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3] 주몽의 라이벌, 집사 우태
김운회(동양대 교수) 1. 소서노를 사랑한 남자, 우태 드라마 ‘주몽’을 한층 재미있게 만드는 남자가 있다. 바로 우태이다. 드라마의 제작진에 따르면, 우태는 어린 시절 소서노와 함께 성장하였고 연타발 밑에서 집사 노릇을 하면서 뛰어난 상재(商才)를 발휘한다. 소서노가 주몽을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평생 소서노만을 사랑하는 순애보적인 사랑의 주인공이 바로 우태이다. 여자가 이런 남자를 매니저 또는 보디가드로 둘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될 것이다.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자기를 평생 보호해줄 이런 남자를 갈구할 것이다. 성공적인 드라마였던 『모래시계』, 『해신(海神)』에도 이런 남자가 나오는데 이것은 분명 드라마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좋고 평생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남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자기의 생명까지 버려가면서 보호하려는 의지를 가진 남자를 가까이 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2. 우태는 누구인가? 드라마 ‘주몽’에서 역사상 실체를 알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는데 이 우태는 드물게도 역사상에 실존하는 인물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태는 구태 또는 울구태라고 불리는데 이 분은 부여의 왕자(또는 부여왕)로서 대제국 백제의 실질적 시조에 해당하는 분으로 우리 역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드라마 ‘주몽’은 상단의 집사로 만들어두었으니 앞으로 작가가 이것을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하다. 백제의 건국시조에 대한 사료로는 『삼국사기』(백제본기),『삼국유사』(기이, 남부여),『북사(北史)』(백제), 『주서(周書)』(「열전」백제전), 『수서(隋書)』(백제)『속일본기(續日本記)』(桓武天皇 9年 秋7月) 등이 있다. 이들 사료들 가운데서 『북사』의 기록이 그 시대에 가장 가깝고 여러 사서의 내용을 좀더 상세하게 결집하고 있다. 『북사(北史)』에서는 백제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색리(索離)라는 나라의 왕이 지방에 나간 사이에 궁중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돌아와서 그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가 말하기를 ‘왕께서 아니 계시는 동안 달걀만한 양기(陽氣)가 내려와 제 입으로 들어와 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수상하게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시녀를 살려두기로 했다. 후에 시녀가 아이를 낳자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김을 불어 얼어 죽지 않았고 말 우리에 버리니 말도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 왕은 이 아기가 아마 신이 보낸 것 같다고 여겨 주워 기르고 그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하였다. 동명은 자라서 활의 명수가 되었다. 왕은 동명을 두려워하여 다시 죽이려 하자 동명은 남쪽으로 몸을 피하고 도중에 엄체수(淹滯水)라는 강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때리니 물속에서 고기 떼, 자라 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은 그 다리를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北史』卷94 「百濟」].” 위의 기록은 앞서 보았던 부여․고구려 신화의 기록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고리국(槀離國)을 색리국(索離國)으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사서에 이런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그런데 그 다음 내용이 우리에게 새로운 영웅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질고 신의가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우고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얻어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처음에 백(百) 집의 사람을 거느리고 강을 건넌[濟] 까닭에 백제(百濟)라고 한다. 동쪽에는 신라와 고구려가 있고 서쪽에는 바다가 있다(『北史』卷94 「百濟」).” 『수서(隋書)』의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두 기록 모두 백제가 구태(仇台)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거의 유사한 내용이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우태(優台)라고 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는 “혹은 이르기를 (백제의) 시조는 비류이며 아버지 우태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자손이며 어머니는 소서노”라고 적고 있다. 문제는 그 시기가 AD 2세기말~3세기 초라는 것이다. 그 근거는 바로 공손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분석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면 문제는 다소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건국 시기는 B.C. 18년경이라고 하니 백제의 건국 시기와는 거의 2백년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공손도에 대해서는 이미 [특집2]에서 충분히 분석했으므로 구태(우태)라는 분에 대해서만 좀더 알아보자. 『삼국사기』와 『후한서』에는 AD 120년을 전후로 하여 고구려왕이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자 위구태(尉仇台)가 군사 2만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위구태는 활동시기가 달라 구태가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특집2] 참고). 그런데 『삼국지』와 『북사』의 기록을 보면 공손도는 구태와 함께 요동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고, AD 190년경에는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려고 하고 있다(『三國志』「魏書」公孫度傳). 『삼국지』에 따르면 당시 구태의 후손 가운데 권력자는 울구태(蔚仇台)라고 한다. 따라서 이 울구태라는 분이 바로 구태(우태)가 되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대로 부여왕은 위구태(尉仇台) - 부태(夫台) - 울구태(蔚仇台) 등의 순서로 왕위가 승계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지』에는 “부여왕 울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복속되었고 당시 구려(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했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두 적 가운데 위치하므로 종실(宗室)의 딸을 울구태에게 시집보냈다(『三國志』「魏書」東夷傳).” 라고 적고 있다 ([특집2] 참고). 결국 구태는 바로 부여왕(扶餘王) 울구태(蔚仇台)이며 소서노의 부군(夫君)이 되는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태는 현직 부여왕이자 백제의 실질적 건국시조인데, 이 분을 상단의 행수나 집사 정도(또는 호위무사)로 묘사하고 있는 드라마 ‘주몽’은 상당히 위태로워 보인다. 3. 백제의 시조가 부여왕이라면 온조와 비류는 ? 백제의 시조라는 분이 바로 부여왕(扶餘王) 울구태(蔚仇台)라는 것은 한국의 국사교과서에 해일 쓰나미와 같은 충격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백제하면 온조, 비류를 떠올렸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대부분의 국사 책에서도 일반적으로 울구태를 고이왕(古尒王)으로 보고 있다. 백제의 시조가 부여의 현직 왕이라는 것은 백제가 부여의 분국(分國)으로 건설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부여왕이 왜 분국을 건설했을까? 이것은 당시의 요동의 정황으로 보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사서들의 기록을 토대로 본다면, 부여는 주변의 고구려나 선비 등이 강성해지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남부여(요동부여), 동부여(285) 등을 만들고 이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한족(漢族)과의 동맹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를 보면 백제의 실질적인 시작이 AD 2~3세기의 전후가 되는 결과가 나타나는데 그러면 온조와 비류는 누구인가? 무엇보다도 온조와 비류는 BC 1~2세기의 인물들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들은 소서노의 아드님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온조와 비류가 우태, 소서노와 함께 기록이 되어 있으니 모순이다. 이것은 ‘신화의 역전 현상’으로 보인다. 즉 신화상에는 할아버지 뻘 되는 사람이 아들이나 손자뻘의 아들이 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는데 온조․비류 - 우태․소서노의 관계가 바로 그런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류와 온조가 개인뿐 아니라 무리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주몽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대국 백제는 온조와 비류의 백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태를 중심으로 다시 강력하게 구축된 부여의 분국 즉 남부여를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백제라는 명칭은 이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백제라는 명칭은 5세기 경 남북조 시대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 나라는 백제가 아니라 실은 부여라는 것이 맞는 말이다. 이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온조와 비류가 분명히 구태(우태)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고기(古記)를 토대로 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온조와 비류는 오히려 구태의 먼 조상뻘 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할아버지가 ‘손자의 아들’이 되는 해프닝이 벌어진 셈이다. 이 같은 혈연의 역전(逆轉) 현상은 초기의 종족과 후기의 종족이 다르지 않고, 현재 지배세력이 구세력보다도 힘이 훨씬 강대함을 의미하거나 온조나 비류의 세력이 부여왕 울구태(우태) 세력에 통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역사에서 이런 경우는 자주 나타난다). 그러니까 온조(溫祚)와 비류(沸流)가 울구태(蔚仇台)의 아들로 둔갑한 때부터 백제는 전혀 새로운 나라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소국(小國) 백제(伯濟 -『삼국지』기록)가 대국 부여(남부여)로 다시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서의 관련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온조나 비류는 고구려가 정벌한 지역의 사람들이거나 정벌과정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세력 또는 반고구려계(친부여계)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 ‘백제는 없었다’ 참고). 그래서 온조와 비류의 결합으로 백제국이 소규모이지만 도시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한강유역에 자리 잡게 되는데 이것이 흔히 한국의 국사 교과서에서 말하는 백제(이른바, 한성백제)의 실체이다. 그러나 이 백제는 우리가 아는 대국 백제는 분명히 아니고 당시 한강 유역과 한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했던 수십개의 소국(小國)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三國志』「魏書」東夷傳). 따라서 AD 3세기 이전에 한반도 안에 존재했던 백제라는 나라는 거의 고려할 만한 수준이 못 되는 소국(小國)에 불과하다. 즉 3세기 후반에 씌어진 『삼국지』에서는 마한의 54개국 가운데 백제국(伯濟國)이 나타나고 있는데 당시 마한의 맹주는 목지국(目支國)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국 백제는 3세기에 접어들면서 엄청난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된다. 요동 지역의 부여 세력들이 한반도로 밀려들어오고 이들이 이 지역의 부여계를 신속하게 흡수하고 주변지역을 점령해나감으로써 한반도 남부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국 백제의 성립과정이고 좀더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부여의 분국(남부여)이 만들어 진 과정이다. 그러면 왜 부여계가 한반도쪽으로 대거 밀려왔을까? 그것은 요동의 국제정세가 매우 급박하게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조와 원소의 중원 통일전쟁이었던 관도대전(200) 이후 요동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실상 연나라왕이었던 공손씨는 손권의 오나라와 교류를 하는 등 위나라의 중앙정부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이것은 위나라 정부로 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대역무도한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요동지역의 연나라 - 부여의 연합세력이 중국전체를 통일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에 위나라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삼국지』「위서」공손도전). 역사적으로 요동 만주 세력이 강성해서 통일된 세력이 나타나면, 연나라 - 부여 연합과 같은 쥬신(흔히 말하는 동이와 북적)의 중원정벌의 시도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러한 흐름이 후일 북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의 등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부여왕 울구태(우태)의 처가인 공손도의 집안은 236년 위나라 장군 사마의에 의해서 거의 대부분 주살 당하게 되는데 AD 210 년에서 236년의 근 25년간 요동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경우 공손씨와 결혼동맹을 맺고 있던 부여계 역시 요동 지역에 발붙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바로 이 기간 동안 많은 부여계 세력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4. 백제 고이왕, 우태 한국에서 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흔히 “마한의 한 군장국가인 백제국(百濟國)으로부터 발전하여 기원 전후에 초기국가를 형성한 백제는 3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대국가를 이룩하였다. … 3세기 중엽 고이왕(古尒王 : 234~286) 대에 이르면 대외적으로 정복사업을 활발히 하고 대내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 이에 백제는 고이왕 때에 이르러 광대한 정복국가를 이루고 고대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던 것이다. 『주서(周書)』나 『수서(隋書)』에서 백제의 시조를 구이(仇台)라고 하는데 이 구이는 바로 이 고이(古尒)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이왕대에 백제의 시조적인 발전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변태섭 『한국사통론』79쪽].” 라고 배워왔을 것이다. 위의 서술은 한국 사학계가 말하는 일반적인 성과를 모아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즉 AD 3세기 중엽 백제는 고이왕 대에 이르러 전반적인 체제 정비가 있었으며 바로 구이(仇台) 또는 구태(仇台)라는 분 즉 부여왕 울구태(우태)가 백제를 건설한 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분이 우리가 알고 있는 드라마 ‘주몽’의 우태이다. 백제의 왕실 계보를 보더라도 무언가 심각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만 보더라도 백제는 ① 온조왕 - ② 다루왕 - ③ 기루왕 - ④ 개루왕(128~166) - ⑤ 초고왕(166~214) - ⑥ 구수왕 - ⑦ 사반왕 - ⑧ 고이왕(236~286) 등으로 일목요연하게 왕위계승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고이왕의 경우는 전혀 납득하기 어렵다. 즉 고이왕은 사반왕의 아들이 아니고 전혀 엉뚱하게 ④ 개루왕(128~166)의 둘째 아들이자 초고왕166~214)의 아우로 한참 올라가 버린다. 그러면 고이왕의 수명이 거의 1백 50살은 되어야 한다. 심각한 정치변화가 백제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2권 참고). 그런데 고이왕의 즉위원년(236)은 위나라 황제 조예가 공손연의 토벌을 명한 해이고 그 이듬해(237) 위나라 명장 관구검(毌丘儉 : ? ~255)은 요동 입구인 요수로 출병했으나 가을장마 때문에 부득이 철군했다가 238년 사마의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서 공손연을 토벌하고 공손연의 남은 가족과 고위 인사 또는 장수들을 색출하여 70여 명을 참형에 처한다. 이로써 공손연의 사돈인 요동부여(남부여)도 거의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공손씨와 결혼동맹을 맺은 부여왕 울구태 세력은 요동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나라의 침공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울구태(蔚仇台)의 남부여(요동부여)는 미래를 대비하여 상당한 세력이 2십년 이상 한반도쪽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이 크다(AD 228[?]년 연나라 내부의 정변도 있어 이것도 부여계의 이동을 촉진했을 것이다). 이 때만 해도 압록강 하구를 고구려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하(南下)에는 큰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이왕대(236~286)에는 여러 가지 제도의 정비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도 있겠지만 남부여에서 시행되던 많은 제도들이 반도부여에 그대로 이식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던 백제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국 백제(百濟)는 사실은 부여의 분국(分國), 남부여(南扶餘)라는 것이다. 백제왕들은 일관되게 부여의 시조이신 동명왕(東明王)에 제사를 지내고 있고 개로왕(蓋鹵王 : 455~475)이 북위의 황제에게 보낸 국서(473)에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그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옛 정의를 돈독히 존중하였습니다”라고 하고 있다(『삼국사기』). 더욱 중요한 점은 북위의 사서인 『위서(魏書)』이전의 중국의 역사서 예를 들면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진서(晋書)』『삼국지(三國志)』등을 보면 백제(百濟)가 나오지 않고 부여(夫餘)라고만 나온다. 즉 중국의 여러 역사서들 가운데 백제와 동시대에 가까운 기록들인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서(晋書)』등에는 백제(百濟)라는 말이 없다. 중국 사서들 가운데 백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서가 바로 5세기 중반 남북조 시대 『송서(宋書)』인데 여기서 말하는 송나라(420~478)는 사마씨의 동진(東晋)을 이은 한족의 왕조이다. 그리고 이 『송서(宋書)』를 포함하여 『남제서(南齊書)』『위서(魏書)』등에는 백제가 등장한다. 따라서 적어도 AD 5세기 중엽까지도 백제보다는 부여로 인식했다는 말이거나 아니면 백제가 현실적으로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미한 소국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6세기에 이르러 백제는 다시 남부여(538 : 성왕 16년)로 바뀐다. 실제로 백제라는 말이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1백년도 채 안된다는 말이다. 이 시기는 이미 역사학이나 사관의 기록 체제가 매우 발달해 있는 상태인데도 우리가 알기로 B.C. 18년에 건국하여 무려 3~4백년 건재한 나라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따라서 백제를 건국했다는 말보다는 부여의 분국이 끊임없이 만들어져서 원래의 부여가 멸망하더라도 그 부여의 불씨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동부여(285)의 경우도 모용선비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서 두만강 쪽으로 피난하여 수립된 일종의 임시정부였지만 이를 두고 동부여(東扶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많은 사서들에도 동부여를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는 부여의 동부 지역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이 점은 쓰다고키치(津田左右吉), 히로시(池地宏) 등에 의해 충분히 논증되었고 역사학계에서는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그래서 동부여라는 말은 중요 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보다는 남부여 또는 반도부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그리고 반도부여(남부여)의 시조에 대해서도 울구태라고 새롭게 볼 필요도 없고 그저 동명(東明)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국사기』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한 가지는 백제의 왕들이 하나같이 시조이신 동명왕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부여의 시조와 백제의 시조가 같다는 말이고 다만 그 중시조(中始祖)는 울구태(蔚仇台)이며 반도에 일찍 남하했던 무리들이 온조와 비류라는 것인이다. 후일 이들이 요동과 만주지역의 부여세력과 연합하여 부여계의 국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 우리가 아는 대국 백제의 실체이다. 이것을 확인하게 하는 기록이 『삼국사기』(제사편)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이르기를 백제는 매년 사중월(四仲月: 2, 5, 8, 11)에 왕이 하늘과 5제(五帝)의 신을 제사한다. 그 시조 구태(仇台 : 또는 우태)의 묘(廟)를 나라의 도성(都城)에 세우고 4계절로 제사한다고 하였다[생각건대 『해동고기(海東古記)』에는 시조 동명(왕)이라 하고, 혹은 시조 우태(優台 또는 우이)라 하였으며, 『북사(北史)』 및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왕)의 후손으로 구이(仇台)라는 이가 있어 나라를 대방(帶方)에 세웠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시조를 구태(仇台 또는 구이)라 하였다.](『三國史記』雜志 祭祀)”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다른 것은 혼동스럽지만 백제의 시조가 동명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백제는 부여와 다르지 않은 나라라는 것이다(이 점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고구려도 고씨 부여라고해도 될 것이다). 그러면서 동명왕에 대한 제사와 부여왕 울구태(구태 또는 우태)에 대한 제사는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잡지 제사조에 보면, 백제의 경우 대개 동명제를 왕의 즉위시 처음으로 맞는 새해 정월에 지내는데 이것은 태양신(조국신 :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의미하는데 반하여, 실질적인 시조인 구태제는 1년에 네 번을 지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동명은 특정인물이 아니라 범한국인(범쥬신, 범코리안)들 공통의 신( 조상신)을 의미하는데 반하여 울구태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시조신으로서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강현모 『한국설화의 전승양상과 소설적 변용』 (연락 : 2004) 20-22쪽 내용 참고). 이것은 동명왕이 범한국인들의 시조의 표상인 반면, 부여왕 울구태(우태)는 실질적으로 나라를 세운 분이기 때문에 반도부여(남부여 : 백제) 왕들의 직계 조상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백제의 성장은 한강유역에 일찍 터전을 잡았던 온조나 비류 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요동의 위기가 격화되는 3세기 중반부터 요동과 만주 지역에 있던 부여 세력들이 대거 남하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는 AD 2~3세기 이후에는 거의 만성적인 국가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부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친한족 정책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동 지방(남부여), 태백산지역(장백산 : 동부여), 반도 남부(반도부여), 일본 열도(열도부여) 등으로 끊임없이 근거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쉽게 말해서 부여의 분국(分國)이 요동에서 일본열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요동부여를 바탕으로 반도부여(백제)를 건설했겠고, 반도부여(백제)를 근거로 하여 열도부여(야마도 : 일본)를 건설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부여는 AD 3세기 초 중엽에 극심한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여 그 주요 세력들이 남하하여 반도부여(대국 백제)의 기초를 세우고 다시 4세기 중엽 근초고왕 시기에는 만주에서 백제의 활동이 사라지면서(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102쪽), 한반도에서 왕성한 정복활동을 전개되고 있다(전라도, 낙동강, 황해도).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시기에 백제의 근초고왕에 대한 기록은 20여 년간 사라지는데 이 시기(349~363)에 일본에서는 활발한 정복사업이 시작되고 있다(상세한 내용은 『대쥬신을 찾아서』2권 참고). 백제 관련 연구자들은 “AD 4세기 중반 이후에는 만주지역에서 존재하던 백제의 활동이 사라져버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부여 세력이 대거 한반도로 이전해왔기 때문에 한반도와 일본에서 부여계의 활동이 활발한 것 뿐이다. 더욱 주목할만한 일은 이 시기(4세기)를 즈음하여 7세기 초까지의 일본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의 고분(古墳)들이 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근초고왕 이후 백제 왕비족이 진씨(眞氏)가 되고 전문가들은 이 진씨(眞氏)가 일본의 황족(皇族)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백제 전문가인 이도학 교수에 따르면, 백제의 왕실 교체가 근초고왕(재위 : 346~375) 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기는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부여왕 현(玄)이 잡히고 부락민 5만 여구를 볼모로 데리고 돌아간 시기(『資治通鑑』 卷97 東晋 永和 2年)와 일치한다. 즉 북만주 지역의 부여는 거의 붕괴직전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여의 주세력이 또 한번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무덤양식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서울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즉 4세기 후반에 만주지역의 무덤양식이 갑자기 출현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닮은 언어가 한국어와 일본어인데 일본어는 퉁구스(Syberia) 제어에 가깝고 부여계의 제어들도 퉁구스계에 가깝다고 한다(이기문 『국어사 개설』35쪽 참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요동 만주 지역의 정치적인 격변으로 부여계의 1차 이동(온조 비류) - 2차 이동(부여왕 울구태 계열) - 3차 이동(근초고왕 계열) 등이 있었고 2차 이동은 대국 백제의 탄생을 가져왔으며 3차 이동은 열도부여(일본)의 성립을 가져왔다는 말이다. 분명한 것은 요동 만주의 부여계의 몰락과 한반도 일본의 부여계의 성장과 발전은 뚜렷한 함수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요동 만주 지역의 부여계의 몰락은 한반도 일본의 부여계의 급성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므로 드라마 주몽에 나타난 우태는 부여왕 울구태로 이 분은 부여계의 중시조로 부여계의 2차 이동(남하)를 주도한 세력이며 이것은 대국 백제의 탄생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드라마 ‘주몽’은 이 부여왕 울구태를 일개 상단의 행수로 격하시키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참고 : 졸저 『대쥬신을 찾아서』(해냄 : 2006) 제 2 권 16. 백제는 없었다. 17.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 네 가지 이유 관련 사이트 www.ebiz114.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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