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림원 茶 에세이

화림원 茶에세이

차보살 다림화 2009. 12. 28. 13:29

 

 

북두로 은하수를 길어 차를 달이다

화림원에서

 

 

 

 

1.  수류화개실

2.  추억의 오솔길 (J 선생님께)

3.  감춘

4.  해질녘이면

5.  차 한 잔의 의미

6.  차 한 잔의 사색

7.  차 예찬

8.  암향

9. 다림에서 다님을 안고

10.  초순선미 재즉감순

11. 몽정산촉아주산야

12.  모양 없는 차 그릇

13.  북두로 은하수를 길어

14.  영화로운 흰꽃 삼동을 뚫고

15.  염부단금 같은 꽃술

16.  2009년 4월을 보내며 (철감선사 차실림을 찾아)

17.  쟈스민과 할머니 냄새 (2009 쟈스민)

18.  명창정궤를 위하여

19.  사랑도 got 사랑을 , 동천무이암에서

20.  여름나무를 바라보며

21.  차례는 의식이 아니라 정성이지

22.  용봉문양 불망비 앞에서

23.  다심가도

24.  한국최고차수를 찾아서

25.  망년지우 (바람의 커튼 중에서)

26.  차 한 봉지를 보내며

26.  운흥사를 다녀와서

 

 

 






1.  수류화개실


 


 

 

   

 

으음! !!!

  ................

  시든 잎이  한 모금의 물을 만났을 때 이렇지 않을까?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면,

찻 자리만이라도 정갈하게 치우고 홀로 차를 우린다.  최소한의 다기라도 만지작거리며 찻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차가 우러나기를 잠시 무심(無心)으로 기다렸다가 한 모금 입안에 머금으면,

가슴 속 깊은 곳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 순간 그 맛을 무엇으로 가늠할 것인가.

 

    입안으로 녹아드는 향 맑은 기운이여! 

    빛깔과 향과 맛이 어우러진 이 절묘한 맛! 

  선인의 말을 빌어볼까. "이것은 감로입니다."  삼십여 년 마셔 오지만, 늘 처음 마시는 듯한

  그 오묘한 맛을 무어라 말할 수가 없음이다. "차는 푸른 비취빛이 으뜸인데 찻물 빛깔이

  람백(藍白)이면 좋고, 눈빛이 위요, 비취빛 물빛이 중간이며, 누른 물빛이 아래이다. 차를

  오묘하고 공교(工巧)히 달여, 옥 같은 차 얼음 같은 물빛, 잔에 담기는 절묘한  기예(技藝)여!"

  "맛이 달고 보드라우면 위이고, 쓰고 떫으면 아래이다." 차는 자연의 진향(眞香)이 있어, 이물질이

  들어가면 그 진성(眞性)을 잃는다는 것. 이런 표현들은 녹차(잎차)일 때 해당하는 말이다. 발효차일

  것 같으면 또 다른 빛깔과 맛과 감흥이 나올 것이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차를 마셔보니, 잎차라도 그 빛깔과 맛이 다 다르다. 차를 만든 시기에 따라서

만든 사람의 성정 따라서 혹은 차 우리는 기예에 의해서 그 빛깔과 맛과 향이 다 다르다. 그래도

역시나 그 맛은 고유한 차 맛이다. 첫 잔과 다음 차의 색향미가 다르다. 위의 표현대로라면 내 경험상

으로는 올 봄 차로 할 것 같으면 4월 27일이나 29일 만든 녹차, 새 순(일창 이기)으로만 딴 잎이

그 맛과 색깔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감히.

   제대로 된 차라면 선인이 그랬듯이, 첫 잔은 향으로 마시고 두 번째 잔은 맛으로 마시고 셋 이후는

약으로 마신다 했다. 첫 잔의 마지막 한 방울은 애첩도 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좀 거품이 든 표현이라

하겠지만, 좋은 차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더욱 귀한 한 방울이었을 것이다. 다관에 우려진

첫 잔의 마지막 한 방울이 잘 우려진 한 모금이 될 수도 있기에 그런 표현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한 젊은 청년이 법정스님을 찾아 와서 불쑥 '수류화개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스님도 불쑥, 네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라고 일러 주었다. 법정스님께서 오래 전에 조계산에 삼칸집을 짓고 거처

이름으로 지은 '수류화개실'은 중국 송대의 시인이며 화가인 황산곡의 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만리청천(萬里靑天)    구만리 푸른 하늘에

  운기우래(雲起雨來)    구름 일고 비내리네

  공산무인(空山無人)    빈 산에 사람 끊이니

  수류화개(水流花開)    물이 흐르고 꽃이 피더라.

 

  몇 자 안 되는 황산곡의 글귀에는 푸른 하늘과 구름과 비, 산과 사람과 물과 꽃이 들어있다.

갈봄여름 없이 꽃이 피는 자연의 신비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꽃이 될 수 있겠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성품을 갈고 닦아 좋은 특성으로 기르고 그것이 잠재력으로 응집되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생의 정점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 그만이 지닌 빛깔과 향기와 모양이 주위를

환하게 비출 것이다. 그의 특성대로 피어나야지 서양무궁화나 부용화가 우리 무궁화를 닮으려

하거나 살구꽃이나 벚꽃이 매화를 닮으려 한다면 부용화나 살구꽃에게는 비극일 뿐 아니라 둘레의

불행이 될 것이다. '수류화개실'이 어느 특정한 곳을 말함이었을까? 사람은 마땅히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 그 속뜰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 하셨다.

강물처럼 어디에도 갇히지 않고 영원히 흐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차 한 봉지를 보내며

 

 

 

이른 봄날

산이 푸르러지기 시작하면

그 산빛 우려내고 싶다

다신(茶神)이 부르는 듯

찾아간 그 차나무 숲

아! 내 사랑 같은 첫 차 싹

하늘을 찌를 듯한 정기

고 작은 창끝에 농축되었더라

일창이기, 격지만한, 참새 혀 만하다는

쬐그만 어린 찻잎을 한 잎 한 잎

따서 모으기를 한 나절

오체투지 하는 심정으로

하늘 아래 그 어느 것이 종일토록

나를 그리 몰입하게 하는 것이 > 또 있을까

가을이 오면 사랑이 익어가는

그 차 숲에서 소담한 차 꽃과

봄날부터 간직해온 사랑을 나누리라

 

옛날 다인들이 손수 귀하게 만든 차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차 벗에게 보내는

심정이 이랬을까.

차를 봉하며 그 내밀한 즐거움을

맛보네

(2007년 여름)

 

 

 

 

 

 

화실상봉수(花實相逢樹)

 

차나무에 꽃이 달린다.

차꽃은 가을에 피기 시작하여

겨울 눈 속에서도 핀다.

새로 피는 꽃은 봄부터 여름 가을까지

영글어 있다가 일년 만에 다시

새 꽃과 만난다.

오랜 기다림 끝에

 

향긋한 꽃내음은

매향 스민 차 향기 같고

소담스런 노란 술은

염부단금이라

 

 

화실상봉수,

열매가 새로 피는 동생 꽃과

같은 가지에서 만난다 하여.

 

일년을 영글어 새 꽃과 만나고야

떨어져 새로운 생명의 길을 떠난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쨍쨍한 햇살입니다.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여기 저기, 햇빛에  

부서지며 변덕스런 요술을 부립니다. 벌써 아침저녁으로 바람결이 서늘합니다. 태양은 안간힘을  

다하여 한 낮을 태웁니다. 지난 태풍에도 의연했던 생명의 결정들이 여물어 가는 소리에 숙연해지는  

이 가을 문턱입니다. 축축한 안개가 걷힌 숲 속에서도 카랑카랑한 새소리가 길게 창공을 가르네요.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결에서 그리움 한 줄기 스며 나옵니다. 언제나 정자나무 그늘 같았던  

선생님의 도장이었습니다. 선생님과 몇 잔의 차를 우리다 보면 복잡한 생활의 구정물도 맑게  

걸러져버렸지요. 

 

  중국에는 맑은 향기로 유명한 용정차가 있답니다. 그 중에서도 봄날 청명 전에 따는 차를 명전茗前 

용정차라 하여 최고품으로 여긴다더군요. 용정차의 원료가 춘분에서 곡우 전까지 딴 잎으로만 만드는  

것이랍니다. 옛날부터 가장 좋은 차의 원료는 차 싹 하나와 찻잎 하나인 일창일기라 합니다. 처음  

나오는 잎이 깃대에 나부끼는 깃발과 같다 하여 그렇게 말해 왔다고 합니다. 그 때를 놓치면 풀잎 

과도 같다 했습니다. 

 

  지난 가을에 차 꽃을 보러 갔을 때 차나무 씨앗을 얻어 왔습니다. 씨앗을 화분에 묻어 두고 햇빛  

드는 창가에 두었습니다. 겨울이 다 지나도록 소식을 알 수 없었어요. 햇빛이 창 밖으로 자리를  

옮길 무렵, 화분의 흙을 살짝 헤쳐 보았지요. 아! 그런데 차 씨앗이 푸른색으로 변해 있는 중간에,  

씨앗의 껍질이 터진 줄이 선명했습니다. 저는 얼른 흙을 가만히 덮고 햇빛 쪽에 두었습니다.  

"틀림없이 싹을 틔울 것이야."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연두색 산이 짙어 가는 어느 날,  

무심코 화분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토록 귀한 알창일기(一槍一棋)였습니다. 아니, 일창이기(一槍二棋)였습니다. 언제 솟았는지,  

가슴 밑에서부터 잔잔한 파문이 번졌습니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남몰래 깊이 음미하였습니다.  

가을의 차 꽃이 겨울을 지나 여름내 영글었던 씨앗이었습니다. 한 알의 씨앗이 가을 겨울을  

지나며 긴 어둠 속에서 숨통을 트기까지 거의 8개월 만이었습니다. 

 

  선생님, 생각나시는지요.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엊그제 같기만 합니다. 백련사의 초가을 밤을….  

어둠이 노을을 등지고 잰걸음으로 내려올 무렵에 절 입구에 도착하였지요. 밤의 요정이 시샘하는  

석양빛을 마시며 숨을 고르는 우리를 따뜻이 에워싸 준 메밀꽃 언덕은 얼마나 환상적인  

안식이었던지…. 산사에서 마시는 차의 풍미야말로 그 또한 으뜸 아니던가요. 검부러기 타는  

내음과 어우러진 차 맛은 묘한 향불을 피워내는 것 같았습니다. 때를 맞추어 L 선생이 부는  

대금소리의 향연에 우리들의 영혼들은 하나의 가락이 되어 꿈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산사의  

독경 소리에 위안 받던 수많은 영령들에게도 그 날 밤의 축제는 꿈결 같은 살풀이였을 거라고  

했었지요. 

 

  이곳 전주에서는 해마다 세계소리축제가 열립니다. 일찍이 우리 소리를 위한 작은 축제를  

마련하였던 선생님이었지요. 불현듯 '나왕 케촉'의 명상음악에 이끌려 갔던 경기전 안뜰이었습니다.  

나왕에서 받은 이미지는 처음 선생님을 만났을 때 받았던 그 느낌이었습니다. 영혼의 깊은 안식을  

주는…. 언젠가 인도에서 보내주었던 사진의 선생님과 너무 닮은 나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인상적인 밤이었지요. 

 

  언젠가 도장에 들어서는 저에게 "크리수나뮤르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계가 텅 빈 것  

같습니다." 했지요. 크리슈나므르티를 닮았던 선생님이 한국에 없는 수 년 동안, 한국이 텅 빈  

듯한 날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저도 창을 닦았지요. 그리고 선생님의 창을 통해서 엿보는  

세상이 아닌 저의 창으로 세상을 보게되었답니다.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를 오갔다던 그 오솔길 주변의 차나무 가지에는 지금쯤  

푸른 잎과 꽃과 열매가 동시에 달려 있겠지요? 연 전에 들렀던 백련사에 차 도구와 차를 파는  

찻집이 생긴 걸로 보아, 그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들고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메밀꽃 피는 언덕에 서서 먼 갯벌 바다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 곳은 주차장으로 포장되어  

있었답니다. 

 

  푸르렀던 날들의 사연들을 머금고 있었던 차 씨앗이었습니다. 긴 잠을 자는 동안에도 생명의  

기운은 최후의 힘을 다듬어 농축된 숨결을 고르며 기다렸겠지요. 그 씨앗 한 알의 숨과 나의  

숨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씨앗이 터질 때가 되면, 식물은 갑자기 낱낱으로 흩어집니다. 그 순간  

씨앗은 껍질 속에 갇혀 그렇게 오랫동안 좁게 누워 있던 상태가 파괴된다고 느꼈을까요? 분명  

그랬을 거라 생각돼요. 그러나 이내 새 세상을 얻는다는 사실도 알았으리라 믿습니다.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그 차 씨앗이 말해줍니다. 우리와 죽음과의 관계도 그러할진대, 지금까지  

삶을 가능하게 했던 모든 조건들이 사라진다 해도, 그것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임을  

어찌 아니 헤아릴 수 있겠는지요. 

 

  가을 하늘이 담긴 차 한 잔을 마음으로 올리며 이만 줄입니다. 

 

°지두 크리슈나므르티 - 인도의 철학자, 사상가. '자기로부터의 혁명' 외 다수의 저술이 있음.  

20세기 예수라 칭해지기도 했음. 

 

 

 

   

 

 

 

 

 

 

 

 

 

 

 

 

 

 

 

"저의 항해가 드디어 제 힘의 

  마지막 한계선인 끝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나이다. 

  제 앞의 길은 막혔고 

  양식은 떨어졌고, 고요한 암실에서 

  몸을 피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나이다. 

  하지만 임의 뜻은 이 몸에 무한히 살아 

  있음을 깨닫나이다. 그리고 

  낡은 말들이 입술에서 사라지자 새로운 

  멜로디가 가슴에서 솟아나나이다. 

  옛 길 자국들이 쓰러진 곳에 

  새로운 나라가 놀라운 모습으로 나타나나이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키탄잘리 37 송) 

 

 

 

 2. 추억의 오솔길  (J선생님께)

 

 

 

 

  오랜만에 맞이하는 쨍쨍한 햇살입니다.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여기 저기, 햇빛에  

부서지며 변덕스런 요술을 부립니다. 벌써 아침저녁으로 바람결이 서늘합니다. 태양은 안간힘을  

다하여 한 낮을 태웁니다. 지난 태풍에도 의연했던 생명의 결정들이 여물어 가는 소리에 숙연해지는  

이 가을 문턱입니다. 축축한 안개가 걷힌 숲 속에서도 카랑카랑한 새소리가 길게 창공을 가르네요.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결에서 그리움 한 줄기 스며 나옵니다. 언제나 정자나무 그늘 같았던  

선생님의 도장이었습니다. 선생님과 몇 잔의 차를 우리다 보면 복잡한 생활의 구정물도 맑게  

걸러져버렸지요. 

 

  중국에는 맑은 향기로 유명한 용정차가 있답니다. 그 중에서도 봄날 청명 전에 따는 차를 명전茗前 

용정차라 하여 최고품으로 여긴다더군요. 용정차의 원료가 춘분에서 곡우 전까지 딴 잎으로만 만드는  

것이랍니다. 옛날부터 가장 좋은 차의 원료는 차 싹 하나와 찻잎 하나인 일창일기라 합니다. 처음  

나오는 잎이 깃대에 나부끼는 깃발과 같다 하여 그렇게 말해 왔다고 합니다. 그 때를 놓치면 풀잎 

과도 같다 했습니다. 

 

  지난 가을에 차 꽃을 보러 갔을 때 차나무 씨앗을 얻어 왔습니다. 씨앗을 화분에 묻어 두고 햇빛  

드는 창가에 두었습니다. 겨울이 다 지나도록 소식을 알 수 없었어요. 햇빛이 창 밖으로 자리를  

옮길 무렵, 화분의 흙을 살짝 헤쳐 보았지요. 아! 그런데 차 씨앗이 푸른색으로 변해 있는 중간에,  

씨앗의 껍질이 터진 줄이 선명했습니다. 저는 얼른 흙을 가만히 덮고 햇빛 쪽에 두었습니다.  

"틀림없이 싹을 틔울 것이야."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연두색 산이 짙어 가는 어느 날,  

무심코 화분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토록 귀한 알창일기(一槍一棋)였습니다. 아니, 일창이기(一槍二棋)였습니다. 언제 솟았는지,  

가슴 밑에서부터 잔잔한 파문이 번졌습니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남몰래 깊이 음미하였습니다.  

가을의 차 꽃이 겨울을 지나 여름내 영글었던 씨앗이었습니다. 한 알의 씨앗이 가을 겨울을  

지나며 긴 어둠 속에서 숨통을 트기까지 거의 8개월 만이었습니다. 

 

  선생님, 생각나시는지요.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엊그제 같기만 합니다. 백련사의 초가을 밤을….  

어둠이 노을을 등지고 잰걸음으로 내려올 무렵에 절 입구에 도착하였지요. 밤의 요정이 시샘하는  

석양빛을 마시며 숨을 고르는 우리를 따뜻이 에워싸 준 메밀꽃 언덕은 얼마나 환상적인  

안식이었던지…. 산사에서 마시는 차의 풍미야말로 그 또한 으뜸 아니던가요. 검부러기 타는  

내음과 어우러진 차 맛은 묘한 향불을 피워내는 것 같았습니다. 때를 맞추어 L 선생이 부는  

대금소리의 향연에 우리들의 영혼들은 하나의 가락이 되어 꿈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산사의  

독경 소리에 위안 받던 수많은 영령들에게도 그 날 밤의 축제는 꿈결 같은 살풀이였을 거라고  

했었지요. 

 

  이곳 전주에서는 해마다 세계소리축제가 열립니다. 일찍이 우리 소리를 위한 작은 축제를  

마련하였던 선생님이었지요. 불현듯 '나왕 케촉'의 명상음악에 이끌려 갔던 경기전 안뜰이었습니다.  

나왕에서 받은 이미지는 처음 선생님을 만났을 때 받았던 그 느낌이었습니다. 영혼의 깊은 안식을  

주는…. 언젠가 인도에서 보내주었던 사진의 선생님과 너무 닮은 나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인상적인 밤이었지요. 

 

  언젠가 도장에 들어서는 저에게 "크리수나뮤르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계가 텅 빈 것  

같습니다." 했지요. 크리슈나므르티를 닮았던 선생님이 한국에 없는 수 년 동안, 한국이 텅 빈  

듯한 날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저도 창을 닦았지요. 그리고 선생님의 창을 통해서 엿보는  

세상이 아닌 저의 창으로 세상을 보게되었답니다.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를 오갔다던 그 오솔길 주변의 차나무 가지에는 지금쯤  

푸른 잎과 꽃과 열매가 동시에 달려 있겠지요? 연 전에 들렀던 백련사에 차 도구와 차를 파는  

찻집이 생긴 걸로 보아, 그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들고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메밀꽃 피는 언덕에 서서 먼 갯벌 바다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 곳은 주차장으로 포장되어  

있었답니다. 

 

  푸르렀던 날들의 사연들을 머금고 있었던 차 씨앗이었습니다. 긴 잠을 자는 동안에도 생명의  

기운은 최후의 힘을 다듬어 농축된 숨결을 고르며 기다렸겠지요. 그 씨앗 한 알의 숨과 나의  

숨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씨앗이 터질 때가 되면, 식물은 갑자기 낱낱으로 흩어집니다. 그 순간  

씨앗은 껍질 속에 갇혀 그렇게 오랫동안 좁게 누워 있던 상태가 파괴된다고 느꼈을까요? 분명  

그랬을 거라 생각돼요. 그러나 이내 새 세상을 얻는다는 사실도 알았으리라 믿습니다.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그 차 씨앗이 말해줍니다. 우리와 죽음과의 관계도 그러할진대, 지금까지  

삶을 가능하게 했던 모든 조건들이 사라진다 해도, 그것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임을  

어찌 아니 헤아릴 수 있겠는지요. 

 

  가을 하늘이 담긴 차 한 잔을 마음으로 올리며 이만 줄입니다. 

 

°지두 크리슈나므르티 - 인도의 철학자, 사상가. '자기로부터의 혁명' 외 다수의 저술이 있음.  

20세기 예수라 칭해지기도 했음. 

 

 

 

 

 

 

 

 

  선암사 담장의 고매(古梅) 굵은 마디 끝에서는 봄 향기가 터지고 있었다. 세찬 꽃샘바람이

순천만 갈대 사이를 헤집고 휘돌아 나와 매화 가지에 닿으면 땅 밑에서부터 춘정이 꿈틀댄다.

저절로 오고 있는 봄을 미리 내려가 마중하는 성급한 심사를 누가 탓할 것인가.

 

"정좌하여 차를 반쯤 마시니 향기는 그대로인데 묘한 작용 일어나며,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홀로 피네."

추사 김정희의 茶詩가 떠오른다. 홀로 마시는 차를 왜 신神격으로 비유했는지 알만 하다.

봄맞이 하려 온 천지를 헤매다 돌아오니 뜰 한켠에 매화꽃이 피었더라는 옛사람 되어, 봄 내음

찻잔에 담고 나 또한 홀로 정좌하여 차를 반쯤 마시자니 그 맛에 묘한 감흥이 일렁인다. 얼굴을

들고 보니 매화꽃병에서 달보드레한 향기가 차 맛을 돋구워 차 맛인지 매화 맛인지 묘하기만

하다. 매화는 오래된 가지일수록 그 꽃이 맑고 고아하다. 향기를 풍기고 있는 매화에게 주변을

깨끗이 치우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꽃가지 뒤로 둥근 거울을 세워두니 거울에 비친

꽃 그림자는 달빛 어린 창가에 드리운 매화 가지를 연상케 하는 흥겨움을 준다.

사군자 중의 매화를 벗에 비유하여 봄에 피는 매화를 고우(오랜 벗), 섣달에 피는 매화를

기우(진기한 벗)라 하였다. 겨우내 내 벗님께서는 악양 매화 밭의 꽃가지를 꺾어 부처님께

헌화한 후 그 꽃을 따서 매화차를 나누어 주시니 찬 겨울만은 아니었다. 오랜 벗과 함께 한

겨울이 훈훈했다.

 

  탱글탱글한 꽃봉오리가 따뜻한 기운을 만나니 한 잎 한 잎망울을 터트린다. 매화 가지에서

풍겨오는 달작지근한 향기에 젖어 있자니, 옛 선비들의 매화 사랑이 가슴 속에서 골을 이룬다.

  퇴계 선생은 얼마나 매화를 사랑하였으면 평생 동안 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지었고,

91수의 매화시를 집대성한 ‘매화시첩(梅花詩帖)’ 이란 시집까지 냈을까. 그런 퇴계가 매화보다

맑고 매화보다 향기로운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무심하였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시정이

넘치는 퇴계였으니 명기(名妓) 두향과의 사랑은 사실었으리라. 사랑하는 여인을 보듯 매화

사랑은 더욱 깊었을지 모를 일이다. 매화 피는 봄날 아직 바람은 찬데 단양 호수 가 언덕에

올라 노을을 바라보며 달뜨기를 기다렸으리라.

 

“뜨락을 거닐자니 달이 사람을 따라오고 매화꽃 언저리를 몇 차례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깃에 향내 머물고 그림자는 몸에 가득해라.”

그런 시귀를 짓지는 못하여도 그 마음처럼 나 또한 매화 주변을 몇 번이나 맴돌고 찻잔을

들었다 놓았다 를 몇 번이나 하는 고….

 

그의 감춘(感春)이란 시를 보면 그보다 더 화려한 고향의 봄을 어디에서 느낄 수가

있겠는가 싶다.

 

    그윽한 섬돌엔 여린 풀이 돋아나고

    향기로운 동산에는 꽃나무들 흩어 있네.

    비 내리자 살구꽃 드물고, 밤 들자 복사꽃 활짝 피었어라.

    붉은 앵두꽃은 향기로운 눈이 되어 나부끼고

    하얀 오얏 꽃은 은빛바다가 들끓는 듯.

 

마른 듯했던 맨 가지에 새 잎 피어나고 색색의 꽃봉오리들이 터져 나올 날들이 그려진다.

찻잔에 띄운 매화 송이 마주하니 설레는 이 마음 아실 이, 매화뿐인가 하노라.

 

(2005년 3월 23일)

 

 

 

 

3. 감춘

 

 

  선암사 담장의 고매(古梅) 굵은 마디 끝에서는 봄 향기가 터지고 있었다. 세찬 꽃샘바람이

순천만 갈대 사이를 헤집고 휘돌아 나와 매화 가지에 닿으면 땅 밑에서부터 춘정이 꿈틀댄다.

저절로 오고 있는 봄을 미리 내려가 마중하는 성급한 심사를 누가 탓할 것인가.

 

"정좌하여 차를 반쯤 마시니 향기는 그대로인데 묘한 작용 일어나며,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홀로 피네."

추사 김정희의 茶詩가 떠오른다. 홀로 마시는 차를 왜 신神격으로 비유했는지 알만 하다.

봄맞이 하려 온 천지를 헤매다 돌아오니 뜰 한켠에 매화꽃이 피었더라는 옛사람 되어, 봄 내음

찻잔에 담고 나 또한 홀로 정좌하여 차를 반쯤 마시자니 그 맛에 묘한 감흥이 일렁인다. 얼굴을

들고 보니 매화꽃병에서 달보드레한 향기가 차 맛을 돋구워 차 맛인지 매화 맛인지 묘하기만

하다. 매화는 오래된 가지일수록 그 꽃이 맑고 고아하다. 향기를 풍기고 있는 매화에게 주변을

깨끗이 치우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꽃가지 뒤로 둥근 거울을 세워두니 거울에 비친

꽃 그림자는 달빛 어린 창가에 드리운 매화 가지를 연상케 하는 흥겨움을 준다.

사군자 중의 매화를 벗에 비유하여 봄에 피는 매화를 고우(오랜 벗), 섣달에 피는 매화를

기우(진기한 벗)라 하였다. 겨우내 내 벗님께서는 악양 매화 밭의 꽃가지를 꺾어 부처님께

헌화한 후 그 꽃을 따서 매화차를 나누어 주시니 찬 겨울만은 아니었다. 오랜 벗과 함께 한

겨울이 훈훈했다.

 

  탱글탱글한 꽃봉오리가 따뜻한 기운을 만나니 한 잎 한 잎망울을 터트린다. 매화 가지에서

풍겨오는 달작지근한 향기에 젖어 있자니, 옛 선비들의 매화 사랑이 가슴 속에서 골을 이룬다.

  퇴계 선생은 얼마나 매화를 사랑하였으면 평생 동안 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지었고,

91수의 매화시를 집대성한 ‘매화시첩(梅花詩帖)’ 이란 시집까지 냈을까. 그런 퇴계가 매화보다

맑고 매화보다 향기로운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무심하였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시정이

넘치는 퇴계였으니 명기(名妓) 두향과의 사랑은 사실었으리라. 사랑하는 여인을 보듯 매화

사랑은 더욱 깊었을지 모를 일이다. 매화 피는 봄날 아직 바람은 찬데 단양 호수 가 언덕에

올라 노을을 바라보며 달뜨기를 기다렸으리라.

 

“뜨락을 거닐자니 달이 사람을 따라오고 매화꽃 언저리를 몇 차례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깃에 향내 머물고 그림자는 몸에 가득해라.”

그런 시귀를 짓지는 못하여도 그 마음처럼 나 또한 매화 주변을 몇 번이나 맴돌고 찻잔을

들었다 놓았다 를 몇 번이나 하는 고….

 

그의 감춘(感春)이란 시를 보면 그보다 더 화려한 고향의 봄을 어디에서 느낄 수가

있겠는가 싶다.

 

    그윽한 섬돌엔 여린 풀이 돋아나고

    향기로운 동산에는 꽃나무들 흩어 있네.

    비 내리자 살구꽃 드물고, 밤 들자 복사꽃 활짝 피었어라.

    붉은 앵두꽃은 향기로운 눈이 되어 나부끼고

    하얀 오얏 꽃은 은빛바다가 들끓는 듯.

 

마른 듯했던 맨 가지에 새 잎 피어나고 색색의 꽃봉오리들이 터져 나올 날들이 그려진다.

찻잔에 띄운 매화 송이 마주하니 설레는 이 마음 아실 이, 매화뿐인가 하노라.

 

(2005년 3월 23일)

 

 

 

 

 

 

 

   어느 때인가 구멍 난 내면의 동공에 바람 소리 일었다. 음악의 허무를 내던져버리고 새소리를

채집하러 세계를 돌아다녔던 어느 작곡가처럼, 새 세상을 찾은 성프란시스코처럼, 밭으로 들녘으로

쏘다녔던 때가 있었다. 호미를 든 채 해 저무는 밭두렁에 앉아 지치도록 새소리에 밤이 오는 것도

잊은 적이 있었다.

 

   내던졌던 선율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길바닥에 주저앉듯 멈추어서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에

취하는 일이 많아졌다. 흙 속에 파묻히던 그런 날들도 추억이 되어 가슴에 이는 그리움에 젖어

길을 잃는다.

 

"  “차 한 잔 나누며 한담(閑談)이나 나누어요." 찻집에서 걸려온 후배의 전화 따라 길을 나섰다.

단풍 들어가는 창밖의 풍경을 보려면 해지기 전에 오라고 한다.

찻집으로 가는 도중, 저만치에 한벽루가 보이는 천변에서 발을 머추고 만다. 중바위산 아래서부터

펼쳐진 정경 밑으로 물억새가 숲을 이루었다. 바람부는 쪽으로 일제히 머리카락 휘날리는 억새가

깊어가는 가을을 흐느끼는 듯 하다. 때마침 명연주시간, 샤르쟈드 교향곡이 어울려 먼 나라의 전설을

아련히 떠올리게 하고 강가에서 추억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더미를 바라보며

음악이 끝나도록 그대로 있었다. 어제 해남에서 걸려온 숙이의 말을 떠올렸다. "언니,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겹다우." "해남에서 군산까지 친구 배웅하러 트럭을 운전하고 갔는데, 차도의 가을

풍경이 정말 좋았어. 내 영혼과 핸들만 있는 것 같았어. 언니를 못 만나고 온 것이 아쉬웠어."

그랬다. 나도 사월이 오고 있는 어느 날 그런 느낌으로 그 애에게 그런 전화를 했었다. 누군가와

그런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도 축복이었다.

 

   실내에 앉아 그 곳만큼 바깥 풍경이 좋은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산수화 자체이다. 천연의 화가가 철따라 색깔을 바꾸어 그림을 그려주는 집. 매화 차 향기에

실린 나왕게촉의 피리소리에 감싸여 가을 산수화의 감상에 젖었다. 그미는 결혼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통하여, 원불교 교리에 따라 인생을 참구하고 있다. 수행을 하는

정려다운 정갈한 품위가 베어졌다. 그녀는 왜 사람들은 가을이면 외롭고 쓸쓸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라 했다. 봄이면 새싹이 터서 좋고, 여름이면 뜨거운 태양과 소낙비가 있어

좋고, 가을은 단풍들어 좋고, 겨울이면 눈이 와서 좋을 뿐이라 했다. 그래서 난 그랬다. 이

좋은 시절, 좋으니까 그립고 그리우니 사랑이 샘솟고 그 사랑을 나누어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미는 오늘에야 그 해답을 얻는 것 같다 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그렇지만 자신은 분별심이 아직 많아서 혼자 있어 더 좋단다. 여행을 가도,

혼자가 좋다. 아니면 여럿이 가는 것이 더욱 좋다. 그 여럿 가운데서 혼자의 세계를 즐길

수 있단다. 둘이나 셋이라면 호흡이 일치해야 하니까. 같이 할 수 없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는 말인 듯했다.

   먼 후배 하나가 찾아와서 울적함을 토한다. 이 곳에 와서 차 한 잔 마시고 가면 그래도

격정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이혼을 하고 아이와 살며 꽃을 파는 여자.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는 주변의 눈총 때문에 자주 흔들린다고. 아직 청춘인데 희망이 깔려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해주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면 같이 사랑을 나눌 자가 찾아올 것이라고 했더니,

"어머, 정말 그렇네요. 난 자신이 싫거든요. 비결이 그것인가 봐요."

 

   어느 사이 서쪽 창으로 저녁 해가 완산칠봉 줄기를 넘고 있었다. '저, 노을 좀 봐!."

"여기는 저녁 해가 셋이네!" 난 찻잔에 노을을 담아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그녀는 동쪽

창안의 노을을 보면 되었다. 달이 세 개라는 호수에서처럼.

 

   한 꺼풀씩 옷을 벗는 태양이 서산을 넘으면 서녘 평야를 따라 그 바닷가에 닿으리라.

그날 구름도 사라져 가고 코스모스가 얼비치는 하늘 아래 아직도 푸른 산언저리의 억새풀이

무더기무더기 추억의 길을 안내했었지. 절묘하게 해질녘에 맞추어 당도한 바닷가. 금빛 파도가

물결치고 모래사장이 탄탄한 운동장 같아 카 인 드라이브로 파도 속으로 질주했다. 갈매기가

발 앞의 물가에 앉아 쫑긋거리는 걸음걸이로 우리 앞을 인도하여 행복이 잔물결처럼 밀려들었다.

그럴 때 친구는 또 눈물이 난다고 말할까. 차라리 가슴으로 느끼고 눈빛으로 언어를 삼켰다.

갈매기들이 발끝으로 파도를 차고 날개 짓도 유연하게 서로 소리 내어 알리며 엇갈려 춤을

추었다. 새들의 날개에 실려 같이 날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발갛게 맨몸이 된 태양은 마침내

드넓은 바다 속으로 숨어들었다. 바다의 표면에 스러지듯 안겨드는 석양의 황홀지경에 호흡이

멎고 오히려 눈자위가 흐려졌다.

 

  한없이 풀어 놓은 파도의 가슴에 몸을 숨긴 태양은 지금 행복에 잠겨 있을까. 송림으로 둘러

처진 바다가는 한여름의 열정이 쓸고 간 허전함 가운데 수많은 이야기들로 차 있는 것 같았다.

수평선 위에 그려진 섬들로 더욱 아름다운 바다. 방파제 끝, 등대불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깜박깜박 눈짓을 했다. 마치 떠나는 자들에게 약속의 빛을 던져주는 것 같았다. 다시 오라는

말인지 그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말라는 뜻인지. 한 줄기 빛나는 등대불빛이 등 뒤를 쓰다듬는

듯 어떤 위안 같이 안온했다. 날으는 너울처럼 홍시감빛을 풀어 놓은 하늘이 돌아 나오는 차창을

적셨다. 절정의 순간의 떨림을 어루만지듯 해질녘의 음악은 깊어가는 가을밤을 태초의 사랑 빛으로

물들게 하여 갈 길을 헤매게 한다.

 

   스르르 찾아든 어둠처럼 피리소리가 가슴에 파고 든 사이 우리들 한담과 추억도, 찻잔의 석양도

영원 속으로 녹아나 버렸다. 퇴근길에 길을 잃는 사람들에게 길을 찾아주는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다시 내 앞의 선명한 길을 찾는다.

 

 

 

 

4.  해질녘이면

 

 

 

   어느 때인가 구멍 난 내면의 동공에 바람 소리 일었다. 음악의 허무를 내던져버리고 새소리를

채집하러 세계를 돌아다녔던 어느 작곡가처럼, 새 세상을 찾은 성프란시스코처럼, 밭으로 들녘으로

쏘다녔던 때가 있었다. 호미를 든 채 해 저무는 밭두렁에 앉아 지치도록 새소리에 밤이 오는 것도

잊은 적이 있었다.

 

   내던졌던 선율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길바닥에 주저앉듯 멈추어서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에

취하는 일이 많아졌다. 흙 속에 파묻히던 그런 날들도 추억이 되어 가슴에 이는 그리움에 젖어

길을 잃는다.

 

"  “차 한 잔 나누며 한담(閑談)이나 나누어요." 찻집에서 걸려온 후배의 전화 따라 길을 나섰다.

단풍 들어가는 창밖의 풍경을 보려면 해지기 전에 오라고 한다.

찻집으로 가는 도중, 저만치에 한벽루가 보이는 천변에서 발을 머추고 만다. 중바위산 아래서부터

펼쳐진 정경 밑으로 물억새가 숲을 이루었다. 바람부는 쪽으로 일제히 머리카락 휘날리는 억새가

깊어가는 가을을 흐느끼는 듯 하다. 때마침 명연주시간, 샤르쟈드 교향곡이 어울려 먼 나라의 전설을

아련히 떠올리게 하고 강가에서 추억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더미를 바라보며

음악이 끝나도록 그대로 있었다. 어제 해남에서 걸려온 숙이의 말을 떠올렸다. "언니,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겹다우." "해남에서 군산까지 친구 배웅하러 트럭을 운전하고 갔는데, 차도의 가을

풍경이 정말 좋았어. 내 영혼과 핸들만 있는 것 같았어. 언니를 못 만나고 온 것이 아쉬웠어."

그랬다. 나도 사월이 오고 있는 어느 날 그런 느낌으로 그 애에게 그런 전화를 했었다. 누군가와

그런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도 축복이었다.

 

   실내에 앉아 그 곳만큼 바깥 풍경이 좋은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산수화 자체이다. 천연의 화가가 철따라 색깔을 바꾸어 그림을 그려주는 집. 매화 차 향기에

실린 나왕게촉의 피리소리에 감싸여 가을 산수화의 감상에 젖었다. 그미는 결혼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통하여, 원불교 교리에 따라 인생을 참구하고 있다. 수행을 하는

정려다운 정갈한 품위가 베어졌다. 그녀는 왜 사람들은 가을이면 외롭고 쓸쓸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라 했다. 봄이면 새싹이 터서 좋고, 여름이면 뜨거운 태양과 소낙비가 있어

좋고, 가을은 단풍들어 좋고, 겨울이면 눈이 와서 좋을 뿐이라 했다. 그래서 난 그랬다. 이

좋은 시절, 좋으니까 그립고 그리우니 사랑이 샘솟고 그 사랑을 나누어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미는 오늘에야 그 해답을 얻는 것 같다 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그렇지만 자신은 분별심이 아직 많아서 혼자 있어 더 좋단다. 여행을 가도,

혼자가 좋다. 아니면 여럿이 가는 것이 더욱 좋다. 그 여럿 가운데서 혼자의 세계를 즐길

수 있단다. 둘이나 셋이라면 호흡이 일치해야 하니까. 같이 할 수 없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는 말인 듯했다.

   먼 후배 하나가 찾아와서 울적함을 토한다. 이 곳에 와서 차 한 잔 마시고 가면 그래도

격정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이혼을 하고 아이와 살며 꽃을 파는 여자.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는 주변의 눈총 때문에 자주 흔들린다고. 아직 청춘인데 희망이 깔려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해주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면 같이 사랑을 나눌 자가 찾아올 것이라고 했더니,

"어머, 정말 그렇네요. 난 자신이 싫거든요. 비결이 그것인가 봐요."

 

   어느 사이 서쪽 창으로 저녁 해가 완산칠봉 줄기를 넘고 있었다. '저, 노을 좀 봐!."

"여기는 저녁 해가 셋이네!" 난 찻잔에 노을을 담아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그녀는 동쪽

창안의 노을을 보면 되었다. 달이 세 개라는 호수에서처럼.

 

   한 꺼풀씩 옷을 벗는 태양이 서산을 넘으면 서녘 평야를 따라 그 바닷가에 닿으리라.

그날 구름도 사라져 가고 코스모스가 얼비치는 하늘 아래 아직도 푸른 산언저리의 억새풀이

무더기무더기 추억의 길을 안내했었지. 절묘하게 해질녘에 맞추어 당도한 바닷가. 금빛 파도가

물결치고 모래사장이 탄탄한 운동장 같아 카 인 드라이브로 파도 속으로 질주했다. 갈매기가

발 앞의 물가에 앉아 쫑긋거리는 걸음걸이로 우리 앞을 인도하여 행복이 잔물결처럼 밀려들었다.

그럴 때 친구는 또 눈물이 난다고 말할까. 차라리 가슴으로 느끼고 눈빛으로 언어를 삼켰다.

갈매기들이 발끝으로 파도를 차고 날개 짓도 유연하게 서로 소리 내어 알리며 엇갈려 춤을

추었다. 새들의 날개에 실려 같이 날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발갛게 맨몸이 된 태양은 마침내

드넓은 바다 속으로 숨어들었다. 바다의 표면에 스러지듯 안겨드는 석양의 황홀지경에 호흡이

멎고 오히려 눈자위가 흐려졌다.

 

  한없이 풀어 놓은 파도의 가슴에 몸을 숨긴 태양은 지금 행복에 잠겨 있을까. 송림으로 둘러

처진 바다가는 한여름의 열정이 쓸고 간 허전함 가운데 수많은 이야기들로 차 있는 것 같았다.

수평선 위에 그려진 섬들로 더욱 아름다운 바다. 방파제 끝, 등대불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깜박깜박 눈짓을 했다. 마치 떠나는 자들에게 약속의 빛을 던져주는 것 같았다. 다시 오라는

말인지 그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말라는 뜻인지. 한 줄기 빛나는 등대불빛이 등 뒤를 쓰다듬는

듯 어떤 위안 같이 안온했다. 날으는 너울처럼 홍시감빛을 풀어 놓은 하늘이 돌아 나오는 차창을

적셨다. 절정의 순간의 떨림을 어루만지듯 해질녘의 음악은 깊어가는 가을밤을 태초의 사랑 빛으로

물들게 하여 갈 길을 헤매게 한다.

 

   스르르 찾아든 어둠처럼 피리소리가 가슴에 파고 든 사이 우리들 한담과 추억도, 찻잔의 석양도

영원 속으로 녹아나 버렸다. 퇴근길에 길을 잃는 사람들에게 길을 찾아주는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다시 내 앞의 선명한 길을 찾는다.

 

 

 

 

 

 

 

차(茶) 한 잔의 의미

 

 

 

  분주한 가운데 한가로운 오후 한 때를 마련하여 홀로 차 한 모금 입안에 머금고 창 밖의 만발한

복사꽃 언덕을 바라본다. 이런 화창한 봄날 정성 들여 만든 햇차 맛을 즐기기 위해서다.

  매화 꽃잎을 따다 찻잔에 띄웠다는 옛 다인(茶人)들의 풍류가 생각난다. 茶라 함은 차나무 잎으로만

만든 고유의 정통 차를 말한다. 차(茶)에 반하여 차를 생활화하고 평소 다례(茶禮)를 보급하는 일을

좋아서 해오는 터이지만 날이 갈수록 두렵기조차 하는 요즈음이다. 차 생활은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덕목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절실히 느껴진다.

  중학 2학년인 내 딸아이 친구 다섯 명이 격주로 토요일 오후에 우리 집으로 다례(茶禮)실습을

하러 온다. 열성이 대단하고 너무 좋아한다. 손수 자신의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요즘 아이들이기에

직접 해 본다는 것이 즐거움인 것 같다. 나도 이 날은 그들을 지켜봐 주며 같이 오붓한 차의 아취를

즐기기도 한다.

  관념의 때가 찌든 어른들은 선뜻 차 생활을 시작하지 못한다. 아직은 초롱한 눈망울을 지닌

아이들이기에 이 혼탁한 사회에서 몸과 마음을 가꾸고 우정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차(茶)를

같이 하는 이 시간의 의미를 먼 훗날 그들이 깨닫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처음에는 도자기 그릇을 앞에 두고 망설이기도 하고 부끄럽고 쑥스러워 했다. 차 한 잔 마시는

고요한 여백도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바쁜 현대 생활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초점을 잃어가기도 쉽다. 이런 때일수록 차 생활이 필요하다. 삶을 아름답게 창조해내고,

인생의 내용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길이며, 조화와 균형을 터득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게

바로 차 생활이다. 차 한 잔을 온전히 마시기 위해서는 일 년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아니, 평생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차 잎을 봄철에 정갈하게 따서 만들고 잘 보관하여 눈서리 내리는 겨울까지 내내 따뜻이

우려 마신다. 물을 붓고 끓이며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성찰한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갈등의 요소들을 해소하며 안정을 찾는다. 다관에 물과 차를 넣고 알맞게 농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의 여유는, 영원을 향해 마음이 열려있는, 사랑이 머무는, 축복의 순간이기도 하다.

  차 한 잔을 마신다는 것은 기호음료의 물질적 개념만은 아니다. 茶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우려내는 전 과정, 그 분위기 전체를 마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목적을 위한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한다.

  차를 마실 때 색, 향, 미를 잘 음미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몸과 의식이 분리되지 않고

이 때 이 순간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순간 목전의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집중력을 키우기도

한다. 색향미가 잘 조화된 차 맛을 내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차를 행하여 가는 동안 자신의 삶을

조화롭게 꾸려 갈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진정 정갈한 차 맛과 차향처럼 나의 지닌 맛이 그리되어 가는지 부끄러운 마음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마음속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차나무를 키워 갈 것이다.  (1988년 5월 3일 전북일보)

 

 

 

5.   차(茶) 한 잔의 의미

 

 

 

 

 

  분주한 가운데 한가로운 오후 한 때를 마련하여 홀로 차 한 모금 입안에 머금고 창 밖의 만발한

복사꽃 언덕을 바라본다. 이런 화창한 봄날 정성 들여 만든 햇차 맛을 즐기기 위해서다.

  매화 꽃잎을 따다 찻잔에 띄웠다는 옛 다인(茶人)들의 풍류가 생각난다. 茶라 함은 차나무 잎으로만

만든 고유의 정통 차를 말한다. 차(茶)에 반하여 차를 생활화하고 평소 다례(茶禮)를 보급하는 일을

좋아서 해오는 터이지만 날이 갈수록 두렵기조차 하는 요즈음이다. 차 생활은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덕목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절실히 느껴진다.

  중학 2학년인 내 딸아이 친구 다섯 명이 격주로 토요일 오후에 우리 집으로 다례(茶禮)실습을

하러 온다. 열성이 대단하고 너무 좋아한다. 손수 자신의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요즘 아이들이기에

직접 해 본다는 것이 즐거움인 것 같다. 나도 이 날은 그들을 지켜봐 주며 같이 오붓한 차의 아취를

즐기기도 한다.

  관념의 때가 찌든 어른들은 선뜻 차 생활을 시작하지 못한다. 아직은 초롱한 눈망울을 지닌

아이들이기에 이 혼탁한 사회에서 몸과 마음을 가꾸고 우정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차(茶)를

같이 하는 이 시간의 의미를 먼 훗날 그들이 깨닫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처음에는 도자기 그릇을 앞에 두고 망설이기도 하고 부끄럽고 쑥스러워 했다. 차 한 잔 마시는

고요한 여백도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바쁜 현대 생활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초점을 잃어가기도 쉽다. 이런 때일수록 차 생활이 필요하다. 삶을 아름답게 창조해내고,

인생의 내용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길이며, 조화와 균형을 터득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게

바로 차 생활이다. 차 한 잔을 온전히 마시기 위해서는 일 년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아니, 평생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차 잎을 봄철에 정갈하게 따서 만들고 잘 보관하여 눈서리 내리는 겨울까지 내내 따뜻이

우려 마신다. 물을 붓고 끓이며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성찰한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갈등의 요소들을 해소하며 안정을 찾는다. 다관에 물과 차를 넣고 알맞게 농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의 여유는, 영원을 향해 마음이 열려있는, 사랑이 머무는, 축복의 순간이기도 하다.

  차 한 잔을 마신다는 것은 기호음료의 물질적 개념만은 아니다. 茶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우려내는 전 과정, 그 분위기 전체를 마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목적을 위한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한다.

  차를 마실 때 색, 향, 미를 잘 음미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몸과 의식이 분리되지 않고

이 때 이 순간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순간 목전의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집중력을 키우기도

한다. 색향미가 잘 조화된 차 맛을 내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차를 행하여 가는 동안 자신의 삶을

조화롭게 꾸려 갈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진정 정갈한 차 맛과 차향처럼 나의 지닌 맛이 그리되어 가는지 부끄러운 마음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마음속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차나무를 키워 갈 것이다.  (1988년 5월 3일 전북일보)

 

 

 

차(茶) 한 잔의 의미

 

 

 

  분주한 가운데 한가로운 오후 한 때를 마련하여 홀로 차 한 모금 입안에 머금고 창 밖의 만발한

복사꽃 언덕을 바라본다. 이런 화창한 봄날 정성 들여 만든 햇차 맛을 즐기기 위해서다.

  매화 꽃잎을 따다 찻잔에 띄웠다는 옛 다인(茶人)들의 풍류가 생각난다. 茶라 함은 차나무 잎으로만

만든 고유의 정통 차를 말한다. 차(茶)에 반하여 차를 생활화하고 평소 다례(茶禮)를 보급하는 일을

좋아서 해오는 터이지만 날이 갈수록 두렵기조차 하는 요즈음이다. 차 생활은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덕목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절실히 느껴진다.

  중학 2학년인 내 딸아이 친구 다섯 명이 격주로 토요일 오후에 우리 집으로 다례(茶禮)실습을

하러 온다. 열성이 대단하고 너무 좋아한다. 손수 자신의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요즘 아이들이기에

직접 해 본다는 것이 즐거움인 것 같다. 나도 이 날은 그들을 지켜봐 주며 같이 오붓한 차의 아취를

즐기기도 한다.

  관념의 때가 찌든 어른들은 선뜻 차 생활을 시작하지 못한다. 아직은 초롱한 눈망울을 지닌

아이들이기에 이 혼탁한 사회에서 몸과 마음을 가꾸고 우정을 키우기 위한 방편으로 차(茶)를

같이 하는 이 시간의 의미를 먼 훗날 그들이 깨닫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처음에는 도자기 그릇을 앞에 두고 망설이기도 하고 부끄럽고 쑥스러워 했다. 차 한 잔 마시는

고요한 여백도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바쁜 현대 생활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초점을 잃어가기도 쉽다. 이런 때일수록 차 생활이 필요하다. 삶을 아름답게 창조해내고,

인생의 내용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길이며, 조화와 균형을 터득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게

바로 차 생활이다. 차 한 잔을 온전히 마시기 위해서는 일 년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아니, 평생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차 잎을 봄철에 정갈하게 따서 만들고 잘 보관하여 눈서리 내리는 겨울까지 내내 따뜻이

우려 마신다. 물을 붓고 끓이며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성찰한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갈등의 요소들을 해소하며 안정을 찾는다. 다관에 물과 차를 넣고 알맞게 농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의 여유는, 영원을 향해 마음이 열려있는, 사랑이 머무는, 축복의 순간이기도 하다.

  차 한 잔을 마신다는 것은 기호음료의 물질적 개념만은 아니다. 茶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우려내는 전 과정, 그 분위기 전체를 마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목적을 위한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한다.

  차를 마실 때 색, 향, 미를 잘 음미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몸과 의식이 분리되지 않고

이 때 이 순간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순간 목전의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집중력을 키우기도

한다. 색향미가 잘 조화된 차 맛을 내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차를 행하여 가는 동안 자신의 삶을

조화롭게 꾸려 갈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진정 정갈한 차 맛과 차향처럼 나의 지닌 맛이 그리되어 가는지 부끄러운 마음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마음속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차나무를 키워 갈 것이다.  (1988년 5월 3일 전북일보)

 

 

 

 

 

 

 

 

 

 

 

 

 

 

 

찻물, 신성한 선계의 빛깔 

 

차문화 절정기 고려시대, 청자 비색은 찻물 빛깔 재현 

 

  수렵과 목축을 주로 하는 대륙의 기마민족에게 차는 육식으로 인해 부죽하기 쉬운 비타민과  

무기질을 보충할 수 있는 필수적인 식품이다. 우리 민족이 대륙을 무대로 활동하던 시절, 차는  

지금의 중국인들처럼 일상적인 생활음료였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흔히 마시던 차가 기호음료화 되어 특별한 예법과 결합되며 발전해 간 것은  

농경문화와 만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맑은 물이 넘치는 한반도로 들어와 농경생활을 하게  

되면서 상류층을 중심으로 최고의 맛과 향, 멋을 추구하며 차는 하나의 고급문화로 발전해  

갔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일반 서민층에서는 여전히 특별한 격식 없이 일상음료로 차를  

마셨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차를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애용했는지는 오늘날 '차'라는 단어가 모든 음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특별한 음료가 없던 시기, 차는 우리의  

생활음료였고 세월이 지나면서 차문화가 쇠퇴한 후에도 언어만은 남아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를 '차'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차나무 잎을 가공하여 만든 음료  

이외의 것을 '차'라고 무르는 것을 잘못된 것이다. 

  우리 역사상 차문화의 절정기는 고려시대였다. 차가 불교의 선(禪)사상과 결합되면서 화려했던  

불교문화만큼 차문화도 발전해 갔다. 고려 도자기의 발전은 차문화의 산물이다. 선계의 빛깔로  

일컬어지는 고려청자의 비색(秘色)은 우려낸 찻물의 빛깔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고려시대 사찰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차문화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억불정책이 시작되면서  

불교와 함께 쇠퇴기를 겪는다. 일부 승려와 초야에 묻힌 선비를 중심으로 차문화는 가늘게  

그 명맥만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류와 상관 없이 일반 서민충의 음다 풍습은  

지속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보여진다. 다음은 지리산 화개동의 차 연구가 김필곤  

선생이 어려서 어머니가 부르시던 노래를 기록한 것인데, 우리조상들의 차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다. 

 

피네피네 차잎피네 화개동천 작설차잎 

따세따세 차를따세 연두색깔 봄을따세 

따세따세 차를따세 임생각도 함께따세 

 

쌍계칠불 깊은 절에 쇠북소리 범종소리 

우전세작 귀한차는 부처님께 공양하고 

입하지난 중작대작 일년낸내 집안약차 

 

청동화로 곱돌솥에 돌돌돌돌 차를달여 

우리난군 감기몸살 씻은 듯이 풀어주고 

우리아가 이질설사 닦은 듯이 낫게하세 

 

접동접동 접동새야 네가 울면 봄이가고 

봄이가면 한잎두잎 화개동천 꽃지는데 

이소쿠리 차소쿠리 언제채워 집에갈까 

 

함양마천에서 채집된 민요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초엽 따서 상전 주고, 중엽 따서 부모 주고, 말엽 따서 남편 주고, 늙은 잎은 차약 찧어  

봉지봉지 담아두고 우리 아이 배 아플 때 차약 먹여 벙 고치고, 무럭무럭 자라나서 경상감사  

되어주소…(한국의 차문화) 30쪽에서 인용) 

 

채다가(菜茶歌)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구전민요로 미루어 차가 우리 생활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제사와 공양 등 신성과 연관된 차문화 

 

  차는 마시는 음료이다. 그러나 다른 음료와 달리 마시는데 특별한 예법과 문화가 있다.  

또한 차는 언재나 정신적인 것, 신성한 것과 연관이 되었다. 고대로부터 하늘이나 조상에  

제사를 지낼 때 차를 올렸고, 불교가 유입된 이후에는 부처님 전에 올리는 공양 중에 새벽  

정한수로 정성들여 달인 차를 으뜸으로 삼았다. 도대체 '차'라는 것이 어떤 음료이기에 다른  

음료와 달리 그런 특별한 대우를 받아온 것일까. 

차는 우선 신비로운 빛깔과 함께 깊고 그윽한 맛과 향기로 사람을 매혹시킨다. 아울러 마시고  

난 후는 정신을 맑게 해 주고 잠을 쫓아준다. 이라한 셩격 때문에 특히 선승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것이다. 예로부터 차는 피를 맑게 하고 소화를 촉진시키며 오장육부를 튼튼하게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차는 어떤 과학적 성분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차의 대표적인 성분인 탄닌Tanin은 여섯 종류의 카테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살균과 해독,  

수렴 작용으로 신체 내에 들어온 병균을 죽이고 독소와 독물을 흡착, 배출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성분으로 차는 유리 몸의 중금속과 니코틴의 해독 작용을 하며 염증을 억제시키고 혈중  

콜레스테롤을 저하시켜 동맥경화 고혈압을 예방한다. 아울러 카테친은 위장과 대장의 활동을  

촉진 시키는 작용을 하여 이질, 설사, 위엄 등 장과 관련 돤 각종 질병에 효과가 크다. 특히  

암 예방에 큰 효력을 발휘하는데, 중국 예방의학 과학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불발효차(녹차),  

발효차(황차), 반발효차(우롱차) 모두 항암성분을 가지고 있지만 녹차의 항암효과가 가장 크다고  

한다. 홍차의 암 발생 억제 율이43%인데 반해 녹차는 85%에 이른다. 

  차의 카페인Caffeine성분은 주로 신경계통을 자극하여 정신 활동응 촉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며, 심신의 피로 회복과 숙취를 풀어주고 소변보기를 편하게 하며 심장을 튼튼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 차에 포함된 카페인은 커피 등의 카페인과 달리 카테치, 데아닌, 비타민C 등과  

분자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흡수작용이 서서히 일어나 불쾌감이나 부작용이 없으며 훨씬  

부드럽다. 또한 차는 글루타민산, 아스파라긴산, 아르기닌, 글리신, 알기닌, 바린,데아닌 등 각종 

유리아미노산을 포함하고 있으며 비타민 A,B,C,E 등이 풍부하게 들어있어 각종성인병을 예방하고  

비만을 막아주며 노화를 지연시킨다. 아밖에도 차에는 칼륨, 칼슘, 인산, 망간, 요오드 등 각종  

무기질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마시는 음료 중에 이 정도로 다양한 영양분과 약용성분을  

조화롭게 표함하고 있는 음료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신비로운 맛과 향까지 겸비했으니 과연  

초의선사草衣 1786-1866)가 노래한 대로 하늘과 사람, 귀신이 모두 아끼고 사랑한 기절한  

성품이 아닐 수 없다 (天仙人鬼俱愛重知爾爲物誠奇絶). 

(글·김진옥/자유기고가

 

 

 

 

 

 

 

 

 

 

찻물, 신성한 선계의 빛깔 

 

차문화 절정기 고려시대, 청자 비색은 찻물 빛깔 재현 

 

  수렵과 목축을 주로 하는 대륙의 기마민족에게 차는 육식으로 인해 부죽하기 쉬운 비타민과  

무기질을 보충할 수 있는 필수적인 식품이다. 우리 민족이 대륙을 무대로 활동하던 시절, 차는  

지금의 중국인들처럼 일상적인 생활음료였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흔히 마시던 차가 기호음료화 되어 특별한 예법과 결합되며 발전해 간 것은  

농경문화와 만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맑은 물이 넘치는 한반도로 들어와 농경생활을 하게  

되면서 상류층을 중심으로 최고의 맛과 향, 멋을 추구하며 차는 하나의 고급문화로 발전해  

갔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일반 서민층에서는 여전히 특별한 격식 없이 일상음료로 차를  

마셨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차를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애용했는지는 오늘날 '차'라는 단어가 모든 음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특별한 음료가 없던 시기, 차는 우리의  

생활음료였고 세월이 지나면서 차문화가 쇠퇴한 후에도 언어만은 남아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를 '차'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차나무 잎을 가공하여 만든 음료  

이외의 것을 '차'라고 무르는 것을 잘못된 것이다. 

  우리 역사상 차문화의 절정기는 고려시대였다. 차가 불교의 선(禪)사상과 결합되면서 화려했던  

불교문화만큼 차문화도 발전해 갔다. 고려 도자기의 발전은 차문화의 산물이다. 선계의 빛깔로  

일컬어지는 고려청자의 비색(秘色)은 우려낸 찻물의 빛깔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고려시대 사찰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차문화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억불정책이 시작되면서  

불교와 함께 쇠퇴기를 겪는다. 일부 승려와 초야에 묻힌 선비를 중심으로 차문화는 가늘게  

그 명맥만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류와 상관 없이 일반 서민충의 음다 풍습은  

지속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보여진다. 다음은 지리산 화개동의 차 연구가 김필곤  

선생이 어려서 어머니가 부르시던 노래를 기록한 것인데, 우리조상들의 차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다. 

 

피네피네 차잎피네 화개동천 작설차잎 

따세따세 차를따세 연두색깔 봄을따세 

따세따세 차를따세 임생각도 함께따세 

 

쌍계칠불 깊은 절에 쇠북소리 범종소리 

우전세작 귀한차는 부처님께 공양하고 

입하지난 중작대작 일년낸내 집안약차 

 

청동화로 곱돌솥에 돌돌돌돌 차를달여 

우리난군 감기몸살 씻은 듯이 풀어주고 

우리아가 이질설사 닦은 듯이 낫게하세 

 

접동접동 접동새야 네가 울면 봄이가고 

봄이가면 한잎두잎 화개동천 꽃지는데 

이소쿠리 차소쿠리 언제채워 집에갈까 

 

함양마천에서 채집된 민요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초엽 따서 상전 주고, 중엽 따서 부모 주고, 말엽 따서 남편 주고, 늙은 잎은 차약 찧어  

봉지봉지 담아두고 우리 아이 배 아플 때 차약 먹여 벙 고치고, 무럭무럭 자라나서 경상감사  

되어주소…(한국의 차문화) 30쪽에서 인용) 

 

채다가(菜茶歌)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구전민요로 미루어 차가 우리 생활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제사와 공양 등 신성과 연관된 차문화 

 

  차는 마시는 음료이다. 그러나 다른 음료와 달리 마시는데 특별한 예법과 문화가 있다.  

또한 차는 언재나 정신적인 것, 신성한 것과 연관이 되었다. 고대로부터 하늘이나 조상에  

제사를 지낼 때 차를 올렸고, 불교가 유입된 이후에는 부처님 전에 올리는 공양 중에 새벽  

정한수로 정성들여 달인 차를 으뜸으로 삼았다. 도대체 '차'라는 것이 어떤 음료이기에 다른  

음료와 달리 그런 특별한 대우를 받아온 것일까. 

차는 우선 신비로운 빛깔과 함께 깊고 그윽한 맛과 향기로 사람을 매혹시킨다. 아울러 마시고  

난 후는 정신을 맑게 해 주고 잠을 쫓아준다. 이라한 셩격 때문에 특히 선승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것이다. 예로부터 차는 피를 맑게 하고 소화를 촉진시키며 오장육부를 튼튼하게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차는 어떤 과학적 성분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차의 대표적인 성분인 탄닌Tanin은 여섯 종류의 카테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살균과 해독,  

수렴 작용으로 신체 내에 들어온 병균을 죽이고 독소와 독물을 흡착, 배출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성분으로 차는 유리 몸의 중금속과 니코틴의 해독 작용을 하며 염증을 억제시키고 혈중  

콜레스테롤을 저하시켜 동맥경화 고혈압을 예방한다. 아울러 카테친은 위장과 대장의 활동을  

촉진 시키는 작용을 하여 이질, 설사, 위엄 등 장과 관련 돤 각종 질병에 효과가 크다. 특히  

암 예방에 큰 효력을 발휘하는데, 중국 예방의학 과학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불발효차(녹차),  

발효차(황차), 반발효차(우롱차) 모두 항암성분을 가지고 있지만 녹차의 항암효과가 가장 크다고  

한다. 홍차의 암 발생 억제 율이43%인데 반해 녹차는 85%에 이른다. 

  차의 카페인Caffeine성분은 주로 신경계통을 자극하여 정신 활동응 촉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며, 심신의 피로 회복과 숙취를 풀어주고 소변보기를 편하게 하며 심장을 튼튼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 차에 포함된 카페인은 커피 등의 카페인과 달리 카테치, 데아닌, 비타민C 등과  

분자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흡수작용이 서서히 일어나 불쾌감이나 부작용이 없으며 훨씬  

부드럽다. 또한 차는 글루타민산, 아스파라긴산, 아르기닌, 글리신, 알기닌, 바린,데아닌 등 각종 

유리아미노산을 포함하고 있으며 비타민 A,B,C,E 등이 풍부하게 들어있어 각종성인병을 예방하고  

비만을 막아주며 노화를 지연시킨다. 아밖에도 차에는 칼륨, 칼슘, 인산, 망간, 요오드 등 각종  

무기질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마시는 음료 중에 이 정도로 다양한 영양분과 약용성분을  

조화롭게 표함하고 있는 음료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신비로운 맛과 향까지 겸비했으니 과연  

초의선사草衣 1786-1866)가 노래한 대로 하늘과 사람, 귀신이 모두 아끼고 사랑한 기절한  

성품이 아닐 수 없다 (天仙人鬼俱愛重知爾爲物誠奇絶). 

(글·김진옥/자유기고가

 

 

 

6.  차 한 잔의 사색

 

  (차의 맛, 삶의 맛) (2014년 1월 16일 수정)

 

 

 

 

 

  연두색이 하루하루 짙어가는 산은 싱그러운 향내마저 뿜어내며 앙탄자를 짜고 있는 듯 하다.  

오묘한 녹색 보카시 카펫에 정다운 벗들과 마주앉아서 그 연두 빛 우려진 감미로운 햇 차 맛이  

보고 싶다. 절기에 맞게 곡우가 흠뻑 내렸다. 비 내린 후, 산은 그 투명한 연 초록의 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곡우부터 입하 전까지는 세작인 햇차를 만드는 시기이다. 오늘 같이 청명한 날은  

차잎 따기에 좋은 날이다. 별이 빛나는 밤사이 은빛이슬을 가득 머금은 차잎들을 다음 날 맑은  

아침이슬이 깨기 전에 채취하여 그날 안으로 만들어야 좋은 차를 얻을 수 있다, 지금 남쪽마을  

차밭에서는 차잎 따는 아낙들이 초록빛 마시며 차밭 이랑.을 누비리라 

  해마다 이른 봄 곡우차를 빚어 제일 먼저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던 순향(純香)같은 나의  

스승이자 차 벗이었던 그 님은 이 봄엔 어디에서 차를 빚을까. 나무 잎이 무성하여져 초록빛이  

겹겹이 누비어지는 숲을 바라보니 차를 벗하며 선비 정신을 고양하고 차의 공덕과 정취를  

노래하여 후세에 남긴 옛 성현들이 그리워진다. 

  차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마시는 기호음료 중의 하나다. 보통 우리들이 누구를 만나면 

차나 한 잔 하지 한다. 또 집에 손님이 왔을 때나 손님으로 갔을 때도 처음에 차를 내게  

마련이다. 그렇게 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의 문을 여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그러한  

일반적인 말의 차는 엄밀히 말하자면 전통적인 정통적 차라 할 수 없다. 차는 원래 동양차와  

서양차로 나눌 수가 있다. 우리 고유의 탕 같은 것은 차의 대용일 뿐. 

  차는 차나무 잎으로 만든 것을 정통차라 하고 커피는 커피나무 열매를 볶아서 끓여 마시는  

것이니. 그러니 커피는 차가 아니다. 지난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정책적으로 우리 문화 찾기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 때를 계기로 하여 차문화도 초의선사와  

茶山 정약용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에 이어 제 2의 부흥기를 맞았다고나 할까? 2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차가 보편화되었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열성에 의하여 말 그대로  

다반사가 되었다. 문명의 발달과 기계화는 차 생활에도 예외가 없다. 한 때 다도(茶道)니  

다례(茶禮)니 하여 말도 많았다. 차 한 잔 마시는데 그렇게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한 것인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말이며 습관화되지 않아서 하는 말인 것 같다.  

생활 속에서의 차 한 잔은 오히려 커피보다 더 간단하다.. 

  차에는 차만이 가지는 고유한 색, 향, 미 가 있다. 호수의 맑은 물빛 같은 미묘한 색과  

신비한 향이 있다. 고요한 기분으로 홀로 마시는 한 잔의 차나 마음이 통하는 서넛의 벗과  

마시는 차의 아취는 인생의 번거로움을 한꺼번에 가라앉혀주는 매력이 있다. 

  차 생활은 차와 물의 성질을 조금 알면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술적인 심미감이나 다도의  

경지를 말하자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차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히 느끼게 된다. 어떤  

일이건 기, 예, 도(技, 藝, 道) 하여 30년이라 했다. 기술적인 단련을 십여 년 쌓아 가면  

예술의 지경에 다다르며, 예술적 경지을 이루어가면 도의 경지가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인생살이도 그와 같아 열심히 살다 보면 참 삶의 길이 보일 것이다. 차에도 우리의  

인생길과 같은 길이 있다. 하지만 학문하듯 학문에 매여 그 실행을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덕이  

되지 못할 것이다. 문명의 발달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다른 여러 분야와  

마찬가지로 차 생활도 편리해졌다. 차 생활의 3대 요소라 할 수 있는 차와 물과 불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차를 구하기도 어려워서 아주 귀하게 여겼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귀양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초의선사가 손수 법제하여 보내주는 차 봉지를 받으며 오갔던 정신적 교류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다산 정약용이 차(茶)를 얻으러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를 찾아다녔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지금도 그 오솔길 주변에는 야트막한 차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있으리라. 지금은 백련사나 금산사 뿐 아니라 차 유적지 주변에서 얼마든지 훌륭한  

차도구들과 차를 구할 수 있다. 

  옛날에는 사찰주변의 자생 차 밭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잠을 깨기 위하여 혹은 약용으로 쓰기  

위하여 차를 법제하였다. 또한 궁중에 차를 진상하기 위하여 차가 생산되는 마을 에선 민초들  

노역 때문에 원성이 대단하였다 한다. 현대는 차밭 조성도 많이 되어있고, 다도도 생산자와 소비자  

다도가 구분되기도 한다. 차를 구하기도 쉽고, 물 또한 생수와 정수기가 일반화되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선인들은 좋은 물을 구하기 위하여 산정을 올라야 했고 강 가운데까지 들어가야 했다. 중국의  

다성(茶聖)이었던 육우의 다경에 보면 물의 품성을 20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체성이 좋은 불을  

얻기 위하여 땔감으로 쓰일 나무 가지를 선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은 전기와 가스가  

있으니 얼마든지 화력을 조정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현대인은 바쁘다. 탁한 마음을 여과시킬  

한적한 시간을 낼 수 없다. 문명 중독의 메뉴가 많아지는 현대에야 말로 차는 그 중독성과 취기를  

걸러내는 역할의 한 부분을 한다고 하니 벗 삼을 만 하지 않은가? 

  탕수를 끓이는데 있어서도 옛사람들은 그 물 끓는 모양을 보고 들으며 시끄러운 마음을 달래었다.  

게눈이 지나가고 고기 눈이 일어나고, 소소히 솔바람소리 들려오네. 이는 물이 끓기 시작하는 모양과  

소리를 주의 깊게 살펴본 옛사람들의 표현이다. 물이 완숙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아 물이 맹탕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일상 먹는 밥의 물도 뜸이 알맞게 들어야 맛이 있듯이 물도 알맞게  

익어야 한다. 그리하여 차와 물의 조화가 잘 되어 간이 잘 맞아야 좋은 맛을 낸다. 싱거운 사람,  

짠 사람 하는 말도 이 차의 맛에서 비롯된 것이라 알고 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삼삼하고 담백하게 간을 맞추어 한 없이 들끓는 내부의 혼(魂)을 맑혀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맹탕 헛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어지럽고 들뜬 마음일 때 평화의 간을  

하고,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물기운 같은 때 봄비에 황사가 가라앉듯 오월의 솔바람 같은 아늑한  

정적의 간을 할까. 채워도 채워도 가득 차지 않는 욕망의 불기둥은 비우고 나누는 사랑의 간을 맞추자.  

무엇보다 자신을 성찰하고 현실을 깊이 여과하는 지성의 간을 맞추어 경박한 부딪침 소리가 나지  

않는 맛갈스런 삶의 맛을 내보도록 해보자. 

  우리가 이루어 온 근대화와 민주화만큼이나 우리 인간성도 성숙해졌을까? 차의 계절을 맞아, 

우리의 전통문화가 얼마나 여과되어 우리의 현실에 재조명되고 수용되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선인들이 이루어 놓은 차 생활의 덕목마저 축제와 상업화 한 이벤트에 가리어져 우리 삶의  

간이 맹탕으로 되고 있지나 않은지 염려되는 마음도 없지 않다. 

 

 

 연두색이 하루하루 짙어가는 산은 싱그러운 향내마저 뿜어내며 앙탄자를 짜고 있는 듯 하다.  

오묘한 녹색 보카시 카펫에 정다운 벗들과 마주앉아서 그 연두 빛 우려진 감미로운 햇 차 맛이  

보고 싶다. 절기에 맞게 곡우가 흠뻑 내렸다. 비 내린 후, 산은 그 투명한 연 초록의 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곡우부터 입하 전까지는 세작인 햇차를 만드는 시기이다. 오늘 같이 청명한 날은  

차잎 따기에 좋은 날이다. 별이 빛나는 밤사이 은빛이슬을 가득 머금은 차잎들을 다음 날 맑은  

아침이슬이 깨기 전에 채취하여 그날 안으로 만들어야 좋은 차를 얻을 수 있다, 지금 남쪽마을  

차밭에서는 차잎 따는 아낙들이 초록빛 마시며 차밭 이랑.을 누비리라 

  해마다 이른 봄 곡우차를 빚어 제일 먼저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던 순향(純香)같은 나의  

스승이자 차 벗이었던 그 님은 이 봄엔 어디에서 차를 빚을까. 나무 잎이 무성하여져 초록빛이  

겹겹이 누비어지는 숲을 바라보니 차를 벗하며 선비 정신을 고양하고 차의 공덕과 정취를  

노래하여 후세에 남긴 옛 성현들이 그리워진다. 

  차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마시는 기호음료 중의 하나다. 보통 우리들이 누구를 만나면 

차나 한 잔 하지 한다. 또 집에 손님이 왔을 때나 손님으로 갔을 때도 처음에 차를 내게  

마련이다. 그렇게 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의 문을 여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그러한  

일반적인 말의 차는 엄밀히 말하자면 전통적인 정통적 차라 할 수 없다. 차는 원래 동양차와  

서양차로 나눌 수가 있다. 우리 고유의 탕 같은 것은 차의 대용일 뿐. 

  차는 차나무 잎으로 만든 것을 정통차라 하고 커피는 커피나무 열매를 볶아서 끓여 마시는  

것이니. 그러니 커피는 차가 아니다. 지난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정책적으로 우리 문화 찾기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 때를 계기로 하여 차문화도 초의선사와  

茶山 정약용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에 이어 제 2의 부흥기를 맞았다고나 할까? 2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차가 보편화되었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열성에 의하여 말 그대로  

다반사가 되었다. 문명의 발달과 기계화는 차 생활에도 예외가 없다. 한 때 다도(茶道)니  

다례(茶禮)니 하여 말도 많았다. 차 한 잔 마시는데 그렇게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한 것인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말이며 습관화되지 않아서 하는 말인 것 같다.  

생활 속에서의 차 한 잔은 오히려 커피보다 더 간단하다.. 

  차에는 차만이 가지는 고유한 색, 향, 미 가 있다. 호수의 맑은 물빛 같은 미묘한 색과  

신비한 향이 있다. 고요한 기분으로 홀로 마시는 한 잔의 차나 마음이 통하는 서넛의 벗과  

마시는 차의 아취는 인생의 번거로움을 한꺼번에 가라앉혀주는 매력이 있다. 

  차 생활은 차와 물의 성질을 조금 알면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술적인 심미감이나 다도의  

경지를 말하자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차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히 느끼게 된다. 어떤  

일이건 기, 예, 도(技, 藝, 道) 하여 30년이라 했다. 기술적인 단련을 십여 년 쌓아 가면  

예술의 지경에 다다르며, 예술적 경지을 이루어가면 도의 경지가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인생살이도 그와 같아 열심히 살다 보면 참 삶의 길이 보일 것이다. 차에도 우리의  

인생길과 같은 길이 있다. 하지만 학문하듯 학문에 매여 그 실행을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덕이  

되지 못할 것이다. 문명의 발달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다른 여러 분야와  

마찬가지로 차 생활도 편리해졌다. 차 생활의 3대 요소라 할 수 있는 차와 물과 불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차를 구하기도 어려워서 아주 귀하게 여겼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귀양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초의선사가 손수 법제하여 보내주는 차 봉지를 받으며 오갔던 정신적 교류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다산 정약용이 차(茶)를 얻으러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를 찾아다녔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지금도 그 오솔길 주변에는 야트막한 차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있으리라. 지금은 백련사나 금산사 뿐 아니라 차 유적지 주변에서 얼마든지 훌륭한  

차도구들과 차를 구할 수 있다. 

  옛날에는 사찰주변의 자생 차 밭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잠을 깨기 위하여 혹은 약용으로 쓰기  

위하여 차를 법제하였다. 또한 궁중에 차를 진상하기 위하여 차가 생산되는 마을 에선 민초들  

노역 때문에 원성이 대단하였다 한다. 현대는 차밭 조성도 많이 되어있고, 다도도 생산자와 소비자  

다도가 구분되기도 한다. 차를 구하기도 쉽고, 물 또한 생수와 정수기가 일반화되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선인들은 좋은 물을 구하기 위하여 산정을 올라야 했고 강 가운데까지 들어가야 했다. 중국의  

다성(茶聖)이었던 육우의 다경에 보면 물의 품성을 20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체성이 좋은 불을  

얻기 위하여 땔감으로 쓰일 나무 가지를 선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은 전기와 가스가  

있으니 얼마든지 화력을 조정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현대인은 바쁘다. 탁한 마음을 여과시킬  

한적한 시간을 낼 수 없다. 문명 중독의 메뉴가 많아지는 현대에야 말로 차는 그 중독성과 취기를  

걸러내는 역할의 한 부분을 한다고 하니 벗 삼을 만 하지 않은가? 

  탕수를 끓이는데 있어서도 옛사람들은 그 물 끓는 모양을 보고 들으며 시끄러운 마음을 달래었다.  

게눈이 지나가고 고기 눈이 일어나고, 소소히 솔바람소리 들려오네. 이는 물이 끓기 시작하는 모양과  

소리를 주의 깊게 살펴본 옛사람들의 표현이다. 물이 완숙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아 물이 맹탕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일상 먹는 밥의 물도 뜸이 알맞게 들어야 맛이 있듯이 물도 알맞게  

익어야 한다. 그리하여 차와 물의 조화가 잘 되어 간이 잘 맞아야 좋은 맛을 낸다. 싱거운 사람,  

짠 사람 하는 말도 이 차의 맛에서 비롯된 것이라 알고 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삼삼하고 담백하게 간을 맞추어 한 없이 들끓는 내부의 혼(魂)을 맑혀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맹탕 헛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어지럽고 들뜬 마음일 때 평화의 간을  

하고,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물기운 같은 때 봄비에 황사가 가라앉듯 오월의 솔바람 같은 아늑한  

정적의 간을 할까. 채워도 채워도 가득 차지 않는 욕망의 불기둥은 비우고 나누는 사랑의 간을 맞추자.  

무엇보다 자신을 성찰하고 현실을 깊이 여과하는 지성의 간을 맞추어 경박한 부딪침 소리가 나지  

않는 맛갈스런 삶의 맛을 내보도록 해보자. 

  우리가 이루어 온 근대화와 민주화만큼이나 우리 인간성도 성숙해졌을까? 차의 계절을 맞아, 

우리의 전통문화가 얼마나 여과되어 우리의 현실에 재조명되고 수용되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선인들이 이루어 놓은 차 생활의 덕목마저 축제와 상업화 한 이벤트에 가리어져 우리 삶의  

간이 맹탕으로 되고 있지나 않은지 염려되는 마음도 없지 않다. 

차의 맛, 삶의 맛

 

                                                       조윤수

 

연두색이 하루하루 짙어가는 산은 싱그러운 향내마저 뿜어내며 양탄자를 짜고 있는 듯하다.

오묘한 연녹색 카펫에 정다운 벗들과 마주앉아서 그 연둣빛 우려진 감미로운 햇차 맛이

그립다. 절기에 맞게 곡우가 흠뻑 내렸다. 비 내린 후, 산은 그 투명한 연초록의 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곡우부터 입하 전까지는 세작인 햇차를 만드는 시기이다. 오늘같이 청명한 날은 찻잎 따기에 좋은 날이다. 별이 빛나는 밤사이 은빛 이슬을 가득 머금은 찻잎들을 다음 날 맑은 아침이슬이 깨기 전에 채취하여 그날 안으로 만들어야 좋은 차를 얻을 수 있다, 지금 남쪽 마을 차밭에서는 찻잎 따는 아낙들이 초록빛을 마시며 차 밭 이랑을 누비리라

해마다 이른 봄 곡우 차를 빚어 제일 먼저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던 순 향(純香)같은 나의

스승이자 차 벗이었던 임은, 이 봄엔 어디에서 차를 빚을까. 나뭇잎이 무성 하여져 초록빛이

겹겹이 누비어지는 숲을 바라보니 차를 벗하며 선비 정신을 고양하고 차의 공덕과 정취를

노래하여 후세에 남긴 옛 성현들이 그리워진다.

차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마시는 기호 음료 중의 하나다. 보통 우리가 누구를 만나면

차나 한잔 하지 한다. 또 집에 손님이 왔을 때나 손님으로 갔을 때도 처음에 차를 내게

마련이다. 그렇게 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의 문을 여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그러한

일반적인 말의 차는 엄밀히 말하자면 전통적인 정통 차라 할 수 없다. 차는 원래 동양 차와

서양 차로 나눌 수가 있다. 우리 고유의 탕 같은 것은 차의 대용일 뿐. 차는 차나무 잎으로 만든 것을 전통차라 하고 커피는 커피나무 열매를 볶아서 끓여 마시는 것이니, 커피는 차가 아니다.

1988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린 올림픽을 앞두고 있을 때 나라에서는 정책적으로 우리 문화 찾기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때를 계기로 하여 차()문화도 茶山 정약용 선생으로 인하여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선생에 이어 제 2의 부흥기를 맞았다고나 할까? 3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차가 보편화하였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열성에 의하여 말 그대로 다반사가 되었다. 문명의 발달과 기계화는 차 생활에도 예외가 없다. 한때 다도(茶道)니 다례(茶禮)니 하여 말도 많았다. 차 한 잔 마시는데 그렇게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한 것인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말이며 습관화되지 않아서 하는 말인 것 같다. 생활 속에서의 차 한 잔은 오히려 다른 대용 차보다 더 간단하다. 차에는 다른 음료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차에는 차만이 가지는 고유한 색, , 미가 있다. 호수의 맑은 물빛 같은 미묘한 색과

신비한 향이 있다. 고요한 기분으로 홀로 마시는 한 잔의 차나 마음이 통하는 서넛의 벗과

마시는 차의 아취는 인생의 번거로움을 한꺼번에 가라앉혀주는 매력이 있다. 그 특유의 청아함으로 머리를 식혀 깨우고 심신을 맑게 하는 효능이 있기 때문이다.

차 생활은 차와 물의 성질을 조금 알면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술적인 심미감이나 다도의

경지를 말하자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차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히 습득하게 된다. 어떤

일이건 기, , (, , )하여 30년이라 했다. 기술적인 단련을 십여 년 쌓아 가면

예술의 지경에 다다르며, 예술적 경지를 이루어가면 도의 경지가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들의 인생살이도 그와 같아 열심히 살다 보면 참삶의 길이 보일 것이다. 차에도 우리의 인생길과 같은 길이 있다. 하지만 학문하듯 학문에 매여 그 실행을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득이 되지 못할 것이다. 문명의 발달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다른 여러 분야와 마찬가지로 차 생활도 편리해졌다. 차 생활의 3대 요소라 할 수 있는 차와 물과 불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차를 구하기도 어려워서 아주 귀하게 여겼다.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이 차()를 얻으러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를 찾아다녔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후에 스님들에게 차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귀양 갔을 때도 초의선사가 손수 법제 하여 보내주는 차 봉지를 받으며 오갔던 정신적 교류에 대한 이야기는 애틋하기까지 하다. 초의선사는 다산에게서 유가와 차 제조법을 직접 전수받은 제자였으니 초의와 추사로 이어진 차 생활이 조선 후기의 차문화를 중흥시킨 장본인들이었다.

지금도 그 오솔길 주변에는 야트막한 차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지금은 백련사나 금산사뿐 아니라 차 유적지 주변에서 얼마든지 훌륭한 차 도구들과 차를 구할 수 있다. 옛날에는 사찰 주변의 자생 차밭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잠을 깨기 위하여 혹은 약용으로 쓰기 위하여 차를 법제했을 정도였다. 또한, 궁중에 차를 진상하기 위하여 차가 생산되는 마을에선 백성들 노역 때문에 원성이 대단하였다 한다. 현대는 차밭 조성도 많이 되어있고, 다도도 생산자와 소비자 다도가 구분되기도 한다. 차를 구하기도 쉽고, 물 또한 생수와 정수기가 일반화되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선인들은 좋은 물을 구하기 위하여 산정을 올라야 했고 강 가운데까지 들어가야 했다. 중국의 다성(茶聖)이었던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 보면 물의 품성을 20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체성이 좋은 불을 얻기 위하여 땔감으로 쓰일 나뭇가지를 선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은 전기와 가스가 있으니 얼마든지 화력을 조정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현대인은 바쁘다. 탁한 마음을 여과시킬 한적한 시간을 낼 수 없다. 문명 중독의 메뉴가 많아지는 현대야말로 차는 그 중독성과 취기를 걸러내는 역할의 한 부분을 한다니 벗 삼을 만 하지 않은가?

우리가 일상 먹는 밥의 물도 뜸이 알맞게 들어야 맛이 있듯이 물도 알맞게 익어야 한다. 그리하여 차와 물의 조화가 잘 되어 간이 잘 맞아야 좋은 맛을 낸다. 싱거운 사람, 짠 사람 하는 말도 이 차의 맛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삼삼하고 담백하게 간을 맞추어 한 없이 들끓는 내부의 혼()을 맑혀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맹탕 헛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어지럽고 들뜬 마음일 때 평화의 간을 하고, 맹렬하게 휘몰아치는 물 기운 같은 때 봄비에 황사가 가라앉듯 오월의 솔바람 같은 아늑한 정적의 간을 할까. 채워도 또 채워도 가득 차지 않는 욕망의 불기둥은 비우고 나누는 사랑의 간으로 맞추면 어떨까. 무엇보다 자신을 성찰하고 현실을 깊이 여과하는 지성의 간을 맞추어 경박한 부딪침 소리가 나지 않는 맛깔스런 삶의 맛을 내보도록 해보자. 우리가 이루어 온 근대화와 민주화만큼이나 우리 인간성도 성숙해졌을까? 차의 계절을 맞아, 우리의 전통문화가 얼마나 여과되어 우리의 현실에 재조명되고 수용되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선인들이 이루어 놓은 차 생활의 덕목마저 축제와 상업화한 이벤트에 가리어져 우리 삶의 간이 맹탕으로 되고 있지나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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