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경기전의 여름

차보살 다림화 2009. 8. 9. 22:15

 



배경음악 : Acoustic Cafe - Last Carnival

 

역사의 향기, 전주 경기전에서
 


                                                        조윤수
                                                       
                     
  
   청년 시절에는 처녀의 눈썹만 예뻐도, 찰랑거리는 머리채만으로도, 얼굴이 예쁘지 않아도 그 처녀를 좋아할 수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렇지 않더라는 한 남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청춘이 아니어도, 이순耳順이 넘어도 사람 뿐 아니라 그 어떤 물상이든 한 부분이 특별히 매력적일 때 나머지 전체를 좋아할 수 있게 된다.
   이른봄에 제주도에서 봄을 만끽하고 돌아와서 약간 조용한 봄을 보낼 것 같았다. 아직 춘삼월이 다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모녀가 만나서 우연히 경기전을 산책하게 되었다. 역사적 가치보다 이젠 시민의 공원으로써 자리 매김 된 경기전 뜨락의 숲이 좋기 때문이었다. 대나무 밭이 있는 사고史庫로 막 들어서려던 때 어디선가 보드레한 암향이 풍겨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아! 사고 앞에 기이한 매화나무가 있다고 했지. 뜨란 가운데서 아담한 노매老梅 한 그루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 때 찍은 사진은 행촌수필 제 15호의 표지로 채택되어 기념비로 남게되었다. 가을에는 단풍 숲이 아름다워서 꼭 한 번은 들러서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이 매화나무로 하여 경기전 전체가 담고 있는 역사의 향기를 다시 새기게 되었다.
 
  사군자 중의 매화도를 그릴 때,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그 가지에 있다. 고매古梅의 굴곡진 가지를 잘 그려야 매화의 품격을 나타낼 수 있다. 꽃은 그 다음이다.  경기전 안뜰의 매화나무가 꼭 그렇다. 가지가 세 번이나 절묘하게 굽었고, 굽어진 가지 끝에서 겹꽃과 홑꽃이 총총히 달려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바라보는 사람들도 꽃과 향보다는 그 굴곡진 등걸을 입모아 칭송하고 있었다. 그런 고매가 그리도 화사한 꽃을 피워내고 있으니……. 언제쯤부터 그렇게 힘든 등걸을 누이고 있었던 걸까. 老梅의 둥치가 반은 비어있어 시멘트 같은 약품재로 보수되어 메워져 있다. 古梅는 역시 高梅이고, 故梅, 苦梅, 孤梅며, 枯梅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고매의 맛을 모두 지녔다. 하여 잔가지마다 만발하게 피어난 꽃들이 모두 고귀하고 또 고아하며, 아취가 깊어 어떤 말로 칭송하기조차 어줍잖았다. 경기전을 자주 들렀지만 매화 철엔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던가. 맨 가지로 외롭게 서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걸까. 참 무심했다. 매화 등걸 같은 처지가 되어서야 이심전심 조우하게 되었다. 매향처럼 은근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경기전 정신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태조어진>과 <왕조실록>을 목숨으로 보존하였던 선비들의 넋이 다니러 온 듯하여…….

 

 경기전 사고 앞의 '명품' 노매.  

 


 
   내 친구 임여사는 경기전 문화해설사로 십여 년 일하고 올해로 퇴임했다. 은퇴 기념으로 경기전 동편 담밑에 세 그루의 이팝나무를 심었다. 지금은 나와 함께 전주박물관의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전주문화지킴이의 일역도 담당하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매화나무 감상을 감동적으로 전했더니 경기전의 사계를 이야기하면서 특히 볼만한 풍경을 귀띔해 주었다.
  봄엔 사고 앞의 매화. 여름엔 배롱나무, 특히 배롱나무 꽃이 피었을 때 갑자기 소낙비 온 후 떨어진 꽃잎이 땅에 달무리 무늬를 지었을 때. 참 낭만적이지 않은가. 사고 앞의 매화나무 옆 정전 담장 옆에는 키 큰 잣나무가 있는데 뿌리에서부터 능소화 한 그루가 잣나무 등걸을 감고 올라가서 높은 가지에 꽃을 피운다. 다음으로 정전 앞의 팽나무 이끼를 들었다. 내가 하나 더 들고 싶다면 정문 안으로 들어와서 오른 편의 고목이 된 우람한 회화나무를 들고 싶다. 그걸 그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하니 가을의 단풍든 모습은 말할 것도 없다. 거목이 된 경기전의 은행나무는 향교의 은행나무와 더불어 명품 중의 명품이다.  겨울에는 경기전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나무들이 나목으로 서서 한 생을 되돌아보며 숲에 가려졌던 전각들의 지붕들과 그 속의 역사성을 찾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주의 대표적인 역사적 문화재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침 지난 주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때, 소낙비인가 했더니 태풍의 영향으로 오후 내내 비가 내렸다. 여름날 소낙비 내릴 때의 배롱나무가 생각나서 경기전에 들어갔다. 우산을 받고 바지가랑이가 다 젖었지만 과연 경기전 전각 사이사이의 배롱나무는 잠시 나를 잊게 했다.  휘어졌으나 말쑥한 굵은 가지의 빼어난 수형樹形이 고풍스런 전각들과 조화를 이루어 너무 아름다웠다. 고즈넉한 전각들 사이에서 애절하도록 화사한 진분홍 꽃잎 꽃잎들이 비에 젖고 있었다. 사고 전각 앞의 배롱나무 밑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이 흥건하게 고인 빗물에 달무리를 만들고 있었다.

  전주시의 경관을 보자면, 전주부로 입성하는 남쪽 들머리의 한벽당과 그 뒤 승암산자락은 견훤성 터가 있으므로 후백제의 견훤의 땅으로 보면 좋다. 오목대와 이목대 그리고 향교를 지나서 한옥마을로 이어지는 중심에 경기전이 자리하고 있고, 구 도청자리가 전라감영으로 복원된다면 객사까지 이어지는 관광 밸트가 형성되어 이 일대를 조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거리로 보면 좋을 것이다.
  한양을 두고 전주가 조선의 문화를 대표한다고 과잉 선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경기전의 의미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써, 전주의 충성스런 선비들에 의하여 어진과 왕조실록을 보존하였다는 중요성과 희소성을 생각하는 데서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놓치지 않아야 할 경기전의 문화 코드가 있다면, 하나는 입구에 있는 하마비下馬碑, (지차개하마至此皆下馬  잡인무득입雜人毋得入)와 정전의 정자각 풍판에 붙어 있는 암수 두 마리의 거북이를 말함이 아닐까. 경기전의 참 모습 또한 면면이 이어져 오는 역사문화의 향기에서 그 정신을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역사의 뒤란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전주인들의 정신이 팽나무의 푸른 이끼처럼 경기전 뜨락에 서려 시민의 공원이 될 수 있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도 내 친구 임여사는 조선의 선비 후예답게 문화재를 사랑하는 전주지킴이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어서 든든하다. 역사가 이룬 이러한 품격을 현대의 가치와 양립시킬 수 있는 방도를 찾는 것, 이것이 앞으로 남아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2009년 8월 7일)
 

 

 


 

 경기전 동문으로 들어가서 사고로 들어가는 작은 문 앞에서 배롱나무의 자태에 반해버렸다.

비에 젖어 더욱 매력적인 모습들이었다

 

 

 

 

 

 

 봄에 매향을 피워냈던 매화나무는 지금 잎이 꽃처럼 열려 있다.

 

 

 

 

 

 

 여름 소낙비 내릴 때 배롱나무 꽃잎이 떨어져서

 

 

 담장 옆의 키 튼 나무가 잣나무인데 바로 옆 뿌리 부분부터 능소화가 같이 올라가면서

잣나무를 얼싸안고 가지를 뻗어 올라가서 꽃을 피운다. 능소화는 혼자 자라지 못하는

운명인가 보다. 어디서든 다른 나무나 기둥이나 담을 타고 기대어 살아간다.

가까이 접근하여 찍은 사진이 유실되었다.

 

 

 

 

 

 

 내신문 앞 양 쪽에 수형이 빼어난 배롱나무

 

 

 

 

 정전과 내신문 사이

 

 부속 건물에서 바라본 전동성당

 

 

 

 

 전사청의 부속 건물 중 제의 때 사용한 물의 공급처인 우물, 즉 어정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