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철감선사의 쌍봉사

차보살 다림화 2009. 4. 14. 16:12

 나의 가풍이 몽땅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

   신라 구선선문의 사자산문의 개산조인 철감선사(徹鑒禪師: 798-868)는 우리들에게 잘 아려진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우리나라 차의 비조鼻祖를 들라면 철감선사 도윤道允을 먼저 떠올린다. 천년 고찰 쌍봉사의 청건주이기도 하지만 나그네의 관심은 우리 다맥茶脈에 있어서 철감선사의 위상이다. 쌍봉사에는 우리나라 사찰의 사리탑 조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보 제 57호로 지정된 철감선사탑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는 오솔길 가에 야생 차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사승이었던 철감선사를 더욱더 그립게 한다.

 

  요즘은 차꽃이 만발하여 향기가 가랑비처럼 옷에 묻는다. 선사들은 향성香聲 혹은 문향聞香이라 하여 '향기의 소리'를 귀로 듣는다지만 나그네는 선지가 깊지 못해서인지 차향을 코로 맡는 것만도 행복하다.

  쌍봉사 차꽃 향기가 부러워 나그네도 지난해 가을에 산중 처소인 이불재 뒷사나에 차씨를 한 가마니나 심었다. 장마철 전후해서 싹이 트고, 앞으로 삼사 년 후면 꽃이 피고, 10여 년이 지나 차숲이 이루어지면 차꽃 향기에 취할 것이다.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안휘성 차는 맛이 뛰어나고 몽산차는 약효가 뚜어나다고 했는데 동국차는 다 겸했느니라' 라고 했다. 안휘성과 몽산은 중국의 지명이다. 특히 안휘성은 철감선사가 유학을 가서 남전의 회상에서 조주 스님과 함께 정진했던 땅이다. 남전은 '평상심이 道'라는 가르침을 폈던 고승이다. 도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상의 무심 속에 있다고 설파했던 것이다. 또한 남전의 정신을 이은 조주는 불법을 몰어오는 제자들에게 '차나 한잔 마시게 (끽다거)'로 자신의 가풍을 일으켜 화두로 정착시켰다.

  남전 회상에서 조주와 함께 공부했던 철감선사는 어떠했을까? 평상심이 도라고 외친 스승 남전뿐만 아니라 끽다거 정신을 일으킨, 소무 살 위였던 조주는 스승 같은 사형으로서 철감선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터이다. 더구나 남전은 열반하기 전에 이미 철감선사에게 '우리 종宗의 법인法印이 (너로 인해서) 몽땅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 종의 법인'이란 넓게는 중국의 6조 혜능의 남종선을, 좁게는 남전 자신의 가풍을 말하고있는바, 남전이 일으키고 조주가 완성한 다선茶禪의 정신을 말하고 있음이 아닐 것인가. 나그네가 작년 겨울에 철감선사와 조주 스님이 함께 정진했던 안위성의 남전사터를 찾아가 확인한 사실이지만 절터 주변 야산에는 야생 차나무들이 산재해 있었다. 차나무를 보고 그 ㅇㅅ날 수행스들이 차농사를 짓는 정경이 떠올라 가슴 벅찼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쌍봉사(雙峰寺)에 세워져 있는 철감선사의 부도이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으며, 경문왕대에 이 곳 화순지역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게 되는데, ‘쌍봉’인 그의 호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하였다. 경문왕 8년(868) 71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며,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마치 여덟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흥미롭다. 윗돌 역시 2단으로 두어 아래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塔身)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四天王像), 비천상(飛天像)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특히 최고조에 달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을 만든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 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공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작품으로, 당시에 만들어진 부도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철감선사의 속성은 박씨이고 한주인이며 집안은 대대로 호족이었다고 전해진다. 18세 때 화엄십찰의 하나인 김제 귀신사로출가하여 10년 동안 화엄학을 익히다가 교종에 회의를 느껴 '원돈圓頓의 방편이 어찌 心印의 묘리만 하겠는가'라고 말하고는 28세 때 사신 일행의 배를 타고 당으로 건너가 남전의 문하로 들어갔다.

  마침내 그는 스승 남전에게 인가를 받고, 스승이 열반한 뒤에도 13년 동안이나 당나라에머물다가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한다. 그는 22년이나 유학 생활을 한 셈인데, 그의 차살림도 중국인의 그것처럼 일상화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귀국한 그는 먼저 금강산 정담사로 들어가, 훗날 사자선문을 융성하게 한 제자 징효와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펴다가 남도의 쌍봉사로 내려와 경문왕의 귀의를 받고 열반 때까지 머문다. 그래서 경문왕의 지원을 받아 쌍봉사에 정교하고 웅장한 그의 부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올봄부터 여러 차를 마셔보았지만 쌍봉사의 야생 차나무 잎으로 덖은 차맛이 가장 뛰어났던 것 같다. 쌍봉다원에서 비매품으로 제다하였는데, 쌍봉사 주지스님이 나그네에게 선물하여 함께 마셨던 것이다. 조주에서 발원한 선가의 다맥이 신라 때 철감선사에 의해서 해동으로 건너와 고려 때는 보조국사와 진각국사가, 조선 때는 함허선사와 사명대사에 이어 초의선사가 중흥시켰던 것이 아닐까? 맑고 향기로운 차를 마시게 된 고마움이 문득 들어 소박한 마음으로 다맥의 문제를 제기하여본다. 뜻있는 스님이쌍봉사를 茶寺로 발전시키어 다인들이 차향을 맡고 가는 차의 성지가 됐으면 좋겠다.  (소설가 정찬주의 다인 기행 중에서)

'영상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기행 여수 오동도의 풍경들  (0) 2009.04.26
이불재  (0) 2009.04.14
오목대의 봄과 경기전   (0) 2009.04.11
버들벚꽃  (0) 2009.04.11
청춘예찬, 꽃피는 사월  (0) 2009.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