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결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수
두려운 이름 신이여! 를 발음해 본다
이리도 간절히 자싱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문정희의 먼 길 전문)
순아,
어느덧 가을이 지고 만상이 조락하여 낙엽으로 딩굴 때 거기 어느 산언덕에서 하얀 이별을 서걱이는 억새 몇 포기일까? 쓸쓸한 시골 울타리 밑에서 조촐히 가을을 피워서는 새벽이슬로 울고 있는 흰 국화 몇 송이일까? 아니면 온 하늘을 빨갛게 통곡시키고는 서해 바다 저켠으로 말없이 사라지는 붉은 일몰일까? 또는 저녁 어스름에 말없이 묘비 하나 쓰다듬고 서 있는 중년 여인의 그 부질없는 그리움일까?
<사랑이란, 제가 불러 꽃피우고는 제가 불태워 재 뿌려야 하는 것. 아무도 모르게 틀었던 보금자리였기에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버려야 하는 것. 그리고 먼 훗날 혼자 쓸쓸히 찾아와서는 없어진 그 흔적을 찾아 장끼처럼 한나절 내내 통곡하다가 가야 하는 것.>
순아,
이제 모든 것은 끝나버렸구나. 우리 이제 모두 겨울 한가운데에 서서 이승의 모든 영화도 고뇌도 욕심도 벗어 던지고 나목 되어 서 있는 한 포기의 감나무로 떨고 있구나.
그러나 순아, 그 까마득한 감나무 가지 끝에 차마 마저 따내지 못하고 남겨진 빨간 감알 몇 개 매달려 있거든, 그것이 이 한 생에 바쳐 가슴에 새긴 채 끝끝내 말하지 못했던 내 사랑이었더라고 읽어 주지 않으련?
(양명학의 사랑에 대한 연가 몇 소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