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여름나무를 보며

차보살 다림화 2009. 8. 20. 01:02

여름나무를 바라보며
                                                                                                                           

 

                                                                                   조윤수

  

  깊은 산 속을 뚫는 듯하다. 상관면 신리에서 전주시내로 들어가려면 임실의 슬치에서 내려오는 20리 물길 대흥천을 따라 한벽교를 지난다. 우거진 가로수 밑을 지나는 맛은 시원한 석간수를 마시는 듯 청량하다. 앳된 봄바람이 어느새 훈풍의 열기로 약차 올라 여름나무들이 생명의 기운을 뿜어낸다.
  '땅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자라서 (首地而倒生)', 구( )와 민( )의 빼어난 기운을 차지하고 산천의 영기를 모아서, 가슴이 막힌 것을 씻어서 떨어 없애며, 맑고 온화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 북송(北宋)의 휘종황제 조길(趙佶)이 그의 대관다론(大觀茶論)에서 차나무를 일러 그렇게 서두를 시작하였다.
  
     여름이 되면 한 자리에서 수 백년, 인생의 몇 갑절을 살아내는 나무들이 새삼 경이롭게 다가온다. 거꾸로 땅 속에서 머리칼을 길게 깊게 뿌리내리는 만큼 큰 나무로 자라는 모습으로 일회성의 인생에게 어떤 생명의 본질을 얘기하는 걸까.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를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 원하는 것을 철마다 다 내어주고 나중에는 몸 전체를 다 내어준 후 남은 그루터기마저 늙은 몸을 쉬게 하는 나무. 우주 섭리의 목적을 완성하는 표상이라면 사람도 그런 나무만큼이라도 살아낼 수 있으면 싶다. 사람만의 유익을 위하여 나무들을 이용한다면 내 몸을 함부로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고목에 핀 꽃'이란 수필의 소재가 되어 주었던 금산사 미륵전 앞의 산사나무가 궁금했다. 산사나무는 나이테를 새길 둥치도 없어지고 밑동이 껍질만 남았었다. 뿌리는 튼튼해서인 지 해마다 무성한 꽃이 피고 열매가 맺었다. 이번 5월에 가보니 그 옆에 작은 새끼 산사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마치 늙은 소가 송아지를 낳은 것처럼 그 산사나무가 새끼를 낳은 것이다. 그렇게 말 못하는 생명이 다음 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다.
   다니하다 할아버지는 세계적인 돼지 박사였다. 그분의 기상천외한 동물 이야기를 듣노라면 늘 넋이 나갔었다. 일본의 야마기시 마을은 흔히 말하는 공동체 마을이지만, 실상은 자타일체(自他一體) 정신을 구현하는 자연순환 생태마을이다. 다니하다 할아버지는 특히 돼지를 자기 몸 같이 알고 돌보았다. 돼지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면 먼저 돼지가 자신의 생명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도와야 했다. 처음부터 돼지를 사육하여 수익만 얻고자 하는 마음보다 공존공생의 삶을 이끌어내는 원리였다. 돼지와 같이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고기가 필요할 때 돼지우리에 들어가면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서인지 자청해서 안겨오는 놈이 있다는 것이다. 야마기시마을의 소고기와 우유, 돼지고기, 닭고기와 달걀은 일본에서 가장 맛있는 농산물로 유명했다. 과일과 채소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1992년에 여러 곳의 그런 마을을 참관하고 그 실태를 돌아보았기에 실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다니하다 할아버지가 한국의 산안마을에 와서 머물 때 나는 그 마을에서 열리는 연찬 수련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 마을이 처음 생길 때 사람들은 천막에서 살고 자연순환에 맞는 안락한 닭장부터 먼저 지었다. 보통은 자연 방사하여 키우는 자연란이 좋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에 인위를 가하여 사람도 닭도 서로 살리는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 어떤 일도 사람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법은 없었다. 자연의 순리를 찾아가는 삶이었다.
  이런 삶을 어떻게 살아낼까 는 연찬(硏鑽)의 방법에 있었다. 다니하다 할아버지와 같이 닭장에서 작업 연찬을 하였는데, 닭고기를 잡아 손질하는 것이었다. 나는 결코 닭을 잡아보지는 못하였다. 할아버지는 순식간에 닭의 목덜미를 따서 닭이 부드러운 고기가 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사시미를 장만하여 불쑥 내게 내밀었다. 잠깐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바로 받아먹었다. 그 후로 그런 맛의 사시미를 다시는 먹어볼 수 없었다. 산안마을의 유정란은 그 맛이 좋기로 국내에서도 유명하다. 요즈음 흔한 기능성 계란은 자연의 순리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닭을 돌보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계란을 먹는 사람의 마음에까지 닿도록 정성을 다한다.
 
  가끔 나무의 마음을 배우러 숲이나 큰 나무 밑을 찾아간다. 나무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나무를 해석할 수는 없다. 생의 정점을 넘어야 하는 여름 나무 속은 너무 깊어서 숙연히 올려다보기도 하고 따라서 생각도 깊어진다. 그 짙은 고요함에 이끌려서. 그러나 나무도 동물도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사람만이 계산을 하며 사는 것 같다. 다니하다 할아버지도 그냥 살아가는 나무나 동물의 마음과 통했기 때문에 같은 마음 하나로 소통할 수 있었다. 
  모든 형상 있는 것들은 그대로 있지 아니한다. 태어나면 죽고 죽어야 영원히 다시 살아난다. 생성되고 소멸하는 것들은 다 때가 있으므로 형상 없음만이 영원하며, 우리가 돌아갈 곳은 그 영원성인 무형(無形)의 실체가 아닐까. 영원성과 소통한 생명은 그냥 그대로 순간을 산다. 다니하다 할아버지도 그런 삶을 살게 된 것이었다.
 
  상관 계곡으로 들어선다. 동고산성 자락과 남고산성 자락이 이어졌을 옛날 길을 연상하며 심산유곡을 들어가는 듯한 시원함이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덕진동에서 좁은목의 약수터로 생수를 길러왔고 둑 아래의 냇물에서 빨래를 해놓고 아이들과 놀기도 했던 곳이다. 수목이 울창한 여름 청산을 끼고 돌아가다 보면 하늘을 향해 피어있는 상두화(上頭花)들이 보인다. 나무는 한 자리에 있어도 서로서로 잘 돌보며 살아가는 것 같다.
 '거꾸로 자란다(倒生)'의 관념은 서양에도 있었다고 한다. 풀라톤은 '인간은 거꾸로 선 식물'이라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은 거꾸로 선 인간'이라고 하였단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거꾸로 선 식물'로써 참다운 인류 정신을 발휘하는 삶이면 좋겠다. 여름나무를 보며 고독한 인내로 그냥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나무 옆에 나를 물구나무로 세워본다. (2009/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