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질서의 상징
차는 동양의 산물(産物)입니다만 세계 어디를 가나 차를 마시지 않는 민족은 없습니다. 마시기에 부드럽고 몸을 이롭게 하고 정신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은 무엇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질서입니다.
다도를 논할 때 거론했듯 차는 질서입니다. 질서를 잘 지키고 순리를 존중해야 좋은 맛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혀 끝에 닿는 맛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분위기까지 최상의 자리가 되어야만 정말 좋은 맛이 됩니다. 그러자면 차를 내는 쪽이나, 대접받는 쪽이나 다 예를 지키고 성의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사진 찍을 때 카메라 든 사람의 의중을 헤아려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찍히고 싶다는 욕심만으로 가득한 자신을 돌아본 적은 없습니까. 또 레스토랑에 들어갔을 때 지배인이나 웨이터가 안내해주는 자리를 마다하고 마음대로 빈자리 골라 앉지 않습니까? 예약을 할줄만 알지, 못 가게 되었을 때 사전 해약한 경우는 얼마나 있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알면 얼마든지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이 무질서입니다. 차를 배우다보면 베푸는 쪽이나 대접받는 쪽이나 함께 예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회법을 통하여 그런 것을 배우게 됩니다. 다회법의 요강(要綱)을 살펴봅시다.
▲먼저 초대가 있어야 합니다. 왜? 라는 이유가 명시되어야 합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답을 해야 합니다. 응한다. 못 간다. 하고 말입니다. 그래야 준비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문자가 정해지면 주인은 꼼꼼히 준비를 합니다. 내 집에 와서 어색하거나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방문자가 셋일 경우 각각 앉을 자리까지 미리 정해놓아야 합니다. 다기다구도 빠짐없이 챙겨 차를 하는 도중에 일어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윽고 약속일, 약속 시간이 되면 마중을 나갑니다. 서로 시간을 지키는 것은 예의 기본입니다.
▲대문 앞에서 선절 하고 응접실로 가 맞절을 합니다. 오시느라고 고생은 안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나고 싶었던 차에 마침 불러주시니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하고 정중히 인사를 나눕니다.
▲이때쯤 다실에서 물이 끓기 시작합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물이 끓는 군요, 다실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다실이 어떤 방이냐 하는 것은 (1)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실에 들어서면 주인이 말합니다. 이쪽이 연장자 자리입니다. 그러면 손님들은 그 자리부터 장유유서 순으로 차례로 앉습니다.
▲주인은 차를 냅니다. 차를 맛있게 우리는 법은 (3)에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차를 마시기 전에는 다식이나 다른 먹거리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입안이 오염되면 주인의 정성을 제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 차를 마시고, 그 맛에 대한 찬사가 오가면 만남의 정중한 시간, 즉 1막이 끝납니다.
▲2막은 다식이 곁들이고 사사로운 이야기들이 정감있게 오고 갑니다. 차는 원하는 대로 계속 우려서 마십니다.
▲대화 영역은 우주여도 좋지만 일단은 다실 안의 사물이 화두(話頭)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글이나 그림, 혹은 꽃이나 그릇을 화두로 삼아도 좋습니다. 2막은 이렇게 지혜를 가꾸고 상식의 폭을 넓히는 시간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손님 중 연장자가 말합니다. 다음엔 저희 집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주인이 그 뜻을 얼른 알아차립니다. 다음을 말씀하시니 그만 가시려는 것 같군요. 손님이 말합니다. 가야지요. 시간이 꽤 되었을 겁니다. 그러면 주인이 청합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리를 하겠습니다.
▲손님은 주인이 정리하는 것을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방문으로 인하여 어질러진 살림을 그대로 두고 떠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정리를 끝낸 주인이 인사합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불편한 점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손님이 답합니다. 불편한 점이라니요. 차 맛이 참
훌륭했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시는 손님은 뒤가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하는 것이 한국인의 심성입니다. 다회는 이렇게 끝납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시되어야
다회법을 유심히 보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지켜야할 일상예절이 구체적으로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차는 목적이 아닙니다. 과정이요, 과정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는 예술입니다. 다회법을 수없이 반복 연습하여 몸에 배도록 하면, 그것만으로 예의바른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독불장군 없다는 말이 있듯 세상은 혼자만 잘나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설악산·다도해도 누구와 함께 여행했느냐에 따라 좋은 여행, 그저 그런 여행으로 구별됩니다.
여행이 살아있는 배움의 광장이라고 합니다. 오랜 여행에서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계를 두루 여행하다보면 결국 얻어지는 게 어디를 가나 사람사는 모습은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귀중함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공존(共存)"이라는 두 글자가 피부에 와 닿을 것입니다. 공존 - 그렇습니다. 인류가 희구하는 것, 언젠가 이루어야 할 과제는 공존입니다. 공존은 질서를 존중하는 데서만 가능합니다. 질서의식이 부족하면 강력한 법으로라도 확립해야 합니다.
우리사회 질서의식을 개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육수준·경제수준 다 높아졌는 데 질서의식만은 바닥에 그대로 있다고 야단들입니다. 동방예의지국다운 미풍양속도 옛말이 되었다고 혀를 찹니다. 일반적인 느낌에도 충효사상은 이미 땅에 떨어졌습니다. 스승을 부모처럼 여기라고 가르친 선생이, 학생들로부터 무참한 봉변을 당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습니다. 우리도 서양처럼 강력한 법 집행으로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막 튀어나옵니다.
부랴부랴 효를 바로 세우자는 운동을 펴고 있습니다만 별로 진전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목적이거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과정을 가볍게 여기면서 일순간에 결과를 얻기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또 결과적인 것들로 세상 질서를 바로 잡을 수는 없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별로 문제삼지 않는 사회통속관념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옳지 않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통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미 큰 줄기라면 그렇게해서 흘러가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요.
금메달만 따면 카메라 스포트를 받는 사회 - 금메달만 따면 어떤 과정도 유려한 필치로 미화되는 사회가 우리 사회입니다. 스포츠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도 당선만하면 되고 경제사회도 돈 벌고 출세만 하면 됩니다. 성공(成功)이란 것이 노력으로 이룬다는 뜻이건만 달성(達成)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렇게해서 도달하려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요.
법 보다 윤리 도덕을 더 무서워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시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비루한 금메달 보다 정직한 동메달이 더 값진 박수를 받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까놓고 말하면 궁극적으로 인간은 모두, 재물과 명예를 탐하는 이기주의입니다. 겉으로 자비를 베풀든, 봉사정신을 외치든, 청빈을 내세우든 간에 결국 원하는 것은 명예거나 재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를 허물삼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이란 자신이 원하는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후세는 그 사람의 목표를 따지지 않습니다. 과정이 곧 그의 삶이요, 평가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받는 느낌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과정이 곧 전부일 수 있다는 진리 같은 것 말입니다.
결과만이 중시되는 사회가 되면 조화(調和)라는 단어가 사라집니다. 지금 우리 사회 단면입니다. 과정을 소홀히 여기면 정의(正義)가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역시 우리 사회 단면입니다. 이는 문화인의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 전통사회는 더더욱 아닙니다.
차생활 교육의 참 가치
차에 대해 글을 쓰고 다도교실 운영하는 것이 이럭저럭 십오년 이상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차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왔을 때, 첫 만남의 대화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왜 차를 배우려 합니까?"하고 물으면 대개는 말없이 웃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작은 목소리로 "그냥은, 차가 좋아 보여서요"합니다.
"다도를 배우려는 겁니까?"하고 다시 물으면 고개를 흔들며 "아뇨. 번거로운 건 말구요. 간편하게 마시는 법만 알고 싶어요"합니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마시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마시는 법이야 앞에서 이야기했듯 간단합니다. 끓인 물을 약간 식혀서 차와 함께 주전자에 넣고 우려 마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원두커피 우리는 것보다 간편할지도 모릅니다. 다 가르쳐 주면 다시 묻습니다.
"이것 뿐인가요? 이것 외에 무언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닙니다. 차를 우려 마시는 데는 이것 이상 말씀드릴게 없습니다"
"아니에요, 행차법 같은 게 있지 않아요?"
"…?"
꾸민 것이 아닌 자연스런 대화입니다. 차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단순 오락이나 취미를 넘어서서 생활문화의 규범과 이상을 현실에 반영하자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면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 차를 수단으로 삼아 자기 몸과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는 훈련인 것이지, 차를 마시는 게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다신전(茶神傳)에 이르기를 차는 물의 신(神:靈)이요, 물은 차의 몸(肉)이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다신(茶神)이 나타나지 않고, 정다(精茶)가 아니면 수체(水體)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훌륭한 차를 얻기 위해서는 무색무취(無色無臭)한 물이 있어야 하고 정성들여 만든 차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차는 그 스스로 참된 향과 색과 맛을 지니고 있으니 그것을 잘 살리는 것이 다도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소홀히하여 오염되면 곧 참됨을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차는 이런 것입니다. 더운 물에 티백을 넣어 우려 마시는 것으로 "나는 차마시는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소위 찻기(茶氣)가 있다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풍부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마음이 동하면 이제부터라도 차생활을 하십시다. 우리 사회, 우리 삶이 무미(無味)하고 건조(乾燥)한 것은 모두 차생활을 잃어버린 탓입니다. 거듭 강조합니다. 다도라고 부르며 까다롭게 행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차놀이"한다고 하면서 시작해 보십시오
차생활 운동으로 인식이 제법 나아졌지만, 다도(茶道)의 본뜻을 아직 이 사회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력이나 학교졸업장 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마르고 빈 공간이 현대인을 초조하게 합니다.
지금이라도 시작하십시오. 차를 문화생활의 중심수단으로 삼으면 얼마 지나지않아 사물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고 삶에 윤기가 생깁니다. 혼자도 좋고, 친구와 함께도 좋습니다. 차를 배우고 싶다면 언제든 필자를 불러 주십시오<終>
차는 동양의 산물(産物)입니다만 세계 어디를 가나 차를 마시지 않는 민족은 없습니다. 마시기에 부드럽고 몸을 이롭게 하고 정신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은 무엇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질서입니다.
다도를 논할 때 거론했듯 차는 질서입니다. 질서를 잘 지키고 순리를 존중해야 좋은 맛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혀 끝에 닿는 맛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분위기까지 최상의 자리가 되어야만 정말 좋은 맛이 됩니다. 그러자면 차를 내는 쪽이나, 대접받는 쪽이나 다 예를 지키고 성의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사진 찍을 때 카메라 든 사람의 의중을 헤아려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찍히고 싶다는 욕심만으로 가득한 자신을 돌아본 적은 없습니까. 또 레스토랑에 들어갔을 때 지배인이나 웨이터가 안내해주는 자리를 마다하고 마음대로 빈자리 골라 앉지 않습니까? 예약을 할줄만 알지, 못 가게 되었을 때 사전 해약한 경우는 얼마나 있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알면 얼마든지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이 무질서입니다. 차를 배우다보면 베푸는 쪽이나 대접받는 쪽이나 함께 예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회법을 통하여 그런 것을 배우게 됩니다. 다회법의 요강(要綱)을 살펴봅시다.
▲먼저 초대가 있어야 합니다. 왜? 라는 이유가 명시되어야 합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답을 해야 합니다. 응한다. 못 간다. 하고 말입니다. 그래야 준비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문자가 정해지면 주인은 꼼꼼히 준비를 합니다. 내 집에 와서 어색하거나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방문자가 셋일 경우 각각 앉을 자리까지 미리 정해놓아야 합니다. 다기다구도 빠짐없이 챙겨 차를 하는 도중에 일어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윽고 약속일, 약속 시간이 되면 마중을 나갑니다. 서로 시간을 지키는 것은 예의 기본입니다.
▲대문 앞에서 선절 하고 응접실로 가 맞절을 합니다. 오시느라고 고생은 안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나고 싶었던 차에 마침 불러주시니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하고 정중히 인사를 나눕니다.
▲이때쯤 다실에서 물이 끓기 시작합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물이 끓는 군요, 다실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다실이 어떤 방이냐 하는 것은 (1)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실에 들어서면 주인이 말합니다. 이쪽이 연장자 자리입니다. 그러면 손님들은 그 자리부터 장유유서 순으로 차례로 앉습니다.
▲주인은 차를 냅니다. 차를 맛있게 우리는 법은 (3)에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차를 마시기 전에는 다식이나 다른 먹거리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입안이 오염되면 주인의 정성을 제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 차를 마시고, 그 맛에 대한 찬사가 오가면 만남의 정중한 시간, 즉 1막이 끝납니다.
▲2막은 다식이 곁들이고 사사로운 이야기들이 정감있게 오고 갑니다. 차는 원하는 대로 계속 우려서 마십니다.
▲대화 영역은 우주여도 좋지만 일단은 다실 안의 사물이 화두(話頭)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글이나 그림, 혹은 꽃이나 그릇을 화두로 삼아도 좋습니다. 2막은 이렇게 지혜를 가꾸고 상식의 폭을 넓히는 시간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손님 중 연장자가 말합니다. 다음엔 저희 집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주인이 그 뜻을 얼른 알아차립니다. 다음을 말씀하시니 그만 가시려는 것 같군요. 손님이 말합니다. 가야지요. 시간이 꽤 되었을 겁니다. 그러면 주인이 청합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리를 하겠습니다.
▲손님은 주인이 정리하는 것을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방문으로 인하여 어질러진 살림을 그대로 두고 떠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정리를 끝낸 주인이 인사합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불편한 점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손님이 답합니다. 불편한 점이라니요. 차 맛이 참
훌륭했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시는 손님은 뒤가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하는 것이 한국인의 심성입니다. 다회는 이렇게 끝납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시되어야
다회법을 유심히 보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지켜야할 일상예절이 구체적으로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차는 목적이 아닙니다. 과정이요, 과정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는 예술입니다. 다회법을 수없이 반복 연습하여 몸에 배도록 하면, 그것만으로 예의바른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독불장군 없다는 말이 있듯 세상은 혼자만 잘나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설악산·다도해도 누구와 함께 여행했느냐에 따라 좋은 여행, 그저 그런 여행으로 구별됩니다.
여행이 살아있는 배움의 광장이라고 합니다. 오랜 여행에서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계를 두루 여행하다보면 결국 얻어지는 게 어디를 가나 사람사는 모습은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귀중함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공존(共存)"이라는 두 글자가 피부에 와 닿을 것입니다. 공존 - 그렇습니다. 인류가 희구하는 것, 언젠가 이루어야 할 과제는 공존입니다. 공존은 질서를 존중하는 데서만 가능합니다. 질서의식이 부족하면 강력한 법으로라도 확립해야 합니다.
우리사회 질서의식을 개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육수준·경제수준 다 높아졌는 데 질서의식만은 바닥에 그대로 있다고 야단들입니다. 동방예의지국다운 미풍양속도 옛말이 되었다고 혀를 찹니다. 일반적인 느낌에도 충효사상은 이미 땅에 떨어졌습니다. 스승을 부모처럼 여기라고 가르친 선생이, 학생들로부터 무참한 봉변을 당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습니다. 우리도 서양처럼 강력한 법 집행으로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막 튀어나옵니다.
부랴부랴 효를 바로 세우자는 운동을 펴고 있습니다만 별로 진전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목적이거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과정을 가볍게 여기면서 일순간에 결과를 얻기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또 결과적인 것들로 세상 질서를 바로 잡을 수는 없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별로 문제삼지 않는 사회통속관념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옳지 않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통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미 큰 줄기라면 그렇게해서 흘러가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요.
금메달만 따면 카메라 스포트를 받는 사회 - 금메달만 따면 어떤 과정도 유려한 필치로 미화되는 사회가 우리 사회입니다. 스포츠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도 당선만하면 되고 경제사회도 돈 벌고 출세만 하면 됩니다. 성공(成功)이란 것이 노력으로 이룬다는 뜻이건만 달성(達成)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렇게해서 도달하려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요.
법 보다 윤리 도덕을 더 무서워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시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비루한 금메달 보다 정직한 동메달이 더 값진 박수를 받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까놓고 말하면 궁극적으로 인간은 모두, 재물과 명예를 탐하는 이기주의입니다. 겉으로 자비를 베풀든, 봉사정신을 외치든, 청빈을 내세우든 간에 결국 원하는 것은 명예거나 재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를 허물삼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이란 자신이 원하는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후세는 그 사람의 목표를 따지지 않습니다. 과정이 곧 그의 삶이요, 평가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받는 느낌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과정이 곧 전부일 수 있다는 진리 같은 것 말입니다.
결과만이 중시되는 사회가 되면 조화(調和)라는 단어가 사라집니다. 지금 우리 사회 단면입니다. 과정을 소홀히 여기면 정의(正義)가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역시 우리 사회 단면입니다. 이는 문화인의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 전통사회는 더더욱 아닙니다.
차생활 교육의 참 가치
차에 대해 글을 쓰고 다도교실 운영하는 것이 이럭저럭 십오년 이상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차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왔을 때, 첫 만남의 대화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왜 차를 배우려 합니까?"하고 물으면 대개는 말없이 웃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작은 목소리로 "그냥은, 차가 좋아 보여서요"합니다.
"다도를 배우려는 겁니까?"하고 다시 물으면 고개를 흔들며 "아뇨. 번거로운 건 말구요. 간편하게 마시는 법만 알고 싶어요"합니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마시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마시는 법이야 앞에서 이야기했듯 간단합니다. 끓인 물을 약간 식혀서 차와 함께 주전자에 넣고 우려 마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원두커피 우리는 것보다 간편할지도 모릅니다. 다 가르쳐 주면 다시 묻습니다.
"이것 뿐인가요? 이것 외에 무언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닙니다. 차를 우려 마시는 데는 이것 이상 말씀드릴게 없습니다"
"아니에요, 행차법 같은 게 있지 않아요?"
"…?"
꾸민 것이 아닌 자연스런 대화입니다. 차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단순 오락이나 취미를 넘어서서 생활문화의 규범과 이상을 현실에 반영하자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면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 차를 수단으로 삼아 자기 몸과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는 훈련인 것이지, 차를 마시는 게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다신전(茶神傳)에 이르기를 차는 물의 신(神:靈)이요, 물은 차의 몸(肉)이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다신(茶神)이 나타나지 않고, 정다(精茶)가 아니면 수체(水體)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훌륭한 차를 얻기 위해서는 무색무취(無色無臭)한 물이 있어야 하고 정성들여 만든 차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차는 그 스스로 참된 향과 색과 맛을 지니고 있으니 그것을 잘 살리는 것이 다도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소홀히하여 오염되면 곧 참됨을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차는 이런 것입니다. 더운 물에 티백을 넣어 우려 마시는 것으로 "나는 차마시는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소위 찻기(茶氣)가 있다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풍부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마음이 동하면 이제부터라도 차생활을 하십시다. 우리 사회, 우리 삶이 무미(無味)하고 건조(乾燥)한 것은 모두 차생활을 잃어버린 탓입니다. 거듭 강조합니다. 다도라고 부르며 까다롭게 행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차놀이"한다고 하면서 시작해 보십시오
차생활 운동으로 인식이 제법 나아졌지만, 다도(茶道)의 본뜻을 아직 이 사회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력이나 학교졸업장 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마르고 빈 공간이 현대인을 초조하게 합니다.
지금이라도 시작하십시오. 차를 문화생활의 중심수단으로 삼으면 얼마 지나지않아 사물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고 삶에 윤기가 생깁니다. 혼자도 좋고, 친구와 함께도 좋습니다. 차를 배우고 싶다면 언제든 필자를 불러 주십시오<終>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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