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와 글 모음

창작수필

차보살 다림화 2008. 3. 1. 22:54

조윤수 수필집 1권

5부

1. 오월의 향기
2. 리라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3. 날 잊지 말아요 (개망초)
4  연꽃이 피고 지듯이
5. 견공들에게 복날은 복날인가
6. 빨래터
7. 노아의 방주
8. 영원한 올챙이
9. 소돔과 고모라
10. 빨리빨리즘
11. 별은 빛나건만

 

 

 

 

 

 

 

 

 

 

 

 


수수꽃다리
 - 오월의 향기 -
                                               조윤수

  5월이 수수꽃다리(라일락) 향기로 오고 있다. 비 온 뒤, 햇잎으로 수놓아진 저 산 빛 석간수로 우려내면 은은한 햇차 향기 감돌아 입안에 단 침이 고이는 것 같다. 나무들이 모두 싹틔우기를 기다리던 감나무도 수수꽃다리 향기 때문에 잎을 피우지 않을 수 없나보다. 녹색 짙어지는 나무들 사이 마른 가지 끝에 달리는 어린 감잎이 유난히 눈부시게 반짝인다.
 
  향긋한 5월의 선물. 수수꽃다리 꽃가지에서 퍼지는 향이 차안을 가득 메운다. 이렇게 향기가 코끝으로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 감미로운 즐거움을 준다는 것은 봄날이 무르익어야 알 수 있다. 수수꽃다리 향기의 밀어가 코끝에서 얼굴을 간지럽히고 온 몸에 그윽하게 감겨든다. 오월을 애모하는 정에 복받쳐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톡 터질 것 같이 가슴에 고이는 연보라 빛 물감, 이 물감을 캔버스에 풀어놓을 수 있을까? 자신의 지닌 멋과 맛을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데 나무 꽃을 따를 자가 어디에 있을까. 꽃은 자태로 뽐내기도 하고 훤칠한 키와 무성한 가지나 잎 모양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첫 사랑의 맛, 수수꽃다리는 수수를 따먹듯이 먹고 싶을 만큼 달콤하고 은은하다. 잎이 하트 모양으로 피어나니 꽃향기에 젖은 잎을 따서 사랑하는 사람들 가슴에 오월의 상징으로 꽂아주고 싶다. 수수꽃다리는 아름다운 몸매도 아니고 예쁜 얼굴도 아니다. 앞다투어 피고 지는 봄꽃들이 떠난 자리에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향으로 우리 옆에 가만히 다가온다. 결코 유혹의 낯빛을 내보이지 않고 기품 있는 향기로 다가온다. 가지 끝에 수십 송이 작은 꽃송이들이 옹기종기 뭉치로 모여서 연보랏빛 향을 모은다. 서로 다독이면서 사랑의 향기를 내뿜는다.
 
  손짓하는 여대생들을 승용차 뒤에 태우고 야산 길을 내려온다. 뒤로 고개를 돌려 참새들 마냥 재잘대는 그 처녀애들의 얼굴을 보며,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혼자서 입안으로 우물거리며 "아, 꽃 같은 나이로다."하니, 그 아이들도 "아직도 꽃 같으신데요?"라고 화답해주었다. 아름다운 청춘처럼 싱그러운 햇잎들. 무언가 뜨거운 것이 가슴으로 밀려온다. 젖은 눈 빛 안으로 들어오는 오월의 언덕은 화선지에 번져나가는 물기 섞인 봄 빛 수채화 물감 같다. 눈시울이 적셔진 것은 돌아오지 않을 청춘이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과 오월이 오고 있는 언덕길을 대비하면서 신록의 경이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해서인지도 모른다. 사무엘 울만은 그랬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오월은 딸기가 끝나는 달이요, 갖가지 채소 열매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달이다. 이제 풋 열매들은 계절의 감성을 잃었다. 그래도 여전히 모란의 달이요, 라일락 향기 퍼지는 달이다. 나에게는 미망의 청춘을 접고 결혼의 문으로 들어갔던 달이다. 많은 5월을 잃었고 깊은 산 속의 미로를 헤매기도 했다. 길 아닌 험한 가시덤불을 헤치고 지름길로 오른 산 정상에서 만났던 먼지와 다를 바 없는 '나'와 티끌 같은 세상. 마음의 청춘으로 다시 본 실상(實相)의 세상, 귀한 또 다른 '나' 와 '나'들과 그토록 향기로웠던 오월. 잃었던 옛 오월들도 한꺼번에 몰려오는 걸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다. 내 언제 나이를 세고 살았던가. 사무엘의 말처럼 "가슴속에 간직할 수 있는 것이 경이에의 애모심, 하늘의 별들 그리고 빛나는 사물과 사상에 대한 흠앙(欽仰), 앞에 가로놓은 일에 대한 불굴의 도전, 어린아이 같은 끊임없는 탐구심, 인생에 대한 환희와 흥미." 이런 것들을 잃지 않는다면 청춘이라 했다. 세월이 사람을 늙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이상을 잃을 때 늙는다고 했다.

  비 온 뒤 산천은 더더욱 싱그럽다. 개울물에 흙 묻은 손을 씻는다. 한 움큼 손바닥에 흐르는 물을 받아서 얼굴도 씻어본다. 짜릿하다. 맑은 개울물에 '방금 세수한 얼굴'이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은 아닐지라도 순간 순간 오시는 님을 맞기에 충분한 맑은 마음이면 족하지 않을까. 빛나는 5월의 밝음 속에서 수많은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님은 오시고 또 오신다. 오시는 님의 말씀을 맞을 수 있도록 수수꽃다리 같은 청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었으면….
(2003년 5월)

 

 

 

 

 

 

 

 

 

 

 

 

 

 

1
리라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조윤수

  외딴 섬에 온 듯, 나는 지금 서울의 광화문 네거리에 섰다. 황사바람이 휘몰아쳐서 자꾸만 옷깃이 벌어졌다. 어디선가 감미로운 향기가 바람결에 묻어와서 옷깃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프레스 센터 옆의 파이낸스 빌딩 앞에는 두 그루의 리라꽃 나무가 빌딩의 양쪽 꽃밭에 서있다. 여름의 잘 생긴 배롱나무처럼 하얀 꽃송이를 가득 담고 꽃동산을 이루어 연보라 빛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첫사랑의 아픔이 담겨 있는 마스카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라는 합창곡이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하여 내 마음도 향기 따라 실려간다. 나무 밑의 로드 스톤에 한 남자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나도 차를 갈아타는 것을 밀어두고 타임머신을 타는 듯 가까운 돌 의자에 앉았다.
  리라꽃 향기가 퍼질 때면 나는 첫사랑의 맛에 빠진다. 리라꽃 꽃말이‘젊은 날의 회상’이라는데, 꽃향기에 젖어 있으면 정말 젊은 날의 추억에 빠지기도 하고 삼삼한 그리움에 젖기도 한다. 리라꽃은 단순히 감미롭다기보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쳐 온 몸을 휘감는다. 품격이 높은 그윽한 향기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이 거리가 어떤 거리였던가. 40년 전, 친구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서로 헤어지는 길목이었다. 친구는 경복궁 오른 쪽 담을 타고 올라가는 삼청동으로, 나는 왼쪽 담을 타고 가는 효자동으로. 가을에 경복궁에서 국전이 열릴 때면 노랑 은행잎을 밟고 다녔던 거리.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시절 그 앞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경복궁을 가운데 두고 서로 갈라져서 다녀야 했다.
  화창한 봄,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려고 큰길로 나와 보니 경무대 입구에서 총을 멘 군인들이 광화문 네거리까지 길 양쪽에 쭉 도열해 있었다.  난 아무것도 모른 채 놀라서 광화문 큰 네거리, 지금의 교보빌딩 뒤에 사는 또 다른 친구의 집까지 걸어갔다. 버스는 다니지 않고 그 날부터 얼마간 학교에 갈 수 없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것이 5.16 군사쿠데타가 난 날 아침 풍경이었다.

  부산으로 옮겼다가 얼마 후 서울에서 다시 직장 생활하게 되었던, 내 청춘이 리라꽃 향기처럼 사라져간 거리. 서울시청 앞에 직장이 있어 근무 중에도 가끔은 창가에 서서 시청 앞의 분수대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비 오는 날이면 비안개에 젖은 덕수궁을 내려다보며 알 수 없는 상념에 젖기도 했고,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덕수궁과 돌담길을 산책하기도 했었다. 특별한 국가의 경사가 있는 날 종종 카퍼레이드가 열려 심심하지 않았던 거리였다.
  전통에서부터 현대사의 질곡을 품고 있는 그 거리는 민주화의 물결을 넘어 시청 앞의 광장에 닿아 드디어 월드컵 4강을 이루어 내는 세계화의 거리로 이어졌다. 총부리를 견주던 거리가 언제라도 시민들의 함성을 분출해내는 문화의 거리가 되기도 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무효를 주장하는 선량한 국민들이 촛불시위를 할 수 있는 자유의 거리가 되기까지, 역사의 소용돌이가 리라꽃 향기에 묻혀 바람에 날리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역사의 거리를 산출해낼 총선의 바람은 어떤 쪽으로 불게 될까. 주소는 서울 아들네 집에 두고 전주에서 생활하는 나는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하여 아들네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교차로인 서울의 한복판에서 리라꽃 향기에 젖어 있자니 한 순간에 흘러와 버린 것 같은 역사의 물결이 새로운 강줄기와  만나는 합수점(合水點)에 선 것 같았다.

  그 시절의 저녁 퇴근길, 특히 종로 거리에서 버스를 타려면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시장바닥처럼 군집을 이루었다. 버스 줄이 어찌나 길었던지 타려고 하는 버스 번호를 눈여겨보며 이리 뛰고 저리 뛰기를 몇 번을 하고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지금의 거리는 아직 이른 퇴근 시간이었지만 한산하고 빌딩 숲도 산 숲 같아 지나는 사람이 반가울 정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미굴 같은 아파트에서 살며 승용차를 이용하거나 땅굴로 다니는 일이 더 많으므로 사람들의 체취를 느끼려면 지하철을 타야한다. 다리의 품을 조금이라도 덜 팔려고 버스길을 택했다가 잘 못 알고 건너편으로 갔다 왔다 하며 리라꽃 향기에 서성이다 보니 어느덧 날은 저물었다. 서둘러 광화문 지하도로 다시 내려갔다. 옛날에 수없이 걸었던 길바닥을 발자국이라도 찾아낼 듯 문질러보며 지났다. 지하도는 재구성한다고 모습이 흉흉했다. 한적한 도시 변두리나, 거대한 도시 가운데의 빌딩 숲이나 한가롭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국의 거리를 헤매는 이방인처럼 현대의 바벨탑 사이를 배회하는 재미도 가끔은 즐겨볼 만 했다.

  첫사랑의 맛에 견주기도 한다는 리라꽃 향기. 상처일 수 있는 젊은 날의 사랑을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어떠한 상처보다도 나를 성장시킨 가장 황홀한 상처이기 때문이 아닐까. 첫사랑을 동경하는 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향한 동경이다.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은, 가장 크고 넓은 사랑, 그 하늘같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첫사랑의 본질이 아닐까.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든 여자든 청춘의 정기를 잃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 무엇과도 첫사랑의 느낌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화사한 봄날에 꽃가루를 뿌리는 듯한 혼성 합창곡. 가슴이 부풀어올라 두근거리게 하는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를 리라꽃 향기로 대신하고, 그 멜로디를 흥얼거려 본다. 리라꽃 향기에 신록은 무르익고 종달새는 우네.
(2004. 4.)

★ 리라는 영어인 라일락의 프랑스 말. 우리 말은 수수꽃다리,
   리라꽃이 운율상 어울릴 것 같아 리라라고 말하고 싶었다

 

 

 

 


2
날 잊지 말아요
(개망초)


                                        조윤수

 
  사람이 꽃이라고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그렇다면 꽃이 또한 사람이겠지요. 화려하고 탐스럽고 잘 생긴 재배 꽃들은 또한 잘나고 잘 생긴 대로의 사람이고, 이 땅에 저절로 피고 지는 들꽃 풀꽃들도 그와 못지 않게 모두 소중하고 귀한 생명입니다. 이 땅에 살다 간 조상 대대로의 영혼들이 세상에서 못 다한 한을 달래고자 들꽃으로 피고 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6월이 되면 개망초 꽃들이 아련히 사라지는 산 숲의 아카시와 밤꽃 냄새를 맡으며 몰려옵니다. 봄꽃들이 순서대로 찾아와 찬란한 쇼를 펼치고 돌아간 뒤, 산과 들이 푸르름으로 뒤덮일 때쯤, 때를 맞춰 무리 지어 피어나는 하얀 꽃무리가 안개같이 서립니다.
  진짜 비슷하나 진짜가 아닌 가짜인 것에 개자를 붙이는 것 같습니다. 한 때 흔해서 천대시한 것. 개살구, 개꿈, 개떡, 개판, 개복숭아, 또 개자로 시작되는 안스러운 야생꽃이 있습니다. 개망초꽃. 나라가 망할 때 피어서 농부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받았다는 꽃. 귀화해온 꽃이 들녘을 차지한다고 더러는 무시하기도 한 꽃. 그러나 개자가 붙여진 이름이야말로 지구의 토종인지도 모릅니다. 원초적 본질을 지닌 원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난히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일까요. 진짜도 아니지만 가짜도 아닌 것. 그것이 참모습이지 싶습니다.
  나는 개망초꽃을 망초 꽃이라고 부릅니다. '날 잊지 말아요(Forget me not)' 라는 꽃말을 지닌 물망초 꽃이 있다지만, 난 개망초 꽃을 볼 때마다 그 꽃말을 생각합니다. 판에 박은 듯한 미니 계란후라이 같은 꽃. 노란 꽃술이 도톰하고 하얀 꽃잎이 잘고 짧은, 아이들의 순진한 눈망울 같아서, 망할 망자가 아닌, 망초 꽃이라 하고 싶습니다. 기다란 꽃대에 잎이 엇갈려 나다가 윗 부분에서 꽃가지가 이리저리 뻗어서 꽃다발을 이룹니다.  두어 포기 한 손에 움켜쥐면 꼭 안개꽃 다발 같습니다. 망초 꽃 한 다발 속에 빨간 장미 한 송이 꽂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고픈 훌륭한 애정의 꽃다발이 될 겁니다.

  외출할 때 계단을 내려가면 계단 창틀 안으로 둑 밭의 순결한 망초 꽃들이 비쳐 들어 마음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밝은 나들이가 되라는 눈짓인 듯 생기를 돌게 합니다. 삼천 변을 지나는 길가에 가로수처럼 망초 꽃들이 누가 심어놓은 듯 우르르 줄지어 서서 환영하는 하양 물결을 이룹니다.

  6월의 개망초 꽃은 땅 파먹기 힘들었던 이 땅을 다녀간 수많은 조상들의 영혼일지도 모릅니다. 이제사 마음놓고 한숨을 바람에 날리며 흔들거립니다. 망초 꽃들은 한스런 민초들의 영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언제 농부를 방해했는가 하며, 봄을 시샘하지도 않고 바쁜 농사철 지나서 핍니다. 익어 가는 열매를 탐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제가 올 때를 잘 아는지 산언저리 빈 농토가 아까워 저들의 세상을 만듭니다.
  개망초 꽃들은 후덥지근한 여름의 전투장에서 쓰러져간 영혼들이기도 합니다. 젊은 혈기를 다 여위지 못한 아까운 영혼들이 우루루 모여서 시위를 합니다. 페허가 된 고지에도 지금 망초 꽃들이 피고 있을 겁니다. 삼팔선이 가로막힌 비무장지대에 망초 꽃 언덕이 유난히 많은 것은 그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시골길 가로수가 되어 행인을 반기고, 쓰지 않는 땅을 지키는 망초 꽃들. 6월이 아름다운 것은 망초꽃 언덕과 망초꽃길 때문입니다. 속절없이 사라져 간 영혼들이 토해내는 한숨이 빈 농토마다 허드레 쪼가리 땅에 서리어 안개처럼 망초꽃밭을 이룹니다. 초록빛 들녘에 달무리같이 하얀 꽃무리가 서립니다.
  놀고 있는 빈터가 쓸쓸하지 않는 것은 망초꽃들 때문입니다. 도란도란 작은 눈망울을 굴리는 망초 꽃들이 벌써 날 잊었냐고 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상들도 먼 먼 옛날 중국에서 귀화했습니다. 아니 또 그들의 먼 조상은 동이족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나를 이 땅에 귀화했다고 싫어할 것입니까. 본래 내 땅 네 땅이 어디 있었습니까.
  더운 여름날 모든 곤충과 벌레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는 망초 꽃 들녘. 어느 세월 이전 먼 조상의 정령일 수도 있으며, 다음 세상에 환생한다면, 틀림없이 인간으로 환생할 것을 믿습니다만,  또 알 수 없겠지요. 먼 먼 훗날 내 영혼이 개망초 꽃으로 후미진 빈터에 잠시 수많은 곤충들과 조우하러 올지도 모릅니다.
  태풍이 몰아칩니다. 개망초 꽃들이 들녘마다 한들한들 넌출넌출 곡예를 펼치다가 끝내 쓰러져 갈 것을 어찌 합니까.
(2006. 6)

 

 

 

 

 

 

 

 

 

 


3
연꽃이 피고 지듯이

                                                  조윤수 


  “꽃이 죽었어요!” 현수교를 지나던 아이가 외마디소리를 지른다. 아이의 손끝을 따라 나도 고개를 돌려보았다. 마지막 꽃잎 하나가 떨어질 듯한 연꽃이었다. 연꽃이 죽었다는 아이의 소리가 내 귓전을 자꾸만 맴돈다.

  검정 색과 갈색의 둥그런 돌이 연못가에 삥 박혀있다. 연못의 물은 파랗고 연못에는 물고기가 뛰놀고 있다. 돌 틈새에는 큼지막한 분홍색 꽃이 피어 있고 버드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있다. 그 때 연못 주위엔 버드나무 만 많았다는 것을 나중에 사진을 보고 알았다. 연못 둘레의 빈터에는 푸른 잔디가 군데군데 그려져 있고 주변에는 사람들이 놀고 있다. 새들인지 병아리인지 알 수 없는 날짐승도 그려져 있는 것이 아이의 그림답다고나 할까. 여자아이 셋이서 손짓하며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듯하고 그 앞에는 파마머리를 짧게 한 멋진 젊은 엄마가 카메라를 조준하고 있다. 카메라 다리가 굵고 튼튼하게 그려져 보기에도 선명하다. 간판에 '핫도그 있음'이라 적혀있는 가게 문 앞에 두 손을 들고 서있는 아이의 뒷머리는 까만 색의 동그라미다. 아마도 그림을 그린 여자아이의 오빠였으리라.
  우리 집 식탁 옆벽에 걸려 있는 ‘연못'이란 제목의 그림이다. 내 딸이 초등학교 3학 년 때  미술학원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했던 그림이다. 연못에서 놀던 기억을 떠올려 그렸지 싶다. 아이들이 성혼한 후 덕진 연못에 연꽃이 피게 되면 이 그림에서도 그리움이 핀다.

  그리움을 찾아 연못으로 가는 도중 방향을 돌려 아이들의 고향인 동네로 들어가 보았다. 덕진 초등학교 후문 주변, 주택단지가 막 들어서던 때였다. 반 양옥집이 유행이던 시절. 아이들이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냈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피아노 교습소의 간판이 붙어 있는 이층 건물이 대신 서있다. 그네가 있는 마당 주변에서 매일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소꿉놀이를 하던 집.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방과후면 친구들이 책가방을 던져놓고 고샅길을 누비면서 놀던 길은 지금 번화한 도시의 상가 뒷골목으로 바뀌었다. 마당처럼 아이들이 뛰놀던 거리는 자동차들의 주차장 같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 길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웬 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덕진 연지에 연꽃이 피면 여름 내내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놀았다. 집에서나 놀러 다닐 때도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담아놓기 위하여 나는 늘 다리를 붙여서 같이 찍을 수 있는 사진기를 들고 다녔다.

  올해는 비가 오는 날이 많아서 인지 연꽃들이 잎 아래에서 쑥 올라오지 못하는 녀석들이 많다. 나는 오늘 고귀한 꽃 한 송이를 만났다. 활짝 핀 꽃잎이 동그랗게 방패처럼 받쳐진 가운데 노란 꽃술을 달고 여린 연실이 올라온 모습이다. 여인의 성숙이 열매를 맺은 모습이라 할까. 젊고 싱싱한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의 만족스런 표정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스런 모습이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 손으로는 젖을 만지기도 하면서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만족한 표정으로 젖을 먹는 아기의 모습이 연봉오리에 떠오른다. 나는 ‘연못'을 그렸던 그 어린 아이의 성숙한 모습을 그 연꽃에서 보았다. 내가 그러했듯이 엄마가 되었을 그들도 지금은 꽃보다 아름다운 자신의 아이를 돌보느라 꽃이 눈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연못 가운데로 난 나무다리를 산책하는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품고 지나가는 풍경에 겹쳐지는 연못은 사뭇 환상적이다. 그림 속의 주인공들이 이제는 어엿한 성인들이 되어 한 여름 밤을 수놓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선남선녀들, 손자 손녀들이 연꽃바다에 어우러진다.

  막막한 어둠을 뚫고 나와 폭염과 비바람에 시달리면서도 꿋꿋이 꽃잎의 자애 속에 자란 연실이거늘…. 꽃잎과 꽃술도 여의고 우뚝 솟은 연실이 아름답지 않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덕진 연못의 푸른 잎의 물결이 유난히 바람결에 넘실대는 것은 묵은 연근이 건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연잎이 없는 연꽃을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으랴. 연근이 무성하게 뻗어나서 꽃대가 되는 인연이 생기게 되는 것은 묵은 연근에서 피어나는 잎사귀의 푸근한 품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가 내려도 이슬이 내려도 잎은 결코 물기에 젖지 않고 진주보다 영롱한 옥구슬로 간직했다가 이른 아침 꽃송이들의 영양수로 쓰일까.

  잠자리와 벌 나비도 연향 따라 연못을 떠나지 못한다. 까만 잠자리 한 마리가 어린 꽃봉오리 끝에 앉는다. 가만히 쳐다보자니 언제까지 그렇게 붙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자귀나무 잎도 어둠이 내리면 분홍색 숙고사 꽃 이불 아래 합환하는 시간. 검푸른 연못 위에 조명들이 내려앉는다. 잠자리는 연꽃과 더불어 이 밤을 지새우려나.
  연실이 영글어가는 동안 꽃잎은 어디로 가는 걸까. 돌아가리라. 떨어지는 꽃잎에도 영원한 생명의 기원이 있음을 아이도 알 날이 있겠지. 천년 된 연실에서도 싹을 틔워내는 뜻을. 동화 같은 '연못' 그림은 삶의 현장이 진흙 바닥일지라도 연꽃바다의 마음자리를 챙겨준다.   (2003년 8월 전주덕진공원에서)

 

 

 

 

 

 

 

 

 

4
견공들에게 伏날은 福날인가  

                                      조 윤 수


  여름은 여름다워야 한다. 장맛비가 내린 다음, 불볕 더위가 계속되고 찜통 더위가 절정이다. 그래야 여름답고 들녘의 곡식이 무럭무럭 자라고 여물 것이다. 밭에 나가서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풀잎의 이슬방울에 옷이 다 젖어도, 흐르는 땀이 흙과 범벅이 되어도, 그것이 해 뜨기 전 여름날을 시작하는 맛이다. 한낮 따끈따끈한 햇볕에 축 늘어진 잎사귀를 보는 것도 그 또한 여름을 이겨내는 맛이다. 도시 주변에서도 저녁 노을의 잔영이 남아 있는 해거름 때 어슬렁어슬렁 부채를 살랑거리며 마을을 산책하는 것도 여름밤을 맞는 맛이다.

  한여름은 삼복 더위가 차지하고 있다. 하지가 지나고 한 달 가량 지나면 초복이 오게 되고, 열흘 간격으로 중복과 말복이 온다. 말복 전에 희망의 메시지처럼 입추가 손짓하여 더위의 지루함을 달랠 수도 있다. 삼복 더위가 시작되면 수난을 당하는 것은 긴 혀를 빼물고 이번 여름만은 무사히 넘기려고 안간힘을 하던 견공들이었다.
 그런데, 서양에서도 삼복 더위 때를 개의 날(dog's day)이라고 부른다. 하늘의 수많은 별 중에서 가장 밝은 별이 겨울철의 남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시리우스다. 커다란 사냥개의 모습인 큰개자리의 별인 시리우스는 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에서 가장 밝은 별이다. 시리우스는 큰개자리의 가장 밝은 별로 지구로부터 8, 6광년 떨어져 있는 별이라고 했다. 이 별이 삼복 때가 되면 태양과 같이 떠오른다. 서양사람들은 삼복 때 특히 더운 것은 태양의 열기와 별 중에서 가장 밝은 시리우스의 열기가 합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이 때를 Dog's day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 때가 되면 시리우스는 한낮에 떴다가 지기 때문에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옛날에 별자리 선생이 있었는데, 나를 포함하여 우리 주변의 여러 친구들은, 그의 별자리와 인생에 대한 임상실험의 대상으로, 그의 목록에 들어 있었다. 여름 요가단식 캠핑 때면 모깃불을 피워놓고 밤하늘의 별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밤 자장가처럼 들었는데, 도저히 그 별자리 형상을 찾기가 힘들었다.
  큰개자리에 얽힌 신화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에게는 애인이 많았다. 그 중 케팔루스가 에오스에게 얻은 사냥개라고도 하는데, 이 개의 발이 얼마나 빨랐던지 그 속도에 감탄한 제우스가 이 개를 하늘에 올려 별자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전설이야 어찌 되었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삼복 더위를 참기 힘들어, 개들과 연관지었던 이야기는 한여름 밤의 더위를 식혀주는 재미도 더해준다.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여러 별자리 중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보아 개들의 운명도 인간의 운명과 같은 것일까, 아니면 먼저 하늘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의 운명까지 점치게 된 걸까. 이래저래 개들의 보시의 덕이 하늘에 닿아 더위가 없는 겨울밤을 수놓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복(伏)자는 사람 인(人) 변에 개 견(犬)자로 구성된다. 그래서 그런지 오래 전부터 복날이면 개고기를 먹는다. 원래 복날에 개고기를 먹는 습속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농경사회에서 소가 노동제공 수단으로 중시된 것처럼, 개가 영양섭취 원이 되었다는 흔적은 신석기시대의 유물에 개 뼈가 있어서 그게 바로 개고기를 식용한 증거라고 하기도 하고, 우리나라는 고구려 벽화에서 개 잡는 장면을 내세우기도 한다. 옛날에 먹을 것이 많지 않았던 시절엔 집에서 기른 개는 사람이 먹는 것을 같이 먹고살았다. 가장 사람의 입맛에 맞고 소화가 잘 되는 게 개고기다. 한 울 안에서 같이 살다가 한 몸이 되었으니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체감이 아닐까. 거의 사료를 먹이고 키운다는 요즈음의 개고기도 육 고기 중에서는 가장 소화가 잘 되어 이때 찾게되는 것을 보면 몸에 밴 개의 맛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만을 걱정하는 때에 살면서도 보신탕이 삼복의 음식 중 가장 인기 있는 전통적 상품으로 군림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현대와 같은 웰빙 시대에 맞는 복달임은 다른 데서 개성적인 균형을 찾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개들의 보시에 인간들도 화답을 해야하지 않을까. 옛날과 달리 오늘날은 아예 복달임을 위해서 처음부터 특수 사료로 길러지는 견공들이니 그들의 운명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앞으로도 인간들에게 맞는 보양식이 될지도 알 수는 없다. 어차피 더운 여름을 견디는 것이 개들에게도 가장 힘든 일일 바에야 애초부터 인간에게 몸을 보시하는 운명으로 태어난 것을 복으로 알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당개들은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이 다행이란 깨달음을 동양의 도(道) 정신에서 배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겨울밤의 시리우스는 삼복의 고통으로 시달렸던 개들의 고향일까? 살아 남은 개들은 한여름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릴없이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하고 흥얼거리고 있지나 않을지….
(2004. 8월을 열며)

 

 

 

 

 

 

 

 

 


5
빨래터                                

                                       조윤수

  초여름 경쾌한 날씨였으리라. 산기슭, 흐르는 물가의 바위에는 이미 빨아놓은 빨래가 햇볕에 마르고 있다.  널따란 바위 위에는 두 여인네가 무릎 위까지 치마를 걷어올린 채 쪼그리고 앉아 방망이를 두드리며 빨래를 하고 있다. 한 여인은 치마 자락을 허리춤에 걷어올리고, 속곳을 무릎까지 걷어올린 채 물 속에 서서 흐르는 물에 흔든 빨래를 비틀어 짜면서 건져 올리고 있다. 맞은편 평상 같은 바위 위에서는 또 한 여인이 앞으로 늘어트린 긴 머리채를 땋고 있다. 그녀의 가슴으로 젖을 더듬고 있는 어린아이가 보인다. 그리고 빨래터 뒤편 큰 바위 너머에서 갓을 쓴 남정네가 엉큼하게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분위기의 빨래터인가. 너무도 유명한 풍속화인 단원 김홍도의 '빨래터'이다. 40여 년 전만 해도 전주천변에서는 그런 빨래터 풍경이 있었다. 그래서 전주 10경 중에 하나가 전주천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이었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임에도 화가의 눈에는 그 풍경이 그림이었던 것이다.

  아파트 생활에서는 수돗물과 전기가 끊어지면 모든 생활이 정지되는 것 같다.
벌써 이틀째 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 우리동네와 이웃 동네의 수도관 교체 공사를 한다는 것이다. 한 달이나 공사가 진행된다니, 물통이 될만한 그릇에 미리 받아놓은 물로 아쉬운 대로 최소한의 식생활은 해야 한다. 웬 지 몸이 굳어지는 것 같이 느껴져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럴 때는 빨래와 화장실이 제일 문제가 된다.
  평소에도 물에 대한 인식은 철저한 편이어서 세탁기의 마지막 헹군 물은 받아서 허드레 물로 한 번 더 쓰고 버리기도 한다. 개수대에서도 생각해서 샤워기를 절제하여 쓰고 있다. 그런데도 받아놓은 물을 바가지로 떠서 조심스럽게 쓰자니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동안 물을 얼마나 헤프게도 써 왔는지 다시 생각된다. 단수가 되니 남편과 아들도 맑은 물을 버리지 않고 있다. 평소의 내 잔소리가 이럴 때 이해되는 것이리라.

  오늘 같이 물 소동을 겪어야 하는 날이면 옛 풍속화 그림들이 생각난다. 흐르는 물을 보면 나는 언제나 그렇게 빨래가 하고 싶었다. 옛날 한벽루 밑 전주천의 빨래터가 그립다. 언니를 따라 전주천의 빨래터에 갔었던 적이 있었다. 개울가에는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빨래를 삶아주는 곳도 있었다. 그림처럼 그 때까지만 해도 가까운 물가에는 늘 빨래터가 있었다. 혜원 신윤복의 '물놀이의 여인들' 또한 우리의 세시풍속을 잘 나타낸 그림이 아닌가. 역시 초여름의 으슥한 계곡에서 트레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여인과 속곳을 보이며 그네를 뛰는 여인을 그린 그림이다. 계곡 위에 있음직한 사찰의 땡초 스님들이 여인네들의 물놀이를 구경하러 내려왔으리라. 멀리서 바위 뒤에 얼굴을 살짝 내밀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쳐다보았을 것 같은 모습이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림이었다. 20년 전만 해도 덕진의 연못 주위 다리 밑에서는 단오절이 되면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 여인네들의 물놀이 풍경이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 시골집에서 살았던 추억이 거의 없는 나는 아이들과 고향의 그림을 그리며 살아온 셈이다. 차(茶) 일을 하게 된 연유로 물에 대한 인식은 각별한 셈이다. 좋은 차 맛을 내기 위해서 물의 질은 매우 중요하다. 옛날 중국의 다경에는 물의 등급을 메겨서 1등급에서 20등급까지 나열하기도 하였다. 생수가 일반화되기 이전에 나는 전주 좁은목 약수터에서 물을 자주 떠왔다. 천주교 성지인 치명자 산을 배경으로 하는 수원지가 있어 경치 또한 좋았고 놀이터로서도 훌륭했었다. 그 시절 수원지 근처에도 빨래터가 있었다. 도시락을 챙겨서 아이들과 빨래 소풍을 가끔 갔었다. 이불보 등을 흐르는 물에 흔들어서 빠는 기분은 즐거운 놀이 같아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양지 바른 바위 위에 빨래를 널어놓고 아이들과 물가에서 노는 동안 산뜻하게 말라버리는 것이다.
  어느 해 초여름이었다. 내 여동생이 조카 둘을 데리고 전주에 놀러 왔었다. 우리는 또 빨래 감을 챙겨서 송광사 넘어 위봉사까지 소풍을 간 적도 있었다. 물론 집에는 수돗물이 잘 나오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한데로 개울에는 물이 없었다. 폭포수가 내려가는 정상에 갔을 때야 '앗차' 했다. 그 때만 해도 절기와 농사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을 때였다. 가뭄이 계속되는 것을 잊고 날씨 좋은 것만 생각했다. 모든 물줄기가 논으로 대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 말려서 가야 하는데 낭패였다.
  새로 불사를 하기 전의 위봉사는 고색이 창연한 옛 정취가 서려 있었다. 천년의 이끼가 낀 정원의 숲에는 나무마다 스님이 직접 지어 쓴 시 한 수씩 걸어두어 산책로의 운취를 더하여 주었다. 아이들은 '마음 다스리는 글' 앞에 서서 기도하며 일요일의 '미사'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절 뒤편에 낮은 우물을 발견했다. 물을 퍼서 겨우 빨래는 할 수 있었다. 해는 저물어가고 길은 멀어서 내려가야 했다. 우리들은 모두 빨래를 팔에 걸고, 머리에 쓰고, 들고, 말리면서 산을 내려왔다. 집에서 편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신나는 추억의 소풍을 만들었던 셈이었다. 물 걱정과 환경오염이 심각하지 않았던 때였다.
  도시의 유황불에 데여 피해간 명덕리 시절. 고향집에 돌아온 듯 마당 뒤란에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넓은 자갈을 깔아놓은 터가 있어 겨울을 빼고는 살림하기가 참 좋았다. 시골의 정취를 충분히 느끼며 텃밭도 가꾸며 살 수 있었다. 샘이 깊지 않아 세탁기가 소용이 없었다. 집 가까이 동네의 빨래터가 있어 옛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 연상을 하면서 하늘과 빨래를 함께 함지박에 가득 담고 머리에 이고 다녔었다.
  수돗물이 나올 때까지 한시적이기에 기다리는 불편까지 마다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여름철도 아닌데, 어차피 세탁기 빨래는 모아서 해야 물도 절약된다. 수돗물이 나오기 이전에는 비가 오면 빗물을 받기 위하여 넓은 물통을 처마 밑에 받쳐두던 때가 엊그제 같기만 하다. 아직도 시골 마을 동네에는 빨래터가 있지만, 거의 쓰지 않고 집집마다 편리하게 수돗물을 쓰기도 하고 자연수를 수도시설로 연결하여 쓰고 있는 요즈음이다.
  인구가 불어나고 산업화가 되면서 물 씀씀이가 많아졌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도 물 부족 국가가 되기에 이르렀다. 옛 여인들이 맑은 하늘 아래 계곡의 흐르는 물가에서 빨래를 하며 생활정보도 나누고 풍류를 즐겼던 물놀이의 장소가 현대에는 시설이 잘 된 도시 안의 찜질방이나 인조 온천 방이 대치하고 있다. 사시사철 냉온수를 마음대로 조정하여 쓸 수 있는 편리와 여유가 어떤 희생 위에 얻어진 것인지 생각해 볼일이다.  (2002년 9월)

 

 

 

6
노아의 방주

                                            조윤수

  빗물이 방울져 맺혀 있는 창가. 아기 손바닥 같은 빨간 카드륨 꽃이 안개 젖은 산을 내다보고 있다. 연 4일 집중호우가 계속되고 있다. 계곡과 바다에 몰려 있는 피서객들은 하늘의 게릴라 작전에 포위되고 말았다. 도시에서 땀 뻘뻘 흘리다가 잠시 휴식을 찾아든 피서객들을 혼란의 도가니에 몰아버리는 뜻은 무얼까. 올해는 호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려나 했다. 애써 가꾸어 오던 농작물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며 넋 놓아야하는 농심은 어디서 위로 받아야 할까. 곳곳에서 비 피해의 수치가 올라가고 있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利器)들은 자연의 호령에는 속수무책이다.

  비 오는 날이면 비안개 속의 덕수궁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가곤 했다. 근무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 창공을 자유로이 나는 꿈을 꾸는 새장 속의 새처럼. 비 오는 날 오후 세시, umbrella(우산)란 별명을 가진 청년이 생각난다. 그의 umbrella는 늘 비를 몰고 다니는 것 같았다. 우리들 사이에 그는 umbrella라 불리었다. 그는 지금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정신과병원의 의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고, 혹은 지금까지도 마음의 행로, 어떤 길목에서 그의 우산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을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기다란 우산을 꼭 들고 있어야 하는 그는 영락없이 우산이었다.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홍수의 피해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유리창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추억의 감상에 젖어 있기에는 뭇 생명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너무나 치열할 것 같다.  지구의 여러 곳에서 홍수에 잠기는 동안 적도 부근의 나라는 가뭄에 타고 있다 한다. 어떻게 저 홍수를 저장하였다가 필요할 때마다 쓸 수 있단 말인가. 떠내려보낼 것은 인간의 오만인지도 모른다. 흙탕물이 노도와 같이 농경지를 삼킨다. 도시의 거리가 물에 잠긴다. 자연이 어찌 전쟁을 해야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은 인간에게 해마다, 있는 힘과 마음과 지혜를 다하여 자연을 지켜달라고 우르릉대고 있지 않은가.
  그 옛날, 흠이 없고 완전한 사람으로 하느님이 어여삐 여겼던 노아는 하느님의 예언을 믿고 튼튼한 방주를 만들어서 대홍수에 대비했었다. 문명과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어찌 미리 대비하는 정보에는 그렇게 어두울 수가 있을까.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기 바빠서 하늘을 볼 수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지식인들과 기능인들이 넘쳐나건만, 노아처럼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현대의 문명인들은 어떤 방주를 만들어야할지 생각해 볼일이다.

  새들도 세찬 비 줄기에 놀라 꼼짝 못하나 보다. 숲 속의 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려는 둥지를 붙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런 호우로 어린 새끼가 등지에서 떨어져 죽는 슬픈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산 속의 산초나무에 공존 공생한다는 곤충들도 비 벼락을 맞아 서로 부둥켜안고 있으려나? 이렇게 비가 쏟아져 내릴 때는 차라리 바다 속 고기들을 부러워해야 할까?  치어들의 은신처가 되는 해조들과 해파리들은 떠내려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인지.

  빗물 소리가 저 멀리 떠내려간다. 먹구름 속을 뚫고 나오는 높은 곳의 밝은 빛 한 줄기가 안도의 숨을 고르게 한다. 그래도 우리는 늘 은혜에 대한 감사를 해야 할 뿐이다.
  땅위의 뜨거운 기류가 올라가 찬 공기와 충돌해서 만들어지는 갑작스런 호우란다. 얼마나 탁한 신음을 토하고 또 토해야 했을까. 인간의 혼탁한 신음소리, 취하지 않으면 하루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수많은 마취제들의 잔여물들이 하늘 중간에 모였겠지. 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오염된 구름 층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땅위에 사는 인간들이 지혜를 모으면 뜨거운 열을 내릴 수 있는 길이 있을지. 마음을 모은다면, 하늘이 비를 필요할 때마다 내려줄지 누가 아는가. 천둥번개는 하늘을 갈라야 하고 파도는 넘쳐 나서 바닷물을 뒤집어야 한다. 우리도 가끔은 세상을 뒤집어 바라볼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맑은 세상을 위하여.

  홍수에 떠내려간 목숨이 슬픔의 빗물이 되어 다시 내린다. 주룩 주룩 더욱 세차게 내린다. 유리창이 아픔에 겨워 깨어질 듯 금을 긋는다. 밖이 뿌옇다. 쏟아져 내리는 비 줄기를 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건너편 산 속으로 카드륨도 나도 안개가 되어 스며든다.
(2002/8)
 

 

 

 

 

 

 

 

 

 

 

 

 

7
영원한 올챙이

                                                                      조윤수

 아니, 웬 국화꽃이 이렇게 많이? 봄꽃들이 차례로 물러간 초여름이다. 꽃집 앞에는 작은 국화꽃 화분들이 키 재기라도 하듯이 거리에서 줄을 서고 있다. 서로 크게 보여 빨리 뽑혀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짤막한 키에 얼굴만 큰 노란 국화꽃들은 똑같은 화분 크기만큼이나 같은 색깔 같은 모양들이었다.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미당 시인이 그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원래 국화는 가을꽃이다. 봄부터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과 소나기를 견뎌내며, 바람과 맑은 공기, 밤이슬과 별빛을 벗삼아 긴 여름을 끈기 있게 참아낸 후 소슬한 가을 바람에 고개 젖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국화는 사군자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장에서 막 복제해온 것 같은 이 꽃들에게는 순간적인 화사함은 있을지언정 아름다운 군자의 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가을에 국화꽃을 가까이서 보기 위하여 나는 이제 겨우 몇 포기를 화분에 꺾꽂이했는데 말이다.
지난 겨울은 포근한 온실의 바이올렛 꽂밭에서 지냈다. 바이올렛의 번식은 쉽고 재미있다. 성숙한 잎사귀 한 장을 떼어서 물에 담가 두면 얼마 후 줄기 끝에서 실같은 뿌리가 생긴다. 그 때 질석 화분에 옮겨 심으면 한참 후 그 뿌리에서 새 떡잎이 솟아난다. 그렇게 하여 얼마든지 많이 번식시킬 수가 있다. 간접 햇볕이 드는 창가에서 잘 자라는 이 꽃은 그래서 향기가 없다. 그러나 작고 예쁜 얼굴에서 아기 얼굴을 보는 것 같은 즐거움이 있다. 늦은 아침 거실로 나오면 이미 아침햇살이 동쪽 창으로 깊게 들어와 있다.  터질 듯 말 듯 작은 꽂망울들이 간지러운 몸짓을 하며 오밀조밀 모여 있다 꽂송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햇빛을 향하여 얼굴을 들고 있다. 꽃은 하루 종일 햇살과 눈맞춤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내가 꽃의 얼굴과 맞대고 싶어 나도 햇볕 따라 자리를 옮겨다닌다.
기술이 발달하여 인간은 많은 식물의 새로운 종자를 개발해내고 있다. 계절에 상관없이 비닐 하우스 안에서 인공적으로 자연환경을 조작하여 식물을 복사해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편리함과 문명의 풍성함을 가져다준 과학의 발전은 앞으로 인간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조작을 할 수 있을지 기대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바이올렛이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순간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화분 속의 국화를 떠올리며 나는 또 영원한 올챙이 생각을 하게된다.
오래 전에 나는 불교의 메시지를 담은 작은 책에서 영원한 올챙이 이야기를 읽었다. "멕시코에 서식하는 도룡뇽 가운데 액서러틀이라 불리는 특이한 종류가 있다. 이들은 나름대로 악 조건의 환경에 적응한 결과 대단히 기이하게 되고 말았다 즉 올챙이 상태 그대로 번식하는 특이한 방법을 터득해 버렸기 때문에 결코 어른으로 성장하는 일이 없게된 것이다. 올챙이가 올챙이를 낳고 그 올챙이는 다시 더 많은 올챙이를 낳는다. 그런데 이 '영원한 올챙이''얘기가 도룡농 세계에서 그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간 세상에도 그와 유사한 현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들이야 대단히 자유로이 번식을 한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실제로 진정한 성숙(成熟)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만다. 올챙이가 올챙이를 낳고, 그 올챙이는 다시 더 많은 올챙이를 낳고…. 그러나 인간에게는 도룡농의 경우처럼, 홀몬이나 혹은 다른 어떤 약물을 주사하는, 그런 잔재주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깨달은 성숙인을 배출하는 붓다의 희망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집단으로는 되지 않는 '깨달은 인간'을 배출하는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학으로 볼 때, 고대 전통에는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 짓지 않고, 남성. 여성. 아이로 구분 지었다 한다. 아이 때는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지 않는다. 남자아이가 자라면 남성이 되고 여자아이가 자라서 여성이 된다. 그리고 인간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내가 결혼하여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내 시부모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있었다. 아이를 갖기도 힘들지만 낳기가 힘들고, 키우기가 더 힘이 들며, 그보다 더욱 힘드는 것은 아이 교육하는 일이라는 글귀를 써 주셨다. 정말 그랬다. 대부분 인간은 진정한 성숙인이 되어 결혼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교육과 더불어 사회적 제반 문제에 부닥치는 것이다. 수세기를 거듭하며 양육되어 훈습(薰習)된 관념, 관습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서로에게 덕이 되지 않는 습성도, 끈질기게 하고 있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아이가 아이를 낳아 자기 닮은 아이로 키운다. 좋다거나 옳다거나 한 일들도 오랜 습성이 되면 그 원래 목적을 잃어버리기 쉽지 않은가. 많은 경우 의식 없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제 자리 걸음을 하는 삶의 형태를 되풀이하고 있지나 않은지. 도룡농처럼 말이다.
  이른봄에 산책길에서 발견한 제비꽃과 원추리를 옮겨왔었다. 그런데 실내 화분에 심으니 잎만 무성하게 자란다. 그리고 제비꽃의 본래 모습이 아닌 비슷한 다른 모습이 되었다. 푸른 잎을 보는 나의 즐거움을 위하여 온실의 화분에 갇히는 운명을 만들고 말았다. 국화도 그렇고 제비꽃도 그랬다. 비록 화려한 꽃은 아니나 전체의 생명에 이이진 부분으로써, 드넓은 대지의 기운을 받고 수많은 나무들과 이웃 풀들과 호흡하며 시원한 야생의 바람과 공기가 필요한 것을. (2001년 9월)

 

 

 

 

 

 

 

 

 


8
소돔과 고모라
                                           조윤수


  이게 무슨 냄새지? ?… 앗불싸!
  솥이 새카맣게 타버렸다. 인터넷 서재 안에 있다가 방금 프로판까스 끄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는 넓은 뜰의 한 쪽에 우물이 있던 집이 그리워진다. 차라리 개울가의 밭으로 내려가 솥을 닦으며 가을의 기운을 즐기는 것이 좋겠다. 모래수세미로 한 참 닦아야 할 것 같았다.
  바로 머리 위에서 바람이 구름을 쓸어간다. 솥을 닦는 손놀림이 상쾌해진다. 코끝으로 스치는 갈바람은 숯검정 냄새를 시원하게 날린다. 솥 단지를 내버려두고 부들 숲으로 걸음을 옮긴다. 갈색 소시지 같은 부들열매가 솟아있는 숲 사이로 참새들이 짹짹거리며 창공을 난다. 꽤 넓은 밭에서는 아랫집 아저씨 내외가 배추벌레를 잡고 있었다.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에 나풀거리는 채소 잎이 예쁘기만 하다. 우리는 같이 상추와 어린 배추를 솎아서 낙엽 진 풀더미에 앉아 채소들의 여름 이야기를 듣는다.
  해거름 때면 나는 가끔 이 텃밭에 내려와서 채소밭 고랑을 거닐며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숲의 새소리와 채소들의 속삭임을 듣는다. 막 산을 넘고 있는 석양 속에서 흙을 만지고 풀밭에 앉아 채소 다듬는 일을 할 때면 자연의 넓은 품안에 안겨 있다는 실감이 난다.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진 분지에 자리한 우리 마을의 아래쪽, 이 때쯤이면, 거대한 빌딩 촌에서는 불야성을 이루기 시작한다. 이미 조각달이 떠 있는 하늘 끝으로 주홍빛 여운이 흑 빛으로 가라앉는다. 마을로 들어오는 골목길, 저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번화가를 보며 또 상념에 잠기게 된다.

  현란한 오색 인조 불빛 속에서 밤의 무리들이 광란의 음악과 술과 담배연기 속에 취하고 있을 세상을 생각하면 전설 같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떠올리게 된다. 아주 아주 옛날 소돔과 고모라는 하느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이 정착한 땅이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각종 죄악이 가득하였다. 그 도시는 겉으로는 화려하고 발전되었으며 농사도 잘 되는 땅이었다. 그러나 속은 퇴폐(頹廢)하여 그 도(度)가 넘쳤다. 하느님은 그 도시를 심판하기로 결심하고 유황불로 태워버리기로 하였다. 하느님은 롯의 가족을 구하기 위하여 두 천사를 보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롯에게 재촉하였다. "이 성에 벌이 내릴 때 함께 죽지 않으려거든, 네 아내와 시집가지 않은 두 딸을 데리고 어서 떠나거라." 그래도 롯이 망설이므로 그들은 보다못해 롯과 그의 가족의 손을 잡고 성밖으로 끌어 내렸다. 하느님은 롯을 그토록 불쌍히 여기셨던 것이다. 롯의 가족을 데리고 나온 그들은 "살려거든 어서 달아나거라.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현대 사회는 중독사회라고 한다. 연예계 마약 파동 소식은 잊혀질 만 하면 가끔 뉴스보도의 한 귀퉁이를 시끄럽게 장식하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외국 관광지인 태국은 거의 마약에 노출되어 있어 단속할 수도 없다고 한다. 누구나 간단히 접근할 수 있다. 한번 빠지면 현실로 쉽게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중독의 특성이 아닌가. 연예계 뿐 아니라 현대인들 자체가 무엇인가에 중독된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마약중독, 알코올중독 도박중독 등의 전통적 종류에 추가하여, 최근에는 쇼핑중독, 인터넷 중독, 일 중독, 핸드폰, 텔레비전, 게임 등. 더욱 안타까운 일은 10대의 인터넷 중독이 거의 50%라 하는 보고이다.
이렇게 드러나는 것 외에도, 우리가 또 잊어선 안될 것이 있다. 안개에 옷이 적셔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듯이 서서히 젖어 가는 좋은 것들을 향한 끝도 없고 목적도 알 수 없는 추구(追求)들이 그것이 아닐까. 우리는 흔히 관념의 유희에 빠지는 줄도 모른 채, 감정의 즐거움을 좇아 다닐 수가 있다. 마치 강 건너에 닿아야 하는 목적을 잊고 뱃놀이의 즐거움에 취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생의 의미를 몰랐던 젊은 시절, 이유도 없는 추상적 아름다움을 얼마나 추구했던가.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 문자 발명이래 인간의 의사소통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렇게 초고속으로 해결된 적은 없었다.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문학도 새로운 전기를 맞아 어떻게 영상시대에 젖어 있는 N세대에게 다가갈 것인가가 새로운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글자를 치고, 필요한 정보를 찾고, 수정하고, 전달까지 시간과 노동력이 줄어들고 있으나 여전히 할 일은 많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한다는 전자제품을 고르는 선전문구처럼, 순간의 선택에 사이버세상나들이의 풍경이 달라질 수 있다. 아직 마음대로 컴퓨터를 주무르지 못하는 나는 마우스의 잘못된 클릭, 선택의 실수연발로 시간을 엉뚱하게 허비하기 일수이다.
인터넷이 새로운 지평의 노후를 준비하는데 일 역을 해주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칫 하면 몇 시간씩 순식간에 흘러 가버리니, 목적을 위한 도구인 컴퓨터는 시간도둑이 아닌가. 탄탄대로를 달리다가 눈에 띄는 경치에 순간 홀려 샛길로 빠질 수 있듯이 순간의 마우스 선택에 길을 빨리 갈 수도 있고 미궁에 빠질 수도 있다. 내 영혼의 파수꾼도 점점 힘을 잃어 가는가. 어딘가에 잘 사로잡히지 않는 나이가 이럴진데, 아직 자기를 절제하는 힘이 모자란 어린이나 청소년들이라면 잘 생각해야 할 일이다.
도시의 화려함이나 과거의 망념을 버리지 못하여 뒤돌아 보다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되어 가는 현대인들이 많다. 내 인생에 더 이상 문명의 구속에 꺼당기지 않으리라고 당당한 자유를 선언하였던 때가 엊그제였다. 새삼스럽게 요즘 사람들의 대열 속에 끼일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할지, 올가미가 될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발전하는 문명의 현상을 좇아가다,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성채를 만들고 그 속에 빠져들고 있는 현대인의 한 사람이 되어 가지 않는가.
부드러운 정적과 충만 감으로 물들은 가을 숲으로 간다. 새소리를 들을 때, 나는 한 마리의 새가 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만나면 갈대가 되자. 들꽃을 만나면 한 송이 들꽃이 되고 ……. 가을빛에 취한 마음은 텃밭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나의 계절을 걷자. 컴퓨터에 취했던 정신이 자연의 벗들과 노닐며 깊고 맑은 가을 하늘을 헤엄친다. 하얗게 닦인 솥 안으로 하늘이 담긴다.  (2002.10)

 

 

 


9
빨리빨리즘
                                                 조윤수

  과속운전에 부과되는 과태료 쪽지가 날아왔다. 난생 처음 받아본 범칙금인 셈이다. 논산에서 익산 사이의 도로였음을 기억해냈다. 도저히 용납이 안되었지만, 97Km로 달렸으며 17Km 초과라는 것이다. 지방국도를 일반 고속도로로 착각했던 것 같았다. 그 도로는 교통량이 많을 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시내에서는 빨리 가라며 뒤에서 빵빵거리는 운전자들을 종종 보게된다. 규정 속도와 신호를 정확히 지켜 달리는데도 빠-앙 하는 경적을 울리며 쏜살같이 추월하는 자동차들을 볼 때마다 아찔해진다. 시내를 벗어나 지방도로나 고속도로를 달릴 때도 거의 규정 속도를 지키는 차들은 많지 않다. 운이 나쁘면 도로교통법에 걸린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스피드 위주의 온갖 정책은 우리 일상생활에까지 스며들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가 무섭게 닫힘 버튼부터 눌러버리는 일도 그렇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가 '빨리빨리'라 한다. 매사에 조급증을 물리치지 못한다. ‘시간이 돈이다’라는 말은 현대에 새로 등장한 진리의 말씀이나 되는 것처럼 ‘빨리빨리즘’이란 신 주의를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정확하게’ 또는 기본에 충실하게’ 등은 '빨리빨리'에게 밀려 뒷전으로 쫓겨난 지 오래다. ‘빨리빨리’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얼마간의 부정확하거나 기본에서 벗어나도 용납되는 풍토가 조성된 것 같다. 이런 풍조는 70년대 고속도로 건설을 기조로 시작된 근대화의 물결이 만들어온 부산물아 아닌가 싶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러 민원에서는 고속통행료가 별도로 지불해야하는 요금으로 암암리에 적용되는 풍조도 있었다. 정확한 규정과 규격에 맞는 정품을 써서 치밀하게 했어야 하는 건설과 중공업 분야 등이 눈앞의 이익과 실적에 급급하여 편법으로 통과해 왔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로 인해 이미 우리는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등 많은 재해로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을 한 것이 엊그제인데 또 대구 지하철 참변을 맞게됐다. ‘빨리빨리’에만 정신이 팔려 지하철을 건설해 놓다 보니 그 안에 잠재돼 있던 작은 불씨들이 대형 인재 사고로 이어지고 만 것은 어쩜 예견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사고의 원인 규명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그 ‘빨리빨리’의 속성은 드러나고 있었다. 죽었다고 인정하고 짐짝같이 취급되어 실려온 시체들 중에는 살아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 인명을 소중히 다루어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하는 일이었다. 집을 나간 아들의 소식이 없어 궁금해하던 중에 지하철 사고 소식을 접한 한 어머니는 곧 바로 병원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아들이 살아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졌다. 흰 보자기 밑으로 빠져 나온 시체의 발 한 쪽을 보고 어머니는 아들임을 알았다. 그렇게 어머니는 발만 보아도 아들임을 안다. 눈물로 호소하며 한 번만 더 봐달라고 애원했다. 사정을 뿌리치지 못하여 마지막으로 심장에 충격을 가했더니 살아났단다. 어머니가 아들을 소생시켰던 것이다.

  언제나 대형사고가 있을 때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한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재난에 대비하는 국가적인 조직이 있어야 한다느니, 각종 대책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조직이나 기구의 설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운영하는 개인의 생각부터 달라져야 할 일이다. 내 안에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어 있는 안전불감증과 ‘빨리빨리즘’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앞으로도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라' 는 아버지의 평소 가르침을 받아온 한 아이는 그 아수라장에서도 한 어른의 옷자락을 뒤에서 잡고 따라나와 탈출할 수 있었다. 적어도 침착할 수 있는 마음과 바로 볼 수 있는 힘이 지하철 운영자들에게 있었다면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구조는 인터넷망만큼이나 복잡해져 간다. 올바른 길을 가르친다는 종교마저도 그 조직의 거대함 때문에 가르침의 핵심이 일반 생활 속에 스며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안타깝다. 그럴수록 가르침의 근본을 찾는 노력을 더 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위급한 상황에서 정신 차릴 여유를 찾을 수 있는 힘을 평소에 기를 수만 있어도…. 선정(禪定)수련과 안전교육을 초등학교 때부터 교과목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해마다 아이들과 같이 해온 낙원촌 수련회를 생각한다. 일 주일 혹은 이 주일의 캠프 기간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 마을의 모든 시설을 소개받는 일이다. 생활하는 동안 마을의 제반 기계와 용구들의 사용법을 익힌다. 그리고 모르는 것이 있거나 약간의 의문이라도 일어날 때 임의로 사용하지 말고 반드시 물어 볼 것을 알린다. 모든 사용한 것들은 다음에 사용할 사람들을 생각해서 한다. 그에 앞서 ‘잘 보고 잘 말한다.’ 혹은 ‘잘 듣고 그대로 한다.’에 대하여 연찬(硏鑽)을 한다. 그 말은 너무 쉬운 말이어서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진지하게 테마를 연찬해 본 후 나는 평소에 얼마나 내 생각으로 듣고 내 생각대로 말하여 왔던가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사실을 그대로 보고, 듣기보다 내 관념대로 혹은 내 습관대로 해버리기가 쉬운 것임을 크게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었다. 그것이 일상 생활의 기본이었다.
 혹독한 꽃샘 태풍은 수많은 사람들의 부푼 새봄을 깡그리 앗아갔다. ‘빨리빨리즘’으로 철없는 꽃과 열매를 언제라도 볼 수 있는 것은 저 태풍과는 상관없는 일일까.(2003/ 3/8)

 

 

 

 

 

 

 

 


10
별은 빛나건만
                                                
                                        조 윤수

 
  세 자매가 부산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대진고속도로의 함양 휴게소에서 쉬었다. 화장실 벽화의 가을 숲길이 참 아름다웠다. 옛날부터 유서 깊은 상림 공원. 해는 서산을 막 넘고 동녘의 먼 산에 아직 시들어 가는 햇살이 깔려 있었다. 이 밤을 달려야 할 어떤 이유도 없으니, 저 숲에 가서 저녁산책을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둠이 급히 좇아오는지라 약간은 바쁜 마음으로 그 숲에 닿으니 벌써 야간 전등이 낙엽이 쌓인 오솔길을 비추고 있었다. 알고 보니 함양에는 물 좋고 풍광이 좋은 곳이 많아 정자문화가 발달한 선비의 고장이었다. 예부터 좌(左) 함양, 우(右) 안동으로 영남에서는 서로 제일의 선비 고장임을 다투었다.
 함양에서 지리산 쪽으로 산 하나만 넘으면 산동 마을인가 했더니 인월을 지나고 길은 멀었다. 그 길 밖에 없어 그냥 달렸다. 별들이 차 창 안으로 들어올 뿐 헤드라이트에 스치는 가로수의 단풍빛깔로 보아 주위의 산 풍경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캄캄한 산길 곳곳에 도심을 방불케 하는 위락시설이 가끔 나타났다. 창으로 기어들어 오는 별들의 유혹에 방향을 모른 채 별을 좇고 있었다. 통행료를 지불해야 된다기에 비로소 노고단을 통과하는 길인 줄 알았다.

   "가다가 불빛 하나도 없는 산자락에 세워주세요. 전조등과 차안의 불빛도 다 끄고 별을 좀 보고 가요." 갑자기 동생이 말했다. 합창이라도 하듯 우리는 그러자 고 했다. 검푸른 하늘 밑 산등성이만 까맣게 윤곽이 드러난 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이아몬드 결정체들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은 가까운 이웃 마을 같았다.
   노고단 정상에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만 해도 전기불빛에 하늘이 바랬지만 별나라는 아름다웠다. 동녘 하늘가에서 북두칠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하늘에는 별들의 잔치요, 산 아래의 마을에서는 평화의 불빛이 반짝였다. 얕은 산 어구에 깔려 있는 별꽃 같은 불빛이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켰다. 제낭은 마을의 불빛이 더 아름답다고 했다. 복잡한 마을의 이야기들이 거리를 두고 보면 정겨워지는 법이다.
  오랜만에 잠겨 보는 은하! 하얀 너울이 살래살래 움직이는 은하수 사이사이 수 없이 크고 작은 별들은 장대를 들고 훌쩍 뛰면 금방이라도 따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들이 줄을 이어 두 눈 안으로 툭툭 떨어져 들어와 온 몸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별은 빛나고 땅은 향기를 뿜건만, 어디선가 토스카의 연인 카바라도시처럼 '별은 빛나건만'을 흐느끼듯 간절히 부르는 사람이 없을까.

  밤길을 달리다보면 가끔 들녘에서 불이 환한 비닐하우스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 속에서는 채소들이 밤의 휴식을 모르고 무성한 잎만 자라고 있다. 겨울에도 싱싱한 채소들을 얻을 수 있는 요즈음이기에 가을에 말린 채소를 준비하지 않아도 좋다. 차라리 늦가을 들녘의 한가로운 햇살을 주워 담아 놓고 긴긴 겨울날 꺼내 쓰면 좋을 성싶을 뿐이다. 밤 동안 사랑도 못하여 열매도 맺지 못하는 깻잎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고 했던 언니의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두드린다.

  태양도 눈부신 날개를 접어버리고 고요한 침묵의 품으로 몸을 숨겼다. 낮의 오만과 갈등의 줄다리기, 온갖 치장의 속박과 허세, 아이에서 어른까지 피할 수 없는 비교와 경쟁의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혼의 휴식처는 어디인가. 밤은 낮 동안의 욕망과 가시 돋친 마음을 걸러내는 시간. 졸라매었던 체면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자유롭고 진실할 수 있는 여유. 밤이 있기에 낮의 혼란은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다. 부글거렸던 탁한 열기는 맑은 달빛에 목욕하고 별빛을 가슴에 안을 수 있다면 한낮에도 높이 날아 멀리 볼 수 있는 갈매기처럼 영혼의 날개를 당당하게 펴리라.
 
  고속도로의 달리는 자동차와 같은 우리네의 삶은 교각 밑의 아름다운 쉼터를 스쳐가고 있다. 밤하늘의 속삭임도 꿈결 같은 옛날 이야기에서나 찾을 수 있을까. 밤에도 마을의 거리에는 낮과 같은 불빛이 난무하고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든다. 식당 가 정원수에는 인조 별들이 내려앉아 하늘의 별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전기 불 아래의 딱딱한 금속기구 앞에서 밤을 새고, 낮에는 몽롱한 정신으로 동굴 같은 어둠을 더듬는 현대인들. 순수한 낮과 밤을 잊은 문명인들은 비닐 하우스 안의 깻잎처럼 문명이 이루어낸 거대한 베일 안에서 점점 본연의 모습에서 멀어져 간다. 밤낮 없이 자란 채소를 많이 먹고 특수 사료를 먹인 고기를 먹어야 하는 요즈음인지라 사랑에도 특수한 기술이 발달하는 것일까. 순간 순간의 마주침은 불꽃 튀듯 하지만 진정한 영혼의 진동을 위한 오랜 준비와 기다림에는 하늘의 별을 헤는 만큼 어려운 일이 되고 있나보다. 사랑의 풍속도도 초고속의 물결을 타고, 급히 맺어졌다 급히 헤어지는 사랑이 많아지고 있다. 

 운명의 날은 별이 유난히 반짝였다. 죽음을 예견하고 카바라도시가 연인 토스카와 같이 했던 아름다운 밤을 생각하며 불렀던 저 유명한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 그 때의 그 별들은 지금도 여전히 밤하늘에 반짝이며 '오묘한 조화'를 속삭이고 있건만 ….
 

 

 

 

 

 

 

 

11

6부

1. 뿌리를 찾아서
2. 망년지우
3. 기차는 8시에 떠나네
4. 전시관 나들이
5.  돌의 기도
6. 고목에 핀 꽃
7. 소나무야, 소나무야
8. 이념의 갈등 (마음의 통일)
9. 동짓날의 설난
10. 아름다운 통일을 위하여

    

 

 

 

 

 

 

 

 

 

 

 

 

 

뿌리를 찾아서                        

                                     조윤수


  햇볕이 여전히 따가운 가을 문턱이었다. 할아버지는 후원의 과수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대청마루에 누워서 부채질을 하다가 곤한 낮잠에 빠졌다. 배나무 꼭대기에서 용이 짙은 안개 속에서 용트림을 하며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깬 할아버지는 마루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린 꼬마가 집 앞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다. "거 배를 따고 있는 게 뉘 집 아들인고?"하고 물었다. "아버지가 맹 희자 도자입니다."하고 아이는 겸연쩍어 하면서 배나무에서 내려와 정중히 절을 하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는 방금 꾸었던 꿈과 아이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다고 여겼다.
  최영 장군은 이렇게 어린 맹사성을 지켜보다가 후에 손녀사위로 삼았다. 그 최영 장군이 살다가 맹사성에게 물려주었다는 고택(古宅)은 늦가을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만 바스락거렸다. 집 앞의 우람한 느티나무는 자신의 잎을 떨구어 우리들 발걸음을 포근하게 맞이해 주었다.
   공자의 뜻을 이어받아 자신도 은행나무를 심고 후학을 가르쳤다는 행단(杏亶). 600년 동안 맹 정승의 정신이 알알이 맺힌 듯, 떨어진 은행 알이 마당 한쪽에 수북히 쌓여있었다. 그 은행 알을 보노라니 벼슬에서 물러난 맹사성이 낙향하여 기른 제자들의 얼굴들이 연상되었다. 수많은 세월동안 거기에서 글을 읽었던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보이는 듯했다.
  맹사성은 고려 말에 태어나서 조선조 초기 극심한 혼란기에 당당하게 높은 벼슬자리에까지 올랐다. 그가 의롭고 청렴한 관리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드러운 성품과 지혜로운 예지를 발휘할 수 있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인 맹희도가 정몽주와 동문수학하여 벼슬하던 사람이었지만, 정몽주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함에도 맹씨의 집안은 후세까지 청백리(淸白吏)의 귀감으로 전해오고 있다. 비록 역사가 흐르는 동안 몇 번의 보수공사가 있었겠지만 깊은 산골을 가는 듯, 맹사성의 고택은 옛 자취를 느끼기에 충분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고택에 들어서서 걸어본 구석구석, 땅 속 깊이까지 배여 있을 발자국소리가 더듬어지는 것이었다.
  문득 맹사성 집안의 여인네들의 삶이 생각났다. 관리직으로 있을 동안 평생을 집 한 칸 제대로 장만하지 못하며 살았던 살림살이 규모를 생각하면 얼마나 인고의 세월을 안으로 삼키며 살았을까. 내 아버지의 삶이 또한 그러했기에 나의 어머니를 함께 떠올리며 그 시절 여인들의 삶을 되살리니 애잔한 마음이 사무친다. 맹씨의 부인이 최영 장군의 손녀였으니, 그 성품 또한 상상할 만 하지 않은가. 황금을 돌같이 여기라던 최영 장군이 아니었던가. 요즘 같으면 돌도 황금같이 알아야 할 세상이니 그 격세지감이 또 어떻게 음미되어야 할까.
맹씨가 비록 현대에는 가문의 빛을 잃고 있지만 그들의 숭고한 정신이 사라져버린 건 아닐 것이다. 옛날 봉건제 사회에서부터 성씨는 남자의 성을 따라야 했고, 남자만이 가문을 대표하고 문중 정신을 이어왔다. 그러나 남자들만이 역사를 만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남자 옆에는 반드시 여자가 나란히 같이 해온 세월이 있다. 수 없이 여자들이 섞이고 인구가 불어나 세분화하여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뿌리가 흔들리는 나무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맹씨의 어머니가 흥양 조씨이니 우리 함안 조씨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성씨의 대부분이 중국에 연원을 두고 있으니, 맹자의 54대 후손이 맹사성이다. 어떤 중국인은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면서 중국에서는 조씨가 으뜸가는 성씨라고 추켜세우기도 했었다. 앞으로 호주제도가 없어지면 여자가 호주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미 서양은 보편화되고 있는 예가 많은 현대에, 한 가문의 의미는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하물며 국제결혼도 보편화되고 있는 세계화시대인 것을…. 그러니 어찌 중국이나 먼 나라까지도 남이라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거슬러 근원까지 찾아 올라간다면….
  맹씨행단에서 나는 우리들의 할아버지 맹씨를 떠올리며 그분의 뜻을 기리고 있었다. 맹씨 할아버지가 사시던 그 시절, 나는 과연 어디에서 무엇이었을까? 그 시절의 나는 그 누구의 딸도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어머니도 아니었다. 맹씨 할아버지가 사셨던 고려조와 조선조 초기에는 인구가 지금같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길러준 부모님과 모든 이웃, 세세 대대로 이어져온 자연 환경까지도 어찌 축복이 아니랴. 그리하여 '나의' 가 아닌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우리 가문의 역사만을 꼭 전해 줄 것을 고집하고 싶지 않다. 아버님께서 손자를 위해 손수 써주신 현판,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을,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현의 말씀을 나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손자손녀들이 삶의 지표로 삼도록 그대로 물려주고 싶다.


 
우리의 가문

  자라면서 거의 들어보지 않았던 외가를 찾은 적이 있다.  내 큰언니의 추억을 더듬어 찾아갔던 화동(花洞)은 이름대로 꽃동산이라 할 만큼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대나무 숲이 배경을 이루어 주자가례를 이어받을 만 했다. 한 마을이 모두 주씨뿐인 집성촌이었으며 마을 가운데 시제를 올리는 사당이 근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신안(新案)주(周)씨로 함안 조씨 집안으로 시집을 오셨다. 어머니는 꽃골 댁이란 택호로 불렸다. 어머니가 17살까지 살았다는 집터 근처의 우물가에 다다르니 마치 어머니가 마중 나올 것 같은 착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신안 주씨의 세조(世祖)이신 성현 주자의 증손인 청계공(淸溪公) 잠(潛)이 동국인 우리나라의 주씨 시조이다. 주씨 종친회에서는 청계공 내외분 천묘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중국의 '주자 묘 성묘단'을 모집하여 성묘여행을 서두르고도 있었다. 성씨로 본다면 조씨와 주씨의 몸과 정신을 이어받은 나는 전주 이씨에게 시집와서 전주에서 살게 됐다. 전주 이씨는 또 어떤가. 너무나 잘 알려진 대로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의 묘소는 전북의 보물로 지정된 조경단(肇慶亶)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시절, 소풍지로 으뜸이었던 장소였다. 건지산 줄기에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한은 신라시대에 사공(司空)벼슬을 지내면서 대대로 벼슬을 해왔다. 이한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21대조이기 때문에 그가 모셔진 조경단은 태조이래 역대 왕들이 정성을 다하여 보호했었다. 고종은 1899년 5월에 단을 쌓아 당상관을 배치하고 비석을 세워 전주 이씨 시조의 묘로 정하고 조경단이라 명명하였다. 수많은 왕자와 왕녀를 배출하여 방대한 씨족사회를 이룬 것이다.
  해마다 열리는 시제에 아버님은 전주에 계시므로 그 준비를 함께 하셨으며 참례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지금과 같이 성역화 되기 전에도 집안에서 그 묘각을 지키는 일을 아들에게도 시키면서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아버님은 전주 이씨 중에서도 시중공파로 그 갈래를 따지자면 복잡하기 그지없다. 아마도 친정 아버지와 시아버님께서는 각 집안의 마지막 선비였지 않았나 싶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황금으로 벼슬을 사기도 하여 새롭고 허울만 좋은 가풍을 만들었던 예도 많았다. 오늘날 경제논리가 모든 분야의 일을 좌지우지하는 때에 가문이며 학연이며 지연이 무슨 뜻이 있을까만…. 그래도 모이면 연줄을 묻는 습성은 처음 대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여는 주요한 매개체가 되기도 하고, 인사말이 되어 첫 인상을 좌우하기도 한다.
  단군이 하늘나라에서 가지고 내려온 천부경 외 여러 경전은 제쳐놓고라도, 근대에 와서 불교의 뒤를 이어 서양 종교가 들어왔다. 기독교는 극단적인 순교의 발자취를 이 땅에 새기며 보편적인 진리를 전파하여 왔다. 대가족이 세분화하여 핵가족이 되고 전통의 맥을 잃어 가는 가운데 종교분쟁은 가족 내에서도 갈등의 고리를 만들기도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등 몇 대만 거슬러 올라가 헤아리다보니까 내 뿌리의 끝은 너무나도 아득하여 보이지 않는다. 더 찾을 수 없는 자리, 끝을 알 수 없는 끝 너머, 무한히 고요한 힘이 나를 에워싸는 것 같다. 어떻게 만나야 할 인(因)이 있어 가족의 연(緣)으로 만났을까. 그리고 같은 시대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을 생각하면 애틋한 연민의 정을 금할 길이 없다.  (2002년 11월)

 

 

 

 

 

 

 

 

 

 

 

1

망년지우(忘年之友)
                                           조 윤수

  사진첩 속으로 추억의 여행길에 올라본다. 옛 선비들의 맑은 우정을 찾아 나섰던 그 시절, 그 이야기 속의 인물들과 함께.
  전남 강진 만덕산 기슭, 다산초당을 찾는다. 초당 뒤, 다산(茶山) 정약용이 자신이 머물렀음을 증언하기 위하여 암벽에 새긴 정석(丁石)이란 글씨가 또렷이 남아 있다. 다산의 정갈하고 꼿꼿한 기품이 느껴지는 듯한 글씨다. 지금도 그 바위는 이끼가 낀 채로 다산의 정신을 담은 글씨를 품고 있으리라. 그 바위 언덕을 내려오면 다산초당이 단아한 선비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처음에는 초당이었으나 후에 와당으로 바뀌었다. 초당 옆의 연못을 배회하면서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서 있다." 고 말한 다산의 절절한 고독을 상상했었다. 다산이 스스로 파서 만든 약천의 물과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였던 차 부뚜막은 지금도 여전한지…….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차로서 다스리며 다선삼매(茶禪三昧)를 즐겼을 모습은 인적이 드문 산 속의 차나무 한 그루이거나 한 포기의 난이었으리라.

  다산이 유배지에서의 외로움과 시름을 달래기 위해 틈틈이 동암 옆의 산마루에 올랐는데 그 장소에 세워진 것이 지금의 천일각이다. 우리도 천일각에 올라 강진만의 갯벌바다가 한 눈에 들어와 더 없이 좋은 풍광을 바라보며 말 없이 그 시절의 한을 그렸었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온 지 8년 만에 당시 백련사 주지이던 혜장스님이 지금의 다산초당이 있는 귤동 마을 뒷산으로 안내했다. 이 때부터 다산은 혜장스님과의 인연이 깊어졌고 유배의 시름에 겨울 때마다 백련사에 와서 차를 나누게 되었다. 그 때 다산의 나이 44세, 혜장의 나이 34세였다. 첫 만남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불교와 학문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두 사람은 이후 혜장이 죽을 때까지 서로를 흠모하고 그리워하는 지기지우(知己之友)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거처를 오가면서 다산은 혜장에게 주역을 가르쳐주고 거칠고 분방하던 혜장의 시심을 일깨워주었으며, 혜장은 다산에게 불교의 선사상과 아울러 차의 맛과 멋을 가르쳐주었다.
  혜장이 4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을 때 다산은 직접 제문을 지어 그의 영혼을 위로했으며 취성재라는 누각을 지어 그곳에 거처하면서 한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고 저술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조선의 유배제도가 없었던들 다산이 그처럼 수많은 저술과 실학사상을 집대성할 수 있었을까. 그의 유배생활은 개인을 떠나 한국인으로서 보자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야겠다. 어쩌면 맥이 끊일 뻔한 차문화(茶文化)의 중흥도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다산과 혜장과의 만남, 당시 학승이었던 초의선사와 다산과의 만남이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선생과의 만남으로 이어졌고, 그들의 만남은 다시 다산의 아들들과 초의선사의 우정으로 대물림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다서와 명문들을 후세에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다산은 우리 차의 우수성을 지적하고,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하고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한다' 는 말을 남긴 국산 차 예찬의 선구자였다. 다산은 특히 이곳에서 나온 차를 무척 좋아하였다. 그가 떠난 뒤에도 18명의 제자들이 다신계(茶信契) 을 만들어 선생을 흠모하고 해마다 다산에서 나는 햇차를 보낼 정도였다. 그의 제자들이 남긴 '다신계절목'은 당시의 차 제조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가 되었다.

  다산초당 천일각 옆으로 빠져 고즈넉한 오솔길을 한 마장쯤 걸으면 옛 건축미가 아름다운 백련사에 닿게 된다. 그 오솔길 주변에는 차나무가 많이 있었다. 지금쯤 뒤 꼭지가 너무 매력적인 하얀 차 꽃들이 한 해 동안 영근 차 씨앗들과 한 가지에서 만나 소담스럽게 옛 지우(知友)들을 그리고 있을 게다. 수 없이 그 길을 오가며 상념에 젖었을 다산을 생각하며 그리움에 젖었던 그 때가 또다시 이렇게 그리울 줄이야!

  백련사의 선방에서 찍은 사진을 보자니 다산과 혜장과의 망년교(忘年交)를 닮았던 십 년 연하인 J선생님과의 우정이 되새겨진다. J선생의 서가는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였고 그 분에게 요가와 명상방법을 배우면서 내면을 가꿀 수 있는 힘을 쌓았었다. 그 분은 정기적으로 우리 소리마당을 위한 모임을 주선하여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그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좋은 차 맛을 제대로 내어 드리고, 차를 알리는 일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인도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우리 차를 보내드리기도 했었다.

  법정의 산문집에서 읽었던 감동적인 한 편의 지음지교(知音之敎)도 떠오른다. 옛날 중국에 거문고의 명수인 백아와 그의 음악을 누구보도 잘 이해한 친구인 종자기 사이의 이야기다. 백아가 태산의 북쪽으로 놀러갔다가 갑자기 소낙비를 만나 비를 피해 바위 아래 머물게 되었다. 마음이 슬퍼져 곧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장마 비의 곡조를 타다가 나중에는 산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었다. 곡조를 연주할 때마다 종자기는 곧 그 뜻한 바를 알아냈다. 그러자 백아는 거문고를 내던지고 말한다. "참으로 훌륭하도다. 그대의 들음이여! 내 뜻을 알아냄이 마치 내 마음과도 같구나. 내 거문고 소리는 그대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네." 훗날 백아는 자기의 음악을 이해해 주던 친구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세상에 자기 음악을 이해해 줄 사람이 없음을 통곡했다고 한다.

  단 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친구를 가진 사람은 그 삶이 든든할 것이다. 누구나 다 그런 친구 한 사람쯤은 가졌으리라. 좋은 수필을 쓰지는 못하지만 내가 쓴 글을 읽어주고 내가 쓰고자 한 바 이상으로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어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혈연과 나이를 뛰어넘어 존재와 존재로서 깊이 이어져 있는 친구 같고 연인 같은 나의 망년지우(忘年之友)들.  훗날 우리도 백아처럼 일손을 멈추고 통탄에 빠질 날이 있으리라. 내가 만약 늦게 남게 된다면 다산처럼 두문불출하고 떠난 자들을 그리며 죽는 날까지 글을 쓰게 될 수 있을까. 사랑이 떠난 뒤 사랑을 노래한다는 시인들처럼.
(2003. 11.14)

 

 

 

2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조윤수

 "카테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8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기차를 타고 떠난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언제까지나 기다리며 부르는 노래. 떠난 연인은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하려고 떠난 투사인 모양이다. 결국은 돌아오지 않을 연인을 언제까지나 기다리며 매일 같이 기차역으로 나가는 그리스 여인의 여심(女心)인가. 역시 이 노래는 그리스 여가수가 불러야 제 맛이 난다.

  신화의 땅에서 열렸던 올림픽이 새로운 신화와 수많은 추억을 만들고 있는 동안, 나는 금싸리기가 깔려 있을 듯한 크레타 섬의 해안을 서성거렸다. 그리스에 대하여 잘 모르지만 누구나 근원을 찾아 떠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꿈에서라도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세계문화유산 제 1호인 파르테논 신전 주위와 아프로디테가 수호한다는 밀로스 섬을 동경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스가 위치한 지중해 동쪽의 발칸반도는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집결하는 교차로에 있다. 섬 하나가 세계문화유산이 된 나라. 나라 전체가 노천 박물관 같은 나라. 그리스라면 너무나 많은 문화 콘텐츠를 품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유럽문화의 발상지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사는 민족이다. 대영제국 박물관과 루불 박물관에서 그리스 조각상을 가져온다면 그 박물관이 텅텅 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은 다시 한 번 인류의 문명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터키의 지배를 400년이나 받기 전까지도 역사의 질곡 속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피로 물들었던 지중해 연안을 배회하자니 알 수 없는 회한이 밀려온다. 어쩌면 반도 국가인 우리나라의 지나온 운명과도 비슷하여 같은 정서를 느낀 것일까.

  각종 매체에서는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승전보와 아울러 그리스 문화 탐구도 함께 진행되었다. 특히 많이 들을 수 있었던 그리스 음악에 젖다 보면 지중해 연안이 배경이 되었던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서의 요트를 타고 있는 듯하기도 했다. 작렬하는 태양과 어긋난 청춘의 야망이 끝내 좌절하고, 유난히 따갑게 보였던 지중해의 태양은 그 다음에 올 먹구름을 품고 있었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지중해 연안 유람선을 타보고 싶다는 그 짙푸른 바다가 그리스 음악에 실려 있었다.
  그리스라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작해야 신들의 조각상과 서양철학의 기초가 된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름 정도였다. 그리고 올림포스 산에 살고 있다는 신들의 복잡한 족보.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플라톤이 제자의 물음에 답하였다는, 유명한 표어가 된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 라는 말도 떠오른다. 그보다는 내가 늘 가까이서 느끼는 그리스의 가수 '나나 무스쿠리'를 생각한다. 지난 겨울 발을 다쳤을 때도 한 밤을 그녀의 음악으로 보낸 적도 있었다. 검은 테의 안경을 쓴 총명하고 맑은 모습의 그녀도 벌써 70세가 되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변하지 않았다. 평생 그리스 노래를 세계에 알렸던 그녀는 지금도 조국 그리스를 위한 아니, 이제는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노래하고 있다. 떠오르는 또 한 사람, 뉴에이즈 음악의 주자인 야니도 그리스인이란다. 여러 문화가 교차되고 어우러지는 지역의 특성 때문인지 음악도 독특한 맛이 융화된 풍성한 폭이 느껴진다.

  아테네 올림픽은 그 어느 때보다 문화올림픽이었음을 가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었다. 월계관을 쓴 승자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경기장에서는 경기 사이사이 관중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수많은 음악이 울려 퍼졌는데.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우승자를 축복하는 음악이 올해 79세인 그리스 국민음악가 미키스 데오도라키스의 영화음악 '그리스인 조르바'였다고 한다. 자유의 혼을 담은 그의 음악은 군부 독재 시절에는 금지 곡이 되기도 했으며 그 역시 7년 동안 국외로 추방당하기도 했다. 그리스에는 자유가 찾아왔지만 세계 곳곳에는 평화가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음악가들이 있어 그리스인들이 어두운 질곡을 헤쳐 나오는 데 힘이 되었으리라.

  조수미가 불러서 우리에게 익숙해진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고'를 이번 여름에는 자주 들었다. 그리스의 애환이 담겨 있는 여심을 노래한 것이어서 인지 언제나 가슴을 적셔주었다. 바로 그 노래가 미키스 데오도라키스의 곡이란 것을 이번에 알았다. 그리스인들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며 조국을 사랑하는지 '키스'란 말이 들어 있는 이름이 많은 것 같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로 너무나 유명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이름의 뜻도 '가장 첫 키스'라나 뭐라나, 그리스인의 기질을 잘 나타낸 이름이라고나 할까.
  어디를 가나 그리스인들의 모임에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음악과 춤이 있었다. 한 사람이 돋보이는 노래와 춤이 아니라 함께 어깨를 맞대고 호흡을 맞추며 즐기는 것이다. 그 오랜 투쟁의 역사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남녀노소가 음악을 통해 공감하고 희로애락을 음악으로 풀어낼 수 있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국악이 단지 한(恨)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그 한을 통하여 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의 음악에서는 세계인의 보편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그리스의 전통 악기인 부주키의 연주에서는 우리의 아리랑에서 느낄 수 있는 슬픔과 한이 있었고, 멋과 낭만이 있었다. 지중해 연안을 휘돌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결의 선명한 바다 빛도 느낄 수 있었다.

 올림픽도 끝났으니 나도 지중해 연안을 그만 헤매야겠다. 이제 해질녘이 되면 풀새들의 연주를 들으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여름의 여운을 삭이고, 수풀을 가르고 다가오는 가을을 맞이하리라. 자유의 혼을 태우는 사람들에게 키스를 보내며.
 "그 여름의 유람은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지난 8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2004/9/3)

 

 

 

 

 

3
전시관 나들이

                                           조윤수
   1.                                 

  한강을 건너 남산 외곽 도로를 지나 도성에 이르렀다.  숭례문은 태평로 주위의 거대한 빌딩에 둘러싸진 전시관 안에서 외소하게 앉아 있는 듯하다. 멀리 북악산 아래 청와대가 보이고 광화문 앞부터 세종로와 태평로까지 빌딩과 자동차의 물결로 넘친다. 옛날의 건물들이 새로 들어선 높은 건물들 사이사이에서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 있고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은 드물다.
‘9.18 광화문으로’라는 전단지를 받는다. 비로소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세종문화회관 앞에 선다.  회관 앞 인도와 계단에는 인파로 덮여 있다. ‘9.18 광화문으로 가자. 국가보안법폐지 반대’를 외치는 구호가 허공을 맴돈다. ‘노사모’‘박사모’등 요즈음은 사모라는 말이 유행이다. 하기야 사모처럼 아름다운 말이 또 어디 있는가. ‘박사모’의 프랭카드가 걸려 있다. 데모의 위험을 방지하려는 전경들과 장갑차가 무거운 거리의 풍경을 대변하고 있다.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모여서 이룬 물결일텐데 나는 웬 지 그 전단지를 받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세계보도기록사진전’을 보려는 사람들의 줄이 전시관 앞에서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길다.  전시관 밖의 그 모습 자체가 전시물이다.
  우리의 목적한 곳 세종회관의 컨벤션 홀 안도 사람들의 물결이 일고 있다. 생의 한가운데를 비껴나 한적한 생활을 하다 가끔 이런 곳을 오는 것 자체가 전시실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삶의 깊은 흐름을 느낀다. 특별한 모임에 온 사람들의 얼굴은 서로 닮아 있는 듯하다. 천장이 높은 홀의 크기가 시원하다. 높은 단상에서 서치라이트를 받고 앉아 있는 주최 측 사람들이 일렬로 앉아 있고 객석에서는 그 높은 단상의 사람들의 무엇을 감상하여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모 문학단체의 문학상과 신인상을 발표하는 장이다. 높은 단상에 앉으면 사람도 높아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 낮은 곳의 대중들에게 그들이 스타로써 구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나도 언젠가 그 단상에 앉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일지 않는다.
  내빈 소개가 있다. 느닷없이 불려지는 나와 동료의 이름에 갑자기 유명인사라도 된 듯 일어나 앞뒤로 인사를 한다. ‘역시 다르구먼, 서울에서 하는 행사는 세련되었어!’ 비 오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멀리서 축하객으로 와주었다는 감사를 그렇게 표시해줄 줄 알다니! 꽃다발 속에 둘러싸인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플래쉬가 연속 터지고 시끌벅적 전람회는 막을 내린다.


 2.

 샤갈을 다시 만나는 것은 정확히 33년 만이다. 1971년 8월 21부터 한 달 간 그의 특별전이 있었다. 그의 나이 80세 무렵에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회고 전을 했으며 서울에서도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그 때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했는데. 그 미술관이 덕수궁 안에 있었는지, 경복궁 안에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가는 길. 당시 시청 앞 빌딩에 내 직장이 있었기 때문에 광화문에서 시청 앞 주변에는 내 청춘의 향기를 추억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 때로 돌아가 있는 듯 설레는 마음으로 샤갈을 만나러 간다.
 30여 년 전에 막연히 회색 톤으로 앞날의 꿈을 그리던 내게 다가왔던 그의 그림 ‘탄생’에서의 연인들의 모습은 환상적인 분위기였다. 마치 악몽을 그대로 그린 것 같은 ‘전쟁’의 포스터와 함께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으면서 옛날을 추억하기도 한다. 지금 그는 유명을 달리 하고 있지만 다시 살아 서울시립미술관에 와 있다.
  그가 ‘도시 위에서’를 그렸을 때의 나이 때 나도 비슷한 나이로써 같은 꿈을 꾸었지 않나 싶다. 어둡고 어려웠던 유년 시절의 고향 ‘비테프스키’를 초월하여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이 기하학적으로 서로 안고 하늘을 날고 있는 그림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화가나 작가처럼 유명한 사람은 되지 못하였지만 나름대로 꿈을 안고 살면서 자유와 평화를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내면적으로 깊이 만나는 것 같다.‘도시 위에서’의 연인들이 50여 년 후에 ‘생 폴 드방스 위의 부부’에서는 아름다운 인생의 꽃다발을 피우고 굳건히 붉은 땅 위에 서서 형제애를 나누고 자유를 구가한다, 푸른색의 하늘에 서로 붙어 서서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막연했던 청춘의 회색 꿈에서 생기발랄한 밝은 색조의 꽃을 피워낸 것처럼 나의 내면에도 아름다운 자유와 평화의 꽃밭을 키워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대가들에게서 느끼는 공통점은 시작은 자기애(自己愛)로부터 출발했지만 마침내 전인애(全人愛)에 도달하여 세계인의 보편적인 정서를 이끌어내고 큰사랑을 호소하는 메시지에 있는 것 같다.

 
3.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전시장은 캄캄하다. 국보 83호와 78호인 반가사유상이 실물로 높은 탁자 위에 앉아 있다. 싯다르타의 '생노병사’의 고뇌를 형상화했다는 그 조각상. 그 보살은 과연 누구인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한 옛 사람들, 삼국시대 때의 사람들의 사유였던가 싶지만,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사유케 하고 있지 않은가. 두 보살이 깊은 사유에 빠져 앉아 있는 곳에만 조명이 내려 비추는 극적인 효과에 숙연해진다. 80여 평의 넓은 전시관에 단 두 점의 사유상만 전시되어 있다.  전시물 둘레 사방에는 앉을 의자가 몇 개씩 놓여 있어 관객들이 오래 감상하며 함께 사유할 수 있다.
  83호는 치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다. 머리에는 연꽃 형상인 듯한 삼면관의 모자를 쓰고 있다. 정면에서 앉아 보면 이 사유상은 고요히 명상에 잠겨 있으면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띈 얼굴이다. 얼굴을 받치고 있는 손끝과 오른 쪽 발을 왼 쪽 다리 위에 얹은 발끝에서 생기가 도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깊은 평온 속에 잠겨 있어 고요한 표정이다. 그런데 옆으로 가까이 가서 그 얼굴을 들여다보면 완연한 미소가 번지는 얼굴이다. 조각의 세련미에서 오는 풍만한 얼굴의 입체감, 그 오묘한 미소가 내 마음 속으로 물결쳐와서 뭐라 말 할 수 없는 미묘한 감격에 싸인다.
  78호인 오른쪽 사유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옷의 어깨선이 바람에 날리는 듯하다. 날개 같이 어깨를 덮은 옷 선이 나비처럼 금방 날아오를 것 같다. 사람이 앉아서 저 어깨선과 등선을 어찌 흉내낼 수 있을까. 등선이며 어깨 선, 허리의 곡선, 이 곡선의 미가 한국의 선의 인상이라 했던가. 이 사유상은 많은 치장을 했지만 너무나 단아하고 아름답다. 정면에서는 미소짓고 있지만 가까이 옆에서 보면 또 달리 담백하고 신비한 표정이 나온다. 나는 몇 번이고 가까이 갔다 뒤로 물러났다, 한 참 앉았다 하면서 그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의 울림에 젖는다. 그 사유상을 가만히 앉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눈물이 솟구치더라는 어떤 분의 말이 실감난다. 가장 얇은 면의 두께가 2mm 의 청동으로 저렇게 살아있는 듯한 내면의 미(美)까지 어찌 표현해 낼 수 있었을까. 과연 동양의 불상으로 독보적인 작품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미술시간에 데생을 하면 서양 인물을 모델로 해 왔다. 아그리파나 비너스를 그리면서 얼굴이나 몸에 근육의 부피 감을 그리기에 급급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리의 선을 그리게 해야 한다는 말에는 나도 손뼉이라도 치고 싶다. 우리의 선을 조형미술품에 잘 나타낸 것이 석굴암의 본존불이나 반가사유상이라지 않는가. 우리도 반가사유상을 석고로 조각하여 데생의 모델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반가사유상이 전시되는 동안 불교조각실에서는 매 월요일 사유상의 사진 찍기와 그리기 대회를 열고 있는 일은 참 좋은 일이다. 어떻게 저 반가사유상들을 밀로의 비너스 상에 비유하겠는가, 그 문화의 차이를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이번 전시관 나들이를 즐겁게 마무리 해준 것은 우리 ‘예준’이다. 샤갈을 보고 있는 동안 밖에서 예준이가 기다리고 있어 더 보고 싶은 것을 멈추었다. 예준이는 내 손녀딸이다. 살아 있어 그 모든 전시물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살아 있는 우리가 서로 만나 기쁨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정말의 살아있는 전시관이다. 예준아! 하고 부르면 기어가다가 엉덩이를 살짝 옆으로 비틀어 앉아서 생긋거리며 쳐다본다. 예준이 아빠, 큰 공주인 엄마, 아기 공주‘예준'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볼거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2004/9/18/)

 

 

 

 

 

 

 

 

4
돌의 기도

                                           조윤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얼떨떨하다. 타임머신에 착 달라붙어 뒤로 달려서 약 2500년 전 쯤 어느 마을을 떠돌다 갑자기 툭 떨진 느낌이다. 고창과 부안의 문화유적 답사 여행은 전북 지방에 대한 나의 메마름을 적셔주었다. 언제나 가까이 있으면서도 너무 멀었던 곳이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더니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유적을 접하고 보니 정보를 통하여 보는 것보다 훨씬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고창의 고인돌 군집 앞에 서서 해설사의 열의에 찬 해설을 듣자니 내가 과연 누구였던가 하고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거석문화에 대한 옛사람들의 정신이 읽어졌다. 거석(巨石)의 정령에 대한 믿음이 만물숭배의 신앙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지구 역사로 볼 때는 어쩜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세월일지 모르지만 또 한편은  너무나 아득한 세월이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살다 간 우리 조상들의 숨결들이 돌 틈 사이사이에 베어있는 듯했다. 공동무덤을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묘표석들은 그 당시 마을 사람들이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말은 그럴 듯했다. 인류가 거석을 이용하여 시도한 건축의 시발이었으리라.
 천여 개의 공동 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거의 반경 4 킬로미터의 돌을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작업으로 이루어진 고인돌들의 축조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당시 마을 사람들 전체가 모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쉬이 상상할 수 있으며 공동체적 삶의 모습 또한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만한 야산 에 죽음의 공간을 마련하고 제단을 쌓아 마을 사람 모두 신을 만나고 경배하면서 무엇을 빌었을 것인가. 고창천이 내려다보이는 강가에 마을을 이루고 삶의 풍요와 자손대대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논과 산림의 경계선상의 완만한 사면에 취락과 밭이 동서로 길게 자리하는 땅, 고인돌은 농지 사이의 경계선상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죽음 공간은 삶의 공간을 안고 있기도 하고, 삶의 공간은 죽음의 공간을 우러러볼 수 있기도 했다.
  30톤이 넘는 고인돌의 거대한 상석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성인남성 300여명이 동원됐을 것으로 생각된다는데, 그렇다면 천여 명이 넘는 인구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을 조직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조직을 갖췄을 것으로 생각되는 청동기 시대의 그러한 집단은 후에 나라를 형성하는 모체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인돌의 기원 및 성격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했다. 2천5백여 년 동안, 아니 그 이전부터, 살아왔던 수많은 조상들은 사라져 갔지만 오늘 우리 안에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언뜻 지난 겨울 메소포타미아 문명전에서 보았던 서사시 한 구절을 생각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도시국가인 우르크의 왕이자 영웅이었던 길가메시의 서사시였다. 길가메시는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영생을 찾아 광야를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보잘것없는 여인의 충고를 듣는다. "길가메시여, 당신은 생명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에게 죽음도 함께 붙여주었습니다. 생명만은 그들이 보살피도록 남겨두었지요.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십시오. 밤낮으로 춤추며 즐기십시오.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십시오. 깨끗한 옷을 입고 물로 목욕하며 당신 손을 잡아 줄 자식을 낳고, 아내를 당신 품안에 꼭 품어주십시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니까요."
  그렇게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내세보다는 현실문제를 중시하였으며 도시국가마다 수호신을 섬겨 현세에서의 행복을 빌었다고 했다. 기원전 3000여 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최초의 도시국가 수메르인들도 현대에도 불가사의한 문명을 일으켰고 거대한 지구라트(Ziggurats)라는 탑을 쌓고 홍수가 날 때는 피난처로 삼고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안녕과 행복을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의 발상지였던 비옥한 땅은 지금도 유혈이 낭자하고 폐허의 땅으로 변모하고 있다.
  인류의 문명이 몇 천년동안 발전해온 물질문명은 한편으로는 부족간의 투쟁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져온 전쟁의 역사 속에서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명체들이 고갈되어 가는 시점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차고 넘치는 물질의 홍수에 휩쓸려 가는 우리 시대 우리들이 과연 옛날 고대인들보다 문명의 발달만큼 정신적으로 풍요와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할 일은 저 고인돌무덤에 제단을 쌓고 빌었던 그 당시의 사람들과 길가메시의 서사시 말고 더 해야 할 일이 어디에 있을까 싶다.

  동양 최대의 고창 고인돌 집단 군락지는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데도 중요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고대사를 복원하는 방안의 하나로 보존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단지 고인돌이 문화유적으로 관광의 대상으로만 여겨 지나치고 만다면 너무나 막대한 손실을 우리는 거듭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이 묘지로 둔갑할 지경에 처해 있는 묘제(墓制)문화는 오늘 깊이 생각해야 할 과제인 것 같다. 묘제문화 만큼 변화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하지 않은가. 당시 사람들도 주검을 묻고 묘제로서 거대한 돌로 무덤을 축조하고, 조상을 숭배하기 위함이었건, 아니면 지배층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해서였건, 그것은 조상숭배와 영생의 의미를 극대화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구태여 타임머신을 타지 않아도 정신이란 곧 바로 여기 지금에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옛날의 정신에서 오히려 현대에 구현할 새 정신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고인돌 당시의 묘제의 정신이나 길가메시의 서사시는 오늘날 다시 찾아야 할 새로운 정신문화 유산이 아닐까. '가장 오래 된 것이 가장 현대적이다.'라는 말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2004)

 

 

 

 

 


5
고목에 핀 꽃                  
                                            
                                            조윤수

 금산사 미륵전 앞에는 내 키 만한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이것 무슨 나무죠?” 묻는 사람은 많은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앞으로 다가서는데 한 사람이 나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갸륵하기도 하지, 이렇게 속이 다 파진 몸을 하고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다니! 한 쪽 몸은 거의 껍질만 남았다해도 과언이 아닌 걸." 정말 그랬다.  속이 다 파진 두 밑동 사이는 치료를 받은 큰 상처가 있었다. 골고루 열려있는 빨간 열매들은 무리를 이루어 만개한 꽃밭 같았다. 찔레꽃 열매보다 약간 더 큰 열매를 가득 달고있는 고목은 눈부신 자태로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이 '꽃사과'라고 하면서 지나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산사나무였다.
  나무에 잎이 피지 않는 가지가 있으면 틀림없이 그 가지 쪽에 해당하는 뿌리부분이 상한 까닭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산사나무는 비록 몸체의 밑 부분 한 쪽이 거의 반절이 없어져 있을망정 뿌리만은 모두 건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천년의 세월을 지탱하기 힘들어서 쓰러질 듯했던 미륵전은 아름다운 새 단청으로 치장하고 파란 가을 하늘을 이고 있어 더욱 굳건한 모습이었다.  몇 차례에 걸쳐 전면 해체보수가 완료된 것이 3년 전이었다. 법당 내부 지하에는 솥 모양을 한 연화대가 있어 솥을 만지는 모든 사람은 숙세(宿世)의 업장을 소멸하고 소원 성취한다고 전해 온다. 미륵전의 터는 원래 용이 살고 있던 연못이었으나 어떤 고승의 가르침에 따라 참숯으로 연못을 메워 용을 쫓아내고 미륵전을 건립하였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부도탑과 5층 석탑이 자연 그대로 언덕 위에 있을 때, 우리는 차 공양의례도 가끔 하였고 탑돌이도 했었다. 그 때 미륵전 앞을 많이 거닐었었는데도, 산사나무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무의 수령을 추정할 수는 없으나 백년은 넘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미륵전 밑이 참숯으로 메워져서 땅 속이 맑게 정화되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어린 기도와 미륵불의 가피까지 층층이 쌓여졌을 터전에 깊이 뿌리가 내려져 있기에, 세상의 온갖 풍상에 그리 망가졌어도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가.

  일전에 만났던 600살이나 된 은행나무가 떠오른다. 고려 말과 조선조 초기까지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던 맹사성의 고택에서 보았던 고목이다. 한 쌍의 은행나무가 두 왕조의 역사와 더불어 흘렀던 한 가문의 만고풍상(萬古風霜)의 사연들을 안고 늠름히 서 있었다. 많은 세월, 해마다 무성한 잎을 피워 그늘을 만들고 수많은 열매를 맺고 익혀내기에 그토록 온 몸을 삭혀냈을까. 한아름도 넘는 세 기둥의 밑동 하나는 속살이 다 파져 있고 그 자리에 돌비석이 그 속살을 대신하고 있었다. 산사나무처럼 앞으로 보면 돌비석이 가운데 놓여있는 것 같으나 그 뒤는 껍질만 남은 밑동이었다. 그러나 높은 나무 가지 끝을 보면 아직도 떨구어내지 않은 열매가 조롱조롱 달려 있었다.
  같이 탑돌이와 차 공양을 시연하였던 내 차(茶)스승이자 벗이었던 비구니 스님이 생각난다. 그 분은 서울에서 카톨릭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앞둔 어느 날 수덕사에 가게되었다. 수덕사 앞에서 한 그루의 고목을 만났다. 고목에서 피어난 잎을 보고서 인생을 바꾸었다고 했다. 그는 아리따운 청춘의 나이에 세상의 덧없음을 보았고, 고목에서도 꽃을 피운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새 삶을 살고자 그 날 출가를 결심하였다. 나의 다원을 처음 찾았을 때 우리는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서로 반했다. 내가 차(茶)맛에 반하고 연꽃에 매료되는 것처럼 그에게 반한 것은 그가 이미 깨달음의 꽃을 피워내고 수행의 향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르익을 대로 익은 노란 물감으로 뒤덮인 은행나무 옆에 빨간 열매가 아기자기한 산사나무를 배치하고 나는 그 아래에 앉아본다. 오랜 삶을 같이 해온 친구처럼 마음이 통할 것 같다. 동병상련일까, 내 발에 남긴 흔적 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고목들이다. 세상살이 풍상에 힘들었던 시절에 나도 그렇게 힘을 소진했던가.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느라고 일생에 써야 할 최대한의 힘을 일찍 쏟아냈던 것일까. 비록 속살의 힘을 잃어 오래 서서 버틸 힘이 없지만, 마음의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는다면 고목 같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밑동이 파졌지만 의연한 산사나무나 은행나무처럼….
  나무의 나이테는 자신이 놓인 환경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단다. 기후 조건이 좋았던 해는 나이테가 넓다. 그렇지 않았을 때는 갑작스레 좁아진다. 나무가 한창 자라야 할 시기에 극심한 가뭄이나 병충해와 서리 등 환경이 나빴을 경우 가짜 나이테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모양을 이용해 지구환경변화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내 인생의 나이테에는 어떤 삶의 무늬가 새겨지고 있을까. 나이가 든다는 것이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그 시간들 속에서 삶의 굴곡을 이겨내고 지혜를 쌓아 가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마을 어귀에 소리 없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도 역사와 더불어 지금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고목들에서 내가 되어갈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천지와 조화하는 나이의 순리와 삶의 지혜를 생각하게 한다. 뿌리가 좋은 정토에 내려져 있는 고목처럼, 내 의식의 뿌리도 영원한 생명에 튼튼히 이어져 있어 어떤 경우에도 생명의 빛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리라. 묵묵히 살아가는 나무처럼 땅이 나무에게 구속이 아니듯이 내 자리에서 그렇게 살리라. 고목의 생명력이 내 마음에 환희와 희망을 준다.
  사람은 노년이 될수록 몸이나 마음도 약해진다. 작은 일에도 섭섭하고 참을성도 없어지기 마련이며 고집만 강해져가기 쉽다. 푸른 숲보다 단풍들고 낙엽 지는 가을 숲이 더욱 아름답다지만 사람의 경우, 모든 노년이 다 아름답지만은 않다.
  삶의 예술이 가장 뛰어나고 진기한 예술이라고 '칼 융'은 말했으며, 극소수의 사람만이 삶의 예술가가 된다 했다. 젊음은 매력적이지만 노년은 눈부시다. 삶의 예술을 빚어온 사람의 노년 주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새벽빛이 퍼져 있다 했거늘. 조화로운 삶을 빚어내어 본보기가 되어준 헬렌 니어링의 얼굴의 주름은 실로 경이로운 삶의 예술가다운 모습이었다. 산사나무에 핀 꽃을 보면서 내 황혼의 나무에는 어떤 꽃을 피울 수 있을지 그려본다. 
  (2002년 10월)

 

 

 

 

6
소나무야, 소나무야
 -숲이 사라진다 2 -

                                          조윤수
                                   

  아카시 향을 머금은 송화 가루가 흩날린다. 녹음 우거지는 사이사이 산 찔레꽃도 송화가루를 맞고 있다. 이름 모를 풀꽃들의 도란거림도 바람결에 사라지는 송화 가루처럼 아카시 꽃 숲으로 사라지는 해거름. 잡을 수 없는 그윽한 향기, 아카시 꽃 눈물 흘러내리면 세월의 꼬리도 잡을 수 없으리라. 희뿌연 저녁 안개가 내리는 언덕 위, 꾸불꾸불한 붉은 몸체로 서 있는 소나무도 자신의 향보다 진한 아카시 향에 취해 있는 듯하다. 울타리처럼 서 있던 소나무들이 다 죽어 있는 한 무덤 앞에 앉아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아쉬워한다. 장사도 치르지 못하는 소나무들의 넋이 허깨비 되어 서있는 것 같다. 며칠 전에 보았던 해안지대의 소나무 무덤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가 아닐까? 소나무는 솔잎에서 송화 가루까지 우리의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식품과 약용으로 쓰임새가 많은 나무다. 한국의 건축자재로 소나무를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지금은 소나무를 대신할 재료가 많이 있지만 천연 재료밖에 없었던 옛날에는 궁궐이나 사찰, 일반 가옥의 건축에 주로 소나무를 많이 썼다. 저 유명한 거북선도 소나무로 만들었다. 모든 나무 중의 우두머리인 소나무를 신격화하여 모심으로써 집의 안전과 가문의 번창을 기원했고, 경남 지방의 '성주신'설화는 이러한 소박한 민간신앙의 일면을 반영한다. 그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성주풀이'는 소나무 탄생의 신화를 말해주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지조와 충절, 꿋꿋한 선비의 이미지는 조선시대의 기본이념으로 삼은 유교사상과도 잘 맞아떨어졌기에 오랜 세월 관상용·정자목·신목으로 심어왔다. 그래서일까, 내가 시집온 해 시아버님께서는 송판으로 만든 책꽂이를 선물해주셨다. 집안의 가훈처럼 충절을 잘 지키라는 뜻이었을까?

  그 오랜 세월, 소나무와 함께 살면서 만들어낸 이야기와 시, 노래, 그림 등 소나무의 자취는 짐작할 만하다. 전설처럼 들리지만, 우리 민족은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소나무와 더불어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음미해 본다. "한국인은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났고, 푸른 생솔가지를 꽂은 금줄을 치고 지상에서의 첫날을 맞고, 산모의 첫 국밥도 마른 솔잎이나 솔가지를 태워 끓이고, 아이가 태어난 지 사나흘 째인 삼일 날이나 이렛날인 칠일 날에는 소나무로 삼신할미한테 산모의 건강과 새 생명의 장수를 빌고, 그 아이가 자라면 솔방울을 장난감 삼아 놀면서 솔 씨를 먹고 허기를 달랬다. 소년이 되면 봄마다 물오른 소나무가지를 잘라 껍질을 낸 뒤 송기를 먹고 갈증을 달래며 유년의 봄을 보냈고, 어른이 되어서는 소나무 껍질은 귀한 양식이 되었으며, 소나무를 먹고 솔 연기를 맡으며 살다 죽으면 소나무 관에  육신이 담겨 솔숲에 가 묻히는 생(生)을 살았다. 죽어서는 무덤 가에 둥그렇게 솔을 심어 이승에다 저승을 꾸몄다. 우리 민족은 소나무와 인연을 함께 하였다." 정동주 님의 소나무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소나무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우리민족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굴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소나무 숲은 고갈되었으므로 소나무에 대한 관심은 조선시대에 들어 급격히 많아진다. 나라에서 꼭 필요한 용재였으므로 엄격히 보호 시 되었다. 이렇게 보호되던 소나무는 조선시대 말기에 송진이 들어 있어 불땀이 좋고 주변에 쉽게 구할 수 있어 땔감으로 마구 베어졌다.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본격적인 수난이 시작되었다. 일제는 우리의 아름드리소나무를 마구 베어 전쟁말기에 땔감으로 쓴 것이다. 이러한 소나무 수탈은 극에 달하여 궁궐의 좋은 소나무 숲까지 모두 수탈하였다. 새로 들어선 정부 역시 유실수를 심자는 삼림정책을 폈고, 이를 이용하여 소나무를 베어 팔려는 장삿속이 맞물려 소나무 수난은 한층 가중되었다. 소나무를 괴롭힌 것은 사람뿐이 아니다. 송충이로 시작해서 솔잎흑파리의 피해로 큰 위기를 맞아 많은 소나무가 빨갛게 죽어갔었다. 겨우 회복되어 가는가 했더니 또다시 소나무는 결정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한다. 이번에는 해외에서 들어온 '루이지애나 재선충'이다.

  마을 뒷산 소나무가 죽어 가는 곳이 많다. '조선사람은 소나무다' 하리만큼 소나무는 우리 자신의 일부처럼 가까운 나무이지 않은가. 수 십 년 뒤 한반도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고난의 세월을 살아온 나무, 민족을 아우르는 소나무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값지고 귀한 일이다.

 겨울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소나무가 흰눈을 덮어쓰고 묵묵히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든든하고 아름다운 정경인가. 소나무에 한가위 달 오르면 솔잎이 채 질 하는 달빛 마시며 솔잎을 따서 송편을 빚어야 하는데……. 하루 종일 새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고, 아름다운 백로들이 배회하는 소나무 숲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며 함께 생명을 구가해주면 좋겠다. (2003년 5월)

 

 

 

 

 

 

 

 


7
이념의 갈등

                                       조윤수

  자꾸만 고개가 뒤로 돌려졌다. 아무도 없는 산언저리에 한 남자를 내버려두고 일행은 멀어져 갔다. 한참 서서 그 남자를 바라보다 일행의 꼬리가 가늘어지면 뛰어가곤 했다.
  오랏줄에 손목이 묶인 죄수들이 개성에서 서울까지 호송되고 있었다. 한국 동란의 1.4 후퇴 때의 일이다. 우리 가족도 그 행렬과 함께 걸어야 했다. 어머니는 내 여동생을 업었고, 막내 남동생을 캥거루 같이 배속에 품고 있었다. 어머니의 머리에는 박스형 라디오가 얹혀 있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보다 산에 버리고 온 그 병든 아저씨가 불쌍해서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산등성이를 향하여 한참을 올라갔다. 수풀을 헤치고 쫓아오는 인민군들의 추격을 피해 허겁지겁 달려야 했다. 그리고 산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저씨를 부축하고 가야 했다. 나는 힘이 빠져서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꽉 붙잡았던 것은 다름 아닌 이불깃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그런 꿈을 가끔 꾸었다. 그런 후면 언제나 아무도 없는 산자락에 웅크리고 있던 그 아저씨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버려져야 했던 일행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의 사진보다 더 또렷하게 내 마음 한 구석에 각인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무수한 주검을 가득 실은 트럭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내 동생을 이끌고 그 곳으로 가 보자고 했다. 궁금하였지만 무서워서 얼굴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두 눈만 뜨고 내다보곤 했었다. 내 초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우중충했다. 입학할 때 근사했던 학교가 아니었다. 우리 학교는 전쟁 부상병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고 있었다. 우리는 부산의 구덕산 중턱의 천막 분교에서 공부를 했다. 왜 우리는 전쟁을 해야 했는지 학교에서 배웠다. 인민군은 빨갱이들, 남한을 침략한 나쁜 놈들이라고 배웠다. 왜 빨간색은 빨갱이란 오명을 뒤집어썼는지 알 수 없었다. 선홍색 빨간 장미 빛이 이념의 굴레를 쓰면 왜 적색의 위험 신호로 둔갑해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북한은 베일에 가려졌고, 알아서는 안 되는 금기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반공포스터 그리기와 반공표어 짓기로 사상을 강화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몇 십 년이 지나고 나서 TV로 보게된 북한사람들이 얼마나 낯설고 신기했는지 몰랐다.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마저 믿어지지 않았다. 거꾸로, 우리를 알게된 그들은 또 얼마나 신기했을까. 대한민국 축구 4강의 신화가 창조되고 있는 사이, 서해에서는 북한과의 교전이 벌어졌다. 남북, 양쪽의 많은 젊은 생명들이 또 희생되었다. 한 젊은 영혼은 한 달이나 물 속에 잠겨 있었다. 마지막까지 밝은 얼굴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는 어느 중사 부모들의 아픔을 어떤 보상이 대신 할 수 있겠는가.
  철새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유로이 철조망을 넘나든다. 지구촌 어느 곳도 끊어져 있는 경계는 없건만 오로지 한반도만 허리가 두 동강으로 잘려있다. 지도 상 그럴 뿐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거의 잊고 살았었다. 여러 나라에서 만든 각 자국의 세계지도를 처음 보았을 때 으아 했던 기억이 있다. 호주의 세계지도를 보면 호주가 한 가운데에 있다. 모든 나라가 다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세계지도만 보았던 나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신기하고 놀라웠다.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의 뜻이 이보다 더 명확하게 드러난 예가 또 있을까 싶었다.

   서독과 동독이 통일이 된지가 벌써 10년이 넘었다. 통일독일의 10년을 결산해보는 인터뷰 마당에서 독일의 한 인사가 말했다. "정치적으로는 통일이 되었지만 아직도 마음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동독인 남자와 서독인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동독인 남편은 말했다. “분단되었던 세월동안의 쌓였던 사고(思考)의 벽과 생활습관의 차이 때문입니다”라고. 마음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한 시간 또한 분단의 세월만큼 필요할지도 모른다. 한 가지 예를 들었다. 서독인 부인은 생활 가전제품을 먼저 들여놓고 사용하면서 카드로 지불하자고 했다. 동독인 남편은 왜 그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돈을 모아서 그 제품을 살 형편이 되었을 때 사야한다는 것이다. 두 의견이 다 일리가 있다. 생활의 차이가 사고방식의 차이로 나타난 결과이다. 그럴 때 생각은 다르나 두 사람이 마음의 통일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일은 한 가정, 한 사회, 어느 곳에나 있는 일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 틀에 맞추려고 감정의 소모를 자초했으며, 내 잣대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살고 있는가. 생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이 다양하다는 것은 창조성을 키워나갈 기회가 더 많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우리는 감정을 상하거나, 싫어하거나, 마침내는 갈라져야 하는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남북한의 끊어진 철도가 신의주까지 연결되고 시베리아 벌판, 아니 유럽까지 연결될 희망이 보인다. 소식조차 몰랐던 북녘동포들이 남녘을 찾고 있다. 아시안 게임에 북한도 한 국가의 대표로 참가했으니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남과 북의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체육인,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얼마나 자주 내왕을 하고 있는가? 더구나 이산가족들이 서로 남북을 오가며 얼마나 한 서린 피눈물을 흘리던가?
  철새들은 이념을 모른다. 그러기에 그들에겐 마음의 경계가 없다. 생각을 바꾸면 마음을 통일할 수 있는 길이 보일텐데 그게 이리도 어렵다. 남과 북 칠천 만 겨레의 염원인 통일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끊어질 때는 순간이지만 이을 때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따라야 한다. 마음 하나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건만 서로 그 마음을 열기가 왜 그렇게 힘든 것일까?  (2002년 10월)

 

 

 

 

 


8

아름다운 통일을 위하여

                                       조윤수     

1. 서울 1945 이후

  삼족오(三足烏)가 다시 비상하고 있다. 고구려의 역사와 삼족오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던 우리에게 갑자기 한꺼번에 고구려가 몰려오고 있다. 지상파 방송 세 채널에서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주몽'과 '연개소문'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과 발해의 시작을 알리는 '대조영'이 그것이다. 중국이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위하여 대규모 고구려 왕성 정비에 집중했고, 고구려의 역사를 자기네 역사의 일부분으로 만드는 작업인 동북공정에 착수하여 대대적 홍보에 나서게 되자 우리나라도 다급해진 것이다. 뒷북치는 일 같지만 아직 늦지 않을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후 55년 동안 우리는 고구려를 잊고 있었다. 남북 전쟁이 일어난 그 해,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버지는 경남 진주에서 막 부산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북에게 진주성을 빼앗기기 직전에 부산으로 오시게 되어서 구사일생이 된 셈이었다. 남쪽 끝에 있으면서 어디로 피난을 가는가 하고 어린 나이에 의문스러웠다. 어찌된 셈인지, 우리는 트럭에 짐을 싣고 개성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또 다시 아버지는 개성으로 발령을 받으신 것이다. 그 때가 소위 9.28 서울 수복 때였다. 그 난리 통에 가족을 다 데리고 가셔야 했던 아버지의 입장을 안 것은 내가 어른이 다 되고서였다. 아버지는 친척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으셨다. 다시는 국군이 밀리지 않을 확신을 가지셨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의지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 때 진주고보를 다니셨던 아버지는 수학여행을 금강산으로 가셨다. 그 금강산에 다시 가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어찌 두 달 후에 중공군이 개입하여 후퇴할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인가. 우리는 맨 몸으로 1.4 후퇴의 행렬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은 그 개성을 그리워한다. 단 두 달 머물다 온 그 도시를.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는 모두 전쟁의 피해자들이었다. 남쪽은 마치 섬처럼 대륙과 떨어져 북쪽을 외면하고 살았다. 북한 공산당들은 멸공해야 할 대상으로 교육을 받았던 것이 아니었던가. 멸공 포스터나 멸공 표어 짓기 등이 초등학교 때의 그림 그리기나 글짓기가 아니었던가. 초등학교를 기억한다면 내게는 전쟁 시 병원으로 쓰였던 본교 건물과 부산 구덕산 기슭의 천막교실만 생각날 정도이다.
  반세기 동안 얼마나 많은 예술 장르에 그 전쟁이 소재가 되었던가. 그럼에도 우리 현대사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의 실체에 대하여 잘 몰랐다. 그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왔음에도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하면서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오류 속에 살아오지 않았을까. 2006년에 KBS에서는 그 현대사를 조명할 수 있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서울 1945. 나는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입장에서 안타까워하며 재미있게 보았다. 우리 세대가 잘못 알고 있는 편견과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신세대에게는 올바르게 그 시대를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따뜻한 인간애로 남북을 바라보는 관점이 좋았다.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고 민족을 위하는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이념을 달리하는 것이 우리를 그렇게 바다 가운데 섬처럼 살게 했던 것이다.
  남북의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교류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저으기 놀랐다. 북쪽의 사람들이 TV에 나올 때나 남북 친선 경기가 있을 때, 북쪽의 응원단이 왔을 때, 어머! 우리와 똑 같구나! 어쩜 저럴 수가! 신기하기만 하였다. 우리가 서로 그렇게 적대시하고 타도해야만 하는 상대. 그쪽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세뇌되었던 결과였을까. 그만큼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드디어 사상 처음으로 지난여름 평양에서 북한의 국보들이 내려오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그간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의 교류를 꾸준히 희망해왔으며, 그 결실로써 북한이 자랑하는 중요 문화재 90점이 출품되어 '북녘의 문화유산'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남북 유물들이 통일된 한 공간에서 뜨겁게 해후했다. 전시실로 들어서면서 나는 가슴이 뛰는 듯 흥분을 느꼈다. 마치 55년 전 개성에 묻고 내려와야 했던 내 부모님의 유물이 돌아온 것 같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헤어져 그리웠던 사람들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궁금해하던 평양에 온 것 같았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민족사 전 시기에 걸친 대표적인 유물은 북한에서도 외부로 나들이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해방 이후 북한은 일제강점기의 일본인들이 우리 고조선의 역사를 신화화한 작업을 극복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보존된 '고려 태조 왕건상'이나 중국 원나라의 라마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아 온몸을 장신구로 화려하게 꾸민 대리석 '관음사 관음보살'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발해의 웅비에 관한 유적 그리고 남한에서도 늘 가까이 볼 수 있었던 조선의 작가들의 작품을 북한에서도 공유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평양성도(平壤城圖)' 앞에서 나는 배회하였다. 평양성 안팎을 그린 회화 식 지도였다. 회화 식 지도는 조선 후기에 걸쳐서 유행한 듯하다고 한다. 평양, 진주, 전주 등 유명한 명승지가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 평양성도는 여러 본이 있다는데, 그 중 서울대학교 박물관에도 소장된 것과 공통된 점이 많다고 한다. 고구려의 전성기 때를 연상하게 하는 평양성과 오늘의 평양 사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시공을 잊고 대동강변을 거닐고 있는 착각에 잠시 빠졌다.
  너무도 여실한 하나의 민족, 하나의 문화였다. 분단된 남북이 같은 역사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동질성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금방이라도 이념의 벽이 무너질 듯한 통일의 당위성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2. 평양성

  오늘 다시 평양성을 눈으로 밟고 다녔다.

  고구려 역사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맞춰, 남북 역사학자의 고구려 유적 공동답사를 통해 고구려 역사, 문화의 역동성과 계승의 문제를 조명한 'KBS 스페셜'이다. 평양의 일부는 보도를 통하여 단편적으로는 알 수 있었다. 고구려의 유적인 산성과 고분을 간접적으로나마 답사하며 전성기 때의 고구려의 생활상을 상상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영상으로 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장수왕 때 천도하였다는 평양성. 왜 평양성이었던가.
  "성의 북쪽은 금수산 최고봉인 모란봉과 만수대, 청류벽 등의 절벽을 끼고 있으며, 동, 서, 남에는 대동강과 그 지류인 보통강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평양성은 북쪽으로부터 북성·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으로 이루어진 복곽식 산성으로, 성벽의 바깥 둘레가 약 16km, 각 성곽 사이의 성벽까지 합치면 무려 23km에 달한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평지성과 산성으로 이루어진 도성방어 체계를 구축하여 평상시에도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적군이 침입하면 산성으로 피신하였다.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평양성은 전통적인 도성 방어체계를 창조적으로 계승한 새로운 형태의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회화 식 평양성도의 설명이다.
  그림으로 평면만 보았을 때는 그 구석구석을 들여다 볼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직접 답사한 영상을 보게 되니 생생한 유적의 현장에 있는 것 같았다.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조명한 설명까지 곁들여서 고구려의 발자취를 같이 걷는 듯 했다. 고구려가 정말 우리 안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500여 년 전의 고구려의 전성기를 영상으로 복원해서 볼 수 있어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 평양에 가보고 싶다.
  절반이 산성이고 절반이 무덤이라는 고구려. 평양성은 산성의 나라 고구려가 만든 철옹성으로, 북한의 국보유적 제 1호다. 한양의 관문인 남대문이 우리 국보 제 1호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평양성은 고려, 조선을 거치면 개 보수를 했지만 전성기 고구려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다. 서울의 남한산성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이 아름답듯이 평양성의 대동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평양을 에워싸고 있는 대동강이 또한 아름다웠다. 평양시 자체가 하나의 성이었다. 언제 평양엘 가서 을밀대에 올라 사방이 확 트인 평양을 내려다 볼 수 있을까. 그립기만 하다. 아직은, 아니 앞으로도 살아서는 결코 평양성을 둘러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동안 민간교류의 결과로 금강산은 관광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아쉽다. 나에게는 전설로만 남을 뻔했던 금강산보다는 개성과 평양에 더 가고 싶다.


3. 고구려 고분벽화
 
  1500여 년 전 위대한 고구려 인이 죽었다. 땅 속 돌무덤에 묻혔고 천장과 사방 벽에 그림을 남겼다. 기록은 왜곡이 될 수 있지만 그림은 거짓 없이 1500년 전을 증언한다. 고구려 벽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왜 중요한지를 몰랐다. 고구려 벽화 모사본의 전시회를 본적도 있으며 박물관에서 고분 모형 속 고구려의 벽화를 보았지만 그들의 문화와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KBS 스페셜을 통하여 그 벽화의 의미와 정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벽화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다시 고구려 사람이 살아나서 우리에게 그들의 정신과 문화를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에 도굴되고 파손을 당하였지만 벽화를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고구려의 색채와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영원한 정신성이 담긴 그 벽화를 가져갈 수는 없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벽화고분은 중국 집안 권이 30기, 평양 권은 73기로 중국이 다수일 것이라는 예측을 뒤집는다. 북한은 벽화 중심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벽화 전시회에서도 내가 인상깊게 보았던 것은 사신도(四神圖)에 나타난 상상의 동물이었다. 스페셜 방송의 고구려 벽화에서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림 앞에만 서도,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을 부릅뜬 백호는 꼬리에까지 힘이 넘친다. 남쪽을 지킨다는 날카로운 부리와 힘이 뻗어나는 벼슬을 가진 주작. 6세기에 그려진 소나무. 소나무 그림으로써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그림이 아닐까. 우리나라 사람의 소나무 사랑은 그때부터였을까. 두 그루의 소나무는 소나무 그림 중 최고의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산수화에서도 뛰어난 고구려인의 소질을 엿보게 한다. 북쪽은 현무 한 쌍, 거북은 음(陰)을 뱀은 양(陽)을 의미한다. 청룡은 동쪽을 지키며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 무덤을 쌓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 것은 그 때부터였던가 싶다. 이렇게 강서대무덤 안은 벽화의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그것은 회칠한 벽에 그린 것이 아니라 판석 위에 직접 그림으로 생동감이 넘치기 때문이다. 특히 눈과 입을 강조하여 무덤 입구로 향하여 돌진할 것 같아서 보는 사람이 압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돌 깎는 기술의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94년에 북한의 철령에서는 쇠말 54개와 4개의 청동 말의 모형을 발굴했다. 조선력사박물관에 전시된 기마군단은 3개 대열로 편성되어 남쪽 방향으로 진군하는 모습이었다. 일반에서도 사신은 방위 신을 제시한다는데, 고구려에서는 군대를 지휘하는 실물로 등장시킴으로써 전투 부대가 사신의 돌봄을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동쪽은 청룡을 서는 백호, 남은 주작을. 그래서 군대의 대열 앞쪽에 주작을 배치하는 것은 군대가 남쪽을 향하여 진군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으로써가 아니라 실제로도 사신의 수호를 받는다는 믿음을 실물로 만든 첫 번째 사례라고 볼 수 있다는 것. 벽화에 그려진 사신은 실제로 그들 곁을 지켜주어 반 만 년의 역사 한 가운데에서 광활한 중원의 땅을 종횡무진(縱橫無盡)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안악 3호의 벽화에도 철갑기병을 앞세운 다음 차례로 창수, 공수, 부월수로 이어지는 대행렬도를 볼 수 있다.

  어떤 간절함이 있었기에 평양 곳곳의 고분의 벽화에 그들만의 정신세계를 그려 넣었을까. 한 고분에는 감실이 있었다. 감실은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죽은 자를 새로운 세상으로 보내는 의식을 했다는 뜻이다. 예불도에서는 부부가 여래 앞에 절을 하는 모습이다. 천장에 그려진 수많은 연꽃은 환생을 기원하였다는 뜻이리라. 하늘 민족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고구려 인은 천장의 별자리에도 나타난다. 북두칠성은 죽음을 의미하고 남두칠성은 삶을 나타내어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았다. 하늘 세계는 신선이 산다는 세상으로 알고 그들도 죽으면 신선이 된다고 믿었다. 죽으면 또 하나의 이상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죽은 자를 영혼의 세계로 인도하는 사신은 무덤을 지키고, 사신이 살아 움직이는 무덤 안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였다. 무덤 안에서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고구려인의 참 모습이 살아 숨쉰다. 그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여 1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숭고한 의식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것이 세계인이 주목한 북한의 제 l호 세계문화유산에 '고구려'라는 이름을 새긴 이유였다.


4. 역사문화전쟁
 
  중국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고구려의 유적은 국내성을 포함하고 있어 앞으로 역사전쟁이 확대된다면 고구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여 벽화에 남긴 고구려의 정신을 우리는 어떻게 계승하여야 할지 생각하여야 할 때이다.
  기술이 발달하여 우리는 그 유적만으로도 1500년 전의 고구려 인을 오늘날 만날 수 있게 되고 그 정신을 알 수도 있게 되었다. 벽화에 나타난 말타기 대회를 보면 알 수 있듯, 143번의 전쟁을 치른 고구려는 언제나 전쟁에 대비하여야 했고 평화시는 그 속에서 문화를 발전시켰다. 얼마나 많은 전사자들이 있어 죽음을 애도했으며, 얼마나 많은 장군들이 벌판에서 사라졌던가. 이름도 장군총의 돌무덤으로 남아 장군과 전사들의 넋이 중국의 높은 하늘에 서려 있으리라. 그 넋들이 땅에서와 같이 하늘에서도 강건하기를 기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인은 궁궐 짓기를 잘 하였고 돌 쌓는 기술이 뛰어났다고 삼국지의 기록이 말한다. 고구려의 역사는 궁궐 짓고 평지에서부터 겹겹이 산성을 쌓고, 돌무덤을 만들다가 끝난 역사 같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성기의 평화 시(時)에 뛰어난 문화와 예술의 경지를 펼쳤다는 것은 얼마나 높은 기상이었던가. 주름치마를 입고 얼굴에 곤지를 바른 귀부인과 박쥐모양의 우산을 들고 따라가는 시중들의 모습에는 고구려인의 얼굴 표정, 복식 등이 그대로 살아 있다. 안악 3호분의 벽화에는 1500년 전의 부엌 살림살이와 외양간 등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릉의 벽화에 나타나는 645개의 연꽃은 신격화된 위대한 시조 왕의 환생을 기원하였으리라. 오늘날까지 동명왕릉에는 백성들이 개인적인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도 끊임없이 찾아 든다고 한다.
 그래픽 영상기술이 지하 궁이었다는 안악 3호 고분을 복원하여 우리의 고구려에 대한 상상력을 일깨운다. 애니메이션으로 그때의 생활상도 생생히 나타낼 수 있어 고구려가 부활하여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오게 한다. 역사 공부시간에 외었던 이름들. 그 전설의 이름들이 구체적 역사 속의 생활인으로써 어떻게 활약했는지를 보게 된다. 있음직한 사실을 상상해서 그 때 그 시절의 사람으로 돌아가서 같이 호흡하게 한다. 그 모든 것이 오늘날 남아있는 유적과 기록을 통하여 상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700년이라는 세월, 전성을 누렸던 고구려는 결코 사라진 역사가 아니다. 고구려를 이어받은 발해가 300년의 역사를 이어 왔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흡수한 고려가 고스란히 그 문화를 이어 발전했고 조선을 거쳐 오늘의 근간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고조선 이전의 역사까지 거슬러 유적을 발견한다면 그 유구한 역사 속의 남북이 갈라져 있었던 반세기는 우리의 역사문화를 갈라놓을 시간이라고까지 할 수도 없다.

  한민족의 반 만 년의 역사 중심에 있던 700년의 고구려 역사가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런 시점에서 마땅히 남북이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해야 한다. 한 하늘 아래 하나인 땅을 어찌 갈라놓을 수 있는가. 하나의 민족, 하나의 문화임에 틀림없음을 우리는 바로 인식하여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사랑함으로써 한 걸음 한 걸음, 아니 지금이야말로 '빨리빨리' 정신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닐까. 전쟁으로 얼룩진 인류사에 역사와 문화까지 전쟁을 해야 하겠는가. 그 옛날의 고구려, 천손 민족의 상징이었던 삼족오의 깃발을 중국의 하늘에 날게 할 수는 없어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고구려 인들이 벽화를 그렸듯이 통일의 기원을 새긴 삼족오를 새겼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서 평화의 물결이 넘실댈 때 고유한 개성(個性)이 빛나는 각 나라의 문화예술이 지구촌 인류의 미래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2007년 l월 5일)

[제4회 동상작] 아름다운 통일을 위하여 (대학/일반 부문) | KBS 공모전 당선작  
‘KBS 스페셜 고구려의 부활’을 보고

 

 


9

 

'좋은 시와 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0) 2009.05.03
물질의 위함한 힘  (0) 2008.05.25
2005년 가을  (0) 2007.12.26
그대는 아는가  (0) 2007.01.24
구름이 떠나가고  (0) 2006.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