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광원암 가는 길

차보살 다림화 2014. 6. 4. 13:57

 

진각국사의 원대한 다풍을 엿보다

광원암에서

 

 

 

 

조용했던 겨울나무에서 푸른 잎을 불러낸 것은 봄바람이었던가. 나를 여기까지 불러낸 것도 여기저기 산 능선을 타고 흐르면서 연둣빛 물감을 번지게 했던 그 바람 소리였나 보다. 선암사와 화엄사의 홍매 이야기를 등 뒤로만 듣고 만 어느 날, 송광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번에는 큰절에 들지 않고 광원암으로 먼저 오르기로 한다. 매표소에서 조금 오르면 청량각앞에서 두 길로 나뉜다. 계곡 왼편으로 난 자연한 흙길을 밟는 맛이 청량하다. 언젠가 송광사에서 내려오면서 다음엔 저 길로 오르리라 하고 생각했던 그 길이다. 나무에는 햇잎이 파릇이 돋기 시작하고 곳곳에서 매화 향도 번지는 날이다. 십여 분 오르면 된다지만 조금은 가파른 숲길을 올라야 한다. 그러나 송림과 편백림이 우거진 길이어서 잠깐의 노고는 쉽게 씻어진다. 불일암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났지만 진각국사의 부도를 먼저 만나고 싶어 광원암으로 오른다.

 

 

 

 

 

 

 

 

 

 

 

 

.

 

 

흙 계단을 올라 진각국사의 승탑 앞에 다가선다. 복련과 앙련이 맞붙어 몸돌을 받치고 있는 아담하고 야무진 승탑이다. 날렵한 팔각 지붕돌 위의 상륜부에서 기단까지 온전히 남아 풍진세월을 지켜왔다. 몸돌 팔각 면마다 양각으로 부조된 동물상과 승상이 조각되었다. 정면에 진각국사 원조지탑이라고 희미하게 새긴 글자가 보였다. 탑 아래에는 두 계단으로 된 단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아마도 다례재를 올리도록 마련한 것이지 싶다. 언덕 아래 주변에는 차나무를 둘러 심었다. 차나무 밭 언덕 위의 높은 곳에 승탑이 있다. 올라오면서도 절집 주변에 차나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지금의 스님도 진각국사가 각별히 차를 가까이 했으며 절창인 다시도 많았다는 것을 알고 차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생각을 해봤다. 마음으로 달인 차 한 잔을 올리고 승탑을 참배하였다.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사리탑은 그 자리에서 창건 이래 수차례의 중건을 거치고 전란을 거쳐 훼철될 때까지 법맥을 이어갔던 후학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승탑의 표면에 쌓인 세월의 이끼가 차라리 아름다운 문양으로 보인다. 국사의 말없는 법문인양 새겨진 글자나 되는 것 같아 숨겨진 비밀의 코드라도 찾을 듯 들여다보았다. 바위 누대에 앉은 듯 언덕 아래를 내려다본다. 광원암 너머 맞은 편 산 너머 먼 하늘을 바라며 국사의 <인월대(隣月臺)>를 떠올린다.

 

 

 

이 누각에서 부도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쉬기도 하고 내려와서 쉬어갈 수도 있는

솔바람이 말의 뜻을 음미하기도 한다.

 

부도 앞 단에서 내려다 본 광원암

 

 

 

백제 무령왕 때 창건했다는 광원암은 송광사의 1번지다. 고려 때 진각국사(眞覺國師, 1178~1234) 혜심이 머물면서 수행자의 필독서인 <<선문염송집>>을 완성한 뒤, 그 책이 널리 유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광원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선사는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관에 들어갔으나 홀어머니의 병간호 때문에 귀향했다. 어머니의 49재 때 보조국사 지눌과 인연이 되어 출가했다. 그는 어는 절에 머물건 <<선문염송집>>을 집필하고 밤에는 참선하고 새벽에는 염송에 나오는 게송을 목청 높여 낭랑하게 외는 것을 일과로 삼았단다. 그로 하여 구례 사성암에 머물 때는 산 아래 읍민들의 잠을 깨울 정도였단다. 어찌 아니 그러랴. 바로 보조 지눌이 스승이었으니 스승에게서 본대로 행했지 싶다. 보조가 광양 백운산에 머물 때 진각은 선승 몇 사람과 스승을 뵈러 가는 길에 산 밑에서 쉬는데, 암자와의 거리가 1천여 보나 되는데도 암자에서 시자 부르는 소리가 들여왔단다. 이때 진각은 게송(偈頌) 하나를 지었다. <아이 부르는 소리 송라의 안개에 울려 퍼지고 / 차 달이는 향기 돌기 바람에 전해온다네> 이 시절에는 주로 떡차를 가루 내어 달였으니 차 달이는 동안 차향은 사방으로 퍼졌을 것이다. 선정의 향기처럼 차향이 바람에 실려 왔으리라. 보조도 틈틈이 차를 마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비록 차시를 많이 남기지는 않았지만,

 

 

 

 

 

 

 

 

진각은 후에 조주의 무()자 화두로 가지고 보조국사와 선문답을 나눈 끝에 인가를 받았다. “내 이미 너를 얻었으니 너는 마땅히 불법으로써 자임(自任)하여 본원 수선(修禪)()를 폐하지 말라.” 하며 은밀한 유지를 받고 33세에 보조가 입적한 뒤 수선사 제2세 법주가 되었다고 한다.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고 많은 다시를 남긴 걸로 보아 틀림없이 조주와 철감선사의 다맥(茶麥)이 그로 인하여 또 이어졌으리라. 진각국사는 광원암에서 월남사로 가서 입적하였다고 한다. 국사는 1234년에 입적했는데 고려 고종은 탑호를 원조지탑(圓照之塔)으로 내렸다. 진각국사탑비명은 이규보가 지었는데, 비명에는 그 위치를 광원사(廣遠寺) 북록(北麓)’, 광원암 뒤의 북쪽 언덕이라고 적혀 있다 한다. 말 그대로다. 탑비는 전남 강진군 월남사지에 세웠는데 비신은 파손되고 하반부만 남아 있다. 현재 보물 제313호로 지정되었다.

오랫동안 잡풀에 덮여 있던 절터를 1992년 지금의 현봉 스님께서 오랜 염원을 다하여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햇살은 화사하여 눈부시는 날, 살랑이는 바람만이 염송인 냥 귓전을 맴돈다. 북쪽 뒤 언덕으로 오른다. 조사당 앞 작은 홍매가 어여쁘게 반긴다. 언덕 바로 밑에는 조촐한 누각이 있어 나그네가 쉬어갈 만한 쉼터가 된다. 현봉 스님의 배려인 듯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해우소의 갤러리를 관람하게 된다.

조경오온助見悟溫 이라고 세로 쓴 편액이 안쪽 신발장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선여자 실이나 선남자 실을 찾아 볼 일을 보게 한다.

아름다운 해우소 갤러리다.

 

 

 

 

진각국사의 원대한 다풍을 그리다

  -광원암에서

 

 

조용했던 겨울나무에서 푸른 잎을 불러낸 것은 봄바람이었던가. 나를 여기까지 불러낸 것도 여기저기 산 능선을 타고 흐르면서 연둣빛 물감을 번지게 했던 그 바람 소리였나 보다. 선암사와 화엄사의 홍매 이야기를 등 뒤로만 듣고 만 어느 날, 송광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번에는 큰절에 들지 않고 광원암으로 먼저 오르기로 한다. 매표소에서 조금 오르면 청량각앞에서 두 길로 나뉜다. 계곡 왼편으로 난 자연한 흙길을 밟는 맛이 청량하다. 언젠가 송광사에서 내려오면서 다음엔 저 길로 오르리라 하고 생각했던 그 길이다. 나무에는 햇잎이 파릇이 돋기 시작하고 곳곳에서 매화 향도 번지는 날이다. 십여 분 오르면 된다지만 조금은 가파른 숲길을 올라야 한다. 그러나 송림과 편백림이 우거진 길이어서 잠깐의 노고는 쉽게 씻어진다. 불일암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났지만 진각국사의 부도를 먼저 만나고 싶어 광원암으로 오른다.

백제 무령왕 때 창건했다는 광원암은 송광사의 1번지다. 고려 때 진각국사(眞覺國師, 1178~1234) 혜심이 머물면서 수행자의 필독서인 <<선문염송집>>을 완성한 뒤, 그 책이 널리 유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광원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선사는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관에 들어갔으나 홀어머니의 병간호 때문에 귀향했다. 어머니의 49재 때 보조국사 지눌과 인연이 되어 출가했다. 그는 어는 절에 머물건 <<선문염송집>>을 집필하고 밤에는 참선하고 새벽에는 염송에 나오는 게송을 목청 높여 낭랑하게 외는 것을 일과로 삼았단다. 그로 하여 구례 사성암에 머물 때는 산 아래 읍민들의 잠을 깨울 정도였단다. 어찌 아니 그러랴. 바로 보조 지눌이 스승이었으니 스승에게서 본대로 행했지 싶다. 보조가 광양 백운산에 머물 때 진각은 선승 몇 사람과 스승을 뵈러 가는 길에 산 밑에서 쉬는데, 암자와의 거리가 1천여 보나 되는데도 암자에서 시자 부르는 소리가 들여왔단다. 이때 진각은 게송(偈頌) 하나를 지었다. <아이 부르는 소리 송라의 안개에 울려 퍼지고 / 차 달이는 향기 돌기 바람에 전해온다네> 이 시절에는 주로 떡차를 가루 내어 달였으니 차 달이는 동안 차향은 사방으로 퍼졌을 것이다. 선정의 향기처럼 차향이 바람에 실려 왔으리라. 보조도 틈틈이 차를 마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비록 차시를 많이 남기지는 않았지만,

진각은 후에 조주의 무()자 화두로 가지고 보조국사와 선문답을 나눈 끝에 인가를 받았다. “내 이미 너를 얻었으니 너는 마땅히 불법으로써 자임(自任)하여 본원 수선(修禪)()를 폐하지 말라.” 하며 은밀한 유지를 받고 33세에 보조가 입적한 뒤 수선사 제2세 법주가 되었다고 한다.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고 많은 다시를 남긴 걸로 보아 틀림없이 조주와 철감선사의 다맥(茶麥)이 그로 인하여 또 이어졌으리라. 진각국사는 광원암에서 월남사로 가서 입적하였다고 한다. 국사는 1234년에 입적했는데 고려 고종은 탑호를 원조지탑(圓照之塔)으로 내렸다. 진각국사탑비명은 이규보가 지었는데, 비명에는 그 위치를 광원사(廣遠寺) 북록(北麓)’, 광원암 뒤의 북쪽 언덕이라고 적혀 있다 한다. 말 그대로다. 탑비는 전남 강진군 월남사지에 세웠는데 비신은 파손되고 하반부만 남아 있다. 현재 보물 제313호로 지정되었다.

오랫동안 잡풀에 덮여 있던 절터를 1992년 지금의 현봉 스님께서 오랜 염원을 다하여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햇살은 화사하여 눈부시는 날, 살랑이는 바람만이 염송인 냥 귓전을 맴돈다. 북쪽 뒤 언덕으로 오른다. 조사당 앞 작은 홍매가 어여쁘게 반긴다. 언덕 바로 밑에는 조촐한 누각이 있어 나그네가 쉬어갈 만한 쉼터가 된다. 현봉 스님의 배려인 듯하다.

흙 계단을 올라 진각국사의 승탑 앞에 다가선다. 복련과 앙련이 맞붙어 몸돌을 받치고 있는 아담하고 야무진 승탑이다. 날렵한 팔각 지붕돌 위의 상륜부에서 기단까지 온전히 남아 풍진세월을 지켜왔다. 몸돌 팔각 면마다 양각으로 부조된 동물상과 승상이 조각되었다. 정면에 진각국사 원조지탑이라고 희미하게 새긴 글자가 보였다. 탑 아래에는 두 계단으로 된 단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아마도 다례재를 올리도록 마련한 것이지 싶다. 언덕 아래 주변에는 차나무를 둘러 심었다. 차나무 밭 언덕 위의 높은 곳에 승탑이 있다. 올라오면서도 절집 주변에 차나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지금의 스님도 진각국사가 각별히 차를 가까이 했으며 절창인 다시도 많았다는 것을 알고 차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생각을 해봤다. 마음으로 달인 차 한 잔을 올리고 승탑을 참배하였다.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사리탑은 그 자리에서 창건 이래 수차례의 중건을 거치고 전란을 거쳐 훼철될 때까지 법맥을 이어갔던 후학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승탑의 표면에 쌓인 세월의 이끼가 차라리 아름다운 문양으로 보인다. 국사의 말없는 법문인양 새겨진 글자나 되는 것 같아 숨겨진 비밀의 코드라도 찾을 듯 들여다보았다. 바위 누대에 앉은 듯 언덕 아래를 내려다본다. 광원암 너머 맞은 편 산 너머 먼 하늘을 바라며 국사의 <인월대(隣月臺)>를 떠올린다.

 

우뚝 솟은 바위산은 몇 길인지 알 수 없고 / 그 위 높다란 누대는 하늘 끝에 닿아 있네 /

북두로 길은 은하수로 밤차를 달이니 / 차 연기는 싸늘하게 달 속 계수나무를 감싸네

巖叢屹屹知幾尋(엄총흘흘지기심) 上有高臺接天際(상유고대접천제)斗酌星河煮夜茶(두작성하자야차) 茶煙冷鎖月中桂 (다연냉쇄월중계)

차시茶詩)로서 최고의 절창으로 알고 오래전부터 애송하고 있다는 정찬주씨로부터 듣고 나도 마음에 담고 있는 시 중의 하나다. 바로 하늘 밑 높은 바위에서 차를 달이니, 손만 뻗으면 북두를 잡아 은하수를 뜰 수 있었으리라. 호방한 깨달음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은하수와 북두가 뜨지 않더라도 달이 뜰 때마다 달을 에워싸는 차 연기가 그려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도 국사를 그리며 밤차를 우릴 때가 가끔 있다. 매화 철에 섬진강가에서 때마침 보름달이 떠올랐던 초저녁에도 은하수 안 강물을 떠서 모래밭에서 떡차 한 편을 끓이면 차 연기가 올라 구름에 달 가듯 하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인월대>를 말하면서.....

소나무 뿌리에서 이끼를 털어내니 / 샘물이 영천에서 솟구친다. / 상쾌함은 쉽게 얻기 어렵나니 / 몸소 조주선(趙州禪)에 든다.”끽다거(喫茶去)로 유명한 조주임에 진각국사도 다선일미에 젖었으리란 것이 쉬이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게 된다.

국사가 임종하는 날 제자 마곡에게 내가 몹시 바쁘다.” 하니 못 알아들었다. 제자에게 다시 내가 몹시 아프다.”라고 했으나 또 못 들어서 결국 임종게를 남기고 조용히 앉은 채로 입적했다고 한다. “뭇 고통이 이르지 않는 곳에 / 따로 한 세계가 있나니 / 그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 아주 고요한 열반문이라 하리라.” 차와 시를 선으로 승화 시킨 흔적을 보여주는 차시의 하나라고 보아진다.

이 세상 마지막 하직할 때 이런 시를 암송이라도 할 수 있으면 더는 바랄 것이 없으리라. 부도를 참배한 뒤, 우리는 주인도 없는 다실에서 차를 우려서 마셨다. 잠시 시간을 잊고 조주선은 아니래도 어느 세상에서 와서 어느 세상에 있는지도 잊을 수 있는 시간을 누렸다. 은하수 흐르는 하늘의 북두칠성을 본지가 하도 오래여서, 꿈 같이 사무치게 별만이 반짝이던 어느 하늘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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