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고진 만마관을 찾아서
한벽루에서 상관면 쪽에서 흘러내려온 물길을 바라보면 지금도 아름답기 그지 없다. 옛살람이 달 놀이를 하면서 옥같은 물이 절벽에 부딪혀 안개를 이루는 풍경을 보고 한벽청연이라 일컫고 즐겼던 곳. 그곳을 지난다. 시절 인연따라 지금은 한벽교가 만들어져 교통은 편지해졌지만,
그토록 아름답던 물길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깝다. 그래도 이 길은 지금 사계절 아름다운 숲속을 지나서 집으로 가는 길이 되어 흐믓하다.
승암산 자락에서부터 가까운 산부터 먼 산까지, 오른편 남고산성 자락부터 시작한 첩첩산이 겹쳐 이루는 사이는 산숲 계곡을 이룬다. 마침
양쪽 산자락이 단풍이 들기 시작하여 색색이 수를 놓고 은행나무 노란 잎이 알맞게 익어서 가을의 정취가 무르익고 있다. 겨울이 되어도 새봄의 산벚꽃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산자락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길이다.
나는 전주에서 볼일을 마치면 거의 매일 한벽당 아래 다리를 건너서 좁은목을 통과한다. 지금은 신리에서 서부로 우회 도로가 생겼기 때문에 외곽도로로 나갔다가 전주시를 지나고 이쪽 좁은목으로 올 때도 있다. 좁은목을 지날 때마다 도시의 일거리를 다 잊어버린 채 숲속을 산책하는 기분이 된다. 저절로 고요해져서 하루의 일을 정리하기도 하면서 혹은 모든 것을 잊고 딴 세상으로 드는 것 같다. 승암산과 남고산 사이의 협곡을 지나 대흥천을 따라 드라이브 하는 길이다. 전주천은 슬치에서 발원한 물이 북으로 흐르다가 한벽당에서 서쪽으로 돌면서 전주천이 된다.
남원 쪽에서 전주로 들어올 때는 두 좁은목을 통과해야 한다. 가끔 남원에서 전주로 올 때, 임실을 지나고 슬치고개를 넘어올 때마다 나는 전주 쪽 좁은목보다 더 으스스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첩첩이 산이 가로막은 협곡을 통과하는 일이 마치 요새를 지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경관이 좋아서 좋지만 옛 조선시대를 생각하면 얼마나 험난한 길인가 말이다. 옛날에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지만 전주에 오래 살다보니까.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자 이곳에 남고산성과 관련한 남관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연 그랬다. 전주천이 되기 전까지는 대흥천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래 전, 내 아이들이 초등학교 시절 저 덕진에서 남고산성 밑의 좁은목까지 와서 물을 받고 개천에서 빨래도 하고 놀았던 때를 추억하기도 한다. 그때는 수원지가 형성되어 마치 호수 같았기 때문이다.
오래 동안 전주에서 살다가 상관면 신리로 이사하게 되었다. 6년 째 상관면민이 되어 살면서 이곳의 지리와 문화가 새삼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상관면의 여려 마을을 다녀보기도 하였다.
지난 해 예부터 듣던 정여립의 생가가 상관면에 있었다 했지만, 어디가 생가터였는지 몰랐다. 최근에 발굴하여 월암 마을에 정여립 터라고 추정한 곳에 정여립을 기념하는 정자를 세우게 되었다. 마침 정여립의 죽도 가는 길의 답사 차로 마제봉 산을 넘어 상관 저수지까지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순례길 표시인 '달팽이' 그림의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지고 저수지를 둘러서 소양으로 죽도까지 이어지는 길목의 길이
되었다. 저수지 둘레길은 물을 끼고 걸을 수 있는 천혜의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조선조 ‘기축옥사의 희생양’ 정여립의 한서린 눈물이 베인 길이었다. 정여립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전주 남문 밖(전주시 색장동)의 파쏘(봉) 아래 집터는 파헤친 후, 숯불로 지져 그 맥을 끊었다는 신정일 우리땅걷기 이사장의 설명이다. 월암마을 한 모서리가 바로그 파쏘였던가.
진동규 시인은 그의 시에서 파쏘를 이렇게 노래했단다.
"살던 집은 텃 자리 까지 파버렸습니다. 그 이웃까지 뒤집어 파서 앞내 끌어 휘돌아 가게 하였습니다. 깊고 깊은 소를 만들어 버렸지만 그때 그 집 주인이 반역했다고, 그래서 전주천 물이 거꾸로 흐른다고 소문내고 그런 속샘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댁건너 마을 사람들 은 상죽음(上竹陰) 하죽음(下竹陰)하면서, 구름처럼 모여 들었던 선비 들의 죽음 그 때죽음을, 서방바우, 각시바우, 애기바우, 그 피울음을 상 댁건너 하댁건너 점잖던 자기 마을 이름위에 불러보기도 해 보지만 어떻게 변명 말씀 한번 엄두를 못 내고 죽어지내 왔습니다. 그 집 뒷산 월암에 달이 뜨면 댁 건너 사람들은 월암 아래 소에 들어 대수리를 잡는 답니다. 관솔불들을 밝히고 주춧돌 기둥뿌리 항아리 깨진 것, 뭐 그 집주인 뱃속까지 빨아 먹고 자란 대수리들을 잡는 답니다."
그런데 그 대수리를 잡던 소는 흔적도 없고 산을 넘어고 저수지가 나오니 그 물에서나마 파소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런 정여립의 대동 정신을 상관면민은 이어받아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면 현대에 정여립의 정신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주와 완주는 원래 하나였다. 지금은 행정구역 상 갈려 있을 뿐이다. 지금 완주군은 옛 전주부와 고산현이 합해서 이루어졌다. 옛 전주주는 백제시대 완산이라 하였고 비사벌이라고도 불리었다. 555년에 완산주라고 했고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 완(完)을 의역하여 전주로 고였다. 1403년 (태종 3)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하여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935년 전주면이 부(府)로 승격되어 독립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완주군으로 개칭하였다.전(全)은 온전할 전이고, 완(完)도 완전할 완, 온전할 온으로 지명도 같은 의미다. 전주와 완주 일대에 오래 전부터 완산승경 32경이 있었던 것으로 같은 고장임을 알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전주팔경이 있지만, 완산승경 32경이라면 낯설지만 ‘완산승경 32경’이 정해진 것은 조선 중기 쯤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당시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 구진벌 전쟁터가 최근 사적지로 정해지기도 했다.
정복규씨가 밝힌 완주 승경 중에 상관면에 속한 것은
고달귀운 - 구이면과 상관면의 고덕산, 만마도관 - 상관면 용암리의 만마관, 사대병암(四大屛岩) - 상관면 대성리의 사대원,죽림천엽 - 상관면 죽림리 등이다.
우리나라는 백두대간을 등뼈로 하여 여러 산맥이 뻗어나가기 때문에 동부는 산간이요 서부는 낮게 평야를 이루며 바다로 이어진다.
상관면은 동부지방이니 산이 겹쳐 골짜기를 이루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마을이다.
완주 승경 중의 하나가 상관면 용암리의 만마관이라니 그곳을 찾기로 했다. 남쪽에서 전주부성으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용암리의 만마관을
통과하여야 했다. 만마관이 있었기 때문에 부성의 남쪽 관문인 남관이요, 상관은 전주부로 들어서는 위쪽의 관문이니 상관이었다.
전주부성에서 상관을 지나 남관에 오면 네 거리, 내아마을 쪽 입구에 남관진창건비가 세워져 있다.
역시 슬치를 넘고 용암마을 입구 좁은목을 지나칠 때 늘 천혜의 요새 같다는 내 느낌은 적중했고,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곳이었다. 남고산 어귀의 좁은목에서 용암리 좁은 목까지 40여리에 걸친 산골짜기를 만마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좁은목 신작로 옆에 차를 세워두고 개천으로 내려갔다. 전주문화원 원장과 사무국장님의 선도로 성터를 찾아 올랐다. 돌과 잡목이 어지러운 땅을 헤치고 조금 올라서니 돌을 쌓아둔 곳이 보였다. 성곽이라고 볼 수 있는 돌을 쌓아 둑이라 할 만한 성터가 쭉 높이 이어졌다. 면장님과 나는 더 올라가지 못했다. 두 분 선생님들이 끝까지 올라가고보고 내려왔는데 꼭대기 너머는 산들이 첩첩이 이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큰길 건너 맞은 편에도 만마관문을 이은 성곽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원장님 말씀은 틀림없이 이곳 만마관의 형세가 험준하여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이곳을 뚫기가 어렵기 때문에 돌아서 웅치와 이치로 쳐들어와서 전주성을 함락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남관진이 설치된 만마동 일대는 중국의 가장 험준했던 촉도와 진관에 비견할 만한 천험을 갖춘 요새라고 말할 수 있다고 남관진창건비석에 써 있었다.
만마관은 2층 구조물이었는데 위층은 6칸의 문루로 되어있고, 아래층은 부채모양의 철문을 단 홍예문이었다. 그 밖에 관문을 지키는 장졸들의 수직방守直房 3칸이 있었다고 한다. 전주 북쪽에 서있는 '호남제일성'의 문루처럼 이곳에 다시 만마관 문루가 세워진 모습을 상상해본다.
만마관에서 통행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남원 방면에서 전주를 향하던 길손들은 관문이 닫히면 문이 열리는 다음날 아침까지 문밖에서 하룻밤을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단다. 현대에서 군부대가 형서되면 그 마을이 활성화되는 것처럼 이곳에도 진이 형성되었으니 병졸과 부대원들의 거처들이 필요하여 바로 아래의 쑥재에 마을이 생겼다. 그래서 이름이 내아마을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마을이 형성되다보니 이 마을 어른들이 들은 바로는 아침 등교 시간이 되면 이마을길이 학교가는 아이들의 행렬이 줄을 지었다고도 한다.
용암리 노구마을
또한 관문 밖의 용암리 노구바위마을에는 주막과 여인숙이 성업을 이루었다.
용암리의 노구바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개천을 지나 산정마을로 들어갔다. 멀리서 보아 늙은 개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노구바위 혹은 노고바위마을이라고 불리었단다. 그리 높지 않은 산능선 아래 옹기종기 여러 집들이 편안히 앉아 있다.
이 노구바위마을에서 신관 사또 변학도가 남원 부임길에 점심을 먹은 것이 춘향가에 나올 정도로 당시로서는 유명한 곳이었단다.
"전주부성 동쪽머리 만마관 골짜기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하는 전주천 물살은
좁은 목을 지나, 강모가 내내 하숙하고 있던 청수정의 한벽당에 부딪치며,
각시바우에서 한바탕 물굽이를 이루다가
남천교, 미전교, 서천교, 염전교를 차례차례 더터서 흘러내리며 사마교를 지난다.
을 누비고 흘러오그렇게 모래밭던 물결이,
긴 띠를 풀어 이곳 다가봉의 암벽 아래 오면
급기야 천만으로 몸을 부수며 물안개를 자욱하게 일으킨다." -최명희의 ‘혼불’ 중에서도 서술이 될 정도였다.
중국에서는 같은 값의 돈인데 곱절에서 다섯 배까지 더 받는 복돈(福錢)이라는 게 있었다.
태산에 올라가 소원성취를 빌며 기도를 할 때 향 값으로 바친 향세(香稅)가 횡류된 것이며, 그 소원성취의 효험이 그 돈에 남아 있기에 프리미엄이 붙어 두 곱 내지 다섯 곱으로 값이 붙어나간 것이다.
그런데 만마관에서도 재미 있는 복돈 이야기가 전해온다. 만마관은 남원으로 가는 첫 관문이기도 하고 전주부성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기도 했으니 그 장터가 번성하였으리라. 그리하여 이 장터에 삼난전(三難錢)이라는 한 냥을 닷 냥으로 바꾸는 복전이 있었다. 조삼난(趙三難)이라는 가난한 선비 집 돈인데 그런 이름이 붙은 데는 이유가 있다. 사대부로서 술집을 하기 시작한 것이 일난(一 難)이요, 돈 버는 동안 형님한테까지 술값, 밥값을 받아낸 것이 이난(二難)이며, 돈을 번 다음 재산을 형님에게 돌리고 독서하는 선비로 되돌아 간 것이 삼난(三難)이라 하여 조삼난인데 그 분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면 급제는 기약된 것이라 하여 팔도에서 서생들이 그 돈을 사러 몰려들었다 한다.
남고산성 서문지에 남고진사적비가 서 있다. 창암 이삼만이 쓴 비에 의하면, 순조 11년(1811년)에 개축을 시작해 그 이듬해 완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마관萬馬關' 이라고 미려하게 쓴 창암 이삼만의 행서체의 현판 글씨가 남아 있다. 창암 이삼만은 전주에서 태어나서 중기부터는 상관면 공기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 분이다. 관문 안의 내아마을 깊은 골짜기를 올라가면 공기골로 이어진다.
공기골은 편백숲을 열러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 찾게 되었다. 2년 전만 해도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자주 찾은 적이 있다. 편백숲이 몇 군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나는 아직 아래 부분의 숲에만 가 보았고 그 아래 온천샘이 나오는 곳이 있어 온천수를 받아오기도 하였다. 지금은 마을 사업이 활성화되어 나무로 물통을 만들어 발을 담구고 쉬어가는 쉼터를 만들었다. 최근에는 찜질방이 지어져서 활용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상관편백숲이 많이 알려져서 주차장이 3개나 만들어진 뒤로는 우리는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아래부터 걸어올라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공기마을은 예부터 한지를 뜨는 곳도 있었는데 현재는 그 흔적을 볼 수 없다. 다만 편백숲 입구에 커다란 정자나무들이 몇그루 서 있어 또한 마을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으며 창암 이삼만 선생의 이름으로 지은 창암정이란 누정까지 세워져 있어 다시 한번 창암 선생을 기리게 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또한 선생의 묘소가 고덕터널 밖에 자리잡고 있다. 창암 이삼만 선생은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 후기 서예가라고도 할 수 있으나 추사 생전에 이상만의 글시를 몰라보고 하대한 적이 있다가 나중에 그 가치를 다시 인정함으로서, 호서의 추사 김정희와 호남의
창암 이삼만으로 대변될 만큼 큰 업적을 남긴 서예가이다. 추사 김정희가 중국의 서예를 본받아 차츰 자신의 서체를 형성하여 글로벌한 글씨체로 유명하다면 창암 선생의 글씨체는 가장 한국적인 서예를 구현한 전북의 서예가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창암 선생의 글씨체가 다시 조명받아 전시회도 크게 연바 있다. 창암의 글씨를 다시 조명해보는 기회도 될 것이다. 창암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조선진체의 완성자라고 자부할 수 있다는데, 그 특징을 본다면 무의도성으로 인하여 충만하게 된 자유스러움과 자연스러움과 질박함과 까칠한 삽기를 동시에 다 느낄 수 있다고 김병기 교수는 말해주었다. 강암 서예관이 소장하고 있는 창암 선생의 작품을 살려본다면 충분히 그 느낌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상관면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으며 공기가 좋아서 도시인들의 쉼터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최근에는 상관은 나뭇골로도
유명하여 상관에서 기른 나무들로 정원수로 활용되는 곳이 많아고 한다. 가까운 전주시민들과 한옥마을을 관광차 들르는 사람들이 이곳
상관 주변에서 관광을 비롯하여 웰빙과 힐링까지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근에 신리역이 없어지고 광장이 생겨서 주차장 역할을 하여 마치 도시를 방불케 한다. 그러나 신리역 뒷산 마제봉 오르는 길이 이곳
마을의 둘레길이 되어 저수지까지 이어져서 자주 찾는 곳이다. 마을에서 전주래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언제나 먼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상관이 참 좋다. 나는 내일 또 털거덕거리는 기차소리를 들을 것이며 마을 입구의 다리를 건너서
대흥천을 따라 숲속을 거닐듯이 좁은 목을 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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