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물과 불의 어울림’을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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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야말로 四大 두루 갖춘 물건
수행인에 ‘水火相樂’ 화두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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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중국 윈난 차의 주요 산지 가운데 하나인 ‘이우’(易武). 이우는 차의 여신을 가리킨다.
| 차도 다른 먹을거리와 마찬가지로 물과 불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물이나 불이 알맞지 않으면 제대로 밥을 지을 수 없듯이, 제대로 된 차도 물과 불이 알맞게 어울려야만 한다. 물론 제대로 거둔 쌀이어야만 먹을 만한 밥을 지을 수 있듯이, 제대로 만든 차여야만 마실 만한 차를 우릴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전제일 것이다. 그러니 차를 마신다는 것은 한편 물과 불의 어울림을 마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 차는 ‘서로 맞서는’(相剋)듯한 물과 불을 한 길에서 만나게 하는 ‘화쟁’(和諍)의 도구이기도 하다.
사물을 굴러가게 하는 네 가지 주요 현상(四大)을 일러 물과 불과 바람과 흙이라 했을 때, 물과 불이 어울림은 아마도 수레를 움직이는 두 바퀴일 것이다. 그런데 두 바퀴가 나란히 가지 못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면 수레는 곧 멈추지 않을까. 그러므로 두 바퀴의 어울림을 일러 어떤 이는 ‘물과 불이 서로 즐기다’(水火相樂)고 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물과 불이 늘 함께 머물러야’(水火常住) 하며, 둘째 ‘물은 위로 불은 아래로’(水升火降) 움직여야 하고, 셋째 그러면서도 ‘물과 불은 늘 서로 제 길을 얻어야’(得運其路) 하며, 넷째 이런 일은 ‘걸림 없이 끊이지 않아야’(無碍不息) 한다고 했다.
이 점에서 차는 다른 음식과 꽤 다르다. 다른 음식은 이 네 가지를 두루 갖추지 못하고 있지만, 차는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물건인 탓이다. 옛 분들의 말씀이 대개 이와 같았다는 말로 대신하고 싶을 따름이다.
길이 없으면 다니기가 어렵고 이미 난 길도 오래 다니지 않으면 다시 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물과 불이 맞서고 어울리는 가운데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이 대개 번뇌일 것이니, 이 또한 생각이 길을 찾지 못한 것이거나 타고나면서 있던 길마저 잃어버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겠다.
참선을 하는 이가 화두를 잡는 까닭도 거기에 있어, 화두를 길잡이로 잡아 그 길을 얻으려하는 것이지만, 물과 불이 어울림을 잃고 거센 바람이 그 길을 가로막는다면, 그 화두가 무슨 힘이 있어 망망한 그 바람을 뚫고 거칠어진 길을 열어내겠는가. 그래서 몸에서 일어나는 그 바람을 다스리기 위해 ‘몸부림’(運力)을 하기도 하고 ‘생각거두기’(冥想)를 하기도 함으로써 화두가 길을 열도록 돕지 않는가. ‘차 마시기’도 그런 도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차는 이미 물과 불의 어울림을 이룬 물건이기에, 이 물건을 몸으로 들이면 몸에서 이는 거센 바람을 다스리는 데 꽤 도움이 되는 탓이다. 그리하여 화두가 그 길을 찾고 그 길을 여는 데 도움이 되는 탓이다.
꾀부리지 않고 정진해본 이라면 어찌 불이 치오르는 것을 겪지 못했을 것이며, 물이 내려 냉랭한 기운이 이는 것을 겪지 못했을 것인가. 몸이 있다면 의당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이를 겪으면서도 도움이 되는 방편을 취하지 않으려 든다면, 이 또한 큰 집착이 아닐 것인가. 또한 큰 어리석음이 아닐 것인가.
허나 차라고 한들 어찌 저절로 물과 불이 어울림을 이룰 것인가. 거기에도 길이 있을 터, 그 길을 미리 살펴보고 미루어보는 일도 ‘수화상락(水火相樂)’의 화두거리일 수 있을 것이다. 물과 불의 어울림이 이루어진 차가 옳은 차라면, 이것이 차의 첫 번째 품격일 것이니, 이제 입과 코와 목구멍의 간사함을 넘는 차를 살펴보며 지금까지 품(品)한 차를 함께 껄껄 웃어보기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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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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