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무소유길>

차보살 다림화 2014. 5. 1. 13:01

 

춘수(春瘦)

- 봄을 앓다

 

 

올봄에 만난 가장 아름다운 매화는 법정 스님의 매화였다. 가장 아름다운 길도 송광사 불일암 가는 길인 무소유길이었다. 고려에서 조선 초까지 16 국사를 배출한 송광사이기에 조계산의 경관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날이 꽃철이 다른지라 송광사 경내에서 오히려 매화다운 매화를 만난 셈이다. 송광사 일 번지인 광원암에서 진각국사의 부도를 참배했다. 그의 다풍(茶風)을 음미하며 호젓한 다실에서 차 한 잔을 맛본 뒤, 이웃에 있는 불일암으로 들어갔다.

작은 개울을 건너는 나무다리에서부터 법정 스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탁한 마음을 떨어버리고 맑은 마음을 갖고 싶은 이들을 위하여 디자인한 길이다. 법정 스님이 직접 그 길을 닦았을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길가에 <무소유길>이란 나무 편액이 서 있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라고 새겨 있다.

전나무 울창한 흙길을 걷자면 돌계단이 나오고, 다음은 키 큰 낙엽수들의 울퉁불퉁한 뿌리가 발판이 되어준다. 이어서 대나무 숲길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데. 참으로 호젓하고 청량한 길이 열린다. 다시 무소유 길의 판화 글을 하나 마주한다.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간소함에 있다.”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나무 숲길을 무심으로 걸을 수 있게 된다. 몇 굽이 울창한 대숲 길을 돌아가면 대나무로 엮은 낮은 대문을 만난다. 대문은 열려 있고 참배 시간은 오전 8시에서 4시까지로 쓰여 있다. 깊은 산 속 동화 같은 팔작지붕의 집 한 채, 그 앞에 작은 채소밭, 옆의 작은 집은 요사채인 듯하다. 낮은 기와 담장 옆에 화사한 꽃나무가 먼저 반기는가 했더니 선뜻 언덕 위로 고개를 돌리게 한다. 거기 만발한 매화가 오후 햇살을 받고 빛나고 있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많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 법정 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마당의 꽃밭에는 수선화와 다른 알뿌리 꽃들이 색색이 줄지어 피고 아기자기하게 어울려 재롱을 떠는 것 같았다. 스님의 방식으로 그렇게 이름표를 달고 꽃을 심었으리라 싶었다. 매화나무로 가기 전에 예쁜 꽃밭을 살피고, 한 단 높은 불일암 편액이 붙은 스님의 전각 앞마당으로 올랐다. 샘물이 나오는 곳에 평상이 차려져 있다. 주전자의 물을 따라 마실 수 있도록 물 잔도 가지런히 놓여 있다. 스님이 주시는 차 한 잔을 받들 듯이 맹차 한 잔으로 갈증을 달랬다. 평소 스님이 사랑하시던 후박나무 옆에 스님의 유골이 묻혀 있다. 잠시 묵념을 올린 후 스님이 만든 나무 의자에 놓인 방명록과 사진에도 고개 숙였다. 매화나무 꽃그늘 아래 앉아서 방명록에 몇 자 쓰면서 매향에 젖자니 스님의 가사 자락에서 매화 바람을 느꼈던 옛날이 그려졌다. 불일암에 계실 때 매화를 심고 봄마다 매화가 피는지를 살폈다고 하였기에 나도 스님의 눈길 따라 살펴보았다. 아직 큰 나무는 아니지만, 그 나무를 심고 바라보고 했던 스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 더욱 정감이 갔다. 한 나무에는 백매와 홍매 가지가 함께 달려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여 바라보고 어루만져보기까지 했다. 옆으로 난 언덕길로 올랐다. 16 국사 중의 한 분이었던 자정 국사 부도가 옛 모습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불일암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감회에 젖었다. 자정 국사가 창건한 암자가 폐사된 후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가 1975년에야 법정 스님이 이 자리에 불일암을 중건하였다고 적혀 있다.

아쉽게도 발걸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문 앞에서 뒤로는 송광사로 돌아가는 길이 있는데, 우리는 올라온 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송광사로 가는 길로 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은지라 그럴 수 없었다. 오래전에 법정 스님이 송광사 수련원장 역을 맡고 계시던 시절, 스님의 주도하에 열린 출가 45의 체험을 함께했던 때가 그리웠다. 아마도 불임암에서 그 길로 매일 걸어서 송광사로 내려왔으리라 생각하니 그 길을 걷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와서 불일암에서 광원암 뒷길로 송광사 경내까지 내려가는 길을 걸어보리라 다짐하며 발길을 돌렸다.

봄은 다시 오고, 꽃이 피고 새잎은 돋는데, 한 번 간 사람은 다시 오지 않는 법. 내게 개나리 꽃가지를 꺾어주던 그 사람도, 또 그 앞사람들도. 어느 산모롱이를 지날 때 마주친 작은 묘비가 생각났다. 어린아이의 묘인 듯 부모의 애절한 심정이 새겨진 듯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 부모는 봄마다 가슴이 메리라. 이 봄을 함께 누릴 수 없는 그 부모를 생각하니 눈물이 날 듯했다. 매화나무를 심어놓고 이른 봄마다 매화가 피는지를 살피며 나무 주위를 살폈다는 법정 스님이었다. 매화꽃망울이 맺히던 이른 봄날에 찬바람을 뿌리듯 떠나신 법정 스님. 올봄이 4주기를 맞는 셈인 듯하다. 매화꽃은 아는지 모르는지 화사하기만 하다. 아프게 봄날을 피워낸 매화는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봄꽃이 피고 지듯 인생이 춘몽 같지만, 꽃잎이 떨어진대도 아쉽거나 서럽다고 할 것도 없으리라.

40살이 넘은 내 조카는 꽃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놓고는 나도 이제 늙었나? 이런 것이 좋은 걸 보면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나는 철없이 늙었나? 청춘의 마음으로 산다지만, 사실 청춘 때는 봄을 맞고 보내는 마음이 이리 애틋하지 않았다. 정말 늙었나 보다. 한 해마다 다르고, 하루하루가 새롭다. 이런 마음이 춘수(春瘦)가 아닐까. 생이 마르듯 봄을 앓는 마음이 이런 것일까. 언젠가 내가 떠난 뒤도, 어느 꽃길에서 나를 생각할 자가 있을지. 모든 길이 아름답지만, 지난 사람의 사연이 녹아 있기에 그 길이 더욱 아름답다.

무소유길에서 만난 나머지 글 하나,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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