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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안고 갑니다

차보살 다림화 2011. 6. 6. 20:13

 

행복을 안고 갑니다

 

 

 

                                                                                    조윤수

 

 

 

“런던에 가면 그 사람 좀 찾아보렴.”

 

물론 농담이었지만 동생이 영국에 간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벌써 40여 년 전인데, 아직 살아 있을까? 또 안부가 궁금해진다. 지난 40년 동안 문득 문득 영국 이야기만 나오면 생각나던 그 사람이었다. 콧수염을 기른 옥스퍼드맨이었던 키 큰 영국신사. 그 땅을 밟지는 않았지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은 내가 20대 청춘을 그 문화 출신들과 지냈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청자나 백자를 바라볼 때마다 영국신사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시선이 떠오를 때가 있다. 도자기만큼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동양적 인상에서 서양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신비한 그 무엇을 느끼지 않았을까. 유럽의 찬란한 문화와 미술품을 알고 취하다가 우리의 미술품을 보면 그 간결하고 우아한 맛이 그리도 청신할 수가 없다. 아마도 외국인들이 우리의 미술품을 보고 감탄하는 맛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일제 때 우리의 미술품에 반하여 탐구하고 수집했던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라던가, 영국의 버나드 리치 같이 말이다. 아마도 나를 바라보던 Tim의 시선이 내가 요즈음 우리 미술품을 넋 놓고 바라보는 심정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Tim은 내 직장 상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청춘이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 우리나라 청년들이 제3국에 봉사 차 다니러 가는 일이 유행이듯,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를 탐험하고 한국에 오는 청년들이 있었다. Tim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다. 당시에 부산천주교 교구가 주관하는 단체인 ‘한국자선회’가 내 직장이었고, Tim은 초빙 받은 상사였다. 미국의 전역에 퍼져 있는 스폰서의 후원을 받아 한국전쟁고아를 돕는 일이었다. 나는 후원자들게 보내는 주교님의 편지에 싸인을 대리하는 일을 별도로 맡고 있었다. 자선회 활동의 일환으로 부산송도천주교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한국에 ‘소년의 집’을 창설하였고, 같이 일했던 월쉬아저씨는 미국에 돌아가서도 늘 엽서를 보내주곤 했었다. 영미인들이 나의 세례명인 ‘Anastasia(아나스테시아)’를 부르는 발음은 명랑한 노래 한 소절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우리의 정서에 어울리지 않은 이름인지 모르겠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내가 정한 나의 유물이 몇 점 있다. 사진도 가지고 있으면서 자주 본다. 국보 94호인 <청자과형병>과 국보 115호인 <청자상감넝쿨무늬완>이다. 이번에는 내가 보고자 한 주제인 서예와 회화작품만 보기도 시간이 모자라지만 그의 안부만은 묻고 왔다. 과형병은 민무늬로서 그야말로 우리의 가을하늘을 담고 있다. 그 단순하고 깔끔하며 우아한 병모양도 어찌나 아담한지 잘록한 목을 잡으면 손 안에 착 감겨올 것 같다. 입주둥이는 꽃잎 같고 받침은 아주 짧은 주름치마다. 그 병에 꽃가지 하나를 늘 꽂아 그려보곤 한다. 그리고 청자완은 말차 잔이다. 내가 차를 좋아하기 때문에 언제나 찻그릇에는 마음을 빼앗긴다. 청자 잔에 가루차를 넣고 저어 설록이 피어난 봉긋한 잔을 연상해 보곤 한다. 고려인들은 차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리도 아름다운 잔을 만들었을까.

 

지난해 전북대학교 박물관대학에서 ‘사람과 바다’란 주제를 가지고 공부했었다. 가을에는 서해안에 접한 문화유적지를 답사하고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방문하였다. 1976년도 신안 앞바다 신안선 발굴로 시작된 수중 발굴 현황을 둘러보고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마침 태안 앞바다의 마도2호선에서 출토한 <청자음각매병>과 <청자상감매병>의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운 좋게도 우리는 그 현장을 관람할 수가 있었다. 유물은 유리관 안에 들어가기 전 끝마무리 화장을 하고 있었다. 민 탁자에 놓인 우아한 청자매병 두 점.

 

800년 동안 서해 바닷속에서 잠자던 청자 매병을 만나다 / 하늘을 품에 안은 듯 / 바다를 품은 듯 / 하늘에 묻힌 듯 바닷물에 담긴 듯 / 하늘이 되다 바다가 되다, 그 순간 / 긴긴 꿈속의 세상은 어땠을까. / 신음하듯 안으로 숨을 고른다.

 

상감매병은 세로의 굵은 골 여섯 개로 참외모양처럼 몸통을 만들고, 마름꽃 모양의 틀 안에 버드나무, 갈대, 대나무, 모란, 국화 닥꽃으로 정교하게 상감했는데 꽃 위에는 나비를, 아래에는 오리를 새겼다. 음각매병은 어깨에 구름문양, 몸통에 연꽃문양을 매우 정교하게 장식했는데 유색이 맑고 짙다. 두 개 다 높이 39 cm이며 풍만한 어깨에서 굽까지 S자 형으로 유려하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탁자 주위를 맴돌고 관장의 설명을 들으며 그 실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또 보았다. 순간 덮석 안아보고 싶은 심정을 어쩌랴! 아름다움을 보고 만지고 싶은 욕구를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눈앞의 한 뼘 거리 안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도 유리장 안에 두고 가까이 볼 수 없는 것보다는 흡족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담당자는 가슴을 졸였다고 했다. 혹시나 건드려져서 넘어질까 염려가 대단했다는 것이다. 담당자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영국의 도자기 전문가였던 버나드 리치는 우리의 달항아리를 구입하여 돌아갈 때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 라고 했다. Tim은 조선여자 한 사람을 안고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슬픔의 항아리에 다른 행복의 세월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행복의 안부가 궁금해지면 숨겨놓은 애인을 찾듯 나의 유물을 찾을 것이다. 

(2011년 오월에)

 

 

 국보 115호 <청자넝쿨무늬완>

 

                   국보 94호 <청자참외모형병>

 

 

 

 

 마도2호선 출토 <청자상감매병> 과 <청자음각매병>

출토 당시 이 매병에는 꿀이 담겨져 있었다고 해서 떠들석했다. 

매병의 다양한 용도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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