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명성을 만방에 떨치다, 황룡사지구
분황사와 담장을 나란히 하고 있는 황룡사지 역시 신라의 대표적인 승려인 원효와 자장이 머물렀던 신라의 대표적인 명찰이다.
신라의 유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황룡사이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1238년)으로 불에 타, 지금은 건물과 불상의 주춧돌들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폐사지이지만, 지금의 경주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면적은 대단하다. 현재까지 조사된 황룡사지는 380,087제곱미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진흥왕 14년(553)부터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을 거쳐 경덕왕 13년(754)에 대종을 주조한 데 이르기까지 창건과 관련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황룡사의 창건이 삼국 통일의 국가로써 신라의 저력과 위상이 집약된 국가 사업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전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경내에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큰 대종이 있었으며, 현대식 건물로 따져 20층은 족히 넘는 높이의 80여 미터짜리 구층목탑, 인도에서는 만들지 못하고 비로소 신라 황룡사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는 약 5미터 높이의 장륙존상(인도의 아육왕이 철 5만 5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서 불상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계속 실패하기에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이것이 신라 앞바다에 당도하여 비로소 황룡사 장륙존상을 조성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등이 있었다고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황룡사의 위용은 폐사지인 지금도 그 장엄함과 웅혼함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웃한 아홉 나라에게 신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성격으로 세운 구층목탑은 경주 도성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라 최고의 상징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장육존상이 안치된 불좌대석인지도 모르겠다. 황룡사가 창건된 뒤 5년째 되던 해인 574년 진흥왕 즉위 35년에 신라삼보의 하나인 황룡사 장육존상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다시 10년 후에 새로운 금당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이미 지어진 금당에 거대한 장육조상을 안치할 수 없었으리라.
황룡사 담장을 다 두른 뒤에 신라의 남쪽 바다에 큰 배가 나타났단. 하곡현의 사포(지금 울주 곡포)에 닿은 배를 조사해 보니 첩문에 서축의 아육왕이 황철 57,000근과 황금 30,000분을 모아서 석가삼톤불을 만들려다 이루지 못하고 바다에 띄워 보내니 인연이 있는 나라에 가서 장육존상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는 내용과 함께 一佛, 二보살상의 모형이 실려 있었다. 현의 관리가 이 사실을 문서로 알리니 왕이 사자를 시켜 그 고을의 동쪽 높고 시원한 곳을 택하여 동축사를 세우고 삼존모형을 안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황철과 황금을 경사로 옮겨 대건6년 (574년)에 주조하였는데, 그 무게가 35,000근이나 되는 거대한 불상을 기존의 건물에 안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장육불상을 아치한 후 그 규모에 맞는 새로운 금당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장육존상을 안치하고 10년 후인 584년에 금당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으로 보아 금당이 삼존불보다 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