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아름다운 시절
내 사랑, 화암사
아주 먼, 먼 옛날
내 고장 완주군 상관면의 이야기
연초록을 따라가는 '느바기' 순례길
섬진강 둘레길을 걸으면서
아름다운 시절
와유도臥遊圖
함안 조趙 씨의 본향을 찾다
대한을 참배하다
유배의 땅, 보물섬
전등사의 맛
역동적인 부산
34. 내 사랑, 화암사
내 사랑, 화암사
그를 알기는 십수 년 전부터였다. 몇 번을 만나러 갈 때마다 동행에 따라 느낌이 달랐지만, 조용히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몰래 찾고 싶은 숨겨진 연인 같았다. 그래서 안도현 시인도 <화암사, 내 사랑>이라고 읊었을까. 그러나 나는 그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에게도 그를 만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은근한 당부였는지 모른다. 몇 번 만났다고 말할 수 있으랴. 지금도 나는 말할 수 없다.
홀로 적적하게 찾고 싶은’ 절집. 드디어 그렇게 찾았다. 조용한 시골 길로 접어들면서는 차도 인적도 드물다. 유명세를 치르는 절집이라면 시끌벅적한 상가나 음식점 등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구멍가게 하나도 없다. 들깨나 옥수수밭 사이로 멀리 보이는 앞산만이 푸르름에 넘실댄다. 불명산(佛明山)이라 이름 지었으니, 깊은 산에 불명을 감춘 곳일까.
화암사는 완주군 고산현 동북쪽 불명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들길이 끝나고 갑자기 울창한 숲속 길로 접어들면 저절로 탄성이 가슴 밑에서 올라온다. 시원한 숲 터널이 일주문이다. 피서철이지만, 작은 주차장에는 자동차도 넉 대뿐이다. 아이들과 피서 올 곳은 아니기에, 조용하고 한가로워서 마음에 꼭 든다.
이 길은 조선 시대 이전 그 이전부터 선(禪)객과 선(仙)객들의 발자취로 돌바닥이 매끄럽다. 투벅투벅, 터들하고 삐죽한 돌길을 밟아야 한다. 마을의 잡다한 일상은 바윗돌을 걷자마자 사라지고 일심이 되어 저절로 선객이 된다. 벼랑 벽과 벼랑 사이로 난 바위골짜기 사이를 비집고 오른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크고 작은 물줄기가 작은 소를 만들고, 숨이 찰만 하면 돌 의자에 걸터앉아 산바람을 마시면 다시 걸을 힘이 솟아난다. 겨울에 왔을 때 벼랑을 타고 내려오던 물길이 하얗게 얼어붙어서 빙벽을 이루었는데, 봄이 되면서 녹아 흘러 땅 위 생명의 젖줄이 되었겠지. 산팽나무, 산벚나무, 댕강나무, 갈참나무 등 노거수들이 만든 짙은 그늘 사이로 조각난 빛이 스칠 뿐이다.
매미가 인기척을 들었는지, 반기는 듯 외마디를 지르고. 바위벽을 타고 내리는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정다운 인사말처럼 들린다. 바윗길을 20여 분쯤 걷다 보면 철 계단이 나타난다. 철 계단은 1983년에 조성했다니, 그전의 객들은 얼마나 어렵게 바위를 타고 올랐을까. 그 감회를 생각하면 지금은 가벼운 산책로처럼 과분하다. 철 계단의 철벽 망에 붙은 연꽃이 곳곳에 환하다. ‘꽃 비 내리는’ 절이 아닌가.
150여 개의 계단이 끝나는 곳에 작은 개울을 건너는 너럭바위 네 개가 있다. 이 징검돌을 해탈교라 이름 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미 골짜기 산문을 어렵사리 올라왔으니 절집 앞의 일주문, 사천왕문 등 겹겹의 문이 있을 필요도 없었다. 징검돌을 건너면 계단 길 위에 우화루(雨花樓)가 올려다 보인다.
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 이름이 전설을 담고 있다. 바위에 꽃이 피는 절집? 연꽃이 핀 바위 위에 지은 절. 옛날 임금님이 꿈에 공주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연꽃을 찾았다. 부처님이 꿈에서 알려주었다는 곳. 깊은 산속 바위 위에 연못의 용이 올라와서 연꽃을 키웠다는 이야기. 그 연꽃을 따와서 공주의 병은 낫게 되고 임금님은 그 바위에 절을 지었다. 깊은 산속 연화대에 앉은 절집이다.
우화루 앞의 도랑을 건너는 나무다리가 튼튼한 돌다리로 바뀌었다. 새것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어쩌랴! 우화루의 바라지창이 활짝 열렸다. 반갑게 객을 맞아주는 것 같아 환해지는 마음이다. 처음으로 화암사가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것 같아 이제 내가 그를 만났다는 말을 누구에게 해도 될 것 같다. 우화루 밑은 성벽을 쌓은 듯하다. 세 칸이지만, 가운데 칸의 중심부에 기둥 하나를 더 세워서 네 칸처럼 보인다. 우화루 옆으로 붙은 세 칸의 여염집이 붙어 있는데, 두 칸은 살림집이고 한 칸이 대문 격이다. 여남은 계단을 올라 우화루 옆으로 들어가면 밑에서는 이 층으로 보이던 누각은 일 층이 되어서 네모난 마당의 귀퉁이에 선다.
작은 마당에는 극락전과 우화루가 남북으로 마주 본다. 적묵당과 불명당이 동서로 마주 보아 네 건물이 공평하게 마당을 나누며 서로 처마 끝이 닿을 정도다. 극락전의 용마루가 우화루보다 약간 높고, 적묵당 지붕이 불명당보다는 약간 높은 듯하여 그 격의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또한 본래 부처의 뜻 같지 않은가. 좁은 마당을 둘러싼 네 건축물이 전혀 답답하지 않다. 극락전과 불명당 틈으로 철영제가 보이고, 우화루와 불명당 사이로는 명부전이 훤히 보이는 여유가 있다. 적묵당 마루에 앉아서 한참 숨을 고른 뒤 극락전에 들어서 참배를 한다. 절로 몸을 낮추어 경배하게 된다.
절을 하면서 올려다본 아미타불, 부처를 안치한 닫집은 화려하고 신비하다. 꿈틀거리는 용 한 마리가 부처의 머리 위에 머물고, 주위를 날고 있는 비천상과 화려한 연꽃 등이 환희심을 일으키게 한다. 바위에 연꽃을 키웠다는 전설의 용일까. 부처를 장식하는 탱화나 장식의 문양 등은 알 수 없는 비밀 암호 같다. 극락의 세계를 상징한 표상이지 싶다. 그 깨달음의 내용이 현실에 있는 형상이 아니기에 초현실적인 추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리라. 부처를 표현하는 형상과 문양은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끝없는 수행으로 마음을 밝히라는 불명의 뜻일까. 험한 세상 속에서도 깊이 감추어진 부처의 세계를 찾으라는 뜻일까.
극락전 뒤를 돌아보았다. 육중한 처마를 받치는 백제식의 하앙식 공포라는 것. 앞 쪽은 용의 얼굴 모양으로 화려하게 조각했지만, 전각 뒤의 공포는 단순하게 처리했다. 주변에 여름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어 오랜만에 절집은 잔치를 맞은 듯하다. 뒤안길에는 잎을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가 곳곳에 무더기로 피어서 산자락 뒷길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꽃비 흩날리는 누각', 극락세계가 사철 꽃동산을 이루면 얼어붙는 빙벽 길에도 불명의 꽃비를 내릴 것이다. 바라지창이 활짝 열린 우화루에 달린 목어도 오늘따라 생기를 얻어 날카롭게 삐져나온 이빨이 애교스럽게 보인다.
해우소 뒤 언덕으로 오르면 화암사 중창사적비가 서 있다. 중창비에서 화암사의 내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화암사는 아마도 삼국시대 말엽부터 절터가 있었던 듯하다. 원효와 의상이 기도했다는 원효대와 의상암이 있었다는 중창비의 한 구절이 전해진다. 이 절은 고려 때 첫 중창이 이루어졌다. 수 세기를 거치는 동안 전란에 소실되는 비운을 맞은 뒤, 1611년에 와서야 우화루와 극락전의 중건을 이루었고. 그 뒤로 몇 번의 복원과 중수를 거치고 오늘에 이르렀다. 모든 건축물은 복원 중수하면서 전 시대의 양식을 전통적으로 고수하게 된다. 이전에 백제의 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백제식의 하앙식 공포가 남아 있게 된 것이 그 이유이다. 백제계 건축 요소의 인식을 환기하는 촉매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단청을 덧입히지 않은 절집은 시인의 말처럼 잘 늙은 절집. 곱게 늙은 절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겉은 늙었으나 그가 지닌 정신은 날로 새롭다. 저리 곱게 늙어가서 아름다운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면 사람으로서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래전에 불교 신자도 아닌 내게 법명을 지어서 보내준 큰스님 한 분이 떠올랐다. 바위골짜기를 쉬엄쉬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수월관음을 만난 선재동자처럼 환한 마음으로, 화암사는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도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의 계단이라고.
(완주에 있는 삼사, 화암사, 안심사, 위봉사 순례를 다녀와서.)
35. 아주 먼, 먼 옛날
- 진구사지에서
아주 먼, 먼 옛날
- 진구사지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돌계단을 막 오르는데 ‘깍 깍’, 까치의 외침이 허공을 울린다. 까막까치 두 마리가 유희하듯 날갯짓을 하며 반기는 것 같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적당한 무늬를 그린다. 모처럼 따뜻한 겨울날 오후다. 산책을 나왔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바람이 인다. 목도리를 휘감고 누군가의 흔적이라도 찾을 듯 경건한 발걸음을 옮긴다. 외롭게 보이긴 하지만 우람한 석등의 위용이 빈 들판을 품고 있다.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보물 제267호인 석등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는 진구사지(珍丘寺址)다. 고요하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우리나라 석등 중에서 두 번째로 큰 것 같다.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 앞의 석등이 우리나라 석등 중에 가장 크지만, 이 석등의 조각도 화려하고 아름답다. 아름답기로는 남원 실상사의 석등이 아담하고 빼어나다. 이 석등도 그에 못지않다. 기다란 안상(眼象)이 팔각의 면마다 조각된 기단 돌이 안정감 있게 받쳐주어서 전체적으로 탄탄한 구성이다. 화사석과 기단 사이의 기둥은 장고형으로 되었는데, 위는 앙련(仰蓮)과 아래는 복련(覆蓮) 형식에 더하여 구름무늬의 조각 미가 뛰어나다. 석등 가까이 가서 자세하게 조각과 이음새를 관찰한다. 앙련의 꽃잎 하나가 깨어진 부분이 있고 받침돌 한 부분이 깨어진 것 외에 완전하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석등이 있는 걸로 보아 이 절의 사세(寺勢)도 상당히 크고 넓었던 것 같다. 이전 시대의 석등, 불국사 대웅전 앞, 부석사 석등은 얼마나 간결하고 날씬한 아름다움이 있는가. 이 때에 와서 비대한 장고형이 나온 것도 시대적 특징이다.
기단석의 한 모퉁이에 걸터앉아 햇살을 받는다. 화사석의 팔각마다 열린 화창에서 진리의 법 등을 밝혔던 그 시절을 그려본다.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한줄기의 바람에 실려 오는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 높지 않은 산기슭에 자리한 이 진구사지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산이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어 마치 꽃송이가 활짝 열린 형세다. 연꽃 속의 심청이마냥 나는 그 가운데 포근히 앉았다.
석등이 있는 곳 뒤로 돌계단이 있다. 한쪽은 이끼 낀 옛 돌 그대로이고 한쪽은 새로 보수하여 온전한 계단이 되어 있다. 팔 층 정도 되는 계단을 오르면 넓은 터에 부서진 탑 자제만 한쪽에 얼기설기 포개어져 있다. 5층 석탑 정도는 되지 싶다. 대웅전이나 본전 자리 앞에 그 석탑이 놓였을 것이다. 주변의 마을 집들은 그 당시는 모두 절집의 부속 건물 자리였지 않을까 싶다. 깊은 산골도 아니지만, 첩첩의 산들이 겹쳐진 가운데지만 높지 않은 산들이어서 아늑하다. 예부터 임실은 섬진강을 끼고 있어 물산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곳이었다지 않은가. 이 절에서 얼마나 많은 진리의 말씀이 퍼져 나갔을까. 많은 사부대중이 모여서 화창에 불을 밝히고 법회를 열던 시절의 웅성거림, 예불을 알리는 목탁 소리, 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여기저기서 환으로 들리는 것 같다.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법음과 진리의 빛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을까. 폐허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기에 현대에서 찾지 못하는 갈증 같은 그 무엇을 이런 빈 절터에서 그리는 걸까.
바람이 잦아지자 햇살이 법 등의 빛처럼 석등과 나를 감싼다. 문득 첼로 음률이 다시 들린다. 무반주 첼로를 들을 때면 왜 나는 땅속 깊이로 들어가는 것 같을까. 첼로란 악기가 바닥에 대고 활을 켜서 웅숭깊은 저음을 내는 것이기 때문일까. 땅속의 소리를 길어 올려서 내는 소리 같은 것은. 고대 문명이 스러진 유적지라든가, 나무 한 그루 없는 황토색 짙은 협곡이 펼쳐지는 지구의 민얼굴을 더듬게도 한다. 지구의 땅속을 깊게 뚫어 구멍이라도 나면 우주 공간의 어딘가에서 미아가 되는 기분이 되기도 한다. 우주 비행사처럼 우주 공간 어디쯤에서 아득한 지구별을 내려다보며 내 삶의 여정을 뒤돌아보기도 한다.
어떤 모임에서 첼로 독주를 들었던 그때도 그랬다. 그 전날 몇 군데 충주와 강원도 지역의 폐사지를 답사했던 곳이 떠올랐다. 첼로의 리듬이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곡명이 ‘Long, Long ago'였다. 아스라한 음률이 먼, 먼 옛날로 나를 이끌었다. 첼로 연주에 묻혀 나는 옛 절터의 주춧돌 한 조각이 된 것 같이 고요해진다. 침묵의 호흡을 가다듬는다. 심정사태초(心靜似太初). 마음이 고요하여 태초와 같기가 이와 같을까. 상상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영역일 것이다. 하늘을 품은 이 땅에서 오간 생명의 궤적이 얼마일까. 하늘과 땅이 무심하게 보이는 것은 어떻게도 무엇으로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충주의 청계산 자락의 이끼 낀 숲 속에 숨겨진 청룡사지, 보각국사(1320-1392) 부도는 앞에는 배례석과 석등, 뒤에는 탑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부도의 몸돌에 새겨진 신장상이 배흘림으로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것이어서 특이했다. 우리나라 석조미술의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 년 세월을 견딘 걸작으로 남아 있는 원주의 법천사지의 지광국사 탑비도 국보의 위상에 걸맞은 조각미가 뛰어났다. 이 탑비의 조각은 신이 만든 최고의 걸작이라 불릴 만큼 정교하고 화려한 문양이라고 할 정도이다. 경복궁 마당에 가면 범상치 않은 부도 하나가 늘 눈길을 끄는데, 그 탑이 바로 지광국사의 승탑(국보 제101호)으로 일본 강점기에 밀반출되었다가 복원하여 경복궁에 있게 되었다. 옮기는 것이 위험하여 고향인 법천사지에 가지도 못하고 박물관으로 옮기지도 못하였다. 그 탑의 고향에 와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함께 있지 못하는 유물의 아픈 사연을 알게 되니 감회가 깊었다. 첼로 소리는 여전히 들판을 배회한다.
원주의 거둔사지에 갔을 때, 그 오묘한 기분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넓은 마당 귀퉁이, 빈 절터의 수문장인 느티나무 아래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거대한 절터 마당 가운데 서 있는 외로움에 지친 오층 석탑과 나누지 못한 이야기. 주변 건물지의 주춧돌의 자국에서 읽은 천 년 전의 건축 기법으로 집을 짓고, 그곳 땅의 숨소리를 들으며 누군가의 자서전을 읽듯 황량한 폐사지의 전설을 들추고 싶었다. 옛 선각자들의 법음이 시대를 아우를 만큼 높았기에 오늘까지 국보급 탑과 탑비들로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이 아닌가. 어느새 나는 그 빈 절터의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신비한 첼로 소리에 머물고 있다. 'Long, Long ago'
화들짝 고요한 침묵을 깨우는 까치 울음. 죽비 소리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가야 할 곳을 일러주는 것인가. 그날, 느긋이 옛 흔적의 소리를 듣지 못한 아쉬움을 이 진구사지에 와서 회포를 풀어본다. 어디선가 다시 첼로 소리를 들을 때면 황량한 폐사지에 숨겨진 아득한 이야기를 그릴 것이다. 먼, 먼 옛날이 미래가 되는 날을.
36. 내 고장 상관면의 이야기
-남관진 만마관을 찾아서,
내 고장 완주군 상관면의 이야기
-남관진 만마관을 찾아서
그곳을 지난다. 한벽루에서 상관면 쪽에서 흘러내려오는 물길을 바라보면 지금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옛사람이 달 놀이를 하면서 옥 같은 물이 절벽에 부딪혀 안개를 이루는 풍경을 보고 한벽청연(寒碧靑煙)이라 일컫고 즐겼던 곳. 시절 인연 따라 지금은 한벽교가 만들어져서 교통은 편리해졌지만, 그토록 아름답던 물길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깝다. 사계절 아름다운 숲 속 길을 통과하면 상관면 신리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승암산 자락에서부터 가까운 산부터 먼 산까지, 오른편 남고산성 자락부터 시작한 첩첩 산이 겹쳐 이루는 사이는 산 숲 계곡을 방불케 한다. 마침 양쪽 산자락이 단풍이 들기 시작하여 색색이 수를 놓고 은행나무 가로수들의 노란 잎이 알맞게 익어서 가을의 정취가 무르익고 있다. 겨울에도 새봄의 산벚꽃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산자락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길이다.
나는 전주에서 볼일을 마치면 거의 매일 한벽당 아래 다리를 건너서 좁은목을 통과한다. 지금은 신리에서 서부 우회도로가 생겼기 때문에 외곽도로로 나갔다가 전주시내를 거치고 이쪽 좁은목으로 올 때도 있다. 좁은목을 지날 때마다 도시의 일거리를 다 잊어버린 채 숲 속을 산책하는 기분이 된다. 저절로 고요해져서 하루의 일을 정리하면서 혹은 모든 것을 잊고 딴 세상으로 드는 것 같다. 오래 전, 내 아이들이 초등학교 시절 전주 북부의 덕진동에서 남고산성 밑의 좁은목까지 와서 물을 받고 개천에서 빨래도 하고 놀았던 때를 추억하기도 한다. 그때는 수원지가 형성되어 마치 호수 같았기 때문이다.
남원 쪽에서 전주로 들어올 때는 두 좁은목을 통과해야 한다. 가끔 남원에서 전주로 올 때, 임실을 지나고 슬치고개를 넘어올 때마다 나는 전주 쪽 좁은목보다 더 으스스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첩첩 높은 산이 가로막은 협곡을 통과하는 일이 마치 요새를 지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좋은 경관을 바라보는 맛이 좋지만 옛 조선시대를 생각하면 얼마나 험난한 길인가 말이다.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지만 전주에 오래 살다보니까.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자 이곳에 남고산성과 관련한 남관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연 그랬다. 오래 동안 전주에서 살다가 노년기에 접어들자 상관면 신리로 이사하게 되었다. 10년째 상관면민이 되어 살면서 이곳의 지리와 문화가 새삼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상관면의 여러 마을을 다녀보기로 하였다.
지난 해, 예부터 듣던 정여립의 생가가 상관면에 있다 했지만 어디가 생가 터였는지 몰랐다. 최근에 발굴하여 월암 마을의 정여립 터라고 추정한 곳에 정여립을 기념하는 정자를 세우게 되었다. 마침 정여립의 죽도 가는 길의 답사로 마제봉을 넘어 상관 저수지까지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순례길 표시인 '달팽이' 그림의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지고 저수지를 둘러서 소양으로 죽도까지 이어지는 길목의 길을 걸어 보았다. 저수지 둘레길은 물을 끼고 걸을 수 있는 천혜의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조선시대 ‘기축옥사의 희생양’ 정여립의 한 서린 눈물이 배인 길이었다. 정여립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전주 남문 밖(전주시 색장동)의 파쏘(봉) 아래 집터는 파헤친 후, 숯불로 지져 그 맥을 끊었다는 신정일 우리 땅 걷기 이사장의 설명이다. 월암마을 한 모서리가 바로 그 파쏘였던가.
진동규 시인은 그의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단다.
"살던 집은 텃자리까지 파버렸습니다. 그 이웃까지 뒤집어 파서 앞내 끌어 휘돌아 가게 하였습니다. 깊고 깊은 소를 만들어 버렸지만 그때 그 집 주인이 반역했다고, 그래서 전주천 물이 거꾸로 흐른다고 소문내고 그런 속셈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댁 건너 마을 사람들은 상죽음(上竹陰), 하죽음(下竹陰) 하면서, 구름처럼 모여 들었던 선비들의 죽음 그 떼죽음을, 서방바우, 각시바우, 애기바우, 그 피울음을 상댁 건너 하댁 건너 점잖던 자기 마을 이름 위에 불러보기도 해 보지만 어떻게 변명 말씀 한번 엄두를 못 내고 죽어지내 왔습니다. 그 집 뒷산 월암에 달이 뜨면 댁 건너 사람들은 월암 아래 소에 들어 대수리를 잡는답니다. 관솔불들을 밝히고 주춧돌 기둥뿌리 항아리 깨진 것, 뭐 그 집주인 뱃속까지 빨아 먹고 자란 대수리들을 잡는답니다."
그런데 그 대수리를 잡던 소는 흔적도 없다. 저수지 물에서나마 상상해 보았다. 그런 정여립의 대동정신을 이 시대에 구현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면 현대에 정여립의 정신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주와 완주는 원래 하나였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갈려 있을 뿐이다. 지금 완주군은 옛 전주부와 고산현이 합해서 이루어졌다. 옛 전주주는 백제시대 완산이라 하였고 비사벌이라고도 불리었다. 555년에 완산주라고 했고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 완(完)을 의역하여 전주로 고쳤다. 1403년 (태종 3)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하여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935년 전주면이 부(府)로 승격되어 독립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완주군으로 개칭하였다. 전(全)은 온전할 전이고, 완(完)도 완전할 완, 온전할 온으로 지명도 같은 의미다. 전주와 완주 일대에 오래전부터 완산승경 32경이 있었던 것으로 같은 고장임을 알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전주팔경이 있지만, ‘완산승경 32경’이 정해진 것은 조선 중기쯤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당시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 구진벌 전쟁터가 최근 사적지로 정해지기도 했다. 정복규 씨가 이렇게 정리하고 밝힌 완주 승경 중에 상관면에 속한 것은
고달귀운 - 구이면과 상관면의 고덕산, 만마도관 - 상관면 용암리의 만마관, 사대병암(四大屛岩) - 상관면 대성리의 사대원,죽림천엽 - 상관면 죽림리 등이다.
만마관 이야기
우리나라는 백두대간을 등뼈로 하여 여러 산맥이 뻗어나가기 때문에 동부는 산간이요 서부는 낮게 평야를 이루며 바다로 이어진다. 상관면은 동부지방이니 산이 겹쳐 골짜기를 이루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골짜기마다 터를 지키며 마을을 이루었다.
완주 승경 중의 하나가 상관면 용암리의 만마관이라니 그곳을 찾기로 했다. 남쪽에서 전주부성으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용암리의 만마관을 통과하여야 했다. 만마관이 있었기 때문에 부성의 남쪽 관문은 남관이요, 상관은 전주부로 들어서는 위쪽의 관문이니 상관이었다. 전주부성에서 상관을 지나 남관에 오면 네거리, 내아마을 쪽 입구에 남관진창건비가 세워져 있다.
역시 슬치를 넘고 용암마을 입구 좁은목을 지나칠 때 늘 천혜의 요새 같다는 내 느낌은 적중했고,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남고산 어귀의 좁은목에서 용암리 좁은목까지 40여 리에 걸친 산골짜기를 만마동이라고 했다. 좁은목 신작로 옆에 차를 세워두고 개천으로 내려갔다. 전주문화원 원장과 사무국장의 선도로 성터를 찾아 올랐다. 돌과 잡목이 어지러운 땅을 헤치고 조금 올라서니 돌을 쌓아둔 곳이 보였다. 성곽이라고 볼 수 있는 성터가 쭉 높이 이어졌다. 나는 더 올라가지 못했다. 두 분이 끝까지 올라가서 보고 내려왔는데 꼭대기 너머는 산들이 첩첩이 이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큰길 건너 맞은편에도 만마관문을 이은 성곽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원장의 말은 틀림없이 이곳 만마관의 형세가 험준하니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이곳을 뚫기가 어렵기 때문에 웅치와 이치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했다. 남관진이 설치된 만마동 일대는 중국의 가장 험준했던 촉도와 진관에 비견할 만한 천험을 갖춘 요새라고 말할 수 있다고 남관진창건비석에 쓰여 있다.
만마관은 2층 구조물이었는데 위층은 6칸의 문루로 되어 있고, 아래층은 부채모양의 철문을 단 홍예문이었다. 그 밖에 관문을 지키는 장졸들의 수직방守直房 3칸이 있었다고 한다. 전주 북쪽에 서 있는 '호남제일성'의 문루처럼 이곳에 다시 만마관 문루가 세워진 모습을 상상해본다.
만마관에서는 통행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남원 방면에서 전주를 향하던 길손들은 관문이 닫히면 문이 열리는 다음날 아침까지 문밖에서 하룻밤을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단다. 현대에도 군부대가 형성되면 그 마을이 활성화되는 것처럼 옛 시대 이곳에도 진이 형성되었으니 병졸과 부대원들의 거처들이 필요하여 바로 아래의 쑥재에 마을이 생겼다. 그래서 내아마을이 되었다. 이렇게 마을이 형성되다보니 이 마을 어른들이 들은 바로는 아침 등교 시간이 되면 학교 가는 아이들의 행렬이 줄을 지었다고도 한다. 남관초등학교 뒷길의 어느 집 앞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그것은 전라안찰사가 지났다는 표지석이었다. 그리고 근처에 도랑이 나 있는데 옛날의 마을 빨래터임을 증명하는 빨래판이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그 옆길이 전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그러다가 신작로가 생기자 이 길은 마을의 동네길이 된 것이다.
또한 관문 밖의 용암리 노구바위마을에는 주막과 여인숙이 성업을 이루었다. 용암리의 노구바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개천을 지나 산정마을로 들어갔다. 멀리서 보아 늙은 개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노구바위 혹은 노고바위마을이라고 불리었단다. 그리 높지 않은 산능선 아래 옹기종기 여러 집들이 편안히 앉아 있다.
이 노구바위마을에서 신관 사또 변학도가 남원 부임길에 점심을 먹은 것이 <춘향가>에 나올 정도로 당시로서는 유명한 곳이었단다.
"전주부성 동쪽머리 만마관 골짜기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하는 전주천 물살은 좁은 목을 지나, 강모가 내내 하숙하고 있던 청수정의 한벽당에 부딪치며, 각시바우에서 한바탕 물굽이를 이루다가 남천교, 미전교, 서천교, 염전교를 차례차례 더터서 흘러내리며 사마교를 지난다.“ -최명희의 ‘혼불’ 중에서도 이렇게 서술이 될 정도로 만마관의 위치는 중요했다.
조삼란(趙三難) 이야기
중국에서는 같은 값의 돈인데 곱절에서 다섯 배까지 더 받는 복돈(福錢)이라는 게 있었다. 태산에 올라가 소원성취를 빌며 기도를 할 때 향 값으로 바친 향세(香稅)가 횡류된 것이며, 그 소원성취의 효험이 그 돈에 남아 있기에 프리미엄이 붙어 두 곱 내지 다섯 곱으로 값이 붙어나간 것이다. 그런데 만마관에서도 재미있는 복돈 이야기가 전해온다. 만마관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첫 관문이기도 하고 전주부성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기도 했으니 그 장터가 번성하였으리라. 그리하여 이 장터에 삼난전(三難錢)이라는 한 냥을 닷 냥으로 바꾸는 복전이 있었다. 조삼난(趙三難)이라는 가난한 선비 집 돈인데 그런 이름이 붙은 데는 이유가 있다. 사대부로서 술집을 하기 시작한 것이 일난(一 難)이요, 돈 버는 동안 형님한테까지 술값, 밥값을 받아낸 것이 이난(二難)이며, 돈을 번 다음 재산을 형님에게 돌리고 독서하는 선비로 되돌아 간 것이 삼난(三難)이라 하여 조삼난인데 그분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면 급제는 기약된 것이라 하여 팔도에서 서생들이 그 돈을 사러 몰려들었다 한다.
공기골 이야기
남고산성 서문지에 남고진사적비가 서 있는 것을 남고산성 답사 때 본 적이 있다. 창암 이삼만이 쓴 비에 의하면, 순조 11년(1811년)에 개축을 시작해 그 이듬해 완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마관萬馬關' 이라고 미려하게 쓴 창암 이삼만의 행서체의 현판 글씨가 남아 있다. 창암 이삼만은 전주에서 태어나서 중기부터는 상관면 공기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다. 관문 안의 내아마을 깊은 골짜기를 올라가면 공기골로 이어진다.
공기골은 편백숲을 열어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 찾게 되었다. 2년 전만 해도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자주 찾은 적이 있다. 편백숲이 몇 군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나는 아직 아래 부분의 숲에만 가 보았고 그 아래에는 온천이 나오는 곳이 있어 온천수를 받아오기도 하였다. 지금은 마을 사업이 활성화되어 나무로 물통을 만들어 발을 담그고 쉬어가는 쉼터를 만들었다. 최근에는 찜질방이 지어져서 활용되고 있다. 공기골 마을이나 내아마을은 어느 곳을 200미터 이상 깊이 파면 온천이 나온단다. 죽림온천장이 폐쇄되어 많은 아쉬움이 있지만 언젠가 다시 열리지 않을까 기대한다. 상관편백숲이 많이 알려져서 주차장이 3개나 만들어진 뒤로는 나는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아래부터 걸어 올라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공기마을은 예부터 한지를 뜨는 곳도 있었는데 현재는 그 흔적을 볼 수 없다. 다만 편백숲 입구에 커다란 정자나무 몇 그루가 마을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으며, 창암 이삼만 선생의 이름으로 지은 창암정이란 누정까지 세워져 있으니 다시 창암 선생을 기리게 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또한 선생의 묘소가 고덕터널 밖에 자리 잡고 있다. 창암 이삼만 선생은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 후기 서예가라고도 할 수 있으나 추사 생전에 이상만의 글씨를 몰라보고 하대한 적이 있다가 나중에 그 가치를 다시 인정함으로써, 호서의 추사 김정희와 호남의 창암 이삼만으로 대변될 만큼 큰 업적을 남긴 서예가이다. 추사 김정희가 중국의 서예를 본받아 차츰 자신의 서체를 형성하여 글로벌한 글씨체로 유명하다면 창암 선생의 글씨체는 가장 한국적인 서예를 구현한 전북의 서예가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창암 선생의 글씨체가 다시 조명 받아 전시회도 크게 연 바 있다. 창암의 글씨를 다시 조명해보는 기회도 될 것이다. 창암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조선진체의 완성자라고 자부할 수 있다는데, 그 특징을 본다면 무의도성으로 인하여 충만하게 된 자유스러움과 자연스러움과 질박함과 까칠한 삽기를 동시에 다 느낄 수 있다고 김병기 교수는 말했다. 강암 서예관이 소장하고 있는 창암 선생의 작품을 살펴본다면 충분히 그 느낌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상관면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으며 공기가 좋아서 도시인들의 쉼터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최근에는 상관이 나뭇골로도 유명하여 정원수로 활용되는 곳이 많다고 한다. 가까운 전주시민들과 한옥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이곳 상관 주변에서 관광을 비롯하여 웰빙과 힐링까지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근에 신리역이 없어지고 광장이 생겨서 주차장 역할을 하여 마치 도시를 방불케 한다. 그러나 신리역 뒷산 마제봉 오르는 길이 이곳 마을의 둘레길이 되어 저수지까지 이어져서 자주 찾는 곳이다. 마을에서 전주에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언제나 먼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내일 또 털거덕거리는 기차소리를 들을 것이며 마을 입구의 다리를 건너서 대흥천을 따라 숲속을 거닐듯이 좁은 목을 지날 것이다.
내아마을
내아마을에 들어서니 아주 큰 느티나무 몇 그루가 방문객을 먼저 맞는다. 마을에 큰 정자나무를 보면 대개 그 마을의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마을살이의 진면목이 그 나무들의 나이테에 새겨졌을 것이다. 상관면으로 이사 온 후 몇 년 전에 이곳저곳 차가 들어가는 곳까지 마을을 살펴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살기 좋고 공기 좋고 경관도 좋게 보였는데, 오늘 이곳에 들어와서 보니 전혀 새마을이 되었다. 화실을 운영하는 백당 윤명호 선생께서 마을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정자의 이름도 관선정이라 했으니 과히 선경에 가깝다고 해도 손색이 없다. 전국이 둘레길 걷기 열풍을 비롯해서 친환경 웰빙이 유행하는 때를 맞아 힐링이란 말까지 더하여 관광객의 관심을 자극하는데 이 마을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집집마다 문패를 그 집의 특징을 살려서 ‘정자나무집’ 등으로 그림처럼 붙여서 재미있었다. 화가의 솜씨로 벽화를 그렀기 때문에 여느 마을의 벽화보다 뛰어나 동양화 전시회가 열리는 것 같았다.
내아마을 깊은 곳에는 다람쥐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다람쥐를 보러 갔다. 산으로 오르는 길옆으로 개천이 흐르고 길가의 단풍나무가 마침 알맞게 붉은 옷을 갈아입어 찬란한 빛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산기슭에 자리 잡은 할아버지 집 마당에는 다람쥐 울이 가득 차 있었다. 철망 속을 들여다보니 다람쥐들이 긴 통 속에 들어앉아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 소리가 들리니까 숨어버린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모이를 주러 오면 알고 다 쫓아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 다람쥐를 기르게 된 연유가 있었다. 겨울이 되면 먹을 것이 없어지니까 다람쥐들이 내려오게 되기를 거듭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먹을 것을 주니까 겨울이 되면 으레 다람쥐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할아버지는 다람쥐 집을 지어서 다람쥐를 기르게 되었다. 내아마을은 침엽수림과 돌담이 많고 밤나무, 참나무류가 많으니 먹이감이 충분하였다. 다람쥐가 서식하기 좋았다. 이 마을 다람쥐 일부들이 추운 겨울을 보내기 위하여 할아버지의 가족이 되었고, 봄이 되면 산으로 돌아갔는데, 할아버지는 다람쥐의 생태에 맞게 집을 짓고 앞으로 이 마을에서 다람쥐 생태학습장을 열고 싶어 한다. 도시인들이 상관면의 곳곳을 방문하면 테마별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아이들과 동행하는 부모들이라면 이곳 다람쥐 생태를 살펴보면 즐거운 체험이 되리라고 믿는다.
다람쥐할아버지는 이곳에 들어온 지 20여 년 되는데, 가족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게 되자 쓸쓸하여 다람쥐를 가족으로 맞아들였을까.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맥가이버로 통한다. 그동안 많이 아파서 병원에 다녔다고 하는데, 마침 이웃에서 보일러를 고쳐달라는 전갈이 왔다. 보일러 기술뿐 아니라 잎이 떨어진 나무에 인조열매까지 만들어 달고 다람쥐 집뿐만 아니라 쓰레기 태우는 집까지 예쁘게 만들어 세웠을 정도이다. 아이들이 다람쥐 학습체험을 많이 오게 되면 할아버지는 신나지 않을까 싶다.
내아마을은 남관진의 만마관이 설치된 일과 관련하여 형성된 마을이기도 할 것이다. 관아의 안쪽에 있다고 하여 내아이기도 하고 다른 설은 원래 이 골짜기에 쑥이 많아서 쑥재라고 부르기도 하였단다. 또한 숯을 구웠기 때문에 숯골이 쑥골이 되기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어쨌든 마을 경로당 문패에 내애內艾마을이라 하였으니 쑥골이라는 뜻도 있다. 내애라고 부르기도 하다가 결국 지금은 내아마을이 된 것이다.
내정마을
점심때가 되자 내정마을의 이장 집에 초대를 받아 들어갔다. 대문의 문패에 표길운, 표길용 씨가 붙은 집을 만났는데 두 분은 형제간이었다. 표길용 씨는 이 마을 이장 직을 맡고 있다. 삼대째 이 마을을 지켜온 가문이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열매를 다 떨구고 있지만 남아 있는 대추나무의 굵은 둥치가 이 집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이 집을 지을 때 심은 나무라고 하니까 벌써 20여 년으로 이 집의 둘째 딸과 동가내기쯤 된다. 해마다 실한 열매를 안겨주는 이 대추나무가 조상의 덕을 기리게 하는 뜻으로 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제상에 대추는 가장 중요한 과실이며 씨가 하나이므로 임금을 상징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 마을 뒷산에는 무통바위가 있단다. 표 씨는 어렸을 때 산전山田 하는 일에 아버지 따라 다녔다. 산골짜기에 터를 삼고 살기 때문에 논이 많지 않았다. 높은 산기슭에 다랭이논을 가꾸었단다. 그런데 무통바위는 아무리 가물어도 바위 속에서 물이 흘러내려 대롱을 대고 받아 식수로 사용하고 마른 땅을 적실 수도 있었단다. 지금도 그 바위에서는 물이 흘러 나와서 촛대봉을 넘는 사람들의 목을 축이기도 한단다. 처음에 표 씨 할아버지는 충남 아산 지방에서 이곳으로 내려오셨다. 남의 땅에 집을 지어 살았는데 아버지가 열심히 노력하여 지금의 터에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표 씨는 어렸을 때를 회상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에야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로는 어땠을까.
상관면 내정마을에서 남관초등학교에 걸어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같이 농사일을 해왔기 때문에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 그리 옛날도 아닌데 농촌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들렸다, 이 마을 청년들은 지게대학을 나온 것을 자랑 삼아 이야 한단다. 모두들 도시의 대학을 동경했겠지만 그것은 그림의 떡 같은 이야기였으리라. 아니 부럽지도 않을 만큼 당연한 일이었을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하교 뒤에는 지게를 지고 다녔으니 그럴 법도 한 이야기다. 지게대학의 작대기과를 나왔다고 자랑삼아 이야기 하면서 너털웃음을 웃는 그는 영락없이 넉넉한 마음씨의 농사꾼이었다. 지게를 지면 지팽이 혹은 작대기로 지게 발목을 탁,탁 두드리면서 박자를 맞추어 노래를 불렀단다. 마치 모를 심을 때 부르는 농요가 있었듯이 산골짜기에서는 지게 노래가 있었던 것이다. 겨울의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풋나무를 한 짐씩 져서 허청에 쌓아서 말려야 했단다. 산골에서는 주로 각종 콩 종류와 담배, 보리, 무, 배추 등이었는데, 고냉지 작물이어서 인기가 높았던 모양이었다. 상관의 농산물은 칡넝쿨 끈으로 묶어서 상관의 농산물인 것을 표시하여 전주 장에 내놓았다. 그렇게 하여 살림을 일구고 지금은 밭농사는 물론 한우도 많이 키우게 되었고 아들도 좋은 회사에 진출하게 되었다.
표 씨는 우리가 지금 웰빙 음식으로 선호하는 보리밥이나 고구마 감자 등은 아주 먹기가 싫단다. 방 하나에 수숫대를 쌓아 그 위에 고구마를 쟁여 놓고 겨울 내 먹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을 당사에는 어머니가 감자나 고구마를 식사로 대신했을 때도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들 때 그랬듯이 예전에 보리밥이나 감자 등을 많이 먹었던 사람들은 보리밥이나 고구마를 쳐다보기도 싫다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부인 서정숙 씨는 마을의 개천 아랫마을에서 태어나서 건너편 윗마을의 표 씨에게 시집왔다. 도시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토백이 순수한 산골 아낙네다. 음식 또한 순수 그 자체의 마을을 닮아 있었다.
시어머니 모시고 남편과 농사일을 하면서 삼남매를 키운 전형적인 부인으로 성실하게 살아왔다. 지금은 마을 부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음식 솜씨도 좋거니와 남편을 도와서 큰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든 일에 능하여 음식 솜씨도 알만 하였다. 우리가 집에 들어서자 언제 준비된 것인지 벌써 한 상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자연 그대로 손수 가꾸어 거둔 음식 재료로 차린 음식상은 토속적인 맛이 일품이었다.
풍성한 식탁을 맞으며 표씨부부는 김기동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딸부잣집으로 불리던 김기동씨 집에 모를 심을 때면 품앗이를 하지 못하였으니 품삯을 받았단다. 그리고 흰 사발에 고봉으로 주는 쌀밥이 어찌나 맛있던지 몰랐다고 회심의 미소를 띠기도 했다.
37.
연초록을 따라가는 '느바기' 순례길 섬진강 줄기
연초록을 따라가는 ‘느바기’ 순례길
지난 설 연휴 때 나는 서울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순례문화원의 사무국장이라고 했다. 마로니에 나무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인터넷 검색을 하였더니 내 글이 뜨더란 것이다. 마로니에 나무에 대한 더 상세한 글은 없고 다만 그 기회에 좋은 글을 여러 편 읽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을 들여서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했다.
내가 처음으로 전주에서 차일(茶事))을 하게 되어서 반갑다고 찾아주신 비구니 스님은 꼭 연꽃 같았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한눈에 서로 반했고 다 뿐 아니라 덕진 연꽃도 같이 보러 갔고, 송광사 마로니에도 보러 갔었다. 나는 천주교인이었고 스님은 천주교재단 학교를 나와서 불교로 출가했다. 우리는 종교 이상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쓴 글을 순례문화원 사무국장이 읽고는 마로니에에 대한 이야기를 더 알아봐 달라고 했다.
몇 년 전에 완주 송광사는 개축 불사를 많이 했다. 대웅전 앞의 보기 좋았던 마로니에는 베어져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웅장하고 꽃도 화려해서 그 나무를 보기 위하여 들러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무뿌리가 대웅전 밑바닥으로 스며들어서 건물에 지장이 있다고만 들었다. 구전으로 전해온다는 유서 깊은 이야기 한 토막이 순례단에 의해서 내게도 전해졌다. 구한말에 천주교가 박해받았을 때 신자들이 중같이 머리를 깎고 송광사에 피신했었는데 송광사에서 잘 보살펴 주었단다. 후에 그 은혜로 프랑스 선교사가 송광사에 마로니에 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다. 순례단에서 그 나무를 다시 기념식수로 심고 싶은데 역사적 사료가 없다는 것이다.
순례라는 말은 주로 유럽에서 사용해왔다.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성지에 참배하는 일이다. 인도에서는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도 관광 한국이 되면서 유럽과 인도의 성지 순례를 많이 한다. 국내에서는 순례문화가 형성되지는 않았다. 다만 각 종교에서는 성인들의 성지를 참배하고 있다. 사찰에는 조사당이 있어 역대 조사들의 영정이 걸려 있고 부처님의 성전뿐 아니라 조사들께도 참배한다.
유럽에서 유명한 순례길은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성야보고의 이름) 순례길이다. 이웃나라 포루투갈에서 출발하는 길과 여러 길이 있단다. 풍광이 좋기로도 일품이란다. 순례를 마친 사람들은 순례 사무실에 들러서 순례자 증명서를 받고 마치 표창장을 수여 받는 것 같은 감격을 맛본다. 반드시 걸었다는 증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혼자서도 걷고 둘이서 혹은 삼삼오오 같이도 걷는다. 단체로 걷는 경우는 많이 못 들어본 것 같다. 인생의 여정에서 지칠 때라던가 앞이 막막할 때라던가. 뭔가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할 것 같은 때 일반적으로 순례 여행을 떠난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좀더 분명하고 확실한 터닝 포인트를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최근에 소설가 서영은이란 사람이?성경의 진리를 바로 알려면 내 안의 자의식 찢어 버려야?라고 하면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얻었던 깨달음을 책으로 발간했다고 한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썼단다.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나는 지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내면적 변화를 이끈 초월적 존재를 보고 만졌다.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걸으면서 십자가로써 자기를 죽였다고 했다. 사실 그렇다. 영적인 깨달음이나 환희심은 자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일이다. 불교에서는 자기를 버리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사람도 참으로 예수를 영접하려면 예수를 죽이고 십자가로 자신을 죽여야 영적으로 거듭나는 기쁨에 도달할 것이다.
전라북도는 역사와 전통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우리 민족의 고향 같은 삶의 터전이다. 유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 대부분의 종교가 전라북도에 그 모태를 두고 있다.
“세계 대부분의 순례길이 개별 종교의 특성만을 담고 있거나 역사적으로 종교분쟁과도 맞물려 있었다는 데 비해, ?종교간의 대화?가 세계적인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현 상황에서 여러 다양한 종교가 한데 공존하고 있는 전라북도에서 ‘아름다운 순례길’을 통해 종교간의 대화의 문을 연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각 종교 지도자들이 진정한 대화와 소통의 의미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로 펼쳐지도록 순례문화원은 발이 되어서 함께하겠다는 취지를 밝혔다. 그리하여 사단법인 한국순례문화원은 2008년 개원하였다.
2010년 4월 24일은 ‘봄의 연초록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순례길’이 금산사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하였다. 원평의 ㄱ자교회인 금산교회에서는 남녀의 자리를 달리하여 목사는 그 모서리에서 설교를 하였다는 교회의 실내를 보았다. 그곳은 근대문화유산이 되었고 교회 박물관으로 쓰인다.
원평 원불교 교당에서 신도들의 환대를 받았고 휴식했다.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 초안을 마련한 곳이다. 원불교 전무출신 성직자와 희생과 봉사의 여성 법사들이 많이 배출된 교당이었다. 교당 마당에는 ‘우리는 하나다’란 커다란 비석이 인상적이었다. 다음 원평 저수지를 끼고 있는 증산교 앞에 당도했다. 2년 전만 해도 그곳은 정리되지 않았는데 저수지 주변이 공원화되어 정자도 두 곳이나 지어져 있는 쾌적한 휴식처가 되었다. 강증산이 모악산에서 도를 터득하여 동곳마을(구리동)에 동곡약방을 운영하면서 사람의 길을 가르친 곳이 저수지 뒤에 있다. 반상계급을 타파하기 위하여 대동사상을 펼친 정여립의 활동지도 근처에 있다고 한다. 저수지 옆에 ‘종이학’이란 카페가 있었는데, 그 터에 대순진리교 본산이 건축되었다. 지난해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모악산 주변은 다종교 지역인 것이다.
다음은 수류성당으로 가는 길이다. 전라도 남부지역 전역을 관할하던 초기 천주교회의 하나로 동양에서 가장 많은 신부와 수녀가 배출된 성당이다. 교회 첨탑이 산 숲 속에 높이 서 있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벚꽃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고 돌계단 틈에 민들레와 제비꽃이 하냥 봄빛을 즐기고 있었다. 신자들이 정성 들여 마련한 따뜻한 자연식 점심을 야외에서 먹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오랜만에 성체조배까지 드렸다. 오후 1시 15분에 성당 뒷산을 넘어 가서 완주 안덕건강힐링체험마을에 도착하니 오후 4시 30분이었다. 총 20킬로미터의 순례였다.
나는 처음부터 많이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선발대의 자동차를 타고 마음을 같이했다. 그리고 마지막 코스인 안덕마을의 호반산책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순례단과 같이하면서 생각했다. 그곳은 삼천동에 살 때 자주 왔던 곳이었으며 잘 아는 길이었지만, 오늘 순례자의 마음으로 했을 때는 감회가 새로웠다. 천주교의 신앙을 순례하면서 인생의 기초를 다졌으며 문화적으로 불교를 만나서 석가모니의 일생을 마음으로 순례할 수 있었던 일. 내 인생 순례의 길은 어디까지 와 있나를 생각해보았다.
우리의 고대 삼국이 불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게 된 사실. 특히 신라의 많은 구법승들이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가져왔던 고난의 길들에 깔렸던 정신이 새삼스럽게 가슴저며 왔다. 세게에서도 가장 먼저 중국을 거쳐 인도를 지나 중앙아시아까지 4년여의 순례를 끝내고, 세계에서 가장 앞선 여행기를 남겼던 <<왕오천축국전>>의 저자인 혜초스님의 거룩한 순례길까지 그려졌다. 길에서 태어나서 길에서 득도하고 설법하였으며 길에서 열반하신 석가모니의 길을 그리도 그리워하여 지금도 인도의 성지에서는 수많은 구법승과 순례자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는다.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필요했던 새 정신을 불어넣기 위하여 사상의 박해를 받고 사라진 많은 순교자들의 고귀한 영혼을 명상했다. 핏빛 뿌리며 다져졌던 험난했던 옛 순례길 위에 오늘은 연초록 물감으로 수놓은 카펫 위의 행복한 순례길이었음을 감격해마지 않았다.
현대의 길들은 잘 닦여져서 모든 길이 하나로 이어진다. 마을마다 올레길, 둘레길, 산책길 해변길, 순례길들이 한 문화의 형태로 상품화되었다. 어떤 마음으로 걸을 것인가는 제 각기 마음 몫이다. 고행만이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석가모니께서는 최초의 다섯 비구들에게 최초의 설법을 했다. 지금도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았던 천년 고목 보리수나무 밑의 금강보좌에는 구법승과 순례객들이 발원을 올린다. 인도의 마가타국에만 금강보좌가 있을 것인가, 스페인의 산티아고에만 십자가가 있을 것인가. 아름다운 우리 강산의 순례길이나 자신이 정진하는 그 자리가 자기의 금강보좌가 될 것이다. ‘아름다운 순례단’의 길라잡이는 달팽이가 그려진 화살표였다. ‘느바기’ 즉 ‘느리게, 바르게, 기쁘게’
37-2. 섬진강 둘레길을 걸으면서
- 2010년 3월 27일
섬진강 둘레길을 걸으면서
-2010년 3월 27일
'책읽기운동전북본부'에서 주관하는 섬진강둘레길 천천히 걷기 모임에 참가하였다.
최근에 제주도에서 '올레길'이 열린 이래 전국에서 각 지방마다 둘레길 천천히 걷기가 유행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는 현상이다. 빗나간 교육열도 없지는 않으나 바람직한 방향이라면 좋은 일이다. 얼마 전까지는 지식을 집어넣는 교육에 열을 올린 것 같았으나 요즈음은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앞세우고 체험학습을 손에 쥐여 주려는 열기가 대단하다. 사실은 이날 우리는 궁궐 답사를 위하여 서울 창덕궁을 새롭게 답사할 예정이었다. 젊은 부모들의 열기에 밀려 인터넷 접수에서 더듬거리는 바람에 탈락되었다. 어차피 날을 받아 놓았기 때문에 친구가 대신 이 모임에 신청해주었다. 그런데 의외로 바람직한 봄나들이가 되었다. 여기에도 초등학생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이날 걷기 모임에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 씨도 참가하여 자신이 몸담았던 섬진강 주변을 안내했다.
섬진강은 우리나라 4대강의 하나로 멀리 진안에서 발원하여 임실, 순창을 거치고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에서 옥과천과 합류하고, 곡성읍 동산리에서 남원에서 내려오는 요천수와 합류하게 되고, 오곡면 압록리에서 보성강과 또다시 합류하여 구례와 하동을 거쳐 남해로 흐르게 된다. 하동까지 80리 꽃길과 함께 흐른다.
버스 두 대로 전북도청 남문에서 8시 40분에 출발했다. 이번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길,
임실 옥정호를 따라 순창 장구목까지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나섰다. 거년과 달리 올 춘삼월은 꽃샘추위의 기복이 심하여 지난 해 3월 20일에 만개했던 전주경기전의 고매가 25일이 되어서야 몇 송이 트기 시작하였다. 오늘도 마지막 꽃샘추위인지라 바람이 많이 불어 추웠다. 그래도 섬진강 주변에는 매화가 만발하는 꽃길이 많아서 꽃바람이 상쾌하였다.
우리는 진안 백운면에서 발원한 섬진강 물이 여러 천을 거쳐 관촌 사선대에 모였다가 다시 흘러온 임실 옥정호에서 머물었다 다시 흐르는 물길을 따라 간다. 옥정호 휴계소에서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으면 화장실을 만날 수 없는 길을 간다기에 우리도 옥정호의 물같이 잠깐의 땟물을 내렸다. 옥정호에는 공사 중이던 현수교가 아름답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다시 강진 쪽으로 향한다. 옥정호 대교에서 오른쪽 건너편 언덕에 있는 마암분교를 바라보고 굽이굽이 돌아가고 있다. 덕치면의 회문산자연휴양지 안내판이 보이는 곳에서 반대길로 접어들어 가니 김용택 시인의 구가가 있는 마을, 신촌 마을에 닿는다. 어디선가 매향이 바람결에 밀려든다. 섬진강 둘레에는 매화 꽃길과 매화 언덕이 많다. 시인의 구가 뒷편에도 제법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다. 시인이 이 매화나무와 같이 자랐을 것 같다.
시인의 구가 앞에 선 김용택 시인과 KBS 리포터인 홍석우 씨. 시인의 옛 서재에는 '觀瀾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의 뜻에 대하여 물었다. 시인은 현판 글씨의 뜻과 이 마을에서 나서 자라고 아이들과 함께 했던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직은 살아 있는 섬진강 물결과 함께 흐르면서 천천히 사람과 자연의 조화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이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흐르는 물결을 보는 집'으로 해석이 되는 '관란헌'이다. 글씨 체는 왕희지 글자를 집자한 것이다. '관란헌'이란 이름은 퇴계 이황의 집과 강원도 어느 집에서도 볼 수 있는 이름이라고 했다. 퇴계 선생도 안동 청량산 아래 강물을 사랑하였으니 그럴 만했겠다 싶었다.
집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옥정호에서 한숨 돌린 후 굽이굽이 돌아온 강물결을 바라볼 수 있다. 징검다리가 폭 넓은 얕은 강물을 멈칫거리게 한다.
신촌마을은 임진란 때 생긴 마을이다. 나주와 남원에서 온 피난민에 의해서 마을이 형성되었단다.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며 당산나무 역할을 해왔다. 가난했던 마을을 뒤에서 편안하게 보듬어 왔다. 마을의 정자나무들은 마을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성사시켜온 산 증인이었다. 시인이 방문을 열 때마다 느티나무가 보였고 같이 자랐다고 했다. 땅도 고르지 못해서 규격이 여러 질인 논배미는 이름도 다양했단다. 버선배미, 장구배미, 삿갓배미 등등...
섬진강에는 바위가 많았단다. 고기도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봄여름가을겨울 내내 고기 잡은 이야기로 마을의 풍경을 만들기도 했다. 겨울에도 돌 밑에는 고기들이 많았다. 큰돌을 때려서 고기를 잡으려면 상처 없는 돌이 없었다. 그 돌들이 물결에 씻기고 흘러 내려가다가 곡성에 와서 피아골에서 내려온 물을 만날 때쯤에는 자갈이 된다고 시인은 옛날이야기를 이었다.
신촌마을에서 천담 가는 길은 그림 같다. 아직 포장되지 않았으나 자동차가 다닐 만하다. 우리는 <천담가는 길>이란 시를 이정표마냥 읽고 여기서부터 천담까지 걷기로 한다.
쉬엄쉬엄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길가의 풀밭 사이사이에 나물을 뜯기도 하면서. 쑥이랑 쑥부쟁이와 원추리 등. 서로 이것이 무슨 나물이래요. 이거 쑥부쟁이 맞아요? 하면서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인은 말한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리고 우리를 키워주는 자연이 중요하다고. 그래서 꽃도 만나고 나물도 만나고 바람이 쉬어 가는 나뭇가지도 만나야 한다고. 무엇보다 강물처럼 자연스레 흘러야 한다고.
강들이 문명의 발길에 의하여 짓밟혀 위기를 맞고 있지만 아직 섬진강은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섬진강이여, 영원하라.’고 외치기도 했다. 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강물이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흐르다가 피곤할 때 쉬어 가는 곳이 있다. 직선으로는 쉴 곳이 없다. 굽이가 있어야 기슭을 만나서 쉬고 흐르면서 끼인 때를 거를 수가 있다. 산의 엉덩이가 튀어나온 곳을 만나서 부딪치면 잠시 쉬었다가 때를 벗어놓고 굽어져서 흐르게 마련이다. 임실에서 순창 쪽으로 직선의 고속도로가 우리의 머리 위쪽에서 건설 중이다. 얼마나 많은 직선의 고속도로로 인하여 사람들은 쉬는 것을 잊고 갑자기 어느 날 호흡이 가빠지는 일을 겪고 있는가. 사람들은 쉬려고 자연에 와서도 자기도 모르게 서로 습관의 경쟁에 휘말리기도 한다. 어디까지 얼마 만에 종주를 한다거니 하면서 지름길로 빨리 산을 넘어가려고 한다. 쉬엄쉬엄 걸으면서 옆 사람의 얼굴도 보고 풀꽃도 만나고 무엇보다 자기의 소리를 보는 시간임에도... 강물이 느긋하게 돌면서 굽이쳐야 맑은 물이 되는 것을.......
나는 다음 코스를 위하여 중간에서 자동차를 얻어 타고 천담마을까지 갔다. 나중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논두렁 가의 매화나무 밑에서 나물을 뜯었다. 살갗을 매만지는 꽃가지의 손길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37.-3
아름다운 시절
옥정호에서 모인 섬진강물은 천담마을을 거쳐 구담마을에 오면 산기슭을 크게 한 번 휘돌아야 한다. 구담마을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강물을 보라. 여기는 산 중턱에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고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온 정자나무들이 함께 담소를 나누듯이 모여 있는 넓은 전망대가 있다. 주변에 나무 데크를 설치해 놓았다. '영화의 고장'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는 여기서 준비된 도시락을 먹었다. 어떤 이는 추워서 청승맞다고도 하지만, 이런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호강이지 않은가.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주 무대였다는 이곳 마을은 옛날에는 정말 오지였을 것 같다. 육이오 당시에 비참한 현실에 놓인 어른들의 시대적 현실을 그린 내용이었지만 어른들의 불행한 시절을 엿보았던 그 시절의 어린이에게는 아름다운 시절이 되었다. 그 영화 속의 어린이가 지금의 바로 내가 아닌가. 도시에서만 살았던 내가 육이오 때 피난시절 부모님의 고향에서 한철 보낸 추억이 그리도 아름답게 기억되듯이. 그래서 <아름다운 시절>의 영화의 고장은 모든 이의 고향 같다.
강물은 돌아서 흐르고 우리는 저 아래 징검다리를 건너서 광목천을 풀어놓은 것 같은 하얀 길을 걸어가리라. 가는 곳마다 반기는 매화가지 사이가 파랗지 않아도 좋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게 매향을 보듬고 걷는다. 징검돌에 부딪히면서 바위를 한 아름 안아보기도 하고 어루만지느라 잠시 멈칫거리는 물살의 거품에는 무슨 뜻이 숨어 있을지 귀도 기울여 보면서……. 산기슭 낮은 언덕을 돌아 강물이 스스로 흐르는 동안 우리는 산 가운데를 질러가는 마을길을 걸어간다. 돌아온 강물을 다시 만나는 곳에서 잠시 물결을 내려다보고 우리도 쉰다. 매화나무들을 심어놓고 폐가에 살았던 옛날 사람들은 어디쯤에 흘러가고 있을까.
발길 닿는 곳마다 매향이 휘날리는 봄날 우리는 지난겨울 이야기를 나눈다. 자연과 조화롭게 지내지 못한 옛날들을 미안해하기도 하면서 우리가 함께하지 못한 풍경은 어땠느냐고 묻기도 한다. 공기 중 산소를 보듬은 강물이 높은 곳에서 흐르다가 떨어지면서 강바닥을 깊이 파놓기도 한다. 그런 곳에서 물결은 쉬면서 자신의 허물을 벗어놓고 때를 벗긴다. 물속에 사는 다슬기들이 강물의 때를 먹어준다. 서로 기대어 산다. 물살이 얼마만한 세월 동안 자신을 정화하면서 흘렀을까. 여기까지 흐르는 동안 물결은 바닥의 바위들 위에 자신의 무늬를 새겨 놓았다. 각가지 무늬에는 강물의 이야기들이 우리들의 삶도 함께 그려놓았다. 모두 다 시인이 된다.
섬진강은 순창과 임실의 경계이기도 하다. 순창군 동계면 이곳 장구목은 모든 바위들이 강물 속에서 물결의 무늬를 그리도록 허락한 조각 공원이다. 올 때마다 조각공원에서 상류를 바라보면서 자동차에 올라타고 훌쩍 돌아오곤 했던 곳. 임실 구담마을에서 징검다리 강을 건너서 순창 장구목까지 둘레를 걸어볼 수 있어 생애 최고의 날이다.
김용택 시인은 1970년 5월 1일, 처음 교단에 섰다. 그때는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두려웠다. 한 5년쯤 지나서야 교사라는 게 어떤 것인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2008년 8월 30일 그는 교단을 떠났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날을 잡아 교실로 불러 마지막 수업을 했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라.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해라.” 아이들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른으로서 당부하고 싶은 말들이었다. 교사 생활 38년 중 26년을 2학년만 가르쳤다. 계산이 없는 순수한 나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마음이 통했다. 2학년이야말로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주지 않아도 뛰어놀 땅만 있으면 즐겁고 행복해 하는 나이였다. 2학년과 놀며 시인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정말 그렇다. 정직하고 진실한 것이 통할 때 희망이 있다. 새로운 눈으로 보는 신기한 마음이 중요하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을 6.25로 인하여 부산에서 개성까지 아버지 따라 갔다가 다시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왔다. 학교는 전쟁 중 병원으로 활용되었고 우리는 부산 구덕산 중턱의 천막 교실에서 공부했다. 우충충한 오늘 같은 날씨였던 내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여름방학 한 철 <아름다운 시절> 같은 강 마을인 진주 남강 언저리 큰들, 아버지의 고향에서 보낸 한 철만이 기억에 있는 아름다운 시절임을 먼 후에 알았다. 복사꽃 만발하여 복숭아 열매를 직접 따먹을 수도 있었고 생 가지를 따먹어서 입가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그 시절은 모든 것이 신기하다는 것도 몰랐다.
할머니가 된 어린이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또 날마다 새롭다. 오늘 이 매화 꽃길을 강물 따라 매향 따라 흐르면서 다리가 아프도록 걸으면서도 새록새록 솟아나는 감동으로 이 봄날이 벅차다, 오래 걷지 못하는 내가 이렇게 많이 걸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신기하게 안겨오는 매향과 강물이, 모든 자연물이 주는 순수한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매화나무 가지에 걸린 까만 비닐 조각도 까치처럼 보이는 오늘이다. 오늘이 나의 <아름다운 시절>임을 후에 가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임을 아는 것이 행복이다.
38. 와유도(臥遊圖)
와유도(臥遊圖)
토요일이 좋다. 요즈음 한국은 평일에도 관광객들이 많다. 관광을 위한 삶인가 싶을 정도로 관광이 유행이다. 주말에는 교통체증도 많으니 나들이 하지 않고 집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큰 행운 같을 때도 잦다. 누워서 편안히 휴식하며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얼마 전에 <진품명품> 프로그램에서 조선의 <와유도臥遊圖>가 나온 적이 있다. 꽤 놓은 가격이 매겨진 것으로 기억한다.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와서 금강산의 들머리에서 승경이 있는 곳까지 표시한 그림 한 장이었다. 와유란 말 그대로 비스듬히 누운 채 그림을 감상하면서 마음을 맑힌다는 뜻인 것 같다.
옛 사람도 이제는 늙어서 다시 금강산에 더는 갈 수도 없으니, 자신이 다녀온 길을 그려서 벽에 붙여 놓고 유람할 당시의 감격했던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즐겼다. 조선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은 모두가 와유하기에 좋은 자료들이다. 영조 임금도 직접 금강산을 다니러 갈 수 없어 겸재에게 <금강산도>를 그려오라고 했고, 정조임금도 단원에게 단양팔경을 그려오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그림들은 조선회화사에 큰 자리를 확보하였다.
오늘날은 단면의 사진뿐 아니라 활동사진으로 볼 수 있는 시대이다. 언제라도 나라 안 뿐만 아니라 지구 곳곳의 오지까지 영상으로 인문지리를 파악할 수 있고 자연 풍광을 즐길 수 있다. 토요일은 오전 시간에 <걸어서 세계여행>과 <한국재발견> 프로가 연속 상영된다. 오늘의 세계 여행 코스는 유럽의 남부 ‘크로아티아’였다. 크로아티아는 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다양한 시선으로 다시 보아도 좋은 곳이다.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내가 본 공원 중에 가장 자연스럽게 조성된 아름다운 자연공원이다. 여러 줄기의 폭포가 자연스럽게 계단식으로 이루어져있다. 또 두브로브니크 시는 유럽의 고대문화와 현대가 잘 어우러진 낭만적인 도시다. 멀리까지 나들이는 이제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와유도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한국재발견>에서는 백두대간의 허리인 강원도 인제 지방을 여행했다. 가수 김도향이 진행했던 프로를 성우 배한성이 맡았다. 콧소리가 특징인 목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옛날에 그곳을 지나칠 때를 회상하면서 경관을 감상한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라는 말같이 40여 년 전에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서울에서 설악산으로 가기 위해 인제를 넘어가다가 빗물에 다리가 무너져서 일행이 여관에서 하루를 묵는 동안 근처의 군부대원들이 고쳐주었다. 관동팔경의 일부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버스는 언제나 터덜거리며 버스의 의자 밑은 강원도 옥시기(옥수수를 강원도에서는 그렇게 불렀다.)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때만 해도 강원도에 가면 모두 옥시기를 기념으로 사들고 왔다. 핫팬츠 차림으로 집에서부터 바다와 설악산 울산바위까지 그 험한 계단을 올랐던 것이다. 요즘의 젊은이처럼.
유행은 돌고 돌아 긴 바지에서 여름의 핫팬츠가 다시 눈길을 끈다. 나에게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하면서도 지금으로서는 아찔한 젊은이의 옷차림이다. 문인화 동호회원들과 동해바다에서 울산바위까지 해강의 아드님이신 청강 선생과 여행하면서 들었던 선생의 말이 생각난다. “미스 조는 풍류객 같은 면모가 있구먼.” 무엇을 두고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비슷한 성정이 있었던가 싶다. 나의 아버지처럼. 50년도 더 된 예전에, 아버지는 동생들을 태운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전주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도중, 남원을 지나면서 광한루를 둘러보고 가자고 했으니 말이다.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동안 배한성은 벌써 천상의 정원인 점봉산의 정상, 야생화 천국에 도달하여 숨을 고르고 있다. 한때 점봉산 주위를 너무나 깎아서 환경을 훼손한다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야생화의 보고가 되었다. 용대리 황태 덕장 이야기를 들으며 백담사 가는 길의 추억에 또 젖는다. 백담사라면 만해스님이 가장 좋아했던 곳이다. 스님의 흔적으로 지금은 만해 마을이 조성되었다. 다음에 그곳을 갈 때면 꼭 만해마을에 들르리라. 전직 대통령의 흔적으로 더욱 유명해진 절이기도 하다. 한 번은 주변에서 쉬었고 한 번은 셔틀버스로 절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주변 계곡의 바위는 버스 안에서의 감상만으로도 눈 맛이 시원하던 계곡. 백담사에서 대청봉까지는 눈길로만 더듬어야 할 길. 설악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 적멸보궁이 있는 봉정암에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반바지 차림으로 울산바위까지 올랐던 까마득한 젊음을 뒤로하고 자매들과 연인과 함께 돌았던 설악 주변을 떠올렸다.
6.25 사변 중에도 부산에서 개성으로 두 달 뒤 1.4 후퇴. 당시 몇 날이 걸렸는지, 걷다가 머물었다가 또 차를 얻어 타고 유랑민처럼 내려갔던 길. 원치 않았던 국토 종단 길이었다. 그때로부터 고향을 잃은 디아스포라처럼 살았던 것 같다. 전주에 정착한 뒤에도 서울로 부산으로 혹은 더 먼 곳으로 건너뛰기가 더 쉬웠다. 언젠가 돌아가야 할 어딘가가 있는 것처럼.
많이 움직이기 어려워서 와유를 즐기면서도,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 같이 움직이고 있다. 현대를 노마드 시대라고 하지만, 고대의 유목을 되풀이하지는 않는다. 앉아서도 새 공간의 자유로움을 찾는 일, 새로운 사유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삶이 될 것이다. 정착민과 유목인 사이의 어느 한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두 가치를 모두 받아들이는 생동하는 삶이 될 것이다. 누워서도 앉아서도 새로운 삶의 방식과 가치를 끊임없이 창조하는 삶을 익혀야 하리라. 움직이면서도 앉는 방법을, 누워서도 생동하는 삶의 방식. 영원히 살 것처럼.
38-2
함안 조趙 씨의 본향을 찾다
-나의 <와유도臥遊圖>
지난 6월 중순에 자매들과 부산에서 전주까지 일주한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함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부산까지의 주변 풍광과 길들이 벌써 낯선 나라 같았다. 부산에서 가족행사를 마치고, 언니 집에서 하루를 묵고 올라가는 길에 어디를 들를까 생각했다. 큰언니는 영주부석사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내가 의견을 제시했다. 지난번에 경남 함안군의 와유도를 본 일이다. 전통의 도시 전주가 이씨조선의 본향이란 것이 이 지방의 명분이다 . 그러나 함안 조씨인 우리는 정작 본향인 함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은가. 경남 진주가 고향인 우리 자매들은 처음으로 본향을 방문하기로 했다.
함안군은 옛 아라가야의 땅이다. 아라가야의 궁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고 유교 유적지와 불교 유적지도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과 위치상으로 칠서면의 유교유적지와 악양루를 찾아 보자고 했다. 주세붕이 조선에 처음으로 건립한 서원 자리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뒷산의 대나무 숲에 하얀 왜가리 군락지가 있어 왜가리의 군무만 보았다. 와유도에서 백미로 꼽았던 ‘주씨고택연당지’를 찾는데 갈림길에 이정표가 표시되지 않아서 우여곡절 끝에 찾았다. 사진보다는 좀 작게 보였지만, 주씨고택 서원으로 연당지 안에 섬까지 만들어서 선비의 이상향을 형상화했다. 조그마한 연못에 운치 있는 자그마한 정자와 고풍스러운 소나무 한 그루, ‘무기리연당’에는 연꽃은 없고, 바람에 목욕하는 풍욕루(風浴樓)에 오르니 벼슬과는 바꾸지 않는다는 하환정(何換亭)이 연못 건너 단정하게 앉았다.
함안 악양루에서
햇살이 여위어가고 있어서 서둘러 악양루를 찾았다. 길게 곧은 들판의 길을 가로질러 어렵게 찾은 악양루. 김제 지평선을 연상할 만치 넓고 쪽 곧은 논을 가로질러 갔다. 악양루는 남강과 함안의 샛강이 합류하는 강 가 절벽에 세워져 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서 허름한 누각이 먼지 속에 쓸쓸하게 보였다. 악양루는 강 건너 함안의 들녘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옛날에는 풍류를 읊을만한 곳이었다. 강을 둘러싼 둑방길을 쌓아 홍수를 예방하고 지금은 자전거 길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단다. 악양루라는 이름은 중국의 유명한 악양루에 비유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고대에는 도읍이 될 만한 고장이었다.
어둠이 햇살을 먹고 있는데 갈 길은 멀었다. 아직도 우리는 부산이란 이름과 경남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나라 지도에 경남북도가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실감되었다. 지도를 보고 밤을 지새울 곳으로 덕유산 자락을 꼽았다. 무주의 나제통문이 바로 신라와 백제의 경계가 아니던가. 함양 휴게소에서 저녁밥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밤중에 무주구천동 초입에 들어서자 처음 눈에 들어온 황토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공기가 아주 청신했다. 천장이 높고 넓은 방에서 맘껏 활개를 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첩첩 산중의 산자락에 위치한 곳이란 것을 알았다. 큰언니는 서울에서 시댁 고향인 거창을 다니던 십 년 전을 떠올리면서 길이 정말 좋아졌다고 감격했다. 아침에 덕유산 리조트 주변을 돌아서 아침 식사할 곳을 찾았다. 승강기를 타고 덕유산 정상에 올라볼까 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운영하지 않았다. 구천동 입구에서 알맞은 식당을 찾았다. 송이버섯해장국을 주문했는데 다른 곳과 달리 모든 접시를 사기그릇을 사용하였고 산골에서 직접 채취한 나물 맛이 좋았다. 우리의 운전기사인 제부는 아주 맛있다고 한 달에 한 번씩 여기 오자고 제의한다.
전주로 가는 길에 찾을 만한 관광지를 생각했는데 장수지역을 지나면서 주논개 유적지를 찾다 놓치고 말았다. 朱 씨는 우리 자매의 외척이기도 하니까. 진안에 당도하여 시장에서 수삼을 사고 용담댐을 둘러보고 <운일암반일암>를 지나가기로 했다. 나도 몇 번 다닌 길이긴 하지만 진입로와 방향을 잘 알 수 없었다. 용담댐 공원에서 진안 수박을 잘라 먹고 시원한 입맛으로 공원을 산책했다. 자매들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금강산과 설악산이 부럽지 않다. 먹거리와 볼거리가 좋은, 산수가 빼어난 고장에 오니 부산언니는 더욱 좋아했다. 비록 가물어서 저수지에 수위가 낮았지만 함안의 악양루에 비유할 곳이 아니었기에 못다 한 정취를 용담에서 누렸다. 용담은 이름대로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용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와룡마을 뒷산은 산수화 한 폭 그대로였다. 마이산이 고생대 때에는 바닷속이어서 사암으로 이루어졌다니 이곳은 물이 많다. 진안의 데미샘과 장수의 뜬봉샘이 섬진강과 금강의 시원이어서 물길이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이 수려하다. 내가 전북 사람이 되었으니 전북에 오면 내가 해설사 역할이다.
손벽을 치고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것은 ‘운일암반일암’에서였다. 운일암반일암을 향해서 가는 동안 각자 그곳을 다르게 상상하였다. 큰언니와 제부는 암자인 줄 알았고 부산언니는 운일암과 반일암이 따로 정해져 있 는 것으로 생각했다. 해서 큰 광광지처럼 주차장도 넓은 줄 알았는데 정자 옆의 오른편 언덕길을 오르려고 한다. 올라가야 암자가 나올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팔각정(도덕장)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보니 과연 정자 밑은 반일암이고 운일암, 구름 같은 바위가 즐비하다. 사실은 약 50여 년 전만해도 이 계곡은 깎아지른 절벽에 길이 없어 하늘과 나무와 돌만 있었고, 오가는 것은 구름밖에 없었단다. 하여 반나절만 햇살이 들었다 하여 운일암반일암의 명성을 얻었다. 물이 작아서 이름값을 하지 못했지만 반대편 절벽 바위는 영락없이 부처바위였다. 동생이 어처구니없다면서, 관광안내도를 보면 아주 중요하게 운일암반일암이 크게 표시되었단다. 다니다보면 생각과 실제가 다른 점이 웃음 나게 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안내도에 ‘운일암반일암계곡’이라고 표시해야 맞다고 하면서 착각에 허탈해 했다. 실은 진안군 정천면 주천리의 갈거마을에 있다 하여 갈거계곡이라 한다.
이제 이렇게 하여 나의 와유도가 하나 더 그려졌다. 와유도는 중국에서 비롯했다고 말할 수 있다. 17세기 중국에는 '강산와유도'(江山臥遊圖)를 그린 화가가 있었다. 예술가란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재창조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강산와유도는 중국 미학이 도달한 정점이라고 한다는데, 고요함과 금욕주의가 압축된 명상의 개념을 근본으로 하는 것 같았다. 동양의 산수화나 문인화는 풍경만 그린 것이 아니라 풍경에 우주적 정신을 담아서 혹은 선비의 정신을 담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진정한 와유를 즐기려면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와 너와 사회 나아가서는 지구촌을 아름답게 보전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할 것이다. 수많은 활동 와유도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우리가 기대어야 할 지구가 힘들어 이렇게 가뭄이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저수지들이 맨살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유람의 방향도 많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반성이 되었다. 옛 사람들의 와유는 단순히 마음을 맑게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적이며, 정신적이고 철학적 가치가 그림 속에 담겨 있어야 진정한 와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데 오늘날 유람객들은 그 가치를 실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39. 대한을 참배하다
-반남면고분군을 다녀와서-
영산강의 지류인 삼포강을 지난다. 드디어 영산강 삼백리 어머니 같은 젖줄이 있어 선사인들이 등 붙일 수 있었구나 싶은 실감이 다가왔다. 내려오는 도중, 차창으로 들어왔던 풍경은 드넓은 겨자 빛 들녘과 논둑에서 은빛을 반짝거리며 흔들리는 억새풀들만 인상에 남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풀이 마치 이정표처럼 우리를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나주시 반남면고분군은 반남면의 자미성을 둘러싼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일대에 산재해 있는 40여 기의 고분군을 일러 말한다. 반남면은 반남 박씨의 시조묘도 있는 반남 박씨의 본관지이기도 하다. 백제에 복속되기 이전 최후까지 마한의 세력이 남아 있었던 영산강 유역이다.
거대한 고분 앞에 서자니 그제사 출토되어 유물로 말하고 있는 박물관의 기록들이 시원한 호흡을 하며 다가와서, 나도 비로소 큰 숨을 내쉬었다. 마한(馬韓)이라면 삼한 중의 가장 강력하고 크게 자리를 잡았던 54개국 연맹체였으며, 우리나라의 이름이 대한(大韓)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된 삼한의 한(韓)이 근원이었다 는 것 외에 알 수 없었다. 이번에(2009년 9월 22일-11월 29일)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국내 최초로 '마한의 숨쉬는 기록'을 전시하고 있다. 네 주제, 즉 'l. 마한, 그 시작, 2. 삼한의 으뜸, 마한, 3. 마한 사람들의 삶과 신앙, 4 백제 속의 마한' 등을 통하여 마한과 백제와 주변 동아시아와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볼 수 있다. 그 전시와 연계된 유적 답사로 반남면고분군에 오게 되었다.
반남면고분군의 특징은 고구려 장군총, 공주 송산리 고분군, 신라 경주 대릉원에 견주어 손색없는 대능원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역사에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은 국가가 형성되기 전의 부족국가가 통일국가로 발전하지 못해서였다고 보아야 할까. 백제에 흡수되어 가는 과도기의 삶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는 것을 유물이 말해주었다. 마한의 기록은, 우리의 기록이 없을 때는 언제나 들먹이는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이며 우리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대라고 한다.
마한의 묘제의 특징은 단연 옹관묘이다. 마한에는 왕관은 없지만 옹관은 있다고 했다. 경주의 왕릉이나 부여의 능이 한 왕을 위한 능이었다면 마한의 묘제는 한 분구에서 여러 기의 옹관이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한 분구를 같은 부족이 시대를 두고 계속 매장을 하였다는 것은 이 얼마나 애틋한 부족간의 끈끈한 가족애를 말하는 것인가. 까마득한 고대인들의 어떤 정이 내 속의 어디에 숨어서 숨쉬는 듯하였다. 그러기에 무덤의 형태도 커다란 원형에서 방대형, 사다리꼴, 장고형 등이다. 신촌리 고분들의 규모는 길이 10.5미터에서 35미터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내부시설이 대부분 여러 개의 옹관으로 구성되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 하나의 분구 밑 둘레에 도랑을 파고 물이 흐르게 했다. 띠를 두른 것이 분구의 장식 같다. 그 부족들의 주거지는 대체 어디쯤이었을까. 나주읍성 땅속을 파보면 단서가 될 어떤 유물들이 나올까. 그 거대한 옹관은 어디에서 어떻게 구었을까.
박물관 전시장도 거대한 옹관으로 들어가는 듯한 구성으로 되어서 흥미롭다. 지금까지 막연하였던 마한의 그 이전과 이후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 전시장 입구는 옹관의 입구처럼 좁게 들어가게 되어 넓은 영역으로 인도된다. 처음 입구의 영상에서 만날 수 있는 '말모양허리띠' 장식은 그들에게 절대적이었던 말에서 마한의 으뜸이었음을 느낀다. 전시장 가운데 거대한 옹관이 있고 주변의 유물에서는 마한의 삶과 신앙을 알며 그후로 백제 속의 마한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거대한 옹관을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당시의 강력했던 지배세력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지금도 그런 옹관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2년 전에 광주박물관에서 만났던 신기한 금동관이 신촌리 9호분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을 알고 보니 마한의 세력이 다시금 생각되기도 한다. 옹관은 있지만 왕관은 없다는 기록은 이제 다시 쓰여지게 된다. 이 금동관이 후에 국가 시대 임금들 관모의 전형이 된 것을 보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뿐 아니라 금동신발을 비롯하여 금반지 봉화문환두대도, 청동 팔찌 등 다양한 유물을 통해 마한인들 만난다. 1996년 신촌리 9호분을 재발굴한 결과 고분 정상부를 두르며 장식한 원통형토기 28개가 출토되었다. 이 원통형토기는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된 '하나와'라는 유물과 같은 성격으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 전쟁의 비밀의 실마리도 될 수 있다고 한다.
복암리 고분인 방대형 고분의 정상에 오른다. 작은 야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평평한 정상에 서니 상쾌한 바람이 밀려와서 사위를 둘러본다. 주변의,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한 영산강의 지류가 보이는 곳까지, 사방이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어찌 이 평야를 사랑하지 않았으랴! 3호분이라는 이 거대한 분구는 96-97년 확인된 구내유일의 다양한 묘제 32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금동신발, 관모, 삼두환두대도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마한과 백제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단서들이 된다. 한 분구 안에 마한계의 옹관묘와 백제계의 석실분의 융합된 묘가 매장되었다는 것이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몇 세대를 걸쳐 완성된 분구였다. 4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조성된 집단묘적의 성격과 시기에 따른 옹관묘의 형태 그리고 석실분까지 그 변천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을 제공한 유적이란다.
얼마 전 세상을 놀라게 했던 고창군 봉덕리 고분은 더욱 신기하다. 언젠가 나는 길을 잘못 들어 아산면에서 선운사를 가기 위하여 그 길을 통과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야트막한 야산이 고분이었다니! 주변의 야산을 눈여겨보시라! 혹시나 선사시대의 고분인지 누가 알랴! 작은 구릉 옆을 돌아서니 길옆에 잡풀이 무성한 야산이 하나 있다. 아직 발굴하지 않은 분구가 옆에 발굴하고 있는 분구와 쌍을 이루고 있다. 조각이 찬란한 투조기법의 금동제 신발이 여기에서 나왔다. 대형 옹관 안에 시신을 누이고 금동관을 입고 금동신발을 신고 곡옥을 포인트로 한 구슬 목걸이를 걸었던 사람. 대도(大刀)를 차고 손칼도 들고서 중국제 청자와 호와 은제 탁잔을 거느리고 옹관 안에 누워서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 사람은.
경주에 갔을 때 나는 진평왕이나 선덕여왕 무덤에 가고 싶었다. 주변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 일행이 왕릉에 가봐야 볼 것이 없다 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오늘 답사는 종일 마한(韓)을 열었던 사람들의 무덤만 참배하는 성묫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대한민국을 통으로 참배하는 기분이었다. (2009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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