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가을 꽃에서 울리는 가을의 소리

차보살 다림화 2009. 10. 9. 19:38

김홍도(1745-1806)의 <추성부도秋聲賦圖>가 다시 보고 싶은 이 가을

단원의 후기작품으로 화폭 왼쪽 끝부분에구양수의 <추성부> 전문이 적혀 있다.

(호암미술과 소장)

 

 구양수(1007-1072)의 추성부를 옮겨 보자.

 

  구양자가 한밤중 책을 읽고 있노라니, 서남쪽에서 웬 소리가 들린다. 섬뜩한 느김이다. 이상도 하지.

처음에는 뭔가 우수수 쓸쓸한 바람 소리 같더니, 갑자기 내달리고 뛰어오르고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듯하더니,

난데없이 한밤중에 파도가 치는 듯,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하고, 물건에 부닥치자 쟁강쟁강 쇠조각이 출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적진으로 내달리는 군대가 재갈을 입에 물어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사람과 말이 행군하는 소리만 들리는 듯도 하구나.

  구양수는 동자에게 묻는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나가서 알아보아라."

  "별빛과 달빛이 환히 비차구요, 하늘에는 은하수가 걸려 있어요. 사방에 사람 소리는 도무지 없구요, 숲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데요."

  "슬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니라."

 

 

 

가을 꽃

 

 

모든 꽃들은 아름답다. 이름없는 작은 풀꽃이라도.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은다.

그러나 꽃이 다투어 핀다는 봄꽃에서 느끼는 매력과 가을 꽃이 주는 맛은 사뭇 다르다.

봄이나 가을 모두 각각의 모양과 빛깔이 있다. 그러나 같은 빛깔이라도 봄빛과 가을빛이

다르다. 가을꽃이 마음에 들어오면 그 빛깔은 묘한 빛무늬를 만든다. 왜 그럴까.

코스모스,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각종 소국들...

 

 

 

 같은 하양색이지만 봄꽃이 주는 맛과 가을 대국이나 하얀 구절초에서는

소리가 담겨져 있는 것 같다. 가을 소리... 풀벌레와 방울벌레 소리를 듣고 자라서일까. 

 

 

 

 여러 모습과 마음빛을 지닌 다양한 매력을 지닌 사람들처럼

봄꽃 같은 사람, 여름 꽃 같은 사람, 가을꽃 같은 사람 그리고 겨울 꽃 같은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봄꽃에서 느끼는 마음의 빛깔은 어쩌면 노랑 결이지 않을까. 같은 노랑이지만 봄의 노랑은

힘찬 희망의 깃발을 들고 피면서 생동감이 일렁이게 한다. 가을 꽃의 정서는 뭐라 할까.

구절초의 빛깔이 하양, 분홍 보랏빛이 있지만, 쑥부쟁이와 벌개미취 빛이 주는 아련함이 더한다.

지평선을 물들이는 금빛 나락 물결이 파도치는 누른 들판은 가을 열매와 더불어 풍요로움을 준다.

배고파도 배고픈줄 모르리라. 가을 들판을 채색한 황금빛에서는 봄의 개나리에서 느끼는 찬란함은 없다.

그보다는 말할 수 없는 뿌듯함과 넉넉함 뒤에 오는 허기진 마음, 곧 뒤따라올 비움의 또 다른 넉넉함이

기다리는 맛이다. 깊고 고요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맛. 뜨거운 물만 있으면 자꾸만 우러나는 찻물처럼...

그윽한 그리움의 맛.

 

 

 

 구절초는 여인들에게 좋은 약재가 되는 풀이다. 말려서 차로도 사용한다.

 해서 벌나비와 작은 벌레들이 왕왕거린다.

 

 

 

 초등학생들이 하교길에 이 꽃밭을 지난다. 아름다운 모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어떤 아저씨가 아이 셋을 세워놓고 험한 말씨와 눈초리로

아이 하나를 혼내고 있었다. 서로 싸운 것을 보고는 자기 딸이 피해를 보았다고 같이 싸웠다는

다른 아이를 혼내고 있었다. 아이들 싸움에 아버지가 나서서 역성을 들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자니 혼난 아이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 좋은 구철초와 코스모스가 어우러진 풍경 옆에서 그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저씨, 서로 싸우다가 일어난 일인데, 또 다른 아이를 그렇게

울리고 가시면 되겠습니까?" 어저씨는 그 장면을 보았느냐고 나에게 되물었다.

그렇지만 주의를 주었으면 서로 사이좋게 놀도록 다 다독거려 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이 좋은 가을 날에 아이와 함께 꽃밭이라도 거닐다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넌지시 한 마디 건넸다. 잠시 꽃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닌다면 

어떨까 싶었다.

 

 

 

 

 우리동네 상관면보건지소와 상관초등학교 사이에는 구절초 밭이 있다.

이름난 먼곳까지 가지 않아도 조촐한 이 꽃밭이 너무 사랑스럽다.

좋은 사진 장면을 찾느라고 나무 사이를 헤치다가 거미줄을 만났다.

거미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거미들도 가을에는 예쁜 옷을 갈아 입는걸까.

검은 거미만 보았는데, 참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거미다.

 

 거미는 어디서 나서 이렇게 거미줄을 스스로 치고 일생을 줄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운명일까. 형언해내기 어려운 육체미와 팻션을 하고,

상상할 수 없는 재주를 가지고서 얼마나 살면서 어떤 역할로

우리와 관계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비단벌레 생각이 난다.

 

 

 통일신라시대 때의 지체 높은 사람의 허리띠 장식에는 비단벌레의 날개를 부쳐서 만든 것이 있다.

 지금까지도 그 찬란한 빛깔을 자랑한다.

만드는 과정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단벌레를 얼마나 잡아야 하는지, 수많은 날개를 모아서 촘촘히 붙였다.

그래서 멸종이 되다시피했던 비단벌레의 운명이었다. 최근에 어떤 남쪽 지방에서 다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 거미들은 날개가 없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저 아름다운 몸체의 껍질을 모아서 사람의 장신구로 쓰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까지는 될 수 없는 일이지  싶다.

 

 

 아이야 울긴 왜 울어! 꽃밭에서 꽃들과 노래해봐...  금방 친구들과 사이좋게 될거야.

 

 꽃과 함께 가을의 소리를....

도시에서 나는 가을 소리는 가을 폭탄 세일을 외치는 마트나 백화점에서 시작하는 지 몰라도

조금 여유를 가지고 보면  진정 들리는 가을 소리들이 있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나가서 알아보아라."

  "별빛과 달빛이 환히 비차구요, 하늘에는 은하수가 걸려 있어요. 사방에 사람 소리는 도무지 없구요,

숲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데요."

  "슬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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