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스크랩] 한국의 다도정신

차보살 다림화 2008. 2. 17. 19:27
2. 한국의 다도정신

다도를 관통하는 정신을 다도정신이라 하여 다실의 분위기, 다구의 아름다움, 차의 성품, 차를 끓이는 여러
가지 일 등에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것을 뜻한다.
다도정신은 다인들의 정신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그것을 증명해 준다. 차인들은 차를 통해 세속적 이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초월하고자 했다. 예로 한 시구에서 "맑은 바람을 타고 티끌 세상을 벗어나고자"라 고 표현했듯이 이는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초탈을 희구하뎐 도가의 다도정신으로, 이때의 초탈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부귀와 공명을 가볍게 보려는 마음에서이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 보의 시 중에 "한 잔 차로 곧 참선이 시작된다."는 구절은 차와 선이 한 맛으로 통하는 경지의 표현이다. 차와 선이 서로 같다는 다선일미(茶禪一味)는 선의 삼매경에 들어 대오각성하는 길이나, 차의 삼매에 들어 묘경(妙境)을 깨닫는 것이 한가지라는 선가(禪家)의 말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상통하는 다도정신이다. 우리나라의 다도정신에는 중정이 강조되었는데, 이것이 유교의 다도정신으로 중국의 다도정신에서 강조하는 중용(中庸)과 일본의 화(和)와도 서로 상통한다.

1) 신라시대
《삼국유사》의 수로부인·처용랑·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인들은 신체미를 숭상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므로 미모의 남자를 뽑아서 곱게 꾸민 화랑은 신체미 숭배사상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화랑도가 다도를 수련한 것은 이러한 외형미 못지않게 내면의 심성까지 미화하기 위한 구도적인 정신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성업을 성취한 정신력의 배양도 구도적인 다도의 영향이었다. 또 <마음이 맑아야만 도가 보인다(澄懷觀道)>는 말처럼 화랑도의 아름다운 덕망은 다도의 수련을 통한 맑은 마음에서 샘솟은 것이었다. 이렇게 수련된 화랑도의 아름다운 정신은 《삼국사기》의 열전과 《삼국유사》에 수록된 바와 같이 아름다운 덕행으로 점철되었다. 따라서 신라의 다도정신은 미덕이라 할 수 있다.


화랑정신과 다도정신

정상구의 『한국다문화학』에서는 다도정신의 기원은 화랑도에서 엿볼 수 있으며 한국다도정신의 뿌리는 원효의 화쟁지화(和諍之和)정신과 그의 적지적(寂之寂)정신 즉 靜정신에서 일어 났다고 논의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의 다도정신은 원효성사의 화정(和靜)정신을 기조로 하여 고려시대의 이규보(李奎報)의 다시, 정몽주(鄭夢周)의 다시를 비롯하여 조선조시대의 서산대사의 다시 그리고 초의선사의 다시 및 다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 다고 하겠다.


<신라시대의 다도정신 -- 화(和). 정(靜). 청(淸)>

신라의 화랑들과 다도와는 깊은 관계가 있다. 삼국유사의 충담(忠談)과 차관계에 관한 것에서 이미 충담은 미륵세존에게 차 공양을 올리고 남산의 오솔길을 내려 오면서 지난날 화랑 기파랑(耆婆郞)의 인격을 기리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구름 쫓아 떠가는 어디에
새파란 냇물속에 기랑의 모습 잠겼세라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이
랑의 지나신 마음갓(際)을 쫓고자
아 잦(栢)가지 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차는 이미 선덕여왕 시대부터이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 바에 의하면 흥덕왕 2년에 입당회사인 김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차씨를 화개동에 심었다 하여 점점 퍼지게 된 것이다. 경덕왕은 충담사를 궁중에까지 맞아서 차를 마신 기록이 있다. 왕은 「차의 기미가 신기하여 입안에 이상한 향기가 가득차다.」(茶之氣味異常 中異香郁烈)고 하였다. 이것만 봐도 왕이 차를 얼마나 좋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신라 화랑과 다도와의 관계는 고려 중엽의 문인 이곡의 기행문 동유기(東遊記)에서도 엿볼 수 있고 그의 다시 가운데에도 엿볼 수 있다. 그의 다시 「강릉동헌의 운을 잇다.」(次江陵東軒韻) 또는 「한송정(寒松亭)」등에서 엿볼 수 있다. 뿐아니라 김극기의 화랑 「차부뚜막」을 읊은 시 등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대학자 이규보(李奎報)의 「원효방(元曉房)」을 심방하고 원효와 사복(蛇福)간의 차생활 기록 등에서도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러면 화랑도정신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세속오계를 드나 이는 합당치 않으며 또 어떤 사람은 미덕을 들기도 하나 미덕이란 지나치게 개연적인 것이어서 이를 취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그럼 과연 화랑정신이란 무엇일까 ? 이에 관해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풍류라 이른다. 그 교의 기원은 선사에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실로 이는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집에 들어오면 효도를 다하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의 뜻 그대로이며, 그 한없는 일을 당하여 말없는 교를 행하는 것은 주주사의 종지를 다함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행함은 축건태자의 교화 그대로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랑도는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했으며, 충효신의를 지켜 유교를 무의무언지교 화광동진(和光同塵) 충기이위화 하는 선교를 또 자비덕행하는 석가의 불도를 다 같이 수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랑의 기상은 유. 불. 선의 장점을 산천에의 주유와 더불어 심신을 단련하여 또 차와 더불어 체득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라시대의 화랑정신은 이를 「화합(和合). 충절(忠節). 숭경(崇敬). 청결(淸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랑의 다정신도 화(和). 충(忠). 경(敬). 청(淸)이라고 하겠다.

정영선의 『다도철학』에서는 화랑의 다문화를 논의하면서 6세기 이전의 인물로 추정되는 신라 사선이 경포대와 한송정에서 「석지조(石池爬)」라는 돌못화덕을 사용하여 차를 끓여 마셨다는 기록이 흔히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선은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으로 선인이자 초기 화랑으로 이러한 특수한 다구를 써서 야외의 특정장소에서 차를 끓여 마셨다.

맨 처음 사선의 다조를 글로 남긴 사람은 김극기(金克己,1148-1209)로서 그는 <한송정>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아래와 같이 읊고 있다.

여기가 네 신선이 자유로이 완상하던 곳
지금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구나
주대는 기울어 푸른 풀 속에 잠겼고
다조는 내버려져 이끼 끼었네


또한 이곡(이곡,1298-1351)이 동해안지방을 여행하고 쓴 『동유기』를 보면 경포대와 한송정에 있는 사선의 전다구(煎茶具)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날이 아직 기울기 전에 경포대에 올랐다. 옛날에는 대에 집이 없었는데 요즈음 호사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옛날 선인의 석조가 있으니 대개 차를 달이는 도구이다. 동쪽에 사선비가 있었으니 호종단이 물 속에 넣어 버리고 오직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송정에서 송별연을 했다. 이 정자 또한 사선이 유람하던 곳인데, 고을 사람은 구경꾼들이 많은 것을 귀찮게 여겨 집을 헐어 버렸고 소나무도 들불에 타버렸다. 오직 서리내리는 밤의 달이 맑을 뿐이다. 다만 석조 석지와 두 개의 석정(돌우물)이 그 곁에 남아 있는데 역시 사선의 다구이다.

위의 글을 살펴 보면 한송정 뿐만 아니라 경포대에도 화랑들이 차를 마셨고, 그 자리에 석조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송정에도 석지와 두 개의 석정이 있음도 적고 있다. 우물이 두 개인 이유는 하나는 제사장용이거나 차끓이는 물을 쓰기 위한 신성한 샘이고, 다른 하나는 낭도들이 쓰거나 허드렛물을 쓰기 위해 파놓은 우물이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서에 남아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신라의 음다풍속을 살펴 볼 때, 주류를 이루는 계층은 화랑이었다고 하겠다. 대표적 인물로는 6세기 이전의 초기 화랑인 사선과 후기의 화랑승인 충담, 월명, 보천과 효명 등이라고 하겠다. 사선이 경포와 한송정에서 차를 끓인 이유는 이곡이 쓴 『동유기』에서의 내용과 여지승람을 참고하면 아마 차를 끓여 누군가에게 바치고 기도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차를 바친 대상은 사선과 선인들이 떠받들었던 삼신혹은 셋을 하나로 본 시조삼신(始祖三神)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용운은 사선랑의 행다법을 재구성하면서 그 의의는 풍류도를 닦은 선인들이 한송정이나 경포대에서 차를 달여 마시며 심신수련을 하는 선가의 다풍을 알 수 있는 독특한 행다법에 있다고 보았다. 선랑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심신수련을 하였는데 그들의 수련장에는 차를 달이는 돌절구와 돌부뚜막, 돌우물과 다구들이 있었다. 항상 차를 달여 마시기 때문에 깨지지 않는 돌로 만든 다구들을 준비해 두고 사용했으며 산수간에 노닐면서 오악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또 낭도들이 차를 나누어 마시기 편리하도록 그 자리에 고정시킨 다구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헌다순서로 차를 마셨다고 보고 있다.
1. 한송정에서 석지조를 이용하여 차 끓일 준비를 한다.
2. 석조는 찻물을 끓이며 차 달이는 부뚜막이고, 석지는 찻물을보관하는 기구이다.
3. 석지에 찻물을 길어다 놓고 석조에 불을 피워서 찻물을 끓인다.
4. 석조 옆에 물을 채워서 물이 데워지도록 하고 연료는 숯이나 백탄을 쓰되 솔방울을 주워다 쓰기도 한다.
5. 다구를 깨끗이 씻어서 준비하고 찻물이 끓기를 기다려 물이 끓으면 약간의 탕수를 떠내 찻잔을 데운다.
6. 떡차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돌솥에 넣어 끓인다.
7. 차의 양은 손님의 수에 따라 가감을 한다.
8. 찻잔에 물을 버리고 잘 달여진 차를 떠내서 찻잔에 나누어 따른다.
9. 낭도 한명이 찻잔을 받쳐 들고 정자 안에 계시는 사선에게 차를 날라다 드린다.
10. 사선에게 차 대접을 마치고 나면 다른 낭도들이 마실 차를 달인다.
11. 전과 같은 순서로 차를 달여 낭도들에게 차례로 나누어 준다.
12. 낭도들은 자기의 찻잔은 각자가 휴대하며 차 마실 때 꺼내어 차를 받아서 마신다.
13. 사선은 정자 안에서 마시고 낭도들은 밖에서 아무 곳이나 편리한 속에서 차를 마신다.
14. 사선이 차를 다 마시고 나면 찻잔을 거두어 가지고 나와 석조의 데워진 물에 씻어서 보관한다.
15. 석조에 설거지하는 통이 함께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효의 화쟁지화

신라에 있어 茶와 佛敎와는 끊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충담사와 기파랑, 월명대사, 혜소, 진감국사 등의 고승이 있었으며 이들과 다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크게 불교계 영향을 미친 것은 원효대사이다. 원효대사와 다에 관한 것은 사포와의 일화 및 감천전설 등을 비롯하여 원효방 다론 등 많다.

정상구의 『한국다문화학』에서는 원효가 불교계의 해동보살일 뿐 아니라 우리의 다도정신을 그의 自得道通한 견지에서 승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논하고 있다. 신라통일 조를 전후하여 많은 고승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대부분 당나라 유학을 갔다와 당나라 불교의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당나라 영향을 받은 스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당나라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았던 원효는 스승없이 자득달통한 사람이다. 이에 관해 삼국유사는 「원효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스스로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라고 했다. 또 고려의 대표적인 고승인 의천대각국사는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불교를 생각하여 선대 선지식들의 학덕을 두루 배우고 익혀 관찰해 왔으나 원효성사위에 지나가는 이는 없다.」라고 하여 원효를 聖師라 칭했으며 또 海東菩薩이라고 칭했다.

이런 점에서 더욱 다와 불교와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다도정신에 있어 화합은 막연한 화합 정신에만 그치지 않고 원효의 위대한 和諍사상과 자연 결합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백가이쟁(百家異諍)의 실마리를 풀어서 진리의 바다에 되돌려 보냄으로 하여 한국적 화쟁사상 곧 원융회득하는 정신을 이룩했다. 즉, 화는 원효의 반야경종요서(般若經宗要序)에 나오는 화쟁지화 사상은 다음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백가의 서로 다른 다툼을 회통시켜서 드디어 요란한 四生의 중생들로 하여금 둘도 없는 참다운 본성에 들어가게 하여 꿈꾸는 생사의 긴 잠을 깨워서 큰 깨달음의 지극한 果에 이르게 하며 지극한 과의 큰 깨달음을 이르게 한다.

그리고 諍사상은 원효의 해동기신론별기의 다음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즉, 「불도가 진리의 길이 되는 것은 텅 비고 고요하고 말숙하면서 깊고도 그윽하기 때문이다. 그윽하고 그윽하지만 만가지 형상밖에 벗어나지 않으며 고요하고 고요하지만 오히려 백가의 이론속에 있도다. 」

여기에서 원효가 제일 중요시하는 사상은 「寂之寂」 사상이다. 적지적 사상이란 무엇인가. 寂은 고요할 적 즉, 諍也, 安也가 주격이다. 적지적 사상은 즉 極寂을 말함으로 극적이란 적의 근원에 돌아감을 말함인데 적의 근원은 바로 淸寂 즉 諍이다. 이는 노자의 도덕경의 다음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체 모든 물은 운운하지만 각각 그 근원에 돌아가는 것을 정이라 한다.

노자는 여기에서 무위자연 곧 적지적함을 두텁게 지키면 천지만물이 모두 일어나는데 그것이 諍에 돌아간다는 것을 말함이다. 이와같이 근본 뿌리에 돌아가는 것을 즉, 諍이라 한다는 것이다. 노자의 이치를 통해 볼 때 寂의 본질은 諍인 것이다.

원효의 적지적 사상도 바로 노자의 그것과 상통한다고 본다. 寂은 고요할 적, 바로 諍也다. 적을 강조하여 적지적이라 함은 바로 적의 근원인 諍, 바로 깨달음을 일컬음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원효의 불교사상은 바로 和諍이라 하겠고, 茶禪一體觀을 가진 원효의 다도정신 역시 和諍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원효에 있어 차를 마시는 경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원효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당정산 고총에서 어느날 밤에 해골에 담긴 물을 먹고 그 맛이 감로수 같았던 것이 날이 밝아 보니 해골에 담긴 물이라 구토를 느꼈다. 여기에서 그는 깨달음을 가져 왔다. 다 같은 물인데 어느 때는 감로수 같고 어느때는 구토를 느끼고 그는 三界가 모두 허위이며 三界唯心의 진리를 깨우쳤다. 「마음 그것은 내가 없는 무아경에 이를 때 眞性이며 陽을 나타날 때 和가 된다. 고로 화는 교의 근본이다.」라고 그는 교의를 세웠으리라.

이상과 같이 원효는 그 누구에게도 배운 바 없이 스스로 因心自得하여 후일 고려왕조에서는 그의 위대한 화정사상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화정국사라는 칭호를 내리기까지 했다. 화정국사 원효의 화정정신이 바로 한국다도정신의 근원이라고 하겠다.

원효대사에 얽힌 차얘기는 고려 이규보의 「남행월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튿날 부령현재인 이군 및 다른 손님 6-7인과 원효방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길의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발을 포개고 매우 조심하여 걸어서 도달하였더니, 뜨락의 층계와 창문이 수풀 끝에 솟아 있었다. 듣자니 가끔 범과 표범이 있는데 아직은 당겨서 올라온 놈이 없다고 한다. 곁에서 한 암자가 있는데, 속말로 사포성인이 옛날에 살던 곳이라고 한다. 원효가 와서 살았기에 사포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서 효공에게 올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음을 근심하다가, 그 물이 문득 바위 틈에서 솟아나고, 맛이 매우 달고 젖과 같아서 점다를 시험하였다.

이 글에 나오는 원효방터는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의 뒷산인 우금 암밑이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원효대사가 그 곳에 간 시기는 백제가 멸망한 뒤 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원효대사와 사포스님에 대한 설화는 『삼국유사』의 「말하지 않은 사복」 조에 적혀 있다.

참고로 석용운의 「한국다예」에 나오는 원효성사의 행다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먼저 다실 밖에서 탕관에 물을 끓일 준비를 한다. 불을 피울 숯이나 마른 나무를 가져 온다.

2. 다실 밖에서 불을 피워 찻물을 끓일 차비를 해 놓고 샘에서 물을 길어 온다.

3. 화로에 차솥을 올려 놓고 물을 끓인다. 물 끓이는 일은 밖에서 한다.

4. 차 달일 다구를 챙겨서 다실로 가지고 들어가 배열을 마친다.

5. 밖에서 물이 다 끓으면 삼발이나 화로를 준비해서 차솥을 가지고 들어와 다실에 놓는다.

6. 떡차를 다연에 넣고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놓는다. 가루차는 거친 가루이다.

7. 차솥의 탕수를 한 바가지 떠서 잔을 데운다. 그리고 가루차를 차솥에 넣는다.

8. 또는 가루차를 찻잔에 넣고 탕수를 한 바가지 떠서 그 위에 붓는다.

9. 차솥에 넣은 차는 잘 끓여진 후에 찻잔에 떠내서 따로 만나지만

10. 찻잔에 가루차를 넣고 그 위에 탕수를 부어서 만든 차는 다선으로 저어서 거품을 낸다.

11. 적당하게 물과 차가 섞여지고 거품이 나면 찻잔을 찻상으로 옮긴다.

12. 찻상에 받들어 가지고 가서 원효대사께 드린다. 차를 다 마시면 찻잔을 물린다.

13. 찻상에 찻잔을 받아 가지고 물러나 다구를 챙겨서 치운다.



2) 고려시대

고려의 다도정신은 다가(茶家)들이 읊은 차시(茶詩)에 많이 보이는 망형(忘形)의 경지이다. 예를 들면, 이규보(李奎報)의 《빈강의 촌집에 묵다(宿瀕江村舍)》에는 강가를 방랑하니 저절로 형체를 잃네(江邊放浪自忘形), 임서하(林西河)의 《찻집에서의 낮잠(茶店晝眠)》에는 무너지듯 평상에 누우니 문득 형체를 잃네(頹然臥榻便忘形), 이숭인(李崇仁)의 《신효사 감스님방을 적다(題神孝寺師房)》에는 담쟁이덩굴 무늬 옷과 흰 장삼 차림에 이미 형체를 잃네(蘿衣白衲己忘形) 등이 있다.

망형이란 자신의 형체를 잊고 무위자연의 도(道)를 깨치는 것으로서 망기(忘機) 또는 좌망(坐忘)이라고도 한다. 좌망이란 단정하게 앉아서 잡념을 떨쳐 버리고 무차별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망형의 다도정신은 고려청자의 다기(茶器)에도 투영되었다. 때문에 송나라의 태평노인은 《유중금(釉中錦)》에서 감서(監書)의 술, 단계(端溪)의 벼루, 휘주(徽州)의 먹, 낙양(洛陽)의 꽃, 건주(建州)의 차, 고려청자의 비색은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격찬하였다.


<청허(淸虛), 청화(淸和), 사무 사(思無邪)>

이상과 같이 전개된 한국의 다도정신은 고려시대에 와서도 정몽주(鄭夢周), 이규보(李奎報), 이행(李行) 등의 시 등에서 계속 이어져 그 정신적 발전을 만개하였다. 정상구의 『한국다문화학』에서는 고려시대의 다도정신이 본질적으로 和靜精神과 동질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먼저 고려시대 이규보의 茶詩 중에서 다도정신을 잘 표현한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밤은 깊어 물시계 딩동할 때 그대에게 三語와의 차이를 묻노니 말해 다오.
나는 긴세월 정진했으나 스스로 구하기 어려웠도다. 그대를 잠시 보고 나니 모든 것이 空함을 알메라.
韓退之의 쌍조부(雙鳥賦)는 싫증나고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는 구미에 맞노라.
타오르는 불에 끓인 향기로운 차는 바로 도의 맛이며 흰구름과 밝은 달은 곧 나의 가풍이로다.

이시에서는 깊은 밤 물시계의 딩동하는 소리가 바로 여래의 삼어와 같다는 인식이다.


여래의 삼어를 살펴 보면

①수자의어(隨自意語) -- 부처님이 자의대로 자기가 증득한 실법을 설한 것
②수타의어(隨他意語) --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설한 것
③수자타의어(隨自他意語) -- 부처님이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하실 때 절반은 자의에 따라 설하시고 절반은 타의 근기에 따라 설하신 것을 말함.

앞의 구절에서 물시계의 소리가 여래의 삼어와 차이가 없다는 것은 바로 실유불성(實有佛性)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오랜 세월 정진하였으나 스스로 구하기 어려웠던 것을 다를 만나고 나니 공한 것을 알았다는 것이며 장자의 소요유를 한퇴지의 쌍조부보다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은 현실적인 세계관보다 淸虛와 靜寂의 노장사상에 심취해 감을 읊조린 것이며, 茶의 맛을 道의 맛으로 승화시키는 청정한 그의 마음가짐은 흰구름과 밝은 달을 기풍으로 한다는 청정무구(淸靜無垢)한 무소득무아(無所得無我)의 경지를 가풍으로 한다는 것을 읊조린 것이라 하겠다.

이 시에 나타난 이규보의 다도정신을 『한국다문화학』에서는 청허(淸虛)와 무사의(無邪意)로 보고 있다. 이규보가 설봉선사의 청에 의해서 지은 다음과 같은 茶詩속에도 그의 청허한 다도정신을 알 수 있다.


돌화롯불 활화로 피워 차 손수 달이니
찻잔의 차 빛깔과 맛 자랑스럽네 .
끈끈한 그 맛 입속에 부드럽게 녹으니
어머니 젖내와 젖내 맡는 얘기같네.
고요로운 방안에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차솥 생황소리(물 끓이는 소리) 기뻐네.
차 이야기 물 고르는 것은 이 집의 가풍
어찌 千世의 영화를 바라랴.

화롯불 차 손수 달이는 것 등은 自得自覺의 修行心을 표현한 것이며, 차 맛 입속에 녹으니 내 마음 어머니 젖내 맡는 얘기 같다는 것은 無邪意한 정신, 즉 淸和精神을 말함이라 하겠다. 방안에 아무 것도 없고 차솥 물 끓이는 소리 기쁘네 하는 구절은 청허정적(淸虛靜寂)한 마음자리를 나타내고 있고, 차 이야기 물 고르는 것을 가풍으로 삼고 천세의 영화를 버린다는 것은 陸羽의 精行儉德 정신과 유무상통하는 정신이다. 이러한 이규보의 다시를 살펴 볼 때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이규보의 다도정신은 淸虛. 淸和. 無邪意 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쁜 평판을 모두 허령한 마음 밖에 던지고 나니
오묘한 도는 오히려 눈앞에 있구나.
돌솥에 끓는 차는 향기롭고 흰 젖이 뜨고
벽돌 화로에 피는 불은 저녁놀 같이 붉구나
인간사의 영광과 욕됨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호수와 산을 유랑하는 늙은이가 되리라

위시는 이규보의 茶詩로서 그의 茶道一如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겠다. 자신의 虛한 마음을 밖으로 던지고 나니 비로소 도가 보이는데, 이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끓고 있는 차속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읊고 있다. 이 茶道一如를 통해서 인간사의 영광과 욕됨의 허무함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거기에서 벗어나서 자연속을 유랑하는 삶을 택하겠다는 고고한 정신을 암시하였다. 또한 이 茶詩에는 차의 아름다움을 정말 멋지게 표현하고 있는데, 차를 맑은 흰 젖에 비유하거나 화로의 불을 저녁놀에 비유함으로서 차를 대자연과 조화롭게 이해하려는 이규보의 다정신의 일면을 알 수 있겠다. 정영선은 이규보의 道를 논의하면서 그가 추구하는 道는 佛家나 儒家의 도가 아니라 道家의 도라고 보고 있다. 그 예로서 아래의 시를 인용하고 논증하였다.

한자의 쌍조이야기는 듣기가 싫고
장자의 이충설을 몹시 좋아한다네
타오르는 불에 끓인 향차는 진실로 道의 맛이고
흰 구름과 밝은 달은 곧 집의 풍경이네
생공의 설법은 예리하고 날카로우며
열자는 바람을 타고 다녀 육신이 해탈했네
그대를 만나 망형하고 애오라지 뜻을 이루었으니
그날은 방덕공에게 부끄럽지 않았다오

위 시에서 이규보는 장자의 설을 몹시 좋아하다고 밝히면서 생공과 열자를 인용하고 있다. 노장의 無爲自然을 상징하는 흰 구름과 밝은 달이 곧 자신의 집이라고 하면서 이 老莊에 의해서 육신을 벗어나서 해탈을 얻으니 형태를 잊어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노라 자신있게 밝히고 있다.

또한 익제 이제현선생도 차를 사랑하고 아끼는 다인이었다. 이제현선생은 고려의 충절이요, 대문장가로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점잖기가 성인 같았다고 전한다. 14세 때 성균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5세때 병과에서 급제하였다. 익제선생은 〈익제난고(益齊亂稿)〉를 지었는데 권4에 「소악부」 11편을 남기고 있는데 <고려사> 「악지」에 소개된 내용과 같은 것으로 「장암」「사리화」「처용」등이다.

익제의 아버지 이진 때도 집안에서 차를 즐겨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익제집>에 혜감(慧鑑)이 새차(新茗)을 동암(東菴)에게 보내면 동암은 반드시 시를 지어 보답했으며 이제와서 자원국사 역시 차를 익제에게 보내니 이 일이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이에 <송광화상이 햇차를 보내준 은혜에 대하여 붓가는 대로 적어 방장실에 붙임> 이라는 긴 제목의 시를 지어 바쳤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나가보니 대바구니 보내와
옥과보다 더 좋은 신선한 차를 얻었네.
맑은 향기는 한식 전에 따왔는지
고운 빛깔은 숲속의 이슬을 머금은 듯
돌솥에 찻물 끓는 소리 솔바람 부는 듯
자기 찻잔에 도는 무늬는 꽃망울을 토한다.
황정견이 운용차를 자랑할 수 있으려나
소동파의 월토차보다 월등함을 알았네.
서로의 친분은 혜감의 기풍이 남아 있고
사례하려 하나 동암의 글귀가 없구나.
붓솜씨도 노동을 본받을 수 없는데
더구나 육우를 따라 다경을 쓰겠는가.
원중에서 공안을 다시 찾지 마시오
나도 역시 지금부터 시에 전념하겠소.

천병식의 『韓國茶詩作家論』에서는 이 시에 대하여 햇차의 신선함, 차의 빛깔, 차 솥에 물끓는 소리가 마치 솔바람 소리 같다는 것 그리고 찻잔에 뜨는 무늬의 아름다움 등 찻자리에서의 모든 일들이 거의 다 묘사되어 있다고 논하였다. 그러나 익제는 스스로 겸손의 미덕으로 글 솜씨의 비천함과 육우 같은 재주가 없어 <다경> 같은 글을 지을 수 있는 힘이 없으니 이제부터 시를 짓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다짐하고 있다.

한번은 묘련사의 순암 법사가 찻자리를 벌이고 그의 친구들을 초청하여 옛날에 쓰던 석지조를 가져와 그 내력을 설명하고 차를 한잔 씩 마신 후에 그 석지조의 내력을 다 설명하고 익제에게 시를 지어달라고 부탁함에 익제는 <묘련사석지조기>를 지었다.

김명배는 고려의 다경을 크게 보아 1. 망형(忘形) 2. 다선삼매(茶禪三昧) 3. 역리의 음양사상 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선 망형사상의 예로서 다음과 같은 茶詩를 들고 있다.

강변을 방랑하니 저절로 형체를 잃고

-- 이규보 --

무너지듯 평상에 누으니 문득 형체를 잊고 한 낮의 베개에 바람 불어오니 잠이 절로 깨누나

-- 임춘 --

나무의 이끼와 흰 납의 차림에 이미 형체를 잊고

-- 이숭인 --

이처럼 고려시대의 다시를 살펴 볼 때 자기의 형체를 잊고 자연에 합일되는 초월적 정신이 표현되었음을 이해하겠다. 그리고 이규보는 「장원 방연보의 화답시를 보고 운을 이어서 답하다.」라는 茶詩에서 세계 최초로 茶禪三昧의 경지를 제창하고 있다.


초암의 다른 날 선방을 두드려
몇 권의 오묘한 책 깊은 뜻을 토론하리
늙기는 했어도 오히려 손수 샘물 뜰 수 있으니
한 사발은 곧 이것이 참선의 시작이라네

이처럼 이규보는 차를 통해서 참선의 경지에 이르는 지극한 다도정신을 느끼고 표현한 茶人이었다. 이러한 茶禪三昧의 정신이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다도정신이라 하겠다.

돌솥의 차는 비로소 끓고
풍로불은 빨갛게 피었구나
물불은 천지의 쓰임이니
곧 이 뜻은 무궁하도다

위 詩는 정몽주의 「역경일기」라는 茶詩인데 여기서 역리를 도입한 점이 눈에 띄인다. 『易經』의 설괘전에 따르면 감리의 괘는 물. 불이다. 그러므로 정몽주의 「역경읽기」에 보이는 감리는 천지를 뜻하는 건곤이라고 하겠다. 이 茶詩를 통해서 정몽주의 다도정신은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천지의 정기를 느끼는 역리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겠다.


3) 조선시대


다도에는 오관(五官)이 동원되는 외에도 그림 ·노래 ·춤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잎차 중심의 조선시대에는 다가들이 차를 마시면서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청담을 나누는 취미를 즐겼다. 차마시기의 흥취는 유독한상(幽獨閑賞)에 있었다. 이 때 다가들은 소요(逍遙) ·자득(自得) ·무집착 ·비우사상(庇雨思想) 등의 심상으로 다도를 수련하였다.

- 청허(淸虛). 사무사(思無 邪). 청화(淸和). 중정(中正)

조선시대의 다도정신은 西山대사의 茶詩와 한국의 茶神이라고 일컬어지는 초의선사의 동다송, 다신전 및 그의 다시 등에서 엿볼 수 있겠다.

먼저 西山대사의 茶詩에서 그의 다도정신을 찾아 보기로 하겠다.

西山대사는 중종 15년 (1520년) 3월 26일 안주에서 태어 나셨다. 속성은 최씨요, 호는 淸虛 또는 休諍 자는 현응(玄應)이다. 묘향산 에 오래 계셨으므로 서산대사라 하였다.

낮에는 차 한잔하고
밤이 되면 잠한슴자네
푸른산 흰 구름
더불어 無生死를 말함이여

이 시에 대해 「한국다문화학」에서는 인생의 사고 즉, 生. 老. 病. 死 따위를 초월한 서산대사의 인생관이 표현된 작품으로 보고 있다. 낮에는 차 한잔 하고 밤에는 잠 한슴자네 에는 이러한 대사의 초월적 인생관이 담겨져 있고, 푸른 산 흰 구름 하는 구절은 진리의 침묵, 대자연의 淸淨心 淸虛한 法身 등을 엿볼 수 있으며 無生死를 말함이라는 無我의 경지에 이름을 말하고 있다.

스님 몇 명이 있어
내 암자 앞에 집 지었구나
새벽종에 함께 일어나고
저녁 북에 함께 잠든다.
산골물 달과 함께 길러
다 달이니 푸른 연기나고
염불과 참선일세


여기에서도 서산대사의 고고한 정신을 알 수 있는 바, 새벽종에 일어나고 저녁북에 함께 잠든다 라는 구절은 佛의 소리, 空의 소리, 淸虛의 소리를 담고 있으며 산골물 달과 함께 길러 차 달이는 푸른 연기 하는 구절에서는 淸虛한 空思想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겠다. 날마다 하는 일은 염불과 참선일세 하는 대목은 차 달이는 일이 곧 선의 경지에 이른 것 즉, 차-염불-참선의 茶禪一體, 茶禪不二의 그의 淸虛한 반야의 진리를 밝히고 있다.

산골물 길어 낙엽으로 태워
차 끓여 한잔 마시네
밤에는 바위밑에 자니
얼은 나는 용을 탄 듯하네
내일 아침 천하를 굽어 살피면
온 고을이 벌집처럼 펼쳐 있으리

여기에서 맑고 맑은 그 산골물을 손수 길어와 또 청정무구한 낙엽으로 스스로 태우는 그 한 점 꺼리김?는 淸虛한 마음자리, 거기에 밤으로 또 대자연의 품속에 안겨 바위 밑에 자는 無所得의 정신세계 그 기슭에서 그는 淸虛의 극치인 해탈의 세계를 걷는 것 같은 마음자리, 즉 얼을 나르는 용을 탄 것 같은 그 마음자리, 이는 서산대사만이 가질 수 있는 淸虛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茶詩라 하겠다. 그리하여 이튿날 대사는 천하를 굽어 살피면 어찌 온 마을이 벌집처럼 펼쳐 보이지 않겠는가. 서산대사의 다시 한편을 음미해 보자.

만국의 도성은 개미거머리 같고
고금의 호걸들 하루살이 벌레와 같네
창가의 밝은 달 청허에 벼개하니
차솥 물 끓는 소리 가지런 하지 않음이 풍류로워


제 1, 2행의 '만국의 도성은 개미거머리과 같고 고금의 호걸들 하루살이 벌레와 같네' 라는 구절은 마치 白居易의 詩 「와우각상쟁하사(蝸牛角上爭何事)」즉, 달팽이 뿔위의 싸움 같은 하잖은 일하고 비웃듯 만국의 도성, 고금의 호걸들 다 하잘 것 없는 미의 세계의 것임을 질타하고 이들이 거대하고 대단한 것 같지만 도인의 눈에서 볼 때는 마치 개미거머리 같고 천하를 호령하는 호걸들이라 뽐내지만 하루살이 벌레에 불과한 것으로 깨친 자의 눈에는 보인다는 뜻으로 이 구절에서 전미개오(轉迷開悟)의 높은 淸淨心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 창가 밝은 달 청허에 벼개하니' 에서는 대사의 淸修한 모습과 해탈의 경지에 이른 淸虛한 마음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동시에 다음 '차솥 물 끓이는 소리 그대로 풍류로다' 라고 이어지는 구절은 대사의 禪定의 경지에 이름을 알게해 준다.

이상과 같은 서산대사의 시를 종합해 볼 때 조선조 시대를 대표하는 禪茶詩人으로서 西山대사의 茶詩는 그의 다도정신을 잘 나타내는 동시에 조선조 시대의 다도정신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를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산대사의 다도정신은 바로 淸虛, 茶禪一如 정신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한국의 茶神이라 일컬어지는 草衣禪師의 다신전(茶神傳), 동다송(東茶頌)과 그의 茶詩에 나타난 茶道精神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먼저 草衣禪師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조선조 시대에 한국 차의 중흥을 이룬 茶聖이라고까지 칭할 수 있는 분이다. 그의 속성은 장의순(張意恂)이며 나주 삼향 사람으로 자는 중부(仲孚)요, 법호는 초의이다. 15세때 전라남도 남평 운흥사에 입산하여 벽봉민생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19세때에는 운흥사의 본산인 海南 大興寺에서 고승 완호에게 법을 받는 한편 완호선사와 친분이 두터웠던 丁茶山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茶山草堂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그후 금강산 비로봉을 비롯 경사의 여러 산을 두루 답습하는 한편 김추사(金秋史), 신관호(申觀浩), 김명희(金命喜) 등의 명사들과도 사귀어 견문을 넓히는 한편 불교와 선의 오묘(奧妙)함과 다도의 현모함을 깨우쳤다. 특히 두륜산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지관을 닦기 40년 다생활에 높은 경지를 이룩했다. 그리하여 초의선사는 순조 28년에는 지리산 화개동의 칠불암(七佛庵)에서 유명한 茶神傳을 저술하는 한편 일지암에서는 유명한 「東茶頌」을 비롯하여 「草衣集」이권과 「一枝庵遺稿」등을 저술했다. 먼저 초의선사의 「東茶頌」을 중심으로 한 그의 다도정신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선사의 저서 동다송 29송에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비록 茶의 水體와 茶의 神氣가 온전타 하여도
오히려 중정을 잃을까 두렵네
중정을 잃지 않는다면
건전함과 신령스러움이 잘 어울이리라

여기에서 선사는 차의 정신으로서 「中正」을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동다송」에 있어 茶의 포법(泡法)에 있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泡法은 中正을 얻어야 한다. 體와 神이 서로 고르고 健과 靈이 서로 함께 하는 것을 일컬어 茶道를 다함이라 즉, 茶道에 이르렀다 함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초의선사는 다도정신의 中和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초의선사의 다도정신은 선사의 茶詩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초의 선사가 완당(玩堂) 金正喜에게 보낸 茶詩 중에 다음 구절은 선사의 茶精神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가을 하늘은 맑고 달빛 같아
청화(靑和)로
그 맑음 비할 수 있으랴
잘 생기고 못 생김은
감히 뉘가 말하며
진. 가 또한 다 한가지 초월함이여

위의 詩에서 다도정신의 淸和, 그리고 진. 가마저 초월하는 眞空의 세계의 높은 경지를 알 수 있다. 끝으로 초의선사의 茶詩 한구절만 더 살펴 보고 선사의 다도정신을 음미해 보자.

옛성현들이 차를 좋아함은
차는 군자와 같아 그 됨됨이가 사기가 없으매라.
사람들이 차를 먹게 된 것은
멀리 설영에서 이슬맺힌 茶눈을 따옴으로 하여 비롯되었다.

위시에서 草衣禪師는 茶의 性을 사악함이 없고 眞性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이는 草衣禪師의 茶道觀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사무사(思無邪)라 하겠다. 思無邪란 논어 위정편(爲政篇) 第三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서 그 뜻의 깊은 보배로움을 능히 이해할 수 있다. 「詩經 300여권의 詩를 한마디로 표현하다면 생각에 있어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子曰 詩三百一言以 之曰 思無邪)」이 한구절만 보더라도 공자사상에 있어서 사무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사무사는 바로 공자사상에 있어 仁의 근원이 되는 사상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茶道에 있어서 和靜의 근원이 되는 사상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草衣禪師의 저서인 「동다송(東茶頌)」 및 그의 茶詩 등을 통해 나타난 선사의 茶精神을 종합해 볼 때 「중정(中正)」「중화(中和)」「사무사(思無邪)」로 집약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韓國 茶道精神을 종합. 분석할 때 화정(和靜), 청허(淸虛), 중정(中正), 중화(中和)라 하겠다.

조선조 후기에 중요한 茶人으로서 茶山 丁若鏞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하겠다. 다산선생님은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남기신 민족의 큰 스승이시다. 강진의 초암에서 18년간의 긴긴 유배생활을 하시면서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참으로 선비답게 의연하고 꿋꿋하게 사신 큰 인물이셨다.

그 분의 외롭고 힘든 유배생활에서 귀한 벗이 되어 주었던 것은 茶였고, 또한 茶山선생님은 차나무를 무척 사랑하시어 스스로 호를 다산(茶山)이라 지어셨다.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귀양 갔던 그는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심한 고문 끝에 사형에 처해질 위급한 상황에서 황일환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구해져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읊은 차시에는 극한 상황을 소요와 자득의 정신으로 극복한 모습이 드러난다. 소요정신이란 온갖 욕망을 버리고 유유자적할 때 누릴 수 있는 자유로서, 현실을 관조하고 긍정하는 달관의 경지이다.

한편, 일본의 다도정신인 자득이란 우리의 안빈낙도와 견줄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의 자득이란 다산처럼 절망적인 유배생활을, 선택한 운명인 양 역설적으로 극복하는 능소능대(能小能大)한 품성을 말한다.

무집착은 정약용의 제자인 승려 의순(意恂)이 읊은 “산천도인의 사차시를 받들어 화답하여 짓다(奉和山泉道人謝茶之作)”라는 차시에서 집착하지 않는 것을 바라밀(波羅蜜)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불가의 무집착은 유가나 도가의 좌망에 담겨 있는 무집착과 개념이 같다.

비우사상에 의한 다도정신은 안빈낙도와 청백리 사상을 함께 담고 있는 차때[茶時]라는 미풍양속으로 표출되었다. 비우사상이란 정승 유관(柳寬)이 장마철에 비가 새는 방에서 우산을 받고 살았다는 우산각(雨傘閣)의 고사에서 비롯되어 그의 외증손인 이희검(李希儉)으로 이어지고, 그의 아들인 이수광(李光)이 재건한 비우당(庇雨堂)에 이르러 성숙된 청빈사상이다. 이수광이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사헌부의 관리들이 탐관오리를 탄핵하는 차때를 적으면서 사헌부 감찰의 검소함을 역설한 것도 비우사상과 맥락이 통하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다도정신은 시대별로 양상은 다르지만, 공통의식은 무아의 경지이다. 왜냐하면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란 맑은 것, 아름다운 것, 깊은 것이 샘솟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1805년 정순대비의 승하로 다산의 활동에 약간의 변화가 있어 늘 만나고 싶다고 전갈을 보낸 백련사(白蓮社)의 혜장(惠藏)을 만나러 갔다. 한나절을 보낸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지 않고 있었다. 다산선생이 돌아간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혜장이 뒤쫓아 와서 그 밤을 지새우며 학문을 논하게 되었고 이후 혜장이 40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6년동안 교유하였다. 혜장은 다산선생이 그렇게 좋아하는 차를 함께 마시고 정성껏 만든 차를 때에 따라 보내 주었다. 어느 해 겨울 <걸명소(乞茗疏)>를 지어 아암 혜장(惠藏)에게 보내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을축(1805) 겨울 아암선사에게 보냄 -

나그네는 요즘 차만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마십니다. 글중의 묘함은 육우의 <다경삼편(茶經三篇)>이요, 병든 몸은 누에인양 노동(盧仝)의 칠완(七椀)차를 들이키오. 비록 정력은 쇠퇴했으나 기모경의 말은 잊지 않았고 막힘을 풀고 흉터를 없애기 위해 이찬황의 차 마시는 버릇을 얻었소. 아침 햇살에 찻빛의 일어남은 맑은 하늘에 흰 구름이 일어남 같고, 낮잠에서 일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시내에 잔잔히 부서지는 듯하오. 차를 갈 때 일어나는 가루는 잔 구슬인지 백설인지 등잔불 아래서는 가리기 아득한데 자줏빛 어린 차순의 향기만 그윽하오. 활황와 신천은 산신께 바치는 백포의 맛과 같소. 꽃자기 홍옥의 차완은 노공에게 양보하고 돌솥의 푸른 연기의 담소함은 한비에게 가까웁네. 물 끓는 모습 게눈. 고기눈에 비기던 옛선비의 취미만을 부질없이 즐기고 용단. 봉단은 이미 바닥이 났소. 이에 채신의 병이 있어 애오라지 걸명(乞茗)의 정을 비는 바이오. 듣건데 고해를 건너는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을 뭉친 차를 몰래 보내 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뜻을 고려하사 베푸는 것을 잊지 마소서.


위의 걸명소에는 차를 좋아하는 다산선생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평소 차를 즐겨 마시고 또한 차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하셔서 육우의 다경과 노동의 칠완, 그리고 차 끓이는 방법, 차의 빛깔과 향기, 물 끓는 모습, 차를 가는 방법 등 차일에 관해서 소상히 알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좋은 다완, 용단. 봉단 같은 고급 차도 알고 계시는 등 차에 관해서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셨다.

천병식의 『韓國茶詩作家論』에서는 다산 자신도 차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도 제다 방법을 가르쳤다고 논의하고 있다. 다산선생이 강진을 떠날 때 그에게 글을 배운 많은 제자들이 중심이 된 「茶信契」를 만들도록 하여 그의 제자 24인이 다산이 떠난 뒤에도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신의를 지키도록 다음과 같은 절목을 만들었다. 즉, 계원 명단, 자산 내용과 관리인, 봄가을의 시사와 경비, 동암의 이엉잇기, 차 따는 부역, 차를 만들어 유산에게 보내는 일 등이다.


다산선생은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짓고 정원에 큰 돌을 옮겨다 놓고 물을 끌어 들어 폭포를 만들고 그 바위에다 '정석(丁石)'이라 글씨를 쓰고 이를 새겨 두었다. 처소를 귤동으로 옮긴 다산선생은 마을사람으로부터 차 한 봉지를 얻고서 그 기쁨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아곡의 햇차가 처음으로 피어날 제
마을 사람으로부터 차 한포를 얻었네
체천의 물이 얼마나 맑은지
한가로이 은병에 넣어 그 맛을 시험해 보리

낯선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 중에서도 많은 제자를 길렀으며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한 다산을 떠 받쳐 준 힘은 차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선생은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니 그의 많은 시편들에는 愛民의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김명배는 조선의 다정신을 自得의 정신, 비우사상, 茶禪三昧 등으로 보고 있다. 아래의 茶山선생의 茶詩는 이런 自得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산골물 차가운 소리 천 떨기 대나무에 이르고
봄의 정취는 뜨락의 한 그루 매화에 있네
지극한 즐거움 이 속에 있어도 달랠곳 없어
맑게 갠 밤에 여러번 일어나 어정거리네

위 시에는 언제 귀양에서 풀려날는지 기약도 없는 극한상황을 逍遙와 自得의 드높은 정신력으로 극복한 다산선생의 정신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 정신적인 소요란 현실을 觀照하고 긍정하는 達觀의 경지이고, 自得이란 주어진 여건을 선택된 것으로 여기고 긍정하고 수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정영선은 『다도철학』에서 이러한 자득의 정신을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정신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차를 끓여 마시며 근심을 덜고 빈천을 분수로 여기는 마음가짐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선비 다인들은 차와 더불어 검박하게 살므로써 자연과 쉽게 동화되어 인간이 자연임을 체득하는 정신적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즐겁기만 한데 무엇을 근심하리오
가난과 천함이 분수에 맞도다.

위 시는 중인 계급의 학자이며 시인인 장혼이 그의 이웃의 작은 오두막집에서의 「옥경산방다회」에 참석하여 읊은 것이다. 이처럼 선비들은 스스로 가난함과 천함을 자신의 분수로 알고 만족하며 살았던 것이다. 장혼은 <청렴한 선비의 갖춰야 할 물건 80개>를 들었는데, 그중에는 중요한 책이름, 기를 나무 등을 포함하여 「이름난 차」「차솥」「바구니 다함」등이 있었다. 또 <선비가할 일 34가지>에는 글쓰기와 거울보기, 정원을 가꾸는 여러 일들과 더불어, 「차 달이기」「샘물 긷기」를 들어 선비의 검소한 생활에도 다사가 큰 비중을 차지했는가를 알 수 있다. 김시습의 다음 시는 차가 어떠한 부나 명리보다 높은 가치를 지녔음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솥 속의 감미로운 차가 황금을 천하게 하고
소나무 아래 띠집이 벼슬아치 붉은 관복의 술띠를 가치없게 하네

옛날 서울의 신설동과 보문동 사이에 있었던 숭신방의 동대문외계에는 우산각리가 있었다. 이 우산각의 주인공은 태조대왕부터 세종대왕까지 4대 임금을 정승으로 섬긴 유관(柳寬)인데, 우산각이란 장마철에 지붕에서 빗물이 새어 방안에서 우산을 받고 살았다는 일화가 있는 집을 말하는 것이다.

우산각에서 그의 외종손인 판서 이희검(李希儉)이 청빈의 전통을 이어 받고 살았다. 그의 청빈한 생활신조란 「옷은 몸을 가리기만 하면 족하고 밥은 창자를 채우기만 하면 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청빈의 집인 우산각이 임진왜란 때 불이 타서 주춧돌만 남게 되었는데 이희검의 아들로서 실학의 선구자인 판서 이수광(李?光)이 조촐하게 재건하였는데 근근히 비를 가린다는 뜻으로 비우당(?雨堂)이라는 집이름을 붙였다. 이수광은 비우당에서 「차마시기」(飮茶)의 육언시(六言詩)를 읊기도 하고 채다론(採茶論)을 논술하고, 사헌부의 찻때를 적어 남기기도 하였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불의 상태에
거문고도 피리도 아닌 솔바람소리
노동이 잃은 주발의 마시기를 마치니
표연한 신상은 매우 편안하여라.

효종대왕의 장인인 부원군(府院君) 장유(張維)가 적은 이수광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향을 사르지 않고, 초를 밝히지 않으며, 성악(聲樂)을 듣지 않고, 무색옷을 입지 않으며, 가재에 칠이나 조각을 하지 않고, 베옷으로 소식(素食)하는 생활」이라는 철학이 적혀 있다.

결국 조선왕조의 청빈한 관리에 대한 정신적 메카가 된 것이 비우당이라 하겠다. 이러한 비우사상에 의하여 많은 선비 다인들이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특히 淸白吏들이 차를 몹시 즐긴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청백리는 일반적으로 청렴한 관리를 말하나, 옛날에는 의정부 등의 2품이상 당상관과 사헌부와 사간원의 높은 관리들이 추천하여 선정하기도 하였다. 높은 직책을 맡은 그들은 부를 탐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으로 차를 끓여 마시는 생활속에서 허욕을 버리고 즐거운 마음을 지녔다.

비와 바람은 이미 지붕을 뚫었고
시와 글씨는 부질없이 집에 가득하네
-- (중 략) --
조용히 가는 글씨를 쓰고
한가롭게 게눈차를 끓인다네

위 시는 우리나라 다인들 중에서 다사의 달인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의 다시이다. 여기에는 지붕이 뚫린 초가집에서 살며 한가로이 글씨를 쓰며 차를 끓여 마신 청빈한 서거정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서거정은 궁핍함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조용하게 책을 읽고 차를 달이는 유유자적한 달관된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정신이 과거 선비들의 맑은 청백리 정신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다선삼매의 다도정신에 대해 살펴 보면 다성이라 일컬어지는 초의선사의 다시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초의선사가 읊은 것 중에서 「산천도인이 차를 사례함을 받들어 화답하여 짓다.」라 하는 다게(茶偈)에서 선사의 다경을 찾아볼 수 있겠다.

옛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즐겼나니
차는 군자처럼 성미에 사악함이 없기 때문이라네...
알가의 참된 근본은 묘한 근원을 다하고
묘한 근원에 집착함이 없으면 바라밀이라네


출처 : 인천시무형문화재10호범패와작법무
글쓴이 : 모봉형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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