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악산 줄기를 병풍처럼 둘러싼
성북동 깊이에 자리한
길상사의 가을
법정스님과 길상사의 인연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
1993년 7월 불교을 상징하는 꽃이라는 까닭 하나만으로 독립기념관, 경복궁, 창덕궁 연못의 연꽃을 모두 없어지는 기막힌 사실과 마주섰을 때, 법정 스님은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 는 글을 발표하신다. 나라 지도자가 신앙하는 종교에 앞서 충성하려는 너무나 얄팍한 몇몇 사람 처사였음을 접한 스님은 아연실색하셨다. 그 어이 없는 심정을 그로 발표하신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민주화 운동 이후 다시 한 번 더 세속 일에 관여하시게 된다. 날로 각박해져만 가고 메말라만 가는 우리 심성을
세상과 자연을 두루 맑고 향기롭게 가꾸면서 살아가지는 순수 시민운동을 주창하신 것이다. 주변 친지들의 권유와 시주의 은혜로 살아온
출가사문으로 작은 역할이나마 하시겠다면 1993년 8월 스니미은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 모임'을 발족 시키고 1994년 1월에는 연꽃을 록로 한 스티커 10만장을 무료 배포하며 서울과 부산 이어 대구, 광주, 경남, 대전 등지에서 스님 최초의 대중 강연을 하시며 모임을 만들고, 여기에 듯을 함께 하겠다는 회원들을 오늘까지 17년 째 이글어 주고 계셨다.
한편 법정 스님이 늘 강조하고 실천했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길상화(고 김영한) 보살이 성북동 대원각 터 7천여 평을 스님께 시주함에
따라 1997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인 길상사가 개산되었다.
이 관세음보살은 카토릭 신자인 최종태씨의 조각이라고 한다.
불교의 관세음보살상과 천주교의 성모상이 묘하게 합성된 듯한 상이다.
어쩌면 김영한 보살상 같기도 하다.
구한말에 요정 정치의 산실이었다는 대원각을 개조한 절이다.
이 요정의 주인이었던 김영한씨의 법명이 길상화였다. 십여 년 동안
법정스님께 이 절을 기증하겠다고 하였으나 끝내 스님은 거절하였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이 조용히 정착하면서부터 김영한 보살이 거듭
대원각을 법정스님께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힘. 네 차례나 사양하던 법정 스님은
주변 사부대중의 간청을 수락해 김영한 보살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개인이 아닌 조계종단의 이름으로, 자신은 상징적인 관리자(주지가 아닌 호주)의
입장에서 대원가을 기중 받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후에 순천 송광사의 분원으로 등록되었다.
1996년 9월 26일
김영한 보살의 대원각 기증과 길상사 창건 소식이 동아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전국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민심이 흉흉하던 터에 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지면서 길상는 창건 법호 이후까지 언론의 중심에 서게 된다.
죽도록 시인 백석을 사랑하였다던 김영한씨.
그녀는 15살에 부모의 강압에 결혼했으나 남편이 일찍 죽고, 후에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20세 초에 운명적으로 이북의 백석 시인을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으나 백석의 부모의 반대로
결혼할 수 없었다. 한 때 동거까지 하였지만 백석은 만주로 혼자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삼팔선이 가로막혀 평생 멀리서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백석이 지어준 '자야子夜'라는
필명을 가졌으며, 기명은 '진향'이었다. 그녀도 시서화에 소질이 많았다고 한다. 시를 쓰는 일이
사랑을 지킬 수 있는 길이었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면 문학을 하겠다고 말했단다.
백석 문학상을 위한 기금을 헌금하고 그녀도 세상을 떠났다. 길상사 극락전 옆 방에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가 죽은 후, 뼈가루를 눈오는 날 절 마당에 뿌려달라고 하였다.
이 마당에 겨울에 눈이 쌓이면.... 그가 사랑했던 북쪽에서 태어난 북의 시인 백석과 남쪽 끝에서
태어난 법정 스님의 영혼도 눈꽃으로 내려오실까.
도심의 한가운데 조용한 이 길상사가 있어
시민들의 위안처가 된다.
작은 계곡 언덕에 작은 방가로 같은 집은 스님들의 거처이다.
침묵의 방 안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한 사람이 왼편 벽을 마주하고 명상 중이었다.
나는 오른 편 벽을 마주하였다.
그사람은 이내 자리를 떴고 나는 30여 분 명상하였다.
참 고즈넉하고 편안하고 고요한 시간이었다.
피로가 풀리는 좋은 휴식이 되었다.
이제 이 방에 들어와서 법정 스님이 남기신 무소유 정신을
새기고 실천 의지를 다지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길상화 보살의 큰 마음 또한 감사하게 생각하리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1912-1995)
가나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로 / 가마가리(오막살이집)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탸샤가 아니 올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 응앙응앙 /
울을 것이다
(백석 시인의 27세 때 작품)
길상사 대문 앞 길 건너편 효재네 집이다.
보자기와 아름다운 살림살이로 알려진 집 앞
성북동 길 주변은 절집들과 아름다운 성북동 성당과
외국 대사관저들이 있었다. 모두 담장들이 높다
모두 세콤 장치가 유난했다.
옛날에 참 아름다운 길이었을 것이다.
전철역 한성대 입구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간송미술관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 길 을 올라가게되었다.
우연한 길상사 탐방이 된 것을 감사했다.
간송미술관은 길 끝 대로(대중교통이 다니는 길)로 내려와서
조금 올라가면 성북초등학교 옆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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