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와 글 모음

오월이 오네

차보살 다림화 2011. 5. 3. 19:16


 

 

 

 

 

 

 

 

 

 

 

 

 

 

 

 

 

 

 

 

 

 

 

 

 

 

 

수수꽃다리

- 오월의 향기 -

                                                       조윤수

 

 

  5월이 수수꽃다리(라일락) 향기로 오고 있다. 비 온 뒤, 햇잎으로 수놓아진 저 산 빛 석간수로 우려내면 은은한 햇차 향기 감돌아 입안에 단 침이 고이는 것 같다. 나무들이 모두 싹틔우기를 기다리던 감나무도 수수꽃다리 향기 때문에 잎을 피우지 않을 수 없나보다. 녹색 짙어지는 나무들 사이 마른 가지 끝에 달리는 어린 감잎이 유난히 눈부시게 반짝인다.

 

향긋한 5월의 선물. 수수꽃다리 꽃가지에서 퍼지는 향이 차안을 가득 메운다. 이렇게 향기가 코끝으로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 감미로운 즐거움을 준다는 것은 봄날이 무르익어야 알 수 있다. 수수꽃다리 향기의 밀어가 코끝에서 얼굴을 간지럽히고 온 몸에 그윽하게 감겨든다. 오월을 애모하는 정에 복받쳐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톡 터질 것 같이 가슴에 고이는 연보라 빛 물감, 이 물감을 캔버스에 풀어놓을 수 있을까? 자신의 지닌 멋과 맛을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데 나무 꽃을 따를 자가 어디에 있을까. 꽃은 자태로 뽐내기도 하고 훤칠한 키와 무성한 가지나 잎 모양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첫 사랑의 맛, 수수꽃다리는 수수를 따먹듯이 먹고 싶을 만큼 달콤하고 은은하다. 잎이 하트 모양으로 피어나니 꽃향기에 젖은 잎을 따서 사랑하는 사람들 가슴에 오월의 상징으로 꽂아주고 싶다. 수수꽃다리는 아름다운 몸매도 아니고 예쁜 얼굴도 아니다. 앞다투어 피고 지는 봄꽃들이 떠난 자리에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향으로 우리 옆에 가만히 다가온다. 결코 유혹의 낯빛을 내보이지 않고 기품 있는 향기로 다가온다. 가지 끝에 수십 송이 작은 꽃송이들이 옹기종기 뭉치로 모여서 연보랏빛 향을 모은다. 서로 다독이면서 사랑의 향기를 내뿜는다.

 

 손짓하는 여대생들을 승용차 뒤에 태우고 야산 길을 내려온다. 뒤로 고개를 돌려 참새들 마냥 재잘대는 그 처녀애들의 얼굴을 보며,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혼자서 입안으로 우물거리며 "아, 꽃 같은 나이로다."하니, 그 아이들도 "아직도 꽃 같으신데요?"라고 화답해주었다. 아름다운 청춘처럼 싱그러운 햇잎들. 무언가 뜨거운 것이 가슴으로 밀려온다. 젖은 눈 빛 안으로 들어오는 오월의 언덕은 화선지에 번져나가는 물기 섞인 봄 빛 수채화 물감 같다. 눈시울이 적셔진 것은 돌아오지 않을 청춘이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과 오월이 오고 있는 언덕길을 대비하면서 신록의 경이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해서인지도 모른다. 사무엘 울만은 그랬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오월은 딸기가 끝나는 달이요, 갖가지 채소 열매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달이다. 이제 풋 열매들은 계절의 감성을 잃었다. 그래도 여전히 모란의 달이요, 라일락 향기 퍼지는 달이다. 나에게는 미망의 청춘을 접고 결혼의 문으로 들어갔던 달이다. 많은 5월을 잃었고 깊은 산 속의 미로를 헤매기도 했다. 길 아닌 험한 가시덤불을 헤치고 지름길로 오른 산 정상에서 만났던 먼지와 다를 바 없는 '나'와 티끌 같은 세상. 마음의 청춘으로 다시 본 실상(實相)의 세상, 귀한 또 다른 '나' 와 '나'들과 그토록 향기로웠던 오월. 잃었던 옛 오월들도 한꺼번에 몰려오는 걸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다. 내 언제 나이를 세고 살았던가. 사무엘의 말처럼 "가슴속에 간직할 수 있는 것이 경이에의 애모심, 하늘의 별들 그리고 빛나는 사물과 사상에 대한 흠앙(欽仰), 앞에 가로놓은 일에 대한 불굴의 도전, 어린아이 같은 끊임없는 탐구심, 인생에 대한 환희와 흥미." 이런 것들을 잃지 않는다면 청춘이라 했다. 세월이 사람을 늙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이상을 잃을 때 늙는다고 했다.

 

  비 온 뒤 산천은 더더욱 싱그럽다. 개울물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님은 오시고 또 오신다. 오시는 님의 말씀을 맞을 수 있도록 수수꽃다에 흙 묻은 손을 씻는다. 한 움큼 손바닥에 흐르는 물을 받아서 얼굴도 씻어본다. 짜릿하다. 맑은 개울물에 '방금 세수한 얼굴'이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은 아닐지라도 순간순간 오시는 님을 맞기에 충분한 맑은 마음이면 족하지 않을까. 빛나는 5월의 밝음 속에서 수수꽃다리 같은 청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었으면….

 

  - 조윤수 수필집 <바람의 커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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