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 신시도 월영대에 올라서
신시도는 새만금방조제의 중앙에 있다. 한겨울의 찬바람과 흩날리는 눈발이 앞으로 펼쳐질 새만금 시대에 대한 깃발처럼 신선하기도 했다. 신시도 주차장에서 월영산의 주봉으로 오르는 길은 멀리서 보아도 가파르게 보였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정삼각형을 이루는 봉우리까지는 급경사 길이었다.
산중턱의 전망대에서 주차장과 방조제를 내려다보면서 숨을 돌렸다. 주봉까지는 칼로 바위를 난도질한 것 같은 절리로 이루어졌다. 시간은 얼마 안 걸렸지만 위험했다. 비끗하면 칼날 같은 바위 날에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월영봉에 오르자 힘든 여정의 수고로움은 눈 녹듯 사라지고 발아래 점점이 수놓인 고군산 열도가 한 폭의 수묵화로 펼쳐졌다. 서쪽으로 멀리 말도와 방축도가 병풍처럼 팔을 벌려 선유도와 60여 개나 된다는 고군산열도를 품은 듯했다. 그 너머 아스라이 망망대해를 넘어 중국 땅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월영봉 정상에는 삼각 원추형 돌탑 하나와 월영대가 세워져 있다. 말 그대로 달을 비추어 보이는 곳이 저절로 연상된다. 서녘 바다를 비추이는 석양이 일인천해(日印千海)여서 날아가고 싶도록 일망무제다.
월영대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하늘 가운데 자리 월영산(月影山; 198m)은 고군산도의 주봉이다. 신령한 하늘 가운데 자리에 월영봉이 솟아 최치원 선생이 단을 쌓고 놀았다. 여기서 글을 읽고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고 하니, 선생의 고매한 정신이 중국대륙을 진동시켰음을 은유한다. 월영봉에서 마을까지 신선의 기운을 받는 하늘 길이 이어져 있다.” 이렇게 월영봉을 사랑한 이들의 정성이 돌탑에 아로새겨져 있다.
지방자치제 이후로 각 지방마다 지역관광 상품 개발을 위하여 지역 역사와 연관된 인물과 전설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군산에서도 새로운 향토사의 중요인물로 조명된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고운 최치원이다. 최치원이라면 통일신라의 대유학자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므로 당연히 경주 출신으로 알고 있으니 군산과 관련된 고향 설은 황당한 일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군산에는 예부터 최치원의 출생에 관련된 선유도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전국적으로 수십 개나 있을 정도로 그는 도선국사와 이태조와 함께 백성의 정신 속에 살아온 영웅적 인물이기에 군산에 대한 연관성은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최치원의 고향을 경주라고 적었으니 그의 출생지에 대한 논의는 재고해야 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조에 와서야 최치원의 고향 설이 재기되기 시작했다. 정조 때 서모씨가 최치원의 전기를 썼는데 최치원의 고향을 고군산, 선유도라고 적었다. <<최고운전>>이란 소설에서도 최치원의 고향은 문창군으로 적었다고 하니 그러한 기록은 본래 그의 고향이 명확하게 밝혀진 사실이 없다는 반증이 아니었을까 싶다.
유학의 시조라고 칭해지는 최치원이 경주 출신이었다면 그의 집안을 어찌 알 수 없었을까. 최치원의 제자 중에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충성하여 고려 중앙의 귀족이 된 자가 많았다. 그 결과 최치원은 도선국사와 함께 고려의 호국신의 위치에 오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이름을 드날리고 귀국하였을 때 신라의 지배 계층에게 밀려나 전혀 활동할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신라의 귀족세력과 같은 출신이라면 그럴 수 없었다. 지배계층과 전혀 다른 출신 성분의 사람일 것이란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었다. 고운(孤雲)이나 해운(海雲)이란 그의 자(字)처럼 외로운 구름이나 바다의 구름처럼 떠돌 수밖에 없는 신세였을까?
월영대에서 하늘 길로 혹은 바닷길로 이어지는 중국까지 날 듯 최치원도 그렇게 떠돌다 어느 때인가 여기서 머물게 된 것일까. 악기도 연주하며 중국에서 이름을 드날렸던 당나라 유학 시절을 그리워했을까. 동쪽으로 머리를 돌려 신시도 주차장과 수문을 아스라이 내려다보며 앞으로 새워질 새로운 세상을 그려보았다.
“바다가 육지라면……” 하는 노래도 있듯이 전설이 많은 이곳에, 옛날부터 또 하나의 전설, 범씨 천년 도읍설이 전해오고 있단다. 아직은 망망대해처럼 보이는 방파제 안쪽이 육지가 되어 새 도시가 들어선다는 것은 까마득한 미래같이만 보인다. 30여 년 동안 옛 사람들의 삶을 조명해온 김규남 교수는 마을 사람들과 옛 흔적을 찾으면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선유도의 망주봉에도 그런 전설이 남았다. 북쪽으로부터 왕이 내려온다고 해서 부부가 매일 북향을 바라보다 지쳐서 두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의 비결서인 <<정감록>>에도 우리 민족의 안타까운 소망에 뿌리를 둔 범씨 도읍설이 적혀 있다고 한다. 섬 출신 대통령이 두 사람이나 있었으니 앞으로 고군산 출신이 대통령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섬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아닌 게 재미있다.
고군산이 범씨 도읍이 되는 때는“퇴조(退潮) 300리”, 군산에서 바닷물이 300리 밖으로 물러난 뒤라고 밝혔다고 한다. 새만금 사업으로 신시도와 야미도까지 방조제가 연결되었고 이후 새만금 사업대로 선유도에는 국제 항구가 건설된다. 친환경 고부가가치 농산물 생산과 식품산업시설을 비롯해 미래 신재생에너지 산업 및 연구시설을 집중 육성한다. 친환경적인 녹색에너지단지와 가족형 관광과 해양레저가 함께 하는 관광도시로 건설하여 바야흐로 동북아시아의 경제중심지로 개발하는 사업이 예정대로 이루어진다면, 군산 인근 지역의 바다가 육지가 되는 그때가 된다는 이야기다. 어찌 황당하기만 할까. 새만금에 국제 항구와 관광위락 중심지로 역할이 중대되면 <<정감록>>의 기록대로 범씨 천년 도읍이 바로 이때를 말함이 아닌가 싶다. 섬사람뿐 아니라 인근 지역 사람들 누구나 기대해봄 직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우리 민족같이 예부터 미륵이 하생할 것을 고대한 안타까운 백성이 또 있을까.
하지만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고대 사회 같이 하늘만 쳐다보는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어찌해도 새만금 사업이 잘되면 지역이 더 활성화될 것은 당연지사다. 군산 인근과 부안 주변의 바다가 육지가 다 된다면. 세계의 많은 나라 사람들이 투자하러 올 것이며 관광객들도 덩달아 올 것이니 그야말로 범씨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예부터 다문화민족 국가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피부색이 다른 다문화 인구들도 많아지고 있다. 바야흐로 범 세상을 아우르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백성들이 바라는 군주는 모든 백성들이 공평하게 대우받으면서 정직한 사회에서 맑고 밝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힘쓰는 사람이 아닐까. 백성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 되는 나라일 뿐 아니라, 범 세계인들이 바라는 세상이 새만금에서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범씨 천년 도읍설이 펼쳐질 때를 만난 것이 아닐까?
신시도 월영대에서 내려다 본 고군산군도
18. ‘애기벤여자찡겨죽은바오’를 찾아서
'애기밴여자찡겨죽은바오’를 찾아서
바다의 뿌리가 뽑혀나간 뻘밭은 황량한 사막 같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꿈틀거리거나 퍼덕거리는 생명도 보이지 않았다. <율포의 기억>이란 시가 떠올랐다.“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 먹이를 건지는 /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어렸을 때 부산 앞바다에서 해수욕을 하거나, 수평선 너머 무위의 꿈을 줍고 있을 동안, 서해의 갯벌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줍는 성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래서 누군가 서해 바닷가에 서면 너무나도 문학적인 개펄의 냄새를 맡는다고 했던가. 멀리 새만금방조제가 보이는 해청 쉼터에서 죽어가는 개펄을 바라보며 영도의 풍경을 떠올렸다.
'지명, 그 초기 명명자의 인식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김규남 교수의 강의를 받고 답사에 참여했다. 옛 지명의 인식에 따라 간척이 이루어진 새만금 지역의 변화를 살펴보는 일이었다.
2010년 12월 18일, 인문학 팀은 아침 9시에 전주 시청 앞에서 모여서 군산으로 출발했다. 20여 년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새만금방조제를 찾을 때마다 공허한 사막 같다는 느낌이었다. 비응항을 지나서 첫 휴게실에 도착하여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침 눈발이 그쳐서 바닷바람은 차고 추웠지만 속이 시원할 정도로 상쾌한 기분도 들었다. 건너편 부안 쪽의 바다는 폐허가 되고 있는데 방조제 근처의 군산 쪽은 아직 창파 그대로였다. 옛날에는 몽돌해수욕장이었을 해변을 더듬으면서 미끈한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건너서 야미도의 산에 올랐다.
야미도는 세 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달려온 길은 바다 위에 놓인 부잔교 같이 보였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련한 방조제 안 쪽 바다는 육지가 된다. 이십만 평이라던가. 여의도의 140배나 된다는 그 넓은 바다를 흙으로 메울 수 있을까. 새만금 개발 모형도를 지금 이곳에서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탁상의 설계도처럼 이루기란 어찌 쉽겠는가. 그 많은 흙은 어디서 가져와야 한단 말인가. 흙을 수입할 수도 없으려니와 또 그 흙을 파내는 곳의 환경은 또 어쩔 것인가. 마치 거대한 풍선의 한쪽을 누르면 저쪽이 불러지고 그 쪽을 누르면 이쪽이 튀어나오는 거와 다르지 않을 것인데…….
야미도의 마을 안에는 당산나무가 전라(全裸)인 채 파란 하늘에 아름다운 굴곡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고기잡이 나갈 때마다 굿을 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마을에 교회가 들어오면서 마을 굿은 퇴색해버렸다. 새로 지은 상가들이 있지만 각 횟집이나 음식점은 본래 예상과 달리 많은 적자로 빚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전교생이 단 네 명인 마을의 작은 초등학교. 네 명의 학생들은 마치 이 학교의 족적처럼 남아 있다. 마을을 떠난 사람들의 흔적이 드문드문 폐가에 남아서 정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심정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오랜 세월 고기잡이에 기대어 살 때는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초가였던 옛 집을 헐고 벽돌집으로 짓고 살게 되었으니 발전했다고 보아야 할까. 그러나 사람은 모두 도시로 빠져나가고 할머니만 집을 지키고 있다. 새 벽돌집에 옛날 야미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 사진을 보러 갔다. 고요하기만 했던 것 같은 어촌의 사진은 마을의 유물이 되었다. 산기슭에 앉아 있는 집에서는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다. 숲 속으로 난 마을길을 걸어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보았다.
새만금 지역의 우리나라 지명의 대부분은 일제시기에 한자로 변경될 때 우리 토박이말을 한자로 표기하여 정해진 이름이다. 별의 별 이름이 많은데 재미있고 뜻도 알 수 없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이름에는 반드시 그 지명을 붙인 그 시대 사람들의 인식이 있었다. 야미도(夜味島)도만 해도 그렇다. 한자의 뜻대로, '밤에 맛이 나는 섬’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 뜻을 맛볼 수 있었던 섬이었을지도 모른다. 본래 우리말은 배미였다가 밤이 되었다. 옛날 섬사람들에게는 바다는 마당이었던 모양이다. 바로 고기잡이 터를 땅으로 보았다. 논배미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마을 이름도 선유도는 진말, 안무실, 방축도는 모래미, 장자도는 가재미, 장재미, 무녀도는 모개미. '미'로도 불리었다. 선유도를 벅석금, 방축도를 쎙금, 작은쌩끼미, 깔따꾸마, 벅석구미, 신시도는 살막꾸미, 대끼마, 밍끼미, 무녀도는 망끼마, 생새끼미 나락끼미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해안의 바위 이름도 많았다. 특이하고 가장 긴 바위 이름이 '애기밴여자찡겨죽은바오'였다. 이름만으로도 섬 여자들의 지난한 생활을 엿볼 수가 있다. 임부들도 애기를 낳을 때까지 매일 고기잡이나 조개를 캐러 나가야 했다. 오죽하면 바오에 찡겨 죽었을까. 고개 숙인 성녀들의 순교지가 따로 없었다. 하기는 먹을거리가 많은 현대에도 진정한 먹거리를 찾으려면 성자 같은 마음이어야 한다. 너무 많다는 것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올가미와 꼼수가 있기 마련이어서 어느 틈에 찡겨 고난을 당할지도 모르는 세상이니까.
바다 배미를 읽고, 알싸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애기밴여자찡겨죽은바오'가 있는 곳을 찾아 걸었다. 전설 같은 바오를 찾는 일은 한가로운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떤 종교의 순교가 그렇게 처절했을까. 나는 어느새 순교 터를 찾는 경건한 순례자의 심정이 되고 말았다.
바닷가로 내려오니 낚시꾼들이 자동차를 몰고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점에서 우리는 그 바오가 있는 곳을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갯바위들이 험난하게 늘어선 산기슭 너머를 가리키며 '애기밴여자찡겨죽은바오'가 그쪽에 있다고만 손짓을 했다. 힘센 물살이 갯바위를 때리는 모습이 무섭게 보였다. 성녀들의 아슬아슬한 생활 터임에 틀림없었다. 바닷물이 빠졌을 때 정신없이 조개를 캐거나 일에 몰두하다가 물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갑작스레 바위틈에 끼어 옴짝달싹하지 못했으리라.
선착장으로 나오니 쓸모없는 고기잡이배들이 한가롭게 누워 있었다. 야미도 상가로 내려와서 우럭탕으로 준비된 점심을 먹었다. 바로 잡아온 싱싱한 우럭이라고 했는데, 어디서도 맛보지 못하였던 시원한 국물 맛에 아찔했던 풍경도 다 잊을 수 있었다.
야미도 산을 오르고 바닷가를 걸은 것만으로도 내게는 힘든 고비를 넘은 것 같았다. 분명 ‘애기밴여자찡겨죽은바오’는 거룩한 삶의 순교 터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만종의 그림처럼 물 빠진 바다배미에서 넘실대는 파도를 향해 묵묵히 고개 숙였다.
19. 망해사 가는 길
집합미의 절정. 가을의 꽃으로는 단연 코스모스다. 늦여름부터 피기 시작하는 코스모스는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자주 가까이서 보는 꽃이지만 가을에는 꼭 금만경 들녘을 달려봐야 한다. 이 나라 어디를 가도 이런 지평선 들녘을 볼 수 있겠는가. 코스모스의 사열을 받고 일렁이는 누런 들판이 지평선까지 닿는다. 출렁이는 금물결 바다 그 자체다.
거룩하게 고개 숙인 벼이삭들을 축하라도 하듯이 코스모스 꽃길이 행진한다. 소리 없는 아우성 아닌, 우주 꽃들이 금빛 바다를 향하여 살살이 축포라도 터트리듯 꽃잔치를 베푼다. 코스모스는 밝은 햇살 속 파란 하늘 아래 벼이삭들과는 딱 맞는 궁합이다. 살랑대는 결이 이루는 화음이 사랑의 화음으로 울려나오는 감동에 실려 함께 신의 축복 속에 감싸인다.
고대이집트인들은 황금을 태양신의 땀방울이라고 믿고 황금을 믿고 숭배했다지. 태양을 숭배했던 모든 고대민족들이 최고 권력의 상징, 행운의 상징, 종교의 상징 아울러 최고의 아름다움 그 이상으로 숭배하여 그들의 최고의 신에게 바치고 장식했다지. 그 최고의 상징이자 아름다움 그 이상인 황금들판이 여기 펼쳐져 있다. 태양신의 사랑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땀방울 같은 볍씨를 내리고 어루만져 열매로 익혔으니 아름다움이 현현할 때는 신의 뜻에 맞는 놀라운 비결이 숨어 있으리라.
코스모스는 이름을 참 잘 지었다. 여덟 장의 꽃잎이 한 송이를 이루는 단순한 모양을 한 이 꽃은 하양과 진분홍 색깔 등 몇 가지 색으로도 만 가지 빛을 풍겨내는 무한한 진리의 표상 같기도 하다. 가을의 들녘이 익어갈 때 김제에 오면 배가 고파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가을 들녘이 ‘지평선 축제’이다. 무한히 뻗어나갈 김제 밥의 향기가 이어나갈 듯하다.
筍輿時過稻花香(순여시과도화향) 가마 타고 지나가다 벼꽃 향기 맡네. 얼마 전에 보았던 이서구의 한시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가을 들판은 한여름 뙤약볕에 땀방울과 눈물인 것 같은 볍씨를 달고 혹독한 태풍과 폭우를 이겨냈다. 보이는 것 모두가 시 자체이니 나는 감히 어떤 말로 이 풍성함과 감격을 글로 나타내지 못한다. 단지 옛사람의 글이라도 대신 떠올리며 그 심정을 같이 해본다.
始信鄕園風味好(시신향원풍미호) 이제야 시골 살이 참맛 알게 되었으니 하며 여생을 농사짓다 늙고 싶다고 했단다. 연암과 더불어 실학의 4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았던 그였으니 당연했으리라. 벼슬살이 한 것도 평생의 한으로 생각한 그였다니 아니 그럴까. 그 나이의 내가 되고 보니 같은 심사요. 섬돌 앞 오동나무 잎 떨어지는 소리 아니어도 가을 소리가 지천이다. 자동차 물결에 나부끼는 코스모스 꽃물결과 누런 평야가 살살이 마음바다를 만든다.
사랑이 꼭 좋은 일만 이어진다면 어찌 사랑이라 할 것인가. 봄부터 가을까지 국화를 피우기 위해서처럼 그렇게 천둥과 먹구름도 이겨냈다. 사철의 희로애락을 같이했기에 저토록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자연물의 하나인 사람도 그 자연에 속해서 그 영향 아래 사랑을 익혀왔다. 사랑의 모든 기억들이 파도처럼 벼 이랑의 물결처럼 인다.
진봉면 심포리로 오면 망해사까지 가게 되어 있다. 어느 해 그 가을에 전망대 언덕에서 황홀했던 노을을 오늘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망해사, 바다를 망연히 바라보며 그리워해야 할 대상을 불러보는 곳일까. 사랑의 모태는 하나였으니 신의 존재라도 좋고, 대상을 가릴 수가 없다. 망해사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시절, 요가 캠프를 열고 단식 수행을 공부했던 곳이다. 그때는 이 절의 의미는 몰랐으나, 심포의 해산물이 좋았고 절 마당 아래로 바위 덩어리를 밟고 해안으로 내려가 바닷물에 놀 수도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던 나무였던지, 그 팽나무 그늘에서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고 놀았던 마당은 지금은 엄격한 둘레를 치고 지엄한 공간의 예배 대상이 되었다. 옛날 고향의 마당 같은 정취와 편안함이 사라진지 오래인 것 같다.
망해사는 진묵대사가 중건하여 많은 일화를 남긴 곳이다. 대사가 이곳에서 출생하여 완주 봉서사로 출가하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그분이 지은 낙서전(樂西殿)의 이름으로 보아 서해를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었건만 천년 세월의 사연을 저 팽나무는 제 몸에 옹이를 만들면서 그 많은 사연을 몸에 새겨왔으리라. 그 한 토막의 사연에는 우리들이 놀면서 수행자들의 마음을 익혀본 일이라든지. 저 황금 들녘을 놔두고라도 배고픈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의미를 이곳에서 배웠다는 사실도 있으리라. 그리고 많은 날들이 지나고 새삼 사랑의 추억이라도 만든다고 찾아다닌 흔적도 알리라. 앞으로 망해사는 더 이상 망해사(望海寺)가 되지 않는다는 사연도 아프게 새길 터이다.
망해사에는 최근 몇 년 전에 절 입구에 해우소를 지었다. 나는 이곳에 오면 그 해우소에 앉아 칸막이 창살 사이로 밖의 풍경을 보는 일이 즐겁다. 지금은 새만금 축조 때문에 내해가 되어 출렁대는 바다를 볼 수가 없다. 가운데쯤 섬처럼 보이는 곳은 땅으로 변해가는 어중간한 모습이며 포크레인도 멀리 보이지만, 아직 어느 해안 같다. 얼마 전에 축조된 범종도 이제 그 운명을 달리하여 없어지고 그 기단의 흔적이 을씨년스럽다. 낙서전의 공포가 단순하지만 예스러운 멋도 있건만 이제 그 이름처럼 바다를 바라보는 즐거움은 사라지리라. 그 즐거움을 어떤 풍경이 대신해줄까? 망해사 해우소에서? 망해사(望海寺)는 망해사(亡海寺)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낙서전은 방향을 바꾸어 가을 황금 들녘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려야 하는 것이 더 어울리겠지. 망화사(望禾寺)라 하는 것이 더 낳을지도 모르겠다. (2012년 가을)
20. 붉노랑상사화를 아시나요.
붉노랑상사화 길
변산마실길 2코스에는 붉노랑상사화 길이 있습니다
여름철에 절집에 가면 반드시 상사화를 볼 수 있습니다. 주로 분홍이나 노랑 상사화 그리고 가끔은 흰색 상사화입니다…. . 상사화를 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전설 때문인지 모릅니다. 절의 어느 스님이 속세의 한 처녀를 사랑했지만 이룰 수 없었는데 뒤에 그 스님의 무덤에서 신비한 꽃이 피었다지요. 이룰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이라 하여 상사화라고 이름 지었는가 싶습니다.
붉노랑상사화는 처음 봅니다. 꽃잎 끝이나 가장자리가 붉은 빛을 띱니다. 상사화의 잎은 넓은 난초 같아서 난초과에 속합니다. 봄에 소복하게 잎이 무리지어 올라왔다가 7월쯤이면 모두 없어집니다. 잎이 없어진 그 자리에 꽃대가 올라옵니다. 잎을 만나지 못하고 피는 꽃이어서인지 2,30cm. 쯤 되는 꽃대 위에 다섯 송이씩 무리지어 달립니다. 그나마 덜 외롭겠지요.
꽃도 절대로 잎을 만나지 못해요. 상사화 꽃은 열매도 맺지 않습니다. 같이 살지 않으니 열매를 맺지 못하겠지요. 임을 봐야 뽕을 따지 않겠습니까. 평생 죽도록 사랑하다가 끝내는 수절 수행에 전력을 다했나봅니다. 그 수행력이 하늘에 닿았을까요. 열매 대신에 이렇게 많은 꽃들이 번성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랑도 그리 절대적인 사랑을 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한때 열렬했다가 속절없이 사라지는 그런 사랑 말고 영원을 노래하는 사랑 말입니다. 서로 만나지 못해도 그리움의 끝에서 꽃송이로 태어나는….
해변을 끼고 걸어가는 꽃길은 파도 소리에 발맞추니 더욱 생기를 줍니다. 철썩 철썩 뭍으로 올라왔다가 미끄러지는 바다의 발걸음처럼 또 안타까운 일이 없겠지요. 언덕으로 올라와서 상사화를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또한 파도의 운명인가 합니다. 파도소리와 바람으로 전하는 무심한 말. 그렇게 바다는 바다가 걸머져야 하는 사랑의 길이 따로 있나봅니다. 파도에 밀려 올라온 바닷게 한 마리가 기어이 뭍으로 올라와서 풀밭에서 외롭게 그의 사랑을 찾고 있는 것도 모두 그리움 때문입니다.
어떤 꽃인들 아름답지 않은 꽃이 있겠습니까만, 붉노랑상사화야말로 노오란 그리움으로 피었다가 농익은 그리움이 붉은 빛으로 더해지는가 싶습니다. 무리지어 있으니 보는 사람이 환호작약할 뿐, 꽃들은 정염의 응어리를 옆 눈짓으로 흘긋 거리는 것 같습니다. 외로움의 꽃이 아니라 속내 깊은 정열의 꽃이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에 사라지는 기쁨이 아니라 이 붉노랑상사화는 만남의 설레임이 오래 갑니다. 참으로 상사병이 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한 번 왔다가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운명을 태생으로 안고 있습니다. 같이 있다가 먼저 간 사랑, 멀리 있어도 자주 볼 수 없는 사람들, 한 하늘 한 땅 위에서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랑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같이 있다고 반드시 사랑을 잘 가꾸고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함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을 나누고 옆에 없을지라도 상사화처럼 열렬한 사랑을 할 일입니다. 은근하고 조용히 길게 말입니다. 또 만나지 못한다고 함께 있지 아니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은 한계가 없습니다. 지구 위의 모든 생명이라면 말입니다. 영원한 절대적 사랑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스스로 꽃이 되고 덕이 되는 삶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언젠가 불갑산 꽃무릇 사진을 보내준 이가 있었는데, 그날 저는 그 빛나는 붉은 색에 매료되어 시내로 가지 않고 불갑산으로 달려간 적이 있습니다.
이 꽃을 보고 변산마실길로 달려갈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아마도 많은 꽃들이 지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부안 위도에는 흰 상사화 꽃축제가 한창이랍니다. 선운산, 내소사 등에 많이 피고 있습니다. 꽃무릇(석산)과 비슷한 꽃들이 모두 상사화라고 불린답니다. 꽃들의 특성도 같습니다. 약용으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사진으로라도 일상에 자그만 생기를 더하면 좋겠습니다.
8월 26일에 변산마실길 2코스를 완주했습니다. 변산해수욕장이 있는 송포마을에서 고사포 해수욕장까지였습니다. 자동차가 있는 송포 마을까지 버스타고 돌아왔습니다. 그때는 꽃봉오리들이 조금씩 개화하고 있었습니다. 햇볕이 많은 곳에 조금 핀 정도였습니다. 좀 무리가 되었지만 며칠 후 다시 갈 수 있었습니다. 만개한 꽃길은 상상보다 훨씬 더 환상적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즐긴다는 것이 생의 활력소가 된다는 것을 다시 절감합니다. 상사병이 도지려 해서 이 꽃들의 사진을 함께 즐기며 병은 만들지 않겠습니다. 다음에 만날 약속을 했으니까요..
21. ‘오를 때 못 보았던 꽃, 내려올 때 보았네’
- 순천 송광사에서
오를 때 못 보았던 꽃, 내려올 때 보았네”
(순천 송광사에서)
여우비가 지나가듯 벚꽃을 여읜 봄이 무르익어간다. 아직 조계산은 듬성듬성 산벚꽃이 희끗희끗 남아 있다. 겨우내 빈 몸으로 설한풍을 맞았던 나뭇가지에 봄물이 올라 파르스름한 생기가 돋고 있는 숲 속으로 산문이 열린다.
전에 없던 거대한 선돌.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가 새겨진 비석 돌이 장승처럼 서서 이 사찰의 위용을 말한다. 길 양옆에서 구부리고 서로 손잡듯 맞닿은 노송을 올려다보며 심호흡을 거푸 하다 보니 장엄한 일주문이 가슴을 서늘하게 연다. 육중하게 두 기둥이 서 있는 일반 일주문과 다른 정감이 느껴진다. 양쪽으로 이어진 아담한 돌담 사이에 자리한 것이 대갓집 대문을 연상하지만, 지붕 밑의 공포조각만은 다포계로 화려하고 웅혼한 아름다움이 있다. 산을 오를 때 보지 못했던 꽃 내려올 때 보았다는 말처럼, 전에도 이 문을 들어섰을 테지만 볼 수 없었던 일주문의 장식이었다. 편액 자체도 색다른 형식이다. 세로로 쓴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와 안쪽의 편액, '승보종찰 조계총림', 두 편액으로만 봐도 송광사가 불교사의 역사에서 어떤 위상을 지닌 사찰인지 알만하다. 물론 산문으로 들어서면서 '청량각'이란 누각이 서 있는 극락교 밑을 흐르는 물소리에 벌써 한차례 세심을 하였지만, 한 번 더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삼청교에는 단아한 팔작지붕의 우화각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얼핏 무지개 모양의 홍교인 것만 살피고 바쁘게 지난다. 언제나 그렇듯 단체 여행의 정한 시각으로는 충분히 주변을 살피고 느낄 수가 없다. 주마간산이나마 거대한 사찰이 앉아 있는 주변 산경의 청신한 느낌을 흡입해보고자 온몸의 세포는 들떠 있기 마련이다.
맑은 샘물로 목을 축이고 잠시 옛 기억을 더듬는다. 대웅보전 앞마당에서 사방으로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전각들의 지붕 곡선을 그림 감상하듯 아스라이 둘러볼 뿐, 저 때도 저렇게 많이 전각들이 연꽃잎처럼 대웅보전을 둘러싸고 있었던가.
송광사의 인연은 출가 4박 5일의 체험이었다. 삶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던 시절의 화두를 여기 와서 풀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로부터 삶의 진정한 수행이 시작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벌써 30여 년 가까운 세월인데. 지금쯤은 해탈의 맛을 보고 있어야 할 것이련만. 수없이 해탈교를 건너봤지만, 진정한 해탈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쨌든 그 시절 송광사에서 보냈던 4박 5일, 법정 스님이 수련원장을 맡고 있을 당시였다. 결코 잊을 수 없던 법정 스님과의 독대는 참으로 나에게 시원하게 앞길을 열어주었던 시간이었다. 쌀쌀하게 찰랑대던 스님의 가사 자락에서는 매화 바람 같은 청량함이 느껴졌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했던 회주 큰스님의 미소도 그려진다.
그때는 내 마음의 화두에 몰두한다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일주문이 어떻고 청량각이나 우화각의 건축미가 아름다웠다는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자루’라는 강당에서 함께 선 수행을 했던 50여 명의 도반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엄격했던 발우공양. 마지막 발우에 묻은 음식찌꺼기도 물로 씻어 마셔야 했던 것. 밥이란 수행을 위한 약으로 알라는 것도 그때부터. 최소한의 공양으로 정신을 얻었던 기회였다. 그 뒤로 밥알 하나도 소중히 여겨졌다. 물 한 방울까지. 음식 맛과 마지막 스님들이 해준 찰밥이 그리도 맛있었다는 것만이 생생하다. 아침 시간이나 쉴 때, 지금 보니 일명 침계루(사자루)라고 하는 7칸 누각 밑의 계곡에서 세수도 하며 물소리를 청량하게 들었다는 기억이 전생처럼 느껴진다. 사자루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 가에서 산책도 하고 쉬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절집의 주변을 의식하지 못했다. 눈이 있되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마음의 눈이 떠지지 않았던 때가 그런 것이었던가.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던가.
계곡물이 아래로 흘러내려서 대웅보전 입구의 우화각 밑에 오면 절정의 그림을 연출한다. 돌아 나올 때는 올라갔던 길 반대쪽 길로 내려온다. 개울물에 떠 있는 징검돌다리를 짚으며 무지개 모양 홍교 아래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돌이 빠져나와 있는 것을 엎드려서 눈으로 짚어본다. 들어갈 때 몰랐는데 나올 때 징검돌에서 보니까 우화각은 앞쪽은 팔작지붕인데, 뒤쪽은 맞배지붕이었다. 주변 건축물과의 공간 배치 덕분에 그리도 절묘하게 지붕을 꾸미게 된다. 물론 대웅보전 지붕도 단순한 팔작지붕은 아니었다. 팔작지붕이 겹으로 펼쳐져 있어서 건축의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위에서 보면 바로 아亞자 형식인 것 같다. 신라 때 ‘길상사’란 이름으로 작은 절이 지어져서 조선 시대에 와서 송광사로 이름이 바뀌는 동안 한때는 80여 동까지 번창하였고, 전쟁에 소실되기도 하여 몇 번의 개축이 이어졌을 것이다. 지금의 대웅보전은 1980년대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대 건축미도 적당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제1세의 국사가 된 이래 16 국사를 배출하였다. 옛날의 '길상사'란 이름은 현대에 와서 법정 스님이 살아계신 동안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살린 절이 세워졌다.
내려올 때 다시 보니 일주문 아래서부터 노거수들이 이미 일주문의 상징처럼 도열하여 산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맞아주고 있다. 얼마나 오래된 나무였던지 자신을 모두 내어준 노거수의 그루터기 하나가 포토존이 되어서 한 번 씩 모두 그 패인 그루터기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나무 위에 돌 하나씩을 올려놓고 탑처럼 기원한다.
아! 청량각, 그 오랜 세월 견디면서 송광사의 첫 산문 역할을 하고 있다. 전혀 이 청량각을 건넜던 기억이 없다. 오를 때는 청량각의 현판이었는데 내려올 때 바라보는 쪽은 극락교란 현판이다. 산문을 오르면서 가빴던 숨을 이 누각에서 쉬면서 흐르는 물소리에 저 밑 세상의 복잡한 소식들과 번뇌들을 날려버리도록 배려한 쉼터 역할이다. 부처님을 만나고 다시 새 기운을 얻은 극락의 기분을 맛보고 왔느냐고 극락교가 물어주는 것인가. 몇 번의 보수가 있었겠지만 세월의 힘이 느껴지는 청량각. 천장에 용머리가 내려다보며 마음을 점검한다.
이쪽과 저쪽으로 난 길, 오를 때 보지 못했던 부처들을 내려올 때 다른 길에서 만나는 나무들과 흙과 돌멩이와 풀조차 모두 나의 또 다른 눈부처로 정겹고 신선하다. 아직도 못 가본 수많은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한 길이라도 철저히 밟아볼 수 있다면 다른 길의 이치도 그러할 것이고, 우리의 인생길의 정도도 알 수 있을 것이려니.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지나치며 놓쳤던 것일까. 수많은 사람 중에 만났던 사람, 물상들, 모두 얼마나 안 것일까. 정말로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끝내는 허망하고 물거품 같은 세상이지만, 순간순간 전체로 열심히 살 뿐이다. 누가 나를 몰래카메라로 찍어서 카 톡에 올렸다. 그런 줄도 몰랐네. 오를 때 못 보았던 임들 내려올 때 보았네. 오를 때 못 들었던 소리 내려올 때 들었네.
22. 마르지 않는 문학의 샘 장흥
다섯 손가락이 감싸 쥐고 있는 커다란 보석이다. 저 조형물은 무엇을 형상화한 것일까?
정남진리조트 뒤, 기억산으로 오르는 언덕에 올랐다. 우리가 지나왔던 길 주변과 리조트를 둘러싼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흥이 물의 고장임을 드러낸 형상이다. 하얀 선으로 육각을 그린 무늬가 사방 연속으로 이어져 있다. 육각수를 나타내었다. 대형 물 한 방울이 소중하게 한 손 안에 들었다.
보석 같은 물방울을 감싸고 있는 손을 보자, 고려불화대전에서 보았던 일명 '물방울 관음도'를 그리게 된다. <물방울 관음도(觀音圖)>, 저 물방울을 조금 늘어뜨리면 기다란 물방울이 된다. 통통한 버들잎 같은 물방울 안에 그린 관음보살이다. 푸른색 물방울 안에서 하늘거리는 사리를 입은 우아한 보살이 '선재동자'를 맞이해 주는 그림. 700년 만에 돌아온 고려불화대전이 있던 날, 누구라도 그 그림 앞에서 넋을 놓지 않을 수 있었으랴. 세계 어느 불화도감과 소장처인 일본에서조차도 도감에 올리지 않았던 그림이었다. 세상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낸 희대의 명작이다. 소중하게 감싸 쥔 물 한 방울을 보자니 물방울 속의 관음보살이 저절로 떠오른다. 순간 내가 선재동자가 된다.
장흥은 산 좋고 물이 좋은 곳이란다. 어느 곳에서나 적당한 거리만큼 산능선을 바라볼 수 있다. 보살과 부처의 얼굴을 한 산 능선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요산요수樂山樂水! 지자요수知者樂水라.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장흥은 지혜롭고 어진 자들이 많이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것이 틀림없겠다. 많은 문학인들을 배출한 배경이었다.
정남진 전라남도 장흥군.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국토의 방위의 기점을 알리는 둥근 표지판이 있다. 그곳을 기점으로 정 동쪽은 정동진이고, 정남진이 장흥이다. 우리 전주 팀은 광주를 지나 나주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서 영산강을 건너고 23번 국도를 따라 장흥군으로 들어왔다. 행사장 가까운 유치면에 들어오니 산과 물이 어우러진 풍경이 보기 좋게 나타난다. 보림사가 있는 가지산을 옆으로 접고 남쪽으로 오자니 장흥댐이 길게 물그림자를 드리운다. 망향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댐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진다. 고인돌이 놓여진 '선사유적공원'이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어찌 산과 물이 좋은 곳에 고대로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으랴! 유치면에는 자연휴양림도 있고 <슬로시티>를 상징하는 한옥민박단지도 있다. 장흥댐을 지나자니 바로 정남진 리조트가 기억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공원에 커다란 물방울의 조형물이 장흥의 상징처럼 우뚝 솟아 있다.
한여름의 피서객들이 물러간 야영장은 한가롭다. 200여 명의 회원들의 열기가 여름의 막바지의 더위에 더하여 후끈하게 달아 오르는 듯했지만, 대형 강당은 천장이 높아 매우 시원하였다. 세미나 시간에는 해산海山 한승원님의 문학 강연이 있었다. 장흥이 낳은 문학인 중 현존하고 계신 대표적인 문학인으로서 아직도 왕성하게 집필을 하신다. 주제는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목소리가 폭이 넓고 탁 트이면서도 질박한, 마치 고대 토기에서 울리는 톤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강의는 구수하여 듣기 좋았다. 이야기꾼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도깨비 이야기부터 해산토굴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표적인 이야기 한 토막.
해산 선생의 시 <내 할아버지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할아버지가 밤낚시를 하는데 고기들이 정신없게 입질을 했다.
아흔아홉 마리째 잡아 올리고 난 할아버지가 결리는 옆구리를 외틀고 후유 하고 한숨을 쉬는데 뱃전 밑에서 도깨비가 히히 웃으며 말했다. ‘신나게 한바탕 잡아올렸지?’ 깜짝 놀라 구럭 안을 보니, 단 한 마리뿐이다. 할아버지가 구럭에 고기를 던져 넣으면 도깨비가 몰래 가져다가 낚시에 꿰어주고, 던져 넣으면 또 가져다가 꿰어주곤 하기를 아흔 여덟 번이나 한 것이다. 화난 할아버지가 ‘너 이놈! 나한테 죽어봐라!’ 소리치며 주먹을 그러쥐자 도깨비가 도망치며 말했다. ‘잠시나마 행복했지? 그렇지만 너무 화내지 마라, 한 마리나 아흔아홉 마리나 그것이 그것이니라.”
15년 전, 해산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온 뒤 집필실의 이름을 '해산토굴'이란 당호를 붙였다. 잘 모르는 사람은 토굴이라고 하니 토굴에서 삭히는 새우젖을 생각하고 새우젓을 찾는 사람이 있단다. 토굴이란 스님들이 자신의 수행처를 낮춰 지칭하는 것인데, 선생도 자신의 수행처라는 의미로 붙였다. 같은 사물이나 글자를 보더라도 자기 눈높이나 자신의 관심사대로 읽는다. 시인의 마음이란 그런 것. 어쨌든 해산토굴에서 새우젓이 익어가듯 자신의 글도 익을 것이니 그 토굴이나 이 토굴이나 그것이 그것이니라 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 같다.
폭우와 비바람과 태풍으로 얼룩진 나날 속에 가끔 햇볕 쨍하면 반가울 정도였던 이 여름이었다. 9월이 오면 다시 태풍이 하나 더 있다지만, 범람하는 폭우는 이제 그만. 문학기행 날은 쾌청한 날씨에 뭉텅뭉텅 흰구름도 동반하여 장흥의 억불산 기슭의 편백숲우드랜드에 든다. 울울창창한 편백나무들 사이로 산책로가 걷기 좋다. 향기로운 숲 속을 거닐다가 벤취에서 혹은 누워서 복식호흡으로 온몸을 정화한다. 목재문화체험관에는 나무뿌리부터 잎까지 나무에 대한 역사와 쓰임새와 순환과정까지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전시되어 있다. 편백숲은 장성에도 있고 우리 고장에도 많이 있다. 장흥편백숲은 다양한 형태로 개발하여 정남진의 특화된 장소로 유명해졌다. 우리고장의 편백숲이 토종이라면 이곳은 세련된 퓨전식이라 해야 할 것 같다. 푸른 숲길에 하얀 옥잠화와 벌개미취들이 숲 속의 액센트가 되어 발걸음도 싱그럽게 한다.
여다지(여닫이)해변이다. 장흥은 남국의 정취가 물씬하게 느껴지는 종려나무 가로수길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한쪽으로만 열리는 여닫이문처럼 육지 쪽 물만 내보내는 수문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란다. 관광공사가 '가장 깨끗한 개펄이 숨 쉬는 아름다운 바닷가'로 꼽은 해변 길 600m에 '한승원문학산책로'가 나 있다. 해변 산책로를 걸으면서 느긋하게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았다. 아침 이른 시간이나 노을 때 왔으면 <노을>이란 시가 얼마나 어울렸으랴! '나 그냥 그렇게 산다'에 우선 눈길이 간다.
구름이 물었다 요즘 무얼 하고 사느냐고/ 내가 말했다 미역 냄새 맡으며 모래알하고/ 마주 앉아 짐짓 그의 시간에 대하여 묻고/ 갈매기하고 물떼새하고 갯방풍하고 갯잔디하고/ 통보리사초 나문재 하고 더불어/ …/ 나 그냥 그렇게 산다.
장마 끝에 맑은 날이지만 후덥지근하지만 더운 한낮에 바다 빛은 오히려 사막 같은 아름다움도 있다. 늦꽃인 듯 해당화 몇 송이가 익어가는 열매와 함께 물결에 비쳐들어 반긴다. 여름 손님들을 보내고 쓸쓸하게 지친 듯한 해변에는 배 한 척이 그림처럼 배경으로 서 있고, 조개껍질들이 줄줄이 모여 있다. 물이 빠진 개펄에서 엎드려 썰매 타듯 바닥의 조개를 채취하는 율산마을 사람들의 삶의 허물들인가. 시인은 그들의 삶을 노래했고 이 바다에 헌시를 바쳤지 싶다.
율산마을 집필실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와 하늘, 해와 달과 별과, 산과 섬, 들판에 내리는 빛과 어둠, 눈비와 바람과 안개. 그 속에 서식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을 도깨비와 흥정하여 다 사버렸다. 시와 소설을 쓰는 일에 아주 확실하게 미쳐버린다는 조건으로. 글 쓰는 즐거움과 함께 그 모든 눈 복을 누릴 수 있게 된 해산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란다. 거기에다 차밭을 600여 평 경영하면서 차를 손수 만들어 마실 수 있으니, 다른 소설은 몰라도 ‘차 한 잔의 깨달음’으로 나는 더 가깝게 느낀다. 차 생활을 수행 삼아 하고 있는 나에게는 얼마나 부러운 일이랴!
문학산책로를 뒤로하고 안양면을 돌아서 회진면 진목마을의 이청준 생가로 가는 길이다. 바닷길 마을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동안 바다 낚싯터와 정남진 전망대 등 풍경이 좋은 그림들이 이어진다. 마치 산수화 전시장을 돌아보는 것 같다. 정남진이긴 하지만 남서쪽 바다라고 해야 더 마땅할 것 같다. 서해 끝이 남해로 이어지는 곳이지 싶다. 동해바다와 부산 앞 바다에서 청춘의 열기를 식혔던 나는 서해가 가까운 부안이나 군산 바다에서는 늘 갈증이 느껴졌다. 서해의 정서에는 고대로부터 바다에 생계를 걸었던 사람들의 역사와 삶의 애환이 갯벌에 질펀하게 배어있어 애달프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동해에서는 일출을 맞으며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자신의 의지를 시험해보며 희망을 그리기도 한다. 누가 그랬던가. 동해가 남성적이고 철학적이라면 서해는 여성적이며 문학적이라고. 그래서 서해 가까운 마을에서는 문학인들이 많이 탄생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부산 앞바다와 남해는 문사철적이라고 해야 할까. 회진면으로 들어서니 그곳에 <천년학> 영화 촬영지가 있다고 한다. 한 문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산을 바라다보니 양 날개를 펴는 학의 형상인 산봉우리가 보였다.
이청준의 생가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걸으니 거름 냄새가 고향 냄새인 듯 싫지 않았고 담쟁이덩굴이 그림의 바탕처럼 디자인 된 농가의 담장이 정겨웠다. 이 마을에 들어서자니 선생의 말이 절감된다.
“문학은 불행의 그림자를 먹고 사는 괴물이다. 삶의 압력, 현실의 압력이 가중되면 이걸 견뎌내려는 정신의 틀을 만드는 것, 이것이 문학 활동이고 문학적 상상력이다. 그러니까 행복한 시대에서는 새로운 문학의 틀이 만들어지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 그렇다면 오늘날 행복한 듯한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문학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게 한다. 풍요의 겉옷으로 부풀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또 다른 차원의 불행의 씨앗을 안고 있으려니 언제나 현실의 압력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점심시간에 맞추어 장흥 읍내로 돌아왔다. 탐진강 가의 공원이 아름다웠다. 물 축제를 열었던 곳이다. 개천이기보다는 강 같은 둔치에 연못까지 조성되어 분수대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뿜고 있다. (2011)
23 보림사
내려가는 길에서 스쳤던 그곳 올라가는 길에서 만난다.
장흥 하면 늘 보림사(寶林寺)를 떠올린다. 정남진리조트에서 하계세미나를 마치고 다음날 오전에 장흥의 명소를 둘러보고 올라가는 길이다. 보림사는 가지산파 선종의 종찰이다. 말 그대로 국보와 보물을 많이 지니고 있는 산이다. 대적광전의 비로자나 철불을 다시 볼 수 있어 기쁘다. 장중하고 엄숙한 철불은 신라 말에 당나라 유학승들에 의하여 들어온 선승들의 영향이다. 그 뒤 철불은 고려 때에 많이 조형했던 것 같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품은 건축과 조각상이 일색이다.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은 반인반수(半人半獸)상이 많다. 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빚었다 했으니, 그들의 선진의식은 스스로 신이 되기를 바랐던 것인가. 그들에게 이상화된 청동 영웅상이 많다면 우리에게는 지고의 미를 지닌 청동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는가 하면 불상, 철불과 수많은 석불이 많다. 스스로 절대자가 되는 꿈은 아예 꾸지도 못한 채 그토록 간절한 기원과 예술 혼을 불상에 담았던 것인가. 로마시대 이후 중세까지 예수의 성가족 족보가 모든 서양 예술의 모티브가 된 것처럼 동양은 부처가 모든 예술품의 기원이 됐다.
과거에서 지금까지 미(美)의 정의는 생명의 본질에 있었다. 그것은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가 아닌가. 영원히 변치 않는. 우리는 고대 철학자들이 구축해온 이념들의 영향권 내에 있다. 미술의 기준은 좀 다르지만 현재까지 유효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때 정한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름답다는 것은 조화와 비례가 맞아야 한다. 미술에 있어서도 그리스 시대에 정립된 미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8등신으로 균형 잡힌 ‘다비드’ 상과 여신들의 아름다움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신전에 조각된 여신상들이 모두 8등신의 균형미를 자랑한다. 초현대적 시대의 미의 기준이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그 시대의 기준은 유효하다.
최고의 예술품은 역시 인간임에 틀림없다. 예수와 석가, 많은 선지식과 성인들. 사람은 스스로 그런 인간이 되어 원각을 이루어야 하는 명제를 걸고 이 세상에 온 것일까. 그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설파한 것이 석가모니의 수행과 설법이었다. 진리의 본체인 법신불을 비로자나불로 형상화하여 고대는 종교의 대상으로 오늘날은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우러른다. 진리의 표상으로서 우리를 일깨우며 영원의 세계로 인도한다. 다음 생에 더는 육옷을 입지 않기 위하여 수많은 생을 거듭 닦아온 뒤 마지막 생에서 모든 원을 이룩한 석가모니. 억겁의 세월 동안 인간의 업장은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되풀 될까.
철원의 도피안사의 비로자나 철불은 아담하고 고요하여 여성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보원사지 철불은 우람하고 근엄하다. 남원 실상사의 극락전의 철불은 왜군의 침입을 막으려는 의지가 강한 엄격한 부처님이다. 보림사의 철불상은 깊은 고뇌가 서린 듯 엄숙하다. 진리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거룩하고 거룩한 모습이다. 나라가 정한 국보로 추앙받는다.
남원의 실상사와 보림사는 평지 사찰이다. 아마도 선종 사찰이 평지에 선 까닭은 보편적인 깨달음이 세상 속으로 가까이 왔다는 뜻이 아닐까? 보림사는 공포(栱包)가 아름다운 일주문에서부터 사천왕문과 주 전각까지 일직선으로 통한다. 일주문 앞에서 대적광전 앞의 삼층쌍탑까지 깊숙이 한 문 안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부여 무량사에서도 이런 눈맛을 볼 수 있다.구조가 하나의 문으로 통하여 대문 밖에서 안채의 속내까지 훤히 보인다. 현묘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구조다.
내려올 때 갈 수 없었던 가지산의 보림사를 올라가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산이 좋으면 물이 좋기 마련이다. 이곳 약수는 맛이 좋다. 불유(佛乳) 그 자체다. 깔끔하고 맑고 가벼운 느낌. 이 물을 정법으로 끓여서 차를 우리면 정말 좋은 차맛이 날 게다. 단번에 비자림의 차 잎을 따서 비비고 찻물을 끓인다. 진다(眞茶)와 진수(眞水)의 절묘한 만남. 모양 없는 하늘 다관에다 차 잎을 넣고 형체 없는 찻잔에 차를 따라서 비로자나불 철불께 헌차한 후 돌아선다. 마음으로 올린 차 한 잔.
왜 ‘물방울 관음도’를 그렸는지 그 뜻이 오묘했다. 장흥 정남진 리조트에 조형된 물 한 방울의 의미를 여기서도 새긴다. 관음보살의 음성인 듯, 해산의 말씀인 듯 여기서 ‘물 한 방울의 깨달음’을 되챙긴다. 강물도 거대한 바다도 물 한 방울이 모여서 이룬 것. 물 한 방울 속에 온갖 생명체의 원형질이 담겨 있지 않은가. 물방울처럼 나무도 사람도 하나씩 모여서 숲을 이루기에, 오늘 다시 물방울을 관음한다. 푸른 물방울 보석을 가슴에 단다
3 부 백제의 르네상스를 그린다
불국사와 석불사
안압지의 달밤
꿈같은 하룻밤
신라인의 의지와 이상향
금오봉에 오르다
경주 남산 용장골
대능원지구와 황룡사지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드는 백제참이여!
선화공주는 누구일까
왕궁리 유적
왕궁리 5층석탑
백제의 르네상스를 그린다
25. 불국사와 석불사
초가을비 촉촉히 내리던 어느 해, 안개비를 헤치고 불국사에 내린 적이 있었다. 꿈같은 화엄세계, 장엄한 불국의 정취를 스쳤으나, 그 꿈속의 아름다움을 다 찾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사바세계를 건너 불국토에 떨어졌으니 들어가는 길도, 나오는 길도 아련하여 깨고 나니 역시나 꿈이었던가! 그 꿈속의 불국을 다시 더듬고 있다. 백제의 미륵사지에서 이루지 못한 미륵의 꿈이 허전하면 불국사를 그리고, 불국사에서는 보아도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찾을 수 없어 차라리 미륵사지의 폐허를 걷고 싶다. 앞으로 올 미륵세계는 어디로 올 것인가. 보이는 형상에서 찾으려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리라.
오늘은 순서대로 불국에 들어보자. 언제나 놓쳤던 절집 입구에 있던 당간지주부터 찾는다. 불국사에 처음 들면 먼저 안양루와 자하문에 오르는 연화칠보교와 청운백운교에 시선이 빼앗기게 된다. 돌다리와 석축대 위의 전각부터 올려다보고 안양루와 자하문의 전체를 조망하는 곳에서 머물다가 당간지주를 놓치곤 했다. 긴 세월 당당하게 서 있는 불국사의 당간지주, 지주 높이 당을 펄럭이며 화엄을 불렀을 천 년의 불국사. 안양문 앞쪽의 나무 밑에 멀찍이 기품 있게 서 있는 당간지주를 발견한다. 당간지주 두 기가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당간지주에 기대어 세월의 온기를 느끼며 사진을 찍었다.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국사에서는 석조 건축물을 유심히 들여다볼 일이다. 1400여 년의 세월을 견뎌준 석조미술품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으니 불국으로 들어가는 길은 돌계단을 밟는 것으로 시작된다. 물론 일주문을 통과하고 사천왕문을 지난 뒤, 청운교를 밟고 백운교를 밟아 자하문에 들어서서 대웅전, 석가모니불을 만나야 한다. 아니면 연화교와 칠보교를 밟고 안양루를 거쳐 극락전의 아미타불전에 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그 돌계단을 밟을 수 없으니 아마도 오늘날에는 불국이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연 중 4월 초파일 하루만 이 돌계단을 개방한다기에 언젠가 꼭 그 계단으로 불국에 들어볼까 한다. 석축대 앞으로 드리운 단풍잎이 당간처럼 펄럭이며 부를 것이다.
극락전보다 대웅전이 2층처럼 높고 넓은 까닭이 있고 무설전과 관음전 그리고 비로전이 뒤에 배치한 것 모두 오묘하고 복잡한 화엄세계 정신을 표현한 것이리라. 대웅전 마당이 꽉 찬 듯하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다보여래의 보이지 않는 원력의 형상인가 오밀조밀 흙을 만지듯 조각해낸 탑 형상의 미려함이라니. 안타깝게도 연화좌에 홀로 앉은 사자상, 일제시대에 없어졌다는 다른 세 사자상은 흔적이 없어 홀로 남은 사자상은 그 짝들을 그리며 탑을 수호하고 있다. 방문객의 찬사와 예배를 먼저 받는 석가탑은 이전과 이후에도 없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통일신라 때 와서 그 이전의 다층 식 석탑들의 형상이 삼층석탑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어 한국의 모든 석탑의 전형이 되었다. 이를 두고 미술사가 유홍준은 ‘위대한 삼층석탑의 탄생’이라 했다. 그리하여 석탑을 볼 때 석가탑 이전 것과 이후의 것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비례와 조화와 균형의 세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 그 모든 조건을 갖춘 석가탑에는 황금비례의 비밀이 있다는데....
석가탑과 석굴암의 본존불의 아름다움을 과학적으로 먼저 밝힌 사람은 일본의 측량기사인 요네다 미요지였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비밀을 다시 따져보고 또 보았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과학적인 수의 배열이 있었던 것이다. 꽃의 아름다움에 피보나치 수의 배열이 있는 것과 같은 것. 지금 그 비밀이 해체되고 있는 중인가. 초가을 비에 젖은 석가탑만을 정신없이 바라보았을 때는 다보탑이 복원 중이었으나 이번에는 석가탑이 해체 중이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볼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이층 몸돌 지붕이 기운다는 소식이 있던 차. 그 고통의 아픔을 잘 견뎌주기를!
화엄세계의 정신을 형상화한 불국사를 받치고 있는 것은 석축에 그 모든 뿌리가 있었다. 기단 석축의 짜임새를 보라! 극락전 회랑을 받치고 있는 축대. 자연 돌에 맞추어 깎은 돌로 엉성한 듯 얼기설기, 무심한 듯하나, 정교하게 쌓아올린 솜씨. 돌계단 밑의 홍예문의 아치며 범영루의 축대의 구성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언제라도 날아오를 듯한 학의 날개 같은 범영루의 처마선. 범종과 물고기와 운판이 한꺼번에 울리는 날, 날렵한 범영루의 날개가 활짝 펴지지 않을까. 지상의 생물과 바다와 하늘의 중생, 모든 생물, 무생물까지 성불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범영루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누각을 받치는 석주이다. 돌기둥을 어쩌자고 저리 우아한 곡선을 자아내게 깎을 수 있었는지. 볼 때마다 속 감탄만 할 뿐이다. 또한 드러나지 않는 대웅전 계단 옆모서리. 단순하게 버선코처럼 돌려 깎은 선. 나무를 주무르듯 일심으로 조각했을 옛 사람들의 숨결을 어찌 흉내라도 할 수 있으랴.
불국사의 목조건축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8세기 조선시대에 중창되고 회랑 건물은 196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석조물만이 기적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 바탕 돌의 기초가 있었기에 다시 불국을 복원할 수 있었다. 정신을 담으려면 저리 튼튼한 기초가 서야 하리라. 사람도 몸이 건강할 때 올바른 정신을 담을 수 있고 구현할 수도 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도 그 기초가 튼튼해야 목표한 바를 이루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아직도 다 볼 수 없었던 곳곳의 비밀의 일부를 찾는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문루인 자하문에 들어 천장을 유심히 살펴보고 돌계단을 아래로 내려다본다. 다른 때 이 천장의 들보까지 올려다볼 겨를이 없었다. 반듯이 걸쳐져 있을 들보 기둥이 곡선으로 유려하게 걸쳐 있다. 단청도 한껏 어울린다. 들보의 곡선 장치는 아름다움을 강조한 것인지, 건축의 한 기법으로 한 것인지는 잘 모르나, 이런 곡선의 통나무를 어떻게 절묘하게 갖다 붙일 수 있었던가. 여행객은 그 의문을 따질 시간이 없다. 대웅전 뒤의 무설전이 앙팡지게 앉아서 뒤통수를 잡아 당기는 듯 하지만 눈짓만으로 일별한다. 햇살에 빛나는 범영루 석주도 손으로 쓰다듬고 싶었지만 근질근질한 손바닥을 움켜쥐고 아쉬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불국사 후문으로 나오는 길은 짙은 초록 숲이다. 망중한을 거닐며 토함산불국사 불이문을 나오며 생각한다. 미륵세상이 오면 저절로 불국이 이루어질까. 불국의 정토를 이루는 실현지는 바로 내 안에서부터 기초를 닦는 것이 아닐까! 아름답고 굳건한 석주처럼.
석불사
불국사를 이야기하면서 어찌 석불사를 말하지 않을까? 석굴암의 이름은 처음에는 석불사였다고 한다.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지었다는 석굴암.
수학여행 때 첫 새벽길에 토함산을 올라 석굴암에 갔다. 그때의 기억은 거기에 석굴암이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우리 문화에 눈뜨고서는 불국사에 몇 번 갔지만 여유가 없어서 석굴암에 갈 기회를 놓치곤 했다. 초가을 어느 날 석굴암에 갈 기회를 잡았다. 토함산 석굴암 올라가는 길은 기분 좋은 산책길이었다. 예전처럼 험하지도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락내리락했던 자국으로 길은 다져져 있었다. 석굴에 들기 전에 작은 법당이 있었고, 그 뒤 언덕을 올라야 했다. 같이 간 일행은 힘들다고 그 자리에 남고 나만 혼자 올랐다.
지금은 보호각이 차려져 있고 들어가서 유리관 밖에서 예배를 해야 한다. 절도 올리기 전에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망연히 서서 바라보기를 얼마인지 모른다. 같이 온 일행이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안 내려와서 올라왔다. 그도 그 자리에 말없이 서서 본존불을 바라보았다. 그때서야 나는 삼배를 올리고 부처님을 지그시 다시 바라보았다. 살아있는 부처님을 뵌 것 같았다고나 할까? 그냥 그 자리에서 부처님 안에 들어서 내가 사라진 것 같았다.
누군가 그랬다고 한다. 석굴암에 대해서는 감히 말할 수 없다. 석굴암 본존불은 만나지 않아서 말할 수 없고, 보아도 말할 수 없다고 했던 말이 실감났다. 보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다. 석굴암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숙연한 마음이 되어 말없이 걷다가 뭐라고 한마디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를 기억하지 못하겠다. 엄숙한 거룩함이 석실 안에 감돌았다. 언젠가 석굴암 예배 시간에 가서 꼭 스님과 동행하리라고 했지만, 아직 실행하지 못했다. 우리나라 세계문화유산에 대하여 공부하고 강의를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신비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할 수가 없다.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의 설명은 이렇다. “석굴암은 세계 유일의 인공석굴로, 네모진 앞방(前室), 통로, 부처님이 앉아있는 둥근 뒷방(主室)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방은 부처님께 절을 하고 공양을 드리기 위한 곳으로, 불법을 지키는 신이 4명씩, 바로 옆에는 근육질의 인왕상이 얼굴에 잔뜩 힘을 주고 서 있다. 앞방을 지나 뒷방으로 가는 통로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이 서 있다. 부처님이 앉아 계신 뒷방의 벽면에는 여러 불상들이 좌우 대칭으로 새겨져 있고, 방 가운데에는 연꽃자리 위에 석굴암의 본존불이 앉아있다. 천장은 360여 개의 네모 돌판으로 둥글게 쌓아 올라가다가 중앙은 20톤 무게의 연꽃이 조각된 뚜껑돌로 마무리했다. 이곳에는 단단한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 모난 데 하나 없는 둥글둥글한 부처님을 만들어낸 신라 석공들의 손놀림과 신라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숨겨진 이야기가 많다.”
본존불을 협시하고 있는 ‘미스 신라’라 명명하는 11면 관음보살과 찻잔을 요염하게 들고 있는 보살도 상면하고 싶다. 석굴암에 담겨져 있는 숨은 비밀과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스스로 찾아보시라.
26. 안압지의 달밤
경주에 오면 저녁 산책 코스로 경주역사유적지구의 안압지가 제격이다. 여름밤이면 더욱 어울리는 곳. 경주에 나들이 온 사람들이 주차장에서부터 붐빈다. 경주 고도의 사계절은 각기 특색 있는 맛이 있다. 사계절을 다 본다 한들 어찌 경주를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고대의 무덤을 시내 가운데 두고 있는 경주는 뚜껑 없는 박물관이 아닌가. 야경의 유적지도 불빛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꾸며져서 신라의 달밤은 영원히 빛나는 달밤이 되었다.
안압지의 야경이 황홀하다는 구전을 들은 지 오래. 지난해 봄에도 멀리서만 안압지 전각의 그림자만 멀리서 흘깃거렸다. 언제나 낯선 곳의 여행객으로서는 한꺼번에 다 볼 수 없기 때문에 특색 있는 인상만 남지 않던가.
안압지는 1975년 무렵의 발굴로 해서 신라 월성의 동궐지란 것이 밝혀졌다. 궁궐지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어 이곳이 본래 월지(달못)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경주박물관에 가면 이곳의 유물을 전시한 안압지관이 따로 있다. 첫 번째의 전각 안에 조촐하나마 이곳에서 발굴한 유물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안압지라는 이름은 신라가 멸망한 뒤 오랜 세월 폐허가 되어 안압들만 모여들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이 안압지로 부르게 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신라 때를 고증할 수 있어 궁궐지 외 전각 자리들이 밝혀지고, 주춧돌이 남아 있는 자리 등을 정리한 뒤, 누각도 지금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야간 조명을 받아 물속에 거꾸로 떠 있는 전각은 주변 풍광과 어울려 환상적인 하모니를 자아내고 있다.
옛날 신라를 찾았던 손님들처럼 산책 나온 사람들이 연못 주위를 맴돌고 있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 뒤 나라가 왕성한 힘을 발휘할 때 궁궐도 정비하고 통일신라의 면모를 재정비했던 것 같다. 동궐을 구축하고 임해전를 짓고 외국의 사신들이나 손님들이 방문했을 때 접대와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었다.
천 년 전의 사람이 된 기분으로 안압지에 미친 여자와 배회했다. 안압지의 어디에 미친 것일까. 신라의 공주가 환생한 것이 아니면 그리 안압지 야경에 미칠 것인가. 어느 과거 시절의 애틋한 첫사랑의 환상이라도 떠오른 것인가. 불빛에 비추인 연못 안의 전각에서는 애잔한 가락이 일렁이는 듯하다. 수많은 세월만큼이나 옛사람의 삶의 궤적도 이 땅속에 파묻혔을까. 역사의 수레바퀴가 도는 동안 동질의 민족이 된 지금 이때에 서서 세월의 깊이와 너비를 가늠해본다. 숲 속 어딘가에서 끼리끼리 암중모색을 획책하기도 하지 않았을까. 한쪽에서 탄식하고 한편으로 승리를 자축하기도 한 절절한 사연들이 이 호수 밑의 유물에 녹아 있었으리라. 역사의 승리와 한이 오늘의 사람 가슴마다 어떤 정신의 무늬가 되었으리라.
연못은 발해만 동쪽에 있다는 삼신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의 중국 전설 따라 형상화했다는데, 신선 사상을 나타내었다. 남원의 광한루의 연못이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안압지는 어디서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도록 꾸며졌다. 끝이 보이지 않아 드넓은 바다를 연상하도록 했다는 거다. 다 둘러보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계가 보이지 않아 그 너머를 꿈꾸던 통일신라의 웅대한 원이 서렸던 곳이었다.
수면에 떠 있는 물속의 전각으로 뚜벅 내려가고픈 유혹이 느껴진다. 연못 가상은 직각으로 축대가 쌓여지기도 하고 한쪽은 곡선의 자연스러운 언덕이 그대로 드러난다. 뒤쪽에 가서 돌아보자 오른편 연못 벽은 직각으로 처리되었지만, 왼편 연못가는 둥글게 휘어진 곡선이 대조적이다. 이렇게 인공적인 직선과 자연적인 곡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건너편 숲 속이 궁금해진다. 본래 연지여서 연잎이 뜨면 물이 좁게 보이기 때문에 물속의 연뿌리를 제거하고 돌과 자갈을 깔았단다. 수중 궁전에는 용왕이라도 머물까? 신라 사람들, 아니 삼한의 영혼들의 연회장이면 어떨까. 작은 연못 하나에서 바다 같은 무한한 꿈을 키웠던 오늘의 삼한인들의 발걸음에 무한한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안압지를 나오니 여전히 연향이 밤공기를 에워싼다. 천 년 전에도 피웠을 연향을 따라 나온 연인들이 있었겠지. 쓰개치마를 입고 초롱불을 조심스럽게 밝히며 '월하정인'을 만나는 옛 그림을 오늘은 어떻게 그려내야 할까. 그 밤과 이 밤의 시공간을 무엇으로 가늠하리. 달밤에 몰래 만나지 않아도, 그리 조심하지 않아도 당당하다. 불빛에 반사되는 꿈의 궁전을 즐기는 선남선녀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연못 주위를 배회하며 영원 속의 오늘을 그려내고 있다.
무더운 한여름 밤, 금방 깨어날 환상이언만 신라의 달밤은 휘황찬란하다. 추억 한 장을 신라의 밤하늘에 띄운다.
27. 꿈같은 하룻밤
-양동민속마을에서
꿈같은 하룻밤
-양동민속마을에서
열하일기를 생각하며.
“1780년 7월 13일 기축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
“꼭두새벽에 일어났다. 세수하고 머리 빗는 것이 왜 이토록 싫증이 나는지! 지새는 새벽하늘에는 총총한 별들이 마주 눈을 깜박일 때 마을 닭들은 번갈아 홰를 쳤다. 몇 리를 못 가서 안개는 자욱이 넓은 들을 먹어들어 수은 바다처럼 되었다. 의주 장사꾼 떨거지가 웅얼웅얼 무슨 이야기들을 하면서 길을 가는 것이 어렴풋이 꿈속만 같았다..... .”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그렇게 썼다.
수필의 날 행사 때는 연암의 열하일기를 생각하면 한더위를 이겨내기가 수월하다. 233년 전 연암은 사신 단을 따라 한양에서 북경까지 그리고 열하를 밟았다. 3개월여를 걸어서 또는 말을 타고 변변치 못한 숙박을 하면서도 새벽이나 늦은 밤까지 주변을 세심한 눈으로 관찰하고 현지인들과의 교류를 통한 체험을 세세히 기록했다. 때로는 노숙하기도 했다. 문명화된 현대에 생각하면 마치 야전장 같은 여행을 했던 것이다. 7월 15일에서 7월 23일까지 9일 동안의 여정을 <일신(馹迅)수필(隨筆)>이라 했다. ‘일신수필’은 달리는 역마 위에서 구경하듯 성큼성큼 빨리 본 것을 휘뚜루마뚜루 내갈겨 썼다는 의미이다. 이때 공식적인 ‘수필’이란 말이 등장하여, 한국수필분과위원회에서 이를 기념하여 ‘수필의 날’을 제정했다고 한다.
수필의 날에 참가하는 요즘 일행은 거기에 비하면 행복한 나들이다. 좀 불편한 점조차도 신선한 체험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1박 2일 여정은 일신수필을 쓰듯 주마간산으로 본 것을 겉모습이라도 내갈겨 쓸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일신수필 같은 재미를 볼 수 있는 수필을 쓸 수 있을까 의문이다.
2013년 7월 13일 초복이다.
오전엔 개었으나 한낮에 소낙비가 한 차례 내렸다. 전날, 경주 불국사와 안압지를 제각기 일별하듯 돌고 경주에서 20분 거리에 있다는 양동민속마을에서 한 밤을 지샜다. 한밤중에 도착하여 마을의 입구와 마을의 첫인상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다만 가로에 전등 불빛이 없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개구리 소리만이 요란하게 환영하는 듯했다.
그토록 한 밤이라도 자고 싶었던 옛 시골 초가집이었다. 양동마을은 수년 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고대문화의 박물관인 경주에서 조선시대 500여 년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것으로도 유명해졌다. 양동마을은 보여주기 위한 마을이기 때문에 겉모습은 옛 모습이나 시설은 현대적인 편리함을 두루 갖추고 있다. 연암처럼 세수하고 머리 빗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고 수월한 편이다. 하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는 이 철에는 자주 씻어야 하는 것이 귀찮기도 한데, 그 당시를 생각하면 짜증이나 불평이 자리 잡을 겨를은 없었다. 더운 물이 나오는 욕실도 있고 방에는 에어컨도 있었다. 별채도 있는 다섯 칸짜리 초가집이니 그래도 괜찮은 집이란다. 6.25때 잠시 피난 갔던 아버지의 고향 마을 같았다. 여러 사람이 한 욕실을 차례로 사용해야 되니까 기다리기도 했다. 더러는 마당의 우물에서 속옷 차림으로 세수하고 팔 다리를 씻는 회원도 있어 조선시대 미인도를 연출했다. 옛날에 우물가에서 등물 하듯이 말이다. 그런 광경에서 나는 꼭 꿈속의 옛날에 있는 것 같았다.
늦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 들려오는 갖가지 소리에 신경이 곤두세워졌다. 별채에서 공주 셋이서 새살떨며 웃는 소리는 계속되고, 먼 산의 쑥국새 소리, 개짖는 소리, 개구리 소리들도 합주했다. 잠시 시각을 보니 새벽 3시가 넘었다. 정말 새벽하늘은 캄캄하기만 한데, 연암의 시대처럼 닭들이 번갈아 홰를 쳤다. 어찌나 그 소리가 큰지 시끄러웠다. 어찌어찌 하다가 날이 밝아졌는데, 째쟁이들은 벌써 아침 단장을 하고 있었다. 옷 갈아입기가 귀찮았다. 옆 사람 말을 들으니 새벽 1시 40분에 닭이 홰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나는 그 시간에 잠시 잠이 든 모양이었다.
가방을 챙겨들고 아침식사 전에 마을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가 잠잤던 집은 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 마을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바로 옆에는 기와 고가가 있었지만 둘러 가 볼 수가 없었다. 어젯밤 집주인 할머니로부터 이 마을의 유래를 들었다. 소문으로 벌써 들어 알고는 있지만 현지 사람의 이야기로 다시 들으니 재미있었다. 이 마을은 여강 이씨와 경주 손씨, 모두 처가의 재산을 이어받고 서로 사돈이 되어 수 백 년의 선비 전통을 이어온 마을이다. 마을에 정자만도 열 개나 된다고 자랑했다. 물론 그 여강 이씨는 저 유명한 동국의 5대 문인에 든다는 조선 중종 때의 문인인 회재 이언적이다. 이언적에 대해서는 많이 조명이 되지 않았지만 정신이 부재한 현대에 반드시 거울이 될 만한 정신적 가치가 있으므로 앞으로 재인식될 것이다. 이언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의 훌륭한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노수신이란 데서 기리고 있을 뿐이다.
집집에 민박집이란 표지판이 붙어 있다. 아침에 집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마당에는 작은 채마밭도 있고 우물가에 화초도 심어 보기 좋았다. 옛날식의 '퍼세식' 화장실도 있었다. 접시꽃이 마당 끝에서 전송했다. 마을의 문전옥답은 연을 심어 연밭이 잠시 더위를 잊게 했다. 연암도 마을에 도착하면 마을의 풍경을 그대로 그렸다. “가산 앞에는 길 나마 되는 큰 항아리를 놓았고 그 속에는 네댓 포기 연(蓮)을 심었다. 땅을 파고 한 간 폭이나 되는 나무통을 묻고는 한 쌍의 뜸부기를 기르고 있었다. 가산을 빙 둘러 종려나무, 장미꽃, 석류 등 화분 십여 분을 놓아두었다.” 우리가 아침식사를 했던 아랫집은 그런 풍경이었다. ㄷ자형 집 가운데는 각가지 꽃들을 화분에 심고 포도송이도 달려 있었다. 옆집에는 새벽부터 홰를 쳤던 닭들이 우리 안에 있었다.
연밭 둑을 거닐며 연향에 묻혀 보았다. 못 가의 둑에도 큰 항아리를 묻고 연이 피어나고
있었다. 저쪽 물가에는 물오리도 몇 마리 어울려 놀고 있었다.
“원앙새 노는 모습 한 폭의 그림인가/ 갓 피어난 연꽃이야 저 선경을 어이 알랴!” 연암의 시 한 소절처럼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이 철엔 연꽃이 피었다는 것만으로도 격세지감을 줄일 수 있었다. 나는 연방 연암의 시절에 있었다. 그의 글을 따라 함께 걷고 있었다. 이언적의 고가나 손씨 고가 혹은 어젯밤 할머니가 자랑했던 정자는 한 곳도 찾을 수 없이 숙제로 남겨놓고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발걸음이 언제 될지 모르나 경주에 갈 때면 그 마을까지 다시 가서 숙박해야 할 것 같다.
햇빛이 쨍한 날 시내에 나갔더니 꿈에서 깬 듯 옛날에서 지금으로 나들이 나온 것 같았다. 지금 낯선 여행지에 온 듯 하루하루가 지난다. 여기서는 천천히 오래 묵을 예정이다.
28. 신라인의 의지와 이상향, 경주 남산
여행은 언제나 돌아오는 곳이 목적지다. 버스에서 내리니 비바람이 몰아쳤다. 풍우에 젖은 가을이 어두운 밤길을 재촉했다. 언뜻 최북의 그림 <풍설야귀인>이 떠올랐다. ‘눈보라 치는 겨울밤 나그네는 무사히 집에 돌아왔을까.’ 눈보라는 아니지만, 길가의 은행잎들이 늦가을 비바람에 쏠려서 갈 길을 잃었다. 돌아온 안도감에 아늑했다만, 두고 온 경주 남산의 부처들은 무사할까? 하늘 밑의 노천 절집에서 말이다.
우리 문화유적 답사의 유홍준에 의하면, 경주를 슬기롭게 답사하는 방법으로 4코스를 추천한 바 있다. 즉 서라벌의 향기라 할 고분시대의 유적, 반월성과 왕릉을 일차 코스로 잡고, 2차 코스는 고 신라문화의 전성기인 황룡사 터, 분황사, 첨성대, 삼화령 애기부처 등, 진평왕과 선덕여왕 시절 유물을, 3코스로는 신라가 통일국가의 건설에 국가적 국민적 총력을 기울였던 때의 힘찬 기세의 유물로 쳤다. 감은사탑, 고선사탑, 황복사탑, 불국사 석가탑에서 영지에 이르는 삼층석탑순례가 그것이다. 그리고 4코스는 8세기 중엽 전성기 통일신라 문화의 조화로운 이상미를 살펴보는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에밀레종 등이다. 그다음으로 불국토를 구현하려 했던 신라인의 의지와 이상, 남산의 핵심적 유물을 더듬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주 시내의 고대 유적을 산발적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언젠가는 남산에 오르리라 마음먹었다. 오래전부터 꿈꾸던 경주 남산에 갈 기회가 찾아와서 새벽에 길을 나선 날이었다. 남산은 뚜껑 없는 박물관으로 이름 지어져 있지 않은가. 남산을 답사하기 위한 코스도 다양하다. 나로서는 첫 방문인 이번 답사는 삼릉골에서 용장계곡으로 넘어오는 길이다.
삼릉골 입구에서 하차하여 송림으로 들어갔다. 가끔 영상에서 보았던 대로 눈에 익은 삼릉골 입구로 들어서니 배병우의 사진처럼 제멋대로 자라서 멋스럽고, 자유롭게 자라서 구불구불한 몸매를 지닌 소나무 숲 너머로 삼릉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작은 산의 능선이 이어진 것 같았다. 무덤의 곡선이 부드러운 여체의 신비함으로 다가왔다. 누구의 능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신라 왕족의 무덤인 것은 확실하지 않은가. 대부분 이 삼릉은 제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과 경명왕의 능이라고 말한다. 누가 되었던 유택으로 작은 산을 지닐 수 있었던 천 년 전의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나는 감회가 새로웠다.
제일 먼저 만난 부처상은 머리와 두 손이 잘린 몸뚱이가 그래도 당당한 석불좌상이었다. 목의 삼도 주름이 그대로 선명하고 왼쪽 어깨부터 가슴으로 흘러내린 가사에 달린 꽃 매듭의 문양이 아름다웠다. 무릎을 덮은 가사에도 매듭 끈이 애교스럽게 달려 있다. 이렇게 예쁜 매듭 끈을 장식한 가사를 입고 수많은 사람의 기원을 들었던 부처의 마음도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을 것만 같지만, 부처의 머리와 손은 어떻게 해서 잘렸을지. 상처의 아픔을 굳건히 간직한 채 그 위엄마저 담고 있는 것 같다. 가사 자락을 들춰볼 수도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고대 신라의 조각가들은 남산의 바위가 캔버스처럼 보였나? 아니 바위 안에 부처들이 있는 것을 진즉 알았나 보다. 일필휘지의 선각으로 여러 부처상을 그려내기도 했다. 삼존불과 협시 부처님까지 육존불을 바위 면에서 찾아냈다.
머리 없는 불상에서 왼쪽으로 40여 미터 올라가면 미스 신라라 불리는 관음보살상이 있다는데, 시간상 갈 수 없었다. 경주는 이렇게 당일 코스로는 언제나 여운을 남겨서 꼬리를 남긴다. 다음에 그 꼬리를 물고 다시 오라는 말이다. 다른 산악회 일행은 고위봉을 등반하지만, 나를 위해 기꺼이 안내해주기도 한 안내자와 나는 남산의 불교 유적을 감상하며 금오봉을 넘기로 했다.
또 하나의 석불 좌상 한 구가 여행객을 기다리고나 있는 듯이 위용도 근엄하게 연꽃 대좌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편안하게 맞아주었다.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가부좌한 한쪽 다리가 들썩일 것 같았다. 항마촉지인 상의 석가모니 부처였다. 이 세상을 구제하기 위한 현생 부처가 아닌가. 자세히 보니 광배 한 부분이 새 돌로 보수가 되었고, 얼굴의 눈, 코 부분도 복원되어 완전한 상을 이루었다. 옛날의 조각 솜씨로 복원하는 지금의 기술도 뛰어나다. 누구의 후손인데?
늦가을이지만 땀으로 온몸이 얼룩지고 있었다. 올라가는 길마다 부처들이 위안하고 맞아주니 일시에 땀도 식히고, 정신도 맑아졌다. 온 산에 돌과 바위가 즐비하다. 돌덩이 하나마다 모두 유물과 부처를 안고 있는 듯 보였다. 바위와 더불어 소나무가 많은 남산은 청청하기만 하다. 신라인의 꿈이 저리도 푸르렀을까.
석불좌상이 신라의 수호신처럼 신라의 외곽을 응시하고 있듯 나도 그 시선 따라 산 아래로 펼쳐지는 신라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꿈이 구현된 모습이 오늘이었을까 잠시 상념에 잠겨보기도 했다. 금오봉 정상 아래 암자 하나가 나타났다. 상선암이란다. 여기서 잠깐 숨 돌리기도 하고 예불의 기원도 받아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히말라야 정상을 오른 만큼이나 내게는 귀한 체험이었다.
금오봉은 이름만큼이나 신비스러운 곳인가 보다. 기록에 의하면 냉골바위산은 경덕왕 때 옥보고가 가야금은 타고 놀았던 터라고 하는 금송정(琴松亭)이 있었단다. 옥보고는 금송정에서 바위들과 솔잎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을 벗 삼아 가야금을 뜯으며 세상 시름을 잊었다고 한다. 어떤 바위인들 이 남산의 돌은 모두 부처의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소나무는 그 부처들의 호위 무사로서 신선한 바람을 선사하고 풍우를 막기도 하며 신라인의 기원을 함께했으리라. 남산을 오를 때는 반드시 도시락을 지참해야 한다. 탑돌이를 하듯이 걷다가 배고프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듯 서로에게 공양을 베풀어야 한다.
소나무 뿌리들은 참배자의 발걸음을 보호해주고 다리가 되기도 한다. 한 뿌리가 뻗어 나가다가 잠시 쉬는 동안 새끼 뿌리를 하나씩 치고 또 친다. 잔뿌리는 낮은 받침 기둥이 되어 징검돌 위의 큰 다리 받침기둥 같다. 그 뿌리들은 우리에게 디딤돌도 되고, 걸터앉는 벤치도 대신 해준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이 남산에는 불상들이 거의 미완성인 것이 많았단다.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은 천황사, 황룡사, 황복사 등, ‘황’자가 달린 절이 도성 안에 아홉여 개나 있었다니, 그런 큰 사찰에 다녔지만, 이 남산에는 신라의 이름 없는 석공들이 부처를 조각하고 그들의 소박한 꿈을 기원했으므로 서민들의 불공 터였다지 않은가. 통일을 이루어낸 신라의 꿈과 이상이 이 남산에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번성기 때 경주에는 탑들이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처럼 줄지어 있는 것 같이 보였다고 한다. 남산골만 해도 절터가 122개 정도였으며, 석불만은 50여 개가 넘었다지 아마?
경주 남산 금오봉에 오르다
- 경주 남산의 백미, 용상사지 삼층석탑
드디어 해발 468미터인 금오봉 정상에 도착했다. 작은 산이라지만 정상을 올라보는 것이 얼마 만인가. 정상에 오르는 기분을 만끽하고자 하는 것이 등산하는 자들의 소망인가. 그 소망을 이룬 기분의 에너지가 일상을 버티는 힘이 될까? 그런 에너지는 꼭 등산에서만 얻는 것이 아니지만. 색다른 느낌, 날아갈 듯한 혹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하다는 뜻인가? 그런 기분은 아니고, 나로 말하면 신라의 하늘을 얻은 듯하다. “높고도 신령스런 금오산이여! 천년왕도 웅혼한 광채 품고 있구나 / 주인 기다리며 보낸 세월 다시 천 년 되었으니 / 오늘 누가 있어 / 능히 이 기운 받을런가?” 금오산을 노래한 비석 앞에서 오늘 내가 이 기운을 넉넉히 받고 가노라 하고 읊조린다.
안내자는 나의 눈치와 발걸음에 맞추어 산책하듯 하는데, 나는 연신 땀을 닦아가며 숨 가쁘게 헐떡거린다. 갑자기 너른 벼랑이 내려다보이는데, 거기 마애불이 벼랑바위에서 나와 산 전체를 등짐 지고 겉면에 앉아 있다. 서방을 향해 앉은 거대한 마애불이 위험해서인지 철망을 치고 보수 중이었다.
기기묘묘한 바위 부처들을 밟고 밧줄을 타고 큰 바위틈으로 내려갔다. 묘기 행진이었다. 경주 남산의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에는 골짜기가 40여 곳에 이른다는데, 단연 용장골이 으뜸이란다. 남산의 하이라이트는 용장사지 삼층석탑이다. 금오봉 정상에서 소나무도 발걸음을 하는지 뿌리가 마치 걸음을 떼는 것처럼 뻗어 가고 있다.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너럭바위며 큰 바위들이 다 조각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불상이었다. 소나무가 안내하는 대로 바위를 밟으며 고개를 넘자니 건너편 겹겹의 산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드디어 삼층석탑이 나타났다. 금오봉 높은 중턱에서 신라를 아우르고 있는가. 지금도 웅장하게 서서 석탑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남산 여행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석탑 중에서 불국사의 다보탑은 이형으로 뛰어난 조각 미를 자랑한다. 석가탑은 모든 다층 석탑이 많았던 전 시대를 아울러 삼층석탑으로서 그 비례미와 조형미를 갖추게 된다. 통일신라 이후 석가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이 되었다. 이 용장사지 석탑은 그 석가탑의 전형에서 비롯된 통일신라 후기의 탑으로 볼 수 있다.
<1박 2일> TV 프로그램에서 유홍준이 답사객을 안내한 적이 있었던 뒤로 더욱 방문객이 늘었다고 한다. 석탑으로서 기단이 이렇게 산 전체를 이룬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 석탑을 세운 용장사의 스님들과 신도들, 아니 신라인들은 이 높은 곳에 신라인의 기백이 천년만년 이어질 것을 꿈꾸었던가. 맨 아래 기단석이 웅장하고 넓은 너럭바위다. 너럭바위는 남산 전체를 이고 있는 형상이며, 그 위에 2층 기단석을 세운 것이 아닌가.
용장골로 내려가는 길도 징검징검 바위를 밟고, 때로는 밧줄을 매어둔 곳도 있어 줄타기 를 체험한 셈이다. 신기한 삼륜대좌불을 만났다. 지붕돌과 몸돌이 둥근 돌로 삼 층으로 쌓았다. 꼭대기에 머리는 없어도 당당하게 꿋꿋이 앉은 부처. 부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처이리라. 용장사를 세운 대현 스님이 삼륜대좌불을 돌면 부처도 함께 머리를 돌렸다고 한다.
남산이 품고 있는 신라인의 의지와 이상은 앞으로 천 년 뒤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꿈을 심어주리라. 바윗돌 부처들이 서로 교대로 버텨주면서 세상살이 힘든 중생들에게 발판이 되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 여행이나 답사는 현실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아니고 꿈을 이루는 일도 아니다. 현실 속의 다른 현실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여행지에서 만난 다른 현실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그 삶을 살리라. 돌아온 목적지, 일상을 여행처럼 오래 머물 수 있는 곳, 지금, 이곳이 생생한 새 여행지이리라. 남산에 남겨둔 내 발걸음의 꼬리 한쪽을 언제 다시 잡을 것인가?
29. 경주 남산의 백미, 용장사지 삼층석탑
29-2 경주 남산 용장골에서 - 다인(茶人)매월당 김시습을 그리다
경주 남산 용장골에서
-다인(茶人) 매월당 김시습을 그리다
경주 남산 답사의 백미는 용장사지 삼층석탑이었다. 경주시 전체가 문화유적이라면, 남산은 지붕 없는 박물관이요, 지붕 없는 절집이었다. 수많은 절터 중에서도 용장사지만 그 흔적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남산 금오봉 전체를 기단으로 하여 세운 삼층석탑은 하늘을 뚫는 듯하면서 첩첩 산을 거느리고 신라의 의지였던 불국의 수호처럼 말없는 세월을 담고 있었다.
용장골로 내려서니 늦가을이라 물은 많이 흐르지 않았다. 계곡 옆으로 바위 언덕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이 많았다. 바위 면의 주름살이 선각으로 조각한 현대의 추상화 같았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 하나를 만났다. 바로 ‘설잠교(雪岑橋)’라 하여 매월당 김시습을 기리는 기념 다리였다. 설잠교를 밟고 지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나 그가 심고 찻잎을 땄던 차나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우연히 한시(漢詩)를 배우면서 김시습의 차시(茶詩)를 몇 편 발견했다. 김시습이 조선 초기의 으뜸가는 다인의 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솔바람 차 달이는 연기 몰아 올리고 / 하늘하늘 기울어져 골짝 물가로 떨어진다 / 동창에 달 떠올라도 아직 잠 못 자고 / 물병 들고 돌아가 / 찬물을 긷는다.
김시습의 <차를 달이다 중에서> 잠 못 들고 차를 달이려고 물을 긷는 심정을 그렸다.
어렸을 때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는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다.
시대의 철저한 비평가로서 세조의 단종 폐위 소식을 접하고는 읽던 책을 불태운 뒤 세속을 떠나 방랑의 길로 들었다. 참담한 현실에 절망하여 스스로 머리를 깎고 유랑 생활을 하다가 설잠(雪岑)이란 법명으로 세상을 등진 은둔자가 돼버렸다. 조선이 비록 척불을 내걸었지만, 이미 천년을 내려온 불교를 신생왕조가 완력으로 금지할 수는 없었다. 불교는 유학에 염증을 느낀 선비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은둔자로서 지내기에는 그의 성정으로 결코 현실을 외면할 수만은 없었지 싶다. 10여 년의 만행 끝에 경주 남산의 부처골에 정착했던 것 같다. 그의 나이가 29세였다나. 현실의 상황을 남몰래 아파하던 그는 수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이상세계를 꿈꾸며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했다. 절망과 희망의 교차점에서 <금오신화>에 열정을 바친 곳이 바로 금오산 용장사였다. 스님으로 살았으니 어찌 차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랴. 차는 은둔자의 울분을 달래기에 그지없는 친구였으리라.
나면서 풍진 세상 스스로 괴이하게 여겨/ 문에 들어가 ‘풍’자를 쓰니 이미 청춘 다지나갔다/ 달이는 누런 찻잎 그대는 알까 / 시 짓다가 숨어사는 일 누설될까 오히려 두렵다.
그의 <작설차>란 시를 보면 그가 차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국의 봄바람 부드럽게 부니/ 차 숲의 잎새엔 뽀족한 싹 머금었네/ 가려낸 어린 싹 신령스러움과 통하고/ 그 맛과 품수는 육우 <<다경>>에 실렸다네/ 자순(紫芛)은 창(槍)과 기(旗) 사이에서 따고/ 봉병과 용단은 모양만 본떴다네/ 벽옥의 다관에 활화로 끓이면/ 게눈거품 일며 솔바람소리 들리고/ 산사의 고요한 밤에 손들이 둘러앉아/ 운수(雲膄) 한 모금 마시니 두 눈이 밝아지네/ 당가에서 얕게 잔질하는 저 멋모르는 사람/설다(雪茶)의 그 맑음 어이 알리
이 한 편의 시에 차생활의 일상을 알 수 있고 차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차나무 숲에서 새싹이 나올 때 찻잎을 채취했다. 어린 싹을 신령처럼 생각한 그 심정, 찻잎을 따본 사람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차 맛과 물맛까지 당나라 육우의 <<다경>>을 이해하고 있다. 조선의 선비다인들이 육우의 <<다경>>을 탐독하고 차를 익혔다. 일창일기 사이의 자순이란 여린 자색이 돋는 순을 말함이지 않은가. 차를 쪄 중국 송나라 때 유행했던 용봉 문양을 찍은 병차를 닮게 만들었으니, 그는 흉내만 내었다고 말했다. 푸른 빛 나는 옥 같은 다관에 차를 끓였다는 것이다. 송글송글 떠오르는 물 끓는 모양과 물소리에서 게눈을 그리고 솔바람 소리를 묘사하지 않는가. 드디어 차가 익었다. 산사의 고요한 밤에 도반 몇이서 둘러 앉아 파리한 구름 한 모금을 마시니 두 눈이 밝아졌단다. 아마도 병차를 가루내어 거품 내자 설록이 피어나고 그 한 모금 마시자 눈이 밝아지고 마음도 시원했으리라. 설록 같은 차 한 모금, 설다(雪茶)의 맛을 모르는 사람을 멋이 없다고 했다. 그러하니 이 한 편의 시에 다도의 전 과정이 들었다. 많은 차시를 남긴 것으로 보아 절집을 순회하며 익히고 경주 용장골에서는 수년 동안 머물면서 차로서 다선일미를 이루었으리란 것을 상상하고도 남는다.
내가 보현사에 오고서부터/ 마음 한가하고 형편도 편안해/ 돌솥에 새 차 끓이고/ 쇠항로에 푸른 연기 피어오르네/ 나 같은 국외인으로서/ 속세 떠난 선사 따라 놀면서.
김시습의 <보현사> 시의 일부분을 불교신문에서 보았다. 어떤 보현사인지 모르겠으나, 혹시 방랑 시절 묘향산의 보현사에도 머물었던 것일까?
수년 전에 부여 무량사에 갔을 때 극락전 뒤의 산신각 앞에 김시습의 영정각이 있었다. 그는 50대에 자연에 의탁하여 다시 방랑하다가 부여 무량사에 머물게 되어 그곳에서 친구와 시화답을 하고 후학을 지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무량사에서 59세로 입적하니 그의 승탑이 무량사 부도전에 있다고 한다. 그 때는 승탑전까지 살피지 못하였다. 무량사를 생각하니 그리움이 물씬 밀려든다. 5층 석탑의 미려함과 이 층의 극락전이 아름다운 무량사. 마당 한편의 우람한 느티나무 짙은 그늘 아래서 김시습의 혼이라도 마주하고 마음의 차 한 잔 나누리라. (2014)
30 대능원지구와 황룡사지
-형용할 수 없는 신비감, 대능원지대구
경주 진입로부터는 건축물은 기와지붕이 많다. 건물에 십자가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한가롭게 산책 나서듯 나와서 온종일 걸렸다. 버스터미널에서 시내를 걷기로 했다. 도로표지판만 보아도 경주 시내의 유적이 어디에 분포되었는지 알 수 있다. 방향을 잡기 전에 몇 발자국 걸으며 상가를 둘러보다가 흠칫 놀랐다. 상가 사이로 산 같은 능선이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고분군이었다. 고분군이 있는 내부로 들어갔다. 바로 ‘노서리 고분군‘이었다. 여기는 1921년 금관이 발굴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금관총과 서봉총을 비롯한 10여 기의 능이 있는 곳이다. 공원화되어 경주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쉼터이다. 운동복 차림의 시민 몇 사람이 열심히 무덤 주변을 걷고 있다.
경주사람들은 무덤을 안고 주변의 주택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서쪽은 노서리 동쪽은 노동리 고분군이다. 민둥산 중턱 고목으로 자란 나무들. 무덤을 뚫고 나온 영혼의 씨앗이 자란 것일까. 얼마나 애타 오른 갈망이 씨앗으로 영글고 영글어 튀어나왔을까. 몇 백 년을 간절히 기원하여 어둠을 헤쳐 나온 작은 씨앗. 천년 경주를 지켜왔다.
경주 시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들만 보더라도 역사 문화 도시 경주의 정체성은 범상치가 않다. 처음부터 계획된 수도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넓어졌기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뒤섞이게 된 것 같다. 현재 경주 도심에는 높이가 23미터(황남대총)에 이르는 것부터 지상에서는 식별이 어려운 것까지 신라 고분 150여 기가 남아 있다.
특히 시내의 평지에 자리한 황남리고분군(대능원), 노동리고분군, 노서리고 분군은 신라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나가는 5~6세기 무렵에 축조된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규모와 출토 유물의 화려함에서 신라 고분을 대표한다. 이들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제 장신구, 유리잔, 토기, 천마도 등은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들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대능원이라 불리는 황남리고분군은 신라시대의 왕·왕비·귀족들의 능이 모여 있는 곳으로,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따온 이름이다. 천마총, 황남대총, 전 미추왕릉을 비롯한 능 20여 기가 있지만,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천마총은 발굴 당시 자작나무 껍데기에 그린 천마의 그림이 나와 붙은 이름이다. 발굴 조사된 고분 가운데 ‘대능원’ 안에 있는 ‘천마총’이 유일하게 그 내부가 공개되어 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만 지하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땅을 파고 시신을 묻은 것이 아니라 그냥 평지 위에 시신을 놓고 그 위에 봉분을 얹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유물 가운데 금관도 출토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황남대총은 신라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동서 길이 80m, 남북 길이 120m, 봉분 높이 23m). 두 개의 봉분이 잇닿아 있어 마치 표주박을 엎어 놓은 듯한 모양이다. 발굴 결과 남쪽이 남자, 북쪽의 무덤이 여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남자의 묘에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순장을 금한 지증왕 이전에 조성된 능임을 알 수 있다.
대릉원의 꽃은 천마총. 국보 3점과 보물 9점이 출토되었다. 1973년 발굴, 자작나무 껍데기에 '하늘을 나는 말 (혹자는 기린이라고도 함)'이 그려진 말다래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란 이름을 붙였다. 금관 중에서 가장 큰 천마총 금관이 나왔다. 국보 188호. 자작나무 껍질로 된 말다래에 천마 그림이 또렷하다. 천오백여 년의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게 새겨져 있다. 아직도 살아 있을 신라 사람의 숨결은 우리들 혼의 어느 한 결이라도 담겨 있을까. 지금의 기술로 복원한 것이 옛 그림과 꼭 같은 것, 그것을 역력히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어느 임금인지. 금관과 금허리띠로 치장하여 누워 있었던 자리. 육체는 삭아 없어지고 금제 장식품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육체는 삭아서 흔적이 없고 변함없이 빛나는 금제 장식은 떠난 육체의 어떤 느낌이라도 품고 있었을까. 유리관 안에 금관과 금모, 금허리띠가 놓여진 상태를 재현해 놓았다. 천마총 안에 전시된 유물은 복제품이나 진품과 거의 같아서 그 기술도 놀랍다. 박물관의 진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천마총 내를 둘러보고 나오니 밖은 어느새 어둠이 내렸다. 대능원은 아름다운 공원이 되어 그 시각까지 관광객이나 걷기 운동을 하는 경주시민을 만날 수도 있었다. 경주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도 있었다. 자기의 집으로 초대하고도 싶다는 말 자체만 으로도 손님 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아니 버스를 타고 와서 두 발로 시내를 걸어 공원을 산책하는 기분은 어느 때의 경주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우주에서 떨어진 어느 별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어린 왕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대편의 문으로 총총걸음을 걸었는데 그쪽은 대능 주위에 소나무 길이 나 있었다. 문지가가 말해주었다. 마지막 대능이 아마도 전 미추왕능일 것이라고 한다. 어둑한 무덤 앞에서 미추왕의 죽엽군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에 대한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고 다섯 사람의 신하를 각지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애환을 듣고자 한 왕이었으니 죽어서도 음병을 보내어 나라를 지켰던 것이리라.
문득 신라의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 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어서도 신라를 수호한 미추왕과 김유신 장군의 설화가 민간에 퍼지게 된 이야기다. 어머니 박 씨가 별빛을 받아 마시고 수태한 14대 유리왕 박 씨는 별빛이 건드리고 들어간 입술이 터서 아무 음식도 삼킬 수 없게 되었고, 유리왕을 해산하던 밤에도 별들이 영롱하게 빛났으며, 집안 가득 이상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그리하여 왕의 재위 때는 별처럼 맑고 향기로운 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가까운 나라가 신라에 쳐들어왔다. 신라의 군사로서는 역부족이어서 금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이르렀다. 위기의 순간에 수를 셀 수 없는 이상한 군대가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되풀이하며 신라를 도와 적군을 물리쳤다. 형형한 눈빛을 한 그들은 신라군과 별로 다를 바는 없었지만 특이하게도 양 귓등에 댓잎을 꽂고 전투를 치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엽군이라 불렀다. 오래전에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이 귓등에 댓잎을 꽂고 생시와 똑같이 싸우더라고 노인들이 말했다. 죽은 선조들이 군사들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신라를 돕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죽엽군이 하늘로 사라진 걸로 알았는데, 어느 날 한 농부가 우연히 미추왕능 근방을 지나다가 그곳 대나무의 잎이 색깔도 바래지 않은 채 무슨 병기들처럼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죽엽군들이 미추왕능에서 나왔다가 다시 저 능으로 들어갔군.” 하였다. 그제야 미추왕이 망자들로 구성한 음병(陰兵))으로써 신라를 수호한 것을 알게 되었다.
통일 신라의 하대(下代))시절에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죽은 김유신 장군도 신라의 호국신이 되어 미추왕의 무덤으로 들어가 신라를 구할 논의를 하였단다.
평화스러운 충청남도 연기의 땅을 밟으면서 그 들녘 곳곳 어디선가 옛 백제인들의 억울한 혼령들이 죽엽군처럼 들고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백제의 음병들이라면 귓등에 솔잎을 꽂고 나타나지 않을까? 논산 벌 어느 곳의 견훤의 무덤을 지켜볼 일이다. 혹여 계백장군도 백제의 호국신이 되어 견훤의 무덤으로 들어가 백제의 한을 풀 길을 논의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지금쯤이면 차원을 달리하여 모두가 화해하고 하나가 되기를 기원하고 있을 것이다. 동서 지역갈등도 없고, 반도의 허리가 잘려 섬처럼 살아온 민족의 한을 풀 수 있도록 기원하고 있지 싶다.
이날은 마침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날씨가 춥고 흐려서 보름달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신라의 달밤은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하늘의 별들이 땅으로 내려와 별빛이 반짝거리니 부끄러운 달은 그 모습을 나타내기 어려웠지 싶다. 경주는 거리마다 '경주빵과 경주보리빵' 간판이 즐비하다. 관광객이 많으니 돌아갈 때 경주의 특화된 빵을 사들고 돌아가게 한 것이다. 하지만 특화된 음식은 없으니 무난할 것 같은 맷돌순두부 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보름날이니 식구들이 부럼을 깨고 있으면서 나에게도 호두를 몇 점 깨어 건네준다. 식사도 보름의 특식인 오곡찰밥과 손수 만든 손두부에 생선구이까지 해서 든든한 대접을 받고 숙소도 안내 받을 수 있었다.
대능원에서 나오면 바로 자동차 길을 두고 한쪽은 불빛에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 첨성대가 있고 그 뒤로 계림 숲이 보인다. 불빛을 받고 있는 첨성대는 하늘의 별을 관찰했던 천문대라기보다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방형 돌을 이고 있는 기둥처럼 조각물이 아름답게 보였다. 일 년 삼백예순다섯 날을 담아내기 위하여 삼백육십 개의 돌을 기단에서부터 지붕까지 쌓아 조형했다던가.
신라의 명성을 만방에 떨치다, 황룡사지구
閔思平 (1295-1359)
情人相見意如存 須到黃龍佛寺門
氷雪容顔雖未覩 聲音仿佛尙能聞
고운 님 보고픈 생각이 나면
황룡사 문 앞으로 달아 오소서.
빙설 같은 얼굴이야 비록 못 봐도
방불한 그 목소린 여태 들려요.
살다 보면 문득 가버린 님이 생각날 때가 있겠지.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말도 못하게 그리운 날이 있겠지.
그대!
살다가 그런 날 만나게 되거든
아무 말 말고 황룡사 문 앞으로 찾아오소서.
빙설처럼 고운 그 모습이야 보이지 않겠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앞에 서면
그 님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소곤소곤 들려옵니다.
따뜻한 봄 햇살에 종다리들
하늘 꼭대기까지 조잘대며 올라가고,
우리 사랑했던 아름답던 시간들
주춧돌 위에 여태도 남아 반짝입니다.
무지개로 걸리던 빛나던 맹세는 어디로 갔을까?
사랑했던 그 사람은 어디에 숨었나?
잊었던 그 사랑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날이면,
맺지 못한 꿈이 안타까운 날이면,
나는 기둥만 남은 황룡사 일주문 앞에 와서
눈감고 그 기둥에 기대곤 한다.
신라의 명성을 만방에 떨치다
황룡사지구
경주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보니 분황사 표지가 나타나서 내렸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 때 건축했다는데,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전석탑이다. 본래 9층이었던지, 7층이었던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3층만 남은 벽돌로 쌓은 탑이라 해서 전탑을 모방했다는 의미의 모전석탑이라 한 것 같다. 경북 안동지역에 전탑이 여러 구 남아있다. 여주 신륵사에도 전탑이 한 구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국보 제30호이다. 백제의 탑은 목탑 형식으로 시작했지만, 신라의 탑은 전탑 형식으로 시작한 것 같다. 유서 깊은 절이며 유적도 많기 때문에 고즈넉한 시간을 갖기에 좋은 곳이다.
신라의 유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황룡사이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1238년)으로 불에 타, 지금은 건물과 불상의 주춧돌들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폐사지이지만, 지금의 경주에서도 황룡사지가 차지하는 면적은 대단하다. 현재까지 조사된 황룡사지는 380,087제곱미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진흥왕 14년(553)부터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을 거쳐 경덕왕 13년(754)에 대종을 주조한 데 이르기까지 창건과 관련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황룡사의 창건이 삼국 통일의 국가로써 신라의 저력과 위상이 집약된 국가사업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전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경내에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큰 대종이 있었으며, 현대식 건물로 따져 20층은 족히 넘는 높이의 80여 미터짜리 구층목탑, 인도에서는 만들지 못하고 비로소 신라 황룡사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는 약 5미터 높이의 장륙존상 등이 있었다고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황룡사의 위용은 폐사지인 지금도 그 장엄함과 웅혼함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웃한 아홉 나라에게 신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성격으로 세운 구층목탑은 경주 도성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라 최고의 상징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분황사와 담장을 나란히 하고 있는 황룡사 역시 신라의 명승인 원효와 자장이 머물렀던 신라의 대표적인 명찰이었다. 높고 거대한 당간지주 앞에 서서 황룡사지를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넓은 들판에 군데군데 거석의 기단 돌이 박혀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본래 당간지주는 분황사에 속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다른 당간과 달리 두 기둥 사이에 거북상이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장육존상이 안치된 불좌대석일 것 같은 대좌 앞에 우뚝 선다. 황룡사가 창건된 뒤 5년째 되던 해인 574년 진흥왕 즉위 35년에 신라 삼보의 하나인 황룡사 장육존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황룡사 담장을 다 두른 뒤에 신라의 남쪽 바다에 큰 배가 나타났단다. 하곡현의 사포(지금 울주 곡포)에 닿은 배를 조사해 보니 첩문에 서축의 아육왕이 황철 57,000근과 황금 30,000분을 모아서 석가삼존불을 만들려다 이루지 못하고 바다에 띄워 보내니 인연이 있는 나라에 가서 장육존상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는 내용과 함께 일불一佛, 이二보살상의 모형이 실려 있었다. 현의 관리가 이 사실을 문서로 알리니 왕이 사자를 시켜 그 고을의 동쪽 높고 시원한 곳을 택하여 동축사를 세우고 삼존모형을 안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황철과 황금을 옮겨 대건6년 (574년)에 주조하였는데, 그 무게가 35,000근이나 되는 거대한 불상을 기존의 건물에 안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장육불상을 안치한 후 그 규모에 맞는 새로운 금당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장육존상을 안치하고 10년 후인 584년에 금당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으로 보아 금당이 삼존불보다 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도 나타난 이야기이다.
아직 쌀쌀한 바람이 머플러를 추켜세우게 한다. 황량하기만 한 이 황룡사가 그대로 번성했다면 그 안에 내가 샅샅이 들여다볼 기회도 없었으리라. 찬바람 속에 드넓은 전각들 사이를 거닐자니 가슴 메이는 폐허의 쓸쓸함이 점점 알 수 없는 벅찬 느낌으로 밀려왔다. 황룡사지는 백제의 미륵사지와 대비된다. 황룡사를 건축할 때 백제의 아비지를 초청해서 건축했다. 또한 백제의 미륵사를 건축할 때는 진평왕이 도움을 주었다지 않은가.
신라의 황룡사와 백제의 미륵사. 두 사찰은 비슷한 시기에 왕실에서 주도하여 만든 국가사찰의 성격을 갖는 최대 규모의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역사의 라이벌이었다. 전쟁이 치열했던 그 시기에 서로 도움을 주었다니 기술에 있어서는 라이벌이 될 수 없었단 말일까. 황룡사는 보수적 성향을 띤 1탑 3금당인 반면에 미륵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3원 병렬식 가람이라는 독창적인 가람배치를 구현했다. 수세기 동안 쌓아온 역사의 뒤안길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그 속에 면면히 남아 흐르는 평화의 메시지가 아닐까.
31.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
“미치도록 내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없어도 좋고 아름다운 인연이라 해도 좋다. 오늘은 염부단금* 같은 꽃술을 가진 차 꽃을 탑신께 헌다화(獻茶花) 하고 싶다. 1980년도 초, 풀밭에 둘러싸인 석탑 앞에서 우리는 정성스레 차를 올리고 탑을 돌곤 했다. 우리 스님은 유난히 백제탑들을 좋아했으니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정림사지 탑을 닮은 미륵사지 서탑과 왕궁리5층석탑엘 자주 갔다. 그때는 연꽃 같은 스님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나도 따라 좋아했고 스님의 행을 그대로 닮고 싶었다. 탑을 올려다보는 시선 따라 같이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내가 다례원을 열었을 때, 전라북도에 오니 차(茶) 하는 사람도 없고 전통찻집도 없다 하시면서 스님은 나의 다원에 오시기를 좋아했고 우린 한눈에 서로 반했다. 선뜻 전화 주시고는 송광사 마로니에를 같이 보러 가자 하시고, 연꽃이 필 때는 연 방죽에 같이 가자고 했다. 스님이 경기도로 옮긴 후 많은 해가 지났다. 문득 지난날들이 되살아나 미륵사지와 왕궁리를 다시 찾게 되었다.
왕궁리 탑을 보러 갈 때면 옛 연인을 만나는 듯한 묘한 설렘조차 일었다. 탑을 돌아보고 면석을 어루만져도 보고, 풀밭에 누워보기도 하고 무한한 아늑함에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하며, 때로는 거석이 주는 위압감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한참 탑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폐허로 남아있는 탑 주변에서 알지 못할 적요한 마음결이 느껴져서 좋았다.
어느 날 오후 넋 놓고 탑신을 바라보자니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교수를 모시고 탑 앞에 모였다. 부산의 대학생들이었다. 혼잣말로 '왜 이렇게 이 탑이 아름다운지요!‘하고 중얼거렸다. 이들을 이끌고 백제 지역을 답사하는 교수는 내 말을 귀담아 듣고 문득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손뼉을 "딱,딱,딱 치며 자, 여러분! 이 백제탑이 어떻게 아름다운가요? 신라 탑과 어떻게 다른가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멍하니 모두 올려다보았다. 물론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돌조각을 쌓는 데는 모두 과학적 원리가 있다. 그리고 시선이 닿았을 때의 체감까지 고려한 점도 있다. 그 교수의 설명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나도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보았고, 그 후로 더욱 그 미감을 음미하곤 했다.
"초층 탑신은 맏형처럼 듬직하고 2층 이상은 어여쁜 누이동생들처럼 옹개종개 오라버니 넓은 등에 업혔다. 평사낙안 기러기처럼 너른 지붕은 넉넉하고 한가로운 정경…. 지붕 끝마다 드러난 추임새는 어느 여인이 진양조 느린 가락으로 춤을 추다가 불현듯 손끝을 튀기는 악센트…. 위층으로 오를수록 지붕은 넓고 몸뚱이는 가냘퍼! 저 꼭대기의 긴장은 아름답다 못해 애틋하고 속이 타들어 간다." 이렇게 탑 박사는 탄식했다. 아마도 이 감상은 정림사지5층석탑의 미를 표현한 말이지만, 이 왕궁리 석탑에도 충분히 해당되는 맛이다.
미륵사지 서탑(국보 11호)은 200여 년의 전성기를 누렸던 목탑(木塔)의 시대가 끝나고 영원하게 변하지 않을 석탑의 시원(始原)을 연 탑이기에 그 의미가 깊다. 한 번 돌탑을 조성한 백제의 석공은 나무를 주무르듯 이렇게 조각미가 아름다운 정림사지 탑과 왕궁리 석탑을 만들었다.
이제는 왕궁 터가 발굴되어 왕궁리란 이름의 물증이 드러났다. 사방에 나타난 성벽과 유구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실체의 흔적이 드러날수록 발굴되기 전의 모습이 애틋하게 그립다. 탑이 보이는 입구에 서면 자연의 흙길이 열려 있고 양옆으로 100여 년 가까이 된 벚나무가 줄 서 있으며, 흙길 끝에 하늘을 당당히 떠받치고 서 있는 탑이 노을을 배경으로 홀로 서 있는 아름답고 슬픈 자태는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했다.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 옛날 탑 사진을 보던 한 관람자는, 자기는 이 부근의 마을에 살았는데 초등학생 때 탑 주위에서 놀면서 옥개석(지붕돌) 위를 올라 다녔다고 했다. 인근 초중등학생들의 소풍장소가 미륵사지와 왕궁 터였다. 소재구 탑 박사도 그랬다. 어렸을 때 늘 이 주위에서 놀 질 때까지 자주 놀았단다. 그 인연이 나중에 청년 시절부터 탑에 미쳐 새벽부터 밤늦도록 돌아다닐 줄을 그때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느냐고 술회했다. 참 인연이란 묘하다. 내가 아버지의 직장 인연 때문에 중고등학생시절을 전주에서 보낸 일이 후에 다시 이곳 사람과 결혼할 인연이 될 줄이야! 설화의 주인공처럼 서동이 선화공주를 찾아다녔던 것 같이 내 남편도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던 나를 찾아 전주까지 데려올 줄이야! 아마도 친정 친척 하나도 없는 타향에서 내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나를 위로해주었던 백제 탑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작부터 차의 공덕을 알고 부처께 헌다공양을 올렸던 기원의 덕도 힘이 되었을 것 같다.
어렵사리 삼국을 통일한 신라. 백제를 무너뜨리고도 고구려와 8년간이나 전쟁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당나라를 물리치기까지 힘겨웠다. 통일한 나라를 화합하기에는 내용이 충분해야 했다. 자기 고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익산 지역 사람들은 백제의 마지막 희망과 꿈이었던 미륵사를 유지하기 위하여 강력한 신라인들로부터 시주를 받아야 했겠지. 지역을 살리고 화합하기 위하여 그들의 민요에 신라의 선화공주라는 상상의 인물을 등장시켰는지도 모른다.. 문학적 상상력은 선화공주를 빌려 서동의 신분 상승을 올려놓을 만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지역은 오랜 세월 <서동요>의 덕을 보아왔던 셈이다. 새삼스레 선화공주가 아니고 익산의 호족이었던 '사택적덕'의 딸이라 했으니 여러가지 시대적 상황과 기록의 증거로 보아 그녀는 후비인 것 같다. '사리봉안기'에 쓰인 절대연대인 '기해년'이 어느 해인지 학자들에겐 의문의 여지르 남기지만 <서동요>는 설화에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일연 스님이 언뜻 보면 한낱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서동요를 채록하여 남기고자 했던 원의(願意)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서동요는 노래가 주는 감성보다도 시대적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근심어린 원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국경 전쟁으로 탐욕에 찬 마음을 돌이키고, 나와 같은 사람을 원수로 여기는 어리석음에 대한 설법이 아니라, 상처로 얼룩진 민초들의 서정에 단비 같은 것이었을 게다. 신라 백제가 상종 못하는 별종이 아니라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 예쁜 여인을 사랑하는 불타는 청춘을 노래하는 상사가(想思歌)는 국경을 초월한다는 것을 먼 훗날을 위해서도 알려주고 싶었으리라.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듯 모두가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염원했던 뜻이었다. 고대로부터 우리민족은 가무를 즐겨 했으니 어떤 설법보다 노래 한 가락이 민초들의 마음을 울렸으리라.
아버지의 덕택에 경남에서 산 세월보다 전주에서 산 세월이 많아졌다. 이제는 이곳의 문화미(文化美)에 푹 젖게 되어 탑 앞에 서면 한 살처럼 느껴진다. 고대에 선화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내 피도 걸러지고 여과되어 나에게서는 복합 문화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가 첫 세대로써 영호남의 가교를 이었으며 내 아들도 대를 이어 영남 여인을 아내로 맺었으니 그렇게 해서 선화공주의 후손들은 대한만국 안에서 하나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 창조해 가고 있다. 만날 때마다 내 발길을 붙잡는 백제탑이여, 아! 세월이여! (2009
선화공주는 누구일까
교통이 발달된 2008년 여름, 나는 옛 신라 땅, 경주 근처 후포리에 가기 위하여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가을에 오라고 하신 광도사 스님 말씀을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했다. 고속 버스가 부산까지 바로 가는 것이 있긴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부산엘 가려면 대전발 0시 기차를 갈아타고 열차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신라 땅에서 태어나서 어찌하여 이 백제 땅에 와서 살게 되었는고! 현대판 선화공주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옛날 백제의 땅 익산에서 경주까지 어떻게 그런 낭만적이고 선정적이기까지 한 러브스토리가 있을 수 있었는지. 어찌 익산에서 경주까지 서동이 마를 캐어 팔러 갔을꼬. 그런 노래까지 지어서 말이다.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 /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 선화공주님은 /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 薯童房乙(서동방을) / 夜矣卯乙抱遣去如(야의묘을포견거여) / 맛동(서동) 도련님을 / 밤에 몰래 안고 간다
공자도 그 나라 가요를 들으면 그 나라의 상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정부수립 이후 60년의 가요사를 보아도 그 시절마다 그때의 상황과 정서를 느낄 수가 있다. 그동안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신라의 선화공주와 서동과의 관계는 그 시대로써는 말도 안 되는 개 짖는 소리라고 들 해왔단다.
“역사에서, 문학에서, 전설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면 역사가는 그 베일에 가려진 진실을 찾아내는 수사관이 되어야 한다." 전 고궁박물관장이던 소재구 씨의 말이다. 역대의 역사의 수사관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그동안 역사 배경적으로, 문학적으로 <서동요>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기로, 백제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 이야기로 낙찰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무왕이 익산의 토착 귀족층의 힘에 의하여 왕으로 등극하였고 부여 씨들의 세력에서 벗어나고자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었을 것이라는 심증은 결국 오늘, 1400여 년 만에 물증이 드러난 셈인가. 아직은 미비하지만. 2009년 1월, 드디어 미륵사지서탑 마지막 기단부의 심초석에서 사리기와 사리봉안기 등 유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출토 유물은 사리장엄구를 비롯해 국보급 유물 683점이다. 미륵사를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하게 된 내력을 새긴 ‘금제사리봉안기’에는 절대연대와 왕비의 이름이 밝혀졌다.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왕의 수명장수, 치세영구, 상구하화이며, 왕비에 대해서는 신심명징, 건강복리, 불도성취를 기원한다. 대가람을 세운 목적이 최고통치자인 왕과 왕비에 대한 건강, 치국, 불심에 모아진다. 말하자면 왕사로서 지어지고 왕권강화에 목적이 있음이 명확하다.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 창사의 배경과 전경이 뚜렷한 반면, 미륵사연기설화인 서동설화에는 드러난 전경은 없다. 미륵사를 창건하게 된 배경은 나와 있지만, 창사의 목적은 뚜렷하게 나와 있지 않다. 또한 사리봉안기에는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이며 왕비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이다. 따라서 역사와 설화 상에서 흥미로운 혼란이 다시 생기게 된다. 역사적 사실이 된 사리봉안기에 따르면 서동설화는 거짓말이 되었으니, 선화공주는 누구란 말인가. 또 ‘기해년’은 과연 무왕조의 기해년인가.
신라여인이 백제로 와서 살고 있는 나를 두고 ‘선화공주’라는 애칭으로 불러준 이가 있다. 미륵사지에 헌다례를 하러 자주 갔던 나는 더욱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선화공주를 찾아야 했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의 지붕은 석탑의 형식미를 따라서 건축했다. 지금은 서양식 잔디밭이 되어버린 폐사지의 벤치에 앉아 그 당시의 가람을 상상해본다. 연못가를 서성이며. 우리의 선화공주는 어디로 갔는가. 선화공주의 정체성을 찾는 일은 본의 아니게 역사공부와 문학공부가 되었다. 흥미로운 역사 탐색이 아닐 수 없었다. 단 두 줄의 <서동요>가 향가 중에서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고도의 문학장치를 세련되게 구사했다는 점. 절묘한 시작법(詩作法).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글 쓰면서 들어온 풍월로 문학작품이 이렇게 탄생하는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어디까지나 사실적 기록이 아닌 전해져 내려온 민담과 설화와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설이 텍스트가 되었다면 기록자나 전달자의 상상력에 따른 인위적 가필이 허용될 수 있다. 사史는 사실적事實的이요 전傳은 사실적寫實的이다. <<삼국유사>> 전체 성격이 그렇듯, 무왕조, 역시 史가 아닌 傳을 텍스트로 하고 있다.” 라고 나경수 교수는 언급했고, 이번에 발굴된 ‘사리봉안기’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겪었던 혼란을 밝히는 빌미가 된 셈이다.
“서동설화는 역사는 아니지만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서동설화는 민중들의 간절한 희망이 투사되어 있다. 서동설화는 창의력 신장교육을 위한 훌륭한 문학 작품이다.” 역시 나경수 교수가 이미 밝힌 의견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기(고려)는 작품의 주인공과 주변의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 구전되어온 신화와 민담과 전설이 섞여서 서동설화로 묶어질 수 있는 시기였다. 일연 자신도 혼란을 겪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상상력을 포함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고대국가의 건국신화에 나타난 여신女神의 실체가 시대를 거쳐 오면서 정치적 상황에 의하여 변색된 것처럼. 도저히 그 당시의 정치적 입장에서는 두 나라 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문학의 장치인 아이러니와 역설 속에 민중들의 소망을 담고 탄생되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의 탑상조에서 ‘미륵선화’를 만나러 가는 이야기가 있다. “네가 웅천(지금의 공주)수원사로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보게 될 것이다.” 眞慈師가 꿈을 꾸고 미륵선화를 만나러 가는 이야기다. “신라 진흥왕은 불사를 많이 짓고 승니를 많이 두었다. 천성이 풍류를 좋아하였고 신선(神仙)을 많이 숭상하여 인가의 예쁜 낭자를 뽑아 원화(原花)로 삼았으니, 그것은 무리를 모으고 선비를 뽑아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가르치려는 것으로서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하였다.” “여러 해 후에는 풍월도(風月道)를 하여 나라를 흥하게 하려고 명을 내려서 양가의 남자로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다시 화랑(花娘)을 남자 화랑(花郞)으로 고치고 맨 먼저 설원랑을 국선(國仙)으로 삼으니…….” 그 당시 신라 사람들은 신선을 가리켜서 미륵선화(彌勒仙花)라 불렀다. 미륵선화(彌勒仙花) 조에서도 <서동요>에서처럼 “이에 노래를 지어 어린아이들을 유혹하여 거리에서 부르게 하였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일연은 이렇게 똑 같은 수법으로 구전을 채록하고 작성하였다
지배권자들은 전쟁을 일으키지만 민중들은 평화를 원한다. 얼마나 전쟁이 치열했던 시기였던가. 설화는 민중들의 소망에서 탄생되는 것이기에 모두 사이좋게 살기를 바란다. 신랑인 백제와 신부인 신라와 결혼하여 진정으로 사이좋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쩌면 백제인들의 소망이기도 했을 것이고, 통일시기 신라인들에 의하여 각색되어졌을 수도 있었던 서동설화였다. 진평, 즉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말이다. 민중들은 백제의 왕과 화랑으로 승화돤 ‘미륵선화’를 맺어준 것이 아닐까. 그렇게 ‘미륵선화’가 신라의 선화공주로 시적 변모한 것이 아닐까? 서동요는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국경을 초월하는 영원한 세레나데로 남을 것이다. (2009)
32. 왕궁리 유적
왕궁리 유적
돌아가는 발길이 즐겁다. 아니, 자동차를 운전하는 마음이 가볍다. 흔들리는 자동차의 울림이 마음의 박자처럼 온몸에 어떤 기쁨을 주는 것 같다. 감동! 어떤 일에든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 일상을 운용하는 원동력이 되는구나!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오늘, 그와 같은 감동이 새로운 활기를 생기게 한다. 바로 왕궁리 탑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되었다. 30여 년 전부터 가끔 봐 오던 탑이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석탑이 주는 감동이라기보다는 어떤 신앙심이 작용했지 싶다. 그 무렵부터 다도를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스님이 좋아하는 왕궁리 탑과 이웃에 있는 미륵사지 석탑에 우리 다도회원들은 가끔 헌다의례를 행했다. 석탑이 부처의 사리를 묻고 있기 때문에 석탑은 부처 자체였다. 애초에 불교에서는 절집이 생기기 전에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탑을 먼저 조성했다. 그리하여 믿음이 있는 자는 석탑을 예배 대상으로 여겼다. 석탑의 조형미를 감상하기보다는 경외심을 가지고 탑에 차를 올리고 탑돌이를 했다.
논에 모가 자라서 푸른 들판은 초록 융단을 깐 듯하다. 비 오는 어느 날 다시 이곳을 찾았다. 비 오는 날은 그 석탑이 잘 보일까. 궁금했다. 카메라 줌을 끌어당기지 않은 거리. 초록 논을 넘어서 멀리서 더욱 또렷하게 탑이 보였다. 주위가 온통 안개가 끼어서 하늘은 회색빛인데, 석탑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뒤의 산 그림이 모두 안개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석탑만 홀로 선명했다.
왕궁리 유적 주변은 발굴 작업이 거의 끝나서 그 옛날에 왕성이었다는 것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한때는 왕궁이었다가 백제가 망한 뒤에는 왕궁 사찰지로 변환된 것이다. 혹자는 견원이 후백제 도읍지를 정할 때 이곳 왕궁리 유적을 생각했다는 설도 있다고 하는데, 그럴 만한 곳이다.
비 오는 날, 고즈넉하게 궁성이었던 당시를 상상하며 석탑 뒤의 후원지까지 걸어보았다. 그때도 비 오는 날이 있었을 것이며, 바람이 부는 날도 많았으리라. 겨울에는 눈도 왔으리라. 비를 피해서 또는 눈바람을 피해서 제각기 역할과 위치에 따라서 어느 전각 밑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겠지, 때로는 빗장을 열어보며 언제 비가 그치나 하늘을 우러렀을 것이다.
이웃의 미륵사지 아래 용화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이라 했던가. 궁성을 쌓기 위해서 터를 높였을까. 주위보다 언덕처럼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평화로운 논밭이 펼쳐져 있다. 아련한 세월 동안 묻혀있던 백제의 옛 꿈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근처의 고도리에는 석조여래입상 두 기가 200미터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다. 언제부터 서 있었을까. 설명에는 고려시대 양식을 띠고 있다는데, 백제 이전의 마한시대부터 있지 않았을까. 마한시대의 금마지역을 수호하는 신처럼, 마치 절집의 일주문처럼 호위무사같이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다.
미륵사지를 비롯하여 이곳 왕궁리 유적은 공주, 부여와 함께 2015년 7월 백제유적지구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얻었다. 말 그대로 백제의 옛 꿈이 새롭게 열리는 계기를 맞았다.
그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풍남문 종소리에 나를 깨워서
남고산성 달빛 아래 나를 재워 주
아 - 아 -
덧없이 세월은 흘러가도
백제 서울 옛 꿈은 마냥 새로워
전주가 36년간의 후백제 도읍지였다니, 백제의 옛 꿈은 익산지역으로부터 시작하고 부흥하여 그 꿈이 키워졌지 싶다. 이제는 근엄한 모습으로 경계를 둘러치고 있어서 옛날처럼 친근하게 다가갈 수도 없다. 우러러보고 그려가야 하리라. 백제인의 꿈이 천년만년 이어지도록.
왕궁리 유적의 전시관이 세워졌을 때, 좀 의아했다. 석탑 하나 덩그러니 있을 뿐인데 그 넓은 주차장에 대전시관이라니. 발굴하고 보니 그럴만한 유적이었다. 왕궁터였고 그 뒤 사찰 지였다는 명와와 많은 유물이 나왔으니. 신비에 싸여서 그리움만 키워왔던 옛 꿈이 낱낱이 드러났다. 과연 탑 하나가 아우를 수 있는 유적지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아름다움의 정신이 앞으로 한국인의 생활 정서에 싸여서 빛나지 않을까. (2016)
왕궁리오층석탑
옛날에는 탑 주변은 온통 풀더미에 덮여 있던 주변이 잠자듯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벚꽃이 피는 봄이면 벚꽃에 싸인 탑의 아름다움도 덩달아 환하게 빛났다. 가을이면 마른 풀 언덕에 홀로 우뚝 서 있는 5층 석탑은 쓸쓸하여 외로움의 더께를 한 겹 더 입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눈발을 받은 석탑은 오히려 따뜻하게 보일 정도로 아늑하여 조용한 숨을 쉬는 듯도 했다.
그 시절은 문화유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때다. 석탑 주위의 잔디밭에서 돌탑이 보초를 서는 듯, 안전한 거리에서 자리 깔고 쉬기도 했다. 돌을 어루만지며 경외심과 묵직한 알 수 없는 믿음도 있었다. 아무도 눈여겨 봐주지 않을 때라,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었지 싶다. 왜 무엇이 그토록 석탑의 아름다움이 내 안에서 힘을 주었던지 알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예술인의 혼이 연결되었을까.
왕궁리 5층탑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이 있다고 말해준 해설사의 인도로 우리는 그 장소를 찾아갔다. 탑의 서쪽 1,000여 미터의 거리에서 보는 석탑이다. 석탑 옆으로는 삼례에서 논산으로 가는 국도 1번대로가 있다. 그 길을 천천히 달리면 길옆으로 탑의 전체 모습이 훤히 보인다. 그 길을 아래로 지나서 서쪽 논 가운데로 간 거리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았다.
미술사학자 강우방 씨가 발견한 지점이란다. 이 탑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이라고 그는 자랑했단다. 통일신라에서 석가탑이 탑의 정형으로 가장 비례미가 아름답다고 했다. 석탑의 양식이 시대에 따라 변형해왔지만, 정형화된 탑 이전의 백제탑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탑의 양식이 목탑의 모습에서 이어져 내려온 짜임새에서 오는 부드럽고 온화한 때문이지 싶다. 백제의 탑. 가까이서 바라보면 장중하여 압도되지만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면, 옥개석의 받침수와 층층의 덮개돌의 선과 몸돌의 어울림이 주는 형식이 아름다운 어떤 조형미를 나타낸다. 백제탑은 덮개돌의 면 끝이 버선코처럼 마치 춤사위의 손끝 동작처럼 살풋 치켜들었다. 멀리서 아련하게 보이는 석탑은 날개를 접고 안전한 곳에 내려앉아 천년 세월을 품고 있다. 백제인의 어떤 삶의 철학이 강직하기만 한 돌에 예술 혼을 실었을까. 생명을 불어넣은 돌탑에서 어떤 정신을 발견해야 하는 걸까. 옛 백제인의 삶의 철학과 의지를 통하여 오늘 내게 새로운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천4백 년 전의 혼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어떤 정신에 감동된 것일까. 어떤 감동이든 그 감동을 통하여 우리의 의식은 새로운 통로를 발견하는 것 같다. 생활의 활력이 되어서 행동의 변화도 일으키고, 보람찬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날로 새로운 감동의 날들을 엮어가면서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는 다음 세대로 또 이어지리라.
망연히 쳐다보았다. 아직 모를 심지 않은 논에는 물을 받아놓았다. 몇 겹의 논두렁을 넘어서 전봇대도 보이고 시선이 닿은 끝에 산이 둘러쳐져 있다. 그 산의 높이에 탑의 상륜부가 닿았다. 탑 앞의 벚나무들이 숲으로 보이고 한 쪽으로 약간의 공간이 있는 가운데 뚜렷한 모습으로 보이는 석탑은 먼 산과 주위 숲이 어울려 신비한 감응을 주고 있다. 흘러가버린 세월을 품고 있는 석탑은 가까이 가면 그 세월을 풀어낼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삼례에서 논산 간의 국도 1번 도로가 왕궁리유적을 가리게 되어 아쉽다.
저녁 이내가 내리는 시각, 안타까워 그리는 백제의 옛 꿈을 말없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스라이 먼 것 같지만 또렷하다. 어느 순간은 가까이 보던 때와 더 장중하게 다가오는 석탑.
만날 때마다 내 발길을 붙드는 백제탑이여!
쌍릉
익산시 무왕로에 있는 쌍릉은 대능과 소능이 있는데 그것이 무왕과 무왕비인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탑리 마을에서 국도로 올라와서 금마 쪽으로 달리다가 금마 사거리에서 죄회전하면 '무왕로'를 지난다. 길 이름을 '무왕로' '선화로' 등으로 지어 익산은 거리마다 옛 백제를 떠올리게 한다. 무왕로의 중간 지점쯤 가면 '쌍릉'의 이정표를 만나게 되고 우측으로 '쌍릉로'인 작은 길을 조금 가면 길 가에 대능이 나타난다.
선화공주의 넋이 되어 무왕로를 지나면서 그 옛날의 치열했던 신라와의 갈등 속에서 백제의 영화를 꽃피워 보려던 무왕의 심정으로 되돌아가 본다. 지금은 그들 혼백들도 능 주위로 다시 찾을 것 같지 않다. 어쩌면 그 혼백들은 먼지 같은 기氣로 화해서 오늘날 우리들 혼의 일부로 환생되었는지도 모른다.
주차장에서 능으로 난 길은 두 갈래다. 왼쪽의 능이 소능(小(陵)인데, 아마도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아니 이젠 선화공주란 이름을 바꾸어서 그냥 무왕비의 능으로 불러야 할지. 오랜 세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 설화는 그대로 가치가 있었기에...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가면 소나무 숲 사이로 대능(大陵)이 보인다.
대능 쪽에서 소나무 숲길을 따라가면 소능까지 산책길로 이어진다. 소능 쪽에서 숲을 빠져나오면 대능이 나오고 바로 큰길가이다. 대능의 꼭대기에 올라 보면 동쪽, 왕궁터의 원경이 아스라이 보인다. 무왕과 왕비가 죽어서도 왕궁터를 그리며 백제의 치세가 탄탄하도록 빌고 있을 거라는 염원을 담아 왕궁을 향한 이곳에 능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지금 내가 공주의 혼이라면 그렇게 나라의 안녕을 원하며 쳐다보았을 것 같다. 고대 왕국들의 비원이 한데 뭉쳐져 이제는 통일된 한반도가 이어져 왔고. 남북이 하나 되기도 빌고 있지 않을까. 멀리 아스라이 왕궁 터가 보인다. 폐허가 다시 살아날 듯하게 발굴되고 있는 왕궁 터의 석탑을 차거운 달빛이 보드랍게 어루만질 것이다. 오늘 같은 보름날 밤이면, 쌍릉에서는 무왕 부부의 혼이 달빛 속에서 오늘의 세태를 감지하며 달을 올려다보며 빌지 않을까. 나라의 앞날을 위한 기원을... 이제 무거운 왕관 내려놓았으니 서동으로 돌아가 한가하게 소나무 산책로를 지나 공주를 맞으러 가서 달밤의 고요를 두 손 잡고 너울 춤추어 보소서. 그 옛날 두 분이 사자사를 방문하려할 때 미륵사 연못에 나타난 삼존불이 또 나타나서 무슨 언질을 주실지 가늠해 보시라. ( 2009년 첫 보름날을 지내며.)
추신: 2016년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쌍능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최근 일제시대 때 발굴했던 내용을 다시 검토했다. 대능의 발굴품 중에는 40대 여인의 치아로 판정된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쌍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재검토해야 하는 일인지 모른다. 40대 여인의 치아가 맞으면, 그 능의 주인이 선화공주일 가능성이 높으며 무왕은 그 뒤에 죽었으니 다른 곳에 묻힐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한번 기정사실처럼 굳어진 설화가 어떻게 다루어질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33. 백제의 르네상스를 그리다
백제의 르네상스를 그린다
헌다례(獻茶禮)을 올리기 위하여 茶스님과 화림회원들은 가끔 미륵사지와 이웃 왕궁리 오층석탑에 갔었다. 1980년 무렵, 미륵사지서탑은 한 쪽이 시멘트로 메워진 채로 반쪽의 몸만 남은 탑신이었다. 주변에는 떨어져 조각난 탑돌들이 세월을 잊은 채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우리는 차를 우려 차반에 받쳐 들고 그런 탑을 돌곤 했다. 폐사지의 허전한 들판에서 부서져 남은 반쪽 부처의 집을 올려다보며 그저 경건한 마음으로 탑돌이를 하고 나면 돌아오는 발걸음이 고요해졌었다. 폐사지 주변은 정리되지 않은 논두렁길로 어수선했었지만, 그것이 더욱 미륵사가 품고 있었던 백제의 꿈을 그리게 했었다. 아직 발굴이 전개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2008년 봄에 박물관자원봉사자팀이 익산 답사에 나섰다. 연못 뒤의 가건물 안에 미륵사지서탑이 해체되어 있었다. 1400여 년의 백제인의 삶과 한의 무게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한 탑돌들이 늘어져 있었다. 각각의 돌은 이름, 층수, 위치, 방향 등을 치밀하게 기록한 표식을 주렁주렁 달고 제자리를 찾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층부는 모두 해체되었고 기단부분만 남아 있는 1층 옥개석의 네 귀퉁이에 수인상이 울상을 짓고 있는 듯했다. 한많은 서탑이 창고 안에 갇힌 이래 난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창고를 다 둘러보고 늘어놓은 돌들을 보자 너무나 아득하였다. 저 돌들이 모두 제자리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옛날부터 있었던 연못가에 앉아 그려보았다. 왕과 왕비가 사자사에 가는 도중 미륵삼존불이 나타났던 연못이 여기였을까. 미륵사지를 나오면서 나는 못내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옛날 헌다례를 행하러 다녔을 때가 차라리 그리웠기 때문이다.
역사적 기록이 전무하였던 백제의 유적이 발견될 때마다 뉴스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1971년이었던가, 공주의 무령왕릉이 발굴되었을 때가 그랬고 부여 능산리에서 '백제금동향로'가 발굴되었을 때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서울의 몽촌토성이 그랬으며, 2007년에는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발견된 창왕(昌王) 시대(577년 제작) 사리기가 나온 것이다. 사리기는 석가모니 부처의 유골인 사리(舍利)를 담는 그릇을 가리키는 말이다.
2009년 1월 드디어 미륵사지서탑 해체 과정 중 마지막 기단부의 심초석에서 사리장엄구와 사리봉안기 등 유물이 쏟아짐으로써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번 사리장엄구 발굴로 인하여 학계에서는 많은 토론을 했다. <미륵사지 탑지의 조사과정에 대한 검토>에 관한 심포지엄도 개최되었다. 모두가 '사리봉안기'의 '기해년'을 당연히 '무왕조'의 기해년으로 단정 짓고 토론되었으며 신문 보도 또한 '639년 기해년'으로 이루어졌다.
<<삼국유사>>의 무왕조를 몇 번이나 살펴보았다. "고본(古本)에는 무강왕(武康王)이라고 하였으니 틀린 것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 ...... 이에 미륵법상 3개와 회전, 탑, 낭무 각각 3개소씩을 창건하고 액(額)을 미륵사라고 하였다. (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하였음.) 진평왕이 百工을 보내어 도왔는데, 지금까지도 그 절이 남아 있다. 또 <<삼국사>>에서는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이 전에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알 수가 없음)."
고본에 표기된 '무강왕'과 '기해년'이 다시 실마리가 되는 셈이다. '기해년'이란 절대연대로 인하여 무왕조가 아닌 <무령왕 19년 519년(기해년)>임이 더욱 선명해졌다는 사재동 교수의 논문 <미륵사지 문물의 예술사적 고찰>이 너무나 그럴싸해서 나의 생각도 거의 무령왕 쪽으로 기울어졌다. 일연의 시대에서는 이런 사실을 증거할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일연은 무강왕은 없다고 일축했으리라. 이로써 문학가와 역사의 수사관 사이에 또 학자들 사이에 심심찮게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겪었던 혼란이 그대로 남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륵사창건설화의 배경의 무왕은 무령왕이라는 주장이 다시 흥미를 갖게 된다. 동성왕 때 무령왕은 왕자였으며 신라와 국혼이 있을 정도로 교류가 많았고 백제의 문물이 가장 융성하여 미륵사 같은 대찰을 창건할 여건이 무르익었으며, 무령왕의 녕寧 자가 <<삼국사기>>에 나타난 무강왕의 강康 자와 동의同意 이어異語로 얼마든지 환치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삼국유사>>의 살생을 금한 법왕(法王) 조(條)에는, “법왕이 당시의 수도 부여에 왕흥사를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승하하였다. 무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선왕의 사업을 이어받아 몇 기(紀)를 지나 완성하고 그 이름 또한 미륵사라고 하였는데, 산을 등지고 물을 임하였으며 꽃과 나무가 수려하여 사시사철 아름다웠으므로 왕이 매양 배를 준비시켜 강을 따라 절로 들어가서 그 장려한 경치를 감상하였다. (고기(古記)에 실린 바와 조금 다름. 무왕은 가난한 어머니와 못의 용이 교합하여 태어났고, 아명은 서예(薯 )였으며, 즉위한 후의 시호가 무왕인데, 처음 왕비와 함께 창건한 것임).
정경으로 본다면 부여 백마강 근처의 왕흥사가 맞을 것 같다. 그렇다면 몇 기(紀)가 걸렸다는 것은 몇 십 년일 텐데, 지금의 미륵사를 계속 건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 같다. 미륵사도 왕흥사나 경주의 황룡사처럼 많은 세월을 거쳐 완공되었을 것이기에 무왕 이전 시대부터 건축되고 증축되어오지 않았을까. 세계유일의 3탑 3금당에 의한 3원 병렬식 가람 배치는 백제만의 독창적 건축 활동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 같다. 진평왕에게는 셋째 딸이 없었다고 하는데, 기해년이 백제가 신라와 교류가 많았던 시절 무녕왕 때의 기해년일 수도 있다는 일부 학자들의 추측이 가능한 실마리다.
미륵사 서탑의 ‘사리봉안기’로 인하여 서동설화는 역사적 사건들로 등장하게 되었다. 미륵사의 창건을 발원한 사람은 첫 왕비였고, ‘사택적덕’의 딸인 왕비는 후비로서 서탑을 봉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삼국유사>> 저자인 일연의 의문은 여전히 남는 것 같다. 고기(古記)에는 왕흥사였다는 대목 때문이다. 어쨌든 <서동요>는 백제와 신라를 잇는 사랑의 메시지로 오늘날과 미래에도 유효하고, 미륵사야말로 백제의 문명과 문화가 집결된 총화였으리라.
유물관을 들어서면서 벌써 마음이 상기되었다. ‘사리장엄구’들을 친견하는 마음이 그리도 달뜰 수가 있을까. 모래알만 한 ‘사리’ 하나를 둘러싼 오색유리알 11과의 사리는 어쩜 그리도 협시보살들 같은가. 부처님 몸을 모시는 믿음을 영원히 변치 않는 ‘금제내호’에다 최고의 공예기술의 문양을 새기도록 했다. 옛 백제인들의 마음을 대하는 이 시대의 마음도 그들과 다를 게 없다. “사리를 일곱 번 요잡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다.”하지 않았던가. 옛날 사람들이 그랬듯이 전시된 유리관 탑을 돌며 자세히 살폈다. 순금제 내호는 두 손으로 감싸면 그 손바닥 안에 폭 싸일 것 같은 크기로 참으로 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찬란하다’ 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장려한 색채를 품고 있었다. 엄숙하고도 고귀한 빛을 은은하게 빛내지 않는가.
백제의 미(美)를 말할 때 흔히 사용되어지는 말이 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치졸하지 않다. 그러나 이제 그 말만으로는 백제의 예술을 다 말하지 못할 것 같다. 통일신라 시대의 상징인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은제품에다 청동과 목제품이었다. 금세공의 기술이 이미 높은 수준에 와 있었던 백제였다. '백제금동대향로'에 그들의 우주관을 통째로 표현한 조각 솜씨와 중국의 탑을 능가하는, 목재를 주무르듯 조각한 석탑의 조형으로 보아 어찌 다른 예술품을 상상하지 못하랴! 대사찰에 담긴 모든 불교미술과 신앙도구들이 당대 최고의 기술과 예술품으로 창조됨으로써 한국 불교문화의 전형으로 현대에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새꼬리 모양의 치미는 미륵사 전각마다 용마루의 양쪽 끝에 세워져서 건물의 위용을 자랑하였을 것이고 사자 얼굴 다리로 된 향로, 사리함에 새겨진 공예 솜씨로 보아 다른 문물들의 솜씨를 능히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세 금당에 모셔진 삼존불상에는 당시 왕실 대가를 중심으로 최고 절정의 공예품이 제작되고 복장 되었으리라. 삼국시대에 제작된 국보 78, 83호인 '미륵반가사유상'를 탄생시킨 빼어난 조각 솜씨가 아닌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서도 짐작될 수 있다. "사리봉안기의 금판 명문은 무령왕릉 출토 지석의 석판 명문과 그 시대적 기록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터라 하겠다. 이러한 양자의 명문은 실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최고의 성과인데, 하나는 생전의 원찰에 새기고 하나는 사후의 능침에 새기었으니, 그 친연성이 실감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리봉안기의 명문이 무령왕 대의 소산임을 족히 유추할 수가
있겠다."
그 옛날 그때도 미륵사에서는 사리봉안 대법회가 이루어졌으리라. '사리봉안기'에 담은 백제의 기원을 한데 모아서 왕과 왕비를 주축으로 하여 왕실가족과 대소 신료들, 시주자들과 전국의 승려들, 백성들이 다 모인 가운데서 야단법석이 펼쳐졌을 것이다. 새꼬리 모양의 웅장한 치미가 하늘을 찌르는 전각 앞에서 금동대향로에서는 백제 인들의 비원의 향이 하늘로 피어올랐을 것이며, 백제 악기인 배소, 완함, 거문고, 피리, 북 등을 연주하는 최고의 악사들이 아름다운 가락을 울렸을 것이고, 음악에 맞추어 춤도 추는 축하공연도 하였으리라.
여름 한 달(2009년 6월 27일 - 7월 26일) 동안 익산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 지난 1월에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굴한 '사리장엄구'와 유물들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장마 기간이었지만 전북 지방은 물론 이거니와 전국에서 많은 관람객들이 다녀갔다. 감개무량하게도 1400여 년 만에 같은 자리 폐사지에서 전북의 모든 사찰의 스님들과 불자들이 모인 가운데 부처님사리 친견대법회를 다시 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폐막식 공연도 다채롭게 열려져서 백제불교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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