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마한 숨쉬는 기록

차보살 다림화 2009. 10. 13. 15:23

 

대한민국을 참배하다
-반남면고분군을 다녀와서-
                                                                                                                                           조윤수


  영산강의 지류인 삼포강을 지난다. 드디어 영산강 삼백리 어머니 같은 젖줄이 있어 선사인들이 등 붙일 수 있었구나 싶은 실감이 다가왔다. 내려오는 도중, 차창으로 들어왔던 풍경은 드넓은 겨자 빛 들녘과 논둑에서 긴 줄을 서서 은빛을 반짝거리는 억새풀들만 인상에 남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풀이 마치 이정표처럼 우리를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나주시 반남면고분군은 반남면의 자미성을 둘러싼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일대에 산재해 있는 40여기의 고분군을 일러 말한다. 반남면은 반남 박씨의 시조묘도 있는 반남 박씨의 본관지이기도 하다. 백제에 복속되기 이전 최후까지 마한의 세력이 남아 있었던 영산강 유역이다.
  거대한 고분 앞에 서자니 그제사 출토되어 유물로 말하고 있는 박물관의 기록들이 시원한 호흡을 하며 다가와서, 나도 비로소 큰 숨을 내쉬었다.  마한(馬韓)이라면 삼한 중의 가장 강력하고 크게 자리를 잡았던 54개국 연맹체였으며, 우리나라의 이름이 대한(大韓)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된 삼한의 한(韓)이 근원이었다 는 것 외에 알 수 없었다.  이번에(2009년 9월 22-11월 29)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국내 최초로 '마한의 숨쉬는 기록'을 전시하고 있다. 네 주제, 즉 l. 마한, 그 시작, 2. 삼한의 으뜸, 마한, 3. 마한 사람들의 삶과 신앙, 4 백제 속의 마한 등을 통하여 마한과 백제와 주변 동아시아와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볼 수 있다. 그 전시와 연계된 유적 답사로써 반남면고분군에 오게 되었다.
  반남면고분군의 특징은 고구려 장군총, 공주 송산리 고분군, 신라 경주대릉원에 견주어 손색없는 대 능원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역사에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은 국가가 형성되기 전의 부족국가가 통일국가로 발전하지 못해서였다고 보아야 할까. 백제에 흡수되어 가는 과도기의 삶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는 것을 유물이 말해주었다. 마한의 기록은, 우리의 기록이 없을 때는 언제나 들먹이는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이며 우리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대와 <삼국유사>혁거세조이다. 
  마한의 묘제의 특징은 단연 옹관묘이다. 마한에는 왕관은 없지만 옹관은 있다고 했다. 경주의 왕릉이나 부여의 능이 한 왕을 위한 능이었다면 마한의 묘제는 한 분구에서 여러 기의 옹관이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한 분구를 같은 부족이 시대를 두고 계속 매장을 하였다는 것은 이 얼마나 애틋한 부족간의 끈끈한 가족애를 말하는 것인가. 까마득한 고대인들의  어떤 정이 내 속의 어디에 숨어서 숨쉬는 듯하였다. 그러기에 무덤의 형태도 커다란 원형에서 방대형, 사다리꼴, 장고형 등이다. 신촌리 고분들의 규모는 길이 10.5미터에서 35미터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내부시설이 대부분 여러 개의 옹관으로 구성되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 하나의 분구 밑 둘레에 도랑을 파고 물이 흐르게 했다. 띠를 두른 것이 분구의 장식 같다. 그 부족들의 주거지는 대체 어디쯤이었을까. 나주읍성 땅속을 파보면 단서가 될 어떤 유물들이 나올까. 그 거대한 옹관은 어디에서 어떻게 구었을까.
  박물관 전시장도 거대한 옹관으로 들어가는 듯한 구성으로 되어서 흥미롭다. 지금까지 막연하였던 마한의 그 이전과 이후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 전시장 입구는 옹관의 입구처럼 좁게 들어가게 되어 넓은 영역으로 인도된다. 처음 입구의 영상에서 만날 수 있는 '말모양허리띠' 장식은 그들에게 절대적이었던 말에서 마한의 으뜸이었음을 느낀다. 전시장 가운데 거대한 옹관이 있고 주변의 유물에서는 마한의 삶과 신앙을 알며 그후로 백제 속의 마한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거대한 옹관을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당시의 강력했던 지배세력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지금도 그런 옹관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2년 전에 광주박물관에서 만났던 신기한 금동관이 신촌리 9호분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보니 마한의 세력이 다시금 생각되기도 한다. 옹관은 있지만 왕관은 없다는 기록은 이제 다시 쓰여지게 된다. 마한의 역사 기록이. 이 금동관이 후에 국가 시대의 임금들의 관모의 전형이 된 것을 보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뿐 아니라 금동신발을 비롯하여 금반지 봉화문환두대도, 청동 팔찌 등 다양한 유물을 통해 마한인들 만난다. 1996년 신촌리 9호분을 재 발굴한 결과 고분 정상부를 두르며 장식한 원통형토기 28개가 출토되었다. 이 원통형토기는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된 '하나와'라는 유물과 같은 성격으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 전쟁의 비밀의 실마리도 될 수 있다 고 한다.
  복암리 고분인 방대형 고분의 정상에 오른다. 작은 야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평평한 정상에 서니 상쾌한 바람이 밀려와서 사위를 둘러본다. 주변의,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한 영산강의 지류가 보이는 곳까지, 사방이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어찌 이 평야를 사랑하지 않았으랴! 3호분이라는 이 거대한 분구는 96-97년 확인된 구내유일의 다양한 묘제 32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금동신발, 관모, 삼두환두대도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마한과 백제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단서들이 된다. 한 분구 안에 마한계의 옹관묘와 백제계의 석실분의 융합된 묘가 매장되었다는 것이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몇 세대를 걸쳐 완성된 분구였다. 4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조성된 집단묘적의 성격과 시기에 따른 옹관묘의 형태 그리고 석실분까지 그 변천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을 제공한 유적이란다.
  얼마 전 세상을 놀라게 했던 고창군 봉덕리 고분은 더욱 신기하다. 언젠가 나는 길을 잘못 들어 아산면에서 선운사를 가기 위하여 그 길을 통과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야트막한 야산이 고분이었다니! 주변의 야산을 눈여겨보시라! 혹시나 선사시대의 고분인지 누가 알랴! 작은 구릉 옆을 돌아서니 길옆에 잡풀이 무성한 야산이 하나 있다. 아직 발굴하지 않은 분구가 옆에 발굴하고 있는 분구와 쌍을 이루고 있다. 조각이 찬란한 투조기법의 금동제 신발이 여기에서 나왔다. 대형 옹관 안에 시신을 누이고 금동관을 입고 금동신발을 신고 곡옥을 포인트로 한 구슬 목걸이를 걸었던 사람. 대도(大刀)를 차고 손칼도 들고서 중국제 청자와 호와 은제 탁잔을 거느리고 옹관 안에 누워서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 사람은.
  경주에 갔을 때 나는 진평왕이나 선덕여왕 무덤에 가고 싶었다. 주변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 일행이 왕릉에 가봐야 볼 것이 없다 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오늘 답사는 종일 마한(韓)을 열었던 사람들의 무덤만 참배하는 성묘 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대한민국을 통으로 참배하는 기분이었다. (2009년 10월 13일)

 

 

 

 나주시 서남부에 위치한 반남면, 대안리(사적76호), 신촌리(사적 77호), 덕산리(사적78호) 등 3개

고분군으로 나뉘어 분포하고 있다.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을 중심으로 자미산을 가운데 두고 있다.

일제 강접기에 처음으로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진 후 많은 도굴꾼에게 착취되기도 했다.

1996- 1997년에 대부분 재 발굴되어 복원하였다.

 

 

 

 

 

 길 건너 덕산리 고분이 보인다.

 

 

 

 

 신촌리 국립박물관 예정지를 지표 조사 하던 도중 발견된 유구.

 

 

 

 

 

 

복암리 방대형 분구 , 작은 운동장 같은 분묘의 정상에서 사방으로 펼쳐진 황금들녘이

영산강 유역을 뒤덮고 있다. 사적 제 404호인 복암리고분군은 영산강을 끼고 펼쳐진

평야지대에 자리 집은 대형고분군이다. 원래 고분 7기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4기만 남아있다.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 고분군

 

 

 

 

 봉덕리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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