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와 글 모음

바람의 육화

차보살 다림화 2011. 7. 18. 13:14

 

바람의 육화(肉化)

 

 

 

오늘도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창밖을 내다보니 회색 하늘 바탕에 나무들과 산이 잔뜩 먹물을 머금은 듯하다. 빗줄기는 어디서부터 저렇게 줄기차게 직선으로 내려올까. 짙푸른 나무 앞에서 빗금을 무겁게 긋고 있는 빗줄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질 때는 바람도 없다. 본래 바람은 얼굴도 없고 소리도 없으니 혼자서는 어떤 형상을 나타낼 수도 없다. 뭔가 자신을 받아줄 대상이 있어야 그를 통하여 그 모습을 나타낼 수가 있다. 현악기의 활이 현에 닿아야 소리를 내는 것처럼.

 

점점 세차게 빗줄기가 쏟아진다. 빠져나가는 길을 잃은 바람들이 어디에선가 모두 모였다가 울고 싶어진 것일까. 뭉쳐서 비구름이 된 바람은 답답해져서 울고 싶다. 안개 되어 산허리까지 내려오다가 울음보를 터트린 것일까. 투정부리고 싶은 아이들이 우는 것처럼, 울다가 보면 더 큰 울음이 되고 더욱 설움이 복받쳐서 통곡하고 싶어진다. 방향을 찾지 못한 바람의 몸부림인가.

본래 바람이 어디에 있었던가. 지상에 내려와 땅과 합일하고 싶고 물이 되어 바다로 내려가고 싶었던 걸까. 본래 하나였으니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자 함인가. 지수(地水)화풍(火風)으로 제각기 제 역할을 잘 하면 될 일이 건만 언제부터인가 그 조화가 깨어졌단 말인가.

때로는 천둥을 동반하기도 하고 그 화기를 드러내고 싶어 번개도 친다. 한꺼번에 복받쳐서 눈물조차 삼켜버린 채 소리와 빛을 발산하기도 한다. 드디어 바람은 허공을 쪼갤 듯 비수 같은 빛줄기를 휘두른다. 그렇게 터지고 나면 한 번 크게 숨을 돌린다. 뚝 그치지 못하는 바람의 몸체가 스르르 몸을 푸는 것 같다. 조용하게 다시 숨 고르며 빗줄기는 바람의 노래가 되어 잦아든다.

 

연일 비가 내려 축축한 날에는 차(茶)보다는 따끈한 커피가 어울릴 것 같다. 계곡의 물소리처럼 커피 물이 끓는다. 좀 강렬한 맛이 제격일 것 같아서 커피 가루에 약간의 단맛만 가미한다. 바람이 숨 돌리고 있는 사이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내 안의 축축한 바람을 말린다. 이렇게 긴 장마동안 바람이 육화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우주와 합일해봤던 저 시절의 번개 같았던 찰나의 빛을 꿈 같이 떠올려본다. 언젠가 진짜 우주의 바람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어느 순간을 미리 짐작해보며 바람의 미로를 그린다.

 

20여 일째 장마가 이어지면서 한 해 내릴 비의 3분의 1이 넘는 '물폭탄'이 쏟아졌다고 한다. 전북 전주와 충북 청주는 보름 이상 내내 비가 온 것 같다. 집중 호우가 계속될수록 타지방에서는 인명 피해와 주택, 농경지 침수, 산사태, 빗길 교통사고 등 안타까운 소식도 많았다. 산간도서지역에서 이재민이 속출하고 사망자도 16명 정도나 있었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빗줄기가 가늘어지면서 바람의 얼굴이 건듯 스치는 것 같다. 바람의 격정을 종잡을 수 없는 우리들은 그 격정이 어디로 쏟아질지를 모른다. 미리 바람이 눈치를 주었건만 자신만은 예외일 것으로 믿는 걸까. 재해를 막을 준비를 할 수도 없이 자신의 가족도 집도 농경지도 한꺼번에 몰수당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비바람과 한 덩이로 통곡해야만 한다. 어떤 이는 안개 숨을 토해야 하고, 아예 회오리바람처럼 흔적 없이 하늘로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훗날 언젠가 다시 그 영혼들이 모여 바람의 몸을 만들 것이다. 아직 거대한 몸집을 풀지 못하여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는 태풍의 눈이 있지 않은가. 이 여름이 가기 전에 바람은 그렇게 호시탐탐 또 다른 육화를 꿈꾸는 것일까.

호우의 도가니 속에서도 비바람을 먹은 여름은 생명의 꽃을 피우고 있다. 무궁화꽃이 피었고 수행하던 배롱나무도 붉은 바람을 피운다. 자귀나무는 연분홍 저고리를 나풀거리고 산기슭에서 큰수염꼬리가 긴 꽃송이를 흔든다. 이제 긴 장마의 끝이다. 연화장세계를 장엄하는 연못에서 바람이 육화한 그림을 읽을 일이다.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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