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찻잎 따던 날 - 신록의 고허

차보살 다림화 2009. 4. 30. 23:23

 신록新綠의 고허古墟

 

                                                        이은상

 

  형이어,
  춘광(春光)이 쉽다더니 과연 옳습니다.
  눈 녹이고 얼음 풀리기 그리도 어려운 양 겨우 왔던 그 봄비, 언젤지도 모르고 지난 그 어느 날 밤비에 갔나봅니다. 진실로 춘광은 이리도 쉽습니다. 명종(明宗) 시(時)의 사람 운곡 송한필의 시 중에 "화개작야우(花開作夜雨) 화락금조풍(花落今朝風) 가련일춘사(可憐一春事) 왕래풍우중(往來風雨中)"이란 구(句)를 다시금 읽어봅니다. 그리고 나도 노래 한 수를 남깁니다.

  오기도 어렵더니 그리도 쉬이 갔나
  내일도 봄일 줄 알고 잠깐 몰라 누웠더니
  물으매 낙화(洛花)도 마저 먼지 되다 하는고나

 

   형이어,
  경박(輕薄)한 여인같이 가버릴 봄!
  강반(江畔) 어느 곳에서 백범(白帆) 타고 멀리 간 그를 바라 보낼 수 있다더라도, 나는 찾아가 어리석은 애상(哀傷)으로 내 자존심을 헐고 싶지 아니합니다. 미더운 친구같이 오시는 신록! 야두(野頭)로  나아가 청연(靑煙)에 싸여 오는 그를 맞으렵니다. 그의 신선(新鮮)한 눈썹 앞에 내 가슴의 만종(萬種) 열뇌(熱惱)를 다 열어 보이렵니다.

 

  형이어,
  지금 나는 사사(私事) 번우(煩憂)에 어수선과 답답으로 가득한 내 머리를 연방 한 손으로 씻어가며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에 붙들리어 가듯 서울을 떠납니다. 고허(古墟)에 덮인 신록! 그것이 과연 무슨 말을 내 귀에 전해 줄는지? 나는 그 비어(秘語)를 들으려 미리부터 귀를 기울입니다. 더구나 이번 길은 이군(李君) 청전화백(靑田畵伯)과 노이(路伊)가 되었으며 짧은 동안이나마 혹은 초제(草提)를 나란히 빌려 활가(活歌)로 가슴 열 때도 있을 것이요, 혹은 여침(旅枕))을 같이 베고 장소(長嘯)로 마음 쓸쓸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같이 한묵(翰墨)으로 일삼는 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좋은 일이 아니오리까.

 

   형이어,
  글 쓰는 나로 말하면 혹은 차실(車室)에 흔들리는 무릎에서 혹은 여사(旅舍)의 어둑신한 촉화(燭火) 아래서 몇 날의 탐고(探古) 감회(感悔)를 써지는 대로 쓸 것이매 이것은 당초부터 사고(史考)로 보아주실 것도 아니요, 또한 문장으로 여겨주실 것도 아닙니다. 아마 형은 이 글이 두미(頭尾) 아울러 소(疎)한 것이라 하여 감히 꾸짖으실 줄로 압니다마는 나 딴은 끔찍이 여기는 내 역사, 내 땅에 대하여 가진 내 조그마한 사랑! 그것이 나로 하여금 자신의 천식(淺識)과 박재(薄才)를 잊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형이어,
  나는 참으로 비범(非凡)한 문재(文才)가 내게 있기를 원(願)합니다. 나는 참으로 절세(絶世)의 대학(大學)이 내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백 천 배 더 원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고도(高度)한 열애(熱愛)입니다. 나는 차라리 문재(文才)의 곰배팔이가 될지라도, 학식의 소경이 될지라도 내 역사(歷史), 내 민족, 내 땅에 대한 사랑의 병신은 되고 싶지 아니합니다. 조선은 노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곡조(曲調)로 노래한 자가 얼마입니까? 조선은 공부할 것입니다. 그러나 껍데기 문자로 공부한 자가 얼마입니까?
  '소리 나는 괭과리와 울리는 북'을 요구하는 조선은 아닙니다. '변함없는 사랑의 신도(信徒)'를 찾아 부르는 조선입니다.

  애닳다 저 목소리 사랑을 찾으시며
  우릿 임 저 가슴이 어일꼬 다 타시네
  내로라 대답코 나설 이 누구시오 누구시오

 

 

*화개작야우 화락조풍 가련일춘사  왕래풍우중 - "간밤 비에 피었던 꽃, 아침 바람에 흩지누나, 아뿔싸! 봄 잔치여, 풍우 속에 사라지누나."
 급급여율령-"급히 율령대로 하라"는 뜻으로 소경이 잡귀를 몰아낸다는 주문 끝에 외는 말.

 

 

 

 

 

 

 

 

 

 

 

 

 

 

 

 

 

 

 

 

 

 

 

 

 

 

 

 

 

 

 

 

 

 

 

 

 

 

 

 

 

 

 

 

 

 

 

 

 

 

 

 차나무 숲에서

 

 떡잎 속의 새순이

 

 지난 해 꽃핀 자리에 맺은 열매 몽오리가 새 봄에 맺혔나

 

 마른 꽃대를 쭈욱 밀어내고 그 끝에 맺은 몽오리. 신비하여라!

 

 꽃받침 밑에서 알이 맺히려고...

 

 봄부터 맺힌 알 몽오리가 크고 자라 영근 씨앗되어 떨어진 껍질.

 

 옛사람들도 그랬지. 종일토록 차잎 따도 앞치마가 채워지지 않는다.

이 작은 어린 잎을 한 잎 한 잎 따서 모은 것이...

 

 

 처음 덖어서 비빈 것을 널어놓고...

 

 녹빛을 잃지 않으려 볶은 것은

'영상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에서 순간으로  (0) 2009.05.15
YESTERDAY  (0) 2009.05.03
모란  (0) 2009.04.30
금오산 향일암  (0) 2009.04.26
여수 돌산공원에서  (0) 2009.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