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신라의 달밤

차보살 다림화 2012. 2. 9. 21:38

 

 

 

 

 

 

  한가롭게 산책 나서는 것 같이 버스터미널로 나갔다. 오랫동안 벼르던 일이었다. 경주에 갈 때마다 내가 정작 자세히 보고싶었던 것을

볼 수 없었다. 봄이 오기 전에 경주박물관에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억었다. 날씨가 춥고 흐린 날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산책이 안성마춤이다. 어차피 월요일은 박물관이 휴관이므로 월요일 당도해서 다음 날 충분히 보기로 하였다.

 

  동대구에 가서 경주가는 버스로 갈아타기로 했다. 오후 1시 버스가 터미널을 출발해서 진안을 지나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장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지수, 계님, 장계 지역은 들판의 잔설이 많았다. 장수 지역을 벗아나니까 설경은 없고 맨 흙이 드러나는 들녘이 많았다. 남으로 내려갈 수록 눈발은 그치고 구름 속에 희미한 햇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함양 휴게소에서 쉬었다. 나들이 한가한

철이라 휴게소도 조용했다.

  동대구에서 경주가는 4시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경산을 지나서 건천부터는 한옥 지붕이 많이 보였다. 휴계소 건물이 한옥지붕이다. 톨게이트 건물도 기와지붕이다. 경주로 들어서면 여러 건물의 지붕이 기와지붕인 것이 다른 지역과 다른 특성이다.

  경주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였던가. 버스터미널에서 시내를 걷기로 했다. 도로표지판만 보아도 경주시내의 유적이 어디에 분포되었느지

알 수 있다. 도로주면의 상가 간판이 '경주빵'이란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방향을 잡기 전에 몇발자국 걸으며 상가를 둘러보다가 흠칫 놀랐다. 상가 사이로 산 같은 능선이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고분군이었다.  고분군이 있는 내부로 들어갔다. 바로 '노서리 고분군'이었다.

여기는 1921는 금관이 발굴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금관총과 서봉총을 비롯한 10여 기의 능이 있는 곳이다. 공원화되이 경주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쉼터이다. 운동복 차림의 시민 몇 사람이 열심히 무덤 주변을 걷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경주사람들은 무덤을 안고 주변의 주택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서쪽은 노서리 동쪽은 노동리 고분군이다.

 

 

 

 

 

 

 

 

 

 

 

 

 

 

 

고분군은 이제 더 이상 무덤이 아니다.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로 안성맞춤이요. 경주사람들이 옛사람들의 혼이 서려 있어 함께 호흡하는

만남의 장이다.

 

 

 

 

 

 

 

 

민둥산 중턱 고목으로 자란 나무들.  무덤을 뚫고 나온 영혼의 씨앗이 자란 것일까.  얼마나 애타오른 갈망이 씨앗으로 영글고 영글어 튀어나왔을까. 몇 백 년을 간절히 기원하여 어둠을 헤쳐나온 작은 씨앗. 천년 경주를 지켜왔다.

 

 

형용할 수 없는 신비감, 대능원지구


경주 시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들만 보더라도 역사 문화 도시 경주의 정체성은 범상치가 않다. 처음부터 계획된 수도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넓어졌기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뒤섞이게 된 것이다. 현재 경주 도심에는 높이가 23미터(황남대총)에 이르는 것부터 지상에서는 식별이 어려운 것까지 신라 고분 150여 기가 남아 있다.


특히 시내의 평지에 자리한 황남리고분군(대능원), 노동리고분군, 노서리고 분군은 신라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나가는 5~6세기 무렵에 축조된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규모와 출토 유물의 화려함에서 신라 고분을 대표한다. 이들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제 장신구, 유리잔, 토기, 천마도 등은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들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관되고 있다.


대능원이라 불리는 황남리고분군은 신라시대의 왕·왕비·귀족들의 능이 모여 있는 곳으로,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따온 이름이다. 천마총, 황남대총, 전 미추왕릉을 비롯한 능 20여 기가 있지만,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천마총은 발굴 당시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의 그림이 나와 붙은 이름이다. 발굴 조사된 고분 가운데 ‘대능원’ 안에 있는 ‘천마총’이 유일하게 그 내부가 공개되어 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만 지하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땅을 파고 시신을 묻은 것이 아니라 그냥 평지 위에 시신을 놓고 그 위에 봉분을 얹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유물 가운데 금관도 출토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황남대총은 신라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동서 길이 80m, 남북 길이 120m, 봉분 높이 23m). 두 개의 봉분이 잇닿아 있어 마치 표주박을 엎어 놓은 듯 한 모양이다. 발굴 결과 남쪽이 남자, 북쪽의 무덤이 여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남자의 묘에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순장을 금한 지증왕 이전에 조성된 능임을 알 수 있다.


대능원에 있는 고분 중 유일하게 그 내부가 공개되어 있는 천마총. 발굴 당시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의 그림(사진)이 나와 붙은 이름이다.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ㅇ전시명 : 황금의  나라,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Golden Splendors: The Royal Tomb of Silla "Hwangnamdaechong"
ㅇ전시기간 : 2010년 9월 7일(화) ~ 2010년 10월 31일(일)
ㅇ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
ㅇ전시작품 : 황남대총 북분출토 금관 등 595건 1268점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 이전개관 5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전시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을 개최합니다. 황남대총은 경주에 있는 신라 고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봉분이 두개인 쌍릉입니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발굴한 유물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왕릉의 전모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한 특별전으로 신라 왕릉 하나만을 주제로 한 대규모 전시론 처음입니다.

신라는 아주 오래 전부터 황금의 나라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황금의 나라, 신라의 진정한 모습은 우리 손으로 신라 마립간(서기 4세기대 신라에서 사용한 칭호로 왕을 의미)시기의 왕릉인 ‘황남대총’을 발굴하고 나서야 체계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거대한 왕릉의 탄생 비밀과 고대국가로 성장한 신라의 국제적 위상, 그리고 신라가 황금의 나라를 이룩하게 된 배경을 밝히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총 58,441점의 황남대총 출토품 중에서 금관을 비롯한 각종 황금 장신구와 귀금속 그릇들, 서아시아에서 온 유리그릇 등 신라 황금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거나 문화적 계통을 밝혀줄 1,268점을 엄선하여 전시합니다. 이렇게 대규모로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것은 발굴 후 처음입니다. 아울러 황남대총의 구조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전시장에 일부 구조물을 직접 재현해 놓고, 고분 내부 구조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3D 홀로그램 영상물도 마련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신라 마립간시기의 왕릉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이해와 더불어 간접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남대총 출토품은 최근에 동북아시아 고고학에서 새로운 국제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어 학문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황남대총이 신라 마립간[麻立干]의 왕릉 중 하나이기에 왕릉의 축조 시점을 추론할 수 있어 절대연대와 더불어 당시의 문화유형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왕릉에서 출토된 고구려 계열의 다양한 문물들은 중국 지안[集安]에서 근년에 발굴된 고구려 태왕릉(太王陵 : 광개토대왕비 근처에 있는 초대형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광개토대왕 무덤으로 추정)의 주인공을 밝힐 수 있는 많은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또한 최근 요동치고 있는 일본의 고훈시대[古墳時代]의 절대연대에도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은 새로운 학설의 근거를 마련해 줍니다. 즉 동북아시아 고고학에서 황남대총이 앞으로 진행될 연구에 시금석이 되기에, 그간의 연구 성과를 공개하는 이번 특별전시는 그 의의가 더욱 큽니다.

전시는 9월 7일(화)부터 10월 31일(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열립니다.


 

<삼국사기>에 '미추왕은 백성에 대한 정성이 높아 다섯 사람의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백성의 애환을 듣게 하였다. 재위 23년 만에 붕어하니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대능원이란 이름이 비롯했다.

이 중 황님대총은 경주시내의 고분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쌍분이며 순장의 풍습과 비단길을 통한 서역과의 교류 등을 알 수 있는 유물 5만 9천 여점이 출토되었다. 쌍능 중 북쪽 능원 여자의 것으로, 남쪽의 것은 남자의 것으로 순장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장의 풍습을 폐한 지증왕 이전의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대릉원의 꽃은 천마총. 국보 3점과 보물 9점이 출되되었다. 1973년 발굴,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 (혹자는 기린이라고도 함)'이 그려진 말다래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란 이름을 붙였다. 금관 중에서 가장 큰 천마총 금관이 나왔다. 국보 188호

자작나무 껍질로 된 말다래에 천마 그림이 또렸하다. 천오백여 년의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게 새겨져 있다. 아직도 살아 있을 신라 사람의 숨결은 우리들 혼의 어느 한 결이라도  담겨 있을까. 지금의 기술로 복원한 것이 옛 그림과 꼭 같은 것이 그것을 역력히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어느 임금인지. 금관과 금허리띠로 치장하여 누워 있었던 자리. 육체는 삭아 없어지고 금제 장식품은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육체는 삭아서 흔적이 없고 변함없이 빛나는 금제 장식은 떠난 육체의 어떤 느낌이라도 품고 있었을까.

 

 

 

 

 

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진품이나 복제품이라 우리의 눈으로 변별하기 힘들다.

 

유리관 안에 금관과 금모, 금허리띠가 놓여진 상태를 재현해 놓았다. 천마총 안에 전시된 유물은 복제품이나 진품과 거의 같아서 그 기술도 놀랍다. 박물관의 진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천마총 내를 둘러보고 나오니 밖은 어느새 어둠이 내렸다. 대능원은 아름다운 공원이 되어 그 시각까지 관광객이나 걷기 운동을 하는 경주시민을 만날 수도 있었다. 경주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도 있었다. 자기의 집으로 초대하고도 싶다는 말 자체로 만으로도 손님 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아니 버스를 타고 와서 두 발로 시내를 걸어 공원을 산책하는 기분은 어느 때의 경주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우주에서 떨어진 어느 별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어린 왕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대 편의 문으로 총총 걸음을 걸었는데 그쪽은  대능 주위에 소나무 길이 나 있었다. 문지가가 말해주었다. 마지막 대능이 아마도 전 미추왕능일 거라고 한다. 

어둑한 무덤 앞에서 미추왕의 죽엽군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에 대한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고 다섯 사람의 신하를 각지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애환을 듣고자 한 왕이었으니 죽어서도 음병을 보내어 나라를 지켰던 것이리라.

 

 

 

 

  문득 신라의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 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어서도 신라를 수호한 미추왕과 김유신장군의 설화가 민간에 퍼지게 된 이야기다. 어머니 박씨가 별빛을 받아 마시고 수태한 14대 유리왕 박씨는 별빛이 건드리고 들어간 입술이 터서 아무 음식도 삼킬 수 없게 되었고, 유리왕을 해산하던 밤에도 별들이 영롱하게 빛났으며, 집안 가득 이상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그리하여 왕의 재위 때는 별처럼 맑고 향기로운 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가까운 나라가 신라를 쳐들어왔다. 신라의 군사로서는 역부족이어서 금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이르렀다. 위기의 순간에 수를 셀 수 없는 이상한 군대가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되풀이하며 신라를 도와 적군을 물리쳤다. 형형한 눈빛을 한 그들은 신라군과 별로 다를 바는 없었지만 특이하게도 양 귓등에 댓잎을 꽂고 전투를 치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엽군이라 불렀다.오래 전에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이 귓등에 댓잎을 꽂고 생시와 똑 같이 싸우더라고 노인들이 말했다. 죽은 선조들이 군사들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신라를 돕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죽엽군이 하늘로 사라진 걸로 알았는데, 어느 날 한 농부가 우연히 미추왕능 근방을 지나다가 그곳 대나무의 잎이 색깔도 바래지 않은 채 무슨 병기들처럼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죽엽군들이 미추왕능에서 나왔다가 다시 저 능으로들어갔군.” 하였다. 그제야 미추왕이 망자들로 구성된 음병(陰兵))으로써 신라를 수호한 것을 알게 되었다.

  통일 신라의 하대(下代))시절에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죽은 김유신 장군도 신라의 호국신이 되어 미추왕의 무덤으로 들어가 신라를 구할 논의를 하였단다. 평화스러운 충청도 연기의 땅을 밟으면서 그 들녘 곳곳 어디선가 옛 백제인들의 억울한 혼령들이 죽엽군처럼 들고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백제의 음병들이라면 귓등에 솔잎을 꽂고 나타나지 않을까? 논산 벌 어느 곳의 견훤의 무덤을 지켜볼 일이다. 혹여 계백장군도 백제의 호국신이 되어 견훤의 무덤으로 들어가 백제의 한을 풀 길을 논의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지금쯤이면 차원을 달리하여 모두가 화해하고 하나가 되기를 기원하고 있을 것이다. 동서 지역갈등도 없고, 반도의 허리가 잘려 섬처럼 살아온 민족의 한을 풀 수 있도록 기원하고 있지 싶다.

(<나도 샤갈처럼 미친 글을 쓰고 싶다>  <죽엽군> 중에서)

 

 

이 날은 마침 정월 대보름 날이었다. 날씨가 춥고 흐려서 보름달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신라의 달밤은 찬란하기 그지 없었다. 하늘의 별들이

땅으로 내려와 별빛이 반짝거리니 부끄러운 달은 그 모습을 나타내기 어려웠지 싶다.  경주는 거리마다 '경주빵과 경주보리빵' 간판이 즐비하다. 관광객이 많으니 돌아갈 때 경주의 특화된 빵을 사들고 돌아가게 한 것이다. 하지만 특화된 음식은 없으니 무난할 것 같은

멧돌순두부 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보름 날이니 식구들이 부럼을 깨고 있으면서 나에게도 호두를 몇 점 깨어 건네준다. 식사도 보름의 특식인 오곡찰밥과 손수 만든 손두부에 생선구이까지 해서 든든한 대접을 받고 숙소도 안내 받을 수 있었다.

신라의 달밤은 더 이상 달밤이 아니다. 경주는 밤이 더 화려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대능원에서 나오면 바로 자동차 길을 두고 한 쪽은 첨성대가 불빛에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그 뒤로로 계림 숲이 보이지만 밤에는

갈 수 없었다.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불빛을 받고 있는 첨성대는 하늘의 별을 관찰했던 천문대라기 보다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방형 돌을

이고 있는 기둥처럼 조각물이 아름답게 보였다. 일년 삼백예순다섯 날을 담아내기 위하여 삼백육십 개의 돌을 기단에서부터 지붕까지

쌓아 조형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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