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수류화개실

차보살 다림화 2007. 9. 7. 12:49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

 

2007년 여름 지리산 화엄사 차명상 수련대회에서

 

수련생들이 다선일미를 체험한 후
정성들여 준비한 차와 꽃 한송이씩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다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

                                                                           조 윤 수

  
  으음! 시든 잎이  한 모금의 물을 만났을 때 이렇지 않을까?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면, 찻 자리만이라도 정갈하게 치우고 홀로 차를 우린다.  최소한의 다기라도 만지작거리며 찻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차가 우러나기를 잠시 무심(無心)으로 기다렸다가 한 모금 입안에 머금으면, 가슴 속 깊은 곳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 순간 그 맛을 무엇으로 가늠할 것인가. 입안으로 녹아드는 향 맑은 기운이여!   빛깔과 향과 맛이 어우러진 이 절묘한 맛!  선인의 말을 빌어볼까. "이것은 감로입니다."  삼십여 년 마셔 오지만, 늘 처음 마시는 듯한 그 오묘한 맛을 무어라 말할 수가 없음이다. "차는 푸른 비취빛이 으뜸인데 찻물 빛깔이 람백(藍白)이면 좋고, 눈빛이 위요, 비취빛 물빛이 중간이며, 누른 물빛이 아래이다. 차를 오묘하고 공교(工巧)히 달여, 옥 같은 차 얼음 같은 물빛, 잔에 담기는 절묘한  기예(技藝)여!" "맛이 달고 보드라우면 위이고, 쓰고 떫으면 아래이다." 차는 자연의 진향(眞香)이 있어, 이물질이 들어가면 그 진성(眞性)을 잃는다는 것. 이런 표현들은 녹차(잎차)일 때 해당하는 말이다. 발효차일 것 같으면 또 다른 빛깔과 맛과 감흥이 나올 것이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차를 마셔보니, 잎차라도 그 빛깔과 맛이 다 다르다. 차를 만든 시기에 따라서 만든 사람의 성정 따라서 혹은 차 우리는 기예에 의해서 그 빛깔과 맛과 향이 다 다르다. 그래도 역시나 그 맛은 고유한 차 맛이다. 첫 잔과 다음 차의 색향미가 다르다. 위의 표현대로라면 내 경험상으로는 올 봄 차로 할 것 같으면 4월 27일이나 29일 만든 녹차, 새 순(일창 이기)으로만 딴 잎이 그 맛과 색깔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감히.
  제대로 된 차라면 선인이 그랬듯이, 첫 잔은 향으로 마시고 두 번째 잔은 맛으로 마시고 셋 이후는 약으로 마신다 했다. 첫 잔의 마지막 한 방울은 애첩도 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좀 거품이 든 표현이라 하겠지만, 좋은 차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더욱 귀한 한 방울이었을 것이다. 다관에 우려진 첫 잔의 마지막 한 방울이 잘 우려진 한 모금이 될 수도 있기에 그런 표현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한 젊은 청년이 법정스님을 찾아 와서 불쑥 '수류화개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스님도 불쑥, 네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라고 일러 주었다. 법정스님께서 오래 전에 조계산에 삼칸집을 짓고 거처 이름으로 지은 '수류화개실'은 중국 송대의 시인이며 화가인 황산곡의 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만리청천(萬里靑天)    구만리 푸른 하늘에
  운기우래(雲起雨來)    구름 일고 비내리네
  공산무인(空山無人)    빈 산에 사람 끊이니
  수류화개(水流花開)    물이 흐르고 꽃이 피더라.

  몇 자 안 되는 황산곡의 글귀에는 푸른 하늘과 구름과 비, 산과 사람과 물과 꽃이 들어있다. 갈봄여름 없이 꽃이 피는 자연의 신비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꽃이 될 수 있겠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성품을 갈고 닦아 좋은 특성으로 기르고 그것이 잠재력으로 응집되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생의 정점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 그만이 지닌 빛깔과 향기와 모양이 주위를 환하게 비출 것이다. 그의 특성대로 피어나야지 서양무궁화나 부용화가 우리 무궁화를 닮으려 하거나 살구꽃이나 벚꽃이 매화를 닮으려 한다면 부용화나 살구꽃에게는 비극일 뿐 아니라 둘레의 불행이 될 것이다. '수류화개실'은 지정된 어느 한 곳을 말함이 아니다. 사람은 마땅히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 그 속뜰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 하셨다. 강물처럼 어디에고 갇히지 않고 영원히 흐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토마스 머톤의 말대로 법정스님은 혼자 있을 때 가장 넉넉하고 충만하다고 했다. "깊은 산사의 조그만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다기를 매만지고 있으면 참으로 넉넉하고 충만한 내 속뜰이 열린다. 이 속뜰에서 나는 세상의 소리를 듣고 인간사를 바라보면서 내 자신을 들여다 본다."
  그런 법정스님의 혼자 사는 그 내용을 참으로 이해할 것 같은 요즈음이다. 내가 갑자기 혼자가 되어서 느끼는 심정은 결코 아니다. 젊을 때부터, 아니, 어렸을 때부터 혼자 하는 훈련을 해 왔고, 어른이 되어서도 꾸준히 홀로 깨어 있는 훈련을 하기 때문일까. 여전히 홀로 있어 좋고 또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좋다. 하지만 참으로 같이 있으면서 같은 마음으로 하나인 듯 할 수 있기는 힘들다. 같이 해서 좋았던 일들도 각기 제 마음의 세상이 다르기 때문에 그 순간 같은 장소에 있었다 해도 정말 같은 마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의 마음을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생각과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면 그 마음결을 느끼게 되어 부담이 되는 수도 많다. 그런 수많은 만남이 모두 한 마음으로 되어 가는 과정임을 또한 알기 때문에 만나야 하고 기꺼이 같이 해야 하는 일과 상황이 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 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결코 아닌 것 같다.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혼자 있는 시간을 우주와 합일하여 전체의 정신을 받아들이는 충전의 시간이 되도록 하면 최상의 행복한 시간이 되리라. 변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새로운 벗과 함께라면 더욱 그렇다. 나에게도 차는 그래서 고맙고 정답고 향기로운 삶의 벗이다.

  혼자 있다 해도 진정으로 홀로 있기는 쉽지 않으며 같이 있다 해도 진정으로 같이 있기는 쉽지 않다. 누구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전체인 내가 아닌 부분적인 나로 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의 한계를 상대로 인하여 더욱 느낀다.  물론 사람의 유형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같이 있어도 하나로 있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얘기 하나가 떠오른다. 나이 어려도 나에게 차 스승이신 분이 있다. 그 당시 법력 높으신 어느 문중의 큰스님이 계셨는데, 불법공부나 보살행보다 그 스님만 찾아다니는 신도들 일군이 있었다. 그들은 그 스님만을 우상처럼 받들어 다른 스님께는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있어, 내 차 스님은 참 이상하다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스님께서 차 유적지 탐방하던 날 돌아오던 길에 한 번 그 큰스님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다. 돌아오신 그분께 내가 들은 이야기 인 즉 몇몇 보살들이 그 큰스님의 이름에 누가 되게 하는구나 하셨다. 같이 차 한 잔 나누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이야기도 없이 그 큰스님과 같은 침묵의 공간을 나누었는데 둘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넉넉한 시간이 될 수 있었다고 흐믓해 하셨다. 참으로 같은 명상 속에 들 수 있었다는 말만 들어도 감동이 되었었다.
  이제사 나도 홀로 마시는 차를 신(神)이라 한 까닭이 깊이 와 닿는다. 역시 초의선사의 다신전(茶神傳)의 음차(飮茶) 조를 빌려 본다,
  음차이객소위귀(飮茶以客少爲貴)  차 마실 때 손이 적어야 귀하다.
  객중즉훤(客衆則喧)  손이 많으면 시끄럽고,   
  독철왈신(獨 曰神)  홀로 마시면 신령스럽고,
  이객왈승(二客曰勝)  두 손이면 으뜸이며,
  삼사왈취(三四曰趣)  서넛이면 멋스럽고,
  오륙왈범(五六曰泛)  대 여섯이면 들뜨며,
  칠팔왈시(七八曰施)  일곱 여덟이면 베풂이라 한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내가 차를 마실 때이거나 아니라도, 그 자리가 곧 바로 수류화개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나 자체가 수류화개실이어야 하겠지. (2007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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