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림원 茶 에세이

차 에세이 14. 영화로운 흰 꽃, 삼동을 뚫고

차보살 다림화 2009. 12. 28. 14:19

14.  영화로운 흰 꽃, 삼동을 뚫고

 

   지난 추석은 서울에서 보냈다. 김포에 있는 한재사당의 가족묘에 참배했다. 한재 이목(寒齋李穆)은

시댁 중조(中祖)이다. 이목(李穆(1471-1498)은 18세기 茶고전으로 알려진 초의선사의 '다신전'과

'동다송' 보다 300여 년 앞서 우리의 최초 茶書인 <다부(茶賦)>를 지으신 분이다.

  추석이라지만 음력과 양력이 같이 가는 해라서 늦더위가 심했다. 다정 앞뜰에 차밭의 푸른 기운이

힘차게 보였다. 차나무의 생장이 추운 지방에서는 어렵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우스 안에서 길렀다.

가지 밑을 살펴보니 드문드문 차꽃이 피었고 옥구슬 같은 봉오리도 여기저기 보였다. 소담스런 꽃술은

꼭 금가루 같다 하여 중국의 다서에는 '염부단금'이라고 했다.  맑은 향을 은근히 내어주는 귀엣 소리!

바야흐로 가을의 영화(榮華)가 열리는 것이다.

  식물이 가장 영화를 누리는 때는 꽃피는 시절이다. 아니 모든 생명이 그러할 것이다. 이른 봄이

되면 조용하던 겨울 들녘에서 작은 풀꽃으로 시작되는 꽃 소식이 즐비해진다. 매화, 산수유, 목련,

살구, 복숭아, 그리고 벚꽃에 이르면 꽃피는 4월의 절정이 아닌가. 그리고 여름을 익어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다. 하지만 그것들만이 다는 아니다. 여름이나 가을에 또는 겨울에 영화를 보는

식물들도 많다. 줄기 끝에 꽃등을 조롱조롱 달고 붉은 빛을 반짝이는 게발선인장은 내 옆에서

겨울을 영화롭게 하며, 화분의 차나무는 겨울도 아랑곳없이 영화로운 꽃을 피우고 있다.

  색다른 멋과 속내를 지닌 식물들도 있다. 상사초라는 꽃은 여름에 다보록하니 잎만이 올라와서

무성해진 후 꽃을 만나지도 못한 채 잎은 지쳐버린다. 잎이 진 자리에 여러 꽃대들이 올라 와

그 끝에 꽃송이를 매달기도 한다. 절 귀 마당에 많이 심기도 하는 상사화는 잎과 꽃이 서로 만날

수 없어 서로 그리워한다 는 그 꽃의 전설들을 모르는 이가 없다. 흔히 꽃무릇이라고 불리는 꽃도

상사화와 같아, 늦여름에 실핏줄 터지는 정열의 꽃술을 화려하게 토해낸다. 그런가 하면 너무나

유명한 蓮花. 불교에서 진리를 상징하는 꽃으로 여기는 연꽃은 '방화직과'芳花직菓'다. 꽃이 피면서

열매도 동시에 맺는다. 원인과 결과가 동시라는 뜻이다.

  어디 그 뿐인가. 9월 마지막 날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마을의 누런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영조임금 태실을 오르던 길에서 가을이 이렇게 영화로운 것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아직 추수가

이른 들녘에 황금열매를 단 벼이삭들, 둔덕에 펑퍼짐하게 널려 있던 호박을 빛나게 하던 붉은 홍초,

태실 오르는 풀밭 언덕길의 예쁜 여귀들과 산괴불꽃들이 어우러져 은빛 살결 살랑이는 억새꽃들.

아무리 밟아도 다시 일어나는 질경이 꽃들.

  영조임금의 태실에 오르면서 나 또한 영조임금이 그리 하였던 것처럼 한재 선생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영조임금은 당시 어지러운 당파 싸움과 반궁까지 들어온 음란한 잡악雜樂을 모든 유생들이

관람하는 등, 사기士紀가 바르지 못함에 개탄한 영조대왕은 "오늘날 이목의 무당에 대한 곤장의

士氣가 있었던들 어찌 저런 일이 있으랴!" 하며 만고에 우뚝한 선비의 표상으로 추앙하였다는 점이다. 

영조태실의 의미가 가을의 영화 속에 새롭게 다가온 것은 영조임금이 한재를 그리워했다는 대목이

새삼스러웠던 것이다.

 

  1495년 이목선생이 저술한 다부는 賦詩文形으로 쓰인 차의 예찬서이다. 다른 고전과 달리 내가

주목하고 지침서로 사랑하는 까닭은, 다부는 15세기까지에 탐람探覽할 수 있는 茶고전과 경서를

섭렵한 여즙의 저술로 차생활을 통한 수신구도의 自誡書이기 때문이다. 28세에 절명가를 짓고

홀연히 세상을 걷어찰 수 있었던 절개를 무엇으로 가늠할까만, 30여 년의 차생활에서 겨우

짐작할 수 있는 그의 차정신을 그는 벌써 깨우치고 차나무 같은 성정으로 사셨던 분이기에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다. 사당 앞의 차나무의 푸르름과 꽃의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의 정신이 사후

몇 백 년을 넘어서 빛을 발하는 것은 올곧은 선비정신이 차나무의 정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란 것을.

  흔히 사군자를 으뜸으로 곱을 수도 있으나, 어떤 나무 중에서도 차나무만큼  영화로운 나무가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이태백도 노래했지. '형주, 옥천사, 청계 여러 산에 차나무가 널려 있는데,

가지와 잎이 푸른 옥 같으며 옥천사 진공이 늘 따 마신다'고 했다. '천선인귀구애중天仙人鬼俱愛重.

천, 선, 인, 귀, 모두 愛之重之하니 네 품물品物됨이 진실 기절함을 알겠구나'

  차나무는 '밀엽토선관동청密葉鬪霰貫冬靑'하는 나무다. 떨기나무가 대부분이지만 중국의 茶王樹를

보면 느티나무처럼 큰 나무도 있다. '잎 촘촘 싸락눈 겨뤄 삼동 푸르게 뚫고' 새순을 온전히 내어준다. 

초봄의 새순은 지난해의 열매를 같은 가지에서 상봉하고 영화로웠던 가을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초의 선사의 동다송 2송에 그랬지, '소화탁상발추영素花濯霜發秋榮 서리 씻긴 흰 꽃 가을 영화로이

피었네'. 가을에 꽃이 피고진 자리에 맺힌 열매가 봄에 맺혀 여름을 키우고 가을로 와서, 같은

가지에서 동생 꽃과 만나는 해후를 누리고 그 익은 열매는 떨어진다. 그래서 '화실상봉수花實相逢樹'

라 하니 꽃 중에 이보다 더 영화로운 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송나라 때 주돈이는 그의 '애련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余謂 菊花之隱逸者也 牡丹花之富貴者也(여위 국화지은일자야 목단화지부귀자야)

  나는 국화꽃은 숨어서 여일하는 자요, 목단꽃은 부귀자이며,

  蓮花之君子者也(련화지군자자야)  연꽃은 군자라 말하겠노라.

  噫! 菊之愛 陶後鮮有聞 蓮之愛同予者何人(희! 국지애 도후선유문 연지애동여자하인)

  아, 국화사랑은 도연명 이후 듣기 드물고, 연꽃을 사랑하는 자는 얼마나 되겠는가!

  꽃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없겠으나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뜻이겠다.

오늘날 차 생활이 범람하고 있지만, 이목이 사랑하고 살았던 茶精神을 얼마나 얻고 있는 지

의문이다.  차나무 사랑이 그에 못 미치니 나 세상 떠난 후에 이 차 사랑을 이어갈 자 있어

얼마나 나를 기억해 줄까. 짧게 살았어도 굵게 살아 이목의 차정신은 후세 대대로 차인(茶人)들에

의하여 회자될 터이니 위대한 삶이었다.

  올해는 추석 때부터 경기도 한재사당에서 차나무 숲에서 그 어른을 추모하고, 10월에는 전주

중인리 친구 집의 정원에서도 차 꽃들을 만났다. 시월이 익어갈 때 차지기 네 집의 차나무 정원에는

차 꽃들이 만발하여 은은한 꽃향기에 둘러싸여 그들의 영화가 은혜로웠다. 토실한 차 씨앗을 구하고

차 꽃도 허락하여 이 겨울에도 그 영화를 마신다.  한재사당 앞의 차나무에 꽃이 피고 늘 푸른 잎들이

생전의 선비정신을 빛내는 것처럼 사후에까지 생의 정신을 남길 수 있는 삶이라면 영화로우리라.
(2008 겨울)

 

  

15.  염부단금 같은 꽃술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 2송에는 차(茶)꽃과 차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姑射야仙子粉肌潔 고야선자분기결 / 閻浮檀金芳心結 /  염부단금방심결

    고야산 선인 깨끗한 살결로 분장하고 / 염부강 단금이듯 향기로이 맺힌 꽃술'

      -꽃술 누르기 황금 같고, 가을에 꽃이 피면, 맑은 향기가 은은하다-

    沆瀣漱淸碧玉條 항해수청벽옥조 / 朝霞含潤翠禽舌 조하함윤취금설

    - 한밤이슬에 닦이어 맑은 푸른 옥 가지 / 아침안개 배어 윤택한 비취빛 작설이여! -

 

<장자>에도 姑射之山 有神人居焉 라는 말이 있다는데, 항해沆瀣는 한밤중에 내리는 이슬기운을

말한다. 축시 (01-03시 사이)에 고산정의 북쪽 하늘에서는 천기의 항해가 내리는데 도가(道家)에서는

항해를 마셔서 수명(修命)의 약으로 한다고 했다. 차 잎을 따는 날은 맑은 날 아침 안개가 걷히기

전에 따야 최상으로 여겼다. 여러 해 손수 차를 따고 찻잎을 덖어 보았지만, 아직도 아침안개 배인

잎은 딸 수 없었다. 그러나 맑은 날 이른 아침 햇살에 반지로운 햇잎을 '비취빛 작설이여!' 하며 깊은

감흥이 올라오는 심경을 토로하는 그 마음은 일천, 이천여 년의 옛 사람과 다를 바 없어, 한 하늘

어디선가 같이 교감하는 맛이려니!

 

 

또한 가을에 차꽃을 만나는 그 기쁨이라니! 봉오리나 반쯤 핀 꽃이 머리 숙이고 있는 모습은

수줍은 낭자의 뒷머리의 어여쁨이라 할까. 허차서와 그의 친구가 말했던 그 '십삼 세의 낭자'의

뒤태라고나 할까. 활짝 핀 흰 꽃 안의 소담한 꽃술이라니, 그것을 '염부단금'이라 했을진데, 그

얼마나 고귀한 것을 말함인가! 염부수란 나무는 중국의 어드매 쯤 있는 것인지.

  염부수 숲 속을 흐르는 강바닥에서 나는 사금으로 적황색에 자주 빛을 띠고 있어서 가장 고귀한

황금으로 평가되었다지 않는가. 지금도 그 강바닥에 사금이 있는지. 천 년이 지나고 이 천 년이

지난 세월, 지난 봄에 지진이 일어난 사천 지방 어디쯤인지도 모를 일. 염부단금은 그저 전설이

되어 흐르고 있는 것이려니!

 

 

 '이태백이 이르기를 '형주 옥천사' 청계 여러 산에 차풀(차나무)이 널려 있는데, 가지와 잎이

푸른 옥 같으며 옥천자 진공이 늘 따 마신다'고 했다. 천(天),선(仙), 인(人) 귀(鬼) 모두 애지중지하니

네 품물 됨이 진실 기절(奇絶)함을 알겠구나.' 라고 초의선사도 이어 읊었다.

  중국은 동진 16국과  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수문제의 통일을 바탕으로 당나라에 와서 개원

연간이래 중국 봉건 사회에서 전대미문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성당(盛唐) 시기에는 정치, 경제,

문화와 종교 등 전반에 걸쳐 전성기를 누렸다.

 

 

차 산업도 대대로 발전을 거치면서 당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성숙된 단계로 발전하였고, 남방

농업 경제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남방의 차는 대량으로 북방에 운송되었고, 차 수요의 증가에

따라 또 차 산업이 발전되었다. 야생의 차나무 이외에 대량으로 인공재배가 진행되었다. 당대 차

산지는 대대적으로 증가되어 사천, 운남, 광동 광서, 복건 절강, 강소 등 15개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재배되었다. 그 지리적인 위치는 대개는 기온이 온난다습한 남쪽  지역의 수많은 구릉과 산기슭에는

모두 차나무를 심었다. 역사에는'강남의 백성들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대부분 차 농사를 짓고

있다"고 기록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신라 때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앗을 가져왔다 하여 지금 하동 지방에 가면

천 년 된 차나무가 있다. 섬진강 따라 하동 지방에 가면 산 비탈바다 차나무가 심어진 광경을 볼

수 있다. 겨우 20여 년 사이 그 정도 발전될 수 있었다.

 

 

당대의 육우(陸羽)가 저술한 <다경(茶經)>은 고대로부터 전해진 차의 옛일에 관한 저술을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차 산업에 관한 세계 최초의 전문저서로 찻잎의 생산과 판매, 건조, 볶는 방법,

다구 등에 관하여 일일이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일본과 서역까지 그의 다경이

전파되었다. 당대 수많은 유명인들은 모두 차를 좋아하였다. 육우를 이은 다도의 명인은 노동

( - 835)이라 한다. 노동은 소실산에 은거하며, 스스로 호를 옥천자라 했다. 저서로는 <옥천자 시집>

이 있는데, 그의 '칠완차가'는 차를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읊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중국의 유물 중, 성당(盛唐) 시절, 금화 앵무 문양 손잡이가 달린 은주전자를 중국유물집에서

보았다. 그것은 1970년 섬서성 서안 남쪽 근교 하가촌의 당대 저장 창고에서 연단(煉丹)용 금은

용구 수십 개 중의 하나이다. 실제로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러한 기구의 출토는 당대 상류 사회에서 석연단(石煉丹) 복용이 성행하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당육전(唐六典)의 기록에 의하면 성당 때 금속 가공 기술에는 소금(銷金), 박금(拍金), 도금(鍍金),

직금(織金) 등 14종류의 방법이 있었다. 발굴되었던 2백여 가지 금은기로 그 중에는 접시, 잔, 사발,

주전자, 관, 솥, 합, 향로, 향구 등이 있었는데 그 그릇들의 형태는 아름답기 그지없다고 한다.

  '신비한 동방의 연단술'이란 말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선조들은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욕망이

있었다. 일종의 야금(冶金)시술을 이용하여 광물질의 약을 만들어 내어 연단술이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연단자를 칭할 때는 방사(方士)라고 했다. 진(晉)대의 유명하였던 갈홍의 저술인 <포박자>라는

책 속에는 당시 방사들이 사용했던 연단의 원료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다. 그 책은 인류문명

발전 사상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연단술은 당대의 금속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차산업과 함께 금속에서 당삼채와 도자기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하니 육우의 다경의 차도구를 보면 당시의 문화를 엿보게 한다. 차의 종류는 조차(粗茶),

산차(散茶), 말차(末茶), 병차 등이 있었다. 오늘에 비추어 보면 차를 만드는 과정에 따라 차도구는 매우

복잡하고 그 수가 많았다.  연단술도 최고조로 발전하였기에 화려한 문양의 은주전자도 장생을 위한

연단술로 쓰였으리라. 육우의 다경 4장의 그릇에 보면, 차솥은 무쇠로 하면 좋다하였다. 다음으로

질그릇 돌그릇은 다 맑은 그릇이나 바탕이 굳고 실하지 않으며 오래 유지하기가 어렵다. 은을 사용하여

만들면, 극히 깨끗하나, 다만 사치 화려함이 지나치다, 우아하면 곧 아취로웁고, 깨끗하면 또한 산뜻하다.

오래 쓸 량이면, 끝내는 쇠로 돌아갈 것이다.

  아름다운 은주전자에 염부단금을 달였을까? 안개 서린 아침노을에 반지로운 어린 싹을 한 잎 한 잎

따서 오전 안으로 덖었다가 가을에 염부단금같은 아리따운 꽃을 청백자 잔에 띄우고…. 그건 사치함이

지나치다 삼가라 했으려니.

 

 

9년 간의 정벌 끝에 천하를 통일했던 수문제 양견은 태자 양용에게 "자고 이래로 사치스럽고

부패한데 오래도록 평안함을 구가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너는 태자의 신분으로

반드시 절약해야만 한다"라고 훈계하였으나….  수문제의 모든 제도는 당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과도기가 되고 말았다.

 

 

 

그 달을 떠서 찻잔에 담고

 

어제밤에 뜬 보름달은

참으로 빛났다.

그 달을 떠서 찻잔에 담고

은하수 국자로 찻물을 떠

차 한 잔에 명상한다.

뉘라서 참다운 차(茶)맛을 알리요

달콤한 잎 우박과 싸우고

삼동(三冬)에도

청정(淸淨)한 흰 꽃은

서리를 맞아도

늦가을 경치를 빛나게 하나니

선경(仙境)에 사는

신선(神仙)의 살빛 같이도 깨끗하고

염부단금*(閻浮壇金)같이

향기롭고도 아름다워라

    -초의선사(草衣禪師)-

 

 

 

염부단금*(閻浮壇金):염부나무 사이를 흐르는 강에서 나오는 사금(沙金). 또는 염부나무  밑에 있다고 하는 금 덩어리.

    주: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분이다. 그래서 '다성(茶聖)'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