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경기전慶基殿의 역사
조선시대 태조진전
어진이란 한 조종과 국가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특히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창업자의 영정이란 점에서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의 어진만을 모신 태조진전은 전국에 걸쳐 다섯 곳에 세워졌다. 즉 왕실의 본향인 전주, 태조가 태어난 영흥, 태조의 구택舊宅이자 고려 수도였던 개성, 고구려와 신라의 수도였던 평양과 경주 등 총 5곳에 진전을 건립하고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이렇게 태조진전을 여러 곳에 건립한 것은 한나라의 시조인 고조高祖의 묘를 경사京師 뿐 아니라 군국郡國에도 분립하도록 했다는 한漢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조상과 자신의 살던 옛집을 궁으로 삼고 진전을 세우는 것은 그곳을 기념하고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국가의 시조를 잊지 않고 경모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한편으로 전시대의 도읍에 진전을 건립한 것으로 볼 때 정치적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태조진전은 처음에 어용전, 수용전, 영전 등으로 불렸다. 지금 같이 영흥 준원전(선원전), 평양 영숭전, 경주 집경전, 개성 목청전 전주 경기전 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세종 24년 (1442)부터이다. 준원전, 집경전, 영숭전은 태조 대에 지어졌고, 태종 10년 9월에 전주 경기전을 세우고, 태종 18년 (1418) 5월에 개성 목청전이 추가로 건립되었다.
경기전은 조선 태종 10년 (1410)에 창건되었다. 전주가 태조 이성계의 본향(本鄕)이므로 태종 9년(1409)에 완산부(전주)에서 태조 어진을 봉안히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경주 어용전(御用殿)에서 어진을 한양으로 모셔가 모사하고 이듬해 경기전이 완공되면서 태조 어진을 경기전에 모시게 된다.
태조진전은 임진왜란과 정유내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조선 후기의 야사인 <공사견문록>에 경기전 중창과 관련된 기록으로 보면 중종 14년 (1519)경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공사의 범위는 알 수 없지만 중창 시 자재를 활용하여 몇 칸 되는 집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유재란 때 경기전이 소실되자, 경기전의 어진은 여러 곳을 거쳐 묘향산 보현사로 이안하였다. 광해군 6년 (1614)에 경기전을 중건하면서 묘향산 보현사에 있던 어진을 환안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도 태조어진은 적상선성으로 이안하였다가 난이 수습된 뒤 경기전에 다시 모셨고, 한 편 숙종 1년 (1675)에는 위봉산성을 축조하면서 산성 안에 재난시 경기전의 영정을 이안할 수 있도록 행궁을 마련하였다. 지금은 위봉산성 일부만 남아 있다. 한편 숙종 2년 (1676)에 경기전 정전 동쪽 실록각이 있던 자리에 유사시 어진의 이안처로 사용하고자 별전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숙종 13년 (1687) 화재로 소실되고 이듬해 중건하여 1937년 일제에 의해 훼철될 때까지 존재하였다.
영조 43년 (1767)에 전주성에 큰 화재가 나 주택 2천3백여 호가 소실되었으나 경기전은 재난을 피했다. 영조 47(1771)에는 경기전 복동쪽에 조경묘를 창건하여 전주이씨 시조와 시조비의 신주를 봉안하였다. 실록에 의하면 경기전은 철종 5년과 7년에 수리가 있었고, 고종 년간, 고종 9년 (1872)에는 어진을 새롭게 모사하여 다시 모시면서 조경묘와 함께 대대적인 경기전 중수가 이루어진다. 이때 경기전은 정전 내 침실(어방)의 바닥을 온돌에서 대청으로 바꾼다. 또한 부식된 기둥 두 개를 개비하였으며 번와에 단청등을 새롭게 하고 정자각과 별전도 보수하였다. 당시 공사는 4개월 정도 소요되었다.
1937년 일제에 의하여 별전과 서쪽 부속채들이 철거되었다. 별전이 있던 자리에는 1963년 전리북도 박물관이 건립되었으며, 1976년에는 전주시립박물관으로 새로 개관 되었다. 1990년에 경기전 정문을 설치하고 이듬해 박물관을 철거한 후 전주사고 실록각을 복원하였다. 1995년에 원래 부속채들이 있던 중앙초등학교 교사를 철거하고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아쉽게도 건물지가 제대로 확인되지 못하였다. 2004년에 <경기전의(慶基殿儀)>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사청 등 부속채들을 복원하였다.
홍살문은 원래 정문 밖에 서쪽 방향으로 서 있었는데 중수 때 이곳으로keutek
내신문 오른 쪽 문으로 들어가서 나올 때는 왼 쪽 문으로 나온다.
신도는 일반인은 사용하지 않는다.
태조 어진
어탑 안에 모셔진 태조 어진
현재 정전 및 월랑에 전시된 각종 가마를 비롯한 의식구들은 매우 귀중한 문화재이다. 노출전시를 피하여 안정된 환경에서
보관하 여야 한다. 전주 李씨 문중과 전주 시민들의 원력이 모아져서 경기전 뒤의 중앙초등학교 자리에 공사 중인 태조어진각이
완성되면 그 문화재들은 거기에 전시될 성싶다.
1995년에 원래 부속채들이 있던 중앙초등학교 교사를 철거하고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아쉽게도 건물지가 제대로 확인되지 못하였다.
1937년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었던 별전의 자리에 원래대로 사고가 건립되었고 서쪽 부속 건물이 복원되었다.
2004년에 <경기전의(慶基殿儀)>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사청 등 부속채들을 복원하였다.
예종의 태실
조선왕조실록
성종 4년 (1474) 봄, 세조·예종의 양조실록이 완성되자 경기전 내에 사고(史庫)를 건립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를 비롯한 전국 네 곳의 사고, (서울 춘추관, 성주사고, 충주사고, 전주사고)가 소실되었지만, 전주의 실록이 남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전주의 실록은 내장산에 피하였다가 다시 묘향산으로 피란했다.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은 전후에 4본을 필사하여 태백산, 정족산, 적상산, 오대산 등에 보관하게 된다. 이리하여 실록이 산으로 간 까닭이다. 일제 때 적상산본은 창덕궁 이왕직이 보관하다가 6.25 때 북한 김일성대로 가게 되고 현재 인민학습당에 보관 중인 것으로 안다. 전주사고본은 강화도 정족산에 보관하였고 일제 때 경성제국대에 있었다가 6.25 때 부산으로 피난,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중이다. 태백산본은 경성제국대에서 부신으로 피란, 부산정부문서보존소에 보관중이며 이것을 번역하여 전국 인터넷을 통하여 국민들의 열람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전주의 선비들이 목숨을 다하여 지킨 실록으로 하여 오늘날까지 조선의 왕실의 문화를 통하여 전통의 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고 앞 뜰
사고에서 정전으로 들어가는 쪽문
조선시대에 어진은 왕의 존재 그 자체였다. 따라서 어진의 봉안과 이안은 왕을 모시듯이 엄격하게 하였다. 그런 점에서 한 때 태조어진 현대 모사본을 어탑御榻의 문 밖에 걸어둔 것은 격식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현재는 어탑 안에 어진이 모셔져 있다.
현재 정전 및 월랑에 전시된 각종 가마를 비롯한 의식구들은 매우 귀중안 문화재이다. 노출전시를 피하여 안정된 환경에서 보관하여야 한다. 전주 李씨 문중과 전주 시민들의 원력으로 태조어진은 전주로 환안하게 되었다. 경기전 뒤의 중앙초등학교 자리에 공사 중인 태조어진각이 완성되면 그 문화재들은 거기에 전시될 성싶다.
조선시대에 경기전은 조선왕조 창업자의 초상을 모신 곳으로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제 세월이 바뀌어 경기전은 시민들에게 사랑 받는 공원이 되었다. 모든 이들이 선조들의 유산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경기전이 예사로운 유원지가 아니라 왕의 초상을 모시는 엄숙한 공간이었다는 원칙은 존중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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