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경묘
천하의 명당자리란
오월 마지막 주에 강릉 지방을 다녀왔다. 준경묘는 태조 이성계의 4대 조인 목조 이안사의 아버지의 묘라 해서 조선의 뿌리를 이해하고자 전주역사박물관이 기획한 답사였다. 역사적 이해보다도 예부터 관동팔경을 유람하던 사람들이 모두 강릉지방을 거쳐야 했고 실지로 강원도의 풍광은 남다른 데가 있기 때문에 오랜만에 새롭게 유람을 한 셈이었다. 우리나라 고택의 모범이란 ‘선교장’과 이율곡이 탄생지인 ‘오죽헌’도 둘러보았다. 오죽헌은 안 보던 사이에 성역화 하여서 본래의 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선교장도 그렇고 오죽헌도 뒷산의 수목이 울창하여 더없이 흔쾌한 기분이 들었다. 세월 따라 유적의 외관도 많이 바뀌었지만 선교장의 뒷 언덕의 소나무 길은 오래 걷고 싶은 길이었고, 오죽헌에 있는 율곡 소나무와 배롱나무는 몇 백 년 동안 그 자리에서 유적이 품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사연을 안고 있는 듯하여 감회가 깊었다.
우리나라 묘는 풍수를 떠나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 명당의 자리에 가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듯하였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두타산 기슭에 있는 준경묘. 여기는 ‘백우白牛금관金棺’설화가 전해진다. 어느 정도 가파른 길을 힘겹게 올라 흙길로 들어서자 울창한 소나무 숲이 예사롭지 않았다. 온몸의 땀도 한꺼번에 씻기우고 숲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한아름의 금강소나무군들이 이어지는 오솔길을 걸어서 준경묘에 닿았다. 사방이 울창한 숲으로 감싸인 가운데의 넓은 터가 비었고 높은 곳에 제각과 묘가 보였다. 입구에 하늘 높이 자란 금강소나무들에게 하나씩 이태조의 4대조까지 소나무 이름을 붙여 불린다.
목조 이안사가 아버지인 이양무의 묘자리를 찾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나타나 한 곳을 가리키며 “이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 했다. “이곳이 제대로 발복(發福)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百)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시신을 금관(金棺)에 안장하여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집고 창업주가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소 백 마리는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았다.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가 될 수 있고, 귀리짚은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 처가에 간 이안사는 밭갈이 할 일이 있다며 흰 소를 잠시만 빌려 달라고 하여 소를 끌고 노동(盧洞)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처가에서 빌린 흰 소를 잡아서 재물로 사용하고, 부친을 넣을 관은 귀리짚으로 대신하여 아버지의 장사를 치렀다. 이안사의 기지도 참 대단했다는 생각이다. 과연 창업주의 조상이 될 자질이었던가. 전주이씨 실묘로는 남한에서 최고 시조묘임을 증명했다고 한다. 고종 36년 (1899)에 그 동안 실(失)묘(墓)하였던 이곳 이양무의 묘와 이곳에서 4키로 정도 떨어진 하사전리에서 그의 부인 묘를 찾아 대대적인 묘역 정비공사 후 이양무의 묘를 준경묘(濬慶墓)라 하고, 그의 부인 묘를 영경묘(永慶墓)로 정하였다.
산기슭에서 1.8키로 정도 된다기에 쉽게 생각했지만, 초입의 길이 워낙 가파른 길이어서 힘들었다. 그러나 한 고비 오르자 평지의 숲길이 나타나고 하늘로 쭉 뻗은 장 생긴 소나무를 바라보는 맛이 힘든 허리를 가볍게 했다. 산책하듯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소나무들에 감탄사를 보내다 어느덧 너른 평지가 나타났다. 묘에 참배한 뒤에 비각을 들여다보았다. 오목대의 목조대옹 구거유지바와 같은 글씨의 묘비가 있었다. 묘를 옆으로 난 숲길을 돌아 뒷산으로 올랐다. 숲해설사의 안내로 풀더미 우거진 길을 한 마장 쯤 올랐다. 주로 궁궐의 재목으로 쓰인다는 나무들이 있는 곳이고, 얼마 전 숭례문 복원에 쓴다고 베인 소나무 자리를 보았다. 일반인의 도벌을 금한 그곳에는 정말 잘 생긴 금강소나무 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같이 서 있는 것으로도 소나무의 기운을 함께 하는 것 같았다. 명당이었으니 뒷산 울창한 송림이 명당의 배경임은 두말 할 것이 없었다. 원시림 상태로 우거져 있는데 특히 이곳 송림은 황장목이라 하며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사용하였단다. 몇 십 년 자란 황장목이 베인 그루터기를 보았는데. 해설사에 의하면 나이테의 색깔이 다른 나무와 다르다고 한다. 다른 곳과 달리 강원도의 기후에서만 그런 황장목이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추위와 바람에 시달리면서 햇볕을 찾아 올라간 나무들이어서 자라는 동안 쌓인 정기가 빼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답사에서는 강원도의 소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길이었다. 새 기운으로 충전하기에 이런 숲만 한 것이 다시 있을까 싶다. 문화유적이란 물상은 그와 함께 해온 지킴인 나무들이 말없는 해설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의미를 더하는 것 같았다.
현대에는 자동차가 들 수 있는 곳이 아닌가. 그 옛날의 명당자리도 이제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닦이어 있어, 여전히 명당의 칭호를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첩첩 깊은 산 같은 준경묘에도 필요한 제물이나 노인들도 실어 나를 수 있는 최소한의 길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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