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예덕상무사와 충의사

차보살 다림화 2011. 4. 24. 12:17

 

 

행촌수필문학회 2011년 봄 문학기행 날,

 

이곳 완주의 벚꽃은 꽃비가 내려 이렇게 땅바닥을 수놓고 있었다.

 

 

 

 

이번 봄 문학기행은 충남 예산 지방이다.

차령산맥 위쪽 가야산을 둘러싼 예산, 서산, 홍성, 태안, 나아가 당진, 아산에는 비산비야의 넓은 들판이 생겼단다. 옛날에는 여기를 '내포內浦'라 했고 지금도 이 일대를 내포평야라고 부른단다.  내포 지방은 전북의 김제나 부안 지방 같이 농사와 과일이 잘 되고 수산물도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택리지에 "산천은 평평하고 아름답고 서울의 남쪽에 위치하여 서울의 세력있는 집안치고 여기(충청도)에 농토와 집을 두고 근거기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다. ...  사실 안동 김씨 후예인 내 동생 시댁도 이 곳에 땅이 제법 있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예산 지방으로 들어서니 애정어린 농촌의 전형을 그리려면 내포 땅이 좋다고 한 화가의 말이 기억되기도 한다.

 

기행단의 버스가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충의사'와 '예덕상무사' 앞이다.

관광이나 유적 답사는  길을 떠나 새로운 곳을 찾아가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더듬으며 그 옛날의 영광과 상처를 되새기고 나아가서 오늘의 나를 되물으면서 이웃을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 땅의 역사 지리와 삶의 내용인 인문지리를 어느정도 이해하는 일이 바탕이 된다.

예덕상무사에 들러서 옛날 보부상들의 흔적을 들러보는 일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보부상들의 삶과 유품전시장에서 우리는

옛날 장돌뱅이들이 등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넘나다녔던 것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조선 정조임금 시절 제주도의 거상이 된 '김만덕'의 드러마를 보았는데, 거기서도 부보상을 꾸려서 장사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보부상이라 하지 않고 부보상이라고 하는지 의문이 되었는데,

알고보니 보부상이나 부보상이나 같은 말이었다. 보상은 보자기에 싸고 다녔고, 부상은 지게에 지고 다녀서 생긴 이름이니 그렇다.

 

 

 

 

우리의 문학 속에 나타난 보부상의 흔적은

'정읍사'와 '메밀꽃 필 무렵'에 나타다 있는데, 오늘 이 전시관을 통하여 행상들의 생활을 살펴보니 정읍사의 여주인공의 기다리는 심정이

비로소 애틋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 장돌뱅이라 불리는 보부상이 하나의 길드적 조직으로 형성된 것은 고려말, 조선초로 생각된다.

이성계가 석왕사를 지을 때 황해도 토산 사람 백달원이 보부상을 거느리고 불상과 건자재를 운반한 공이 있어서 이태노가 그에게 보부상의 상행위에 관한 전권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덕상무사'ㅂ 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 역대 보부상 두령의 위폐 중에서 '두령 백토 선생 달원 신위'가 중앙에 크게 세워져 있다.

 보부상의조직은 근대로 내려올수록 커지고 사회 구성에서도 점점 큰 몫을 갖게 됐다. 1866년에 와서는 드디어 나라에 보부처이 세워졌다.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이 이 보부청의 청무를 맡았다. 그리고 나서 보부청은 여러번 기구가 개편되고 명칭이 바귀다가 1899년에는 상리국商理局 안의 좌사, 우사로 개편됐다. 그래서 생긴 말이 상무사이며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인들이 이들을 해산시키고 상권을 오로지하였던 것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적답사기> 중에서 발췌)

 

 

이 보부상들이 정치에 관여하고 환란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의 권율장군에게 수천 명의 양식을 조달해주었고,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사의 포위망을 뚫고 양곡을 조달해주었으며, 1866년 병인양요 때는 강화도에 군량을 운반해주었다고 한다. 농민전쟁 때와 갑오농민전쟁 때는 관군을 도와 농민군 토벌에 공을 세웠다고 한다. 내포 땅에 가면 보부상들이 쉬었다는 밤나무 울타리의 주막이 있다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의문이다. 정치에 관여하고 관군을 도와서 토벌에 공헌하였다는 것은 오늘에 와서 보면 민중의 한 형태로 보일 뿐이다.

대부분의 행상들은 힘든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전쟁 때에는 민중의 입장에 설 수 없었다. 그들의 시장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현대에 와선 정경유착이라는 단어의 뿌리가 이 때에 자리 잡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관권과 상권의 결탁이라는 것이 이토록 오랜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결국 그들이 국가의 반란 때 기여했다는 것은 그들의 순수한 애국적 동기보다는 상권을 지키기 위한 시장보호차원이었다고 보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상무사에 와서 과거에서부터 쭉 이어져 온 사회의 밝은 면과 어두움을  읽어봐야 할 것이다.

 

 

 

 

 

예덕상무사 옆에 '윤봉길의사기념관'과 충의사가 있다.

윤봉길의사도  이 보부상단들로 인하여 세상소식과 일본인들의 동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농사가 잘 되는 내포 땅, 기암절벽이 만드는  절경은 없어도 낮은 구름으로 이어지는 부드럽고 온화하여 누구라도 고향 같은 친근감이 있는 이 땅에서는 윤봉길의사를 비롯한 기골이 장대한 걸출 인물이 많이 탄생한 것은 아마도 이 평야보다는 가야산 정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유홍준의 심사였다. 최영 장군부터 시작해서 사육신의 성삼문, 임진란의 이순신, 9년 유배객 추사 김정희, 구한말에 자결한 의병장 면암 최익현, 김대건 신부, 김좌진 장군. 개화당의 김옥균, 상록수의 심훈, 남로당의 박헌영, 만해 한용운과 화가 고암 이응로 등이 그들이다. 자기의 명을 못다할망정 의를 다한 분들이시다.

 

윤봉길의사는 어렸을 때부터 누구와의 싸움에도 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성정이었으니 어찌 일제와 싸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지나는 거리마다 나무들의 새 잎이 쫑긋쫑긋 반짝이며 생명의 환희를 일게 한다.

 

윤봉길의사를 향해 묵념을 올리고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회원님들.

 

 

 

내포 땅의 가야산 주변에는 명승지도 많지만 오늘 우리의 목표는 이름 높은 명승지인 '수덕사'이다.

 

20여 년 전의 수덕사와는 많이 달라져 있어서 주변을 잘 알 수 없다.

이 일주문은 새로 건축한 것 같았다.

전북 지방의 벚꽃은 다 떨어져 가고 있는데 이곳은 약간 높은 지역이어서인지 꽃잎들이 절정을 넘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계단을 오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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