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영상물 모음

섬진강 물길따라 매화향기 따라

차보살 다림화 2010. 3. 29. 02:03

 

섬진강 둘레길을 걸으면서

2010년 3월 27일

 

'책읽기운동전북본부'에서 주관하는 섬진강둘레길 천천히 걷기 모임에 참가하였다.

최근에 제주도에서 '올레길'이 열린 이래 전국에서 각 지방마다 둘레길 천천히 걷기가

유행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는 현상이다. 빗나간

교육열도 없지는 않으나 바람직한  방향이라면 좋은 일이다. 얼마 전까지는 지식을

집어넣는 교육에 열을 올린 것 같았으나 요즈음은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앞세우고 체험학습을

손에 쥐어 주려는 열기가 대단하다. 사실은 이 날 우리는 궁궐 답사를 위하여 서울 창덕궁을 새롭게

답사할 예정이었다. 젊은 부모들의 열기에 밀려 인터넷 접수에서 더듬거리는 바람에 탈락되었다..

어차피 날을 받아 놓았기 때문에 친구가 대신 이 모임에 신청해주었다. 그런데 의외로 바람직한 봄 나들이가

되었다. 여기에도 초등학생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이날  걷기 모임에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씨도 참가하여 자신이 몸 담았던 섬진강 주변을 안내했다.

 

섬진강은 우리나라 4대강의 하나로 멀리 진안에서 발원하여 임실, 순창을 거치고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에서

옥과천과 합류하고 곡성읍 동산리에서 남원에서 내려 오는 요천수와 합류하게 되고 오곡면 압록리에서 보성강과

또다시 합류하여 구례와 하동을 거쳐 남해로 흐르게 된다. 하동까지 80리 꽃길로 유명하다.

 

버스 두 대로 전북도청 남문에서 8시 40분에 출발했다. 이번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길,

임실 옥정호를 따라 순창 장구목까지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나섰다. 거년과 달리 올 춘삼월은

꽃샘 취위의 기복이 심하여 지난 해 3월 20일에 만개했던 전주경기전의 고매가 25일이 되어서야 몇 송이

트기 시작하였다. 오늘도 마지막 꽃샘 추위인지라 바람이 많이 불어 추웠다. 그래도 섬진강 주변에는

매화가 만발하는 꽃길이 많아서 꽃바람이 상쾌하였다.

 

 

 우리는 진안 백운면에서 발원한 섬진강물이 여러 천을 거쳐 관촌 사선대에 모였다가 다시 흘러온

임실 옥정호에서 머물었다 다시 흐르는 물길을 따라 간다. 옥정호 휴계실에서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으면

화장실을 만날 수 없는 길을 간다기에 우리도 옥정호의 물 같이  잠깐의 땟물을 내렸다. 옥정호에는 공사중이던

현수교가 아름답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다시 강진 쪽으로 향한다.  옥정호 대교에서 오른 쪽 건너편 언덕에 있는 마암 분교를 바라보고

굽이굽이 돌아 가고 있다.

덕치면의 회문산자연휴양지 안내판이 보이는 곳에서 반대길로 접어들어 가니   김용택 시인의

구가가 있는 마을, 신촌 마을에 닿는다. 어디선가 매향이 바람결에 밀려든다.

 

 

 섬진강 둘레에는 매화 꽃길과 매화 언덕이 많다.

시인의 구가 뒷편에도 제법 오래 된 매화나무가 있다.

시인이 이 매화나무와 같이 자랐을 것 같다.

 

 

 시인의 구가 앞에 선 김용택 시인과 KBS 리포터인 홍석우씨.

시인의 옛 서재에는 '觀瀾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의 뜻에 대하여 물었다. 시인은 현판 글씨의 뜻과

이 마을에서 나서 자라고 아이들과 함께 했던 옛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아직은 살아 있는 섬진강 물결과

함께 흐르면서 천천히 사람과 자연의 조화에 대하여생각하는 시간이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흐르는 물결을 보는 집'으로 해석이 되는 '관란헌'이다.  글씨 체는 왕희지 글자를 집자 한 것이다.

'관란헌'이란 이름은 퇴계 이황의 집과 강원도 어느 집에서도 볼 수 있는 이름이라고 했다. 퇴계 선생도

안동 청량산 아래 강물을 사랑하였으니 그럴만 했겠다 싶었다.

집 마당에서 내려다 보면 옥정호에서 한 숨 돌린 후  굽이굽이 돌아온 강물결을 바라볼 수 있다.

징검다리가 폭 넓은 얕은 강물을 멈칫거리게 한다. 

 

 

 

 신촌마을은 임진란 때 생긴 마을이다. 나주와 남원에서 온 피난민에 의해서 마을이 형성되었단다.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며 당산나무 역할을 해왔다. 가난했던 마을을 뒤에서 편안하게 보듬어 왔다.

마을의 정자나무들은 마을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성사시켜온 산 증인이었다. 시인이 방문을 열 때마다

느티나무가 보였고 같이 자랐다 고 했다. 땅도 고르지 못해서 규격이 여러 질인 논베미는 이름도 다양했단다.

버선베미, 장구베미, 삿갓베미 등등...

섬진강에는 바위가 많았단다. 고기도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봄여름가을겨울 내내 고기 잡은 이야기로

마을의 풍경을 만들기도 했다. 겨울에도 돌밑에는 고기들이 많았다. 큰 돌을 때려서 고기를 잡으려면

상처 없는 돌이 없었다. 그 돌들이 물결에 씻기고 흘럿 내려가다가 곡성에 와서 피아골에서 내려온

물을 만날 때 쯤에는 자갈이 된단다 고 시인은 옛날 이야기를 이었다.

 

 

 

 

 신촌마을에서 천담 가는 길은 참 아름답다. 아직 포장되지 않았으나 자동차가 다닐 만 하다.

우리는 <천담가는 길>이란 시를 이정표 마냥 읽고 여기서부터 천담까지 걷기로 한다.

쉬엄쉬엄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갈가의 풀밭 사이사이에 나물을 뜯기도 하면서. 쑥이랑 숙부쟁이와

원추리 등. 서로 이것이 무슨 나물이래요. 이거 숙부쟁이 맞아요? 하면서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인은 말한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리고 우리를 키워주는 자연이 중요하다고. 그래서 꽃도 만나고

나물도 만나고 바람이 쉬어가는 나뭇가지도 만나야 한다고. 무엇보다 강물이 자연스레 흘러야 한다고.

 

 

 

  강들이 문명의 발길에 의하여 짓밟혀 위기를 맞고 있지만 아직 섬진강은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섬진강이여,

영원하라고 외치기도 했다. 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강물이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흐르다가 피곤할 때 쉬어가는 곳이 있다.  직선으로는 쉴 곳이 없다. 굽이가 있어야 기슭을 만나서 쉬고 흐르면서

끼인 때를 걸를 수가 있다. 산의 엉덩이가 튀어나온 곳을 만나서 부딛치면 잠시 쉬었다가 때를 벗어놓고 굽어져서

흐르게 마련이다. 임실에서 순창 쪽으로 직선의 고속도로가 우리의 머리 위 쪽에서 건설 중이다. 얼마나 많은

직선의 고속도로로 인하여 사람들은 쉬는 것을 잊고 갑자기 어느날 호흡이 가빠지는 일을 겪고 있는가.

사람들은 쉬려고 자연에 와서도 자기도 모르게 서로 습관의 경쟁에 휘말리기도 한다. 어디까지 얼마만에

종주를 한다거니.  지름길로 빨리 산을 넘어가려고 한다. 쉬엄쉬엄 걸어면서 옆 사람의 얼굴도

보고 풀꽃도 만나고 무엇보다 자기의 소리를 보는 시간임에도... 강물이 느긋하게 돌면서 굽이쳐야

맑은 물을 보면서도...

 

 

나는 다음 코스를 위하여 중간에서 자동차를 얻어타고 천담마을까지 갔다. 나중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논두렁 가의 매화나무 밑에서 나물을 뜯었다. 살갗을 매만지는 꽃가지의 손길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구담마을까지는 모두 모여서 버스로 이동했다.

천담에서 구담마을까지 흐른 강물은 여기에서 한번 크게 굽어 돌아야 한다.

구담마을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강물을 보라. 여기는 산 중턱에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고 오래된 정자나무들이 함께 담소를 나누듯이 모여 있는 넓은 전망대가 있다. 주변에 나무 데크를

설치해 놓았다.  '영화의 고장'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는 여기서 준비된 도시락을 먹었다. 어떤 이는 추워서 청승맞다고도 하지만,  이런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호강이지 않은가.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주 무대였다는 이곳 마을은 옛날에는

정말 오지였을 것 같았다.  육이오 당시에 비참한 현실에 놓인 어른들의 시대적 현실을 그린 내용이었지만

어른들의 불행한 시절을 엿보았던 그 시절의 어린이에게는 아름다운 시절이 되었다. 그 영화 속의 어린이가

지금의 바로 내가 아닌가. 도시에서만 살았던 내가 육이오 때 피난시절 부모님의 고향에서 한철 보낸

추억이 그리도 아름답게 기억되듯이. 그래서 <아름다운 시절>의 영화의 고장이 더욱 아름다운 고향 같다.

 

 

 강물은 돌아서 흐르고 우리는 저 아래 징검다리를 건너서 광목 천을 풀어놓은 것 같은 하얀 길을

걷는다.

 가는 곳마다 반기는 매화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그래서 더욱 애틋하게 매향을 보듬고 걷는다.

 

 

 

 징검 돌에 부딛치면서 바위를 한 아름 안아보기도 하고  어루만지느라 잠시

멈칫거리는 물살의 거품에는 무슨 뜻이 숨어 있을지 귀도 기울여 보면서...

 

 

 

 

산 기슭 낮은 언덕을 돌아  강물이 스스로 흐르는 동안 우리는 산 가운데를 질러 가는 마을 길을

걸어간다. 돌아온 강물을 다시 만나는 곳에서 잠시 물결을 내려다 보고 우리도 쉬어간다.

 

 매화나무들을 심어놓고 이 폐가에 살았던 옛날 사람들은 어디쯤에 흘러가고 있을까.

 

 

 

 발길 닿는 곳마다 매향이 휘날리는 봄날

우리는  서로 만나서 이야기 나눈다 . 지난 겨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자연과 조화롭게 지내지 못한 옛날들을 미안해 하기도 하면서

 

 다시 강물을 내려다 보는 곳까지 온다.

 

공기 중 산소를 보듬은 강물이 흐르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부서지는 곳에

강바닥을 깊이 파놓기도 한다. 그런 곳에서  물결은 쉬면서 자신의 허물을 벗어놓고 때를 벗긴다.  

물속에 사는 다슬기들이 강물의 때를 먹어준다. 서로 기대어 산다.

 물살이 얼마만한 세월동안 자신을 정화하면서 흘렀을까. 여기까지 흐르는 동안 물결은 바닥의 바위들 위에

자신의 무늬를 새겨 놓았다. 각가지 무늬에는 강물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모두 다 시인이 되었다.

 

 바위 위에서 삼행시 쓰고 상품으로 책을 선물받다.

 

 섬진강은 순창과 임실의 경계이기도 하다. 순창군 동계면 이곳 장구목은 모든 바위들이

강물 속에서 물결의 무늬를 그리도록 허락한 조각 공원이다.

 

 

 올 때마다 조각공원에서 상류를 바라보면서 자동차에 올라타고 훌쩍 돌아오곤 했던 곳.

임실 구담마을에서 징검다리로 강을 건너서 순창 장구목까지 둘레를 걸어볼 수 있어

생애 최고의 날이라고 했다.

 

 

 

 

 

 

 요강 바위라는 큰 바위 구멍 속으로 어린이가 내려가 본다.

 

▲ 섬진강 장구목 강바닥에는 '요강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20여명의 떼도둑이 중장비를 끌고 와서 '요강바위'를 뽑아 갔다는 것이다. 도둑들은 이 바위를

경기도 광주군의 야산에 숨겨 놓고 살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 바위 한 덩어리의 값이 10억원을 넘었다. 어떤 주민이 이 바위가

섬진강 바위임을 알아채고 경찰에 신고했단다. 도둑은 붙잡혔고, 요강바위는 장물로 분류되어 전주지법 남원지청의 마당으로 운반되었다.

남원에서 이 물가까지 바위를 옮기는데 중장비 사용료 500만원이 들었다. 바위의 무게가 25톤이었다. 장구목 마을 주민 12가구가 돈을 모아서 500만원을 마련했다. 요강바위는 중장비에 실려서 4년 만에 고향 물가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 김훈의 < 섬진강 기행 > 중에서

▲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두 사람이 들어앉을 정도의 웅덩이가 파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강바위'라고 불렀다 

 

 

 

 

 김용택 시인은 1970년 5월 1일, 처음 교단에 섰다. 그 때는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두려웠다. 한 5년쯤 지나서야 교사라는 게

어떤 것인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2008년 8월 30일 그는 교단을 떠났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날짜를 잡아

교실로 불러 마지막 수업을 했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라.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해라. 아이들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른으로서 당부하고 싶은 말들이었다

교사 생활 38년 중 26년을 2학년만 가르쳤다. 계산이 없는 순수한 니아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마음이 통했다. 2학년이야 말로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주지 않아도 뛰어놀 땅만 있으면 즐겁고 행복해 하는 나이었다. 2학년과 놀며 시인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정말 그렇다. 정직하고 진실한 것이 통할 때 희망이 있다. 새로운 눈으로 보는 신기한 마음이 중요하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을 6.25로 인하여 부산에서 개성까지 아버지 따라 갔다가 다시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왔다.

학교는 전쟁 중 병원으로 활용되었고 우리는 부산 구덕산 중턱의 천막 교실에서 공부했다. 우충충한 오늘 같은

날씨였던 내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여름 방학 한 철 <아름다운 시절> 같은 강 마을인 진주 남강 언저리 큰들,

아버지의 고향에서 보낸 한 철만이 기억에 있는 아름다운 시절임을 먼 후에 알았다.  복사꽃 만발하고 복숭아 열매를

직접 따먹을 수도 있었고 생 가지를 따먹어서 입 가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그 시절은 모든 것이 신기했는지도 몰랐다.

할머니가 되어서야 모든 것이 신기하고 또 날마다 새롭다. 오늘 이 매화 꽃길을 강물따라 매향 따라 흐르면서 다리가

아프도록 걸으면서도 새록새록 솟아나는 감동으로 이 봄날이 벅찼다, 오래 걷지 못하는 내가 이렇게 많이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 신기하게 안겨오는 매향과 강물이, 모든 자연물이 주는 감동이었다. 매화나무 가지에 걸린 까만 비닐 조각도

까치처럼 보였던 오늘이었다. 오늘이 나의 <아름다운 시절>임을 후에 가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임을 아는 것이 행복이다. 이 행복을 새삼 깨우쳐 주는 오늘 걷기 모임 주선해주신 관계자와 이 모임에 초대해준

내 친구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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