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리에 외로운 꿈’
-전북 지방을 중심으로 본 조선 시대의 여성문학 소고-
조윤수
언뜻 눈길이 꽂혔던 단어 한 마디는 적원(敵園)이었다. 적의 뜰이라! 김호연제(浩然齊)(1681-1722)의 시「촉오형屬伍兄」이란 제목의 시구였다.
암담하고 괴로우니 / 늘 적의 뜰(敵園)에 있는 것 같네 / 다시 만날 인연도 없이 / 저마다 시집을 가야만
하네 / 길이 머니 글을 부치기 어렵고 / 봄이 깊으니 기러기도 날지 않네 / 꿈속에서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네 /
시집온 지 십여 년 가까이 되었어도 호연재는 시댁을 적국敵國으로 묘사할 정도로 시집살이가 고달파했다. 친정에서는 서모인 어머니를 비롯해 형제들이 자유로운 문학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친가에 대한 그리움은 당연했으리라. 시대를 넘어 현대에 와서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던 예전의 나를 생각하니 동지애적인 상념에 젖었다. 경상도가 고향인 내가 전라도의 땅에서 살게 되었으니 고대에는 과연 적국이었던가. 전주에서 신접살이 십여 년까지의 세월이 호연재의 심정이었을까. 그 같은 시집살이를 한 적도 없었고 출입도 자유로웠지만, 친정붙이 하나도 없는 이곳이니 잠시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조선 시대의 호연재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남편과의 순탄하지 않은 부부생활 속에서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으니. 당연히 호연재는 친정과 혈육을 잊지 못하는 시를 많이 지었으리라. 고통스러운 시댁의 삶에서 해방하기 위해 술과 담배도 접하였고 나중에는 허날설헌처럼 선계仙界를 동경하기에 이르렀단다. 호연재는 늙어서도 고향에 대한 이별의 한을 품고 살았음을 그의 시 「자탄」에 고스란히 묘사했다. 그 시절은 길이 멀어서 갈 수도 없었으니 죽어서라도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가끔 내가 농담처럼 남편에게 했던 말 ‘나 죽으면 부산이나 진주 땅에 묻어주오!’ 란 것처럼. 그때까지만 해도 적원敵園에서 사는 것 같을 때가 잦았던 터였다. 얼마나 외로운 나날을 보냈기에 적의 뜰이라 표현했을까.
‘천리에 외로운 꿈’은 유명한 이매창의 시조 ‘이화우 흩뿌릴 제’의 종장 구절이다. 조선의 여성 문학이라면 언뜻 황진이와 더불어 이매창, 허날설헌을 떠올린다. 기녀이면서 예술인이었던 그들은 조선의 여성 문인을 대표하는 것처럼 알려져 왔다. 그들의 삶과 문학은 이미 많은 연구가 나와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잘 모르던 이 지방의 여성 문인들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2012년 2월에서 4월 15일까지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조선의 여성문학>특별전을 열었다. 전북지방을 중심으로 남아 있는 문서와 그림들을 살펴볼 기회였다.
조선 시대 전기까지만 해도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남성과 대등했다고 볼 수 있었다. 조선 중기까지 나타난 <재산분배기>를 보면 남녀가 똑같이 재산과 노비까지 나누었고 제사도 나누어서 지내기도 했다. 조선 중기부터 후기로 오면 성리학 영향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과 표현 행위는 많은 제약을 받았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지은 이익(1681-1763)의 글에서 당시 사대부들의 여성 문학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글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요, 부녀자는 질서에 따라 조석으로 의복, 음식을 공양하는 일과 제사와 빈객을 받드는 절차가 있으니, 어느 사이에 서적을 읽을 수 있겠는가? 부녀자로서 고금의 역사를 통달하고 예의를 논설하는 자가 있으나 반드시 몸소 실천하지 못하고 폐단만 많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 이익 『성호사설』권 16 「인사문 부녀지교」발췌.
그럼에도 남녀 불문하고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묻어놓을 수가 없다. 모든 조건이 제한된 시대에도 문장으로 중국에 이름을 떨쳤던 여성이 있었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에게 보시를 권하는 글을 지은 여성이 있었다. 또한, 남편을 훈계한 여성이 있는가 하면, 임윤지당 같이 성리학의 심오한 철학을 이해하고 자기의 생각을 펼친 여성도 있었다. 여성,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남성보다 한참 못한 대우를 받던 여느 여성이 아니라 남성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남성보다 뛰어났던 여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여성으로 첫손가락 꼽을 수 있는 이가 순창의 설씨 부인이다. 설씨 부인(1429-1509)은 신숙주의 동생인 신말주의 아내이다. 신말주는 벼슬을 버리고 부인 설씨의 고향인 순창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설씨 부인의 권선문 전문 16폭과 그림 두 폭을 원문 그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강천사의 중건을 위해 신도들에게 시주할 것을 권장하는 내용의 글과 그림을 그려 돌려보게 하였던 것이다. 두 폭의 그림은 사찰의 채색도이다. 이 권선문의 내용은 여성 문인으로써는 보기 드문 인과법에 따라 지은 글이라서 높이 평가되기도 하고, 누구라도 읽으면 보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도록 썼다. 실제로 보시하여 복을 받았던 사례까지 들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었다. 필사본 그대로 남아 있어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신사임당의 그림보다 100여 년 앞선 조선 시대 여성문인이 쓰고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오래된 필적이라는 점에서 전북지방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순창의 명산인 강천산 입구에서 강천사를 향해 조금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설 씨 부인의 공덕 탑비가 세워져 있고 그때 있었던 암자 자리를 표시한 작은 공원이 조성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중국 명나라에서 펴낸 『열조시집』에는 ‘유여주의 처’가 지은 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유여주의 처는 부여 중정리에서 김수천의 장녀로 태어난 김임벽당(1492-1549)이다. 남편이 기묘사화 후 낙향하여 임벽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궁벽한 촌에서 가난하게 살아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는 삶을 담담하게 풀어낸 시가 눈에 띄었다. “땅이 구석지어 찾는 이 적고 산이 깊으니 속세의 일 드물구나 / 집이 가난하여 한 되 술도 없어 / 자고 갈 손님도 밤에 돌아가네 / 「빈녀음」전문.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8)의 아내인 송덕봉은 유배 가게 된 남편을 뒷바라지하였다. 시절 좋은 봄날에도 자신은 오직, 술과 고운 자태에 흥미가 없고 오로지 서책에만 즐거움을 찾는다는 유희춘에게 다른 것에도 관심을 두고, 사직을 권유하는 시를 지어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시는 그녀가 남편과 종속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위치였음을 보여준다. 『미암일기』는 국가의 보물 제250호로 지정되었으며 그의「庭訓」또한 후대에 교훈이 되는 글로 유명하다. 담양에 가면 그의 유적을 만날 수가 있다.
자기 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여성 문인도 있었다. 조선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봉(1526- )의 서녀 옥봉은 조원 (1544-1595)의 문장이 뛰어남을 알고 스스로 소실이 되기도 하였다.
1998년 4월, 한글 편지글이 이응태(1556-1586)의 무덤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원이 엄마의 편지글은 한글 흘림체로 쓰여 있어서 판별하기도 어려웠다. 아내로서 지아비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표현한 글이었다.
지아비에 대한 극진한 보살핌을 폈던 여성 문인으로서 주목이 되는
김삼의당(1769-1823)의 문집은 그야말로 자서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원에서 나고 자란 삼의당은 과거 공부를 하는 남편의 든든한 내조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여성 문인이었다. 삼의당은 남원부 봉서방에서 김일손 (1464-1496)의 후손인 김인혁의 딸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 같은 마을에서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태어난 담락당 하욱(1769-1830)과 혼인하였다. “......... 혼례식 치fms 날 밤에 지아비가 연이어 절구 두 편을 읊었으며, 내가 그것에 화답하였다.”
“십 팔 세 선랑과 선녀 / 동방 화촉 밝히는 좋은 인연이로다 /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았으니 / 이날 밤 상봉이 어찌 우연이리 / 이하 생략.
삼의당의 노력에도 남편이 과거에 실패하고 가세가 기울어지자 진안 마이산 근처로 거처를 옮겨 살았다. 이때의 시들은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자그마한 땅을 일구며 안분지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편 하욱이 향시에 합격하고 회시를 보러갈 때 지은 시가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 뒤 끝내 남편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자 절필하고 말았다.
“경오년 (1810년 9월 남편은 향시에 합격하고 회시를 치르기 위해 출발함에 나는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학문에 뜻 세우기 어찌 이리 더딘지 / 사십 나이에 희 살쩍을 쓰다듬네 / 또 서울을 향하며 먼저 웃고 가나니 / 객지 생활에서 울며 돌아올 일 만들지 마세요./『삼의당김부인유고』에는 자신의 성년식에서 가졌던 다짐부터 남편의 과거시험 뒷바라지할 때의 감상과 초당에서의 꿈결 같던 생활 등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고 한다.
한 남자의 아내이며 어머니였던 여성, 자식에 대한 가르침이 지극했던 여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감격했던 여성은 서영수합徐令壽閤(1753-1823)이다. 영수합은 여자가 붓을 잡고 종이를 대하는 것을 스스로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 홍인모(1755-1823)가 만년에 자기 시에 화답할 사람이 없자, 영수합에게 시 짓기를 강권하였다니, 남편 복이 많았던 그녀였다. 그 시절 참으로 초현대적인 남편의 표상이었지 싶다. 영수합은 남편의 시우詩友가 되기 위해 붓을 들었으나 남편이 죽은 후에는 결국 붓을 꺾고 만다. 그러나 영수합은 자식의 교육에는 철저하였던 모양이었다. 영수합이 바로 정조 임금의 따님, 숙선옹주의 부마가 된 홍현주의 어머니였다.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은가. 이 어머니가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동다송」을 접할 수 있었겠는가. 茶聖 초의선사가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많은 문사와 교유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홍현주였다. 특히 초의선사로 하여금 茶書 동다송을 짓게 하고 다도를 정립하는 계기를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다송의 첫 장에 ‘承海道人命作 草衣沙門意恂(해거도인의 명을 받아 초의사문의순 지음)’ 이라고 명기되어 있지 않은가.
海居道人 洪顯周(1793-1863)는 우의정을 지낸 홍석주와 홍일주와 형제간이었으며 모두 문장과 학문에 뛰어났다. 영수합의 철저한 교육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계필담』을 지은 서유영은 영수합을 가리켜 ‘어릴 때부터 계산법에 밝고, 배우지 않았는데도 능히 서경을 읽고 기삼백朞三百의 주注를 한 번 보고는 해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재능을 지니고 있던 영수합이었지만 여성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남편의 강권이 있기 전까지 붓을 들지 않았으며, 결국 남편이 죽은 뒤 곧바로 절필하였다. 남편 홍인모의 문집 『족수당집』뒤에 부록 되어 있는 『영수합고徐令壽閤稿』에는 한시 115편 191수, 사辭 1편이 실려 있다.”
다음 궁중 여성의 글을 들 수 있다.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1407-1504)가 1475년에 편찬한 『내훈』. 인목왕후(1584-1632), 광해군 즉위 후 영창대군이 살해당하고 자신도 1618년부터 5년 동안 서궁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복위하였다.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자신을 기력이 다한 쓸모없는 늙은 소에 비유하여 쓴 시 「在西宮自嘲」가 목판본으로 남았다. 혜경궁홍씨가 쓴 한시, 종이에 먹紙本墨書가 남았는데 인목왕후의 작품은 해서체인데 기백이 느껴지지만, 혜경궁홍씨의 시는 행서체로서 꼿꼿하며 부드러움도 묻어나오는 작품이었다. 인목왕후와 정명 공주기 지은 것으로 알려진 『서궁일기』, 『인현왕후전』 『한중록』등은 궁중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서술한 문학 작품이자 당시 왕실의 풍속과 역사성까지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조선 시대 여성 문인으로 큰 자리를 차지할 뿐 아니라 여성 문인으로 대표될 만큼 알려진 문인이 기녀 문학가였다. 신분이 낮았지만, 사대부들과 교유가 활발할 수밖에 없었던 위치에 있었으니 종합 예술인이어야 했던 여성들이었다. 황진이, 이매창 등은 많이 알려졌어 그들의 대표 작품은 지금까지 회자하고 있다. 기녀들은 정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기에, 평생을 정인과 함께 삶을 나눌 수 없었으므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애절한 만남과 이별의 글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었던가 싶다.
황진이와 이매창 이외에도 기녀 출신으로 166수의 시를 남긴 설죽, 떠나는 임께 시조를 지어 받친 홍장, 홍낭, 시 잘 짓고 그림 잘 그렸던 죽향도 있었다. 각기 정인을 만난 기쁨과 이별의 심정을 시에 담았다. 남장하고 금강산을 여행하였던 김금원, 당시에는 바람난 여자로 손가락질 받았겠지만, 뒤에 여행기도 남겼단다.
김이양(1755-1845)의 소실이 되었던 운초가 주목되었다. 운초는 풍부한 감성과 다양한 언어구사로 빼어난 문학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운초의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부용으로 본래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중간에 기녀가 되었다가 1831년 연천 김이양의 소실이 되었다. 기녀 시절 운초는 시에서 자기 자신을 절세가인으로 비유하는가 하면, 연못에 가득 핀 붉은 연꽃이 아름답다 한들 자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연꽃이 연못 가득 붉게 피어 / 사람들이 나보다 연꽃이 예쁘다고 말하지만 / 아침에 내가 연못가를 지나가면 / 사람들은 어찌하여 꽃을 안 보나’ 라고 했다. 김이양도 운초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여 서로 애정이 묻어난 시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김이양이 죽은 후 운초는 자기의 처지와 비슷한 이들과 ‘삼호정시회’를 결성하여 활동한 점이다. 현대와 같은 동인의 모임이었다. 이름을 남기지 않았지만 조선후기로 와서는 규방 모임에서 길삼가, 시절가, 교육가 등의 가사를 함께 낭독하였으니 자녀 훈육에 힘쓴 것은 고금이 다르지 않았다..
전북 문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면 ‘저항성’을 들 수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판소리계 소설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판소리계 소설의 저항과 풍자, 비판의식이 오늘의 전북 문학에 면면히 이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신라의 향가가 남성인 승려와 화랑이 지은 것이 대부분이라면 전북 문학의 뿌리에는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정읍사」를 지은 이름 모를 여인이 있으며, 가사가 남지 않은 「선운산가」,「지리산가」등은 모두 여성이 부른 노래다.
조선 시대에도 전북지역에서 나고 자란 설씨부인, 감삼의당, 이매창 등은 많은 조선시대 여성 문학가 가운데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게 이어진 여성성은 최명희(1947-1998), 양귀자(1955- ), 은희경(1958- ), 신경숙(1963- )등에게로 전해졌을 것이다. 사회적 한계를 극복하고 많은 작품으로 인생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이겨낸 조선의 여성문인들의 열정이 오늘에 와서 꽃을 피어내게 되었다고나 할까. 개인과 시대의 한을 풀어내듯 많은 여성 문인들이 배출되고 있다. 현재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 문인들에게도 조선 시대의 여성문인들의 문맥이 흐르고 있지 않을까. 이들이 앞으로 어떤 문학의 영토를 만들어갈까. 이름을 밝히지도 못하여 남편의 이름 뒤에 혹은 당호만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오늘날은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고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성만큼은 변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한 사람의 딸로, 아내로, 어머니의 역할을 해내면서 자기의 일을 갖는다는 것은 힘겹다. 그래도 자신이 하고자 한다면, 아니 자신의 인생을 잘 마무리하자면 여성성을 뛰어넘어 가장 안간 다운 정진이 필요할 것이다. 옛 시대나 오늘이나 여성 문인들의 꿈은 역시나 “천리에 외로운 꿈”을 펼치는 것이 아닐까. 오늘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어찌 고맙지 않으랴!
시가 동네가 적원(敵園)으로 남지 않은 것은 김호연제 등의 꿈이 있었던 덕분일까. 어느덧 적원은 고향의 정원이 되었으며 어딜 가나 우리의 강토와 함께 할 수 있으니……. 그들의 꿈은 개인과 시대의 벽을 넘어 그 영역을 넓혀 오늘에 이르러 새로운 꿈이 되리라. 비록 천만리의 외로운 꿈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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