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탐방] [8] 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입력 : 2014.10.02 13:25
문화재청 자료
공식 명칭: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한자 명칭 :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지정일 : 1962.12.20 -
테마: 기록유산, 서각류, 금석각류, 비
시대: 통일신라 시대
주소: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4
문화재청 설명
성주사 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
(821)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
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
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
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 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
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기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
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 머리와 같은 방향
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
타나 있어 당시 신라 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
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 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 시대 최고의 수
준을 보여주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이다. 사산비명(四山碑銘)이란
'네 군데 산(山)에 남긴 비석의 글'이라는 뜻인데 신라말 최치원이 남긴 네 곳의 비명(碑銘)을
말한다.
통일신라 말기 대문장가 최치원(857~?)은 뛰어난 문장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남긴 비문 중에서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성주사 낭
혜화상 백월보광탑비)` `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大崇福寺碑(대
숭복사비)`를 일컬어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부르는데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당대 고승의
행적이나 신라왕가의 능원(陵園)과 사찰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사산비명은 그 시기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앞설 뿐 아니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역사
사실이 많아 한국학 연구의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중국 육조 시대
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한문 문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반 탐방객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 예로부터 많은 해설서가 나와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은 다음과 같으며
현재 비석이 남아있지 않은 경주 초월산 대수복사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보이다.
보령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비(국보 제8호), 하동 지리산 쌍계사 진감국사비(국보 제47호), 경
주 초월산 대숭복사비(국립경주박물관, 실물은 파손, 문장만 전함).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
사비(국보 제315호).
최치원의 사산비명은 네 곳 모두 별도의 답사기를 통해 이미 소개한 바 있으나 국보순례에 포함
하여 한 번 더 소개하기로 한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국보 제8호
충남 보령에는 신라하대 구산선문의 한 중심지였던 성주산문의 성주사 옛터가 남아 있는데 이
황량한 폐사지에 승탑은 없이 탑비만이 보호비각 안에 서 있으니 이것이 바로 최치원의 사산비
명 중 하나인 낭혜화상(郎慧和尙)부도비이다.
성주사 터는 최근 어느 정도 정리되고 울타리도 쌓아 나름대로 차분해 보이지만 관리인도 안
보이고 입장료도 받지 않는 넓고 평평한 옛터에 5층 석탑과 석등 하나, 나란히 선 3층 석탑 세
개, 그리고 금당이 들어선 흔적이 있을뿐,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저 황량해보이는데 이래뵈도
전성기 때는 불전이 50칸, 행랑이 800칸, 고사(庫舍)가 50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의 전각과 탑, 불상들이 모두 재현된다고 하여도 저 뒤쪽 한켠에 서 있는 보호비각
안의 탑비 하나만은 못할 터이니 바로 국보 제8호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郎慧
和尙 白月葆光塔碑) 때문일 것이다.
낭혜화상(郎慧和尙, 801~888년)
신라 후기의 승려. 속성은 김씨(金氏),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이고, 법명이 무염(無染)
이며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
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으며 그 뒤 부석사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
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선 수행에
몰두하였으며,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동방의 대보살’이
라 불렸다. 45년(문성왕 7년), 25년 만에 귀국하여 보령 성주사(聖住寺)를 성주산문의 본산으
로 삼아 40여 년 동안 주석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하여 상주
(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하였으며 888년 89세로 입적하였다.
열반한 지 2년 뒤에 부도와 비를 세웠으니 진성여왕 4년인 890년이다. 진성여왕은 당대의 명문
장가인 최치원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며 시호를 大郎慧(대낭혜), 사리탑을 白月葆光
(백월보광)이라 하사하였다.
최치원이 지은 비문은 5천여 자에 이르는데 사촌 동생 최인곤이 글을 썼고, 이 지방 특산물인
높이 2.63m의 남포 오석의 비신에 또박또박 새긴 글씨는 누구의 솜씨인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아쉽다. 이 비는 통일신라 탑비 중에서 가장 크고,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에서도 가장 당당한 것
으로 평가된다.
보령 성주사(聖住寺)
성주사는 본래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로 그때 이름은 오합사(烏合寺)라고 했다. 오합사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언급되었고 또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왓조각에 오합사 글자가 있어 확실하다.
이 오합사가 백제가 멸망한 후에 어찌 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위세가 약해지고 근근이 명
맥을 유지하다가 어느 지방호족이 또한 어느 고승을 만나 크게 중창하면서 되살아 난 것이라면
이곳 보령지역의 호족 김양과 낭혜화상 무염 국사에 의하여 중창되었을 것이며 무염국사를 성
인(聖人)으로 보고 성인이 주석한 절이니 성주사(聖住寺)라 이름 붙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임진
왜란 때 모조리 불타버리고 오늘날 폐사지만 남아있다.
9천여 평에 달하는 넓고 평평한 성주사 터에는 금당 터 앞에 5층 석탑과 석등이 남아있고, 그
뒤쪽으로는 3개의 삼층석탑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어 그동안 3탑을 세운 절집이 없었으나 어떤
형태 어떤 의미인지 설명이 쉽지 않다.
이러한 부도비나 각종 비석을 둘러볼 때마다 금석문에 관한 지식이 모자람이 안타깝다. 비석에
쓰인 상태로 한자를 읽고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대부분이 그렇지
못한 현실이므로 가능하다면 한자 원본과 해석본을 비치해서 볼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또한,
관련된 서적을 폭넓게 읽어서 사전에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탐방객들의 도리라고 본다.
아직 더 견문을 넓히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옛 비문을 銘(명)이라고 하면, 비문 끝에 그분의 삶을 기리는 시구를 附記(부기)하는 것인데,
글쓴이가 銘(명)을 썼으면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고, 없으면 그저 부탁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碑文(비문)과 碑銘(비명)의 차이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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