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와 글 모음

2005년 가을

차보살 다림화 2007. 12. 26. 00:52

가을에는
                                               

 

                                                                               조윤수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자주 만나지 않아도 같은 하늘 아래서 호흡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흡족합니다.
 가을이면 언제나 지난날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풀벌레들이 생의 축제를 벌렸던 들녘이 보드라운 가을 햇살로 풍요롭게 익고 있습니다. 가지런히 고개 숙인 노란 벼이삭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가을의 전설을 부르는 억새풀의 연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챌 듯한 작은 들꽃들의 속삭임. 뭉게구름 흩어지는 사이로 비치는 하늘빛이 그윽합니다.

 지난 주말에는 부산에서 조카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경기도에 살고 있는 동생과 큰언니가 전주로 와서 함께 부산까지 내려갔습니다. 경상남도가 고향인 자매들이 집안 행사가 있으면 우리는 전국을 일주하는 여행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마침 제부가 운전을 해주어서 우리들은 편안한 가을 마지 유람을 하게되었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자매들과의 여행은 어릴 때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어요. 큰언니가 들려주는 부모님에 대한 추억은 낯선 옛 이야기 같았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낙동강 하류에서부터 저희의 탯자리인 진주 남강으로 해서 깊어 가는 가을 산과 섬진강 물길 따라 올라 왔습니다. 2박 3일이 짧았습니다. 산골 깊은 곳, 작은 마을을 지나고, 강가에서 들길에서 쉴 때 함께 했던 날들이 영상처럼 스쳤습니다. 코스모스 투명한 꽃길을 지날 때는 지평선에 노을지던 꽃길을 생각했습니다. 하얀 메밀꽃들이 찰랑댈 때는 그 달밤의 메밀밭에서 걷기 명상에 잠기던 일행이 그림처럼 떠올랐습니다.
 이제 막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산이 올 따라 유난히 가슴 뻐근하게 합니다. 산은 그토록 익어 가는데 즐거움만은 아닌 쑥부쟁이 같은 꽃물이 가슴 밑바닥을 적시는 것 같았어요..

  여행이 그렇고, 산에 오르는 것도 그래요. 혼자 오르지 못하는 산도 여럿이 함께 오른다면 기꺼이 오를 수도 있었습니다. 히말라야 등반 대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원들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도록 서로 돌보아 가는 것이라고 했지요. 험난한 여정 중 자신을 극복하고 목표를 향한 도전 정신도 물론 중요합니다.
 인생 여정도 그와 같다고 하는 우리입니다만…. 같은 기차를 타야 할 처지라면 혼자 빨리 간다고 달려도 혼자는 여정 동안 즐거움도 누릴 수 없겠지요. 결국 다음 사람을 또는 일행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선은 불편한 것 같지만 '어깨를 끼고 달리면 편하다' 는 것을 터득하라 했습니다. 정말 함께 해야 할 처지라면 차를 탄대도 같이 탈 것이고 차를 놓쳐도 같이 놓칠 거니까요. 그러니 어깨를 맞대고 달리려면 홀가분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는 동안 사랑의 방법을 익히게 될 테니까요.
 니체가 그랬다던가요? 피치 못할 일이라면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인생을 충실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라구요. 삶의 산을 오르는 동안, 혹은 여행을 하는 동안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보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상황를 더 많이 만났던 것 같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장면이 더 많았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동반자들이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할 수 있는 유쾌한 마음을 지닐 수 있었다면 좋은 여행이 되었을 것입니다.
 삶이 만남이며 만남의 연속이라면, 일상에서 만나는 내 일용품부터 시작하여 내 시선이 머무는 모든 인연들이 내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또 다른 모습이겠지요. 그 중에서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힘든 것은 왜 그럴까요. 길 가다가 풀잎에게 물어봅니다. 풀꽃을 보려면 풀꽃의 높이에서 보아야 하지 않겠어요? 무량사의 부처님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대답을 들으려니 절을 해야 하더라구요. 탑의 대답을 들으려니 탑돌이를 해봐야 되겠더라구요. 나무에게 대답을 구하려니 나무 밑에 앉아봐야 하구요. 골짜기로 흐르는 물에게도 물어보니 물길이 흐르는 쪽을 봐야 했습니다.

 생명을 길러내는 태양이 정말 은혜롭습니다. 고대인들이 태양신을 숭배하며 종교 의식으로 승화하였다는 것은 참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구의 움직임에 따라 우리는 일몰과 일출의 경관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경탄합니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장면에 우리는 웃고 울곤 합니다. 아무리 나쁜 상황이라도 먹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눈앞의 나쁜 상황들도 기꺼이 넘어갈 수 있겠지요. 우리들이 상황의 조건에 따라 자신의 기분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섯부른 행동을 해버린다면 거듭 혼란만 계속될 것입니다.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본래 성품인 한없는 마음의 세계를 믿습니다. 좀 더 일찍 그 믿음이 있었다면 생을 더 살릴 수 있었을텐데요.  여생(餘生)이 아니라 새 출발의 지평을 넓혀 가도록 그 본성이 발현되는 삶이고 싶습니다.

 이제야 뭔가 알 것 같아요. 무량사 사천왕문 안으로 보이는 풍경이 한 장의 그림입니다. 한 폭의 그림에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의 위치가 절묘한 데서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그림의 일부처럼, 풍경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하나의 돌처럼,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 풍경 속으로 여러 님들이 보입니다.  벌써 서로의 인생에 의미가 된 우리들이 그래서 소중합니다.
 우리는 지금 수 없는 가을 중에 어떤 가을을 지나가고 있을까요. 짧은 가을을 결코 아쉬워 할 수만은 없습니다. 가을의 전설이 쌓이면 영원한 가을을 그려 볼 수도 있습니다. 논두렁에 앉아 청명한 가을 햇살을 끌어 모아 보려고 하늘을 우르러 봅니다. 쏟아져 내리는 빛살에 벼이삭처럼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한 포기의 벼이삭이 되어 이 가을은 참회와 감사함으로 보내야겠습니다.
 (2005.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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