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중심으로 역사를 다시 정리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지금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은 부분 다르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문명의 발상지를 바이칼호(湖) 주변으로 보는 사관(史觀)에서라면 민족의 위상은 더욱 힘차고 멋지게 정리된다.
원시나 상고시대, 집단을 이루며 사는 정주민(定住民)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두 말 할 것 없이 그것은 물이며, 따라서 가장 강한 민족이 가장 좋은 물이 있는 땅을 차지하게 된다. 이 가설을 토대로 한다면 한반도를 택한 민족은 결코 약한 민족이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물이 철철 넘치는 땅이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공자(孔子)가 늘 와서 살고 싶어한 군자국(君子國)이 우리나라 아닌가.그리고 차는 좋은 물을 더욱 고급스럽게 마시는 방법이다. 멋을 아는 민족만이 택할 수 있는 지혜(智慧)의 산물(産物)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 두 가지 추정만으로도 한민족의 위상은 금세 당당해질 수 있다.
그러면 한반도에 차나무는 어느 때 생겨났고 차생활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일반적인 견해가 어떠하든 우리의 차 이야기는 가락국(駕洛國) 건국신화(建國神話)와 함께 시작한다. 이능화(李能和/1869-1943)는 조선불교통사에 다음과 같은 귀한 기록을 남겼다.
…김해 백월산(白月山)에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종자를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장백산(長白山)에도 차가 있는데 백산차(白山茶)라 한다…
인도로부터 차 전래설은 긍정할 수밖에 없다.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허황옥(許黃玉)이 엄염한 실존인물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적힌 그대로를 사실로 받아 들이자. 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와, 하늘의 뜻대로 지상을 다스린 첫 군왕(君王)이다. 그리고 허황옥은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태어났는 데 꿈의 계시로 수로왕에게 시집왔다.
허 공주는 서기 48년 음력 5월, 리만 해류를 타고 고국을 떠나 7월 27일 김해 별진포에 상륙하였다. 수행원 20여 명과 함께 타고 온 그녀의 배에는 비단·금·은 패물 등이 가득했는데 이 속에 차나무 씨도 있었다.
차나무는 심은 자리에서만 살도록 천명(天命)을 받은 나무이다. 허황옥이 차나무씨를 가져온 것은 "나는 이제 옮겨가선 살 수 없는 가락국 사람"이란 뜻이었다. 수로왕은 이 차끼를 김해에 심도록 했다. 여자가 시집갈 때 차나무 씨를 가져가 뒷뜰에 심는 풍습은 이로부터 생겨났다.
허 공주가 꿈의 계시에 따라 가락국 김수로왕에게 시집와서 생애를 마쳤다는 것은 가락국기(駕洛國記) 외에 유사(遺事)의 금관성 비사석탑,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수로왕비릉(陵), 그리고 김해 허씨 후손에 의해서도 고증된다. 또 수로왕릉 중수기념비의 머리에 새겨진 여덟마리 뱀 무늬는 태양왕조를 상징하는 아유타국의 깃발 문양과 같고, 마주보는 신어상(神魚像), 두 개의 활무늬 역시 아유타에 뿌리를 둔 것들이다.
이 때에 차가 있었다는 사실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거등왕이 즉위년인 199년에 제정한 세시풍속(歲時風俗)에 떡·밥·차·과일 등을 갖추어 다례(茶禮)를 지내도록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 김유신이 수로왕의 12대 손이다. 문무왕에게는 김수로 왕가가 외가 쪽 조상이 된다. 이렇게 혈통이 이어진 관계로 김수로 왕은,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된 뒤에도 오랜동안 가야의 시조(始)로 봉사(奉祀)되었고 다례 풍습도 이어졌다. 이는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오기 3백 년 내지 6백 년 전의 이야기다.
차문화의 학문적 연구에 반생을 바친 김명배(金明培·숭의여전) 교수는 허황옥과 죽로차의 전설을 쫒던 중 비밀스런 역사에 접근하게 된다.
허 왕후는 모두 10남 2녀를 낳았는데 태자는 거등왕이 되었고 거칠군이라는 왕자는 진례성주(進禮城主)가 되었다. 그리고 일곱명의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長遊和尙)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성불(成佛)했다. 지금의 칠불사(七佛寺)가 그곳으로 약 1800년전 이들 일곱왕자가 성불한 이후 칠불암(七佛庵)이라 이름 지어졌다. 그리고 두 공주 중 한명은 신라 탈해왕의 태자비가 되었다.
기록은 그것 뿐이다. 9남 1녀에 대해서는 이렇게 상세히 전하고 있는데 한 명의 왕자와 한 명의 공주 행방은 없는 것이다. 김교수는 이들 남매의 흔적을 "김씨왕세계"에서 찾아냈다.
…거등왕 즉위년에 왕자 선견(仙見:神功)은 신녀(神女)를 따라 구름을 타고 떠났다. 거등왕이 도읍의 언덕 돌섬에 올라 선견을 불렀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거등왕 즉위년은 서기 199년이다. 신녀를 공주로 본다면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나 왜인전(倭人傳)에 들어있는 일본 고대국가 야마도(邪馬臺)의 히미꼬(卑彌呼) 여왕과 그의 남동생 이야기와 맞아 떨어진다. 왜인전의 기록을 보자.
…모두 함께 한 여자를 내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이름을 히미꼬라 하였다. 귀신의 도를 섬겨 능히 무리를 감동시켰다. 나이가 찼지만 남편이 없었는데 후에 남동생이 나타나 나라 다스리는 일을 도왔다….
여왕은 183년에 옹립되어 247년 붕어하였다 했다. 왕이 된 후 신녀(神女)로 불리웠을 그녀가 199년, 고국에 들러 국사를 보필할 남동생을 데리고 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 가설은 일본 사학자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저명한 사학자 이노우에(井上光貞)는 그의 저서 "일본국가의 기원(日本國家の起源)"에서, 히미꼬는 한반도와 관계있는 여성으로 보인다고 했고, 진구우(神功) 역시 한반도에서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왕의 위폐를 모신 묘오겐궁(妙見宮)에서 볼 수 있는 신어상(神魚像)이 김해 수로왕릉의 것과 같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히미꼬 여왕이 김수로 왕의 딸이라면 차나무도 이때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히미꼬 여왕시대부터 차나무가 있었다"는 일본 고고학계의 주장이 맞는 것이 된다.
이 히미꼬 이야기는 뒤에 소개되는 김성호(金聖昊)의 "비류백제(沸流百濟)와 일본의 국가기원(國家起源)"에서 더 발전된다. 가야의 유민 중 신라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김유신 외에 우륵(于勒)·강수(强首) 정도이다.
또 가야가 쇠퇴하여 신라에 완전 합병된 시기는 6세기 중엽이다.
신라인의 차생활을 엿보게 하는 일화로는 시승(詩僧) 충담(忠談)선사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충담 이야기는 찬기파랑가로 시작된다.
경덕왕 시절 국선 화랑 중에 기파랑(耆婆郞)이란 낭도가 있어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성품이 고결하고 인품이 넉넉하여 남들이 감히 따를 수가 없었다. 충담은 그를 찬(讚)하는 노래를 지었다.
헤치고 나타난 달
흰구름 따라 흐르니
새파란 시내에
기파랑 모습 잠기네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랑(郞)의 지니신 마음 읽으니
아아, 드높은 잣나무 가지
서리모를 씩씩함이여
충담이 지은 찬 기파랑가(歌)는 장안의 유행가가 되었다. 임금도 신하도 뭇백성들도 즐겨 불렀다.
경덕왕 치세 20년이 지나면서, 오악(五岳) 삼산신(三山神)이 궁전 뜰에 불쑥 현신하는 등 나라 안팎에 심상치않은 불길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23년(765년) 봄 경덕왕은 착잡한 마음으로 경주 귀정문(歸正門)에 올랐다. 신하를 대동하고 문루에 오른 경덕왕은 "근자의 괴변을 막고 나라를 잘 다스릴 방법이 없을까?…"를 골똘히 생각했다.
궁리 끝에 경덕왕은 훌륭한 스님을 한 분 모셔오라고 했다. 이에 신하들이 장안 제일의 원로스님을 모시고 왔다. 그런데 왕은 몇 마디 나누지 않고 이 분은 내가 찾는 스님이 아니라며 돌려보냈다.
문루 끝에 서서 남산을 바라보던 경덕왕의 눈에 멀리 걸어오는 한 스님이 보였다. 낡은 납의(衲衣)에다 등에는 걸망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다. 왕은 스님을 루상(樓上)으로 모시도록 했다.
"스님은 누구신가요?"
경덕왕이 묻자 스님은 충담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기파랑가를 지으신 스님입니까?"
경덕왕은 크게 기뻐하며 예를 갖추고 다시 물었다.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남산 삼화령에서 오는 길입니다. 소승은 삼월삼짇날과 구월 구일이 되면
언제나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드렸습니다. 오늘이 삼월삼 짇날이어서 다녀오는 길입니다"
"어떤 차입니까? 나에게도 그 차를 나누어 줄 수 있습니까?"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님은 등에 진 걸망을 풀었다. 걸망 속에는 차와 다구가 들어있었다.
정성껏 차를 달여 경덕왕께 드리니 왕은 그 맛의 훌륭함과 기이한 향기를 극찬했다. 충담은 주위의 신하들에게도 고루 차를 나누어 주었다. 뜻밖의 다회가 벌어진 것이다. 경덕왕은 또 말했다.
"스님이 지으신 사뇌가(詞腦歌:찬기파랑가)는 그 뜻이 매우 고상하여
온 백성이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하
나 지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즉석에서 안민가를 지어 올렸다.
임금(君)은 아버지요, 신(臣)은 인자한 어머니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와 같으니
아이가 어찌 부모의 크신 은혜 다 알리요.
꾸물거리며 사는 중생 먹여 살리시니
그 은혜로 나라가 유지되네
왕이 왕다웁고 신이 신다웁고 백성이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라
경덕왕은 크게 기뻐하며 충담을 왕사(王師)로 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충담은 거듭 사양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이는 대렴이 당(唐)에서 차 종자를 가져왔다는 흥덕왕 3년에서 보면 63년전의 일이다. 문운의 황금시대였던 경덕왕 시절이 아니더라도 이때에 이미 차가 불공에 쓰이고 궁정에서 예폐물로 다루었던 사실은 드러난 것이 되었다.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조에 적힌 내용을 훌륭하게 뒷받침한다.
…흥덕왕 3년(828년) 당(唐) 사신 대렴(大廉)이 차 종자(種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는 것인데 이때에 와서 아주 성해졌다…
여기서도 분명해지는 것은 중국으로부터 차 종자가 들어오기 이전 우리에게 차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귀족 문화였을지는 몰라도 이미 차생활이 있었기에 중국을 다녀오는 사신도 차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흥덕왕 3년에 "중국의 차 종자"가 전래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한국의 차생활 역사가 이때, 즉 828년에 시작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일은 앞으로는 없어져야 한다.
신라인들이 마시던 차를 유사(遺事)에서는 전차(煎茶)라 전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남행월일록(南行月日錄)에는 점차(點茶)로 적혀있다. 전차란 잎을 우려 마시는 엽차(葉茶)요, 점차는 잎을 연( )에 갈아 가루로 만든 뒤 뜨거운 물에 풀어마시는 말차(抹茶)를 일컫는데 사학계(史學界) 견해는 두 가지 형식이 함께 있었다는 쪽이다. 다만 엽차보다 말차 음다법이 더 성행하였을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은다. 이때의 분위기는 신라말기 국사를 지낸 고승 혜소(慧昭774-850)의 비문에서 엿볼 수 있다.
…누가 한명(漢茗/茶의 異名)을 보내오면 그(眞鑑國師)는 그것을 돌로 만든 가마에 넣고 나무를 때서 삶았다. 가루로 만들지 않고 달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모른다. 그저 배가 느긋할 뿐이다"라고 했다. 국사(國師)가 정진(正眞)을 지켜 세속(世俗)을 미워함이 다 이와 같았다…
혜소, 즉 진감국사 비문을 쓴 이는 고운(孤雲) 최치원이다. 그는 이 비문에서 신라말기 우리 사회의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당시 일반에 널리 음용되고 있던 것은 말차였는데, 누가 중국차를 보내오면 일부러 신라의 방식으로 가루내어 마시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신라인의 차생활은 원효(元曉617-686)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그가 인적 드문 변산의 한 산마루 외딴 암자에서 선(禪)에 정진할 때의 일이다. 시중들던 사포가 차를 달여 드리고자 하였으나 물이 없었다. 간절히 물을 원하니 홀연 바위틈에서 젖과 같이 달콤한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포는 원효께 차를 달여 드릴 수 있었다. 후일 이곳을 찾은 고려의 시인 이규보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좁고 험한 산길 지나 백 길은 됨직한 산 위
일찌기 지어진 효성(曉聖)의 암자
신령스런 자취는 어디에 있는가. 영정만 종이 폭에 남았구나
다천(茶泉)에 고인 옥빛 샘물 마셔보니 천하일품
예전에는 물 없어 불승(佛僧) 머무르기 어려웠는데
원효대사 머물 때에 솟아난 샘이라네
우리 스님 높은 뜻 이어받고자 누더기 걸치고 이곳에 들어
시중드는자 없이 홀로 앉아 세월 보내네
문득이라도 소성(小性/원효의 이명) 올라 오시면
얼른 일어나 허리굽혀 절할 것이로세
29세에 출가한 원효는 34세 때에 의상(義湘)과 함께 불법을 닦고자 당나라로 향한다. 요동(遼東)을 지나던 중 공동묘지에서 하룻밤을 지내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한그릇 마셨다. 이튿날 깨어보니 그 물은 해골 속의 더러운 물이었다. 안간힘을 다해 토해내려고 하던 중 원효는 깨달음을 얻었다.
"마음이 살아야 모든 사물과 법이 생기를 얻는다. 마음이 죽으면 해골이나 다름없구나(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壻?不二). 삼계(三界)가 마음에서 지어진다 하신 것을 어찌 잊었더냐(一切唯心造)"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발길을 돌려 경주로 돌아와 분황사(芬皇寺)에서 불경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좌선입정(坐禪入定)하여 계율을 철처히 지키는 수도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당시의 불교가 형식에 치우쳤던 것에 과감히 맞서 불교의 대중화를 시도했는데 그 일련의 과정들이 차생활을 통해 다져졌을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내성적이면서 동시에 호탕한 일면도 가지고 있던 원효는 어느 날 이런 노래를 지었다.
…도끼에 자루를 끼게할 자는 없는가. 내가 하늘 받칠 기둥을 깍아야겠구나…
사람들은 그 노래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원효는 아무 소리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를 전해들은 무열왕(武烈王)은 "대사가 부인을 얻어 현자(賢者)를 낳고자 하는 것이다"고 해석하며 홀로있는 요석공주를 생각했다. 이윽고 원효는 요석공주를 만나게 된다. 춘원 이광수는 "원효대사"에서 원효와 요석이 만나는 대목을 다음같이 묘사하고 있다.
…원효는 시녀가 이끄는대로 여러 복도를 지나서 한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쌍학을 수놓은 이불과 쌍봉, 쌍란, 쌍원앙을 수놓은 긴 베개가 있고 요석공주가 혼자 촛불 밑에 앉아 있었다. 원효는 방에 들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공주는 원효를 보고 일어나서 읍하고 섰다. 백작약 일곱송이를 꽂아놓은 것으로 보아서 원효는 이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공주는 자기를 구리선녀로 자처하고 원효를 선에 선인으로 비겨서 세세생생에 부부되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촛불이 춤을 추고 창밖에서는 벌레소리가 울려왔다. 이윽고 공주가 고개를 들어 "앉으시오. 오늘은 법사로 여쭌 것이 아니요, 백의로 오시게 한 것입니다. 이 몸의 십년 소원을 이뤄 주십시오"하고 눈물을 떨구었다.
아무리 십 년 동안 먹은 마음이라 하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기가 힘들기도 하려니와 또 무섭기도 하였다. 원효도 제 몸에 입은 옷이 중의 옷이 아니요 속인의 옷인 것을 다시 보고 공주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공주도 한 무릎 세우고 앉았다. 공주는 다로(茶爐)에 끓는 다부(茶釜)에서 대극으로 물을 떠서 차를 만들어 원효에게 권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새벽 쇠북 스무여덟 소리가 다 끝나도록 원효사마께서 아니오시면 이 칼로 이 몸의 목숨을 끊기로 마음먹고 있었오"하고 공주는 금장식한 몸칼을 몸에서 꺼낸다. 고구려 도장이 만든 칼이었다…
이것은 대충 서기 655년 전후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요석공주가 원효에게 만들어 대접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점다(點茶), 즉 말차이다. 삼국사기 흥덕왕 조에 대렴을 논하면서 차는 선덕왕(632∼647) 때부터 있어왔는데… 한 대목을 훌륭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원효는 요석 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얻었다.
신라의 다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분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다. 어린 나이에 당나라 유학을 가서 천재적인 문장으로 온 중화국(中華國)을 뒤흔들었던 고운은, 귀국 후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부귀영화를 한낱 뜬구름처럼 여기고 지팡이를 벗삼아 방랑하며 곳곳에 많은 詩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중국에 있을 당시 인편이 있을 때마다 고향의 어머니께 차를 보내드리곤 했는데 이는 삼국지의 유비현덕이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차를 구해드리기 위해 멀고 위험한 여행을 떠났던 사실을 연상하게 한다. 어쩌다 인편이 없어 차를 보내드리지 못할 때면 몹시 마음 조렸던 일들이 그의 시문집(詩文集·桂苑筆耕)을 보면 간간 들어있다.
통일신라 이전의 차는 불전 공향과 승려들의 수도용으로 사찰 안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특히 수도자에게 있어 차는 잠을 쫓아주고 소화를 돕고, 정신을 맑게하는 효능으로 좌선(坐禪)의 유적현묘(幽寂玄妙)함을 도와주어 선승(禪僧)들에게 아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차가 불교의 전래와 함께 들어와 승려들 간에 성행하였다고 하지만, 그러나, 차와 불교의 만남은 신라통일 무렵에나 이루어 졌다. 이미 독자들도, 앞에서 살펴본 사실만으로 불교를 따라 전래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는데 동감할 것이다.
당에서 차 종자를 가져온 것도 승려가 아닌 당 사신 대렴(大廉)이었고 이를 지리산에 심게한 이도 흥덕왕이었다. 또 차는 그痼막?시작된 게 아니라 이미 있었는데 이 때에 와서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고 했다. 화랑들이 차생활로 심신을 수련하였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후일 삼국을 통일시키는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차는 불교와 관계없이 번진 것이다.
신라인들이 차를 마시는 데 있어 어떤 통일된 형식이나 예법을 가졌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차는 군자의 기질과 덕을 지니고 있어, 맑고 곧은 예지와 함께 관용의 미덕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고, 맑은 인격과 고매한 학덕과 예(藝)를 고루 갖춘 지성을 "다인(茶人)"이라 하는 풍습이 - 그리고 그 부름이 선비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관칭대명사로 인식되어 명정(銘旌)에 기록되는 것을 최상의 영예로 여기는 풍습이 -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시대 고구려·백제의 차생활을 전해주는 기록은 없다. 고구려는 북쪽에 위치하여 차의 재배 생산이 어려웠다손 치더라도 호남의 따뜻한 지방을 영토로 했던 백제에 차 마시는 습속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볼 때도 신라 쪽인 경상도 지역보다 백제 영역이었던 전라도 방면의 기후나 토양이 차나무 재배에 더 적합하고, 따라서 차 산출 역시 몇십 배나 많을 수 있다는 가정(假定)에서 백제인들의 음차생활 진위는 유난히 궁금해 진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김성호(金聖昊)의 "비류백제(沸流百濟)와 일본(日本)의 국가기원(國家起源)"을 인용해 볼 필요가 있다. 백제의 역사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는데 짙은 의문을 품었던 그는 15년간에 걸친 집요한 답사와 연구를 거쳐 백제는 하나가 아닌, 2개의 국가였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 역사 연구가 일본인들에게 강점되었던 시대에 일본사학자들은 근 3∼4백 년간에 걸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불신했고, 이러한 풍조는 우리 사학자들에게 고스란히 계승되어 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 온 국사는 바로 이러한 불신론이 전제된 역사였다…<중략>…백제의 시조였던 온조측의 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을 보면 온조의 형이던 비류는 미추홀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삽입되어 있는 이설의 단편기록에는, 비류도 시조가되어 "동이강국(東夷强國)"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온조측의 초기기록은, 자기의 도읍지가 경기(京畿) 광주(廣州)임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부터 3백리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충남(忠南) 공주(公州)의 기사가 함께 나타남에 의심을 품고, 공주 쪽의 기록을 분리해 본 결과, 역시 비류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미추홀(지금의 아산 인주면)에서 40여 km가량 떨어진 공주로 옮겨 가서 별개의 나라를 세웠음이 밝혀졌다. 이것이 바로 古代三國(신라·고구려·백제)과 구별되어야 할 또 하나의 국가로서, 고대 초기에 있어서 "백제"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이어 그는, 이러한 백제 초기기록의 복원 결과는 광개토대왕 비문에서도 확인됨을 설명한 뒤 이 나라가 멸망한 이야기까지 적고 있다.
…공주를 근거지로 크데 번성했던 국가 비류백제는 경기만을 남하해 내려온 광개토왕의 수군(海軍)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396년 멸망하였다…
BC 18에 건국한 비류백제는 광개토왕에게 토멸된 AD396까지 무려 413년간을 존속한 고대 초기의 왕국이었다. 한중일 3국 문헌에서 공주 쪽의 백제 관계 기록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4백여 년 간에 걸친 역사의 맥락이 정연하게 재구성된다.
중국 송서와 양서 "백제전(百濟傳)"에서는 "백제는 막강한 수군력을 바탕으로 점점 강하고 커져서 여러나라를 병합하였다. 백제는 요동의 동쪽을 모두 차지해 백제군이라 이름했다" 했다.
사학계 일설에 백제의 영역은 중국 동부 황하문명의 심장부까지라고 하면서 요수 아래 하북성, 하남성 전체가 백제군이었다는 것인데, 이의 진위시비는 뒤에 두더라도, 어쨌든 막강한 수군으로 황해(黃海:西海) 연변의 백가제해(百家濟海)를 이룩했던 강인한 나라는 비류(沸流)의 백제였다. 때문에 광개토대왕은 수군(水軍)을 앞세워 비류를 먼저 굴복시켰던 것이다.
이 나라(沸流百濟)의 역사가 지금까지 망각되어 온 데에는 하나의 기묘한 이유가 있었다. 즉, 비류백제가 멸망하고 80년이 지나서 온조백제도 고구려의 침공을 받고 공주로 남천(南遷)했다. 그 이후 온조백제는 비류의 옛도읍(舊都)이던 공주를 마치 처음부터 자기의 영토인 것처럼 역사를 개서(改書)함으로 인해서 비류계의 역사는 말살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온조측의 기록이 건국 초부터 광주와 공주로 2중화된 것도 바로 비류계의 역사가 온조측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학계에서 백제 초기기록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했던 것도 실은 이러한 초기기록의 지역적 이중성이 파악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성호 씨는 이 비류백제의 멸망이 곧 일본의 국가기원(國家起源)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일본 천황국가의 기원은 비류백제의 멸망에서 밝혀진다. 396년 광개토왕이 비류백제를 토멸했을 때, 공주성을 탈출한 비류계의 왕족 일단은 일본열도로 쫒겨가서 망명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지금까지 신비의 베일에 싸여왔던 천황국가의 탄생이었다…
천황국가 일본의 제1대 천황은 신무(神武)이다. 이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즉위전사 7년(卽位前史 七年"이란 글과 함께 자주 겹치는 이름이 있는데 응신(應神)이다. 응신은 390년에 즉위한 비류백제 마지막 왕이었다.
…일본 사학계에서 "가장 확실한 최고(最古)의 천황"은 응신천황(應神天皇)으로 즉위 원년은 390년이다. 응신과 동일 인물로 지목되어 온 제1대 신무천황(神武天皇)의 "卽位前史 七年"을 더하면, 비류백제가 멸망한 다음 해(397년)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응신이 처음부터 일본의 천황이었던 것이 아니라, 비류백제의 마지막(15대) 왕으로서 390년 즉위한 후, 396년에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그 다음 해인 397년, 즉 즉위 7년째에 최초의 일본천황이 되었음을 뜻한다.
일본의 많은 사학자들은 제1대 신무(神武)와, 제15대 응신(應神)이 동일인물일 것으로 여겨 오면서도 신무의 "즉위전사 7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못해 왔다. 이 "前史 7年"이야말로 응신(神武)이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해서부터 최초의 천황이 되기까지의 7년에 해당한다. 이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양쪽에서 명백히 증명된다.
응신 조(朝)는 한민족(비류백제)의 망명정권이었기 때문에 응신 이후의 천황 성(性)은 비류계 왕성(王性)인 진(眞)씨로 되었던 것이며, 이 이후의 후기 고분으로부터는 전기에 없었던 백제계의 마제(馬制)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변진(弁辰)민족이 일본열도를 정복하여 천황가(天皇家)를 세웠다는 소위 "기마민족 정복설"도 이 전기와 후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급격하게 돌변하는 데에 근거된 것이었다…
김성호 씨는 또, 비류백제가 망명정부를 세우기 훨씬 이전인 서기 100년 경 기다큐슈(北九州)에 야마도(邪馬臺國)를 개설한 숭신(崇神) 역시 비류백제 왕실의 종친이었다고 하면서, 일본서기에 야마도를 "담로(淡路)"라 칭했는 데, 이는 비류백제의 군·현(君·縣)을 가리키던 담로(擔魯)와 일치한다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비류백제가 일본에 처음 진출한 것은 서기 100년 전후였고,왕실의 자제종친으로 "담로주"를 임명했는데 첫 담로주가 숭신(崇神)이었다는 것이며, 이로부터 296년이 지난 뒤 광개토왕에게 밀린 비류백제 마지막 왕 응신(應神)이 이를 근거로 이곳에 망명정부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물론 전력을 가다듬어 실지를 회복하려는 꿈을 가졌으나 차차 뒤로 미루게 되었고, 이윽고는 일본 천황가의 개조(開祖) 즉 신무(神武) 1세로서 다시 출발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김성호 씨의 주장과, 가락국 김수로 왕의 딸이 일본으로 건너가 여왕이 되었다는 김명배 교수의 주장은 180년 전후 히미꼬(卑彌呼)에 이르러 엇갈리는 부분이 생긴다. 김성호 씨의 글을 보자.
…비류백제 세력에 의해 야마도가 개설되어 70년 가량이 지나서 모계 원주왜인(母系原住倭人)에 세력기반을 갖고있던 신공(神功)황후 히미꼬가 네 번째의 담로주이던 중애(仲哀)를 죽이고 여왕(女王)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신공(神功)이 죽은 후 다시 양쪽의 충돌이 야기되어, 야마도의 역사는 269년 종말을 고했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신공과 히미꼬를 별개의 여인으로 보아왔으나, 실은 사망년도까지 일치하는 동일인이다…
그러나 김명배 교수는 김수로 왕의 두 딸중 하나가 일본으로 건너가 183년 여왕이 되었으며, 199년 거등왕 즉위년에 잠시 귀국하였다가 돌아갈 때 남동생(仙見)을 데려가 야마도를 다스린 것으로 밝히고 있다. 여왕이 곧 히미꼬(卑彌呼)이며 남동생이 신공(神功)이라는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옳든 간에 이러한 한·일 고대사는 여러분야에 심심찮은 파문을 던진다. 백제가 일본천황가의 전신(前身)처럼 되어버림에 따라, 백제의 옛 땅(故地)은 일본 천황가의 영지(領地)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여기 근거하면 고대 천황가가 남한지역을 지배했다는 "남한경영설(任那經營說)"도 어쨌든 성립된다. 또 일본의 교육이념을 주도해 온 전통적인 역사관이 한반도 강점을 침략으로 보지않고 고대 천황의 영지를 회복한 것처럼 여겨온 것 역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보면 납득되고 만다.
차문화 측면에서도 풀리지않는 의문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히미꼬라고 차 씨를 안 가져 갔을리 없다. 차나무는 이때 전해졌을 것이다. 또 가락국(駕洛國)의 차 이야기는 신라로 이어지는 반면, 백제인의 다풍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 이유도 어렴풋이 밝혀진다. 그것은 정복자 신라에 의해 말살된 역사가 아니었다. 그들이 가지고 이 땅을 떠난 역사였다.
부여 공주 이남이 비류백제의 영토였다고 보면 고대 차문화는 비류백제를 중심으로 피어났을 것이 당연하다. 그곳이 우리나라 최적(最適)의 차 산지(産地)이기 때문이다. 경기 광주의 온조백제 영토에까지 차가 있었다고 보여지진 않지만, 비슷한 시기 영남에 있던 차나무가 호남에는 없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비류백제의 기록이 깡그리 없어졌기에, 백제인의 차생활 흔적도 찾을 수 없게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이미 짐작이 갈 것이다. 일본 차문화의 뿌리가 곧 백제인의 차생활이요 그 자체였던 것이다
원시나 상고시대, 집단을 이루며 사는 정주민(定住民)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두 말 할 것 없이 그것은 물이며, 따라서 가장 강한 민족이 가장 좋은 물이 있는 땅을 차지하게 된다. 이 가설을 토대로 한다면 한반도를 택한 민족은 결코 약한 민족이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물이 철철 넘치는 땅이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공자(孔子)가 늘 와서 살고 싶어한 군자국(君子國)이 우리나라 아닌가.그리고 차는 좋은 물을 더욱 고급스럽게 마시는 방법이다. 멋을 아는 민족만이 택할 수 있는 지혜(智慧)의 산물(産物)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 두 가지 추정만으로도 한민족의 위상은 금세 당당해질 수 있다.
그러면 한반도에 차나무는 어느 때 생겨났고 차생활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일반적인 견해가 어떠하든 우리의 차 이야기는 가락국(駕洛國) 건국신화(建國神話)와 함께 시작한다. 이능화(李能和/1869-1943)는 조선불교통사에 다음과 같은 귀한 기록을 남겼다.
…김해 백월산(白月山)에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종자를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장백산(長白山)에도 차가 있는데 백산차(白山茶)라 한다…
인도로부터 차 전래설은 긍정할 수밖에 없다.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허황옥(許黃玉)이 엄염한 실존인물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적힌 그대로를 사실로 받아 들이자. 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와, 하늘의 뜻대로 지상을 다스린 첫 군왕(君王)이다. 그리고 허황옥은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태어났는 데 꿈의 계시로 수로왕에게 시집왔다.
허 공주는 서기 48년 음력 5월, 리만 해류를 타고 고국을 떠나 7월 27일 김해 별진포에 상륙하였다. 수행원 20여 명과 함께 타고 온 그녀의 배에는 비단·금·은 패물 등이 가득했는데 이 속에 차나무 씨도 있었다.
차나무는 심은 자리에서만 살도록 천명(天命)을 받은 나무이다. 허황옥이 차나무씨를 가져온 것은 "나는 이제 옮겨가선 살 수 없는 가락국 사람"이란 뜻이었다. 수로왕은 이 차끼를 김해에 심도록 했다. 여자가 시집갈 때 차나무 씨를 가져가 뒷뜰에 심는 풍습은 이로부터 생겨났다.
허 공주가 꿈의 계시에 따라 가락국 김수로왕에게 시집와서 생애를 마쳤다는 것은 가락국기(駕洛國記) 외에 유사(遺事)의 금관성 비사석탑,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수로왕비릉(陵), 그리고 김해 허씨 후손에 의해서도 고증된다. 또 수로왕릉 중수기념비의 머리에 새겨진 여덟마리 뱀 무늬는 태양왕조를 상징하는 아유타국의 깃발 문양과 같고, 마주보는 신어상(神魚像), 두 개의 활무늬 역시 아유타에 뿌리를 둔 것들이다.
이 때에 차가 있었다는 사실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거등왕이 즉위년인 199년에 제정한 세시풍속(歲時風俗)에 떡·밥·차·과일 등을 갖추어 다례(茶禮)를 지내도록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 김유신이 수로왕의 12대 손이다. 문무왕에게는 김수로 왕가가 외가 쪽 조상이 된다. 이렇게 혈통이 이어진 관계로 김수로 왕은,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된 뒤에도 오랜동안 가야의 시조(始)로 봉사(奉祀)되었고 다례 풍습도 이어졌다. 이는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오기 3백 년 내지 6백 년 전의 이야기다.
차문화의 학문적 연구에 반생을 바친 김명배(金明培·숭의여전) 교수는 허황옥과 죽로차의 전설을 쫒던 중 비밀스런 역사에 접근하게 된다.
허 왕후는 모두 10남 2녀를 낳았는데 태자는 거등왕이 되었고 거칠군이라는 왕자는 진례성주(進禮城主)가 되었다. 그리고 일곱명의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長遊和尙)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성불(成佛)했다. 지금의 칠불사(七佛寺)가 그곳으로 약 1800년전 이들 일곱왕자가 성불한 이후 칠불암(七佛庵)이라 이름 지어졌다. 그리고 두 공주 중 한명은 신라 탈해왕의 태자비가 되었다.
기록은 그것 뿐이다. 9남 1녀에 대해서는 이렇게 상세히 전하고 있는데 한 명의 왕자와 한 명의 공주 행방은 없는 것이다. 김교수는 이들 남매의 흔적을 "김씨왕세계"에서 찾아냈다.
…거등왕 즉위년에 왕자 선견(仙見:神功)은 신녀(神女)를 따라 구름을 타고 떠났다. 거등왕이 도읍의 언덕 돌섬에 올라 선견을 불렀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거등왕 즉위년은 서기 199년이다. 신녀를 공주로 본다면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나 왜인전(倭人傳)에 들어있는 일본 고대국가 야마도(邪馬臺)의 히미꼬(卑彌呼) 여왕과 그의 남동생 이야기와 맞아 떨어진다. 왜인전의 기록을 보자.
…모두 함께 한 여자를 내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이름을 히미꼬라 하였다. 귀신의 도를 섬겨 능히 무리를 감동시켰다. 나이가 찼지만 남편이 없었는데 후에 남동생이 나타나 나라 다스리는 일을 도왔다….
여왕은 183년에 옹립되어 247년 붕어하였다 했다. 왕이 된 후 신녀(神女)로 불리웠을 그녀가 199년, 고국에 들러 국사를 보필할 남동생을 데리고 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 가설은 일본 사학자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저명한 사학자 이노우에(井上光貞)는 그의 저서 "일본국가의 기원(日本國家の起源)"에서, 히미꼬는 한반도와 관계있는 여성으로 보인다고 했고, 진구우(神功) 역시 한반도에서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왕의 위폐를 모신 묘오겐궁(妙見宮)에서 볼 수 있는 신어상(神魚像)이 김해 수로왕릉의 것과 같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히미꼬 여왕이 김수로 왕의 딸이라면 차나무도 이때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히미꼬 여왕시대부터 차나무가 있었다"는 일본 고고학계의 주장이 맞는 것이 된다.
이 히미꼬 이야기는 뒤에 소개되는 김성호(金聖昊)의 "비류백제(沸流百濟)와 일본의 국가기원(國家起源)"에서 더 발전된다. 가야의 유민 중 신라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김유신 외에 우륵(于勒)·강수(强首) 정도이다.
또 가야가 쇠퇴하여 신라에 완전 합병된 시기는 6세기 중엽이다.
신라인의 차생활을 엿보게 하는 일화로는 시승(詩僧) 충담(忠談)선사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충담 이야기는 찬기파랑가로 시작된다.
경덕왕 시절 국선 화랑 중에 기파랑(耆婆郞)이란 낭도가 있어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성품이 고결하고 인품이 넉넉하여 남들이 감히 따를 수가 없었다. 충담은 그를 찬(讚)하는 노래를 지었다.
헤치고 나타난 달
흰구름 따라 흐르니
새파란 시내에
기파랑 모습 잠기네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랑(郞)의 지니신 마음 읽으니
아아, 드높은 잣나무 가지
서리모를 씩씩함이여
충담이 지은 찬 기파랑가(歌)는 장안의 유행가가 되었다. 임금도 신하도 뭇백성들도 즐겨 불렀다.
경덕왕 치세 20년이 지나면서, 오악(五岳) 삼산신(三山神)이 궁전 뜰에 불쑥 현신하는 등 나라 안팎에 심상치않은 불길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23년(765년) 봄 경덕왕은 착잡한 마음으로 경주 귀정문(歸正門)에 올랐다. 신하를 대동하고 문루에 오른 경덕왕은 "근자의 괴변을 막고 나라를 잘 다스릴 방법이 없을까?…"를 골똘히 생각했다.
궁리 끝에 경덕왕은 훌륭한 스님을 한 분 모셔오라고 했다. 이에 신하들이 장안 제일의 원로스님을 모시고 왔다. 그런데 왕은 몇 마디 나누지 않고 이 분은 내가 찾는 스님이 아니라며 돌려보냈다.
문루 끝에 서서 남산을 바라보던 경덕왕의 눈에 멀리 걸어오는 한 스님이 보였다. 낡은 납의(衲衣)에다 등에는 걸망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다. 왕은 스님을 루상(樓上)으로 모시도록 했다.
"스님은 누구신가요?"
경덕왕이 묻자 스님은 충담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기파랑가를 지으신 스님입니까?"
경덕왕은 크게 기뻐하며 예를 갖추고 다시 물었다.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남산 삼화령에서 오는 길입니다. 소승은 삼월삼짇날과 구월 구일이 되면
언제나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드렸습니다. 오늘이 삼월삼 짇날이어서 다녀오는 길입니다"
"어떤 차입니까? 나에게도 그 차를 나누어 줄 수 있습니까?"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님은 등에 진 걸망을 풀었다. 걸망 속에는 차와 다구가 들어있었다.
정성껏 차를 달여 경덕왕께 드리니 왕은 그 맛의 훌륭함과 기이한 향기를 극찬했다. 충담은 주위의 신하들에게도 고루 차를 나누어 주었다. 뜻밖의 다회가 벌어진 것이다. 경덕왕은 또 말했다.
"스님이 지으신 사뇌가(詞腦歌:찬기파랑가)는 그 뜻이 매우 고상하여
온 백성이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하
나 지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즉석에서 안민가를 지어 올렸다.
임금(君)은 아버지요, 신(臣)은 인자한 어머니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와 같으니
아이가 어찌 부모의 크신 은혜 다 알리요.
꾸물거리며 사는 중생 먹여 살리시니
그 은혜로 나라가 유지되네
왕이 왕다웁고 신이 신다웁고 백성이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라
경덕왕은 크게 기뻐하며 충담을 왕사(王師)로 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충담은 거듭 사양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이는 대렴이 당(唐)에서 차 종자를 가져왔다는 흥덕왕 3년에서 보면 63년전의 일이다. 문운의 황금시대였던 경덕왕 시절이 아니더라도 이때에 이미 차가 불공에 쓰이고 궁정에서 예폐물로 다루었던 사실은 드러난 것이 되었다.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조에 적힌 내용을 훌륭하게 뒷받침한다.
…흥덕왕 3년(828년) 당(唐) 사신 대렴(大廉)이 차 종자(種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는 것인데 이때에 와서 아주 성해졌다…
여기서도 분명해지는 것은 중국으로부터 차 종자가 들어오기 이전 우리에게 차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귀족 문화였을지는 몰라도 이미 차생활이 있었기에 중국을 다녀오는 사신도 차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흥덕왕 3년에 "중국의 차 종자"가 전래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한국의 차생활 역사가 이때, 즉 828년에 시작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일은 앞으로는 없어져야 한다.
신라인들이 마시던 차를 유사(遺事)에서는 전차(煎茶)라 전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남행월일록(南行月日錄)에는 점차(點茶)로 적혀있다. 전차란 잎을 우려 마시는 엽차(葉茶)요, 점차는 잎을 연( )에 갈아 가루로 만든 뒤 뜨거운 물에 풀어마시는 말차(抹茶)를 일컫는데 사학계(史學界) 견해는 두 가지 형식이 함께 있었다는 쪽이다. 다만 엽차보다 말차 음다법이 더 성행하였을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은다. 이때의 분위기는 신라말기 국사를 지낸 고승 혜소(慧昭774-850)의 비문에서 엿볼 수 있다.
…누가 한명(漢茗/茶의 異名)을 보내오면 그(眞鑑國師)는 그것을 돌로 만든 가마에 넣고 나무를 때서 삶았다. 가루로 만들지 않고 달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모른다. 그저 배가 느긋할 뿐이다"라고 했다. 국사(國師)가 정진(正眞)을 지켜 세속(世俗)을 미워함이 다 이와 같았다…
혜소, 즉 진감국사 비문을 쓴 이는 고운(孤雲) 최치원이다. 그는 이 비문에서 신라말기 우리 사회의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당시 일반에 널리 음용되고 있던 것은 말차였는데, 누가 중국차를 보내오면 일부러 신라의 방식으로 가루내어 마시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신라인의 차생활은 원효(元曉617-686)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그가 인적 드문 변산의 한 산마루 외딴 암자에서 선(禪)에 정진할 때의 일이다. 시중들던 사포가 차를 달여 드리고자 하였으나 물이 없었다. 간절히 물을 원하니 홀연 바위틈에서 젖과 같이 달콤한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포는 원효께 차를 달여 드릴 수 있었다. 후일 이곳을 찾은 고려의 시인 이규보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좁고 험한 산길 지나 백 길은 됨직한 산 위
일찌기 지어진 효성(曉聖)의 암자
신령스런 자취는 어디에 있는가. 영정만 종이 폭에 남았구나
다천(茶泉)에 고인 옥빛 샘물 마셔보니 천하일품
예전에는 물 없어 불승(佛僧) 머무르기 어려웠는데
원효대사 머물 때에 솟아난 샘이라네
우리 스님 높은 뜻 이어받고자 누더기 걸치고 이곳에 들어
시중드는자 없이 홀로 앉아 세월 보내네
문득이라도 소성(小性/원효의 이명) 올라 오시면
얼른 일어나 허리굽혀 절할 것이로세
29세에 출가한 원효는 34세 때에 의상(義湘)과 함께 불법을 닦고자 당나라로 향한다. 요동(遼東)을 지나던 중 공동묘지에서 하룻밤을 지내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한그릇 마셨다. 이튿날 깨어보니 그 물은 해골 속의 더러운 물이었다. 안간힘을 다해 토해내려고 하던 중 원효는 깨달음을 얻었다.
"마음이 살아야 모든 사물과 법이 생기를 얻는다. 마음이 죽으면 해골이나 다름없구나(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壻?不二). 삼계(三界)가 마음에서 지어진다 하신 것을 어찌 잊었더냐(一切唯心造)"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발길을 돌려 경주로 돌아와 분황사(芬皇寺)에서 불경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좌선입정(坐禪入定)하여 계율을 철처히 지키는 수도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당시의 불교가 형식에 치우쳤던 것에 과감히 맞서 불교의 대중화를 시도했는데 그 일련의 과정들이 차생활을 통해 다져졌을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내성적이면서 동시에 호탕한 일면도 가지고 있던 원효는 어느 날 이런 노래를 지었다.
…도끼에 자루를 끼게할 자는 없는가. 내가 하늘 받칠 기둥을 깍아야겠구나…
사람들은 그 노래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원효는 아무 소리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를 전해들은 무열왕(武烈王)은 "대사가 부인을 얻어 현자(賢者)를 낳고자 하는 것이다"고 해석하며 홀로있는 요석공주를 생각했다. 이윽고 원효는 요석공주를 만나게 된다. 춘원 이광수는 "원효대사"에서 원효와 요석이 만나는 대목을 다음같이 묘사하고 있다.
…원효는 시녀가 이끄는대로 여러 복도를 지나서 한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쌍학을 수놓은 이불과 쌍봉, 쌍란, 쌍원앙을 수놓은 긴 베개가 있고 요석공주가 혼자 촛불 밑에 앉아 있었다. 원효는 방에 들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공주는 원효를 보고 일어나서 읍하고 섰다. 백작약 일곱송이를 꽂아놓은 것으로 보아서 원효는 이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공주는 자기를 구리선녀로 자처하고 원효를 선에 선인으로 비겨서 세세생생에 부부되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촛불이 춤을 추고 창밖에서는 벌레소리가 울려왔다. 이윽고 공주가 고개를 들어 "앉으시오. 오늘은 법사로 여쭌 것이 아니요, 백의로 오시게 한 것입니다. 이 몸의 십년 소원을 이뤄 주십시오"하고 눈물을 떨구었다.
아무리 십 년 동안 먹은 마음이라 하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기가 힘들기도 하려니와 또 무섭기도 하였다. 원효도 제 몸에 입은 옷이 중의 옷이 아니요 속인의 옷인 것을 다시 보고 공주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공주도 한 무릎 세우고 앉았다. 공주는 다로(茶爐)에 끓는 다부(茶釜)에서 대극으로 물을 떠서 차를 만들어 원효에게 권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새벽 쇠북 스무여덟 소리가 다 끝나도록 원효사마께서 아니오시면 이 칼로 이 몸의 목숨을 끊기로 마음먹고 있었오"하고 공주는 금장식한 몸칼을 몸에서 꺼낸다. 고구려 도장이 만든 칼이었다…
이것은 대충 서기 655년 전후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요석공주가 원효에게 만들어 대접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점다(點茶), 즉 말차이다. 삼국사기 흥덕왕 조에 대렴을 논하면서 차는 선덕왕(632∼647) 때부터 있어왔는데… 한 대목을 훌륭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원효는 요석 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얻었다.
신라의 다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분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다. 어린 나이에 당나라 유학을 가서 천재적인 문장으로 온 중화국(中華國)을 뒤흔들었던 고운은, 귀국 후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부귀영화를 한낱 뜬구름처럼 여기고 지팡이를 벗삼아 방랑하며 곳곳에 많은 詩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중국에 있을 당시 인편이 있을 때마다 고향의 어머니께 차를 보내드리곤 했는데 이는 삼국지의 유비현덕이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차를 구해드리기 위해 멀고 위험한 여행을 떠났던 사실을 연상하게 한다. 어쩌다 인편이 없어 차를 보내드리지 못할 때면 몹시 마음 조렸던 일들이 그의 시문집(詩文集·桂苑筆耕)을 보면 간간 들어있다.
통일신라 이전의 차는 불전 공향과 승려들의 수도용으로 사찰 안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특히 수도자에게 있어 차는 잠을 쫓아주고 소화를 돕고, 정신을 맑게하는 효능으로 좌선(坐禪)의 유적현묘(幽寂玄妙)함을 도와주어 선승(禪僧)들에게 아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차가 불교의 전래와 함께 들어와 승려들 간에 성행하였다고 하지만, 그러나, 차와 불교의 만남은 신라통일 무렵에나 이루어 졌다. 이미 독자들도, 앞에서 살펴본 사실만으로 불교를 따라 전래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는데 동감할 것이다.
당에서 차 종자를 가져온 것도 승려가 아닌 당 사신 대렴(大廉)이었고 이를 지리산에 심게한 이도 흥덕왕이었다. 또 차는 그痼막?시작된 게 아니라 이미 있었는데 이 때에 와서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고 했다. 화랑들이 차생활로 심신을 수련하였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후일 삼국을 통일시키는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차는 불교와 관계없이 번진 것이다.
신라인들이 차를 마시는 데 있어 어떤 통일된 형식이나 예법을 가졌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차는 군자의 기질과 덕을 지니고 있어, 맑고 곧은 예지와 함께 관용의 미덕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고, 맑은 인격과 고매한 학덕과 예(藝)를 고루 갖춘 지성을 "다인(茶人)"이라 하는 풍습이 - 그리고 그 부름이 선비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관칭대명사로 인식되어 명정(銘旌)에 기록되는 것을 최상의 영예로 여기는 풍습이 -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시대 고구려·백제의 차생활을 전해주는 기록은 없다. 고구려는 북쪽에 위치하여 차의 재배 생산이 어려웠다손 치더라도 호남의 따뜻한 지방을 영토로 했던 백제에 차 마시는 습속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볼 때도 신라 쪽인 경상도 지역보다 백제 영역이었던 전라도 방면의 기후나 토양이 차나무 재배에 더 적합하고, 따라서 차 산출 역시 몇십 배나 많을 수 있다는 가정(假定)에서 백제인들의 음차생활 진위는 유난히 궁금해 진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김성호(金聖昊)의 "비류백제(沸流百濟)와 일본(日本)의 국가기원(國家起源)"을 인용해 볼 필요가 있다. 백제의 역사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는데 짙은 의문을 품었던 그는 15년간에 걸친 집요한 답사와 연구를 거쳐 백제는 하나가 아닌, 2개의 국가였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 역사 연구가 일본인들에게 강점되었던 시대에 일본사학자들은 근 3∼4백 년간에 걸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불신했고, 이러한 풍조는 우리 사학자들에게 고스란히 계승되어 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 온 국사는 바로 이러한 불신론이 전제된 역사였다…<중략>…백제의 시조였던 온조측의 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을 보면 온조의 형이던 비류는 미추홀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삽입되어 있는 이설의 단편기록에는, 비류도 시조가되어 "동이강국(東夷强國)"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온조측의 초기기록은, 자기의 도읍지가 경기(京畿) 광주(廣州)임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부터 3백리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충남(忠南) 공주(公州)의 기사가 함께 나타남에 의심을 품고, 공주 쪽의 기록을 분리해 본 결과, 역시 비류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미추홀(지금의 아산 인주면)에서 40여 km가량 떨어진 공주로 옮겨 가서 별개의 나라를 세웠음이 밝혀졌다. 이것이 바로 古代三國(신라·고구려·백제)과 구별되어야 할 또 하나의 국가로서, 고대 초기에 있어서 "백제"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이어 그는, 이러한 백제 초기기록의 복원 결과는 광개토대왕 비문에서도 확인됨을 설명한 뒤 이 나라가 멸망한 이야기까지 적고 있다.
…공주를 근거지로 크데 번성했던 국가 비류백제는 경기만을 남하해 내려온 광개토왕의 수군(海軍)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396년 멸망하였다…
BC 18에 건국한 비류백제는 광개토왕에게 토멸된 AD396까지 무려 413년간을 존속한 고대 초기의 왕국이었다. 한중일 3국 문헌에서 공주 쪽의 백제 관계 기록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4백여 년 간에 걸친 역사의 맥락이 정연하게 재구성된다.
중국 송서와 양서 "백제전(百濟傳)"에서는 "백제는 막강한 수군력을 바탕으로 점점 강하고 커져서 여러나라를 병합하였다. 백제는 요동의 동쪽을 모두 차지해 백제군이라 이름했다" 했다.
사학계 일설에 백제의 영역은 중국 동부 황하문명의 심장부까지라고 하면서 요수 아래 하북성, 하남성 전체가 백제군이었다는 것인데, 이의 진위시비는 뒤에 두더라도, 어쨌든 막강한 수군으로 황해(黃海:西海) 연변의 백가제해(百家濟海)를 이룩했던 강인한 나라는 비류(沸流)의 백제였다. 때문에 광개토대왕은 수군(水軍)을 앞세워 비류를 먼저 굴복시켰던 것이다.
이 나라(沸流百濟)의 역사가 지금까지 망각되어 온 데에는 하나의 기묘한 이유가 있었다. 즉, 비류백제가 멸망하고 80년이 지나서 온조백제도 고구려의 침공을 받고 공주로 남천(南遷)했다. 그 이후 온조백제는 비류의 옛도읍(舊都)이던 공주를 마치 처음부터 자기의 영토인 것처럼 역사를 개서(改書)함으로 인해서 비류계의 역사는 말살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온조측의 기록이 건국 초부터 광주와 공주로 2중화된 것도 바로 비류계의 역사가 온조측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학계에서 백제 초기기록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했던 것도 실은 이러한 초기기록의 지역적 이중성이 파악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성호 씨는 이 비류백제의 멸망이 곧 일본의 국가기원(國家起源)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일본 천황국가의 기원은 비류백제의 멸망에서 밝혀진다. 396년 광개토왕이 비류백제를 토멸했을 때, 공주성을 탈출한 비류계의 왕족 일단은 일본열도로 쫒겨가서 망명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지금까지 신비의 베일에 싸여왔던 천황국가의 탄생이었다…
천황국가 일본의 제1대 천황은 신무(神武)이다. 이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즉위전사 7년(卽位前史 七年"이란 글과 함께 자주 겹치는 이름이 있는데 응신(應神)이다. 응신은 390년에 즉위한 비류백제 마지막 왕이었다.
…일본 사학계에서 "가장 확실한 최고(最古)의 천황"은 응신천황(應神天皇)으로 즉위 원년은 390년이다. 응신과 동일 인물로 지목되어 온 제1대 신무천황(神武天皇)의 "卽位前史 七年"을 더하면, 비류백제가 멸망한 다음 해(397년)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응신이 처음부터 일본의 천황이었던 것이 아니라, 비류백제의 마지막(15대) 왕으로서 390년 즉위한 후, 396년에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그 다음 해인 397년, 즉 즉위 7년째에 최초의 일본천황이 되었음을 뜻한다.
일본의 많은 사학자들은 제1대 신무(神武)와, 제15대 응신(應神)이 동일인물일 것으로 여겨 오면서도 신무의 "즉위전사 7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못해 왔다. 이 "前史 7年"이야말로 응신(神武)이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해서부터 최초의 천황이 되기까지의 7년에 해당한다. 이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양쪽에서 명백히 증명된다.
응신 조(朝)는 한민족(비류백제)의 망명정권이었기 때문에 응신 이후의 천황 성(性)은 비류계 왕성(王性)인 진(眞)씨로 되었던 것이며, 이 이후의 후기 고분으로부터는 전기에 없었던 백제계의 마제(馬制)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변진(弁辰)민족이 일본열도를 정복하여 천황가(天皇家)를 세웠다는 소위 "기마민족 정복설"도 이 전기와 후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급격하게 돌변하는 데에 근거된 것이었다…
김성호 씨는 또, 비류백제가 망명정부를 세우기 훨씬 이전인 서기 100년 경 기다큐슈(北九州)에 야마도(邪馬臺國)를 개설한 숭신(崇神) 역시 비류백제 왕실의 종친이었다고 하면서, 일본서기에 야마도를 "담로(淡路)"라 칭했는 데, 이는 비류백제의 군·현(君·縣)을 가리키던 담로(擔魯)와 일치한다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비류백제가 일본에 처음 진출한 것은 서기 100년 전후였고,왕실의 자제종친으로 "담로주"를 임명했는데 첫 담로주가 숭신(崇神)이었다는 것이며, 이로부터 296년이 지난 뒤 광개토왕에게 밀린 비류백제 마지막 왕 응신(應神)이 이를 근거로 이곳에 망명정부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물론 전력을 가다듬어 실지를 회복하려는 꿈을 가졌으나 차차 뒤로 미루게 되었고, 이윽고는 일본 천황가의 개조(開祖) 즉 신무(神武) 1세로서 다시 출발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김성호 씨의 주장과, 가락국 김수로 왕의 딸이 일본으로 건너가 여왕이 되었다는 김명배 교수의 주장은 180년 전후 히미꼬(卑彌呼)에 이르러 엇갈리는 부분이 생긴다. 김성호 씨의 글을 보자.
…비류백제 세력에 의해 야마도가 개설되어 70년 가량이 지나서 모계 원주왜인(母系原住倭人)에 세력기반을 갖고있던 신공(神功)황후 히미꼬가 네 번째의 담로주이던 중애(仲哀)를 죽이고 여왕(女王)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신공(神功)이 죽은 후 다시 양쪽의 충돌이 야기되어, 야마도의 역사는 269년 종말을 고했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신공과 히미꼬를 별개의 여인으로 보아왔으나, 실은 사망년도까지 일치하는 동일인이다…
그러나 김명배 교수는 김수로 왕의 두 딸중 하나가 일본으로 건너가 183년 여왕이 되었으며, 199년 거등왕 즉위년에 잠시 귀국하였다가 돌아갈 때 남동생(仙見)을 데려가 야마도를 다스린 것으로 밝히고 있다. 여왕이 곧 히미꼬(卑彌呼)이며 남동생이 신공(神功)이라는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옳든 간에 이러한 한·일 고대사는 여러분야에 심심찮은 파문을 던진다. 백제가 일본천황가의 전신(前身)처럼 되어버림에 따라, 백제의 옛 땅(故地)은 일본 천황가의 영지(領地)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여기 근거하면 고대 천황가가 남한지역을 지배했다는 "남한경영설(任那經營說)"도 어쨌든 성립된다. 또 일본의 교육이념을 주도해 온 전통적인 역사관이 한반도 강점을 침략으로 보지않고 고대 천황의 영지를 회복한 것처럼 여겨온 것 역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보면 납득되고 만다.
차문화 측면에서도 풀리지않는 의문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히미꼬라고 차 씨를 안 가져 갔을리 없다. 차나무는 이때 전해졌을 것이다. 또 가락국(駕洛國)의 차 이야기는 신라로 이어지는 반면, 백제인의 다풍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 이유도 어렴풋이 밝혀진다. 그것은 정복자 신라에 의해 말살된 역사가 아니었다. 그들이 가지고 이 땅을 떠난 역사였다.
부여 공주 이남이 비류백제의 영토였다고 보면 고대 차문화는 비류백제를 중심으로 피어났을 것이 당연하다. 그곳이 우리나라 최적(最適)의 차 산지(産地)이기 때문이다. 경기 광주의 온조백제 영토에까지 차가 있었다고 보여지진 않지만, 비슷한 시기 영남에 있던 차나무가 호남에는 없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비류백제의 기록이 깡그리 없어졌기에, 백제인의 차생활 흔적도 찾을 수 없게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이미 짐작이 갈 것이다. 일본 차문화의 뿌리가 곧 백제인의 차생활이요 그 자체였던 것이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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