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수집

성주사지

차보살 다림화 2016. 7. 14. 13:08

 

  햇살 좋은 어느 가을날 그리운 누군가를 만날 듯 길을 나섰다. 병풍처럼 사방으로 둘러쳐진 산 아래 햇살만이 가득한 빈 절터다. 성주사지,성인이 주석했던 절이었다는 것을 이름으로 짐작했다. 언젠가 빈 절터에 삼츧석탑 3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고 그 앞에 5층 석탑이 따로 있는 성주사지 사진을 본 뒤로 궁금했다. 거기에는 낭혜화상탑비가 있는 것이다. 언젠가 꼭 가보리라 하고 생각한 날이 바로 이날이었다. 낭혜화상탑비명은 그 유명한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4개의 비문은 지리산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보령 만수산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경주 초월산의 대숭복사비 문경 희양산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 적혀 있는 금석문이다. 대숭북사비는 비문만 남겨져 있고 비석은 없다. 낭혜화상탑비를 못봤기 때문에 꼭 보고 싶었다. 비문을 읽을 수는 없지만, 대문장가인 최치원의 글씨 흔적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탑비를 세울만한 선사가 주석했던 절이면 법풍을 일으켰기 때문에 분위기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될 것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런 절이 있는 곳이면 산세와 풍경이 그보다 더 좋은 곳이 없지 않은가.

  쌍계사 가는 길은 해마다 벚꽃길로 유명하고 우리나라 차나무의 시배지로 가끔은 내가 찾는 곳이기도 하다. 봄마다 하동으로 차를 만들러 가기도 하는 곳이다. 문경 희양산의 봉암사는 불교의 선사들의 공부 도량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는다. 해마다 사월초파일에만 일반에게 열려 있다.

벼르고 있다가 어느 해 초파일에 우리는 봉암사를 찾아서 하루를 불도량에서 쉬고 온 적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성주사지를 이번에 찾았다. 

   어찌보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들판에 멀리서 보면 작은 석탑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군에서 나온 일꾼들이 풀을 깎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야 빈 절터에 가자고 하면 동행할 사람이 없다. 혼자 넉넉히 둘러보자니 일꾼이 다가와서 신기하게 묻는다. 내가 교수나 학자처럼 보이는지 물어보기까지 한다.  해바라기 밭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모두 시들고 있었다. 입구로 보이는 곳 계단으로 올랐다.  계단을 오르면 석등이 먼저 불을 밝힌다. 석등은 단아한 모습이다. 기단 돌 위에 복련을 조각한  기둥 받침에 팔각 기둥을 세우고  몸돌인 화사석을 얹는 앙련 조각 받침 돌 위에 몸돌인 화창석을 세웠는데, 8면에 화창이 열려 있다.  그 위에 8각 지붕돌을 얹었다. 상륜부는 없어졌다.

   5층 석탑은 통일신라 하대의 것으로 조촐하고 우뚝한 모습이었다. 전형적인 1탑, 금당, 강당 식의 도량인 것 같았다.  금당 터에는 연화 좌대가 당당하게 놓였는데, 어쩌면 석불상이 놓여진 곳이리라 짐작되었다. 금당터와 강당 터 사이에 3층석탑 3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서 이상했다. 이렇게 석탑들이 즐비하게 배치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탑들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들은 본래 이 절터에 있던 것이 아닌 듯 한데, 아무도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낭혜화상탑비는 탑군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다.  처음에 발견될 때는 길 가에 묻혀 있었던 것을 보수해서 세웠고, 지금은 보호각 안에 있다.

내가 본 비석 들 중에서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아름답게 조각된 것 같았다. 귀부의 몸통은 거북 같지만 머리는 불을 뿜는 용의 모습 같은데 오른 쪽 얼굴이 심하게 깨어져서 안타까웠다. 오석에 새긴 5,000여 자의 글자는 또박또박 선명하게 파여 있는데, 이럴 때면 그 글자를 읽을 수 없음이 애석하다.

낭혜화상이 성인이란 칭호를 받을 정도로 그 덕이 빛났기에 성주사란 이름을 하사 받은 것이리라.  문화재청 설명,

     성주사 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

(821)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845)에 귀국하여 당

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