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책머리에
국보 제217호인 겸재 정선의 <금강산전도>는 내금강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체적으로 원형구도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모습이다.
나는 금강산에 가본 적도 없지만, 이 그림에서 금강산의 아름다움 그 이상을 느낄 수 있었다. 정선은 실경산수의 효시이지만, 금강산의 실경을 그렸으되 그의 독특한 주역 사상이 바탕이 되었단다.
야산과 높은 암산을 좌우로 배치하여 음과 양, 부드러움과 강함이 대비될 수 있게 그렸다. 그럼에도 이 그림을 보면 금강산의 전체 모습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정선이 금강산을 생각으로 그리지 않고 골짜기 골짜기를 직접 발로 밟아보고 다녀 봤기 때문이다.
마치 명장이 목공소에서 깎아놓은 나무를 가져가 조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뭇결에 따라 대패질을 한 나무로 집을 지은 것과 같다는 평이다. 이 얼마나 문학적 회화인가! 실제로 본 풍경을 재구성한 것이다.
내가 그린 문화재 순례기(巡禮記)들은 어떻게 그려졌는가. 직접 다녀 보았다지만, 제대로 본 것인지 모르겠다. 대패질이 너무 서툴러 거친 그림이 된 것도 많으리라. 아니, 구소(九霄)의 하늘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어찌 그리겠는가.
이 책은 내가 다시 가볼 수 없는 때, 누워서 산책할 나의 순례도이니 만큼, 부족한 대로 마무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흡하지만 내가 찍은 사진에는 나만의 추억과 감상이 있기에 회상의 즐거움도 있으리라. 어떤 이에게는 좀 지루할 지도 모르지만, 혹시 나와 같은 심정으로 보아주신다면 같이 이야기를 더하여 나누고 싶다. 나와 만났던 모든 물상과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엮었다. 책이 나오도록 도와주신 선생님들께 감사의 절을 올린다.
2016년 가을 조윤수
1부 - 윤슬 같은
영원한 미소
환생한 경천사지 십층석탑
살아 있는 한국 역사의 보고
상세황의 자화상
<우금암도>와 함께하는 부안 역사문화 산행 탐방
혼돈의 무지개
윤슬 같은
전설의 연꽃
꿈의 절집, 봉암사
천년 법문을 품은 봉암사 석조유물
슬프다, 수덕사, 그 옛날의 수덕사여!
예산 수덕사에서 꼭 보아야 할 곳
1. 영원한 미소
일본에는 나라 시대부터 계승되어온 ‘노가쿠’에 사용하는 가면이 있다. 이 가면은 세 가지 표정을 낼 수 있다. 앞으로 조금 숙이면 슬픈 표정이 되고 위로 올리면 웃음을 띤다. TV를 통하여 잠깐 보았지만 신비스럽게 표정이 변했다. 노가쿠는 예능으로 잘 보호된 절제된 형식이 인정되어 2008년 세계무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노가쿠 가면극을 지금 인기리에 공연한다는 소식이다. 우리나라에도 하회탈을 비롯한 다양한 탈이 있다. 중국에는 전통적인 경극이란 것이 있어 희한한 가면이 많다. 서양에도 가면무도회를 열어 자유로운 연회를 즐긴다.
사람답지 못한 사람에게 사람 탈을 쓴 짐승이란 말을 한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까지 사람은 많은 탈을 쓰고 사는 것 같다. 사람의 표정에는 그 사람의 상태가 잘 드러난다. 오랜 세월 자신의 삶의 형태가 녹아난 표정은 갑자기 관리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얼굴에 많은 신경을 쓰며 화장이란 가면을 입힐 것이다. 등에 화장을 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손뼉을 친 적이 있다. 사람의 뒷모습에도 표정은 있다. 뒤돌아서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쓸쓸하게 보이는 때.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걷는 모습. 그러니 등에도 화장이 필요할지 모른다. 앞이든 뒤든 화장 밑의 마음 상태는 숨길 수도 없다. 불편한 심기는 언제라도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무표정한 얼굴 뒤에 여러 가지 감정이 숨어 있기에 표정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두꺼운 가면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인 두껍이라 하지 않는가. 희극의 가면 밑에서 배우도 인생의 고통과 슬픈 현실은 피할 수 없다. 인생의 무대에서 유능한 배우가 되어야 하기에 세상은 가면극의 대무대인지도 모른다.
진실은 불편하므로 외면하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의 심리다. 표면만 본다면, 거짓이 어쩌면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면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밝혀야만 하는 진실을 덮으면 모두 조용할 것이라고 적당히 넘기는 일이 많다. 그러나 그 진실은 누군가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며 죄악의 덩어리가 되기도 한다. 결코, 그냥 그대로 있지 않는다. 진실은 살아 있으니까. 가면의 무대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가면극은 적나라한 사람의 속내를 연출함으로써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시원함이 있는 것 같다. 가면극의 역설이 감동과 즐거움을 제공하여 사람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지 싶다. 많은 나라에서 가면극도 예술의 한 형태로 그 몫을 하고 있나 보다. 인도의 자이니즘에는 다양한 신이 있다. 인도는 신의 나라다. 비슈누를 비롯하여 다양한 신의 모습을 탈 공예로 제작하여 각기 좋아하는 신의 탈을 집에 달아놓고 숭배한다. 십자가나 성모상을 걸어놓는 기독교 가정이 있고, 불교에는 탑 상 이후로 불상을 조성하고 있는 것도 또한 탈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아름답고 고귀하여 사람에게 지향할 목표가 된다면, 가면을 숭배하다가 어떤 진리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한 역할이 되겠다. 오랫동안 교회나 성당과 절에 다닌다고 모두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허울만 내세우고 기도하는 당일에도 사람 탈을 쓴 짐승처럼 싸우는 사람도 있으니 종교가 많아서 세상이 구원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종교도 또 다른 형태의 가면무대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새벽부터 시작한 하루가 참 길었다. 오전 내 길에서, 지하철에서 그리고 시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스쳤다. 여러 군상 중의 하나로 술렁거리면서 나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오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을 돌아보고 나니 몇 날 며칠 외국 나들이 하는 기분이었다. 피곤하여 본관의 주요한 유물 몇 가지만 보기로 하고 이 층으로 갔다.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실로 갔다. 캄캄한 독실에 미륵상만 조명을 받은 방이다. 저절로 숙연해져 함께 명상에 들게 된다. 이 조각품을 처음으로 전시할 때 감상한 적이 있고 가끔 사진으로 본다. 실물을 보기로는 거의 8년 만인 것 같다. 친근하지만 처음으로 대하는 것 같은 신성함과 동시에 평온이 밀려들었다. 바닥에 앉은 채로 한참 눈을 감았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야말로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미륵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리고, 턱 위의 볼에 오른 손가락을 대고 고개는 약간 숙인 채 눈은 반쯤 뜨고 있다. 언제나 부처들이 명상하는 자세는 눈은 약간 내리뜬 모습으로 가부좌 한 채 약 1미터의 거리의 어느 점에 시선이 모인다. 옛날과 같이 미륵상 가까이 가서 사방으로 조심스레 관찰하였다. 이 미륵상은 뒷모습도 아름답다. 어깨선과 등의 선이 그리 유연할 수가 없다. 마음에 티끌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으니 고요한 미소 자체가 되었다. 뒤태에는 온 몸에서 풍기는 빛이 광배를 이룬다. 어떤 쪽에서도 신비한 표정을 나타내는 미륵상. 미륵이란 56억 7천만 년 후에 나타난다는 부처라 하니까, 얼마나 요원한 일인가. 어느 때이든 모든 사람이 이 미륵상만큼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이 평상심이 될 수 있다면 이미 세상은 지금 이 자리가 평화로운 왕국이리라. 앞으로 가까이 가서 숙인 얼굴을 밑에서 올려다보았다. 입술에 띤 미소는, 미소 정도가 아니고 짙은 웃음을 짓고 있다.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미소 같아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미륵반가사유상이 하루의 지친 피로를 씻겨주었다.
‘노가쿠’를 보자니 바로 그 반가사유상이 떠올랐다. 적멸에 이른 고요한 미소를 가진 탈이 있다면 기꺼이 쓰고 다녀도 누가 뭐랄까. 아니, 이 미륵상만큼 되는 일이 삶의 최고 가치가 아닐까. 몇 생이 걸릴지 모르지만. 가부좌를 한 채 미륵상처럼 표정을 지어본다. 잡다한 생각이라도 끊고 진짜 미소가 떠오를 때까지 해보고 싶다. (2013/ 5)
* 이번에 보았던 미륵상은 83호이며 머리에 삼산관을 쓴 단순한 절제미가 뛰어난 것 같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기 전, 경복궁 시절에 유일하게 두 미륵상을
한 장소에 전시하여 같이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아래 글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그때의 감상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한 뒤로는 6개월마다 두 미륵상을 교체 전시하고 있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전시장은 캄캄하다. 국보 83호와 78호인 반가사유상이 실물로 높은 탁자 위에 앉아 있다. 싯다르타의 '생노병사’의 고뇌를 형상화했다는 조각상. 그 보살은 과연 누구인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한 옛 사람들, 삼국시대 때의 사람들의 사유였던가 싶지만,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사유케 하고 있지 않은가. 두 보살이 깊은 사유에 빠져 있는 곳에만 조명이 내리 비추는 극적인 효과에 숙연해진다. 80여 평의 넓은 전시관에 단 두 점의 사유상만 전시되어 있다. 전시물 둘레 사방에는 앉을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어 관객들이 오래 감상하며 함께 명상할 수 있다.
83호는 치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다. 머리에는 연꽃 형상인 듯한 삼산관의 모자를 쓰고 있다. 정면에서 앉아 보면 이 사유상은 고요히 명상에 잠겨 있으면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얼굴이다. 얼굴을 받치고 있는 손끝과 왼쪽 다리 위에 얹은 오른쪽 발끝에서 생기가 도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깊은 평온 속에 잠겨 있는 표정이다. 그런데 옆으로 가까이 가서 그 얼굴을 들여다보면 완연한 미소가 번지는 얼굴이다. 조각의 세련미에서 오는 풍만한 얼굴의 입체감, 그 오묘한 미소가 내 마음속으로 물결쳐 와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감격에 싸인다.
78호인 오른쪽 금동미륵사유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옷의 어깨선이 바람에 날리는 듯하다. 날개같이 어깨를 덮은 옷 선이 나비처럼 금방 날아오를 것 같다. 사람이 앉아서 저 어깨선과 등 선을 어찌 흉내 낼 수 있을까. 등 선이며 어깨 선, 허리의 곡선, 이 곡선의 미가 한국의 선의 인상이라 했던가. 이 사유상은 많은 치장을 했지만 너무나 단아하고 아름답다. 정면에서는 미소 짓고 있지만 옆에서 보면 또 달리 담백하고 신비한 표정이 나온다. 나는 몇 번이고 가까이 갔다 뒤로 물러났다, 한참 앉았다 하면서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의 울림에 젖는다. 그 사유상을 가만히 앉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눈물이 솟구치더라는 어떤 분의 말이 실감난다. 가장 얇은 면의 두께가 2mm 의 청동으로 저렇게 살아있는 듯한 내면의 미(美)까지 어찌 표현해 낼 수 있었을까. 과연 동양의 불상으로 독보적인 작품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미술시간에 데생을 하면 서양 인물을 모델로 해 왔다. 아그리파나 비너스를 그리면서 얼굴이나 몸에 근육의 부피감을 그리기에 급급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리의 선을 그리게 해야 한다는 말에는 나도 손뼉이라도 치고 싶다. 우리의 선을 조형미술품에 잘 나타낸 것이 석굴암의 본존불이나 반가사유상이라지 않는가. 우리도 반가사유상을 석고로 조각하여 데생의 모델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반가사유상이 전시되는 동안 불교조각실에서는 매 월요일 사유상의 사진 찍기와 그리기 대회를 열고 있는 일은 참 좋은 일이다. 어떻게 저 반가사유상들을 밀로의 비너스 상에 비유하겠는가, 그 문화의 차이를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이번 전시관 나들이를 즐겁게 마무리 해준 것은 우리 ‘예준’이다. 전시를 보고 있는 동안 밖에서 예준이가 기다리고 있어 더 보고 싶은 것을 멈추었다. 예준이는 내 손녀딸이다. 살아 있어 그 모든 전시물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우리가 서로 만나 기쁨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정말 살아있는 전시관이다. 예준아! 하고 부르면 기어가다가 엉덩이를 살짝 옆으로 비틀어 앉아서 생긋거리며 쳐다본다. 예준이 아빠, 큰 공주인 엄마, 아기 공주‘예준'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볼거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2004)
2. 환생한 경천사지 십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의 동관 내 '역사의 길'에는 조형이 너무나 아름답고 웅대한 '경천사지십층탑'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에 들어오는 사람 누구나 그 탑에 서지 않을 수 없다. 박물관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는 그 아름다운 탑의 조형에 사로잡히기보다 잠깐 혼란에 빠졌었다.1960년대 내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닐 때 분명히 본 탑인데, 그리고 그 탑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는데……. 어느 날 그 옛날 사진을 찾아냈다. 그건 분명히 경복궁 동편 마당 안(지금의 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고 누구나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친구와 같이도 찍고 독사진도 찍었다. 오랫동안 그 탑의 역사를 잊고 있었다.
‘경천사지십층석탑’은 모든 병을 낫게 하였다고 일명 '약황탑'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개성 부소산에서 1907년 일본으로 밀반출되었고, 1918년 고국으로 반환되었던 것을 1960년 경복궁에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그러니 막 경복궁에 복원되었을 때 우리는 경복궁에 다니면서 국전을 보고 그 탑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산성비와 여러 이유로 1995년 다시 해체되어 10년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수리한 후 2005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 개관할 때 실내에 복원하였다. 그러니 민족의 현대사와 더불어 만고풍상을 같이 겪어온 셈이다. 국내이거나 외국에서나 유물 반출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유물 이동은 경찰 호송 하에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마어마한 보험액이 걸린다. 유물 이동은 그래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다고 한다. 경복궁 내의 박물관에서 용산으로 이전할 때도 그랬고, 더욱이 이 경천사지 석탑을 복원한 과정은 아슬아슬한 위험을 겪었다고 한다.
‘경천사지십층탑’은 그 조형미가 복잡하고 뛰어나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사각 탑보다 원형 탑이나 팔각 탑이 많다. 월정사 9층탑이 그렇고 경천사지십층탑 또한 그러하다. 십층 탑에는 각 층 4면에 부처상이 많이 조각되어 있으며, 모서리마다 나무로 조각한 듯 세밀한 조각 솜씨가 무엇을 형상화했는지도 알 수 없이 아득하기만 하다. 당연히 부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일 것임에 틀림없지만 올려다볼 수가 없다.
이 탑을 박물관 내에 복원하는 일을 담당한 박물관 사람에게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굴착기로 작업을 하는데 이미 완성된 건물 안에서 작업해야 하니까, 대리석 바닥에서 하는 작업은 조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만 해보아도 아찔한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 사실 복원 작업을 마친 박물관 담당자는 그 탑이 본래 '약황탑'이었기 때문에 사람도 탑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작업을 마쳤을 것이라고 후일담을 이야기 한 바 있다. 성공적으로 완수한 작업이었기에 그렇게 쉽게 한마디로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탑의 위력은 오늘날까지도 힘을 발하며 여전히 탑 앞에 서면 부처의 원력에 공손해지고 그 탑의 조형미에 감동한다. 우리나라도 왕국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삼국 모두 받아들인 불교가 문화적 도약을 도모할 수 있는 선진 종교가 되었다.
평생을 읽어도 다 읽을 수 없는 팔만사천의 법문이 불경으로 들어왔다. 문자가 없는 세상에서 문자를 사유해야 하는 세상으로 일약 도약하게 된다. 샤머니즘의 주술은 불경 앞에 머물 자리가 없어져 버렸다. "불, 법, 승 삼보를 들여와 공손히 모시는 전당을 마련하고 포교를 하니 불경 같은 책 만드는 법, 붓글씨 쓰는 법, 종이 만드는 법, 기와집 짓는 법, 연꽃무늬 기와 만드는 법, 절집의 벽체에 그림 그리는 법, 불교 행사 때 춤추는 법, 지금까지 보도 듣도 못한 수준 높은 온갖 것이 함께 들어온다.“ 어찌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으랴! 컴퓨터 자판으로 이렇게 글을 두드릴 방법이 있으니 원고지에 또박또박 글자를 새기지 않아도 된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손도 아프다. 그러니 누구나 컴퓨터를 사고 인터넷을 공부해야 한다. 오늘날 정보사회를 이룩한 근거도 문화의 약진, 인쇄술에서 출발했다고 할 만하다. 세계에 유례없는 우리의 인쇄술이 불경을 새기기 위해서였다. 서양에서 성경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발견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그러한 것처럼.
삼국시대 정복국은 백성을 다스리기에 불도를 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불교가 성행하였고 사찰과 석탑 조성의 경쟁이 심했다. 신라의 불국정토 구상은 천년의 역사를 지탱한 원동력이 되었다. 더욱이 불도를 닦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니 세습되는 왕권에도 도전할 수 있는 희망을 몰래 품어볼 만하기도 했다. 부족마다 자기 부족에서 왕을 추대하려는 혁명적인 일도 벌어졌다. 불교는 그렇게 우리나라에 퍼져 들어갔다. 서서히 흡수된 이슬비는 모래밭을 적셨고, 강물 위에 번지는 물방울처럼 번져 나갔다.
그리고 절을 세우는 곳마다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 세워졌다. 불경에는 조탑공덕경이 있고 불경을 사경하는 공덕이 있다. 지금도 절에는 각종 불경을 사경하는 인쇄물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재의 모든 부분이 불교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절집의 처마 밑에 서서 올려다보는 처마 선이며 공포의 조각들이 아름답고, 낙조에 홀로 선 석탑의 실루엣이 그리도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그러나 왜 이렇게 세상은 혼탁한가.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 소식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듣고 있어야 하고 모이면 남의 탓이요, 모일수록 투쟁을 일삼는 일이 많아진다. 아름다운 문화를 지니고 있으면서, 감상만 하고 모두들 부처 되기를 마다해서 그런가. 그리도 빌기를 몇 천 년을 해 왔건만, 스스로 부처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없어서일까. 하긴 미륵이 하생하려면 석가모니 열반 다음, 56억만 년 후라 했던가? 그만한 세월과 노력이 필요하단 이야기일까.
그러나 미륵님 하생하여도 미륵이 대신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2009)
32. 살아 있는 한국 역사의 보고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 10월 28일, 용산 시대의 역사적인 서막을 열었다. 덕수궁, 경복궁, 중앙청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시절을 마감하고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남북으로 훤히 트인 열린 마당은 앞으로 전개될 복합문화 공간의 대문 구실을 하며, 하늘까지 담고 있는 ‘거울못’은 닦고 비추어보는 문화의 의미를 새겨보게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은 세계문화의 맥락 속에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여 세계화를 지향하며, 남북통일에 대비한 역사(役事)이기도 했다.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 협력단체인 국제건축가연맹의 공인을 받아 1994년 국제설계경기로 시작되었다. 전 세계 건축가를 대상으로 좋은 아이디어를 얻고자 현상 공모하여 46개국 341(국내 78, 외국 263)건의 작품이 접수되었다. 2단계의 심사를 거쳐 정림건축(김정철) 작품이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남향과 배산임수 지형을 명당으로 여겨왔다. 용산은 서울의 한가운데라고 할 수 있다. 뒤에는 남산이 있고 앞에는 한강이 흐른다. 복합문화공간으로 박물관 부지로 적당하다. 교통시설이 편리하고 앞으로 남북통일의 염원이 이루어진다면 전통문화의 본산이 될 것이다.
지하철 이촌 정류장에 인접한 거리에 있는, 용산국립중앙박물관 입구, 국립중앙박물관은 부지면적 9만 2천여 평, 연면적 4만여 평이며 사업비 4천여 억 원, 10여 년의 사업기간에 걸친 대공사였다. 서울 갈 때마다 들르긴 하지만 아직도 전시장 모두를 다 관람하지 못했다. 기획전시나 특별 전시를 보기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정원도 우리나라의 산천 모습을 그대로 닮게 조성되었기 때문에 소풍장소로도 그만이다. 도시락을 준비해 가도 좋다.
공원 안에 세워진 박물관이어서 진입로부터 야생화 밭을 옆으로 끼고 본관으로 들어간다.
우리 산야에서 볼 수 있는 낯익은 수종과 화초들로 메워져 있다. 유난히 훤칠하고 잘생긴 소나무는 멀리 속초에서 온 금강송이란다. 관람으로 피로해진 몸은 푸른 숲이 누그러뜨려 줄 것이고, 휴식시간이 무료해지면 유물을 찾아 나서는 자연스러운 환치가 이루어진다. 커다란 인공호수 '거울못'. 건물 앞의 물은 전통적으로 명당 요건의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이 연못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유물을 관람한다는 것은 내면성찰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내 모습을 비추어보고, 미리 마음을 추스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거울못의 주체는 물이다. 수중생물을 키우지 않는 이유이다. 거울못에서 건물로 오르는 길은 한국 산성의 성벽 모습과 흡사하다. 멀리서 보면 박물관이 성곽에 둘러싸인 형상이다.
열린 마당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이 역사의 길로, 왼편은 기획전시실과 어린이 박물관과 강당 등이 있다. 봄, 가을의 단체 관람객까지 가늠해서 확보한 넓이이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면 확 트인 광장이 나타난다. '열린마당'이다. 지붕이 있으면서도 앞뒤로 훤히 뚫려 안이면서 바깥인, 한옥의 대청마루 같은 공간이다. 뒤로 보이는 남산은 우리 전통 건축의 중요 개념인 차경借景인 셈이다. 왼편으로 더 멀리 북악산까지 보인다. 모든 방문객은 이곳에서 만나고 소통한다. 이 박물관 건물은 앞뒤의 구분 없이 설계되었다. 남산 쪽에서 보면 그 나름의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열린마당에서 출입구까지 내려오는 굽이치는 곡선은 남도의 돌담길 같다.
건물 안, 동관 입구의 원형 공간 '으뜸홀'은 박물관 전시실의 관문이다. 천장까지 그대로 뚫려있어 시원하다. 어디를 보아도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아 천의무봉의 경지이다. 전시실의 중앙복도인 '역사의 길'. 어쩐지 텅 빈 듯한 느낌, 여백의 미가 이곳의 컨셉트이다. 전시와 관람의 공간이기 때문에 어쩌면 의도된 단순함이다. 2010년 11월 11일 호후 6시, 서울 G20 정상회의 리셉션이 이 ‘역사의 길’ 광장에서 열렸다. 세계적인 박물관, 영국박물관이나 루브르, 오르세와 캐나다 온타리오 박물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위용과 고품격을 지녔기 때문에 세계 정상들을 환영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될 수 있었다.
관람자의 관심이 유물에게만 쏠리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 미색의 대리석은 바깥의 화강암에 비해 온화한 분위기를 준다. 건물 안인데도 답답하지 않고 쾌적하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역사의 길' 천장을 통해 유입된 자연채광 덕분이다. 특수 유리를 부착해 유물에 해로운 자외선은 걸러내고 눈이 편안해하는 부드러운 빛만 불러들였다. 복합문화공간인 새 박물관이 아직은 많이 낯선 사람들도 많지만, 새로운 곳에 발을 들 여놓았을 때 고향 같은 푸근함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낯을 익히는 데는 애정이라는 스펙트럼이 제일이라고. 건물도 생명체라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무한히 성장할 수도 있다. 천천히 눈길을 맞추다 보면 한결 친숙해질 것이다. 박물관이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라고 박물관 사람들은 말한다.
지하철 이촌 역에서 내리면 바로 박물관으로 통하는 지하도로 연결되었고, 양쪽 벽은 우리나라 대표 유물 사진이 전광판에서 움직이고 있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우리나라 대표유물을 감상하는 동안 박물관 정원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박물관 동산에서는 아이들이 바위 위에 오르내리며 놀기도 하고 야외 조각들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풍경도 볼 수 있다.
4. 강세황의 자화상
시간은 조선 후기로 되돌려졌다. 강세황 선생이 근엄하게 나를 맞아주는 것 같았다. 전시장 입구에서 두 초상화를 만나는데 하나는 평복의 두루마기를 입고 오사모(烏紗帽)를 쓴 엄숙하고 냉철한 눈빛을 한 그의 자화상이다. 표암이란 그의 호를 대변할 만하다고나 할까. 흰 두루마기의 가슴에서부터 흘러내린 빨간 매듭 끈이 그림에 생기를 주었다. 또 하나는 당시 인물화의 대가였던 이명기가 그린 초상화다. 이것은 정식으로 오사모에 관복을 입은 것이다. 위아래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쌍학 문양의 흉배가 선명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선의 임금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의 초상화가 많이 있지만, 화가로서 초상화를 가진 이는 드물다고 한다. 그러나 강세황은 다른 사람이 그려준 것과 합해서 다섯 벌이나 남아 있다. 그런 데다가 강세황의 자화상과 이명기가 그린 초상화는 각각 보물 제590-1호와 2호일 만큼 귀중한 자료이다. 초상화로 국보가 된 것은 윤두서의 자화상이 있고, 최근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올봄,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 - 시대를 앞서간 예술혼”이란 표제로 그의 탄신 3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다. 조선의 대표 화원이라면 단원(檀園) 김홍도가 유명하기에 오랫동안 강세황은 단원의 스승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 전시회로 그가 왜 ‘18세기 예원(藝園)의 총수’라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
자화상 - 조선 1782년 (정조 6), 비단에 색 88.7 x 51.0 Cm
보물 제590-1호
강세황 초상 , 이명기 조선 1783년 정조7 비단에 색 145.5X94.0
진주 강씨 백각공파 종친회 소장, 국립중앙박물과 (기탁 918)
보물 제590-2호
유일하게 정면상인 작자 미상의 강세황의 초상화도 있다. “키가 작고 외모가 보잘것없어서, 그를 잘 모르는 사람 중에, 그 속에 이렇게 탁월한 지식과 깊은 견해가 있으리라는 것을 모르고 그를 만만히 보고 업신여기는 예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번번이 싱긋이 한 번 웃고 말았다. 겉모습은 모자라고 수수해 보이지만, 속은 상당히 영특하고 지혜로워 뛰어난 지식과 교묘한 생각을 가졌다.”라는 글과 잘 어울리는 초상화라고 한다.
보기 드물게 부채(합죽선)에 그린 69세 때의 초상도 있다. 작자는 한종유다. 1781년 정조는 부총관 강세황에게 자신의 어진(御眞)을 그려줄 것을 분부하였지만, 그는 늙어서 눈이 어둡고 잘 보이지 않아서 어진을 그리기 어렵다고 정중히 사양하였다. 다만, 어진을 제작할 때 옆에서 부족한 부분을 돕겠다고 자처함으로써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였다. 당시 어진을 그리는 화사가 바로 한종유, 신한평, 김홍도 세 사람이었다. 이때 강세황은 한종유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짚방석을 깔고 앉아 노송에 기댄 채 책을 읽으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야외 초상화이다. 옹이가 깊게 팬 노송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들고 있는 그의 한가로운 자세가 어찌 그리도 잘 어울리는가. “야외 초상화는 산수를 배경으로 인물의 일상을 토해 내면의 일단과 존재감을 시각화한 18세기 이후에 보편화한 형식이다.” 자연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통해 고매한 인격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니 시서화(詩書畵) 삼절다운 기품을 살려낸 것 같다.
뭐니 해도 보물 제590-2호인 이명기 작인 초상화가 객관적인 그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이라고 여겨진다. 강세황의 집안은 할아버지에서부터 아버지, 그리고 강세황 자신에 이르기까지 삼 대째 기로신(耆老臣)에 임명되는 명예를 누렸다. 강세황은 할아버지 강백년(1603-1681)과 같은 나이인 71세에 기사(耆社)에 들어가 기로신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정조는 1783년 5월 28세의 젊은 화원이었던 이명기(1756-?)로 하여금 지고한 강세황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강세황의 셋째 아들 관은 <<계추기사>>에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 총 19일간의 제작 일정과 소요 비용, 재료 등을 일기체로 소상히 적어 놓았다. 이 기록은 당대 예술계를 주름잡던 아버지의 초상화가 어떻게 탄생하였는지를 낱낱이 기록해 놓은 희귀하고도 중요한 자료란다.
임희성(1712-1783)의 <강세황 입기사서(入耆社序)>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아! 대를 이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도 우리나라 400년 역사에 정말 보기 드문 훌륭한 일인데, 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공 3세가 대대로 은택을 입어 기로소의 계단을 거듭 오른 것은 고금에 거의 없고 공 가문이 유일한 것 같다......,” 또한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추사 김정희도 그의 빼어난 특유의 서체로 쓴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란 현판 글씨를 남길 정도였으니,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초상화 분야에서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큼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이명기가 당시 최고의 문인인 강세황의 초상을 그리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더구나 머리털 하나라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닮게 그리기를 강조하던 그를 마주 대하고 재현하는 일은 아무리 화명을 날린 화가였을지라도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28세인 이명기는 강세황이 살아가면서 경험한 성공과 좌절, 희열과 열패감 등 온갖 오욕과 칠정을 그의 붓끝으로 표현하였다. 깊은 통찰력과 과학적 분석력을 동원하여 이목구비의 생김새를 낱낱이 해부하고 강세황의 어두운 내면을 햇살처럼 밝힘으로써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놀라운 묘사력에 감탄할 뿐이지만, 소매 밖으로 드러낸 손가락 마디마디와 손톱 끝 하얀 부분까지 세밀하게 놓치지 않은 세심함은 표현력의 절정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정조의 제문은 강세황이라는 인물과 그의 삶을 축약하여 나타내고 있다.
“姜世晃公七十一歲眞 御製祭文”을 두 줄로 세로로 쓰고 세 줄의 내용은 이렇다. “탁 트인 흉금, 고상한 운치, 소탈한 자취는 자연을 벗하네, 붓을 휘둘러 수만 장 글씨를 궁중의 병풍과 시전지에 썼네, 경대부의 벼슬이 끊이지 않아 당나라 정건(鄭虔)의 삼절을 본받았네. 중국에 사신으로 가니 서루에서 앞다투어 찾아오네, 인재를 얻기 어려운 생각에 거친 술이나마 내리노라. 조윤형 삼가 쓰다.”
강세황이 70세에 그렸다는 자화상이기에 같은 나이가 되어서인지 나의 삶을 돌이켜보는 시간이 잦아진다. 여권 갱신을 위하여 사진관에 가서 명암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물론 한복도 아니고 양장인 셈이다. 모자를 쓰지 말아야 하므로 정장 차림의 사진이 드물었는데, 그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그것으로 명암을 낼 때 쓰기도 하고 크게 인화해 놓기도 했다. 벌써 7년 전 사진이니 좀 멋지고 젊게 보인다. 이걸 내 초상화라 할지라도 무슨 말로 나를 묘사할 화제를 찾을까. 액자 속의 내 사진과 강세황의 자화상을 번갈아 바라본다. 혼미할 뿐이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일상복에 오사모를 쓴 강세황의 자화상 앞에서 오랜 시간 서성였다. 언발란스(Unbalance)적인 패션, 요새 말로 코디가 맞지 않게 그리고서 여유만만하게 초상화 위의 좌우편에 스스로 표제를 썼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오사모를 쓰고 야복(野服)을 걸쳤으니 마음은 산림에 있으면서 조정에 이름이 올랐음을 알겠다. 가슴에는 만 권의 책을 간직하였고, 필력은 오악을 흔드니 세상 사람이야 어찌 알리. 나 혼자 즐기노라. 노인의 나이 일흔이요, 호는 노죽(露竹)이라. 초상을 스스로 그리고, 화찬도 손수 쓰네.” 다른 사람을 평하듯, 자신을 객관화하여 농을 걸며 웃고 있는 듯한 글이지만 표정은 자못 진지하다. 볼수록 깊은 울림이 있는 자화상이 아닌가. 그 자신을 모자와 두루마기에 단 몇 줄의 화제로 압축하여 나타내었다.
“강세황은 산수를 그릴 때처럼 초상화도 한 치의 오차 없이 형체를 닮게 그리고, 내면을 옮기는 전신(傳神)을 강조하였다. 일흔 나이에 이르기까지 대여섯 점의 자화상을 남길 정도로 그는 초상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고, 서양화법을 수용하면서 18세기 회화사에 변화의 실마리를 제공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평소에 그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볼품없다고 토로하였다. 그럼에도 그가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은 한편으로 예술가로서의 내면을 탐구하는 자의식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듯이 둥근 원 안에 배치한 다음 푸른색을 채워 넣어 강렬한 느낌이 든 자화상도 있다. 그가 자화상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했던 치열한 예술가의 자세를 여실히 대변하고 있다. 왜 아니 그러랴. 누구나 자기 보는 것을 좋아한다. 단체 사진이나 작품집을 받고서도 대부분 자신과 자신의 글을 먼저 찾기 마련이다.
“조선의 18세기는 영 . 정조 연간의 안정된 치세를 바탕으로 도시가 발달하고 세상을 보는 눈과 생활양식이 빠르게 바뀌어 갔던 역동적인 시대였다. 강세황 또한 그 시기를 치열하게 살았던 지식인으로서 예술에 대한 재능과 열정, 지적인 탐구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시 . 서. 화 세계를 일구었으며, 문예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안목으로 비평가로서의 업적도 남겼다.”
아무리 시대를 앞서 살았다고 해도, 그의 먼 미래인 300년 후의 오늘은 그 시대의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정신은 세월만큼 앞선 것 같지도 않다. 오늘날 문무백관들의 정치 현장의 작태는 어떤가. 시끄럽고 유치하기 짝이 없다. 문화면에서도 예술사조가 해체되어 혼돈의 무지개 속을 해매고 있는 우리 현대인의 자화상은 어떤가. 이 시대를 깨울 문예인은 또한 얼마나 있을까. 어떤 장르라도 현대의 물질 만능 시대에는 예술인 역시 돈과 권력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본받을 만한 어른이 드물기 때문일까. 지금 조선의 삼절을 들먹이는 일은 어쩜 고루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부모세대의 영향은 삼대를 갈 수도 있지만, 가업을 이어받는 자식들이나 순수한 인문정신을 이어받는 후배들은 얼마일까. 지난 40여 년 동안 추구해온 물량가치와 속도전에서 방향을 잃고 맹목적으로 달리고만 있는 것일까. 3퍼센트의 소금이 바닷물을 유지하듯 그러한 인물들이 이 사회를 유지하는 힘이었고, 면면히 이어지는 장인 정신이 문명을 발달시켜왔다. 풍성한 생활환경에서도 아직도 빈곤감에 허덕이는 것 같은 시류는 정신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리라. 이제는 물신주의와 속도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기가 주인이 되는 철학과 정신이 필요한 때이지 않은가. 진정한 키워드가 되어야 할 ‘웰빙’과 ‘힐링’도 상투적인 구호처럼 들리는 이때, 강세황의 정신이 오늘을 깨우는 것 같아 청신한 바람처럼 느껴졌다.
나의 자화상을 상상해본다. 인생의 고난과 역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지만, 조상과 부모의 삶이 바탕이 되어 더 자유로운 정신과 의식으로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 요즈음 일흔은 노인이라 부르기도 어색하다. 같은 일흔인데 강세황은 구십처럼 보인다. 옛 사람은 일찍 철이 든 사람이 많아서 한 생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이도 많다. 나야말로 현대의 철없는 할머니에 불과하다. 헐렁한 청바지를 즐겨 입는 캐쥬얼 콤비 차림에 모자는 이십 대부터 쓴 나의 분신, 한국인인지 서양인인지 모를 퓨전 스타일. 어떤 틀에 나를 묶을 수가 없다. 한 장의 사진에 어떤 말로 내 의식과 내면에 맞는 화제를 삼을 수 있을까. 문인이라 내세울 정도도 못 되지만, 엉성한 수필집들 속에 내 자화상의 실루엣이 그려졌으리라. 남은 내 삶 속에서 못다 한 그림을 그린다면, 마음자세만이라도 표암의 자세를 본받아 날로 새로운 정신으로 힘써 볼 일이다. ‘세상사람 누가 알랴! 나도 혼자 즐기노라’ 차숲(茶林)에서.
4. <우금암도(禹金巖圖)>와 함께하는 부안 역사문화 산행 탐방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2014년 10월 <표암 강세황 -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 이란 주제를 가진 특별전을 열었다. 이를 기념하여 부안문화원이 주최한 <우금암도>와 함께 하는 부안 역사문화 탐방길 답사 행사가 있었다. 강세황이 전라북도 변산 기행을 하면서 남긴 유일한 그림 한 점이 <우금암도>이며,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가 남아 있다.
2014년 10월 11일 오전 11시에 전주박물관에서 출발하여 부안에 도착, <정자나무>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부안의 동남향 방향에 있는 개암사로 향했다. 개암사는 그새 대웅전 공포를 새로 단청하여서 현대적인 느낌이었다. 몇 년 전의 퇴색하여 민얼굴이었던 공포(栱包) 조각미는 없었지만, 새 단청도 청신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침 10시쯤 햇살이 팔작지붕 처마를 비출 때 그 조각의 아름다움이 살아나서 참으로 감동적으로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의 기분으로 새로 단청한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대웅전은 뒷산 우금 바위에서 날개를 펴고 내려앉은 봉황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개암사는 백제 무왕 때 지은 절이지만 여러 차례 중창을 거듭해온 역사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다. 지금의 대웅전은 보물 292호로 지정되었다. 고건축을 공부하는 건축가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다.
사찰 뒷산 길을 오른다. 예상 외로 가파른 산길이다. 경사 길을 힘들게 굽이쳐 돌고 막다른 곳에 앞을 가로막는 사암 바위가 나타난다. 바로 우금바위다. 맨 뒤에 올라서 숨을 고르느라 설명을 듣지 못했지만 익히 들어왔던 바위의 전설을 떠올리며 굴 앞에서 쉬면서 사진을 찍었다. 이 굴이 정말로 원효 방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뒤에 원효대사가 이 굴에 와서 수행하며 백제 유민들의 아픔을 달랬다고 했다. 근처의 바위를 치니 생수가 흘러서 그 물로 차를 달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만한 흔적을 지금은 상상할 수가 없다. 동쪽에 한 산의 감시자인 듯한 우금바위는 변산의 전설이 모인 곳이다. 옛날에 묘연왕이란 자가 이 굴에 숨어 살았는데, 우 씨와 김 씨의 두 장수가 이 묘연왕를 쳐서 우금암이 되었다. 또 하나의 전설은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의 김유신이 만났다고 해서 우금암이 되었다는 설도 있단다. 또 백제가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산성도 있다니 원효가 백제 유민들의 아픔을 달래는 수행을 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기도 하다. 개암사에서 올려다보는 우금암은 그렇게 신비한 위력이 서려 보였다. 정상에서 내리막길도 힘들지만, 신비에 싸인 우금암의 굴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숲 속 오솔길을 걷는 맛은 일반 등산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미가 있다.
이 길을 표암 선생은 가마꾼과 말을 번갈아 타며 걸어가기도 했단 말인가. 그때 표암의 나이는 60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난 그보다 더 많은 나이인데, 그때를 생각하면 힘든 길이었을 것 같다. 산을 넘고 내려오니 유동 마을이다. 여기서는 버스를 타고 계곡 아래까지 간다. 바로 부안 댐의 상류라고 하는 곳이다. 표암의 우금암도에는 문현동을 지났다는데, 그곳으로 추증되는 곳에서 내려 먼 바위를 바라보았다.
부안댐 상류에는 내변산 대형주차장이 있다. 부안 실상사로 들어가는 입구다. 계곡 왼편 길로 들어가자니 눈에 익은 길이다. 벌써 세어보니 30여 년 전 같다. 1980년 무렵 청하 큰스님의 불사로 전국에서 버스 4,5대로 모인 불자들이 실상사 절터에서 불사 법회를 가졌는데, 그때 친구 따라 온 적이 있었다. 그런 법력으로 하여 실상사가 그 자리에 복원되었다. 강세황도 “실상사에 이르렀는데, 절은 매우 크고 웅장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쓰러져 있었다.”고 하였다. 나는 실상사를 구경하는 일은 생략하기로 했다. 가야 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월명암 가는 길을 먼저 올라간다.
오! 이렇게 힘든 산행답사였다면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 없는 산길을 헤쳤다. 오후 3시 8분, 우리 일행은 다른 일행과 길이 갈려서 더 힘든 산행을 했다. 마치 새 길을 개척하면서 나뭇가지를 헤치기도 하며 바위산을 기어오르기도 했다. 바위산을 몇 개를 넘었는지 셀 수 없었다. 아들 같은 젊은 동행자가 나를 끌고 뒤에서 밀어주어서 갈 수밖에 없었다. 되돌아가는 길도 없으니. 한 고개를 넘으면 반드시 보너스처럼 내리막 평지 길을 만나고 한숨 돌리게 한다. 떨어져서 보니 진안 마이산 같은 암봉 하나를 기어 넘었다. 커다란 바위산에 기대 눈앞에 펼쳐지는 내변산의 전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아주 높은 산은 아니지만 우금암에서부터 모든 산들에는 절리 같은 바위와 비석 같은 선돌이 뼈대를 이루어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구불한 오솔길에 들어서자 월명암 지붕이 수풀 사이로 보이고 입구에 벤치가 몇 개 기다리고 있다. 거기까지 오는 방문자의 노고를 알아주는 듯했다. 반갑게 의자에 털썩 앉아 땀을 씻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표암과 육당 최남선이 죽도록 고생하여 걸어왔던 월명암이 아니었던가. 예전 선비들이 월명암에서 느꼈던 감상은 이보다 더 기막혔을까? 나도 오늘 죽도록 고생하여 올라온 월명암에서 자게 된다. 다른 일행이 월명암 선방 뒤로 올라가서 '낙조대'에 오른 사이 나는 절 경내를 산책했다. 대웅전에서 참배하고 공양간에서 채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다실에서 스님이 우려 주는 차를 마시고 월명암 창건자인 부설거사의 전설 같은 생애를 들으며 과일과 약주로 피로를 풀었다.
그믐달이 아직 파리한 하늘에 새털구름과 대비를 이루는 그림에 풍경소리가 더하여 적요한 분위기에 감싸였다. 마치 우주의 별 한 점으로 내가 떠 있는 것 같다. 월명암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일망무제의 내변산을 내려다보는 맛을 그 무엇에 비기랴.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육당 최남선도 월명암이 낙조와 한가지로 조하(朝霞)의 승지로도 이름 있는 소이(所以)를 알겠다고 했다. “어두워가는 저녁보다 밝아오는 아침이 갑절 미관(美觀)을 비칠 것인즉...”.
아침노을에 비친 변산의 능선도 잠을 깨고 있었다. 따뜻한 방에서 피로를 풀고, 잠시 눈만 감은 채 밤을 샌 듯 아침을 맞았다. 아침공양을 받고 스님이 우려 주는 차를 연거푸 마시고 행장을 준비했다.
내려가는 길이라서 어느 정도 안심은 되었지만, 워낙 있는 힘을 올라오는데 썼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얼마쯤 내려가니 절벽 같은 벼랑길이 나온다. 바위가 이중삼중이다. 이래서 표암 선생도 가마를 탈 수밖에 없었겠다 싶었다. 돌산을 오르고 넘는 길은 완전한 명상길이다. 오로지 한 발자국씩 헛발 디디지 않는 일. 발자국 자리를 잘 짚는 것만 목적이다. 바위산을 기어올랐던 만큼 내려가는 돌밭도 급경사진 곳도 많다. 내변산을 둘러보면 그리 높은 악산은 아닌데 숲이 우거진 산마다 뼈대 같은 바위들이 박혀 있다. 때로는 바위가 절리를 이루듯 벼랑으로 감싼 곳도 있고 곳곳에 선돌같이 우뚝 바위가 있는 산도 많다. 얼마쯤 평지로 내려오니 계곡이 나타나고 이정표가 나온다. 한숨 크게 몰아쉬는 곳이다.
이곳에서 직소폭포와 내소사 방향으로 다시 올라야 한다. 옛사람들이 갔던 험한 길은 아니나 나무판자로 안전하게 협곡을 지날 수 있게 되었다. 나무 계단과 돌길을 번갈아 걷다 보니 너른 호수가 보인다. 전망대에서 아름다움에 취할 여유가 생긴다. 일행과 사진도 찍으며 산행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호수 상류까지의 데크 길은 보너스 같은 즐거운 길이다. 얼마쯤 돌길을 걸어 올라가자 드디어 쉼터가 나온다. 바로 직소폭포 건너편 전망대다. 맞은편 절벽의 벼랑 바위가 막은 댐처럼 서 있고 둥근 소에 물이 고여 있다. 갈수기여서 폭포수는 가는 물줄기만 멀리 보인다. 직소폭포의 설명 판에 있는 사진을 보며 물이 많이 쏟아져 내리는 풍경을 상상한다.
이제 마지막 목표인 내소사로 간다. 직소폭포 계곡을 뒤로하고 시냇물 같은 계곡물을 왼편에 끼고 너르고 편안 풀길이 이어진다. 내소사 쪽에서 보면 절 뒤편 산 아래다. 결국 산 하나를 넘어야 하는 숙제가 남은 셈이다. 조용한 숲길은 앞에 남은 산을 넘기 위해 숨을 고르는 시간인가. 즐겁게 걸으며 지나는 나무며 풀꽃 등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내변산이 한때 도둑 소굴이었던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한 오솔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반대편의 내소사를 넘어오는 등산객들을 만나면 반갑게 안사를 나눈다. 마지막 한 고비 정상까지 올라야 한다. 이끌어준 사람에 의지해서 정상의 너른 바위에 올랐다. 건너편 멀리 구름에 싸인 변산 앞바다가 보인다. 아! 바다가 보이는 높은 곳. 내소사에서 뒷산을 올려보기만 했던 그곳에 선 것이다. 월명암을 떠나 내소사 입구 원암마을까지 4시간여를 걸은 셈이다. 내 생애 이보다 고된 걸음 할 일은 더는 없을 것 같다.
무사히 집에 돌아와서 개운한 차림으로 편히 쉬자니 바위산의 돌부리를 잡고 엉금엄금 기어올랐던 험한 길이 떠올랐다. 손잡아준 일행이 참으로 고마웠다. 아찔아찔했던 순간들이 떠오를 때마다 몸서리가 쳐지기도 했다. 꿈길에 발을 헛디디는 착각이 일듯이. 변산을 뒤돌아보며 지은 옛 시인의 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변산이 바닷가에 있어 / 굽이굽이 놀다오니 생각할수록 아득하구나. / 첩첩 낭떠러지와 겹친 호수가 기이한 구경거리고 / 구름 낀 돈대와 절간들이 별천지였 지. / 마음속으로 다시 오르니 낯선 손님이 아니고 / 꿈속에 찾아가보니 모두 신선이구나. / 눈에 가득한 진면목이 그림처럼 떠올라 / 등불 마주하고 앉으니 잠도 오지 않네.
또한 육당 최남선은 <<심춘순례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직나직한 산이 둥긋둥긋하게 뭉치고 깔려서 앞의 놈은 주춤주춤, 뒤의 놈은 갸웃갸웃 하는 것이 아마도 변산 특유의 구경일 것이다. 금강산을 옥으로 깎은 선녀 입상의 무더기라 하면 변산은 흙으로 만든 나한 좌상의 모임이라 할 것이다. 쳐다보고 절하고 싶은 것이 금강산이라면 끌어다가 어루만지고 싶은 것이 변산이다.”
5. 혼돈의 무지개
혼돈의 무지개
여기는 어느 나라의 미술관인가? 잠시 착각이 든다.
서울 지하철 이촌 역에서 국립중앙박물관 뜰까지 바로 연결되는 통로가 일 년 정도의 공사 끝에 개통되었다. 이촌역 구내에서 박물관까지 통로는 양 벽면의 전광판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유물이 상영되고 있다. 전시회는 지하철역에서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상설 전시장 같다. 도보 에스컬레이트가 장치되어 가만히 서서 관람하는 동안 마당 입구까지 스스로 닿는다. 먼 외국에 나들이 온 것 같다.
미국미술 300년(Art Across America) 속으로 들어간다. 2013년 2월 5일부터 5월 19일까지 열고 있는 전시회장이다. 지금까지 미국이라면 뉴스를 통하여 정치와 경제면만 듣고 지나쳤다. 6.25 이후부터 물밀듯이 들어온 미국문화가 아니었던가. 20대의 청춘 시절을 영미(英美)인(人)들과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르면서 아는 듯 미국 문화에 젖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모든 생활과 문화가 미국화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각별하게 생각하지 않고 미국적 생활 방식에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우리나라 사람 일부에게는 미국이 자유와 기회의 땅으로 떠올랐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 역사도 벌써 100여 년이나 된다. 그런 미국의 300여 년 간의 역사를 보여 주는 전시회이다. 또한 미국의 역사는 이민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300년간의 북아메리칸의 표정들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지난 겨울 동안 전북도립미술관에서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친 현대미술거장전이 열렸다. 현대 미술 경향을 조금 알 수 있는 전시회였던 차에 미국전시회는 같은 시기의 미국적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토마스 콜(18-1-1848)의 인물이 있는 풍경, <모히칸 족의 최후>의 한 장면만으로도 평화롭게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어떻게 사라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아메리칸 인디언 족장의 연설문을 기억할 것이다. 자연과 하나로 살아갔던 인디언들에게 자연은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거대하고 웅혼한 자연 풍경에 압도되어 힘센 정복자에 의하여 피 흘리며 죽어가는 한 쌍의 남녀를 놓치게 된다. 또 하나의 그림. 영국의 청교도들이 이주하여 펜실바니아를 형성하고 정착민들을 설득하는 장면이다. 청교도들이 토착민들에게 성경의 장면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바로 이사야 11장, ‘장차 올 평화스러운 왕국’이다. 지상의 천국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나도 좋아하는 대목이다. 유럽의 현대 화가들이 이 대목을 천국의 형상으로 그린 대형 작품을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도 예수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 구절을 설명하면서 바로 지금 여기, 자신들이 건설한 이 지역에 평화스러운 왕국이 도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참으로 고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으나 재미있는 그림이었다. 그 외에도 예술의 본고장인 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온 미국 미술가들의 작품, 미국의 인상파 작가들과 현대 설치미술까지 한눈으로 볼 수 있게 미국의 역사와 문화가 펼쳐져 있다.
유럽에서 자유와 기회를 찾아온 이민자들의 신세계에서부터 오늘날 세계 질서의 중심에 서기까지 북아메리카대륙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말글이나 영화를 통하여 알아온 미국의 역사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역사의 특징이 한눈으로 보게 된다. 현대적인 미국 초상화들은 고전적인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귀족의 가면을 쓴 듯 보였다. 태평양을 건너 항구에 도착한 이민자들과 영국의 청교도들이 정착민들을 설득하는 장면이 어느 소설보다 적나라하다. 서양미술사에서 많이 들어온 그리스 건축물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는 미술 거장들의 이름에 익숙하였으므로, 미국의 미술가들은 생소했다. 현대에 와서는 모든 미술의 사조들이 해체된 경향이다. 미국의 현대 미술가 잭슨 폴록과 앤디 워홀 영향이 커서 뉴욕은 추상과 팝아트의 본고장이 된 것 같다. 이제는 유럽인이 다시 현대 예술을 배우기 위하여 뉴욕을 찾아온다. 피에트 몬드리안도 생의 말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의 정경들을 그의 선과 면의 조형에 담았으며 추상 미술이 발전하는데 일조를 한 것 같다.
‘주제가 제일 중요하며, 그 다음이 도구다.’ 로버트 라우센버그가 말했다. 어찌 하여 나는 글의 주제도 없이 이 글을 쓰는가. 또한 폴 세잔은 말했다. ‘우리는 혼돈의 무지개 속에 산다.’ 미술뿐 아니라 현대는 예술 형태가 모두 무너진 혼돈 속에서 무지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행을 선도하는 최첨단이란 문명에서 오는 의식주의 생활이 또한 어지러울 정도다. 과연 그런 아름다움을 기조로 해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세계는.
(2013)
6. 윤슬 같은
‘와! 환상적이다.’ 홍매 사진을 본 사람의 외줄기 탄성. 죽음 같은 어두운 가지 끝에서 틔워낸 꽃무리, 그 생명의 힘을 어찌 한마디로 말해버릴 수 있을까. 아름다움은 어디서 온 것인가. 생명의 창조자는 누구인가. 말글의 의미를 잃고, 단지 말 없는 꽃 빛의 속내에 젖어볼 뿐이다.
몇 번의 초봄에 가서 혹시나 했지만 조우하지 못했다. 바로 일주일 전에 구례 화엄사 주변 암자의 양지에서 어린 홍매와 토종 백매만으로도 황홀했다. 그때 각황전 옆의 홀로 선 홍매는 겨우 한두 송이 피기 시작하였다. 화사하게 피울 홍매의 수관을 상상하며 꽃봉오리를 머금은 가지를 올려다보며 조마조마했다. 그런 뒤, 오늘 다시 갈 기회가 생겼다. 법고 각 옆에서 각황전을 향해 눈길을 올린 순간, 가슴에서 확 윤슬이 일기 시작했다. 환하게 붉은빛이 나를 향해 반사하는 것 같았다. 초봄 카페서 본 호면의 윤슬이 절묘하게 매화 꽃송이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은하수가 쏟아져 내려앉은 별빛’, 그런 윤슬이 각황전 뒷산을 배경으로 붉은빛을 뿌리고 있었다. 바로 윤슬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빛 부신 잔물결처럼. 부서지는 꽃빛 윤슬에 눈이 시렸다. 가까이 가서 일주일 전에 보았던 봉오리들인가 하고, 활짝 핀 꽃들과 반개한 봉오리들까지 자세히 보고 또 올려보았다. 전각의 처마 단청에 절묘하게 걸친 꽃가지들에게 환상적이란 쉬운 말을 토해낼 수가 없었다. 환하게 가슴에 안겨서 피어나는 꽃들이 전각 지붕 사이를 수놓았다. 너무 붉어 흑매라고 불린다는 홍매 나무의 수관을 밑에서 올려보고 옆에서, 담장 너머에서, 전각 뒤까지, 탑돌이 하듯 아름다운 자태를 탐미했다. 한순간에 빛나고 흩어질 윤슬을 붙잡기라도 할 듯, 그 빛나는 홍매의 윤슬을.
사군자(매난국죽)는 오랫동안 선비 정신을 나타내는 그림의 소재였다. 탈속한 선비의 으뜸이었던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고아한 ‘탐매探梅’ 고사도는 유명하여 뒤에 많은 묵객들에게 탐매도探梅圖를 낳게 했다.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오래전부터 선비와 화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화목畵目 중의 하나였다. 월매도, 설매도, 연매도 등이다. 조선 중기 어몽룡의 <월매도>는 우리나라 5만 원 지폐에 당당히 인쇄되었을 정도다.
맹호연의 ‘탐매’ 이후, 많은 시인 묵객들이 매화를 추종하는 버릇이 생겼다. 시대를 넘어 조선의 시인 묵객들로 이어져서 많은 시와 그림으로 탐매도를 남기고 있다. 그 영향은 현대의 우리나라 탐매꾼들과 사진작가들에게도 고매(古梅) 작품을 줄줄이 탄생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나도 화엄사 홍매와 인연이 닿기를 바랐다.
옛날에는 매화가 귀해서 산속으로 탐매를 나섰겠지만, 오늘날은 개량 매화 농원이 많아서 초봄에 섬진강을 낀 마을마다 산기슭은 하얀 꽃구름이 내려앉은 것 같지 않은가. 지금도 옛 선비들이 아낀 고매(古梅)가 전국 곳곳에 남아서 그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화엄사의 홍매도 통도사 홍매와 단속사지 정당매와 산천재의 남명 매화와 더불어 이름난 매화 중의 하나다.
아름다움은 항상 존재하지 않아서 시공간의 거리 안에 존재함이다. ‘이별이 미(美)의 창조자’라고 말한 한용운의 글이 참으로 오묘한 의미로 다가온다. ‘아름다움이란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미(絶對美) 그 이상이란 뜻’이라. 그 절대미야말로 이별이 만들어내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창조미(創造美)라! 꽃이야말로 단절의 슬픔이 만들어내는 절대미인가.
각황전 아미타불의 법문일까. 법신불의 화신 중 하나인 홍매화일지니. 몇 백 년의 세월 동안 온갖 풍상과 시련을 넘어 살고 있는 홍매화 나무. 수많은 사람의 기원과 화엄 사찰이 지녀온 사연, 이별의 사연들까지, 꽃잎으로 피어나지 않을까. 사람이 꽃 중의 꽃이라면 이별하지 않는 꽃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언젠가 세상을 이별해야 하는 운명 앞에서라면……. 어차피 한순간의 환(幻) 같은 인생일진대, 윤슬 같은 빛 무리를 드러냈던 생의 어느 순간이 있었다면 세상살이의 보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15)
구례 화엄사 적멸보궁 4사자삼층석탑
구례 대화엄사
지리산대화엄사, 해동선종대가람의 산문 입구를 지나 올라오면 양지바른 길가에 고승들의 부도가 즐비하게 모여 있다. 오른쪽 언덕에는 문학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00미터쯤 올라가면, 지리산 화엄사라고 써진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머리는 용, 몸뚱이는 거북, 날개가 있는 용 모양의 조각 받침돌 위에 벽암스님 비석이 서있다. 화엄사를 중창한 스님을 기념한 비석일 것 같다. 비석 앞에 금강문, 금강문을 들어서면 범종각과 보제루를 오르는 계단을 올려다보게 된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장엄한 가람의 본체가 펼쳐진다. 봄이면 각황전 옆의 홍매화가 윤슬처럼 반짝이고, 전각들 사이로 청매화도 그윽하다. 여름이면 푸르고 울창한 깊은 숲 속에 붉게 타오르는 배롱나무들이 전각들 사이사이에서 산뜻하게 농염한 붉은 빛을 발하고 있다. 화엄사의 여름은 더위를 잊은 듯하다.
금강문 옆으로 난 잔디밭의 징검다리를 밟으며 다시 보제루를 향한다. 보제루는 맞배지붕이며 양 옆으로 그보다 작은 팔작지붕의 범종각과 운고각이 나란히 서 있다. 보제루는 성보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보제루 앞마당에 동서오층석탑이 당당한 모습으로 위용을 나타내고 있다. 오층석탑의 조각미를 뜯어보는 맛이 있다. 왼편 언덕의 장엄한 각황전과 오른편 정면의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아야 예배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른 새벽, 도량예불 때 길게 줄을 서서 각황전 오르는 스님들의 모습은 여명을 밝히는 한 장의 묵화였다.
관광객들이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 울리는 마당에서 뭇 중생을 일깨우는 운고판을 두드리는 스님들의 손놀림을 올려본다. 모두가 아름다운 여름 하루의 저녁을 맞는다. 한여름 차(茶)명상을 끝내고 각황전 안의 아미타불 앞에서 백팔배를 드릴 때 뒷문에서 내려오는 산바람이 땀을 씻어주던 기억이 새롭다. 각황전 마당의 석등은 우리나라 석등 중 가장 크다는 것만으로도 위용을 자랑한다.
각황전 왼쪽으로 동백나무 숲과 어우려져 있는 백팔 계단을 올라가면 노송으로 둘러싸인 부처님 사리탑인 4사지삼층석탑과 공양상 석등이 근엄한 자세로, 완전히 압도하는 멋이 있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최순우는 말했다. “한국 고대의 건축미술 작품 중에서 한국의 석탑처럼 그 다양한 창의성과 공간 조형의 세련된 아름다움을 다시금 재평가 받는 건조물은 없다. 그런 아름다움은 익산 미륵사탑이나 부여 정림사 같은 탑의 조형에서 찾아볼 수 있다. 8세기 무렵의 통일신라시대로 오면 이전의 석탑 조형을 더욱 세련시켜서 사각 삼층으로 된 한국 석탑 양식의 정형을 이룩하게 된다. 불국사 석가탑이 그 좋은 예가 된다. 화엄사 4사자석탑은 전형적인 삼층석탑 양식을 기본으로 했으면서도 “매우 이례적인 사자주 양식을 곁들인 탑으로 기교나 창의 면에서 매우 높이 평가해야 할 한국미의 일면을 보여 준다고 할 것이다.” 석탑 앞의 공양상은 신라시대의 고승 자장법사의 모습이라든가. 연기조사가 어머니께 공양 올리는 모습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정말은 밝힐 수 없다. 그리하여 최순우는 “삼발 석등 아래 한 무릎을 세우고 정화해서 합장 공양하고 있는 보살형의 모습은 어쩌면 신라 불교미술인들에게 바치는 경건한 찬양의 자세라고도 나는 느끼고 싶은 것이다. 산자수명한 지리산 송림은 푸르고, 탑이 서 있는 나지막한 이 언덕은 이 탑이 세워짐으로써 아름다움의 생명력이 샘솟는 곳이 됐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신기로운 일인지, 불교도가 아니지만 나도 가슴에 손을 얹고 고요에 잠기고 싶은 심정의 세계이다.”
석등 불빛창을 받치고 있는 삼발의 공양상. “이 석등과 공양인물상은 배좌와 아울러 삼층 사자석탑의 부속물로 이루어진 것이며 화강석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던 통일신라시대 석조 미술의 뛰어난 솜씨가 맥맥이 전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부슬비 내리는 늦은 가을날이면 이 석등 위에 돋아난 해묵은 돌이끼가 파아랗게 하나하나 살아나서 이 석탑 언덕은 마치 삼층석탑에 새겨진 비천상들이 보여 준 주악과 율동을 일깨우는 듯 한층 더 신비로움과 정적의 아름다움이 뼈에 시리도록 고마워진다.”
뭐니 해도 화엄사의 장엄은 지리산 노고단으로 오르는 뒷산의 배경에 있다. 대웅전 뒤로 가서 절의 뒷모습을 보고 암자로 오르는 대숲이 나는 가장 좋다. 이른 봄이면 토종 매화 꽃 향을 맡으며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 것이 얼마나 청량한지. 늦은 봄이면 차나무에서 새순이 올라 차향을 그리게 한다.
7. 전설의 연꽃
“대하연(大賀蓮, 오오가 하스)
대하연은 연꽃 애호가들 사이에 ‘전설의 연꽃’으로 알려진 세계 최고, 가장 오래된 꽃이다. 일본의 식물학자인 오오가 이치로 박사가 1951년 3월 지바시 도쿄대학 운동장 유적지에서 2000년 전의 연 씨 3개를 발굴하여 그해 5월, 1개를 발아시키는 데 성공, 다음해인 1952년 7월 18일 분홍색 꽃을 피움으로써 탄생하였다.
이 연꽃은 발굴자의 이름을 따 ‘오오가 하스’라 명명되었으며, 연 씨가 지구에서 가장 오랫동안 종자의 생명력을 지닌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당시 세계적인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부여 궁남지의 대하연은 이석호 전 부여문화원장이 1973년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에서 들여와 재배해오다가 2008년 5월 20일, 부여군에 기증하여 심어진 것이다.“ 궁남지에 붙여진 팻말의 내용이었다.
그 무렵 나도 궁남지에 갔었지만 몇 배미의 논에 연밭이 있어 새벽에 걸어본 적이 있다. 그때 대하연의 팻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둘레에 목책을 두르고 키웠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 뒤부터 부여군에서는 궁남지를 대대적으로 넓게 조성하여 지금은 한 번에 둘러보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연밭이 주제별로 구성되었다. 해마다, 연꽃축제가 백제문화제보다 더 성황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지난 7월 24일 전북일보 <금요수필>에 내 수필이 실렸다.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 좀 난감했다. 원고 길이도 1,600자에 제한된 글이었기 때문이다. 계절 감각을 생각해서 마침 연꽃이 만발한 시기라 그동안의 연꽃 기억을 압축하여 되살려내 보았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시의 제목을 빌렸다. 그 글의 마지막 대목이 이렇다. ‘천년 된 연실에서도 싹을 틔워낸다는 연꽃의 꿈을 연화 세상에 와서 다시 읽는다. 진흙 바닥 같은 삶의 터전에서 연심(蓮心)을 챙겨본다.’
글을 잘 보았다는 지인들의 격려를 전화와 문자로 받았는데, 그중 한 지인, 익산에서 문화해설사로 활동한 분의 전화를 받았다. 바로 그 천년 된 연실에서 피어난 연꽃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보도를 통하여 소식을 알았을 뿐, 그 연꽃를 볼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바로 궁남지의 대하연을 기증했던 전 부여문화원장 이석호 선생님 댁에 가면 그 연꽃이 피는데, 언젠가 여름에 꽃을 본적이 있다고 했다. 이석호 선생께 연락하여 화요일에 집에 계신다고 해서 약속을 잡았다.
백제의 고도, 부여는 언제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아닌가. 가지 않으면 오지도 못하는 연인같이 한곳에 붙박여 있어야 하는 운명의 ‘정림사지 5층석탑’과 궁남지, 부소산성, 백마강 등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올 7월에 부여의 백제유적지와 익산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 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부여 읍내에는 곳곳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축하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선생님 댁은 부여 외각인 듯, 앞으로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한옥 지붕을 하고 있었다. 저수지 가에도 연꽃이 한창이었다. 넓은 호수에 한두 척의 배가 떠있는, 연꽃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솟을대문보다 직접 만들었다는 나뭇가지로 엮은 쪽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정원을 꾸미고 있는 각가지 형상의 수석은 마당 안에 우주와 지구를 포함하여 한국의 이미지까지 표현했다고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여름꽃들도 화사하게 피고 있었다. 전설의 ‘대하연’의 종자가 이어져 와서 핀 연꽃은 물론이거니와 돌확에 수련, 대백합, 금강초롱, 서양의 사프란과 야래향까지.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백송과 호피송(호랑이 껍질), 특히 덩굴을 타고 오르는 인동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일제시대 때부터 겪었던 고초들과 일생의 추억들이 집 전체에 담겨 있었다. 선생님의 삶 자체가 인동나무 같았다. 인동초는 백제의 문양이었다. 백제 왕관과 백제대향로에 그 인동문양이 새겨 있다. 인동은 백제문화의 상징이었다.
선생은 평생 백제의 와당을 연구하였다. 백 가지 문양의 와당을 모으기로 하였다. 드디어 백 가지 문양의 와당이 모였을 때, 그것을 탁본하여 꾸민 족자를 이 층 계단 위 벽에 걸었다. 선생은 자신을 고아원(古瓦院) 원장이라고 불렀단다. 그리고 천 년 전의 와당을 종이에 탁본하여 만든 부채의 바람을 쐐주면서, ‘이게 천 년 전의 바람이야!’ 하셨다. 평생 모은 2천여 점의 와당을 한남대학교에 기증하였고, 한남대학교박물관에 가면 그 와당을 볼 수 있단다.
연꽃 문양의 수막새와 연꽃무늬가 변조된 전돌. 백제미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단다. 백 가지 문양의 와당은 백제미술의 정수를 담았다고나 할까. 실지의 연꽃잎은 얇지만, 와당에 표현한 연꽃은 풍선에 공기를 넣은 것처럼 탱탱하여 여인의 젖가슴 같은 생명력이 느껴진다. 연꽃은 이미 연꽃이 아니었다. 백제 와당이 아름다운 것은 지수(地水)화풍(火風)의 영기(靈氣)를 품은 생명력의 표현이기 때문일까.
기억 자로 된 집의 외곽 토방은 모두가 백제 전돌로 꾸몄으며, 쪽대문에 이어진 담장은 버려진 옛 기왓조각을 켜켜이 쌓아서 운치를 더했다. 정원에 우주의 신비가 숨겨진 듯한 돌들로 인하여 나무와 꽃들이 집과 어울려 더욱 아름다웠다. 예술로 승화된 연꽃 문양의 와당이 가득한 집 안팎과 활짝 핀 ‘오오가하스’. 천 년 전의 백제 고도의 한 마을에 있는 듯했다.
선생은 1973년도에 도쿄대학에 <백제 와당>에 대한 강의 초청을 받았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하여 대학교의 대 정원을 산책했다. 연못 앞에서 한 팻말을 발견하였다. ‘오오가 하스’였다. 한 시간 반의 강의를 마치고 총장실에서 차를 마셨다. 강의료를 주는 것을 거절했다. 의아해하는 총장에게 선생은 강의료 대신에 ‘오오가 하스’를 한 뿌리 분양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총장은 난처해했단다. 그것은 이사회의 결정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사정했지만, 아쉽게도 포기했다. 비행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뜻밖에 종이로 포장한 물건을 받게 되었다. “아무 말 마시고 그냥 가져가세요.” 하면서 준 것은 ’오오가 하스‘ 연뿌리 하나였다. 소중히 간직하여 돌아와서 부소산성 아래의 집에 심었단다. 뒤에, 평생 모아온 선생의 문화재로 꾸민 지금의 기와집을 짓고, 해마다 2천 년 전의 꿈에서 깨어난 생명의 찬가를 들으며 백제의 르네상스를 그린다.
작은 연못의 직계 자손인 ‘오오가 하스’는 빗방울이 맺혀 처연하도록 아련했다. 활짝 피어 한 세상을 열었다. 다음 세상을 이어갈 자방을 드러내었고 꽃잎이 하나 둘 열리다가 접혀서 고아한 자태다. 생명 보존의 끈질긴 일념으로 그 오랜 고독의 세월을 숨죽여 왔던가. 적멸의 세계에서 깨어난 모습,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꽃심을 내 가슴에 새겼다. 꽃잎 가장자리는 분홍색 띠를 두른 듯하지만 안 쪽으로 갈수록 하얀 빛이 되다가 연실의 연노란 색과 조화를 이룬다. 연꽃은 꽃과 동시에 연씨를 맺어 더욱 오묘한 생명의 꽃이다. 단 며칠 피었다 떨어지는 꽃자리 가운데 이미 씨가 자라고 있다. 송나라 주돈이의 <애련설> 이후로 세세대대 화중군자로 사랑받고 있지 않는가.
처렴상정(處染常淨)의 꽃. 진흙 속에서부터 맑게 기운을 투과하는 숨구멍을 스스로 만든다. 꽃대 하나로 올곧게 올라와서 가지도 치지 않고 홀로 한 세상을 지키는 삶이다. 물론 모든 홍련의 모습은 그 색이 조금씩 달리하지만, 거의 같아서 어느 것이라도 천년의 생명을 이어오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열반(涅槃)적정(寂靜)의 웅축된 기운으로 피워낸 꽃이 아닌가. 선생의 별 정원에서 만난 ‘대하연’의 후손은 애틋한 신비감이 더했다. 옆에서 바라보면서도 총총한 그리움으로 밀려드는 감회에 젖는 것이리라. (2015)
8. 꿈의 절집, 봉암사
5월은 차꾼들에겐 1년의 차(茶)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 달이다. 차나무의 잎을 살펴봐야 하므로 초파일과 겹쳐지는 그 시기에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 이번 석가탄신일도 둘째 주 화요일, 차(茶) 하기에 최적의 시기였지만 올해는 차나무 생육에 이변이 일어서 많이 늦다는 소식이다. 사진작가인 지인이 보내 준 겨울 봉암사 사진을 본 뒤부터 이번 초파일엔 차(茶) 만드는 일을 제쳐놓고 거기부터 먼저 다녀오려고 벼르고 있었다.
1983년 가을, 유홍준은 그 유명한 지증(智證)대사의 탑비와 부도를 보기 위하여 문경 봉암사(鳳巖寺)에 갔다가 처참하게 출입을 거절당하고 돌아왔다. 바로 1982년부터 80여 명의 납자(衲子)들이 결제와 산 철 없이 정진하는 청정도량이기 때문이었다. 전문 미술사학자로서의 답사였지만 절집은 부처님 모신 곳이지 미술사의 대상이 아니라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어느 스님을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돌아온 후 늘 꿈의 절집이었단다. 그런 뒤 십 년 만에 봉암사 선방의 상량식 때 기회가 생겨서 갈 수 있었다. 십 년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지증대사의 비문 속의 아름답던 봉암사의 전경은 환상 속의 절집 봉암사였어야 옳았다고 했다. 글 속에서만 볼 수 있는……. 1년에 단 하루,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만 축제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한다는 것을 알고 1991년 한국문화유산답사회 7차 답사로 다시 다녀왔다는 것이다.
천하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의 사산(四山) 비명(碑銘) 중의 하나인 지증대사비 속의 절집의 풍경은 전연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로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천하의 문장이란 비문을 읽을 수도 없거니와 비문 속의 봉암사를 본 적이 없으니 낙심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그때의 답사객 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경관이 맑고 빼어나면서도 마음의 평온을 안겨다 주는 가장 넉넉한 기품의 절집이라고 했으니까. 다음 부처님 오신 날 다시 갈 거라고 했으니까. 봉암 결사대회로 담 높은 이 절집을 나도 귀동냥으로 듣고는 갈 수 없는 절로만 생각했다.
서울에서 온종일 걸려서야 갈 수 있었던 봉암사. 20여 년 전만 해도 문경에서 봉암사가 있는 원북마을까지 비포장길이었으니 그럴 만했겠다. 아마도 내가 전주에서 혼자 봉암사를 찾아가려면 하루가 걸렸을 것 같다. 그러나 서울에서 출발한 우리는 원북마을까지 두 시간 만에 당도할 수 있었다.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었지만 1년 중 하루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흰 구름이 산허리를 감아 도는 청록산을 바라보고 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상쾌한 5월이 펼쳐졌다. 원북마을에 들어서니 자동차들이 한쪽에 줄을 서고 있었고 교통 안내원의 인도를 받아 셔틀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산문 밖 초소에서 내려서 걸었다. 거기서부터 계곡을 끼고 비포장길을 걸어간다. 너럭바위들이 많은 계곡을 따라 푸르른 숲 속을 걷는 것만으로 세속의 모든 잡다한 일상을 끊어버리기에 충분하다. 이때쯤 초록빛 속에 빛나는 때죽나무 꽃무리가 환영하듯 종소리를 울려주기도 한다. 한참 가다 보니 개울 건너편에 일주문이 보였는데 일주문 형식부터가 고색창연한 모습이다. 계곡을 가운데 두고 양 갈래 길이 있었다. 초파일 외에는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 않아 절집 앞에 있기 마련인 잡상이 없으니 청량하기 그지없다. 희양산 봉암사는 결코 관광의 대상이 아니다.
노주석을 바라보며 -
경내로 들어서니 많은 봉사자가 공양 간에서 점심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특이하게도 대웅전 앞마당은 오색 연등이 아니라 하얀 등이다. 밤에 등불을 켜면 어떨까. 백련이 가득 핀 연밭 풍경이 그대로다.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설선당 마루에 걸터앉아 땀을 훔쳤다. 봉암사에서 진짜로 멋있는 유물은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한 쌍의 노주석이라고 했으니, 백 등에 싸여서 미리 알고 가지 않았으면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다. 노주석이란 정료석(庭燎石) 또는 순 한글로 불우리 라고 한다. 이 돌 받침은 야간 행사가 있을 때 관솔불을 피워 그 위에 얹어 마당을 밝히던 곳이다. 이런 불우리를 봉암사처럼 옛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평범한 구상으로 그 형태도 단순하지만 둥근 받침돌이 위로 오므라드는 긴장된 맛과 그 위에 얹힌 판석의 듬직스러움이 한 시대의 멋스러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고 하는 말이 그대로다. 전야제 때 불우리에 관솔불을 피우고 연등을 밝히고 탑돌이를 하는 행자들의 행렬이 떠오른다. 희양산의 장엄한 바위산을 이은 봉우리들 속에 들앉은 이 가람 형태가 연꽃 속의 연실인 듯, 연꽃 속의 연등이라! 햇빛 희, 볕 양. 희양산(曦陽山)은 글자 그대로 수행자들의 정진에 뜨거운 기운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곳을 거쳐 간 고승들 사이에서 “우리도 옛날에 봉암사에서 힘 얻었지.”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풍수에 대한 의미를 몰라도 희양산의 정기를 입은 봉암사란 것을 알 만했다.
절집 마루에 앉아 노주석의 관솔불 타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올라오던 노고가 풀린다. 우선 점심 공양부터 하기로 하고 공양간에 가서 순서대로 공양을 받는다. 정성이 깃든 오색 나물들을 곁들인 비빔밥과 미역국 한 그릇, 후식으로 떡도 한 조각씩 나누어 준다. 식사는 큰 선방이나 주위에서 자유롭게 한다. 방바닥은 적당히 따듯해서 삼삼오오 둘러앉아 식사하는 풍경이 다른 곳 같으면 피난민을 연상했겠지만, 이곳, 이날만은 모든 사람이 즐거운 부처님의 탄신을 축하하는 즐거운 자리로 여겨졌다. 아니 그랬다. 열린 방문 하나하나는 신록의 푸른 물이 주르르 흐를 듯한 풍경 사진이어서 또 하나의 맛을 곁들인다. 돈으로 거래되지 않은 부처님이 내린 순수한 공양이다. 음식 대부분이 선 수행하는 스님의 울력에서 나온 것이려니 스님들의 기도 힘을 먹은 셈, 부처님의 가피가 아닐 수 없다. 수행 정진의 정신을 희양산 기운과 더불어 음식으로도 받는다.
봉암사는 전국 각지에서 선禪 수행을 위한 최고의 선승들이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수행 정진하기 위해 찾는 정신적, 상징적 절로 유명하다. 그리고 하루 세 번의 공양, 세 번의 예불, 14시간 이상의 좌선, 그리고 결사의 뜻을 이은 울력(공동노동)은 모든 수행자가 해야 한다. 개인적인 공간도 없고 높고 낮은 구분도 없이 한 방에서 같이 공부하고 같이 자고 같이 수행하는, 전적으로 자급자치 공동체의 삶이다. 배가 부르니 따뜻한 방에 등을 대고 눕고 싶다. 먼 길을 헤매다 고향집에 돌아온 느낌이다.
천년 법문을 품은 봉암사 석조유물
늘씬한 고전미인 같은 봉암사 삼층석탑 -보물169호-
지증대사비문 속의 봉암사 정경은 남아 있지 않고 폐허와 중창을 거듭했으니 지금의 대웅전과 여러 전각은 유적으로의 가치는 없는 셈이다. 극락전만은 옛 목조탑의 형식으로 이 층 구도여서 옛 맛을 풍긴다. 그리고 이 도량을 묵묵히 지켜온 석조유물들은 천 년의 숨결을 느끼기에 유감이 없다. 봉암사 석조유물들은 모두 국가에서 지정한 보물들이다. 불국사 삼층석탑이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이 된 뒤로는 모든 탑은 그 전후로 따지게 된다. 봉암사의 삼층석탑은 불국사 석가탑의 형태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다듬어져 아담하다. 지붕돌의 곡선미까지 살려냈으며 기단부가 훤칠하게 커서 늘씬한 미인을 연상케 한다는 비유가 얼마나 기막힌지. 옥개석의 이끼는 세월을 거쳐 간 선승들의 숨결이 고인 것 같아 숭고미를 더한다. 남원 실상사의 삼층석탑과 유사한 형상으로 상륜부까지 온전하게 남아서 당당하게 선종의 뼈대를 지켜냈다.
지증대사적조탑비와 승탑 - 승탑 (국보315호) 탑비 (보물137호)
봉암사는 선종구산문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이고, 지증대사의 창건설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한문으로 된 문장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나로서는 그냥 신화적인 최치원의 4산 비문 중 내가 만날 수 있었던 두 번째 탑비란 것만으로도 행운으로 생각한다. 히말라야의 티베트 사원에서는 경전을 읽을 수 없는 민중들이 마니차를 돌리는 것으로 경전 읽는 공덕을 쌓는다는 것처럼 말이다. 비문은 하대 신라의 선종을 연구하고 설명하는 논문에서 빠져서는 안 될 글로서, 최치원의 글맛이 이 비문보다 더 잘 나타난 것이 없다고 해서 유홍준에게는 더욱 꿈같은 절이 되었다고 한다. 나도 가까운 시간 내에 그 번역본이라도 읽어봐야 할 일이다. 아슬아슬하게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지증대사탑비 옆에는 대사의 승탑이 있다. 지금은 모두 보호각 안에 있다. 통일신라의 모든 기량이 모인 듯 내가 본 부도들 중에서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이다. 받침돌부터 상륜부까지 균형미가 빼어날 뿐 아니라 각부마다 비천상들의 조각이 선명하다. 악기를 부르고 공양을 올리며 기도하는 천신들의 표정도 살아있다. 치밀한 돋을새김의 정교한 솜씨는 예술성 짙은 장식성보다 고매했던 대사를 흠모했던 임금의 태도까지 짐작게 한다. 지붕돌의 처마 선까지 살짝 들어 올린 것이 매력이다. 떨어진 한쪽 지붕돌 조각에서 오히려 세월을 뛰어넘는 대사의 법문을 들어야 할 것 같다.
백운계곡에서 만난 마애보살좌상 (도유형121호)
봉암사 경내를 벗어나 계곡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계곡은 예로부터 ‘봉암용곡’이라 불려왔단다.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물이 흐른다는 뜻이다. 20여 리에 이른다는 계곡은 옥빛 물줄기가 기묘한 정원수들을 벗하며 넓은 암반 위를 용같이 꿈틀거리며 흐른다. 신록으로 빛나는 숲 속을 용틀임 하는 폭포 소리를 들으며 일념으로 걷는다. 비록 힘은 들지라도 그 용솟음치는 물소리가 계속 기운을 생동케 한다. 마침내 드러난 마당 바위 동북쪽에 마애보살좌상이 고요한 동자상으로 앉아 있다. 앞마당처럼 너른 바위 위쪽 소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비질하듯 경사진 바위 마당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보살상 앞에는 하얀 천막을 친 단이 있다. 저절로 엎드리고 싶어진다. 평소에 사람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 계곡에 갑자기 사람들로 북적이게 되었으니 보살도 만면에 미소를 띠는 것인가. 시끄럽다고 할는지. 그 어떤 소리도 물소리에 잠겨버리고 부처님의 법문 안에 녹아버린다. 기묘한 바위들이 군집을 이루고 거대한 바위틈을 비켜 조금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보니 이 계곡의 위용이 나타난다. 돌 위에 작은 돌로 석탑을 쌓기도 하고 바위틈에서 철쭉꽃도 피어난다. 모든 형상이 법신의 성현(聖現)이다. 폭포수같이 부서져 내리는 옥빛 물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쩌렁쩌렁한 죽비 소리 같기도 하여 폐부까지 시원스레 씻어진다. 마애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쓴듯하고 오른손으로 연꽃 가지를 들었다. 염화미소를 상징하듯 그 뜻을 묻는다.
백운계곡 마애불 앞에서 모든 여독을 내려놓고 다시 내려오는 길. 오를 때는 잘 몰라서 일주문 반대편 길로 올랐고 내려올 때는 일주문으로 내려온다. 오를 때 볼 수 없었던 일주문의 정경을 편액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안쪽에는 ‘봉황문(鳳凰門)’ 편액을 걸었고 바깥은 ‘희양산 봉암사’란 편액이 걸려 있다. 봉황문이란 편액은 고려 공민왕이 썼다고 하는데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지증국사가 와서 보니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계곡 물이 멀리 둘러 백 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봉황문 편액이 걸린 이유이리라.
산문을 빠져나오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용의 허리처럼 길게 늘어지고 있다. 우산을 받고 모두들 차분하게 버스를 기다린다. 날이 좋았으면 희양산 자락의 유서 깊은 신라 시절의 절집을 돌아보려고 하였다. 초파일에 삼사(三寺) 참배하면 복 받는다고 해서다. 빗속에 문경새재를 넘고 넘어 이천의 쌀밥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생각했다. 이 쌀밥이 어디서 왔는가, 편히 먹을 자격이 있는가. 부처님 당시의 선풍을 일으키고자 고칠 것은 고치고 부처님의 근본 말씀대로 해보자는 선승들의 결사 의지를 우리도 생활 속에서 일깨워야 되지 않을까. 천년의 석조유물들이 내리는 법신의 법문이 아니겠는가.
10. 슬프다. 수덕사, 그 옛날의 수덕사여!
예산 수덕사 입구의 난장은 내포 땅의 생산물이 풍부하다는 것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식당가와 상가를 지나서 수덕사 경내로 오른다. 약간은 쌀쌀한 상쾌한 바람결에 살랑거리는 벚나무를 올려다본다. 아련한 봄날의 정취가 무르익는 가운데 우람한 배흘림기둥 네 개가 지붕을 받치고 있는 일주문이 활짝 품을 열고 있다. 총림다운 일주문이다. 1984년 수덕사가 총림으로 승격된 후의 건축물인 것 같다.
수덕사 오르는 길은 저 남녘 지리산의 쌍계사처럼 약간 경사진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일주문에서부터 덕숭산의 온갖 나무들이 작은 새들의 혓바닥처럼 새순을 살랑댄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선남선녀들과 어우러진 봄빛이 화사하다.
돌계단이 앞을 가려 대웅전은 나타나지 않고 계단 끝에 가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대웅전 오르는 돌계단이 몇 개나 될지 헤아려보지 못하였다. 국보 제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을 보기 위하여 어마어마한 성채를 축조해 놓은 것 같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것이 서글펐다. 이래서 유홍준은 '슬프다 수덕사여! 그 옛날의 수덕사여!' 했던가보다. 자연스런 흙길을 버리고 값비싼 돌바닥과 돌계단을 쌓은 결과 중국 무술영화 세트 같은 괴이한 형상이 되고 말았다고 탄식할 만하다. 문화재 전문위원인 건축사가 신영훈 선생은 이런 짓을 막지 못한 것을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단다.
그러나 돌계단을 다 오르고 초파일 연등으로 가득한 마당 옆, 법고각을 감싸고 있는 하얀 벚나무와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순간 돌계단에 대한 못마땅한 생각은 일순에 사라져버린다. 법고각 전각의 공포供抱와 쇠서 모양, 기둥 장식 조각들의 낡은 색채가 전각의 모양과 어울려서 아름다웠다. 자잘한 자주 빛 새잎이 나오고 있는 이 거목이 새 기운을 받아 생기 충천한다. 마당 전체에 그늘을 드리운 나무 아래 빈 의자를 그냥 두고 오면 유죄려니! 내 꿈속의 수덕사는 사라지고 이렇게 거목 아래서 그 옛날의 수덕사를 그려본다. 마치 내가 옛날부터 수덕사와 인연 지은 사람같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전생에 수행자였던 사람들이 이생에서 가족으로 만났던가. 엄격한 어머님 같은 노보살님의 가족은 모두 절집의 인연을 가지고 있다. 보살님이 젊은 처녀 때 부모님 몰래 중이 되겠다고 절로 도망갔다가 도로 잡혀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보살님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보살님은 군인 장교와 결혼해서 아들딸들을 낳았고 장성의 부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리고 노후에는 큰 사찰을 돕는 일로 세월을 보낸다. 그런데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둔 그의 큰딸이 이 수덕사에 놀러 왔다가 비구니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가 못다 한 원을 따님이 이룬 것인가. 이른 봄철, 고목에서 새잎이 나는 것을 보고 그냥 머리를 깎고 싶었단다. 장성의 딸로서 19세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지금은 중견 스님이 되어 불교의 한 문중의 큰 역할을 하신다. 바로 나의 차(茶) 스승인 스님이다. 그리고 15년 후에는 스님의 여동생이 이어서 수덕사로 출가하였다. 이렇게 절집의 인연을 가진 가족을 가까이하여서인지 나도 그의 가족의 일원 같아 이 수덕사가 낯설지 않다.
수덕사에 와서 만난 고목이 어떤 나무였을까 하고 두리번거려지기도 한다. 약관의 나이에 세상의 무상을 보았다고 했던가. 그리고 고목나무의 새잎처럼 절집에서 새로운 생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봄마다 차를 만들고 부처님과 스님들께 차(茶) 공양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현대 차인(茶人)으로써는 가장 오래 차를 만들어 오신 분이지 않을까 싶다. 선방에서 수행을 마치고 세상에 막 내려와서 금산사의 심원암에 주석했는데, 그때 내가 전주에서 다례원을 하게 된 인연으로 만나게 되어 우리는 한눈에 반했던 것이다. 불교신자는 아니었지만, 당시엔 나는 오히려 천주교 신자였다, 차茶 일을 같이 하며 배우고 좋아하게 되어 지기지우(知己之友)가 된 셈이다. 스님을 만나면 나 자신이 늘 청청해졌다. 스승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 만나지 않아도 같은 마음인 듯한 분. 귀한 인연이었다. 어느 때인가 그 임은 말했다. 깨치고 보니 구태여 불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그러나 이왕 불교로 출가하여 뿌리 내렸으니 그 안에서 뜻을 펴리라고 했다.
드디어 국보 49호인 대웅전 앞에 선다. 언뜻 무미건조한 것 같지만 마름모꼴 사방연속무늬의 창살은 이 집의 정숙한 기품을 더욱 살려준다. 부 안의 내소사의 창살문을 흔히 말하며, 꽃 창살 무늬로 유명한 사찰도 많지만, 이 대웅전의 창살문의 격조를 비교할 수는 없다.
수덕사 대웅전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백제계 사찰이지만, 고려 충렬왕 34년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까지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나무로 지은 집이다. 철근을 써도 100년을 넘기지 못하는 건축물이 많은 현대로서는 나무로 된 집이 700년 이상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귀중한 건축사의 한몫이다. 단순하고 화려한 장식과 단청도 없는 저 간결한 모습이 어째서 그리도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는가. 눈길을 확 끌게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발길도 멈추는 현대인에게 이 단순성이 보여주는 간결한 것의 아름다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런 수식이 가해지지 않은 필요 미는 얼른 다가오지 않는다고 유홍준도 말했다. "그러나 안정된 정서를 가진 사람이라면 수덕사 대웅전의 저 간결미와 필요 미가 연출한 정숙한 아름다움에 깊은 마음의 감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도 가벼운 밑 화장만 한 중년 미인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 같은 것이다."
나는 절집을 가면 반드시 주 건축물의 뒷모습을 본다. 절집의 후원을 둘러보는 맛이 참으로 고즈넉하기 때문이고 뒷산의 울창한 숲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덕사 대웅전 뒤는 덕숭산 총림을 가늠할 수 있기에 이 가람이 숲을 이루는 각가지 나무들처럼 모인 승려들의 수행처가 될 만한 까닭이지 않은가. 하얀 꽃이 만발한 키 큰 벚나무가 눈부시다. 백제 시대 국보 343호인 산경문전(山景紋塼)) 전돌의 원관념이 이 대웅전 뒷산에 있는 것이 아닌가.
11. 예산 수덕사에서 꼭 보아야 할 곳
사찰 건축의 대표적인 지붕 형식은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주심포집의 맞배지붕', 앞면과 뒷면의 지붕을 사람 인(人) 자 모양으로 배를 맞대었다고 해서 맞배지붕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목조건축의 대종은 맞배지붕이었다고 한다. 새로운 형태인 팔작지붕이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고려 중기쯤 된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가장 오랜 팔작지붕의 목조건축물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로 유명하다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만 장식하는 것이 주심포이며, 건물을 화려하게 보이게 하려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장식하는 것이 다포형식이다. 맞배지붕에는 주심포가 팔작지붕에는 다포지붕이 어울린다. 다포형식이 전해진 이후에도 주심포가 세워진 것은 단순히 고식이거나 조촐한 집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수덕사 대웅전이 바로 그런 맞배지붕이다.
그리고 바로 이 맞배지붕의 옆면, 한 장의 현대 회화 한 폭을 보는 것 같다. 건축물 부재가 그대로 바깥으로 노출되어 골격을 드러낸 채 간결한 면 분할과 비례미를 나타낸 그림. 색채도 단순한 갈색 조 자체다. 우리의 전통 조각보가 조각 천을 사용하다 보니 아름다운 면분(面分)의 디자인이 되었다. 조상들의 손맛이 담긴 조각보가 몬드리안의 추상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하듯이 대웅전의 옆면 또한 몬드리안의 추상화 같은 단순하고 경쾌한 초현대적인 맛도 느껴진다. 20세기 신조형주의를 창시한 화가 몬드리안. 클레의 그림과 우리의 전통 조각보도 직선의 비례와 색의 조화를 통해 조형미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많이 닮았다.
건축물의 외형은 각 부재가 이루어내는 면 분할의 조화 여부에 성패가 걸린다고 한다. 수덕사 대웅전의 면 분할은 무엇보다도 건물의 측면관에 멋지게 구현되었다. 우리 시대 건축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간결성의 멋과 힘이 거기 있다. 튼튼한 부재의 정직한 드러냄이야말로 이 집이 천 년이 가도 끄떡없음을 자랑하는 견실성의 핵심요소라고 한다. 오래된 미래가 전통의 가치가 아닌가. "둥근 나무와 편편하게 다듬은 나무가 엇갈리면서 이루어낸 변주는 우리의 눈 맛을 더없이 상큼하게 열어준다. 그리하여 수덕사를 답사했을 때 내가 가장 오랜 시간 머무는 장소는 저 대웅전의 측면이 한눈에 들어오는 오른쪽 꽃밭 한 귀퉁이로 되었다."
대웅전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배흘림기둥이다. 배흘림기둥은 기둥의 가운데가 배가 슬쩍 부풀러 팽팽하고 위를 좁게 마무리한다. 지붕이 기둥을 누르지 않게 보이게 한다. 마치 살아 있는 물체가 힘 안 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멀리서 보는 사람의 시각도 안정감을 갖게 한다.
문학기행이라는 특성 때문에 우리는 수덕사의 여러 면모를 살필 수 없었다. 그래도 수덕사에 오면 여기만은 꼭 감상하고 가야 한다고 동료의 손을 끌고 왔다. 수덕사 대웅전이 건재하는 한 몇 번이라도 여기 올 수 있다면 '수덕사는 슬프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덕사에는 여인들의 애틋한 이야기가 많다. 김일엽 문인이 '청춘을 불사르고' , 스님이 된 사연으로 유명해진 이후로 만공스님이 비구니 선방을 창건한 까닭도 있다. 그 후 많은 비구니의 제일 선방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일엽스님은 1896년생으로 본명은 김원주, 목사의 딸이었던 일엽은 조실부모한 후 23세에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삼일운동 후 일본에 건너가 동경영화 학교에 다니다 귀국하여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시인으로서 신문화운동, 신여성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신여성 나혜석 만큼이나 화려한 추문의 주인공이었다고 한다.
또 한 여인의 애달픈 사연이 수덕여관과 수덕미술관에 서려 있다. 수덕여관은 본래 수덕사 일주문 밖에 있었지만 십여 년 전쯤, 불사를 일으켜서 일주문이 더 밑으로 내려왔고 수덕여관을 지키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므로 헐고 복원하였다
수덕미술관에는 고암 이응로 화백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의 전통문양이 배어 나온 현대화도 있었지만, 생각나는 그림 한 점은 우람한 나무를 우러르고 있는 사람이다. 나무를 올려다본 내가 그림 속에 있기 때문일까. 1957년, 고암 이응노 씨가 자신의 예술을 국제무대에서 펼쳐볼 의욕으로 독일을 거쳐 파리로 건너갈 때 그는 이화여대 제자였던 박인경 여사와 동행했단다. 오래전부터 본부인을 버리고 그렇게 살았단다. 버림받은 고암의 본부인은 초가집 수덕여관을 지어 운영하면서 수절하고 살았다.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섭섭함이 조금도 얼굴에 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1968년 이른바 '동백림공작단사건'으로 고암이 중앙정보부원에게 납치되어 1년여를 옥살이할 때 교도소 옥바라지한 분은 이 버림받은 본부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내 파리로 돌아갔다. 조선 여인의 체념 어린 순종을 나타낸 마지막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김일엽 스님의 일화를 화려하다고 해야 한다면 고암 본부인의 이야기는 슬프다고 해야 할지.
감옥에서 풀려난 고암은 이 수덕여관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고 있다. 수덕여관 뒤의 개울가의 너럭바위에 암각화를 새겨 놓고 갔다. 전각자의 이름도 선명하게 '이응로 그림'이라고 새겨져 있다. 유홍준은 내포 땅을 답사할 때 의례 수덕여관에서 하룻밤 묵는 것이 하루의 마지막 일정으로 잡았다. 수덕여관 뒤뜰 고암의 암각화가 새겨진 너럭바위에 올라앉아 술상을 차려놓고 답사객들과 자리를 함께했다고 한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인지 솔바람소리인지 구별이 안 가는 가야산 덕숭산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내포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미움을 되새겨보는 것은 그 밤의 일정이었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의미심장하고 아름다운 문자 추상도라고 할 수 있겠다. 미술사가는 이 문자도(文字圖)를 고암의 서도동기식(西道東器) 그림 중 최고작으로 꼽는다. 어쨌든 어떤 의미가 서린 추상문자는 보기에도 돌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 같기는 하다. 이제 수덕여관과 너럭바위의 암각화는 옛날의 슬픈 사랑이 이루어낸 예술품이 되어 관광객의 방문을 받고 있다.
'아! 슬프다 수덕사여!' 숲 속으로 내리 비치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노란 개나리와 붉은 진달래가 더 이상 수덕사를 슬퍼하지 말라는 듯 봄빛을 자랑하고 있다.
이응로의 문자추상도
21. '오를 때 못 보았던 꽃, 내려올 때 보았네' (순천 송광사에서)
2부 마곡사 연가
탄로가
법주사를 다녀와서
마곡사 연가
신시도 월영대에 올라서
'애기밴여자찡겨죽은바오'를 찾아서
망해사 가는 길
"오를 때 못 보았던 꼿 내려올 때 보았네"
마르지 않는 문학의 샘, 장흥
보림사에서
탄로가
탄로가
- 不在其位, 不謨其政
희미한 태양이 구름 사이에 나타난다. 주위를 살핀다. 처음 왔을 때와 반대인 사임리 쪽으로 들어와서 청련암에서 쉬게 되었다. 초행 때와 달리, 사인암(舍人岩) 앞으로 흐르는 남조천의 구름다리 반대편이다. 사인암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려면 구름다리를 건너서 갑판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된다. 여름이나 단풍철이라면 나무숲과 어울린 절벽이 아름다웠겠지만, 기암절벽만 오롯하게 그 맨살이 드러난 초겨울도 좋다. 오히려 낙엽을 떨군 나목들의 가지 사이로 암벽 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서늘한 모서리를 칼처럼 벼리고 있는 절벽을 오직 소나무만이 지키고 있다. 밝은 날 자세히 살펴보니, 사인암을 품고 있는 산을 받치고 있는 뼈대 바위들이 많다. 빼어난 작품 하나가 있으면, 주위에 비슷한 작품들이 있기 마련이다.
물가의 작은 둔덕에 우탁(禹倬) 선생의 기적비가 소나무 세 그루 사이에 서 있다, 아침 산책을 하다가 둑 아래 한 소나무 밑에 시조 한 수가 새겨진 선돌을 만난다.
춘산春山에 눈 노기는 바람 건듯 불고 간듸 업다
저근덧 비러다가 머리우희 불이고져
귀밋티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가 하노라
우탁 선생의 시조 한 수다. 안내판을 보니, 우탁(禹倬)(1263~1342년) 선생은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태생이며 호가 백운당, 시호는 문희(文僖)이고, 후세에 역동(易東) 선생이라 불리었다. 조선 시대 성종 때 임제광이 단양군수로 재임할 때 선생을 추모하여 기암절벽을 사인암(舍人岩)이라 불렀다. 고려 말, 우탁 선생이 정4품 ‘사인’ 벼슬에 있을 때 이곳을 사랑하여 자주 휴양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아하! 그래서 사인암이구나!
우탁 선생이 사인 감찰 벼슬에 있을 때 충선왕의 부왕의 후비와 간음하는 짓을 하자 백의(白衣)로 도끼와 거적자리를 메고 대궐에 들어 소를 올려 간언했다고 한다. 왕의 곁 신하가 그 소를 펴들고 감히 읽어 내려가지 못하였다. 이를 지부상소(持斧上疏)라 일컫는다. 신하도 임금도 부끄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우탁 선생의 절의(絶義)와 곧음의 정신을 나타내는 바위라는 뜻이었구나. 과연 그렇다. 70여 미터나 된다는 절벽의 모서리는 날카로운 장 도끼를 방불케 한다. 서슬이 퍼런 바람결이 느껴진다.
우 선생의 충의와 대절(大節)은 천지와 산악도 움직일 만하고 경학의 밝음이나 진퇴의 정당함이 뛰어나서 후학의 사범이 되어 백 세에 묘식(廟食)을 할 분이라고 ‘역동서원기’에 퇴계 선생이 썼다고 한다. 역동(易東)이란 이름도 중국의 역(易)을 한 달 만에 익혀서 동(東)으로 가져왔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두 개의 바위에 고어와 현대어로 새긴 우탁 선생의 <탄로가嘆老歌>가 기막히게 절절하다. <<청구영언>>에 나오며 교과서에도 나온다는데 내 기억에는 없으나 이 시조가 귀에 낯설지는 않다, 이제 우리도 백발이 서리어 오는 즈음이라 참으로 가슴을 치는 시구가 아닌가. 돌이킬 수 없는 세월, 늙어가지만 그래도 지금이 좋다만, 젊다면 저 칼날 같은 정신을 써먹을 수나 있을까.
사인암 가까이 가려면 마을 쪽에서는 지금의 청련암으로 들어가야 한다. 청련암 역시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에 의해 창건된 절이었으나 1954년 현 위치로 옮겨와서 사인암 뒤에 삼성각을 짓고 승려의 수련장으로 사용한다. 청련암 모서리를 돌아가니 청정수가 흐른다. 한 사발 들이켜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기이하게도 사인암과 그 뒤의 절벽 사이 좁은 틈새에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다. 앞에서 볼 때는 전연 그 뒤로 해서 절벽 위를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바윗돌을 쓰다듬듯 올려다본다. 마치 파리한 비단으로 바윗돌을 감싸서 차곡차곡 비딱하게 혹은 길쭉하게 쌓아놓았다. 어떤 건축가나 조각가가 저리도 추상화같이 쌓고 조각할 수 있을까. 자유분방한 형태의 탑이다. 추사 김정희도 하늘에서 내려온 그림 같다고 했다.
계단을 오른다. 가파르고 좁아 조심스럽다. 입구에 세모난 선돌에 다른 시조 한 수가 새겨져 있다. 청련암에서 만든 모양이다. 역시 우탁 선생의 탄로가 한 수.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은 가시덩굴로 막고, 찾아오는 백발은 막대로 치려고 했더니,
백발이 (나의 속셈을) 제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세월을 막으려는 의지보다 더 빨리 와버린 백발이다. 고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다. 어찌 자연스러운 일을 자연으로 가로막을 수가 있단 말일까. 고졸한 선비의 풍류가 아닐 수 없다. 늙는 줄도 모르고 살다 보니 이렇게 백발이 서리고 있으니. 현대 사회는 백발도 검게 하고 얼굴의 주름살도 없애는 기술이 있는 것을. 하지만, 흰 머리칼을 염색하고, 주름을 편다고 한들 그 사람에 서린 나이를 어찌 감출 수 있으며, 어찌 기력을 젊게 돌릴 수 있단 말인가. 고고한 선비의 정신과 감성이 묻어난 인간미를 느낀다. 고려 말의 이 시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로써 국문학사에 길이 남아 있는 획기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계단을 끝까지 올라 삼성각에 참배하고 한숨 돌린다. 삼성각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본다. 절벽 끝의 상판 바윗돌이 바로 눈앞이다. 삼성각의 지붕 바로 위에 걸쳐져 있다. 네모난 떡판 같기도 하고, 바둑판 같은, 탑 끝의 상륜부에 오른 듯하다. 하늘 높은 곳에서 희어진 소나무 가지가 가리키는 아래가 멀게 느껴진다. 흐르는 물줄기를 즐기면서 바둑판을 앞에 놓고 있는 선비처럼 보이기도 한 소나무다. 우탁 선생의 표상이라도 될까. 이곳을 자주 찾은 우탁 선생과 후대의 시인 묵객들이 와서 즐겼을 풍경을 상상해본다. 봄여름 가을의 풍치는 더할 나위가 없었겠다. 싸늘하게 날카로워 서릿발같이 고매한 선비의 절미(絶美)에다 옷을 입히면 어떨까, 어느 철 다시 오고 싶다. 막대와 가시덩굴로 막을 수 없는 길을 백발이 가로막을까 몰라.
요즈음에는 새 머리칼을 심기도 하고, 얼굴뿐 아니라, 몸 전체를 성형도 한단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란 착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라 한다. 그래서 돈 앞에 무릎을 꿇고 돈줄에 서는 돈을 신으로 우러러 쫓는다지 않는가. <탄로가>를 읊기보다 탄식가를 부를까 한탄 가를 부를까.
정치판이나 기업 판이나 사람이 만든 조직에는 돈과 권력이 신인가 보다. 신은 신인데 귀신임에 잠시 뒤에는 헛것임이 증명되지 않는가. 정치인들의 모습이 그러하며 돈 귀신의 노릇에 눈멀어 ‘항공기 회향’ 사건을 일으킨 아무개 항공사 부사장 일 같은 귀신 장난이 많은 세상인 것 같다. 잘 모르겠지만, 예술분야라고 뭐 다를까. 분명 사인암이 말하는 뜻은 제정신을 차리라는 말이다.
不在其位, 不謨其政 (부재기위, 불모기정). 논어에서 배운 이 말이 시대를 넘어 오늘에도 얼마나 적격한 말인가. 가슴 깊이 닿으면서 그 누구, 어디에도 적용되는 말인 것 같다. 우탁 선생이야말로 벼슬에 있을 때 죽음을 각오하며 임금의 부당함을 상소했고, 자리에 물러났을 때 지방으로 칩거하여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그 자리에 있을 때 월권 하지 않았으며, 물러난 뒤에 정사에 상관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고 관련도 없는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만 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인 것 같다. 새삼스레 삼갈 일임을 챙긴다. 내 일상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시정의 일을 말할 수 없음이다. 모르는 일은 전문가에게 묻고 배우고 직접 관찰하고 체험할 일이요. 알아도 다 말하지 못할 일이 많다. 그 자리의 소임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 사람답기가 쉽지 않다. 늙고 힘없어도 꼿꼿이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조용히 자기의 일을 할 뿐.
비단으로 싸인 듯한 바윗돌들. 비단이 세월에 벗겨지기도 하고 찢기기도 했다. 긴 세월 옷 벗겨진 맨살의 돌까지 모두가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풍모와 정신을 품고 있는 사인암의 절리(節理)가 자꾸만 떠오른다. 스산한 소식이 많은 이 세모에. (2014년 12월)
법주사, 팔상전과 희견보살상
법주사 팔상전
속리산 법주사 하면 절 풍경보다 입구에 있는 40여 년 전의 정이품 소나무가 먼저 떠오른다. 4년 전 춘삼월의 폭설 때 이 소나무의 가지가 부러졌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이 일었기에 그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옛날과는 너무나 변화된 주변 환경이어서 그 소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처음엔 알아볼 수 없었다. 비록 한 가지가 잘려나갔지만 여전히 그 수관(樹冠)은 수려하다
하늘을 가린 참나무들이 울긋불긋한 오리 숲 터널. 계곡에 물은 많지 않으나 맑은 하늘을 인 나무숲이 물속에서 거꾸로 음영을 그리고 있다. 어젯밤 짙은 안개가 내려서인지, 낙엽이 쌓인 숲이 품어내는 향기가 폐부 깊숙이 배어들어 몸과 마음이 맑아진다. 숲의 향기가 하루 내 코끝에 맴돌아 거룩한 향공양을 받는 기분이다. 맑게 정화된 마음으로 '호서제일가람'이란 편액이 붙은 일주문을 들어선다. '속리산대법주사'란 전서로 된 편액은 서산에 있는 개심사 편액의 글씨와 너무나 흡사하여 숲을 지나는 동안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를 고쳐 세워 준다. 오리숲 길에서 가다듬은 마음으로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을 지나고 천왕문을 통과하자니 저절로 경건해진다.
아! 만나고 싶었던 '팔상전'
1984년 화순의 쌍봉사 목탑이 불타버렸다는 비보를 들은 후 유일한 예로 남은 국보로서의 목탑이 팔상전이다. 보통 사찰에 들어서면 대웅보전 앞에 석탑이 있기 마련이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부처님의 무덤이기에 부처님의 몸을 상징한다. 법주사는 석탑이 없는 대신에 이 팔상전이 탑이다. 몇 십 년 전에 스쳤던 팔상전을 늘 사진으로 소식으로 접하다가 드디어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인 성도 과정을 참배하게 된다. 신라 553년 의신조사가 창건 이래 임란 때의 소실과 조선 인조 때 다른 전각과 함께 중건을 거쳐 1969년 무렵 해체 복원한 것이다. 이 층 기단 위에 5층 목탑, 층마다 점점 좁아지는 처마 선이 활짝 피어난 꽃잎 같아 화려하게 핀 연꽃 형상이라고 해야 할까. 층마다 네 귀의 공포 조각은 또 하나의 꽃 같이 아름답고 목조 특유의 부드러움과 아늑함이 있어 포근하여 친근하다. 석가모니의 성도 과정의 깨침을 뜻하여 팔(捌) 자는 깨칠 팔 자라 한다. 물론 여덟 팔로도 쓴다. 각 층의 모서리에 귀면 상을 붙여 모든 악을 물리치고 있다.
쌍계사, 선암사, 범어사에서도 볼 수 있었고, 큰 사찰이라면 팔상도가 걸려있는 전각이 있기 마련이다. 모두 다 한눈에 팔상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우선 팔상전 앞의 배례석에서 예의를 갖추고 육바라밀을 의미한다는 여섯 계단을 올라 전각 안으로 들어간다. 특이하게도 밖에서는 5층으로 되어 있으나 안에서는 한 통으로 되어 있다. 마치 금산사 미륵전이 밖에서는 3층인데 안에서는 한통속인 것과 같다. 그리하여 가운데는 4면 벽으로 된 통 기둥이 상륜부까지 이어져 있다. 한 면의 벽에 두 폭씩 석가모니의 팔상이 걸려 있다. 팔상을 다 보려면 한 바퀴를 돌아야 하고 그리되면 자연히 부처님 일생을 참배하는 탑돌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두 면의 팔상도 밑에 부처님의 법륜상이 앉아 있고 나머지 앞면은 항마촉지인 상과 뒷면은 열반상이 누워 있다.
법주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한 의신조사의 뜻대로 속세를 떠나 인도로부터 가지고 온 불법의 진리를 펼 수 있는 터임에 틀림없었던 것 같다. 천여 년의 세월을 넘기면서 소실되고 중창을 거처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펼쳤던 불법의 진면목들이 있었다면 어디에서 구현되고 있을까. 속세를 떠나 깊은 산에서 불도를 닦으며 진리의 빛을 밝혔던 법력에 의해서 오늘날 이 세상이 이렇게 발전했을까. 이 가람에 석등이 네 기나 있는 것은 그를 입증하는 것도 같다. 특히 국보 5호로 지정된 쌍사자 석등의 아름다운 조각이 대변하듯, 진리의 빛을 드높이 올려 두루 비추려 쌍사자가 온 힘을 다해 화사석을 떠받치고 있지 않은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사자 둘이 서로 무슨 말을 하는 듯도 하며, 두 발에 예쁜 신발까지 신고 키 발까지 세워 화사석을 돌리고도 있는 것 같다. 그 오랜 세월 키 발로 석등을 받치고 있느라 힘들었을 텐 데도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리하여 천 오백여 년 동안 세상은 변하여 조용하던 절 집 문턱 앞까지 자동차와 사람 물결이 밀려드는 것일까. 대형버스가 물밀듯 들어오며 오리숲길 앞에는 저잣거리가 야단법석이 따로 없다. 번뇌가 곧 보리(깨달음)이며 중생이 부처이고, 승속(僧俗)이 하나가 된 세상이 된 듯하다. 언뜻 보기에 법주사의 가람 배치가 어수선한 것 같음은 원래의 배치가 후에 변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원통전 앞에 희견보살상’이란 석조인물상이 있다. 이는 보살상과는 거리가 먼 형상이다. 이 석조인물상이 희견보살이라 명명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 새로 해석된 신앙을 나타낸 것이란 설이다. 이 석조인물상은‘봉(捧)향로 공양자상’으로 부를 수 있으며 불법의 가르침을 얻기 위하여 온몸을 태우며 공양을 드리는 모습이기도 하다. 일본강점기의 사진을 보면, 당시에는 석조인물상의 앞쪽에 본래 미륵불상을 모셨던 전각, 산호전(용화전)이 있었다. 가람 배치 면에서 미륵불과의 관련성이 있다. 따라서 석조인물상은 미륵불을 향해 향을 공양하는 모습의 공양자를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동서축을 일직선으로 석등과 석연지의 존재, 석조인물상 뒤에 석등, 석연지를 한 줄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미륵불에 대한 일련의 공양 (향공양, 등 공양, 정수 공양)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당시의 법주사는 미륵 신앙의 중심도량이었다. 통일 신라 이전에는 이 지역이 삼국의 접전지였으므로 백제 유민들이 미륵하생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륵 도량을 세웠다는 설이다.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율사가 백제 유민으로서 미륵사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금산사에서 이룩하고자 했던 뜻을 법주사의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잇고자 하였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지금은 가람배치 축이 달라졌다. 일주문과 대웅보전까지 남북일직선 상 금강문과 사천왕문, 팔상전과 쌍사자 석등이 배치되고 옆으로 원통보전과 미륵불이 배치되어 있다.
뭐니 해도 사찰의 주 전각은 대웅보전이다. 이 전각의 지붕은 이층이지만 내부는 통청이다. l층이 높아 2층 탑 같은 형상이다. 공포가 많은 다포식이어서 화려하고 계단 돌도 예쁘다. 이런 전각은 마곡사에서도 같은 형태의 대웅보전을 볼 수 있다. 마곡사에는 대웅보전 아래에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명광전이 따로 있다. 대웅보전에 들어가서 예를 올렸다. 보통 대웅보전의 주불은 항마촉지인 상의 석가모니불인데, 주불을 비로자나불로 모시고 있다. 수인의 지권인도 왼손을 감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로 보아 '대적광전'이라고 하지 않은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대웅보전의 삼존불이 이 사찰의 품을 말하고 있다. 지금의 시대가 부르는 것은 화엄 사상일지도 모르겠다만, 화엄사상과 미륵사상, 불교의 법 전체가 한 통으로 형상화된 것으로도 보인다. 법주사는 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삼라만상의 대응과 조화의 이치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와 같은 이치에 인간이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모든아름다운생명들!
"단풍이 들고 국화가 만발할 때 사람들이 놀고 즐기는 것이 봄에 꽃과 버들을 즐기는 것과 한가지다. 사대부 가운데 옛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중양일(음9월 9일) 에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짓는다."라고 <일양세시기>에도 말했다. 시월 마지막 날의 밤안개를 가르고 이른 11월의 첫날 오늘의 나들이가 그런 날이었던가 싶다. 부처님을 참배하여 마음도 맑히는 은혜를 입었고 단풍도 즐겼다. 찹쌀 전병에 감국을 눌러 부친 감국전이나 그윽한 국화주을 대신한 머루주와 찹쌀 떡 한 조각이 충분한 감흥을 돋우어 주었다.
(2008/11/1)
법주사 희견보살상
마곡사 연가
마곡사 연가
해가 짧아 벌써 어둠이 깔린다. 찻물이 끓고 차를 우리고 찻물 흐르는 소리에 오늘의 풍경이 뒤따라온다. 애틋했던 봄 마곡의 추억까지. 단풍 빛으로 둘러싸인 산골짜기에서 여유 있게 거닐지 못하고 총총히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기분을 찻물 속에 갈무리한다. 지난가을 장면들을 단풍잎처럼 곱게곱게 다시 줍는다.
시월의 마지막 날이 낙엽의 카펫 위에서 단풍 꽃으로 피었다. 마곡사 일주문에서부터. 이렇게 읊으며 걸었다.
곳곳에 단풍이고 곳곳에 단풍꽃이네 / 화사하다 못해 붉게붉게 타오르는 /
빛깔 뒤, 머언 데서 들려오는 듯 / 풍경소리 너머에서 / 부르는 듯한
이명 같은 손짓 / 앞에도 단풍이고 뒤에도 단풍 꽃인데
마곡사의 창건 기록은 분명한 것이 없다. 신빙성 있는 사료로는 조선 철종 2년(1851)에 작성된 <사적입안>이라는 자료이다. 1650년 효종 원년에 각순선사가 크게 중창한 이후부터 큰불이 났던 정조 6년 (1782)까지의 기록이 비교적 믿을 만한 기록이라고 한다. 이 기록으로 신라 말 보조체징 (804-880)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어 통효 범일, 보조국사, 도선, 각순 등이 이 절과 연관되어 전해 오고 있을 뿐 임진란 이후부터 기록들이 전한다. 마곡의 이름 유래는 보철 화상이 법을 얻어 오자 사람들이 삼森처럼 많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와 사방에서 이 절로 법을 물으러 오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그 모습이 마치 삼이 서 있는 것 같아서 마곡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극락교 아래로 흐르는 회지천을 가운데 두고 북원北院에는 대광보전, 대웅전, 심검당, 그리고 요사체와 범종루 등이 대표적인 전각들이다. 옛날에서 훨씬 많은 전각이 있었다고 한다. 남원(南園)의 전각들은 주로 수행 도량이었다. 해서 남원에서 수행력을 닦아야 극락교를 지나 북원(北園)의 부처님을 친견하러 갈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불자님들은 북원에서 부처님을 만나고 다시 극락교를 지나서 천왕문과 해탈문을 빠져 사바세계로 만행을 떠난다. 대광보전 옆으로 돌아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은 양편에 가을꽃이 잔잔하게 발걸음을 인도하며 아래쪽 요사체의 높게 쌓아올린 토담 굴뚝과 기와 담장 곡선이 너무 아름답다. 이곳에 올라 뒤돌아서면 대광보전과 측면의 요사체의 처마선과 극락교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보물 제801호인 대웅전 뒤뜰을 지나서 계곡 쪽으로 내려가면 징검다리를 건너서 태화산 속으로 들어간다. 계곡 길을 통과하면 다른 마을길이 연결된다.
북원의 너른 마당에 들어서면 5층탑이 발걸음을 먼저 붙잡는다.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이 탑은 고려 말에 라마교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상륜부의 금동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금탑이라고 불렀다.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이런 탑을 이 외진 산속에 세운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큰 모험이고 실험적인 사건이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제작하기 힘든 것으로서 원나라에서 수입하여 온 것으로 본다. 일층 탑신과 2층 탑신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상륜부는 청동제인 풍마동으로 만든 라마식 보탑이라고 한다. 13-14세기 당시 마곡사가 밀교적 색채를 받아들였던 대표적인 절이다. 고려말기의 대표적 이형異形탑으로 한국 석탑 조영사(造營史)에서 새로운 실험 작이라 평가하고 있다. 석탑 안의 유물은 임진란 때 약탈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곡사는 여러 번 중창 불사와 화재로 수난을 많이 겪었다. 최대의 중흥기를 맞이하였던 시기는 12세기에서 15세기 후반 사이였다고 한다. 대광보전은 단층으로 넉넉하게 편히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안에서는 단층이지만 외부에서는 2층탑의 모습을 하고 있는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석가여래를 주불로 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의 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전체적으로 마당에서 보면 대광보전과 그 위쪽에 위치한 대웅전의 2층 구조 모습은 중층의 목탑처럼 보이고, 또한 지세를 이용하여 장엄한 모습을 연출해 내고 있다. 대광보전은 수평적이고 위의 대웅전은 수직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마곡사의 절묘한 조화이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대광보전의 비로자나불을 뵙고나 가자고 친구의 손을 잡고 법당으로 들어갔다. 사찰에 가면 전각의 현판 글씨를 보는 재미도 있는데 마곡사 대광보전의 현판은 강세황의 유려한 글씨란 것이 새삼 다가왔다. 마침 사시예불 중이었다. 이 법당에 들어오면 예상을 뒤엎고 부처님이 서쪽에 앉아 계신다. 1788년 중수를 하였고, 다시 1831년 중창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중간에 누군가에 의해 변형된 건물이라고 본다. 법당 공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보고자 한 그 시대 스님들의 생각이 엿보이는 곳이다. 이런 구조는 다른 사찰에서도 볼 수 있는 곳이 더러 있다. 통도사 영산전과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과 화엄사 각황전이 그렇다. 이러한 배치는 많은 대중이 법당에 들어와 설법을 듣는데 적당한 방법이며 이런 절들이 모두 화엄 종찰의 성격을 띠고 있다. 1788년 중수를 하였고, 다시 1831년 중창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중간에 누군가에 의해 변형된 건물 지도 모른단다. 두 손 합장하고 우리는 진리의 부처님 상을 탑돌이 하듯 돌았다.
백의관음보살
220여 년 세월에 바랜 우물 천장의 고색 단청들이 은은하게 빛나는 지붕 아래에서 용들의 비호를 받고 닫집에 앉아 있는 부처님. 어느 불상보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비로자나불에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정성을 다하여 삿자리를 짰다는 앉은뱅이가 삿자리가 완성되던 날 스스로 법당 문을 걸어서 나갔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그 자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데….
우리는 부처님 전에 삼배하고 부처님의 뒤로 갔다. 사찰에 가면 나는 꼭 불상의 뒤나 전각의 뒤를 돌아 나온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것이 절집의 풍경이다. 옛날에는 불상을 돌 수 있게 불상을 조금 앞으로 조성하였다. 비로자나불 부처님 뒤편 벽에서 놀랍게도 백의관음보살께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광보전의 후불벽화, 백의관음보살도이다. 너무나 선명하고 아름다운 벽화인데 지금 막 그림을 끝낸 것 같이 선명하고 인상이 부드러운 관음보살이다. 백의보살 가슴 부분 영락은 녹색으로 치장했고 여러 포인트는 붉은색으로 채색되어 찬연한 백의관음보살을 우러러보고 저절로 합장 배례하였다. 보살 옆에서 선재동자도 보살을 우러러 보고 있다. 한쪽에는 유려한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 있는 정병이 있다. 한 발을 육중하게 붉은 연화좌를 밟고 있는 뜻은 무엇일까. 발밑의 연화장 세계를 관음(觀音)하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이 아름다운 백의보살을 환희심으로 작별하고 조용히 물러 나왔다. 나올 때 두런거렸다. 사진을 찍어올 일인데 하고 말이다. 경망스럽게 사진을 찍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곳이었다. 비로전 다른 벽에도 여러 벽화가 흥미를 불러일으켰는데 예불 중이고 시간도 촉박하여 경건하게 물러 나왔다.
어찌하여 남방화소의 본고장이라고 했는지 짐작 가는 대목이었다. 백의관음보살도는 조선 후기의 회화의 일면을 짐작하게 했다. 마곡사에는 조선 숙종 때 조성된 괘불이 있는데 남방화소南方畵所의 품격을 갖춘 불화라고 한다. 조선의 문예부흥 시기의 흔적이 이 마곡사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1782년 대법당을 비롯한 1천여 칸의 전각들이 불타버리는 화재를 만나게 된다. 이후 제봉체규라는 스님이 화주로 나서서 마곡사의 전각들을 다시 중창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사역을 시작한 지 4년여 만에 1788년 대법당을 완공하였고, 2년 뒤인 정조 14년 (1790)에 자신의 기도로 원자(순조)가 탄생하는 경사를 맞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왕실의 도움을 받아 중창 불사는 탄력을 받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정조 19년 (1795)에는 태실로 봉해지고 도내 수사찰의 직인까지 받는 경사가 겹쳐 이후 마곡사의 사세는 일취월장하였다.
대광보전의 백의관음보살을 다시 보고 싶을 것 같다. 여름에 내소사에 가서도 대웅전 후불벽화인 백의관음보살도를 보았는데 그보다 훨씬 선명한 국내 최고의 수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세기 조선회화의 특징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다. 당시 왕실의 화원들 못지 않게 사찰에서도 화사들이 많았을 것이다. 수많은 탱화들과 벽화들을 그리면서 불심을 닦았을 것이 아닌가. 연홍과 상훈 등 15인의 화사들이 그렸으리라. 대형 괘불과 벽화를 그리는 동안 극락교 아래 흐르는 내川는 오방색의 물감으로 닦은 불심이 흘렀으리라. 마곡사의 붉은 단풍잎에 어리는 백의관음보살이 내 마음에 새겨졌다. 선재동자처럼 언젠가 다시 훌쩍 그 백의관음을 만나러 가야지.
(2009/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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