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스크랩] 한국다도의 역사

차보살 다림화 2008. 2. 17. 19:26
3. 한국다도의 역사

1) 고대사회의 차


우리나라 固有의 茶는 草衣禪師의 東茶頌에 의하면 우리나라 古來로 長白山에 白山 茶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長白山 중에 있는 나뭇잎을 따서 알맞게 다려 사람들 이 마셨다고 한다.
曉堂 崔凡述은 이 나무를 생강나무일것이라 하고 應松 스님은 石南科에 속하는 철쭉꽃 이라고 하였다. 우리 民族이 韓半島에 移動하여 農耕生活을 하면서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게 되면서 茶 마시는 풍속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崔凡述 先生은 우리의 飮茶 풍속이 이미 三韓, 漢四郡 이전부터 시작되어 中國과 文化交 流가 활발해지면서 中國으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飮茶 풍속과 中國茶의 移植이 있었을것 으로 보고 있다.

2) 고대국가시대의 차문화

가. 伽倻時代의 茶文化 : 洛東江 下流에 위치한 伽倻地方에 일찍부터 음다 풍속이 있었 다. AD 49년 首露王의 王妃가 印度에서 가져왔다는 보통 茶 나뭇잎보다 큰 장군 茶 가 지금도 金海 일대에 재배되고 있으며 許王后가 올 때 같이온 王后의 兄弟들이 河 東七佛庵에서 佛道를 修行 할 때 茶 나무를 심었다는 설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駕洛國記에 新羅 30代 文武王 元年(661) 王은 金官伽倻 始祖인 金首露王의 墓에 제사(祭祀)를 지내게 하였다. 王命으로 宗廟제사에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茶, 과일등 여러 가지 음식이 차려졌다. 「王之十七代孫 世級于祗稟朝旨 主常漆田 釀 醴정設以 飯茶菓庶치等尊」 위의 사실들을 볼때에 洛東江 下流에 위치한 伽倻地方은 토지가 비옥하고 중국 남쪽 가 交易이 성하여 철기문화와 벼농사가 들어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이 발달하고 사회가 안정 되었다. 이에 茶생활도 일찍 시작되어 土産茶를 재배하고 茶를 祭禮에도 사용 하였으며 飮茶 풍속이 널리 성행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 高句麗 시대의 茶文化 : 고구려 시대의 飮茶 풍속은 부족국가시대 있어 우리 固有茶 와 연결된다. 고구려가 강력한 중앙 집권적 귀족 중심의 사회로 발전 됨에 따라 茶文化는 성행되었다. 고구려의 귀족 분묘에서 錢茶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死者가 生前에 茶를 좋아했거나 土神에게 茶를 바쳤다고 볼 수 있다. 그외 고구려 初期 首都 집안현(輯安縣)에서 굴뚝이 달린 이동식 화덕이 발견 되어 들 (野)에서 茶를 끓였거나 음식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다. 百濟時代의 茶文化 : 百濟의 茶文化는 記錄과 遺積은 없으나 일찍이 中國南朝 와 활발한 文化 交流로 학문, 예술, 산업 등 文化 전반이 발달되고 귀족사회가 정착되었다. 특히 4세기 후반 불교의 전래에 의하여 왕실과 귀족사회가 강화되고 화려한 불교 문화의 융성을 이룩하게 되자 寺院과 귀족층에서 飮茶 풍속이 성행되었다. 일본 東大寺要륵에 百濟의 귀화승 行基(행기)(668 - 748)가 중생을 위하여 茶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百濟의 茶가 일본에 전래되었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다. 백제는 지리적 위치나 기후로 보아 일찍이 茶나무를 재배하고 茶를 생산하였을 것이다.

라. 新羅時代의 茶文化 : 新羅는 地理的 위치로 사회적, 文化的으로 그 발전이 고구려와 百濟에 비하여 後進的 이었으나 6세기 초 佛敎의 公認(공인)과 더불어 왕권의 강화와 貴族사회의 안정이 확립되고 文化가 전반적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특히 眞興王(579 - 632)이후 花郞제도의 公認으로 청소년들의 인재양성과 佛敎의 護 國的 信仰의 性格은 국가발전과 삼국통일의 토대가 되었다. 법흥왕 19년(532)의 金官伽倻 합병과 眞興王 23年(562) 大伽倻 정복은 新羅가 낙동강 유역의 伽倻地方을 완전히 귀속시킴과 동시에 伽倻지역의 茶文化의 유입이 시작되었으며 中國唐과 통교에 의한 唐문화의 수입과 동시에 中國의 茶가 들어오는 계기가 된 다.
- 三國史記 권2에 茶는 善德女王(632 - 647)부터 있었다는 기록 「茶自善德女王之時有之」
- 三國史記 弟 10拳 興德王條에 王3年(828) 唐나라 사신으로 갔던 金大廉 (김대렴) 이 돌아오는 길에 中國茶를 가져와 智異山에 심었다는
「入唐廻使 大廉持茶種子來 王使植智異山」

기록을 보면 新羅初期부터 있어온 茶가 佛敎의 공인, 중국과의 文化交流의 확대에 의하여 6세기 이후부터 9세기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왕족, 귀족, 승려, 화랑等 下流 사회에 飮茶풍속이 성행되고 佛敎寺院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獻茶行事와 팔관회 행사 에서 獻茶(헌차)행사가 행하여 졌다. 또 儒彿仙 思想의 영향을 받은 花郞(화랑)들 사 이 에서는 心身의 修練(수련)과 더불어 茶 생활을 즐겼다. 그 증거로 江陵의 寒松亭 (한송정) 四仙의 茶 유적을 들 수 있다.

마. 統一新羅 社會의 茶文化(676 - 935) : 新羅는 삼국통일 후 전쟁이 없는 平和스러운 생활 가운데 영토의 확장 경제활동의 확대, 귀족사회의 고착등 많은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불교의 문화의 융성과 화려한 귀족사회의 발전은 예술 문화전반이 발달하여 사 회 전반에 茶文化가 보급된다.
八關會(팔관회)등 국가정 행사와 각종 궁정행사에도 獻茶儀式이 널리 행하여지고 귀 족, 관리, 文人들의 생활과 花郞들의 修練(수련)에도 茶가 큰 역할을 하고 승려들의 修行 생활에도 茶는 필수가 되었다.
통일신라 사회에서 彌勒佛(미륵불)에 獻茶(헌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미륵불은 도탄에 빠진 民衆을 구제하는 理想佛이며 未來佛(미래불)로서 미륵이 化身하여 花郞 이 되고 화랑이 나라를 구한다는 民衆的信仰으로써 신라인들은 화랑을 미륵불의 化身 으로 생각하고 화랑을 삼국통일의 역군으로 양성하여 이들은 통일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미륵불과 花郞, 茶를 연관시켜 볼때에 신라人들이 미륵불에 올린 茶는 미래 이상세계 를 믿고 기다리는 신라인들의 염원을 미륵불에 전달하는 매개체로 볼 수 있다.

● 통일신라의 茶人들을 보면
- 원효(元曉 617 - 686) : 통일기의 학자적 승려로 韓國佛敎思想史에 가장 위대한 업 적을 남겼으며 和靜(화정) 사상으로 茶道情神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고려 후기의 文人 李奎報의 「南行日記」의 元曉房(원효방)의 기록에서 원효의 茶에 대한 경지 를 엿볼 수 있다.

- 설총(薛聰 692 - 746) : 원효의 아들이며 유학자로 神文王(신문왕)을 訓戒 (훈계)한 花王戒(화왕계) 設話(설화)내용에 「임금께서 그렇게 잘먹고 잘지내지만 茶와 술로서 정신을 맑게 하시라」 「高粱以充腹 茶酒以精神」

- 보천(寶川)과 孝名(효명) : 31대 神文王의 두아들로서 강원도 오대산에서 佛道를 닦 으면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茶를 끓여 바쳤다는 기록(三國遺事 3卷)

- 충담사(忠談師) : 신라 35대 景德王(742 - 764)때 茶僧이자 詩心이 뛰어난 鄕歌 (향가) 作家였다. 일찍이 화랑도에 몸을 담아 기파랑의 고매한 인격을 찬양한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지었다. 三國遺事에 의하면 忠談師는 每年(매년) 3월 3일과 9월9일에 경주 南山 三花領의 미 륵세존(彌勒世尊)에게 茶공양을 올렸으며 경덕왕 24年에는 王에게 茶를 끓여 올리 고 王의 요청으로 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忠談師가 삼짇날 (3.3)과 重陽節(중양절 9.9)에 미륵세존에게 茶를 올린 것은 불교 적 헌차(佛敎的 獻茶)의 의식(儀式)만이 아니고 신라의 下層民(하층민)인 大衆 (대중) 구제에 대한 염원이 담겨져 있으며 지난날 통일 전쟁에 희생된 신라 壯丁 (장정) 들의 넋을 위로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3) 고려시대의 차문화
고려시대는 불교문화의 융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茶文化의 전성기로 왕과 귀족 관리 백성들 모두가 일상 생활에서 茶를 즐겨 마셨다. 茶는 귀중한 예물로써 왕이 신하에게 茶 를 下賜(하사)하였으며 宮中의 여러 行事를 준비하는 茶房(다방)이란 관청을 두었고 일 반 백성들이 茶를 사서 마실 수 있는 茶店(차점)을 설치하여 茶를 마시는 풍속이 사 회전반에 성행하였다.
또 특히 나라의 큰 행사인 八關會(팔관회)와 煙燈會(연등회)때 土神과 부처님께 獻茶하고 宮中의 각종 의식에도 茶禮가 베풀어졌다.
또 귀족과 文人사회에도 獻茶(헌차) 풍속이 매우 성행하여 茗席(명석 : 찻자리)을 마련하 여 여러사람이 모여 茶를 마시며 담소하기로 하였다. 고려의 茶人들은 우리 茶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강하여 無我(무아)의 경지에서 손수 차 를 끓여 마시며 하나의 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李奎報(이규보), 李仁老, 李穀, 鄭夢周, 李穡 등의 茶人들은 茶생활의 멋과 풍류를 읊은 茶 詩를 많이 남기고 있다.
특히 寺院의 僧房(승방)에서 茶文化가 발달하여 茶禪一致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수행시 茶 로서 잠을 쫓기도 하였다.
고려사회에 茶文化가 성행되었다는 사실은 仁宗(1122 - 1146)때 사신으로 왔던 徐兢(서긍)이 지은 高麗圖經(고려도경)의 行狀圖(행장도)에 보는 바와 같이 茶가 성행되었으며 세계에 자랑하는 靑磁(청자)도 茶文化 발달의 所産(소산)이라 볼 수 있다.


4) 조선시대의 차문화
조선 初期에 왕실과 조정의 儀禮(의례)에서도 茶가 사용되고 조선예법의 기준이 되는 朱子家禮(주자가례)에도 祭祠(제사), 婚禮(혼례), 祠堂(사당)의 祭禮(제례)등에 茶를 올리는 獻茶(헌다)의 법도가 있어 양반 관료 사회에 飮茶(음다) 풍속이 성행되었다. 조선중기 倭亂(왜란), 胡亂(호란)등 양란이후 경제적 사회적 혼란으로 茶생산이 감소되어 茶文化의 쇠퇴를 가져왔다.
그러나 寺院의 僧房(승방)에서 飮茶의 생활과 造茶(조다)의 기술이 유지 발전되어 왔다. 조선 말기에 茶山丁若鏞, 秋史金正喜 草衣大禪師가 쇠퇴한 茶文化를 다시 일으키고 특히 草衣禪師는 海南(해남)에 一枝庵(일지암)을 중건하고 40년동안 茶의 모든 것을 연구하고 韓國茶文化를 中興(중흥)시켰다.
대체로 조선왕조가 신라와 고려시대에 비하여 茶文化가 쇠퇴한 원인은 조선초기 불교의 탄압과 寺院에 重稅(중세)를 과하여 불교가 힘을 잃은점과 일반가정의 祭禮(제례)에서도 淸酒(청주)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일상생활에 담배와 술같은 기호품의 성행과 韓國의 좋은 生水(생수)와 식탁에서 숭융을 많이 마시는 등 한국인의 생활습관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수 있고 또 조선후기 地方官吏(지방관리) 茶貢(다공)에 대한 지나친 수탈도 茶文化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 조선시대의 차인들

茶山 丁若鏞 (정약용 1762 - 1836 영조 38년 - 헌종 2년)
① 경기도 양근(楊根 : 지금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출신 정조 6년 文科에 급 제 정치, 경제, 地理, 經學에 능통했으며, 實學의 集大成 조선후기 최대의학자
② 는 三眉(삼미) 興유당 1789년 天主敎信者라 하여 海美(해미)네 유배되었다고 다 시 등용되어 水源城을 설계하고 西洋式 起重機를 사용하여 수원성 축조에 기여하였 다. 그후 承旨(승지), 암행어사 兵曹參議(병조참의)등 역임 1800년(40세)에 천주교 문제로 장기(경북)으로 유배
③ 1801년(순조元年) 申酉邪獄(신유사옥)에 연류되어 金南康津으로 유배되어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57세(1818)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 살다가 1836년 75세로 별 세 茶山은 18년간 유배생활동안 牧民心書, 經世遺表, 欽欽新書등 三部作외 500여권 의 저서를 남김
④ 茶山은 귀양지에서 茶山草堂을 지어 손수물을 길어 茶를 끓였다. 그가 유배된 뒷山 에 茶나무가 많고, 野生茶 나무를 키우고 유유히 뜨는 구름, 나는새, 푸른산, 떨어지 는 낙엽, 빗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의 손으로 不間水를 떠다 茶를 끓였다. 「책뿐인 茶山草堂 오직 봄꽃 만발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 비개인 뒤 귤나무숲의 아 름다움이여 나는 바위터 샘물을 길어 차병을 씻네.」
⑤ 茶山은 44세(1805)때에 10살 아래인 大芚寺(대둔사 : 대흥사)의 兒庵(아암) 惠藏(혜 장) 스님을 만나 茶生活에 심취 茶山은 兒庵에게 周易(주역)을 가르치고 茶를 얻어 마셨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암은 40세에 요절하였다.
⑥ 茶山은 48세(1809)때에 24세인 草衣를 만나 이때에 草衣는 茶山이 德業이 나라안 에 으뜸가고 文質이 빛나는 스승이라 했고, 그를 만난 기쁨을 "하늘이 나를 孟子 곁에 있게 했다." 라고 표현했다.
⑦ 茶山은 茶가 나쁜 버릇을 고친다고 하였으며 茶를 잘재배하면 中國의 馬(말)과 바 꾸어 나라살핌에 보탬이 된다고 주장
⑧ 茶山이 1818년 유배생활에서 풀려 고향으로 귀향하자 康津(강진)의 제자 18명이 모 여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여 茶信契(다신계)를 조직하였다.
「다신계 절목(茶信契節目)」 序文 1818년 8월 그믐날의 논 귀하다는 사람은 신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떼지어 모여 서로 즐기다가도 흩어진 뒤에 서로 잊어버린다면 이는 금수의 짓이다. 우리들 여남은 사람은 1808년의 봄부 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형이나 동생처럼 모여서 글공부를 하였다.
이제 스승은 북녘 으로 돌아가고 우리들은 별처럼 흩어져 만약에 망연히 서로를 잊고 신의의 도리로 써 생각하지 않게 된다면 이 또한 방정맞지 많을 손가. 지난해 봄 우리들은 이 일 을 염려하여 계를 세워 돈을 모은 것이 그 시초였다.

秋史 金正喜(김정희 1786 - 1856 정조 10년 - 철종 7년)
① 書畵家이며 文臣 호는 阮堂(완당), 秋史(추사), 茶老(다로), 勝雪學人(숭설학인)학 문에는 實學派(실학파)에 속하며 서예에는 독특한 秋史體(추사체)를 대성예서(隸書) 와 행서(行書)에 새경지를 이룩, 저서에 阮堂集, 金石過眼錄등이 있다.
② 秋史는 30세에 茶山의 아들 有山의 소개로(1815) 草衣를 만나 친교가 두터워 해마 다 茶를 얻어 마셨다(金蘭之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갔을 때(1840 - 1848 : 55세 - 63세) 草衣는 제주도에 찾아가 같이 지내며 茶나무도 심고 참선도 하였다. 秋史 는 예술의 茶에도 조예가 깊어 높은 수준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③「참선과 茶 끓이는 일로 한해를 보냈다」는 말이나 草衣에게 써준「茗禪」에는 「草衣가 손수만든 茶를 보내어 왔는데 그제다(製茶) 솜씨를 칭찬하고 글로써 이를 보답한다」고 쓰여있다. 그의 茶詩 20여수가 전해지고 있다. "고요히 않았노라면 차 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듯하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네(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草衣禪師 (초의선사 1786 - 1866 정조 10년 - 고종 3년)
① 본명은 장의순(張意恂) 15세에 출가하여 운홍사(雲興寺)에서 중이 되고 大興寺의 玩虎(완호)스님 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草衣라는 法名을 받았다. 24세 (1809) 茶山의 문하 들어가 3년 동안 수학하였다.
② 39세에(1815) 폐허가 된 一枝庵(일지암)을 중건하고 그곳에서 수행과 저술에 몰두 하여 조선후기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禪風(선풍)을 일으키고 명맥만 유지해오던 韓國茶道를 中興시켰다. 茶에 관한 그의 저술로 「茶神傳」「東茶頌」있어 茶에 대 한 모든 것을 정리하였다.
③ 초의는 詩, 佛畵, 書, 茶道에 뛰어나고(四節) 서울의 많은 茶人, 학자들과 교류했는 데 金正喜, 金命喜 형제, 茶山의 아들 丁有山, 洪顯周(홍현주 : 정조의 부마), 홍석 주, 신관호 등이며 특히 秋史 金正喜와는 金蘭之交의 우정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草衣와 秋史(金蘭之交)
① 草衣와 院堂이 그토록 親交하게된 요인이 무엇일까? 여러모로 異質的 요소가 많았는데 첫째는 동갑(1786 병오생)나기요, 둘째 두사람 모두 天性이 지극히 순수했다는 것 셋째는 宗敎와, 身分 계급을 초월했다는 것 넷째 藝術의 本質에 투철했다는 것 다섯째 茶道의 眞髓를 터득했다는 것
② 草衣가 漢陽에 오면 도봉산 청량사에 머물었는데 그 소문이 서울장안에 퍼지면 「촌놈의 중」을 만나려고 하는 내노라하는 名士들이 줄을 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申獻求(신헌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漢陽의 名士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 은 그가 德望높은 수로승 때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누구나 친근할 수 있는 人間性 때문이다. 詩作, 撑畵佛事(탱화불사), 茶道가 밖으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內面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世人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면서 남들 흉내만 내어 草衣하느니라"
③ 大興寺一枝庵을 찾아온 김정희의 生父 金魯敬과 草衣와의 대화
○ 김노경 : 중년에 내가 中原(北京)에 冬至使兼謝恩使(동지사겸사은사)로 갔을 때 그곳의 (명순)을 마셔보았지만 그맛과 香이 이곳의 우리네 것만 못한 것 같더군 왜 그럴까?
○ 草衣 : 그렇습니다 陸羽(육우)의 茶經에 이르기를 명순은 名山에서 난다 했습니 다. 東茶이 좋은 것은 우리나라의 山水가 수려한 까닭입니다.
○ 김노경 : 하지만 이 茶는 유달리 맛이 좋군 왜 그럴까?
○ 草衣 : 茶에 쓰는 물은 결국 茶의 체가 되는 까닭으로 茶神이 아무리 뛰어나도 물이 나쁘면 좋은 茶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다행히 토굴뒤안에서 좋은 물 이 솟고 있습니다. 乳泉(유천)입니다.
○ 김노경 : 과시 酪(소락)이로고 東茶頌에는 酉堂大爺過一宿紫干山房味乳泉曰勝 酪
○ 草衣 : 다는 홀로마시는 것이 으뜸으로 침니다 마시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합 니다. 그후 교차하는 만감이 차차 줄어듭니다. 그러면 맨 나중에 남는 것 은 공허(空虛)뿐입니다. 그리고 空虛를 다시 조이면 省察(성찰)이 생깁니 다. 그 성찰을 거듭하면 나를 섭섭하게 했던 사람들 나를 헤치려했던 사 람들을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 용서하는 마음은 이전에 지녔던 욕망, 집착, 손익, 타산, 선악, 고정관념을 차차 줄여주고 드디어는 사라 지게 합니다. 그것은 모두 瞑想(명상)의 과정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다 를 瞑想文化(명상문화)의 일종이라고도 하고 禪(선)의 방편이라고도 합 니다.
○ 김노경 : 茶禪一如하는 뜻인가?
○ 草衣 : 그렇습니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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