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스크랩] 乙丑冬 貽兒菴禪子乞茗疏 을축년(1805)겨울 아암선자에게 준 걸명소.

차보살 다림화 2012. 12. 23. 20:53

乙丑冬 貽兒菴禪子乞茗疏  을축년(1805)겨울 아암선자에게 준 걸명소.


<
다산 정약용 선생의 영정>


乞茗疏

乞茗疏 乙丑冬(1805년) 贈兒菴禪師.

-  
茶山 丁若鏞

旅人近作茶饕 書中妙辟 全通陸羽之三篇
兼充藥餌 病裡雄蠶 遂竭盧仝之七椀
雖浸精瘠氣 不忘棊毋㷡之言 而消壅破瘢 終有李贊皇之癖
洎乎朝華始起 浮雲皛皛 於晴天
午睡初醒 明月離離 乎碧澗
細珠飛雪山燈 瓢紫筍之香 活火新泉野席 薦白包之味
花瓷紅玉繁華 雖遜於潞公 石鼎靑煙澹素 庶乏於韓子
蟹眼魚眼 昔人之玩好徒深 龍團鳳餠內府之 珍頒已罄
玆有采薪之疾 聊伸乞茗之情
竊聞苦海津梁 最重檀那之施 名山膏液 潛輸瑞草之魁
宜念渴希 毋慳波惠.


결명소(乞茗疏) : 차를 얻고자 적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乙丑冬(1805년) 贈兒菴禪師 :을축년(1805) 겨울, 아암선사에게 보냄.

旅人近作茶饕
(여인근작차도) : 나그네가 요즈음 茶를 탐음하고
書中妙辟
(서중묘벽) : 책속에 오묘함 열어준
全通陸羽之三篇(전통육우지삼편) : 육우의 다경 三편을 전통하고
兼充藥餌(겸충약이) : 겸하여 약으로 충당한다오.
病裡雄蠶(병리웅잠) : 병을 다스리자니 한밥잡힌 누에로
遂竭盧仝之七椀(수갈노동지칠완) : 마침내 노동 칠완을 다 들이키고
雖浸精瘠氣(수침정척기) : 비록 수척하고 정신이 잠기나
不忘棊毋㷡之言(불망기무경지언) : 기무려의 말을 잊지 않은지라.
而消壅破瘢(이소옹파반) : 옹체를 해소하고 흉터(죽은 깨)를 지우자하니
終有李贊皇之癖(종유이찬황지벽) : 끝내는 이찬황의 버릇이 생겼오.
洎乎朝華始起(계호조화시기) : 아침에 꽃이 갓 필 때,
浮雲皛皛於晴天(부운효효어청천) : 구름이 개인 하늘에 선연히 떠갈 때,
午睡初醒(오수초성) : 낮잠에서 막 깨어날 때,
明月離離乎碧澗(명월리리호벽간) : 明月이 점차 산 개울에서 멀어갈 때,
細珠飛雪山(세주비설산) : 솥에 물을 부으면 작은 구슬은 설산에 나르고
燈瓢紫筍之香(등표자순지향) : 등불은 자순차 향기에 나부끼느니,
活火新泉(활화신천) : 새 샘물 활력있는 불은
野席薦白包之味(야석천백포지미) : 야원에 백토시의 맛을 바치고
花瓷紅玉(화자홍옥) : 붉은 옥호 피어난 사발에
繁華雖遜於潞公(번화수손어로공) : 번영하는 유화는 비록 노국공에 못미치나
石鼎靑煙(석정청연) : 돌솥에 푸른 연기
澹素庶乏於韓子(담소서핍어한자) : 담박 질소하여 한자에는 가까우리.
蟹眼魚眼(해안어안) : 해안 어안은
昔人之玩好(석인지완호) : 옛사람들 즐겨 완미했거니,
徒深龍團鳳餠(도심룡단봉병) : 다만 심궁의 용단 봉병은
內府之珍頒已罄
(내부지진반이경) : 나라안 곳집의 반급할 진장품은 이미 빈 그릇이라.
玆有采薪之疾(자유채신지질) : 이 사람 섶나무조차 못할 질고로 하여
聊伸乞茗之情(요신걸명지정) : 애오라지 茶 비는 정분을 신항함이라.
竊聞苦海津梁(절문고해진량) : 저으기 들으니 인생고해는 부처님의 진량중
最重檀那之施(최중단나지시) : 가장 소중함이 단나의 보시라 하고,
名山膏液潛輸(명산고액잠수) : 名山에 잠긴 경혈과 고액은
潛輸瑞草之魁(서초지괴) : 서초(茶)가 으뜸이라 하거늘
宜念渴希(의념갈희) : 마땅히 갈망 희구함에
毋慳
波惠(무간파혜) : 아끼지 마시고 파도같은 은혜 베풀기 염원합니다.

아암 혜장선사(
兒菴禪師) : 조선 정조 때의 중(1772~1811).
속성은 김(). 속명은 팔득(). 자는 무진().
호는 연파()·아암(). 1790년에 즉원()의 법을 이어받았다.
변려문을 잘하였으며, 성리학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아암집()》이 있다.


나그네는 근래 차 버러지가 되어 버렸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차가운데 묘한 법은
육우의 3편 다경이 통달케 하였으니
병든 큰 누에는 마침내,
노동(盧同)도 남긴 일곱째 잔을 마르게 하였소.
정력이 쇠퇴했다 하나 기모경의 말은 잊지 않았고
막힘을 풀고 흉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찬황의 차마시는 버릇을 얻었소.
아아, 윤택할진저~~
아침에 달이는 차는 흰 구름이 맑은 하늘에 떠 있는듯 하고,
낮잠에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물 위에 잔잔히 부서지는듯 하오.
다연(차맷돌)에 차 갈 때면 잔구슬처럼 휘날리는 옥가루들
산골의 등잔불로서는 좋은 것 가리기 아득해도
자주빛 어린 차순 향내 그윽하고,
불 일어 새 샘물 길어다 들에서 달이는 차의 맛은
신령께 바치는 백포의 맛과 같소.
꽃청자 홍옥다완을 쓰던 노공(盧公=盧同)의 호사스러움 따를 길 없고
돌솥 푸른 연기의 검소함은 한비자에 미치지 못하나
물 끓이는 흥취를 게눈 고기눈에 비기던
옛 선비들의 취미만 부질없이 즐기는 사이,
용단봉병 등 왕실에서 보내주신 진귀한 차는 바닥이 났소.
이에 나물 캐기와 땔감을 조차할 수 없게 마음이 병드니
부끄러움 무릅쓰고 차 보내 주시는 정다움 비는 바요
듣건데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말고 베품 주소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서들>


화려했던 고려시대의 차문화가 유교문화를 수용한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점점 쇠퇴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다가 1700년대 후반 쯤에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는데,
사실 차 문화는 사찰의 스님들이 다선일여(茶禪一如)라 해서
떼 놓을 수 없는 관계라 조선시대에 들어서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차 문화의 중흥에 불을 붙인 곳은 바로 사찰,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유배 가셨던 바로 강진의 만덕산 백련사.
이곳에는 우리 차 문화에 불씨를 당긴 두 사람의 인연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다산과 혜장 스님이었습니다.
서로 만난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불교와
학문으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헤어졌는데 헤어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흠모의 정을 느끼고
그리워하게 됐는데 이때 다산의 나이 44세 혜장의 나이 34세였다고 합니다.
외로운 유배생활에서 진실함과 학식을 겸비한 혜장을 만난 것은 다산에게 실로 가슴 벅찬
반가움이요 충격이었습니다. 혜장 역시 마찬가지여서 연상의 대학자를 깊이 흠모했죠.

밤마다 다산은 혜장을 그리워하고 적적함에 잠 못 들어 했는데
어느 날 밤 자정이 넘도록 잠 못 들고 뒤척이던 차에 인기척이 있어
벌떡 일어나 문을 여니 아! 거기에는 꿈에도 못잊어 하던 혜장이 서있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합니다.
다산이 차를 안 것은 이때였고 혜장에게 차를 배우고 혜장은 다산에게
학문을 배웠다는 것은 강진 땅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다산은 혜장의 입신의 차맛에 홀딱 반했고
혜장은 다산의 학문과 인품에 홀라당 반했으니 여기서 부터
우리 차의 소생이 시작될 싹이 틀 줄이야~~
정다산이 차를 초의선사에게 배웠다는 얘기들이 간혹 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얘기 같습니다.
다산은 명색이 사대부 집안의 선비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차를 접해보긴 했겠으나
다만 본격적으로 애착을 느끼고 관심 있게 배운 때가 아암(兒庵) 혜장이었다 합니다.
다산과 혜장이 만난 후 걸명소를 혜장에게 보낼 무렵엔 다산이란 아호도 쓰지 않을 때였고
초의선사를 만나기도 전이었다 합니다.
다산이 초의선사를 처음 알게 된 건 초의선사께서 스스로 경학을 배우길 간청해서였는데
이때 초의선사의 나이 20세였다고 합니다.

다산은 혜장의 성품이 의외로 급하고 거칠 것이 없는 것을 보고
노자의 가르침 중   "부드럽기를 어린 아이 같이 하라"를 인용하여
아암이란 아호를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혜장과 다산의 만남으로 혜장은 역(易)에 관심이 깊던 터에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난 셈이고 다산은 혜장으로 인해
차와 불교에 심취하게 되는데 특히 차에 대해서는 혜장을 임금처럼 모셨다 합니다.
보은 산방으로 거처를 옮긴 다산은 차가 떨어지면
혜장이 심부름이나 하라고 붙혀준 색성이라는 제자에게
그 유명한 걸명소(乞茗蔬)를 지어 혜장에게 보냅니다.

걸명소를 받아 본 혜장은 도저히 기냥 있을 수 없어 부처님께 올리고자
짱박아 두었던 비상차를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다산의 장난으로 보낸 글이지만 글 내용이 너무나 정성스럽고 간절하며
혜장을 차의 임금으로 추켜 세워서라도 차를 한 줌 뺏어 먹겠다는
다산의 정다운 공갈도 장난이 아니죠.
혜장에게서 이미 육우의 다경(茶經) 3편을 빌려 읽고
꽃청자 홍옥다완을 쓰던 당의 시인 노동과 그의 칠완다가(七碗茶歌)를 알고 있었고
또 당의 재상을 지낸 한림학사 이덕유(李德裕 : 이찬황)의 차 마시는 버릇까지
익숙해 있었으니~~

보은산방에서 겨울을 보낸 다산은 이듬해 강진읍 내에 있는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2년 후 다시 강진 남쪽 귤동(橘洞)으로
거소를 옮겼다고 합니다.
주민들이 제공했는데 이유는 자녀들의 교육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맹모 3천이 아니라 맹사(師)3천인 셈이지요.
귤동은 해남 윤씨의 마을로 인연으로 따지자면 바로 정약용 선생의 어머니가
윤두서(尹斗緖)의 손녀로 해남 윤씨의 시조가 고산 윤선도가 아니던가요?
그렇다면 바로 다산의 외갓집 마을이 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차나무가 많은 다산(茶山)이라는 마을 뒷산에
초당을 짓고 그곳에 선생을 모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산 선생이 죄인이라 이름을 쓸 수가 없으므로 다산 선생이라
혹은 정다산이라 하고 부르게 된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답니다.

그는 이곳에서 빛나는 저술 활동을 하여 이름도 찬란한 동다기(東茶記),
다암시첩, 다신계 절목(茶神契 節目) 외에 걸명소 등 47편의 시를 남겼고
경세유표와 상토지(桑土志)에는 차나무 재배법까지 상세히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독 동다기만이 전해지지 않는다 합니다.

* 도(
?)는 도철의 도로서 재물을 탐하는 것을 도라 하고
음식을 탐하는 것을 철이라 하는데 보통 합해 도철이라 한다.
좌전의 문공 18년의 글에 일찌기 진운씨에게 재주없는 아들이 있어 음식을 탐하고
화유貨貝+有를 무릅써 천하가 도철이라 불렀다 하고
여씨춘추에는 말하길 주나라 솥에 도철의 문양이 있어 머리는 있고 몸이 없으니
사람을 먹는데 목구멍을 넘기지 않아 해가 그 몸에 미친다 했다.

* 노동(
盧仝, 약796-835)은 당나라 범양사람 옥천자로서
맹간의에게 차를 받고 보낸 시에 칠완의 내용이 나온다.
옥천자라 스스로 호하고 어려서부터 소실산에 은거하고 집이 빈궁한데서 힘들여 공부했다.
감로의 변이 있을 때 재상 왕애의 집에 유숙하였다가 왕애와 동시에 해를 입어 죽었다.
옥천자 시집이 있으며 그의 시는 자못 한유 맹교등의 찬사를 받았는데
시의 뜻도 뼈에 새길듯 하고 험한 바 있고 말은 유은했다한다.
감로의 변이란 감로가 내렸다고 속여 환관들을 꾀어 들여 척살하려 했는데
중도에 바람이 불어 장막으로 가린 무사들이 탄 말의 다리가 드러나 발각되어 실패하고
이로 조정관리파 들이 반격 당한 사건을 말한다.

* 기무경(
?毋?)은 대당신어에 나오는 우보궐(右補闕) 무경이니
그는 차가 하루 잠시 주는 이익이 있지만
척기가 정을 침하는 종신의 해가 있다고 경계한 말이 전한다.
기무경의 기무는 복성(復姓)이니 무경이라 간칭한 것이겠다.

* 이찬황(
李贊皇, 787-850)은 당의 재상을 지낸 이덕유(李德裕)로서
그는 조군사람인데 자는 문요(文饒) 길보자(吉甫子)라고 하며 찬황(贊皇)이란
호는 당 무종 때도 재상을 하며 지방세력을 깍고 황권을 높이는데 극력하고
재상을 한데 관계되어 보인다.
그 또한 멀리 혜산물을 길어 먹었으며 차에 감식안이 높았으며
차즙을 육식에 부어 시험해 본 일화가 전한다.

* 뜬구름이 갠 하늘에 효효하다(
浮雲??於晴天)함은
차경의 오지자(五之煮) 편에,
"또 맑은 하늘의 시원 명랑함에 뜬구름이 있는 거와 같아서...(又晴天爽朗 有浮雲)"라는
구절이 있으며 효효도 곧 이 편의 파파연(白+番 흴파)의 파파와 같은 말이다.
리리(離離)는 순자 비십이자편에 "사업에 노고하는데서는
려려연 리리연(離離然)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걸릴리의 뜻이 아니고
거리해 떨어져 있는 모습이다.
즉 위 두구절은 모두 아침에 일어나서 말차를 저어 마심에
찻물에 흰꽃이 구름처럼 일어나는 모습과 저녁에 깨어서 푸른찻물에
달이 비친모습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 세주(細珠)는 가루차를 탕에 붓고 저을때 이는 물방울이고
비설은 연자에 병단차를 갈기위해 연륜을 굴려 날리는 가루를 말한 것이며
산의 등불은 당 황보증의 육홍점 산인이 차따러 가는 것을 보내며 라는 시에
들밥에는 돌샘물 맑고 적적한 등불밤이란 싯구가 있다.

* 참새 참꽃하면 새중의 진짜 새 꽃중의 참된 꽃 뭐 이런 의미로 부르는게 아니라
그 용례가 단지 서로 비슷비슷해 통털어 부르기 쉬운 작은 새무리 중에
별난 한 종류를 말하고 철쭉 중에 독이 있는 여름철쭉과 구별해 식용하는
봄철쭉을 지칭해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엽차 또한 마찬가지로 특히 말차와 상대적 개념을 두고 부른 말이다.
청송 취죽처럼 차나무잎이 푸르니 녹차라 하는가 보다 하거나
또는 국화차 생강차등의 광의의 다른 차개념과 염두해
녹차라 구별해 말하는 순무식은 없을듯한데
그래도 문외한들을 차밭에 몰아 놓아보면 무조건 녹차,
녹차밭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녹차라하면 특히 증제불발효 처리로
가급적 엽록색을 살려 고정시킨, 즉 증청차(蒸靑茶)를 일컫는 것으로
외국의 증청차를 위주하는 곳에서 여타의 다른 발효차,
특히 서양의 홍차와 스스로 상대적 개념을 두고 또한 서양의 Green이란 유행어를
녹(綠)으로 한역(漢譯)하게 되면서 이 이미지를 따 선전하는 한 상품명에 가까운 것이
근간에 우리에게도 일컬어지기 시작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찻물이 붉기에 홍차라 부르는 것 그 또한 정작 서양에서는
가공된 발효차 잎이 검다해서 블랙티라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래서 상품 추구의 경향도 자연히 엽녹색을 위주로 대표해 나가게 되고
비록 불발효차라해도 자주싹이나 순은 녹차 상품에 장애요소로 고려되어
보통 취용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아는데 그러나 녹차의 일반 제법이
중국의 명대에 쪄서 만들었던 나개차 방식을 따름에 잎이 점차 자라 퍼지는데 따라
당연히 더 푸르져가는 것에 기초하므로 채취의 기계화와 대량생산에
유리함을 타고 만드는 것과 달리 여린 것을 귀히했던 옛날부터
차의 자주싹이나 순은 녹색보다 오히려 적지않은 존중을 받아 온 만큼
만약 따로 자주 것으로 골라 따모아 불발효차음을 만든다면
이는 녹차라 말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색의 개념도 다같이 사이색 이지만
녹(綠)이 황과 청의 간색(間色)인데 비해 자(紫)는 어두운 색과 붉은 색의 간색으로
개념도 상반되는 바가 있다 하겠다.
차의 자주싹은 고산의 척박한 땅에 잘 나며 그 기미도 박하다 한다.
즉, 초목이 가뭄에 메마르고 탄 색에 가까운 것 같다.
역시 차나무를 대나무 속에 키우거나 그늘을 지워 생장에 제한이 된 것과 비슷한
이치라 하겠다.
아(芽)는 가지의 눈에서 나는 것이고 순은 죽순처럼 땅에서 오르는 것이다.
대정기에 보면 건녕땅이 차세액이 가장 많은데 탐춘(探春). 선춘(先春). 차춘(次春),
자순(紫筍)의 네 품등이 있다고 했다.

* 한자9
韓子)는 당의 남양 사람 한굉으로 자가 군평, 덕종 때 중서사인을 했으며
대력십재자의 한 사람이기에 한자라고 한 것이다.
그의 잘 알려진 한식시에 푸른 연기가 다섯 제후의 집에 흩어 든다는 구절이 있다.

* 용단 봉병은 송나라 웅번의 선화북원공차록에 보면 개보말년(968-976)에서
태평흥국초(976-983), 그러니까 976년경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 하며
찻가루를 덩어리 한 것에 용봉의 무늬를 찍은 상품말차로서 단(團)은 경단으로
둥근 것이고 병(餠)은 호떡처럼 둥글 납작한 것인데 보통 용단과 봉병으로 만들었다.
명나라 초 홍무 24년(1391)부터 진상이 금지되고 엽차인 차아(茶芽)로 고쳐 올리게 했다.
여기서 내부(內府)에서 준 용단 봉병은 물론 아암이 준 것을 소문(疏文)의 형식에 따라
비유해 말한 것으로 호남에 엽전 모양의 돈차가 전한다하니 역시 이때
단병 형태의 말차를 만들어 주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이른바 전통차라하면 볶아 우려내는 불발효엽차 즉, 초청차(炒靑茶)를 알고 말하지만
이는 비록 근래 광범위하게 퍼지고 깊이 박혔을지 몰라도 결코 묵은 뿌리는 아니며
수천년 우리 차음 역사에 비하면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아주 근세에 비롯한 일로
그 대표자는 바로 초의선사이며 더우기 요근래 수십년에 증청불발효차와 같이
확산된 것으로 고려 도경의 글이나 조선중기 허준의 동의보감 등에 보더라도 쭈욱 말차였다.

* 채신지병(采薪之病)은 곧 예기 곡례편에 나오는 부신지우(負薪之憂)로
군주에게 자신이 나무하다가 몸살나서 지금 명에 응하지 못한다는 뜻의
자신을 낮추어 한말이다.
이것이 맹자에서는 채신지우(采薪之憂)라는 말로 나타나는데 우(憂)는 병(病)의 뜻으로
채신지우나 채신지병 그리고 부신지우가 다 같은 말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말들의 뜻을 살펴보면 시경 주남편의 여분시에,
여수의 큰 제방을 따라 그 졸가지 친다.
군자를 보지 못하니 마음주림이 아침끼니를 거른듯
여수의 큰 제방을 따라 그 움가지 친다.
이미 군자를 보니 나를 아주 버리시지는 않으셨다.
방황어는 꼬리 빨갛게 닿고 왕실은 불난집 같아
비록 불난듯 하여도 부모 대단히 가까이 계시네. 하였으니
시란 당사자의 입장에 따라 기본적 바탕위에 각자 각색해 언지 할수 있는 것이지만
여기서 채신지우란 곧 걸명소 첫구절에 다산이 유배지로 떠돌게 된 자신을
여인(旅人)이라 한 것과 통하여 다시 왕명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 수 있으며
대국적으로 보면 다산은 비록 추사처럼 거듭 쫓겨나고 영 버려지게 되다시피 한 것은 아니고
후에 유배에 풀려 조정에 돌아가 승지의 벼슬 까지 받았지만
결국 나무하다 든 병이 깊어진 셈이 된듯 오래 임무를 맡지 않고
그만 둔 것처럼 되었다 할 수 있겠다.

* 소(疏)는 성글게 틔운다는 뜻인데 곧 이로 사정을 통하게 한다는 뜻으로
후에 군왕에게 올리는 글을 소라했다.
손초가 차를 보내는 글에 역시 차를 의인화 해서 만감후(晩甘侯) 열다섯 사람을
시중하는 재각에 보낸다는 내용이 전한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선생

1762(영조 38) 경기 광주~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翁)·태수(苔?)·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 다산 정약용 선생의 주요 저서 5가지

다산 선생의 5가지 주요 저서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의 1표 2서와
아방강역고, 마과회통을 들 수 있다.
목민심서는 수령이 지켜야할 지침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공무원의 교육서이고,
경세유표는 행정기구, 관제, 토지제도, 조세제도등의 개혁을 논한 책이고,
흠흠신서는 형법서라고 할 수 있다.
아방강역고와 마과회통은 좀 생소한데
아방강역고는 조선의 역사지리서이고, 마과회통은 마진(홍역)에 대한
증세와 치료법을 기술한 책이다.
이 외에도 실학을 집대성한 500여권에 달하는 '여유당전서' 등이 있다.



* 1801년 정약용 강진 유배.
* 1805년 정약용 걸명소 지음.
* 1818년 정약용 유배에 풀려 돌아가게 되자 18명의 남은 제자들이
  다신계를 모음.  이 다신계절목에서 정약용이 볶은 엽차와 말차인 단차를 언급함.
* 1830년 정약용의 사문제자인 장의순이 초엽포차식(炒葉泡茶式)의 내용인
  명나라 장원의 차록을 전재했던 만보전서의 채다론을 지리산 칠불선원에서
  다신전으로 정서함.
* 1836년 정약용 졸.
* 1837년 장의순 18수의 연시로 된 동차송 지음.
* 1840년 김정희 제주 유배



<주注>
*소疏는 성글게 틔운다는 뜻인데 곧 이로 사정을 통하게 한다는 뜻으로 후에 군왕에게 올리는 글을 소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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旅人近作茶號밑食 / 떠돌이가 근래 차를 탐하는 도철을 해서

<주>
*정약용이 자신을 려인旅人이라 한 것은 단지 유배온 객지인 일뿐 아니라 처음 1801년 2월 신유사옥에 관련되어 경상도 장기로 귀양 갔다가 이해 9월 일어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전라도 강진으로 다시 유배소를 옮겨 동문밖 한 술집에 붙어 살다가 몇년뒤 같은 고을의 보은산방으로 주거를 옮기는 상황에서 이해 겨울 걸명소를 쓰게된다 그가 후에 유배에 풀려 돌아갈때 그의 제자들에 의해 구성된 차신계의 차신계절목 말미에 쓴 자술을 보면,
"나는 가경년간의 신유년(1801) 겨울 강진의 유배소에 이르러 동문밖의 술집에 접해 붙어 살았다 을축년(1805) 겨울 보은산방에 깃들고 병인년(1806) 가을엔 이학래의 집으로 옮겨 붙어 살았으며 무진년(1808) 봄에야 차산에 붙어 살았는데 통계가 귀양살이 18년에 그 읍에 거주한 것이 팔년이고 그 차산에 한 것이 십일년인데 비로소 오던 처음에는 백성이 모두 두려워해 문을 부수고 담장을 허물며 편안히 접하기를 허락치 않았으며 이를 맞던 때에 그 좌우가 된 사람은 손씨 황씨 등의 네사람이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면 읍사람 이는 더불어 우환을 같이 한 자들이다 차산에서의 여러 사람들은 오히려 이는 좀 평안해 진 뒤에 서로 아는 자이다 읍인을 어찌 잊을수 있으랴 이에 차신계 규약 말미에 또 읍사람 여섯 인원을 적고 뒷날 징거하는 글로 한다 또 이 여러사람이 차신계일에 응해 한마음으로 돌봄 이는 나의 남기는 부탁이다 어찌 소홀할수 있으랴.
ㅡ.곡우날에 여린 차를 취해 배화해서(*볶아 불말리는 것)한근 만들고 입하 전에 늦은차 를 취해 떡을 두근 만든다 위 엽차 한근 병차 두근을 서찰과 동봉한다.
ㅡ....(*생략)...
ㅡ......
ㅡ......
ㅡ...... "
*도(號밑食)는 도철의 도로서 재물을 탐하는 것을 도라 하고 음식을 탐하는 것을 철이라 하는데 보통 합해 도철이라 한다 좌전의 문공 18년의 글에 일찌기 진운씨에게 재주없는 아들이 있어 음식을 탐하고 화유貨貝+有를 무릅써 천하가 도철이라 불렀다 하고 여씨춘추에는 말하길 주나라 솥에 도철의 문양이 있어 머리는 있고 몸이 없으니 사람을 먹는데 목구멍을 넘기지 않아 해가 그 몸에 미친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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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中妙벽 全通陸羽之三篇 兼充藥餌
글가운데 묘법은 육우의 차경 세편을 모두 통했고 약먹이도 겸하고 있습니다.

<주>.
*벽은 璧자의 밑에 玉없는 법 벽.
*육우(약733-약804)는 전차박사煎茶博士로 불리며 상 중 하 삼편 열조목의 차경을 지은 당의 복주(지금 호북성 천문현) 사람으로 자는 홍점이고 일명은 질疾이며 자는 계자季疵이며 자칭 상저옹이라 하고 또 다른 호로는 동강자라 하며 여시인 이계란 중 교연과 자못 우호가 있었다.

출처 : 漢詩 속으로
글쓴이 : 巨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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