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충북제천시백운면애련리 원서문학관에서

차보살 다림화 2009. 8. 3. 01:41

원서문학관 가는 길

 

 

 청풍호

 

   2009년  유월 전북문인협회대동제가 열렸다. 행사의 하일라이트는 역시 문학강연이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오탁번 시인의 강연이었다. 오랫만에  유연하고도 빼어난 문학을 들을 수 있었다. 문학장치에 대하여 특히 시작을 하는 과정에서 시의 배경과 문장의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친근감 있고도 쉽게 이야기 해 주었다. 시인의 시작 생활 40년의 전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밥냄새'란 시에서, 시골에서 밥먹기도 어려웠던 시절 어머니 등에 업혀서 진외가집에 갔다. 그냥 지나다가 들른 것처럼 금방 나오려고 했다는 어머니 등에서 어린 시인은 대문까지 풍겨나오는 밥냄새에 칭얼대었다. 밥먹고 가라는 진외당숙모의 말에 울음을 그치고 밥을 먹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를 찾았다. '빨리' 먹었다 라는 말도 '허둥지둥'먹었다 는 말도 시적 표현이 아이었다. 그래서 시인은 사전에서 '하동지동'이란 허둥지둥의 어린 표현 말이 발견 했다. 그럴 때 시인은 소주 한 잔 짝 들이키고 싶을 정도로 손뼉을 치며 정확한 단어 하나를 찾았다는 쾌감을 맛본다고 했다. 그리고 시작한지 40여 년을 지난 지금도 그런 재미를 찾아 사전을 찾는다고 했다. 수필을 쓰는 데도 마땅히 본받을 태도여서 기쁜 감동을 받았다.

   그 때 처음으로 오탁번 시인을 보았다. 그전에는 신문에서 가끔 마주친 것 같았으나 그의  시에 대하여 아는 바는 없었다. 그러나 내 동생의 친구 남편이란 것만 알았다. 내 동생이 내 수필집을 그의 부인께 선물하고 평을 들은 바 있었다. 그의 부인도 강원대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국어교수이며 평론가였다. 시인의 약력을 보면 나와 같은 학번인 것 같았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있었어도 같은  영문학과를 수업하는 학생이었지만 만날 인연은 전연 없었고 다른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내 동생 친구는 오탁번 시인과 같은 문학도로써 같은 길을 가며 같은 동아리 활동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후에 결혼하게 된 것 같았다.

  이 여름 한 가운데 장마 기간이어서 우리 자매는 미술관을 산책하며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도 만나서 박물관의 전시를 보기로 하였다. 동생을 만난 자리에서  얼마전에 있었던 오탁번씨의 문학강연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그러지 말고  애련리에 있는 문학관에 가자고 서둘렀다. 언젠가 동생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제천시 애련리에 있는 그의 문학관에 친구 따라 갔다 온 적이 있다고. 정말 말 그대로 애련한 마을에 적막하고 조용한 시골 작은 폐교에 마련한 문학관이어서 얼마나 낭만적이었던지 모른다고 했다.

 

 

 

 

 

 

 

청풍문화재단

 

 

 

 

 

 

 

 

 

 

 

 

 

 

 

 

 

 

 

 

밥냄새

 

                     

하루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 진외가 집으로 갔다

지나다가 그냥 들른 것처럼

어머니는 금세 도로 나오려고 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태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언놈이 밥 막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밥 때 되면 만날 온나

 

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작가 - 오탁번 (1943 충북 제천)

*  고려대 영문과 대학원 국문과

*  1966 동아일보 신춘문예(동화), 1967 중앙일보 신춘문예(시), 1969 대한일보 신춘문예(소설) 당선

*  시집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감> <손님>

*  한국문학 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  현)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시인협회장 / dhtakbon@hanmail.net 011-473-1305

   원서문학관장

 

 

    경기도 분당에서 출발한 시간이 오후 1시로 접어들고 있었다. 장마비 사이를 가로질러가면 좋은 여름의 풍광을 즐기면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생각했던 충주호반을 끼고 가는 길은 나타나지 않고 충주댐에 도착하였다.  다시 새 길을 잡았다. 지도를 살펴보고 충주호를 끼고 가는 제천시로 향했다. 치악산 주변을 스쳐 청풍명월의 고장을 뚫고 지나는 길을 만났다. 날씨는 반깍 개었고 초록이 짙은 시원한 벚나무숲을 지나고 산과 산 사이를 굽이굽이 도는 길은 말 그대로 맑은 바람 속의 낮이요 밝은 달밤이 어울려야만 마땅할 곳이 제천시 가는 길이었다. 치악산을 어미로 삼고 그 어미가 낳은 작은 산들이 주변을 줄지어 능선을 잇고, 가깝고 먼 산 능성이들이 둘러쳐진 청풍호반을 돌았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수운의 요충지로 도호부를 두었던 곳이기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 까지 문화유적이 많은 곳이었다. 1980년에 충주댐을 건설하기 위하여 수몰지구의 유적을 모두 조사하여 후에 청풍문화재단에 이주시켰다. 청풍문화재단은 청풍호수에 떠 있는 하나의 섬 같은 형태로 많은 문화유적을 배치하고 자연 숲을 형성하는 산책로 등이 잘 꾸며진 사람들의 휴양지로 좋은 곳이었다. 각 방송사의 역사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 그 안을 들어갈 수는 없었고 팔영루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청풍호반의 하프현 같은 현수교를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분홍꽃들이 수없이 달린 자귀나무가 흰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에 그림처럼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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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렵사리 백운면사무소를 찾아들었다. 시인의 이름을 대니 '원서문학관'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첩첩 산골을 한참 내려갔다. 옛날을 그려보자니 얼마나 깊고 외진 곳이었을까 싶게 인적이 드물었다. 개천을 따라 훤칠한 느티나무가 나타날 때까지 조심스럽게 달려갔다. 청정한 외진 곳이 도시인들이 선호하는 곳이기도 한 요즈음이어서인지, 제법 넓은 천을 따라 난 길 왼편 산자락에 현대식 팬션들이 옹게종게 지어진 곳이 더러 있었다. 비로소 당도한 느티나무 앞. 잘 생기고 건장한 나무의 굵은 등걸 하나에 튼튼한 빈 그네가 외롭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오후 벌써 서녘이 붉어오고 있는 시각이었다

 

 

 

 

 

 

 

 

 

 

 

 

 

 

 

 

 

 

 

  아직도 눈에 선한 빈 마을의 빈 그네. 아이들의 왁자지글 대는 소리는 온데간데 없다. 서로 그네를 타려고 달려드는 모습이어야 할 느티나무 밑은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적막하였다.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들어 가는 뙤약볕 아래 정갈한 논에서 벼포기들이 힘차게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그 옛날의 학동이 되어 그네를 번갈아 탔다. 노을을 남기며 서녘으로 넘어가는 햇살을 마주하고 마을의 전설을 주저리 주저리 엮었다.  우리가 따라온 내가 원서천遠西川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는 물 이름을 따서 '원서문학관'이라 했는지 철대문 앞에 문학관 이름을 새긴 선돌이 떡 하니 우리를 맞았다. 대문은 잠겨 있고 동생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도 불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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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다녔던 초등학교였다는 소리를 잊고 있었다. 그만큼 문학관이라는 집은 요즈음의 수수한 별장집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제시대 때의 분교였으니 얼마나 시골 작은 학교였겠는가. 대문 밖에서 안을 살펴보자니 정원의 한 쪽은 텃밭도 있고 오른 편에는 작은 연못도 있고 각가지 야생화로 꾸며진 제법 정성들인 정원이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그리워 지쳐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돌아설 수 없었다. 서울서 한달음에 달려온 우리가 아닌가. 철대문 밑바닥을 거의 누워서 안으로 기어 들었다.

살림집은 왼편에 따로 지었다. 오른편의 한 채의 집이 옛날 초등학교 분교였다. 들어가서 옛날 그대로 있는 작은 책상 의자에 앉아보아야 하는데  하고 동생은 아쉬워 했다. 교실 두 개와 교무실 한 개인 것 같았다. 들어가는 복도 입구에 현관문을 달고 유리창에 '원서문학관'이라고 새겼다. 유리창으로 들어온 저녘 햇살 때문에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문학 행사도 가졌던 흔적도 있었다. 서울에서 좀 먼 거리여서 자주 나들이 하기는 불편한 것 같았다. 살림집 현관에 쪽지를 남기고 건물을 둘러보았다. 사람 손을 기다리는 풀들이 보기 좋을 만큼이어서 그런대로 괜찮았다. 고즈넉하고 사람 소리 들리지 않는 적막감마저 도는 빈 뜰을 우리 셋이서 주인 되어 돌고 돌아보고 고추 밭이랑 상추 밭을 살펴보기도 하고 시인의 시비 앞에 섰다.

 

 설날

             

설날 차례 지내고
음복 한잔하면
보고싶은 어머니 얼굴
내 볼 물들이며
떠오른다

설날 아침
막내 손시릴까봐
아득한 저승의 숨결로
벙어리장갑을
뜨고 계신
나의 어머니

 

 

 

 

 

   시인의 어머니가 그에게는 시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생을 도시에서 떠돌며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다가 마침내 그 어려웠던 그 시절의 그 땅,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 폐교된 분교를 구입하여 그의 영원한 고향으로 자리를 잡았건만..

  밥도 제대로 먹기 힘들어서 진외가에 자주 갔던 그 옛날의 그곳.

  반반한 소나무 옆 돌 의자에 앉았다.  교실 앞 잔디 마당엔 삼층 돌탑 한 쌍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다.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인냥 돌탑이 하나 놓여 있고 물에는 수련 꽃봉오리가 곧 열릴 듯 열리고 싶지 않을 듯 애처럽게 떠 있었다. 나무 가지에 메어 둔 새 둥지도 빈 채로 있고 사람 발자국 소리도 하도 멀기에..

  무리지은 하얀 들꽃이랑, 노랑, 분홍 하양 원추리꽃, 청초한 흰도라지 파랑 도라지 꽃들이 여기저기서 한창 뽐낼 나이건만. 누가 보아주던 아니던 그들이 언제 피어나기를 주저한 적이 있던가. 그래도 아쉬웠다 그 꽃들을 뒤에 두고 떠나가는 것이..

  대문 밑을 다시 누워서 기어나왔다. 어디쯤에 그 시인의 집이 있었을까. 어디 쯤에 그의 진외가가 있었을까. 둘러보며 원서천에서 송사리떼와 놀았을 시인과 그의 친구들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를 처음 본 나로써는 나 역시 그와 같은 나이로 한 생을 지났지만 그의 시적 고향의 옛 일이 실감나지 않았다. 너무나 시적인 그의 어린 시절의 원서천과 느티나무 그늘 옆의 작은 분교. 그 시절엔 그런 그네도 없었을 것이다. 그 작은 분교의 아이들은 몇 명이었을까. 20명도 안 되는 아이들이 종소리가 울리자 교실로 쪼르르 달려 가고 있는 듯 했다.

 문학관 앞을 뒤돌아 굽어진 길을 지나면 또 다른 마을이 나올 것이고 가보지 않은 그 길을 우리는 갈 수 없었다. 원서천이 멀리 서쪽으로 흐르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흐르고 흘러간 물이 어디를 돌고 돌아 언제나 바다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다. 시인만은 흐르고 흘러서 더 흐를 곳이 없어 연어처럼 회귀하여 이곳으로 되돌아온 것일까. 여전히 사람 소리  귀한 외딴 마을로...

  문학관 현관 옆에 시인의 어머니의 흉상을 새긴 선돌이 서 있다.

 - 잣눈이 내린 겨울 아침,/ 쌀을 안치려고 부엌에 들어간 어머니는 / 불을 지피기 전에

꼭 부지깽이로 아궁이 이맛돌을 톡톡 때린다. / 그러면 다스운 아궁이 속에서 단잠을 잔

  생쥐들이 쪼르르 달려 나와 살강 위로 달아난다.  <두레반>의 구절에서

 

 

 

 

 

 

  

 

 

 

오탁번 시비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