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선사가 출가한 운흥사에서
초의선사 탄생지인 무안 왕산리에서 스님이 출가를 하여 수계를 받은 나주 운흥사까지는 꽤 먼 거리이다. 집에서 가까운 승달산에 천년고찰 법천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먼 곳까지 출가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아마도 어린 시절 물에 빠진 것을 도와준 분이 혹시 운흥사 스님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짐작해본다.
아무튼 초의선사는 15세가 되던 해에 정든 고향을 떠나 나주 다도면에 있는 운흥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당시에 나주 영산포로 가기 위해서는 뱃길을 이용하여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영산강 포구 중 하나를 이용했으리라. 선사의 고향마을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영산강 포구는 일로읍 부근에 있는 주룡나루터와 몽탄나루터이다. 당시에 주룡나루터는 일로읍과 영암의 독천(지금은 낙지마을로 유명함) 우시장을 오가던 사람들이 소를 실어 나르는 것으로 유명했고, 몽탄나루터는 몽탄 지역의 옹기마을에서 생산한 옹기를 영산강 뱃길을 통해 영암과 나주 지역으로 실어 나르는 것으로 이름났다. 어느 나루터를 이용하던 스님을 태운 배는 구불구불한 영산강 줄기를 따라 영산포까지 순항했으리라. 아니면 남평 드들강에 하선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영산포나 남평에서 운흥사까지 가려면 야트막한 산길을 따라 계속 걸어야한다. 나주 봉황을 지나 다도(茶道)에 이르렀다가 서남쪽으로 약 5km 정도 가면 암정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덕룡산 기슭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구름이 산봉우리에서 일어나는 형태라 하여 원래 운흥(雲興)이라 불렀다고 한다. 운흥마을에서 절까지 이르는 길을 마을사람들은 “문산고랑”이라 부른다. 이 운흥마을 '문산고랑'에 있는 운흥사 들목에 아주 토속적으로 생긴 2기의 남녀 석장승이 위치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성전과 성역을 부정으로부터 지키고 잡귀의 출입을 막고자 세워진 수문신이라고 한다.
△ 감나무와 운흥사 대웅전 |
운흥사는 892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절로 40여개의 전각이 있던 규모가 큰 사찰로 초의스님이 출가한 당시에는 500여명의 스님들이 계셨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화재와 6.25 대재난을 만나 불타고 현재는 문수암 자리에 세워진 문성암, 동암등 작은 암자에 스님들이 기거하고 있다. 주지 혜원스님의 원력으로 최근에 해탈문, 대웅전, 관음전,팔상전,산신각,고승당 등이 지어졌고 체계적인 불사가 계획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옛 영광을 되찾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 대웅전 추녀끝에 달린 풍경 |
대웅전 바로 앞에 있는 당간지주에는 이끼가 끼고 담쟁이 넝쿨로 뒤덮여 있다. 넓은 폐사지 터를 3칸 대웅전 한 채가 지키고 서 있기에는 웬 지 너무나 쓸쓸해 보인다. 눈을 들어 대웅전 지붕을 올려다 보니 사방으로 치켜 올려진 처마 자락이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흰 구름과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추녀 끝에 매달려 산들바람에 한들거리는 물고기 모양의 풍경이 덕룡산 능선 위에 걸쳐 있는 흰 구름을 향해 파닥 거린다. 그 모습이 애처롭고 안타깝구나. 쇠줄에 매달린 물고기가 감히 푸른 바다를 꿈꾸지는 못할 것이리라. 하지만 몸이 묶일수록 영혼은 비상을 꿈꾸는 법이다. 그렇다면 저 풍경에 붙들린 물고기는 틀림없이 하얀 운해(雲海)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덕룡산 자락에 구름이 크게 일어나 구름 바다가 펼쳐지면 굳이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바다 속에 빠지게 될 터이니까. 저 풍경 물고기는 구름바다 위에서 노니는 꿈을 꾸면서 혹 초의선사를 비롯한 옛 선사들의 선지식이 다시 한 번 이곳 운흥사에서 발현 되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일까? 데엥데엥 들려오는 나지막한 풍경소리가 선사들의 설법 소리인 양 향기롭다.
운흥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은 금성산과 더불어 나주를 대표하는 덕룡산이다. 덕룡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숲이 깊다. 덕룡산 뒤편에 있는 불회사는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파한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가 1700여 년 전에 세운 고찰로 그 역사가 찬연하다. 덕룡산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차나무는 그 역사가 이미 1000년을 뛰어넘는다. “다도(茶道)”라는 지명이 말해 주듯이 운흥사가 자리 잡고 있는 이 지역은 고려 때부터 이름난 차 생산지로 국가에 진상하기 위해 전라도 28개 지역에서 생산된 차가 집산 되었던 다소(茶所)와 사원에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촌(茶村)마을이 있는 곳 이었다. 운흥사 주변 역시 오랜 역사가 내재된 차나무가 널리 산재되어 있다. 사찰 오른쪽으로 제법 큼지막한 계곡이 흐르는데 그 계곡을 따라 오른편 산기슭에 꽤 넓은 차밭이 분포되어 있다. 현재 주지로 계시는 혜원스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야생차밭의 면적만 해도 약 1만 5천 평 정도 된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산에 큰 불이 나서 차나무가 불에 타긴 했지만 그 뿌리는 수 백 년 동안 살아남아서 지금은 가지를 무성하게 뻗으며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 운흥사 야생차밭 |
이 차밭에서 초의선사도 찻잎을 따는 울력을 도왔을 것이다. 초의선사가 나중에 이름난 다승(茶僧)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 것 또한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어떤 사람들은 초의선사가 다산 정약용 선생으로부터 다도를 배워 차를 접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스님은 15세에 운흥사에 왔고 24세 때 다산 정약용을 처음 대면했다. 그 기간 동안에 약 10년의 간격이 있다. 사찰 부근의 산자락 어디를 가나 차나무가 자라고 있고 전라도 28개 지역에서 생산된 차를 모아 진상하던 다소(茶所)와 사원에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촌(茶村)마을이 있는 지역에서 살면서 어찌 차를 모르고 지낼 수가 있었겠는가? 그 10년 동안 초의스님은 남도의 여러 명산을 순례했다. 19세 때 월출산 도갑사에서 수행했으며 이후에 해남 대둔사와 승주 쌍봉사에서도 수도 정진했다. 월출산 도갑사와 쌍봉사 또한 작설차로 유명한 곳이다. 스님이 청년시절을 보냈던 차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주위환경이 나중에 발현된 다선일여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 하기란 어렵지 않다.
몇 년 전 초의선사의 발자취를 따라 처음 이곳 운흥사를 찾아 왔을때는 대웅전 앞뜰의 감나무에 주홍빛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시냇가에 있는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에 샛노란 단풍이 물들어 있던 늦가을 이었다. 올 여름에 와보니 그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녹음이 짙은 숲 속에 엷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어서 인지 고요한 산사가 더욱 신비로워 보이고 시냇가 두 그루의 은행나무 또한 훨씬 더 웅장하고 우람차 보인다. 몇 백 년 동안 온갖 풍상을 이겨 내면서 의연한 기상으로 우뚝 서 있는 저 고목으로부터 그리운 사람들의 옛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자꾸 올려다보고 뒤돌아보지만, 무성한 가지가 드리운 짙은 그늘만 생각보다 멀리 뒤따라올 뿐이다. 저 은행나무 그늘 아래에서 초의선사는 도반들과 함께 다담을 나누면서 한가로움을 즐겼을까?
△ 운흥사 입구 석장승(할아버지 장승) |
혜원스님의 손짓을 따라 은행나무 그늘에서 벗어나 울창한 대숲을 지나니 너른 차밭이 눈에 들어온다. 잡목을 제거한 산기슭 차밭에는 광채 나는 찻잎들이 산들바람에 흔들거리며 수런수런 옛 이야기를 속살대고 있다. 하지만 일손이 부족한 흔적이 역력하다. 칡덩굴이 제철을 만나 세력을 확장 시켜 나가느라고 차 밭 언저리까지 그물손을 뻗치고 있는데도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었다. 워낙 시골이라서 일군을 알아보려고 해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스님이 한탄하신다. 운흥사가 다시 옛 영화를 찾기 위해서는 이 차밭을 제대로 복원 시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밭에서 나와 다시 대웅전으로 갔다. 운흥사를 떠나기 전에 절터 전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초의선사의 시에 나오는 소나무가 어디에 있을까 둘러보지만 여러 차례 화마에 휩싸인 전력이 있는 지라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대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은행나무가 불에 타지 않고 견디어 낸 것은 참으로 대견스럽다. 운흥사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은 아미타부처님인데 그 모습이 독특하다. 대웅전 터를 발굴하다가 금동아미타불이 발견 되었는데 그 형상을 따서 제작한 불상이라고 한다. 기단 바로 아래에는 조그마한 샘이 있다. 이 샘물은 부처님 전에만 올리는 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중생의 욕심으로는 이 물로 차를 달여도 좋을 듯싶다.
△ 야생차 밭에서 내려다 본 운흥사 전경 |
초의선사를 흠모하는 차인들에게 이 운흥사는 특별한 사찰로 기억될 만한 곳이다. 스님이 출가한 사찰일 뿐만 아니라 다른 절에 주석하면서도 수시로 들러 수행하면서 휴식을 취했던 곳이다. 해남 대둔사에 일지암을 짓기 전 37세 때 은사의 병을 간호하기 위하여 운흥사로 이사하여 여러 해를 머물렀다. 운흥사와 관련된 시가 몇 편 있는데, 다음은 그 중에서 평소 초의선사와 교류하며 지낸 김도촌이라는 선비와 초의선사가 주고 받은 시이다.
운흥사로 이사 간 초의에게
김도촌(金道村)
몇간의 암자 짓고
일곱 해를 좌선하여
별 보고 불심 깨달아
드디어 신통술 얻었으니
독 품은 용(龍)인들 어찌 두려울 것이며
사나운 범(虎)인들 어찌 휘어잡지 못하랴
어진 골짝은 그대의 이웃이요
바닷가 봉우리는 그대의 벗이라
그대는 삼절(三絶)을 겸했지만
나는 아직 깨우치지 못해 한 일세
그대의 드높은 눈으로 보면
내 몰골은 우스울 것이로다
내가 오로지 바라마지 않는 것은
저 달이 두 골(鄕)을 밝게 함인데
구름과 안개가 그대를 따르고
꽃과 새들 또한 그대를 따를 것이로다
운흥사에는 뛰어난 스님 많을 것이니
그대의 홍덕을 오래오래 전하리로다.
- 초의가 은사의 병을 간호하고자 하여 운흥사에 갔다고 들었다-
김도촌이 시 한수를 보내왔기에 차운하여 보냄
초의선사
도촌이 살고 있는 그곳은
한가롭고 넓은 마을이더라
그의 뜰에는 난(蘭)이 우거졌고
문 밖에는 연못도 있었어
스스로 약을 만들어 먹고
좋은 차 마시며 편히 자더이다
다시 한 번 놀자던 언약은
올 가을 쯤으로 기약하였고.
15세 때 벽봉 민성스님을 은사로 운흥사에서 출가했던 초의는 19세가 되던 해에 일생 일대의 큰 깨달음을 얻게 될 만행에 나선다. 그의 발걸음은 운흥사를 떠나 영암 월출산으로 향했다. 다도에서 영암 월출산까지 가려면 나주 봉황과 세지를 거쳐 영암 금정에 도착한 후 제법 큰 언덕길인 여운재를 넘어야 한다. 여운재 고개를 막 넘으면 갑자기 월출산 봉우리가 나타나면서 광활한 영암평야와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초의선사는 씩씩하게 여운재 고개를 넘다가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을 것이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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