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곳곳에 꽃 열리는 소리

차보살 다림화 2009. 3. 24. 12:51

 감춘 (感春)
                                     
                                        

                                                                          조윤수

 

 

 선암사 담장의 고매(古梅) 굵은 마디 끝에서는 봄 향기가 터지고 있었다. 세찬 꽃샘바람이 순천만 갈대 사이를 헤집고 휘돌아 나와 매화 가지에 닿으면 땅 밑에서부터 춘정이 꿈틀댄다.  절로 오고 있는 봄을 미리 내려가 마중하는 성급한 심사를 누가 탓할 것인가.

                                             정좌하여 차를 반쯤 마시니
                                             향기는 그대로인데
                                             묘한 작용 일어나며,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홀로 피네.

 추사 김정희의 茶詩가 떠오른다. 홀로 마시는 차의 현묘한 신神격 맛이다. 봄맞이하려 온 천지를 헤매다 돌아오니 뜰 한켠에 매화꽃이 피었더라 는 옛사람 되어, 봄 내음 찻잔에 담고 나 또한 홀로 정좌하여 차를 반쯤 마시자니 그 맛에 묘한 감흥이 일렁인다. 얼굴을 들고 보니 매화꽃병에서 달작지근한 향기가 차 맛을 돋구워 차 맛인지 매화 맛인지 묘하기만 하다. 매화는 오래된 가지일수록 그 꽃이 맑고 고아하다. 향기를 풍기고 있는 매화에게 주변을 깨끗이 치우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꽃가지 뒤로 둥근 거울을 세워두니 거울에 비친 꽃 그림자는 달빛 어린 창가에 드리운 매화 가지를 연상케 하는 흥겨움을 준다.
사군자 중의 매화를 벗에 비유하여 봄에 피는 매화를 고우(오랜 벗), 섣달에 피는 매화를 기우(진기한 벗)라 하였다. 겨우내 내 벗님께서는 악양 매화 밭의 꽃가지를 꺽어 부처님께 헌화한 후 그 꽃을 따서 매화차를 나누어주시니 찬 겨울만은 아니었다. 오랜 벗과 함께 한 겨울이 훈훈했다.

 탱글탱글한 꽃봉오리가 따뜻한 기운을 만나니 한 잎 한 잎망울을 터트린다. 매화 가지에서 풍겨오는 달보드레한 향기에 젖어 있자니, 옛 선비들의 매화 사랑이 눈물겨웁다.
 퇴계 선생은 얼마나 매화를 사랑하였으면 평생 동안 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지었고, 91수의 매화시를 집대성한 ‘매화시첩(梅花詩帖)’ 이란 시집까지 냈을까. 그런 퇴계가 매화보다 맑고 매화보다 향기로운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무심하였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시정이 넘치는 퇴계였으니 명기(名妓) 두향과의 사랑은 사실이었으리라. 사랑하는 여인을 보듯 매화 사랑은 더욱 깊었을지 모를 일이다. 매화 피는 봄날 아직 바람은 찬데 단양 호수 가 언덕에 올라 노을을 바라보며 달뜨기를 기다렸으리라.

 “뜨락을 거닐자니 달이 사람을 따라오고 매화꽃 언저리를 몇 차례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깃에 향내 머물고 그림자는 몸에 가득해라.”
그런 시귀를 짓지는 못하여도 그 마음처럼 나 또한 매화 주변을 몇 번이나 맴돌고 찻잔을 들었다 놓았다를 몇 번이나 하는고….

 그의 감춘(感春)이란 시를 보면 그보다 더 화려한 고향의 봄을 어디에서 느낄 수가 있겠는가 싶다. “그윽한 섬돌엔 여린 풀이 돋아나고 향기로운 동산에는 꽃나무들 흩어 있네. 비 내리자 살구꽃 드물고, 밤들자 복사꽃 활짝 피었어라. 붉은 앵두꽃은 향기로운 눈이 되어 나부끼고 하얀 오얏 꽃은 은빛바다가 들끓는 듯.”

 마른 듯했던 맨 가지에 새 잎 피어나고 색색의 꽃봉오리들이 터져 나올 날들이 그려진다.  찻잔에 띄운 매화 송이 마주하니 설레는 이 마음 아실 이, 매향 뿐인가 하노라.

(2005년 3월 23일)

 

 

 

 

 

 

 

 

 2009년 3월 20일 오후

 

잠깐 경기전 뜰을 산책했다. 안뜰로 들어서는 쪽 문 가까이 가자 안 쪽에서 보드레한 향기가 풍겨왔다.

아! 매화나무가 있다고 했지. 점점 암향이 짙게 퍼진다. 절묘한 매화 한 그루.

언제 쯤부터 이렇게 힘든 등걸을 누이고 있었던 걸까. 老梅의 둥치가 반은 비어있어 시멘트로

보수되어 메워져 있다. 古梅는 역시 高梅이고, 故梅, 苦梅, 孤梅며, 枯梅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고매의 맛을 모두 지녔다. 하여 잔가지마다 만발하게 피어난 꽃들이 모두 고귀하고 또 고아하며,

아취가 깊어 어떤 말로 칭송하기조차 어줍잖다.

경기전을 자주 들렀지만 매화철엔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던가. 맨 가지로 외롭게 서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걸까. 참 무심했다. 매화 등걸 같은 처지가 되어서야 이심전심 조우하게

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정전인 경기전의 정신은 아직도

매향처럼 이어져 오고 있다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나무  둥치의 속이 패이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때의 가지들은 없어지고, 휘어지고 한 번 덩 휘어진

가지 끝에 새 가지들을 뻗쳐 저리 꽃을 피우게 되었던가.

 

 

 

 

 

 

 

 매화 단지의 수많은 인파들이 매향을 찾아다니지만

그 매화에서 고귀한 정신의 향에 덧칠할 것 같아

매우 조심스런 봄이다.

 

 

 잠시 한유를 즐기는 선남선녀들의

발길과 눈길을 사로잡는 노매의 모습.

 

 

 

 

 

 

 전주사고 앞의 키큰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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