일까. 집에서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텐데 운반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차의 아홉 가지 어려움 중의 하나가 찻그릇이다.
일본의 국보 중의 하나인 찻사발에 대한 일화를 떠올린다. 조선의 막사발을 우리는 '조선찻사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의 국보가 우리의 막사발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본인들이 우리의 생활 도자기들에 혈안이 되었었다. 일본 차인들은 우리의 막사발을 극찬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임진 때 많은 도자기 장인들이 일본에 끌려가서 마을을 이루고 살며 일본의 도자기 역사를 만든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기도 하다. 일본 천하 3대 이도다완으로 불리는 '쓰쓰이쓰쓰'라는 찻사발이 있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본전국의 패자로 떠올랐다. 그의 승리를 본 아마토고요리야마성의 성주 쓰쓰이케이는 자신의 목숨과 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이도요시 히로가 소장하고 있던 '이도다완'을 도요토미에게 헌납했다. 비천한 출신을 다도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던 도요토미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도요토미는 그 사발에 '쓰쓰이쓰쓰이도'라는 이름을 붙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제일의 찻사발이라고 극찬하고 아꼈던 '이도다완', '쓰쓰이쓰쓰이도'. 어느 날 차를 시중들던 시동이 실수로 그 다완을 떨어뜨려 다섯조각을 내고 말았다. 쓰쓰이이도를 아깝게 여긴 도요토미는 당시 자신의 차두(茶頭)였던 일본의 다성(茶聖) 센리큐에게 수리를 맡겼다. 센리큐는 그 다완을 이틀에 걸쳐 수리했다. 그리고 그 다완의 우주적인 심미감에 사로잡힌 센리큐는 도요토미도 모르게 찻사발에 차 한잔을 했다. 그러나 그같은 사실을 도요토미에게 들켜 엄청난 분노를 사게됐다. 센리큐에게 수리되어 쓰쓰이이도는 일본말로 다섯조각의 이도라는 뜻으로 '쓰쓰이쓰쓰이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쓰쓰이쓰쓰이도 찻사발은 현재 일본의 보물로 지정되어 가나자와현의 사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찻잔의 이름은 용도와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로 말한다. 일반적으로 녹차 잔이 되는 것으로 작고 위아래가 거의 같은 것을 찻종이라 부른다. 다완 모양의 작은 것을 찻잔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막사발에 해당하는 다완은 말차(末茶)잔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말하는 차(茶)라 하면 주로 말차를 말한다. 넓은 사발(다완)에 찻가루를 뜨거운 물로 개어서 다선(찻솔)로 거품을 내어 마시는 것을 말한다. 고려 때 만든 우리의 국보인 청자 사발에 말차를 저어서 거품이 올라오는 모습은 설록이 피는 것 같을 것이다. 설록차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오래 같이 지냈던 사람도 한 둘 떠나고 보내기도 하고, 오래 지닌 것들도 이렇게 나에게서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있다. 사람만큼이나 소중한 것들 중의 하나였다. 진품명품이 아니라도 오랫동안 같이 했던 세월의 정이 담긴 것은 그 어떤 명품보다 명품이 되는 것이 아닌가. 다섯 조각으로 깨졌다면 나도 붙여볼 궁리로 도자기 조각들을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빨리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 그릇이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요즈음 자주 쓰는 차관(차 우리는 주전자)은 주둥이도 상처가 나고 손잡이도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러나 역할을 해내기에는 손색이 없다. 깨어진 것이기에 더 소중히 아껴 쓰고 있다. 이 그릇은 친구 집에서 가져온 것이다. 깨어져서 쓰지 않는 것을 나는 요긴하게 쓰고 있다. 누군가 쓰던 것이어서 정감이 묻어나서 더 소중하게 사용한다. 차 그릇을 파는 집에서 나는 주인이 사용하여 찻물이 베인 차관을 새 것 대신에 사온 적도 있다. 발효차 전용으로 쓰기에는 그 손잡이가 없는 것이 귀하게 보여 뜨거울 때는 수건을 받치고 쓰기도 한다. 그 차관보다 훌륭한 청백자 다관을 깬 것이다. 센리큐처럼 수리할 여지가 남았다면 안타까움은 더했을 것이다. 미련을 가질 수도 없을 정도로 박살났으니 어쩔 수 없다. 센리큐 뿐 아니라 모든 다인들에게 다도(茶道)는 인격의 완성에 이르는 길이었다. 군자는 불기(不器)라 하지 않던가, 생전에 군자에 이르기는 글렀는데, 아직은 그릇을 다루면서 그릇을 넘는 경지에 닿아야 할 것인데…. 이제는 그렇게 가진 마음도 그릇도 놓으라는 말인 것 같다. 어차피 나도 상처 나고 흠집이 많은 그릇인 것을…. 내가 어떤 그릇이 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무엇이든 담고 비우기를 무시로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필의 장르는 바다와 같아야 한다고 하여 바다는 해불양수(海不讓水)여야 한다고……. 그렇다. 형상에 연연할 것 없다. 모양 없는 다관에다 부피 없는 차를 넣고 흐르지 않아 소리도 없는 물을 부어 알맞게 우려진 차는 어떤 맛으로 이름 지어야 할까. 그렇게 우린 차를 가없는 |
오랜 동안 간직하던 차관을 한 순간의 실수로 깨고 말았다. 너무나 익숙하게 잘 다루던 내 솜씨를 믿고 주의를 소홀히 했다. 아니 너무나 몸에 붙어 있어 소중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 있었지 싶다. 미련 없이 쓰레기장에 버렸다. 근데 자꾸 아까웠다. 원래 그 차관은 안정감은 있었지만 물구멍이 너무 세밀하여 물이 잘 흐르지 않았던 것을 요즘 출장 다회 때 사용하기 위해서 손수 물구멍을 정교하게 뚫었다. 손에 익어 막 쓰기에 편리했던 것이다. 물이 흐르는 주둥이 끝도 조금 깨져 있어 함부로 했던 것일까. 집에서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텐데 운반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차의 아홉 가지 어려움 중의 하나가 찻그릇이다.
일본의 국보 중의 하나인 찻사발에 대한 일화를 떠올린다. 조선의 막사발을 우리는 '조선찻사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의 국보가 우리의 막사발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본인들이 우리의 생활 도자기들에 혈안이 되었었다. 일본 차인들은 우리의 막사발을 극찬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임진 때 많은 도자기 장인들이 일본에 끌려가서 마을을 이루고 살며 일본의 도자기 역사를 만든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기도 하다. 일본 천하 3대 이도다완으로 불리는 '쓰쓰이쓰쓰'라는 찻사발이 있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본전국의 패자로 떠올랐다. 그의 승리를 본 아마토고요리야마성의 성주 쓰쓰이케이는 자신의 목숨과 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이도요시 히로가 소장하고 있던 '이도다완'을 도요토미에게 헌납했다. 비천한 출신을 다도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던 도요토미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도요토미는 그 사발에 '쓰쓰이쓰쓰이도'라는 이름을 붙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제일의 찻사발이라고 극찬하고 아꼈던 '이도다완', '쓰쓰이쓰쓰이도'. 어느 날 차를 시중들던 시동이 실수로 그 다완을 떨어뜨려 다섯조각을 내고 말았다. 쓰쓰이이도를 아깝게 여긴 도요토미는 당시 자신의 차두(茶頭)였던 일본의 다성(茶聖) 센리큐에게 수리를 맡겼다. 센리큐는 그 다완을 이틀에 걸쳐 수리했다. 그리고 그 다완의 우주적인 심미감에 사로잡힌 센리큐는 도요토미도 모르게 찻사발에 차 한잔을 했다. 그러나 그같은 사실을 도요토미에게 들켜 엄청난 분노를 사게됐다. 센리큐에게 수리되어 쓰쓰이이도는 일본말로 다섯조각의 이도라는 뜻으로 '쓰쓰이쓰쓰이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쓰쓰이쓰쓰이도 찻사발은 현재 일본의 보물로 지정되어 가나자와현의 사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찻잔의 이름은 용도와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로 말한다. 일반적으로 녹차 잔이 되는 것으로 작고 위아래가 거의 같은 것을 찻종이라 부른다. 다완 모양의 작은 것을 찻잔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막사발에 해당하는 다완은 말차(末茶)잔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말하는 차(茶)라 하면 주로 말차를 말한다. 넓은 사발(다완)에 찻가루를 뜨거운 물로 개어서 다선(찻솔)로 거품을 내어 마시는 것을 말한다. 고려 때 만든 우리의 국보인 청자 사발에 말차를 저어서 거품이 올라오는 모습은 설록이 피는 것 같을 것이다. 설록차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오래 같이 지냈던 사람도 한 둘 떠나고 보내기도 하고, 오래 지닌 것들도 이렇게 나에게서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있다. 사람만큼이나 소중한 것들 중의 하나였다. 진품명품이 아니라도 오랫동안 같이 했던 세월의 정이 담긴 것은 그 어떤 명품보다 명품이 되는 것이 아닌가. 다섯 조각으로 깨졌다면 나도 붙여볼 궁리로 도자기 조각들을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빨리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 그릇이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요즈음 자주 쓰는 차관(차 우리는 주전자)은 주둥이도 상처가 나고 손잡이도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러나 역할을 해내기에는 손색이 없다. 깨어진 것이기에 더 소중히 아껴 쓰고 있다. 이 그릇은 친구 집에서 가져온 것이다. 깨어져서 쓰지 않는 것을 나는 요긴하게 쓰고 있다. 누군가 쓰던 것이어서 정감이 묻어나서 더 소중하게 사용한다. 차 그릇을 파는 집에서 나는 주인이 사용하여 찻물이 베인 차관을 새 것 대신에 사온 적도 있다. 발효차 전용으로 쓰기에는 그 손잡이가 없는 것이 귀하게 보여 뜨거울 때는 수건을 받치고 쓰기도 한다. 그 차관보다 훌륭한 청백자 다관을 깬 것이다. 센리큐처럼 수리할 여지가 남았다면 안타까움은 더했을 것이다. 미련을 가질 수도 없을 정도로 박살났으니 어쩔 수 없다. 센리큐 뿐 아니라 모든 다인들에게 다도(茶道)는 인격의 완성에 이르는 길이었다. 군자는 불기(不器)라 하지 않던가, 생전에 군자에 이르기는 글렀는데, 아직은 그릇을 다루면서 그릇을 넘는 경지에 닿아야 할 것인데…. 이제는 그렇게 가진 마음도 그릇도 놓으라는 말인 것 같다. 어차피 나도 상처 나고 흠집이 많은 그릇인 것을…. 내가 어떤 그릇이 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무엇이든 담고 비우기를 무시로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필의 장르는 바다와 같아야 한다고 하여 바다는 해불양수(海不讓水)여야 한다고……. 그렇다. 형상에 연연할 것 없다. 모양 없는 다관에다 부피 없는 차를 넣고 흐르지 않아 소리도 없는 물을 부어 알맞게 우려진 차는 어떤 맛으로 이름 지어야 할까. 그렇게 우린 차를 가없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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