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새 왕조를 세웠음에도 문화·전통은 신라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계승 발전시키려고 힘썼다. 개성을 건설함에 있어 서라벌을 본따도록 하였으며 일반의 생활양식도 신라의 것을 그대로 이어갔다.
불교도 고려시대에 더욱 발전했다. 고려 때는 특히 임금도 불타(佛陀)의 제자를 자처했던만큼, 손수 불공을 위한 말차를 위해 풀매를 돌리는 일이 흔했다고 고려사(高麗史)는 전하고 있다.
주요 국가 행사에 진차(進茶)의식이 반드시 앞서고, 다방(茶房)이라는 차 전담관청이 만들어져 궁중에 큰 연회가 일을 때 다과(茶菓) 준비하는 일을 담당했다. 승려들의 음차풍는 더욱 깊고 넓어졌고, 사원(寺院) 주변에는 차 농사를 전문으로 삼는 다촌(茶村)이 번성했다.
고려시대 규모가 컸던 궁중행사로 봄의 연등회(燃燈會)와 가을의 팔관회(八關會)를 꼽을 수 있는데, 이러한 행사 앞에는 반드시 진차(進茶) 의식을 가졌었다. "진차"란 주과식선(酒果食膳)을 올리기 전에 임금께 차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진차하라 명하면 집례관은 전(殿)을 향하여 국궁(鞠躬) 배례(拜禮)한 후 차를 올린다. 임금은 다시 태자 이하 시신제관에게 차를 하사한다. 모두의 앞에 차가 놓이면 집례관은 배례를 청한다. 그러면 모두 일어나 임금이 주신 차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두 번 절한 뒤 집례관의 집전에 따라 차를 마시고, 다 마시고 난 후엔 읍한다…
이것이 고려사 상원연등회의조에 있는 연등일의 진차인데 팔관회 때 진차하는 방법도 이와 같았다. 다만 다식(茶食) 쓰는 것은 팔관회에 국한했다고 했는데 이유는 분명치 않다. 팔관회가 왕도(王都)에서만 행하여진 반면 연등회는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거행되었다는 점에서 연등회 의식이 더 규모가 큰 대중적 행사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진차의식을 보면 고려시대에 까다로운 행차예절(行茶禮節)이 있었지 않나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술을 올리거나 진지를 올릴 때도 집례관이 전을 향하여 "잡수십사"하며 국궁 배례하였다 하고, 임금이 시신에게 주과(酒果)를 내리면 집례관의 청에 따라 모두 일어나 두 번 절하고 읍하는 것도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는 궁중의 법도에 근거한 예절로 보는 게 타당하다.
고려 왕실은 이외에도 중요 행사마다 차 의식을 행했다. 왕비, 왕자 책봉시와 공주 하가의(下嫁儀), 대관전에서의 군신 연회나 노인 사연(賜宴), 또 외국 사신을 맞을 때와 상례(喪禮) 등에 차가 행해졌다. 다방(茶房)관리들은 임금 행차시 다구를 갖추어 수행하기도 하였다.
고려인의 차생활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자료로는 흔히 고려도경(高麗圖經)이 인용된다. 이는 이는 송나라 국신사 일행으로 고려에 와서 약 1개월간 송도에 머물었던 서긍(徐兢1091∼1153)의, 현장감이 담긴 기록이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자신이 어느 관리의 집에 초대를 받아 차를 대접받은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초대받은 일행이 나란히 앉자 주인의 아들이 다과를 올렸고, 이어 예쁜 젊은이가 찻잔을 돌렸다. 왼손에 차주전자를 들고, 바른손으로 차선을 끌었다. 윗자리부터 차를 따르기 시작하여 아랫자리에 이르는 동안 조심하여 조금도 어수선하거나 혼잡함이 없었다…
…무릇 연회 때면 뜰 가운데에서 차를 달여 은하(銀荷)로 덮어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데, 의식의 진행자가 "차를 다 돌렸오"라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었으므로 으례 냉차(冷茶)를 마시기 마련이었다. 하루에 세 번 차를 내 오고, 차에 이어 더운물을 내 오는데, 고려 사람들은 이를 약이라고 하며, 손님이 다 마시면 기뻐하고 다 마시지 않으면 주인을 방만히 여김이라하여 불쾌함을 나타냈다. 그래서 억지로 차를 마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서긍은 고려도경에 차조를 따로 두었을만큼 차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그는 송인(宋人)인만큼, 송나라 중심으로 고려의 차를 기술한 부분도 적지않다. 때론 송인의 입맛에 거슬린다고 형편없이 매도한 부분도 있다.
…고려의 차는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러므로 고려인들은 납차(臘茶)와 더불어 송(宋)의 용·봉단(龍·鳳團)을 귀하게 여긴다. 용·봉단은 송나라 제실어용(帝室御用)인 귀한 차인데 예물로 오기도 하지만 부족하여 상인을 통해 구입하기도 한다. 고려사람들은 차 마시기를 즐기는 것 못지않게 다구(茶具)를 잘 다스렸는데 금화오잔(金花烏盞: 황금무늬가 있는 검은 잔)과 비색소구(翡色小具)와 은로(銀爐)와 물끓이는 소부(小釜)가 모두 중국의 것을 본땄다…
이와같은 고려도경의 문구들은, 우리 선조들이 가야·신라시대 이전부터 차마시기를 즐겼고 고려에 와서 그 풍습이 더욱 넓게 번져, 생활문화의 중심으로 삼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 상기해도 신뢰성이 약해진다.
매도한 부분은 그렇지만, 길을 가는 데 만나는 사람마다 "차 한 잔 마시고 가라"하여 접대받은 일까지 상세히 기술함으로서, 고려시대 차가 얼마만큼 민중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어 있었는지를 엿보게 하는 데, 좋은 자료를 남겼음에는 틀림없다.
살펴보면 고려인이 즐긴 것 역시 말차(抹茶)였다. 말차는 찻잎을 쪄서 말려 고형물(固形物)로 두었다가, 필요할 때 풀매로 갈아 가루를 만들고, 이를 끓이거나 끓는 물에 풀어 마셨던 것인데, 당시에는 "차" 하면 대개 이 말차를 일컬었던 것 같다.
차를 가루로 만드는 기구는 연다마( 茶磨), 다마(茶磨)라고 불렀다. 돌로 만들어진 풀매 종류로되 그 모양이 풀매와는 달랐다. 고려인들은 이러한 다마에 차를 갈아 가루로 만들었다. 석제의 둥근 바퀴를 한 팔로 돌리는데, 천천히 돌릴 때마다 옥가루가 쏟아진다는 시구는 말차를 만드는 광경이다.
돌 쪼아 만든 바퀴같은 맷돌
빙빙 돌리니 한 팔이 수고롭다
그대 어찌 차를 즐기지 않으랴만
나의 초당에 다마(茶磨)를 보냈구나
내 즐김이 그대보다 깊다하여
보내준 것이련가.
푸르고 향기로운 가루 날리니
그대 뜻 더욱 고마워지네
마실 때의 차를 일컬어서는 한 잔, 두 잔 하며 잔(盞)을 썼지만, 고형차 상태에서는 각(角)을 단위로 썼다. 고려 성종 8년, 최승로(崔承老)의 죽음을 슬퍼하며 왕실이 보낸 부의(賻儀)에 뇌원차 200각이 있었다 했고, 또 문종 때는 80세 이상 국로에게 뇌원차 30각 씩을 하사했다고 했다.
고형차, 즉 단차(團茶)는 만들 때의 형태에 따라 이름을 달리 했는데, 요즘의 다식(茶食)처럼 둥글 납작하게 만들어 용·봉황 무늬 넣은 것을 용봉단차(龍鳳團茶)라 하였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엽전 모양으로 만들어서는 전차(錢茶)라 하였으며, 또 네모지게 만들기도 했는 데 고려시대에는 네모지게 만들어 그 단위를 각(角)이라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형태로 만들어 두었든지 간에 이를 마시는 방법은 다마, 즉 차맷돌에 갈아 사루로 낸 뒤 끓이거나 쓿는 물에 풀어 마셨다.
찻잎을 채취하는 시기에 따라 차의 품질 등급이 매겨짐은 앞에서 밝힌 바 그대로이다. 채다(採茶)는 4월 중순부터 시작되어 5월 하순까지 계속되는 게 일반이다. 그런데 간혹 그보다 일찍 차를 얻는 경우가 있어 대시인(大詩人)으로 하여금 예찬의 노래를 만들게 했다. 고려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분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유차시(孺茶詩)를 음미해 보자.
소개하는 시는 이규보가 운봉(雲峰)에 사는 고승 노규선사(老珪禪師)로부터 진귀한 유차(孺茶)를 선물받자, 흔열(欣悅)함을 이기지 못하며 써내려간 예찬시이다. 유차란 글자 그대로 어린 싹(嫩芽)으로, 이른 봄 잔설 사이에서 얻은 것인만큼 그 향기며 색깔, 맛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경남 화개지방에서 채다·정제하여 바로 왕실에 진상했기 때문에 일반에서는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보배같은 차였다.
인생은 온갖 맛(百味)을 즐김도 귀중하니
하늘이 사람을 도와 절후(節候)를 바꾸네
봄에 자라고 가을에 성숙함이 당연한 이치이니
이에 어긋나면 그것은 괴이한 일.
그러나 근래의 습속은 괴이함을 좋아하니
하늘마저 인정(人情)의 즐겨함을 따르는구나
시냇가 차잎사귀 이른 봄 움트더니
황금같은 어린 싹 잔설(殘雪) 속에 자랐네
남방사람 맹수도 두려워하지 않고
험난함 무릅쓰고 칡넝쿨 휘잡으며
일만 잎 따 모아 차 한 덩이 만드니
이는 필시, 남보다 앞서 임금님께 드릴 진품
선사는 어디서 이런 귀중품을 얻었는가.
손에 닿자 향기가 코를 찌르고
활활 타는 화롯불에 손수 차 달이니
꽃무늬 자기에 따라 색깔을 자랑하네
입에 대니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마치 어린아이 젖내와도 같아
부귀한 가문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것을
우리 선사, 이를 얻음이 괴이하고 괴이하구료
남방사람들 선사의 처소 알지 못 하니
맛보고 싶어한들 어이 전해줄손가.
이는 필시 구중궁궐에서
고덕한 선사 대우해 예물로 보내준 것을
차마 마시지 못 하고 아끼고 간직하다
봉물(封物) 중사(中使) 편에 내게 보내 주었겠지
나는 이제 세상살이 모르는 나그네
좋다는 혜산천(惠山泉) 물 감상하긴 했지만
평생 불우하여 탄식 속에 살아왔는데
일품을 감상함은 오직, 이것 뿐인가 하네
귀중한 차 마시고 어이 사례 없을손가
공에게 맛있는 봄술 소식 전하노니
茶들고 술 마시며 보낸 한 평생
오며가며 풍류놀이 시작해 보세
백운산인(白雲山人) 이규보(李奎報)의 시를 찬찬히 음미하면 그 안에서 고려인들의 차생활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고려를 대표하는 다인으로는 이규보와 쌍벽을 이루었던 문사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가 있다. 정중부의 난 때 머리를 깍고 피했다가 다시 귀속한 그는 1180년 괴과(魁科)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에 있으면서 당대의 학자들인 오세재(吳世才)·임춘(林春)·조통(趙通)·황보항(皇甫杭) ·함순(咸淳)·이담(李湛)과 결의,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 받아 "해재칠현(海在七賢)"을 자처하며 차와 시를 즐겼다.
그는 높은 정신세계와 교양을 지녔으나 무관 정권하에서 크게 쓰이지는 못했다. 저서 파한집(破閑集)은 한가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글이 되겠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한가로움 속에서 정신세계의 자유를 추구하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차나무에서 눈엽(嫩葉)을 따 건조시켜 포말을 만들 때, 또는 풀매를 돌릴 때의 고요한 정경을 노래한 여러 편의 다시(茶詩)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를 음미해 보자.
깊은 산에 드니 동서도 분간 안 돼 아득한데
날리는 듯 벼랑에 쏟아지는, 샘같은 물 있어
시원함이 가슴을 씻어준다.
손 담그니 얼음인양 차갑고
바라보니 주름진 얼굴 나타나 이를 지켜본다.
냇가에 쉬면서
임금이 재상 동반한 듯, 부싯돌 쳐 차 끓이니
육우(陸羽)의 차맛 아는 것, 별 것 아니구나.
고려시대에는 행인들이 잠을 자거나 쉬어갈 수 있는 여관·휴게소를 다원(茶院)이라 했고, 또 도심에는 차를 사거나 마실 수 있는 가게가 있었는데 이를 다점(茶店)이라 했다. 백운거사·쌍명재와 더불어 해재칠인(海在七人)의 한 사람이었던 임춘(林春)의 시를 보면 다점에서 낮잠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점은 후일 차문화가 쇠퇴하면서 주막(酒幕)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무너지듯 다점 평상에 누우니 금세 형체 잊혀지고
낮잠 머리에 바람 부니 절로 깨어나네
꿈 속의 내 몸은 어디로 갔나
건곤(乾坤)이란게 하나의 큰 여관이었던가… (후략)
공민왕 때 밀직사(密直使) 겸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지낸 이연종(李衍宗)의 시를 보면 고려 사회에 명전(茗戰:차 겨루기)놀이가 성행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이연종이 나이들어 공직에서 물러난 뒤의 것인데, 함양부원군 치암(恥庵) 박충좌(朴忠佐)로부터 차를 선물 받자 붓을 들어 쓴 감사의 글이다. 여기 어린시절 차 겨루던 추억을 간절하게 담고 있다.
소년 시절 영남 절간(嶺南樓)의 손님되어
명전(茗戰)·신선놀이 여러 번 참여했지
용암(龍巖) 봉산(鳳山) 기슭 죽림에서
스님따라 매 부리 같은 찻잎을 땄었지
한식 전에 만든 차가 제일 좋다던데
용천봉정(龍泉鳳井) 물까지 있음에랴.
사미승(沙彌僧) 시원스런 삼매(三昧)의 손길
쉬지않고 찻잔 속에 설유(雪乳)를 넣었었지
돌아와선 벼슬 따라 풍진 세상 치달리며
세상살이 남북으로 두루 맛 보았네
이제 늙어 한가로이 방에 들었거니
쓸데없이 분주함은 나의 일 아니로다
양락(羊酪)도 순갱(蓴羹)도 생각 없고
호화로운 집 풍류 또한 부럽지 않네
한낮의 죽창에 차 끓이는 연기 피어오르니
낮잠에서 깨어나 차 한 잔이 간절하다.
남녘에서 차 달이던 일 추억해 보지만
산중의 친구는 소식조차 없구나
경상(卿相)들이야 어찌, 소원한 사람 기억하고 하사품 나누어 주랴.
치암상국 홀로 잊지 않으시고, 좋은 신차 초당에 나눠 주었네
봉함 열자, 자용향(紫茸香) 살필 틈도 없이
종이에 배어든 품격, 코에 와 닿네
차의 고아한 품격 다칠세라 염려하면서
타는 불에 끓이기를 손수 시험하니
차솥에서 불어오는 솨솨 솔바람 소리, 소리만 들어도 마음 맑아지네
찻잔 가득 피어나는 짙은 그 맛,
마셔 보니 시원하여 골수를 바꾸는 듯 하구나
남쪽에서 놀던 그 시절은 동몽(童蒙)이었기에
차생활로 깊은 경지 이르는 것 몰랐었지
이제야 공의 선물로 인연하여 통령(通靈)했소이다.
옥천자 같이 때때로 두 겨드랑이 바람을 타고
봉래산 상봉으로 날아가, 서왕모 자화상 한 번 기울여
인간세상 묵은 때 씻어줄 구전진금단(九轉眞金丹) 가져 와
공의 진중한 뜻에 보답하고 싶구료.
마시자 신선이 된 기분이라는 찬미가 예사로울 정도로 차 음미를 멋으로 즐겼던 것이 고려인들이었다. 왕실에선 다분히 의식적이었고, 사원에서는 다섯가지 불공의 첫째요, 수도용(修道用)으로 애음되었지만, 일반 선비사회에서의 차생활은 격식없는 자유분방한 것이었다.
차생활로 머리를 맑게하여 학문에 정진하고, 차와 더불어 문학을 논하며 교유(交遊)하였으며, 정치적 혼돈 속에서는 스스로 심성을 순화시켰던 시대였다. 말하자면 차를 음미하며 인생을 다듬고 되돌아보고 반성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충렬왕(1274∼1308) 때 산중재상(山中宰相)으로 불리던 해동 조계종 제6세 원감국사는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하면서, 그러한 고려의 다풍을 한 마디로 노래했다.
…경치가 아름다울 때면 서둘러 물 끓이고 친구 부르세. 차 마시는 일도 선(禪) 아닐 것 없으니, 선에 있어 격식은 초월하는 법…
차는 그렇게 사랑받으면서 불교를 더욱 깊이있게 했고 문화·예술의 발전과 함께 민족의 인품을 향상시켰다. 신라시대 이상으로 덕망있는 군주나 고매한 학자들은 "다인(茶人)"이라 일컬음 받는 것을 큰 명예로 여겼다.
고려인의 차생활 이야기는 삼은(三隱)에까지 이어진다. 도은(陶隱)·포은(圃隱)·목은(牧隱)은 려말(麗末)의 어두운 분위기를 차시에 담고 있다.
타는 불에 맑은 물 끓이노니
푸른 찻잔에 뜨는 향기가 더러운 창자 씻어준다
마루턱에 찬 백만 창생 운명
봉래산 신선에게 물어보고 싶구나
도은(陶隱·李崇仁)은 푸른 찻잔 안에서 명멸(明滅)하는 거품이 백만 창생처럼 보였던 것 같다. 음차의 벽(癖)이 유난했던 포은(圃隱·鄭夢周)은 서재에 혼자 누워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삼매(三昧)에 들어감을 도락(道樂)으로 삼았다.
보국(報國)의 능력없는 서생이
차 마시는 버릇에 세정(世情)을 잊는다
눈 바람 세찬 밤 서재에 홀로 누워 즐기나니
돌 솥에서 들려오네, 솔바람 소리
찻물 끓기 시작하니
풍로의 불도 한껏 타오르네
감(坎) 리(離)는 하늘과 땅의 작용
그 뜻 끝없음, 비로소 깨닫는다.
포은은 동방 이학(理學)의 원조로 알려지는만큼 유교 철학에 심취했는데, 주역(周易)에 몰두할 때면 석정(石鼎)에 물 끓여 차 달이기를 함께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말 학문과 정치에 큰발자국을 남긴 목은에게 차는 불로장생의 벗이었다.
산 높고 물 맑은 나라
땅이 신령스런 인걸의 나라
고려의 늙은이 산에 살면서
불로장생의 선차(仙茶) 마시네
불교도 고려시대에 더욱 발전했다. 고려 때는 특히 임금도 불타(佛陀)의 제자를 자처했던만큼, 손수 불공을 위한 말차를 위해 풀매를 돌리는 일이 흔했다고 고려사(高麗史)는 전하고 있다.
주요 국가 행사에 진차(進茶)의식이 반드시 앞서고, 다방(茶房)이라는 차 전담관청이 만들어져 궁중에 큰 연회가 일을 때 다과(茶菓) 준비하는 일을 담당했다. 승려들의 음차풍는 더욱 깊고 넓어졌고, 사원(寺院) 주변에는 차 농사를 전문으로 삼는 다촌(茶村)이 번성했다.
고려시대 규모가 컸던 궁중행사로 봄의 연등회(燃燈會)와 가을의 팔관회(八關會)를 꼽을 수 있는데, 이러한 행사 앞에는 반드시 진차(進茶) 의식을 가졌었다. "진차"란 주과식선(酒果食膳)을 올리기 전에 임금께 차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진차하라 명하면 집례관은 전(殿)을 향하여 국궁(鞠躬) 배례(拜禮)한 후 차를 올린다. 임금은 다시 태자 이하 시신제관에게 차를 하사한다. 모두의 앞에 차가 놓이면 집례관은 배례를 청한다. 그러면 모두 일어나 임금이 주신 차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두 번 절한 뒤 집례관의 집전에 따라 차를 마시고, 다 마시고 난 후엔 읍한다…
이것이 고려사 상원연등회의조에 있는 연등일의 진차인데 팔관회 때 진차하는 방법도 이와 같았다. 다만 다식(茶食) 쓰는 것은 팔관회에 국한했다고 했는데 이유는 분명치 않다. 팔관회가 왕도(王都)에서만 행하여진 반면 연등회는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거행되었다는 점에서 연등회 의식이 더 규모가 큰 대중적 행사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진차의식을 보면 고려시대에 까다로운 행차예절(行茶禮節)이 있었지 않나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술을 올리거나 진지를 올릴 때도 집례관이 전을 향하여 "잡수십사"하며 국궁 배례하였다 하고, 임금이 시신에게 주과(酒果)를 내리면 집례관의 청에 따라 모두 일어나 두 번 절하고 읍하는 것도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는 궁중의 법도에 근거한 예절로 보는 게 타당하다.
고려 왕실은 이외에도 중요 행사마다 차 의식을 행했다. 왕비, 왕자 책봉시와 공주 하가의(下嫁儀), 대관전에서의 군신 연회나 노인 사연(賜宴), 또 외국 사신을 맞을 때와 상례(喪禮) 등에 차가 행해졌다. 다방(茶房)관리들은 임금 행차시 다구를 갖추어 수행하기도 하였다.
고려인의 차생활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자료로는 흔히 고려도경(高麗圖經)이 인용된다. 이는 이는 송나라 국신사 일행으로 고려에 와서 약 1개월간 송도에 머물었던 서긍(徐兢1091∼1153)의, 현장감이 담긴 기록이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자신이 어느 관리의 집에 초대를 받아 차를 대접받은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초대받은 일행이 나란히 앉자 주인의 아들이 다과를 올렸고, 이어 예쁜 젊은이가 찻잔을 돌렸다. 왼손에 차주전자를 들고, 바른손으로 차선을 끌었다. 윗자리부터 차를 따르기 시작하여 아랫자리에 이르는 동안 조심하여 조금도 어수선하거나 혼잡함이 없었다…
…무릇 연회 때면 뜰 가운데에서 차를 달여 은하(銀荷)로 덮어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데, 의식의 진행자가 "차를 다 돌렸오"라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었으므로 으례 냉차(冷茶)를 마시기 마련이었다. 하루에 세 번 차를 내 오고, 차에 이어 더운물을 내 오는데, 고려 사람들은 이를 약이라고 하며, 손님이 다 마시면 기뻐하고 다 마시지 않으면 주인을 방만히 여김이라하여 불쾌함을 나타냈다. 그래서 억지로 차를 마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서긍은 고려도경에 차조를 따로 두었을만큼 차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그는 송인(宋人)인만큼, 송나라 중심으로 고려의 차를 기술한 부분도 적지않다. 때론 송인의 입맛에 거슬린다고 형편없이 매도한 부분도 있다.
…고려의 차는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러므로 고려인들은 납차(臘茶)와 더불어 송(宋)의 용·봉단(龍·鳳團)을 귀하게 여긴다. 용·봉단은 송나라 제실어용(帝室御用)인 귀한 차인데 예물로 오기도 하지만 부족하여 상인을 통해 구입하기도 한다. 고려사람들은 차 마시기를 즐기는 것 못지않게 다구(茶具)를 잘 다스렸는데 금화오잔(金花烏盞: 황금무늬가 있는 검은 잔)과 비색소구(翡色小具)와 은로(銀爐)와 물끓이는 소부(小釜)가 모두 중국의 것을 본땄다…
이와같은 고려도경의 문구들은, 우리 선조들이 가야·신라시대 이전부터 차마시기를 즐겼고 고려에 와서 그 풍습이 더욱 넓게 번져, 생활문화의 중심으로 삼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 상기해도 신뢰성이 약해진다.
매도한 부분은 그렇지만, 길을 가는 데 만나는 사람마다 "차 한 잔 마시고 가라"하여 접대받은 일까지 상세히 기술함으로서, 고려시대 차가 얼마만큼 민중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어 있었는지를 엿보게 하는 데, 좋은 자료를 남겼음에는 틀림없다.
살펴보면 고려인이 즐긴 것 역시 말차(抹茶)였다. 말차는 찻잎을 쪄서 말려 고형물(固形物)로 두었다가, 필요할 때 풀매로 갈아 가루를 만들고, 이를 끓이거나 끓는 물에 풀어 마셨던 것인데, 당시에는 "차" 하면 대개 이 말차를 일컬었던 것 같다.
차를 가루로 만드는 기구는 연다마( 茶磨), 다마(茶磨)라고 불렀다. 돌로 만들어진 풀매 종류로되 그 모양이 풀매와는 달랐다. 고려인들은 이러한 다마에 차를 갈아 가루로 만들었다. 석제의 둥근 바퀴를 한 팔로 돌리는데, 천천히 돌릴 때마다 옥가루가 쏟아진다는 시구는 말차를 만드는 광경이다.
돌 쪼아 만든 바퀴같은 맷돌
빙빙 돌리니 한 팔이 수고롭다
그대 어찌 차를 즐기지 않으랴만
나의 초당에 다마(茶磨)를 보냈구나
내 즐김이 그대보다 깊다하여
보내준 것이련가.
푸르고 향기로운 가루 날리니
그대 뜻 더욱 고마워지네
마실 때의 차를 일컬어서는 한 잔, 두 잔 하며 잔(盞)을 썼지만, 고형차 상태에서는 각(角)을 단위로 썼다. 고려 성종 8년, 최승로(崔承老)의 죽음을 슬퍼하며 왕실이 보낸 부의(賻儀)에 뇌원차 200각이 있었다 했고, 또 문종 때는 80세 이상 국로에게 뇌원차 30각 씩을 하사했다고 했다.
고형차, 즉 단차(團茶)는 만들 때의 형태에 따라 이름을 달리 했는데, 요즘의 다식(茶食)처럼 둥글 납작하게 만들어 용·봉황 무늬 넣은 것을 용봉단차(龍鳳團茶)라 하였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엽전 모양으로 만들어서는 전차(錢茶)라 하였으며, 또 네모지게 만들기도 했는 데 고려시대에는 네모지게 만들어 그 단위를 각(角)이라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형태로 만들어 두었든지 간에 이를 마시는 방법은 다마, 즉 차맷돌에 갈아 사루로 낸 뒤 끓이거나 쓿는 물에 풀어 마셨다.
찻잎을 채취하는 시기에 따라 차의 품질 등급이 매겨짐은 앞에서 밝힌 바 그대로이다. 채다(採茶)는 4월 중순부터 시작되어 5월 하순까지 계속되는 게 일반이다. 그런데 간혹 그보다 일찍 차를 얻는 경우가 있어 대시인(大詩人)으로 하여금 예찬의 노래를 만들게 했다. 고려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분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유차시(孺茶詩)를 음미해 보자.
소개하는 시는 이규보가 운봉(雲峰)에 사는 고승 노규선사(老珪禪師)로부터 진귀한 유차(孺茶)를 선물받자, 흔열(欣悅)함을 이기지 못하며 써내려간 예찬시이다. 유차란 글자 그대로 어린 싹(嫩芽)으로, 이른 봄 잔설 사이에서 얻은 것인만큼 그 향기며 색깔, 맛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경남 화개지방에서 채다·정제하여 바로 왕실에 진상했기 때문에 일반에서는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보배같은 차였다.
인생은 온갖 맛(百味)을 즐김도 귀중하니
하늘이 사람을 도와 절후(節候)를 바꾸네
봄에 자라고 가을에 성숙함이 당연한 이치이니
이에 어긋나면 그것은 괴이한 일.
그러나 근래의 습속은 괴이함을 좋아하니
하늘마저 인정(人情)의 즐겨함을 따르는구나
시냇가 차잎사귀 이른 봄 움트더니
황금같은 어린 싹 잔설(殘雪) 속에 자랐네
남방사람 맹수도 두려워하지 않고
험난함 무릅쓰고 칡넝쿨 휘잡으며
일만 잎 따 모아 차 한 덩이 만드니
이는 필시, 남보다 앞서 임금님께 드릴 진품
선사는 어디서 이런 귀중품을 얻었는가.
손에 닿자 향기가 코를 찌르고
활활 타는 화롯불에 손수 차 달이니
꽃무늬 자기에 따라 색깔을 자랑하네
입에 대니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마치 어린아이 젖내와도 같아
부귀한 가문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것을
우리 선사, 이를 얻음이 괴이하고 괴이하구료
남방사람들 선사의 처소 알지 못 하니
맛보고 싶어한들 어이 전해줄손가.
이는 필시 구중궁궐에서
고덕한 선사 대우해 예물로 보내준 것을
차마 마시지 못 하고 아끼고 간직하다
봉물(封物) 중사(中使) 편에 내게 보내 주었겠지
나는 이제 세상살이 모르는 나그네
좋다는 혜산천(惠山泉) 물 감상하긴 했지만
평생 불우하여 탄식 속에 살아왔는데
일품을 감상함은 오직, 이것 뿐인가 하네
귀중한 차 마시고 어이 사례 없을손가
공에게 맛있는 봄술 소식 전하노니
茶들고 술 마시며 보낸 한 평생
오며가며 풍류놀이 시작해 보세
백운산인(白雲山人) 이규보(李奎報)의 시를 찬찬히 음미하면 그 안에서 고려인들의 차생활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고려를 대표하는 다인으로는 이규보와 쌍벽을 이루었던 문사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가 있다. 정중부의 난 때 머리를 깍고 피했다가 다시 귀속한 그는 1180년 괴과(魁科)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에 있으면서 당대의 학자들인 오세재(吳世才)·임춘(林春)·조통(趙通)·황보항(皇甫杭) ·함순(咸淳)·이담(李湛)과 결의,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 받아 "해재칠현(海在七賢)"을 자처하며 차와 시를 즐겼다.
그는 높은 정신세계와 교양을 지녔으나 무관 정권하에서 크게 쓰이지는 못했다. 저서 파한집(破閑集)은 한가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글이 되겠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한가로움 속에서 정신세계의 자유를 추구하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차나무에서 눈엽(嫩葉)을 따 건조시켜 포말을 만들 때, 또는 풀매를 돌릴 때의 고요한 정경을 노래한 여러 편의 다시(茶詩)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를 음미해 보자.
깊은 산에 드니 동서도 분간 안 돼 아득한데
날리는 듯 벼랑에 쏟아지는, 샘같은 물 있어
시원함이 가슴을 씻어준다.
손 담그니 얼음인양 차갑고
바라보니 주름진 얼굴 나타나 이를 지켜본다.
냇가에 쉬면서
임금이 재상 동반한 듯, 부싯돌 쳐 차 끓이니
육우(陸羽)의 차맛 아는 것, 별 것 아니구나.
고려시대에는 행인들이 잠을 자거나 쉬어갈 수 있는 여관·휴게소를 다원(茶院)이라 했고, 또 도심에는 차를 사거나 마실 수 있는 가게가 있었는데 이를 다점(茶店)이라 했다. 백운거사·쌍명재와 더불어 해재칠인(海在七人)의 한 사람이었던 임춘(林春)의 시를 보면 다점에서 낮잠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점은 후일 차문화가 쇠퇴하면서 주막(酒幕)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무너지듯 다점 평상에 누우니 금세 형체 잊혀지고
낮잠 머리에 바람 부니 절로 깨어나네
꿈 속의 내 몸은 어디로 갔나
건곤(乾坤)이란게 하나의 큰 여관이었던가… (후략)
공민왕 때 밀직사(密直使) 겸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지낸 이연종(李衍宗)의 시를 보면 고려 사회에 명전(茗戰:차 겨루기)놀이가 성행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이연종이 나이들어 공직에서 물러난 뒤의 것인데, 함양부원군 치암(恥庵) 박충좌(朴忠佐)로부터 차를 선물 받자 붓을 들어 쓴 감사의 글이다. 여기 어린시절 차 겨루던 추억을 간절하게 담고 있다.
소년 시절 영남 절간(嶺南樓)의 손님되어
명전(茗戰)·신선놀이 여러 번 참여했지
용암(龍巖) 봉산(鳳山) 기슭 죽림에서
스님따라 매 부리 같은 찻잎을 땄었지
한식 전에 만든 차가 제일 좋다던데
용천봉정(龍泉鳳井) 물까지 있음에랴.
사미승(沙彌僧) 시원스런 삼매(三昧)의 손길
쉬지않고 찻잔 속에 설유(雪乳)를 넣었었지
돌아와선 벼슬 따라 풍진 세상 치달리며
세상살이 남북으로 두루 맛 보았네
이제 늙어 한가로이 방에 들었거니
쓸데없이 분주함은 나의 일 아니로다
양락(羊酪)도 순갱(蓴羹)도 생각 없고
호화로운 집 풍류 또한 부럽지 않네
한낮의 죽창에 차 끓이는 연기 피어오르니
낮잠에서 깨어나 차 한 잔이 간절하다.
남녘에서 차 달이던 일 추억해 보지만
산중의 친구는 소식조차 없구나
경상(卿相)들이야 어찌, 소원한 사람 기억하고 하사품 나누어 주랴.
치암상국 홀로 잊지 않으시고, 좋은 신차 초당에 나눠 주었네
봉함 열자, 자용향(紫茸香) 살필 틈도 없이
종이에 배어든 품격, 코에 와 닿네
차의 고아한 품격 다칠세라 염려하면서
타는 불에 끓이기를 손수 시험하니
차솥에서 불어오는 솨솨 솔바람 소리, 소리만 들어도 마음 맑아지네
찻잔 가득 피어나는 짙은 그 맛,
마셔 보니 시원하여 골수를 바꾸는 듯 하구나
남쪽에서 놀던 그 시절은 동몽(童蒙)이었기에
차생활로 깊은 경지 이르는 것 몰랐었지
이제야 공의 선물로 인연하여 통령(通靈)했소이다.
옥천자 같이 때때로 두 겨드랑이 바람을 타고
봉래산 상봉으로 날아가, 서왕모 자화상 한 번 기울여
인간세상 묵은 때 씻어줄 구전진금단(九轉眞金丹) 가져 와
공의 진중한 뜻에 보답하고 싶구료.
마시자 신선이 된 기분이라는 찬미가 예사로울 정도로 차 음미를 멋으로 즐겼던 것이 고려인들이었다. 왕실에선 다분히 의식적이었고, 사원에서는 다섯가지 불공의 첫째요, 수도용(修道用)으로 애음되었지만, 일반 선비사회에서의 차생활은 격식없는 자유분방한 것이었다.
차생활로 머리를 맑게하여 학문에 정진하고, 차와 더불어 문학을 논하며 교유(交遊)하였으며, 정치적 혼돈 속에서는 스스로 심성을 순화시켰던 시대였다. 말하자면 차를 음미하며 인생을 다듬고 되돌아보고 반성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충렬왕(1274∼1308) 때 산중재상(山中宰相)으로 불리던 해동 조계종 제6세 원감국사는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하면서, 그러한 고려의 다풍을 한 마디로 노래했다.
…경치가 아름다울 때면 서둘러 물 끓이고 친구 부르세. 차 마시는 일도 선(禪) 아닐 것 없으니, 선에 있어 격식은 초월하는 법…
차는 그렇게 사랑받으면서 불교를 더욱 깊이있게 했고 문화·예술의 발전과 함께 민족의 인품을 향상시켰다. 신라시대 이상으로 덕망있는 군주나 고매한 학자들은 "다인(茶人)"이라 일컬음 받는 것을 큰 명예로 여겼다.
고려인의 차생활 이야기는 삼은(三隱)에까지 이어진다. 도은(陶隱)·포은(圃隱)·목은(牧隱)은 려말(麗末)의 어두운 분위기를 차시에 담고 있다.
타는 불에 맑은 물 끓이노니
푸른 찻잔에 뜨는 향기가 더러운 창자 씻어준다
마루턱에 찬 백만 창생 운명
봉래산 신선에게 물어보고 싶구나
도은(陶隱·李崇仁)은 푸른 찻잔 안에서 명멸(明滅)하는 거품이 백만 창생처럼 보였던 것 같다. 음차의 벽(癖)이 유난했던 포은(圃隱·鄭夢周)은 서재에 혼자 누워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삼매(三昧)에 들어감을 도락(道樂)으로 삼았다.
보국(報國)의 능력없는 서생이
차 마시는 버릇에 세정(世情)을 잊는다
눈 바람 세찬 밤 서재에 홀로 누워 즐기나니
돌 솥에서 들려오네, 솔바람 소리
찻물 끓기 시작하니
풍로의 불도 한껏 타오르네
감(坎) 리(離)는 하늘과 땅의 작용
그 뜻 끝없음, 비로소 깨닫는다.
포은은 동방 이학(理學)의 원조로 알려지는만큼 유교 철학에 심취했는데, 주역(周易)에 몰두할 때면 석정(石鼎)에 물 끓여 차 달이기를 함께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말 학문과 정치에 큰발자국을 남긴 목은에게 차는 불로장생의 벗이었다.
산 높고 물 맑은 나라
땅이 신령스런 인걸의 나라
고려의 늙은이 산에 살면서
불로장생의 선차(仙茶) 마시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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