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기억
조윤수
늦은 밤, 집에 돌아오자마자 맛부터 보았다. 순무 물김치. 심심한 국물맛과 독특하게 알싸한 맛이 입 안에 엉겼다. 강화도 문학기행 때 강화 순무 김치를 한 통 사 온 거다. 김치 담는 일을 감당하지 못해 김치를 담그지 않는지가 오래다. 그래도 선물 들어오는 게 많아서 집에 김치가 떨어지는 날이 별로 없다. 내 손에 오기까지 김치의 과정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가득해진다. 음식을 담아준 손길을 기억하며 사람에 대한 그리움마저 먹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과 같은 배추김치를 먹게 된 지는 19세기가 되어서라 했던가. 그전에는 무를 더 많이 먹었고, 오히려 무김치는 약용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단다. 조선의 역대 임금도 대부분 그랬다고 한다. 특히 영조임금은 김치를 약으로 먹었을 정도였다.
강화의 순무 김치라고 하면 강화도령인 철종 임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선대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도령은 강화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런데 헌종이 후사가 없자 철종은 갑자기 농부에서 원하지 않는 임금이 되어야 했다. 조선 후기부터 왕자가 귀해지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국운이 쇠해지고 있던 혼란한 시기였다. 사랑하는 강화 처녀와 결혼하여 오순도순 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그 처자와 헤어져야 했다. 철종은 궁에 들어와서도 강화 순무 김치를 좋아했단다. 순무 김치를 먹으면서 강화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순무 김치를 먹을 때마다 나 또한 강화의 기억이 떠오르는데 철종 임금은 오죽했으랴.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였다. 고려와 조선을 통하여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조정이 피난했던 곳이다. 강화 섬 둘레의 요새마다 진(陣)과 돈대가 많다. 초지진에 올라보니 잿빛 바닷바람은 우중(雨中)임에도 시원했다. 평화롭고 그 잔잔한 바다가 그토록 피비린내 나는 전장일 때가 있었던가 싶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일본 군함 등 근세 외침에 맞서서 줄기차게 싸웠던 격전지였다. 수문장처럼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가 어찌나 멋이 있던지, 진을 보초 서는 전사의 혼이 서린 듯 당당하게 보였다. 갑곶돈대는 고려가 1232년부터 1270까지 근 40여 년 동안 몽골과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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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서울에서 직장 생활할 때 동료와 강화 전등사를 방문했지만, 어느 곳인지 기억이 가물거릴 뿐이다. 아치형의 성문 앞에서 하얀 모자를 쓴 젊은 날의 초상 한 장이 남았는데, 이번에 보니 그곳이 삼랑성 문이었다.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기에 인근의 마니산에 천제단이 세워진 것인가 싶다. 바로 그 삼랑성 안에 전등사가 있다. 아마도 국내의 사찰 중에 가장 이른 시기에 지어진 절일 것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진종사라 했는데, 고려 충렬왕의 정화공주가 경전과 옥 등을 헌납한 뒤로 전등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단다. 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史庫)를 지키는 호국의 임무도 담당하였다
사찰이 지닌 세월의 흔적은 경내의 거목들이 말하고 있다. 가물던 차에 온종일 비가 내렸지만, 그렇게 세차게 내리지 않아서 우산을 받고 다니는 것도 즐거웠다. 짙은 추색(秋色)에 덮인 전각 처마와 어울린 나뭇가지들이 어찌나 새뜻하고 아름다운지 눈길이 닿는 곳마다 감탄사를 토했다. 역사의 풍상을 기억하는 듯 비에 젖은 거목들의 옹이에서 무언가 간절한 이야기가 터질 것 같아 우러러 살펴진다.
오래전부터 들었던 전등사 나부상(裸婦相)의 전설. 대웅전에 들기 전에 먼저 전각의 네 귀퉁이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나부상을 찾았다. 웅크리고 앉아 두 손으로 처마공포를 받치고 있다. 긴 세월 나부는 얼마나 많은 목탁소리와 스님의 염불 소리를 들었을까. 이제는 내려와 옷을 입고 여염집 부인으로 살아도 좋을 만도 할 텐데…. 벌써 깨달은 바 있어서 내려올 필요도 없어졌을까. 그대로 편안하여 그곳을 찾는 중생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대웅전 앞에 커다란 나부상 조각 작품이 보초처럼 앉아 있다.
나부상의 전설은 이미 많이 퍼지고 그에 관한 글도 많아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옛날 대웅전을 지은 대목수가 마을의 주막집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삯을 받으면 그 여인에게 다 맡겼다. 나중에 혼인하면 집도 작만 하고 잘살아보자는 뜻이었겠다. 그런데 얼마간 지난 다음에 그 여인은 다른 사람과 바람이 나서 도망쳐버렸단다. 목수는 분을 참지 못하여 그 여인을 욕되게 벌하자는 생각에서 벗은 몸으로 대웅전 처마를 받치고 있도록 한 것이란다. 몇 세기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 나부상은 전등사의 보물이 되어서 오는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그 나부상 앞에서 사랑의 맹세를 하면 절대로 헤어지는 일이 없으리라. 그 긴 세월 말하는 뜻이려니, 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그 맛, 예술이다!’ 독특하게 맛있는 음식에 주는 감탄이다. 소박하게 맛있는 강화 순무 김치를 아껴서 먹었다. 강화의 기억까지 새록새록 맛보며. 맛이 곧 멋이던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추억에서 멋까지 풍겨 나오니 예술의 근원이 맛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순무 김치는 그 어느 해 석모도 보문사에서 취했던 낙조를 떠올리고, 별이 쏟아지는 밤바다를 되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음식이란 지역의 풍토에서 자란 재료와 고유한 손맛에 따라 특유한 맛이 나오게 된다. 같은 지구촌이라도 각 나라마다 사람의 생김새와 생활 문화가 다르다. 그 지역의 자연 환경과 풍토에서 나오는 재료의 지닌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역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묘한 개성과 차이가 있을 뿐, 그 다양성이 어우러지면서 멋진 예술이 탄생했으리라.
사찰의 공양 간에는 이런 공양계가 붙여져 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허물을 모두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부끄러움 없이 음식을 받을만한 자격이라면, 각각의 인생도 삶의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체험이 조화롭게 배여 맛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 인생 자체가 예술이리라. 전등사의 나부상이 멋진 예술품이 된 것처럼.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