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새만금 신시도에서

차보살 다림화 2010. 12. 21. 01:12

 

 

신시도 월영대에 올라서.

 

 

신시도는 새만금방조제의 중앙에 있다. 한겨울의 찬바람과 흩날리는 눈발이 앞으로 펼쳐질 새만금 시대에 대한 깃발처럼 신선하기도 했다. 신시도 주차장에서 월영산의 주봉으로 오르는 길은 멀리서 보아도 가파르게 보였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정삼각형을 이루는 봉우리까지는 급경사 길이었다.

산중턱의 전망대에서 주차장과 방조제를 내려다보면서 숨을 돌렸다. 주봉까지는 칼로 바위를 난도질한 것 같은 절리가 이어진 험한 바위를 짚어야 했다. 시간은 얼마 안 걸렸지만 힘든 노정이었다. 비끗하면 칼날 같은 바위 날에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월영봉에 오르자 힘든 여정의 수고로움은 눈 녹듯 사라지고 발아래 점점이 수놓인 고군산 열도가 한 폭의 수묵화로 펼쳐졌다. 서쪽으로 멀리 말도와 방축도가 병풍처럼 팔을 벌려 선유도와 60여 개나 된다는 고군산열도를 품은 듯했다. 그 너머 아스라이 망망대해를 넘어 중국 땅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월영봉 정상에는 삼각 원추형 돌탑 하나와 월영대가 세워져 있다. 말 그대로 달을 비추어 보이는 곳이 저절로 연상된다. 서녘 바다를 비추이는 석양이 일인천해(日印千海)여서 날아가고 싶도록 일망무제다.

월영대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하늘 가운데 자리 월영산(月影山; 198m)은 고군산도의 주봉이다. 신령한 하늘 가운데 자리에 월영봉이 솟아 최치원 선생이 단을 쌓고 놀았다. 여기서 글을 읽고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고 하니, 선생의 고매한 정신이 중국대륙을 진동시켰음을 은유한다. 월영봉에서 마을까지 신선의 기운을 받는 하늘 길이 이어져 있다.” 이렇게 월영봉을 사랑한 이들의 정성이 돌탑에 아로새겨져 있다.

 

지방자치제 이후로 각 지방마다 지역관광 상품 개발을 위하여 지역 역사와 연관된 인물과 전설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군산에서도 새로운 향토사의 중요인물로 조명된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최치원이다. 최치원이라면 통일신라의 대유학자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므로 당연히 경주 출신으로 알고 있으니 군산과 관련된 고향 설은 황당한 일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군산에는 예부터 최치원의 출생에 관련된 선유도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전국적으로 수십 개나 있을 정도로 그는 도선국사와 이태조와 함께 백성의 정신 속에 살아온 영웅적 인물이기에 군산에 대한 연관성은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최치원의 고향을 경주라고 적었으니 그의 출생지에 대한 논의는 재고해야 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조에 와서야 최치원의 고향 설이 재기되기 시작했다. 정조 때 서모씨가 최치원의 전기를 썼는데 최치원의 고향을 고군산, 선유도라고 적었다. <최고운전>이란 소설에서도 최치원의 고향은 문창군으로 적었다고 하니 그러한 기록은 본래 그의 고향이 명확하게 밝혀진 사실이 없다는 반증이 아니었을까 싶다.

유학의 시조라고 칭해지는 최치원이 경주 출신이었다면 그의 집안을 어찌 알 수 없었을까. 최치원의 제자 중에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충성하여 고려 중앙의 귀족이 된 자가 많았다. 그 결과 최치원은 도선국사와 함께 고려의 호국신의 위치에 오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이름을 드날리고 귀국하였을 때 신라의 지배 계층에게 밀려나 전혀 활동할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신라의 귀족세력과 같은 출신이라면 그럴 수 없었다. 지배계층과 전혀 다른 출신 성분의 사람일 것이란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었다. 고운(孤雲)이나 해운(海雲)이란 그의 자()처럼 외로운 구름이나 바다의 구름처럼 떠돌 수밖에 없는 신세였을까?

월영대에서 하늘 길로 혹은 바닷길로 이어지는 중국까지 날 듯 최치원도 그렇게 떠돌다 어느 때인가 여기서 머물게 된 것일까. 악기도 연주하며 중국에서 이름을 드날렸던 당나라 유학 시절을 그리워했을까. 동쪽으로 머리를 돌려 신시도 주차장과 수문을 아스라이 내려다보며 앞으로 새워질 새로운 세상을 그려보았다.

바다가 육지라면……하는 노래도 있듯이 전설이 많은 이곳에, 옛날부터 또 하나의 전설, 범씨 천년 도읍설이 전해오고 있단다. 아직은 망망대해처럼 보이는 방파제 안쪽이 육지가 되어 새 도시가 들어선다는 것은 까마득한 미래 같이만 보인다. 30여 년 동안 옛 사람들의 삶을 조명해온 김규남 교수는 마을 사람들과 옛 흔적을 찾으면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선유도의 망주봉에도 그런 전설이 남았다. 북쪽으로부터 왕이 내려온다고 해서 부부가 매일 북향을 바라보다 지쳐서 두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의 비결서인 <정감록>에도 우리민족의 안타까운 소망에 뿌리를 둔 범씨 도읍설이 적혀 있다고 한다. 섬 출신 대통령이 두 사람이나 있었으니 앞으로 고군산 출신이 대통령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섬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아닌 게 재미있다.

고군산이 범씨 도읍이 되는 때는퇴조(退潮) 300”, 군산에서 바닷물이 300리 밖으로 물러난 뒤라고 밝혔다고 한다. 새만금 사업으로 신시도와 야미도까지 방조제가 연결되었고 이후 새만금 사업대로 선유도에는 국제 항구가 건설된다. 친환경 고부가가치 농산물 생산과 식품산업시설을 비롯해 미래 신재생에너지 산업 및 연구시설을 집중 육성한다. 친환경적인 녹색에너지단지와 가족형 관광과 해양레저가 함께 하는 관광도시로 건설하여 바야흐로 동북아시아의 경제중심지로 개발하는 사업이 예정대로 이루어진다면, 군산 인근 지역의 바다가 육지가 되는 그 때가 된다는 이야기다. 어찌 황당하기만 할까. 새만금에 국제 항구와 관광위락 중심지로 역할이 중대되면 정감록의 기록대로 범씨 천년 도읍이 바로 이때를 말함이 아닌가 싶다. 섬사람 뿐 아니라 인근 지역 사람들 누구나 기대해봄직 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우리민족 같이 예부터 미륵이 하생할 것을 고대한 안타까운 백성이 또 있을까.

하지만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고대 사회 같이 하늘만 쳐다보는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어찌해도 새만금 사업이 잘 되면 지역이 더 활성화될 것은 당연지사다. 군산 인근과 부안 주변의 바다가 육지가 다 된다면. 세계의 많은 나라 사람들이 투자하러 올 것이며 관광객들도 덩달아 올 것이니 그야말로 범씨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예부터 다문화민족 국가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피부색이 다른 다문화 인구들도 많아지고 있다. 바야흐로 범 세상을 아우르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백성들이 바라는 군주는 모든 백성들이 공평하게 대우받으면서 정직한 사회에서 맑고 밝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힘쓰는 사람이 아닐까. 백성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 되는 나라일 뿐 아니라, 범 세계인들이 바라는 세상이 새만금에서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범씨 천년 도읍설이 펼쳐질 때를 만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