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고군산열도를 내려다보다, 야미도에서

차보살 다림화 2010. 12. 21. 01:02

 

전주시평생학습센터 주관

2010 유괘한 인문학 제 6탄 답사

현대사회와 지역사회

"해방, 국가, 개발의 열망"

 

새만금과 고군산군도 사람들의 삶과 지명

 

지명(地名), 그 초기 명명자의 인식을 찾아서

 -고군산 군도의 지명을 중심으로 -

 

 

 

구군산이라는 명칭은 조선 태조 6년(1397)에 지금의 선유도에 수군 만호영을 설치한 후 군산도라 지창한 사실과 관련된다.

그 후 세종조에 군산진을 진표(지금의 군산)로 옮김에 따라 선유도는 고군산이 되었다.

 

'애기밴여자찡겨죽은바오'를 찾아서

 

2010년 12월 18일, 인문학 답사팀은  전주대학교 김규남 교수님의 인솔하에 아침 9시에 시청 앞에서 모여서 군산으로 출발했다. 김교수님은 <지명, 그 초기 명명자의 인식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였다. 교수님은 30여 년간 우리말의 지명을 찾아서 지명에 담겨 있었던 지역 사람들의 삶을 고찰해 오신 분이다. 이번 답사는 새만금을 옛 지명의 인식에 따라 간척이 이루어진 새만금의 지역과 지역의 변화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비응항을 지나 야미도에 먼저 도착했다. 마침 눈이 오지 않아서 바닷바람은 찹고 추웠지만 속이 시원할 정도로 상쾌한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새만금 지역의 우리나라 지명의 대부분이 일제시기에 한자로 변경될 때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여 정해진 이름이다. 야미도 (夜味島) 도 마찬가지다. 한자의 뜻대로, '밤에 맛이 나는 섬'이 아니지만 어쩌면 그 뜻을 맛볼 수 있었던 섬이었을지도 모른다. 본래 우리말은 배미였다 배미가 밤이 되었다. 옛 섬 사람들에게는 바다는 마당이었다. 바로 고기잡이터인 바닥인 땅으로 보았다. 논배미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비응항을 지나서 첫 휴게실에 도착하여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바다지만 곧 땅이 될 것이란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옛날에는 몽돌해수욕장이었을 해변이 미끈한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걸어서 야미도 산 위에 있는 전망대로 올랐다.

야미도는 세 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 가운데 놓인 아련한 다리 같은 길을 달려와서 전망대에 올랐다. 길 오른 쪽 바다는 육지가 된다. 그러나 이십만 평이라던가. 그 넓은 바다를 흙으로 메울 수 있을지부터 걱정이 되었다. 새만금 개발 모형도를 보는 것과는 영 딴판이다. 탁상공론처럼 이루기란 어찌 쉽겠는가. 그 많은 흙은 어디서 가져와야 한단말인가. 흙을 수입할 수도 없으려니와 또 그 많은 흙을 파낸다면 그곳은 또 페허가 될 것이 아닌가. 그 환경공해는

또 어쩔것인가. 마치 거대한 풍선의 한 쪽을 누르면 저쪽이 불러지고 그 쪽을 누르면 이 쪽이 튀어나오는 거와 다르지 않을 것인데...

 

 

 

 

 

 

마을 안에는 당산나무가 아름답게 파란 하늘에 나목으로 가지들의 굴곡미를 드러내고 있다.

고기잡이 나갈 때마다 굿을 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마을에 교회가 들어오면서 마을 굿은 퇴색해버렸다.

새로 지은 상가들이 있지만 각 횟집이나 음식점은 본래 예상과 달리 많은 적자로 빚만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마을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 전교생이 단 네 명이다. 네명의 학생들은 마치 이 학교의 마지막 역사적 유물 같은 인물이되지 않을까 싶었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그만 지나치고 말았다.

 

마을을 떠난 사람들의 흔적이 페허로 남아서 정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심정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오랜 세월 고기잡이에 기대어 살 때는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초가였던 옛 집을 헐고 이렇게 벽돌 집으로 짓고 살게 되었으니 발전했다고 보아야 할까. 그러나 사람은 모두 도시로 빠져나가고 할머니만 집을 지키고 있다. 이 집에 옛날 야미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 사진을 보러 이 집을 방문하였다.

 

 

 

 

 

 

산 기슭에 앉아 있던 집에서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마을 길을 걸어서 바닷가로 나가보았다.

 

 

 

 

지금의 한자어 지명들은 모두 우리 토박이말 땅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들이다. 벼라별 이름이 많은데 참 재미 있고 뜻도 알 수 없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이름에는 반드시 그 지명을 붙인 사람들의 인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유도는 진또, 안또, 사장목.  신시도는 잘포도, 장자도는 안또, 밭또, 시목, 말도는 척사는목, 두챗가는목, 등이다.

야미도는 까고매굴청, 매굴청. 선유도는 금도치굴, 장자도는 강생이굴 등이 있었다.

 

마을 이름도 선유도는 진말, 안무실, 방축도는 모래미, 장자도는 가재미, 장재미, 무녀도는 모개미. '미'로도 불리었다. 선유도를 벅석금, 방축도를 쎙금

작은쌩끼미, 깔따꾸마, 벅석구미, 신시도는 살막꾸미, 대끼마. 밍끼미. 무녀도는 망끼마. 생새끼미 나락끼미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해안의 바위 이름도 많았다. 가장 특이하고 가장 긴 바위 이름이 '애기밴여자찡겨죽은바오'였다. 이 이름으로만으로도 섬 여자들의

지난한 생활을 엿볼 수가 있었다. 애기밴 여자들도 애기를 날 때까지 매일 고기잡이나 조개를 캐러 나갔다가 오즉하면 바오에 찡겨 죽었을까.

 

바다 배미를 읽으면서 바닷바람 시원하게 맞으면서 여유롭게 '애기밴여자찡겨죽은바오'가 있는 곳을 찾아 걸었다. 여유로운 산책나온

사람들처럼...

 

 

바닷가로 내려오니  낚싯꾼들이 자동차를 몰고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에서 우리는 그 바오가 있는 곳까지는 갈 수 없었다. 너 너머에 '애기밴여자찡겨죽은바오'가 있다고만 했다.

전설 같은 얘기인지도 모르지만 위험하기도 한 여자들의 생활터임에 틀립없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바닷물이 빠졌을 때 정신없이

조개를 캐거나 일에 몰두하다가 물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갑작스레 바우 틈에 변을 당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여러 모양의 고기잡이 배들이 한가롭게 늘어져 있었다.

 

 

 

 

 

 

 

 

 

야미도 상가로 내려와서 우럭탕으로 준비된 점심을 먹었다. 바로 잡아온 싱싱한 우럭이라고 했는데, 어디서도 맛보지 못하였던 시원한

국물맛이 일품이었다.

 

그리고 신시도로 향했다. 야미도 산을 오르고 바닷가를 걸은 것만으로도 내게는 기적같은 일이었는데,

신시도 월영대에 오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