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마곡사 풍경

차보살 다림화 2009. 11. 1. 18:26

  마곡사 가는 길

 

 

 해가 짧아 벌써 어둠이 깔린다. 차물이 끓고 차를 우리고 찻물이 흐르는 소리에 오늘의 풍경이 뒤따라온다.

단풍빛이 물속에 어리는 산곡에서 여유있게 거닐지 못하고 총총히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기분을

찻물 속에 갈무리한다.  지난 가을 장면들을 단풍잎처럼 곱게곱게 다시 줍는다.

 일주문을 지나 해탈문을 향하여...

 행촌수필문학회 2009년 가을 문학기행은 공주 마곡사와 무령왕릉으로 정했다.

오전 10시 20분에 도착하여 주차장에서 계곡으로 난 길을 산책하여 마곡사로 들어갔다.

 

 시월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는 마른 잎들이 카펫을 깔고 있었다.

 

 

 태화산 마곡사는 주위에 많은 암자와 등산로가 여러 방면으로 나 있다.

백범 김구선생께서 머물렀던 암자도 오른 쪽 길로 오르면 나온다.

 

 올라오는 도중에서는 노란 은행잎들이 찻창을 자주 메웠다.

단풍잎들이 벌써 지쳐가는 뒷걸음을 붙잡는 듯 따라가야만 했던 성급한 하루.

 

 노란 은행잎 깔린 이 길을 오르는 행자들의 뒷모습이 아름다워

모두 이 길에서 사진을 찍었다.

 

 

곳곳에 단풍이고 곳곳에 단풍꽃이네

화사하다 못해 붉게붉게 타오르는

빛깔 뒤, 머 언 먼데서 들려오는 듯

풍경소리 너머에서

부르는듯한  이명 같은 손짓

앞에도 단풍이고 뒤에도 단풍꽃인데

 

 마곡사는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을 지녔다. 가람 배치도 아기자기하게 배치가 되었으며 특히

회지천을 중심에 두고 남쪽과 북쪽 전각들의 역할과 의미가 다르다.

올해 단풍은 약간 지난 것 같고 사진을 찍을 시간이 없어 연 전의 사진을 가지고 왔다.

담장 안에서 영산전을 비롯하여 30여동의 건물 명칭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옛날 흥성했을 당시의

가람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지금으로써 기억나는 것은 영산전이다. 영산전은 천불전이라고도 하는데

목불의 보고이다. 석가여래의 전생 상들이 재미나게 조각되어 있어 흥미롭다. 남원의 담장 가의 단풍

나무가 마곡사의 가을을 빛낸다.

  하루 잠깐 들렀다 온 사찰의 풍경을 나는 절대 글로 쓸 수 없다. 몇의 계절을 넘기고 나에게 들어왔을 때야 그 의미를 살펴 보게 된다.

오늘 설핏 들여다 본 절집은 넉넉한 시간이 없는 기행 차에 잘 살펴볼 수도 없어 단풍 바람만 가슴을 후비고 지나갔다. 해서 지난 날의

사진을 들여다 보며 그 속 깊은 의미를 찾아 다시 가고 싶어진다. 시월이면 봄 못지 않게 마곡사는 가을 단풍의 백미를 자랑한다.

  마곡사의 창건 기록은 분명한 것이 없다. 신빙성 있는 사료로는 조선 철종 2년(1851)에 작성된 <사적입안>이라는 자료이다.

1650년 효종 원년에 각순선사가 크게 중창한 이후부터 큰 불이 났던 정조6년 (1782)까지의 기록이 비교적 믿을만한 기록이라고 한다.

이 기록으로 신라말 보조체징 804-880)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어 통효범일, 보조국사, 도선, 각순 등이 이 절과 연관되어 전해 오고 있을 뿐 임진란 이후부터 기록들이 전한다. 마곡의 이름 유래는 보철화상이 법을 얻어 오자 사람들이 삼森처럼 많이 모여 들었다는 이야기와 사방에서 이 절로 법을 물으러 오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그 모습이 마치 삼이 서 있는 것 같아서 마곡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남원의 적각들은 주로 수행도량이었다고 한다. 해서 남원에서 수행력을 닦아야 이 극락교를 지나 부처님을

친견하러 갈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되어진다.

 

 부처님을 만나고 다시 극락교를 지나서 천왕문롸 해탈문을 빠져 사바세계로 만해을 떠나는 불자님들이다.

 

 대웅전 앞에서

 

 

 대광보전 옆으로 돌아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은 양 편에 가을 꽃이 잔잔하게 발걸음을 인도하며 아래쪽 요사체의 높게 쌓아 올린 토담굴뚝과 기와담장 곡선이 너무 아름답다. 이곳에 올라 뒤돌아 서면 대광보전과 측면의 요사체의 처마선과 극락교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보물 제 801호인 대웅전을 지나서 계곡쪽으로 내려가면 징검다리를 건너서 태화산 속으로 들어간다. 계곡 길을 통과하면 다른 마을 길이 연결된다.

 

 

 

 

 

 

 

 

누군가 봄 마곡사를 궁금해 하는 문우가 있어 봄의 마곡사 사진을 찾아왔다.

초파일 무렵인지...

 

 마당에 서 있는 5층 탑은 오랫동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이 탑은 고려말에 라마교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상륜부의 금동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금탑이라고 불렀다.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이런 탑을 이 외진 산 속에 세운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큰 모험이고 실험적인 사건이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제작하기 힘든 것으로서 원나라에서 수입하여 온 것으로 본다. 일층 탑신과 2층 탑신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상륜부는 청동제인 풍마동으로 만든 라마식 보탑이라고 한다.  13-14세기 당시 마곡사가 밀교적 색채를 받아들였던

대표적인 절이다.  고려말기의 대표적 이형탑으로 한국 석탑 조영사에서 새로운 실험작이라 평가하고 있다. 석탑 안의 유물은 임진란 때 약탈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곡사는 여러번 중창 불사와  화재로 수난을 많이 겪었다. 최대의 중흥기를 맞이 하였던 시기는 12세개에서 15세기 후반 사이였다고 한다.

극락교 아래로 흐르는 회지전을 가운데 두고 북원北院에는 대웅전과 대광보전과 심검당, 요사체와 범종루 등이 대표적인 전각들이다. 옛날에서 훨씬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고 한다. 너른 마당에서 5층 석탑이 특이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대광보전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는 불상이 서쪽에 안자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대광보전은 단층으로 넉넉하게 편히 자리 하고 있으며 오른 쪽 계단을 오르면 안에서는 단층이지만 외부에서는 2층 탑의 모습을 하고 있는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석가여래를 주불로 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의 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전체적으로 마당에서 보면 대광보전과 그 위쪽에 위치한 대웅전의 2층구조 모습은 중층의 목탑처럼 보이고, 또한 지세를 이용하여 장엄한 보습을 연출해 내고 있다. 대광보전은 수평적이고 위의 디웅전은 수직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마곡사의 절묘한 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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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mance / Steve Barakatt

 


 

 

 

 

2009년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가을의 사연들이 흩어져 날리고.

 

 

 

 

 총총히 발걸음을 돌리는 님들입니다.

 

일정을 너무 많이 잡은 것 같아 시간에 맞추려고 하다보니 아쉬웠다.  대광보전의 비로자나불을 뵙고나 가자고 효순님의 손을 잡고

법당으로 들어갔다.  사찰에 가면  전각의 현판 글씨를 보는 재미도 있는 데 마곡사 대광보전의 현판은 강세황의 유려한 글씨란 것이

새삼 다가왔다. 마침 사시예불 중이었다. 이 법당에 들어오면 예상을 뒤엎고 부처님이 서쪽에 앉아 계신다. 1788년 중수를 하였고, 다시 1831년 중창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중간에 누군가에 의해 변형된 건물이라고 본다. 법당 공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보고자 한 그 시대 스님들의 생각이 엿보이는 곳이다. 이런 구조는 다른 사찰에서도 볼 수 있는 곳이 더러 있다. 통도사 영산전과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과 화엄사 각황전이 그렇다. 이러한 배치는 많은 대중이 법당에 들어와 설법을 듣는데 적당한 방법이며 이런 절들이 모두 화엄종찰의 성격을 뛰고 있다.

  220여 년 세월에 바랜 우물천정 고색단청들이 은은하게 빛나는 지붕 아래 용들의 비호를 받고 닫집에 앉아 있는 부처님의 모습은 어느 불상

보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비로자나불에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정성을 다하여 삿자리를 짰다는 앉은 뱅이가  삿자리가 완성되던 날 스스로 법당문을 걸어서 나갔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그 자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데...

  우리는 부처님께 삼배하고 부처님의 뒤로 갔다. 사찰에 가면 나는 꼭 전각의 뒤를 돌아나온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것이 절집의 풍경이기도 하니까.   옛날에는 불상을 돌 수 있게 불상을 앞에 쯤 조성하였다고 들었다. 비로자나불 뒤편에는 정말 놀라운 벽화가 새겨져 있다. 대광보전의 후불벽화, 백의관음보살도이다. 너무나 선명하고 아름다운 벽화인데 지금 막 그림을 끝낸 것 같이 선명하고 인상이 부드러운  관음보살이다. 백의보살 가슴 부분 영락은 녹색으로 치장했고 여러 포인트는 붉은 색이 백의 관음보살  찬연하게 올려다 보게 했다. 옆에서 선재동자가 우러러 보고 있다. 한 쪽에는 유려한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 있는 정병이 있다. 한 발을 육중하게 붉은 연화좌를 밟고 있는 뜻은 무엇일까. 연화장 세계가 발 밑에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이 아름다운 백의관음 앞에서  저절로 환희심이 우러나와 삼배를 하고 조용히 물러 나왔다. 나올 때 두런거렸다. 사진을 찍어올 일일데 하고 말이다. 그 정도로 경망스럽게 사진을 찍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로전 벽에도 여러 벽화가 흥미를 불러일으켰는데 예불 중이고 시간도 촉박하여 경건하게 물러나왔다.

 어찌하여 남방화소의 본고장이라고 했는지 짐작가는 대목이었다. 백의관음보살도는 조선 후기의 회화의 일면을 짐작하게 했다.

마곡사에는 조선 숙종 때 조성된 괘불이 있는데 남방화소南方畵所의 품격을 갖춘 불화라고 한다.  조선의 문예부흥시기의 흔적이

이 마곡사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1782년 대법당을 비롯한 1천여칸의 전각들이 불타버리는 화재를 만나게 된다. 이후 제봉체규라는 스님이 화주로 나서서 마곡사의 전각들을 다시 중창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사역을 시작한지 4년여만에 1788년 대법당을 완공하였고, 2년 뒤인 정조 14년 (1790)에 자신의 기도로 원자(순조)가 탄생하는 경사를 맞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왕실의 도움을 받아 중창 불사는 탄력을 받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정조 19년 (1795)에는 태실로 봉해지고 도내 수사찰의 직인까지 받는 경사가 겹쳐 이후 마곡사의 사세는 일취월장 하였던 것으로 본다.

  대광보전의 부불벽화 백의관음보살도를 다시 보고 싶을 것 같다. 여름에 내소사에 가서도 대웅전 후불벽화인 백의관음보살도를 보았는데 그보다 훨씬 선명한 국내 최고의 수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세기 조선회화의 특징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라고 본다. 당시 왕실의 화원들 못지 않게 사찰에서도 화사들이 많았을 것이다. 수많은 탱화들과 벽화들을 그리면서 불심을 닦았을 것이 아닌가. 연홍과 상훈 등 15인의 화사들에 의해서 그렸을 것이라고 한다. 대형 괘불과 벽화를 그리는 동안 극락교 아래 흐르는 내川는 색색깔의 물감이 단풍 빛깔과 나무빛깔과 함께 흘렀으리라. 선재동자처럼 언젠가 다시 훌쩍 그 백의관음을 만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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