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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일 금산산 뜰에서
4월을 보내며
조윤수
4월은 아무래도 차분할 수가 없었다. 이른봄부터 봄맞이 의식을 치렀기에 좀 조용하게 4월을 보내려고 했다. '평상심'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한 때 뿐일 4월을 어찌 벌 나비가 되지 않을 수 있었으랴! 마침 배달된 모란꽃이 이 봄 축복의 결미를 장식해주는 것 같다. 모란꽃이 뚝뚝 떨어져야 4월을 잊을 것이다,
긴 나들이가 많았다. 살날이 살아온 날보다 분명 짧은 터이니, 어찌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으랴. 산빛 물들기 시작하면 다신(茶神)이 내려 옴짝달삭 못한다. 신라 구산선문의 사자산문 개산조 철감선사(798-868)께서 입적한 절, 법주사 팔상전과 더불어 목조탑으로 남은 대웅보전이 불타버려서 안타까웠던 쌍봉사엘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복원된 쌍봉사 대웅보전도 아름다웠지만 그보다 철감선사의 차살림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평상심이 도(道)'라고 외쳤다던 중국의 남전회상에서 차(茶)의 부처로 불리는 조주선사와 법형제가 되어 공부했던 스님이기 때문인 것을 알았다. 그분이 조주선사와 사형제 간이었으니 그때부터 스님의 차살림은 시작되었으리라. 너무나도 유명한 공안(公案)이었던 '끽다거(喫茶去)'로 유명한 조주선사 아니던가.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안휘성 차는 맛이 뛰어나고 몽산차는 약효가 뛰어나다. 동국차는 다 겸했느니라' 했다. 그 안휘성이 철감선사가 조주선사와 함께 남전회상에서 정진했던 땅이라고 한다. 남전이 열반하기 전에 이미 철감선사에게 '우리 종(宗)의 법인(法印)이 너로 인해서 몽땅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했다던가. 그가 중국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가지고 왔을 차 씨앗으로 쌍봉사 주변에 야생차가 많은 것이 아닌가. 철감선사의 부도는 내가 본 부도탑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 미를 갖춘 탑이었다. 선사의 부도탑 오르는 길은 흙돌계단이었는데 길가에 철쭉밭 같이 우거진 차나무들이 있었고 찻물로 안성마춤인 샘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아직 차나무에서는 새순이 나지 않았고 양지의 나무에서 겨우 새순 몇 잎을 따먹을 수 있었다. 선사께 헌차를 올리기도 전에 방정맞게도 찻잎을 씹어 샘물에 마시고 말았다.
너무나도 밀린 일이 집안 가득하여 밥 때를 놓치곤 한다. 이럴 때 잠시 차 한잔이 나를 다독이며 정신 차리게 하는 좋은 친구임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어지러운 가운데 찻잔을 만지작거린다. 차가 우러나는 잠시의 시간이 그리도 고요하고 깊은 산골 암자에 앉은 듯하다. 차 한잔이 준비되는 몇 분의 시간은 물 흐르는 산골의 솔바람을 내기도 하고, 향기에 따라 가을의 영화를 누리던 차밭 풍경으로 가다가, 석탑 하나 뎅그러니 남은 옛 절터에 있게도 한다. 감히 철감선사와 마주해 보기도 한다. 오랜 차지기와 함께 있는 듯도 하다. 드디어 모든 상념도 살아진 경계가 나타나면 그냥 무념이다. 마음이 고요하여 태초와 같다. (心淨似太初) 찰나로 살려지는 순간.
이 때 남는 것이 있다면 차 한 잔 뿐이다. 오른 손이 왼손으로 넘겨주며 잔을 건네며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다. 그 차 한 잔은 또 무엇이랴!
깊은 산골에 있다보니 모든 것이 시시해지고 남은 것이 있다면 경(心) 하나와 한 잔의 차가 있을 뿐이라고, 부휴선사 말씀하였던가. 산 넘고 골짜기 따라 강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그 멀고 험난한 과정의 길이 녹아난 모든 경전이 한 권으로 함축된 심경(心經)을 어찌 사량하랴! 이제 꽃피는 사월을 보내고 차분히 신록의 산빛을 우려 마시러 정말 산골로 들어야 할 때. 창 끝 같은 새 차(茶)순이 하늘을 찌르듯 솟아 산천초목께 차공양을 올리고 있으려니. 늘 푸름의 정신을 흡입하러 차잎들께 오체투지로 다가 갈 일이다! 4월을 보내면서 모란을 보내주신 분의 마음이나 신록의 춘광 속에 빛나는 새 차순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평상심'이지 않을까. (2009년 4월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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