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일기

아! 슬프다 수덕사여!

차보살 다림화 2011. 4. 25. 02:01


아! 슬프다 수덕사여, 그 옛날의 수덕사여!

 

예산 수덕사 입구의 난장에는 이곳 내포 땅의 생산물이 풍부하다는 것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식당가와 상가를 지나서 수덕사 경내로 오른다.

 

 약간은 쌀쌀한 듯한 상쾌한 바람결에 살랑거리는 벚꽃잎을 올려다보며

아련한 봄날의 정취는 무르익고

배가 퉁퉁하게 부른 배흘림 기둥 네 개가 일주문 비붕을 받치고 있다. 총림 다운 일주문이다.

 

1984년 총림으로 승격된 후의 건축문인 것 같다.

 

 

선생님들 뒤돌아 봐주세요.

 

수덕사 대웅전 오르는 길에서 이 오줌싸개도 만났다.

 

 

수덕사 오르는 길은 저 남녘 지리산의 쌍계사 오르는 것 같이

약간 경사지게 긴 오르막 길을 올라야 한다.

일주문에서부터 덕숭산의 온갖 나무들이 새순을 내밀어 손짓하고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어우러진 풍경에 선남선녀들이

모두 즐거운 봄빛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현대적인 칠층석탑은 만공스님께서 축조하였다는데 기단부가 없이 건축한 것이 또 하나의 현대적 특징인가.

 

 

 

 

돌계단이 몇개나 될지 헤아려보지 못하였다. 돌계단이 앞을 가려 대웅전은  나타나지 않고 계단 끝에 가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국보 제 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을 보기 위하여 어마어마한 성채를 축조해 놓은 것 같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것이 서글펐다. 이래서 유홍준은 '슬프다 수덕사여! 그 옛날의 수덕사여!' 했던가보다. 자연스런 흙길을 버리고 값비싼 돌바닥과 돌계단을 쌓은 결과 중국 무술영화 세트 같은 괴이한 형상이 되고 말았다고  탄식할 만했다. 문화재 전문위원인 건축사가 신영훈선생은 이런 짓을 막지 못한 것을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단다.

 

그러나 돌계단을 다 오르고 초파일 연등으로 가득한 마당 옆, 법고각을 감싸고 있는 하얀 벚나무와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순간

돌계단에 대한 못마땅한 생각은 일순에 사라져버린다.

 

 

법고각 전각의 공포供抱와 쇠서 모양, 기둥 장식 조각들의 낡은 색채가 전각의 모양과 어울려서 아름다웠다.

그 앞에서 ...

 

자주빛 새 잎이 나오고 있는 이 고목 아래의 벤취에 어찌 앉아보지 않을 수 있으랴!

빈 의자를 그냥 두고 오면 유죄!

 

내 꿈 속의 수덕사는 사라지고 이렇게 고목 아래서 그 옛날의 수덕사를 그려본다. 마치 내가 옛날부터 수덕사와 인연 지은 사람 같이 늘 마음 속에 있었다.  전생에 수행자였던 사람들이 이생에서 가족으로 만났던가. 엄격한 어머님 같은 노보살님의 가족은 모두 절집의 인연을 가지고 있다. 보살님이 젊은 처녀 때 부모님 몰래 중이 되겠다고 절로 도망갔지만 도로 잡혀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보살님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런데 보살님은 군인 장교와 결혼해서 아들 딸들을 낳았고 장성의 부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리고 노후에는 큰 사찰을 돕는 일로 세월을 보낸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둔 그의 큰 딸이 이 수덕사에 놀러 왔었다. 이른 봄철, 고목나무에서 새 잎이 나는 것을 보고 그냥 머리를 깍게 되었다. 장성의 딸로서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19세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지금은 중견 스님이 되어 불교의 한 문중의 큰 역할을 하신다. 바로 나의 차스승인 스님이다. 그리고 15년 후에는 스님의 여동생이 이어서 수덕사로 출가하였다. 지금은 울진의 바닷가의 광도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 이렇게 절집의 인연을 가진 가족들을 가까이서 접하고 있어서인지 나도 그의 가족의 일원 같아 이 수덕사가 낯설지 않다. 

수덕사에 와서 만난 고목나무가 어떤 나무였을까 하고 두리번거려지기도 한다. 약관의 나이에 세상의 무상을 보았다고 했던가. 그리고  고목나무의 새 잎처럼 절집에서 새로운 생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봄마다 차를 만들고 차공양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현대 차인으로써는 가장 오래 차를 만들어오신 분이지 않을까 싶다. 선방에서 수행을 마치고 세상에 막 내려와서 금산사의 심원암에 주석했는데, 그 때 내가 전주에서 다례원을 하게된 인연으로 만나게 되어 우리는 한 눈에 반했던 것이다. 불교신자는 아니었지만, 난 오히려 천주교 신자였다, 차茶 일을 같이 하며 배우고 좋아하게 되어 지기지우가 된 셈이다.  스님을 만나면 내 자신이 청청해지는 것을 느낀다. 스승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 만나지 않아도 같은 마음인 듯한 사람. 귀한 인연이었다. 어느 때인가 그님은 말했다. 깨치고 보니 구태어 불교가 아니어도

상관 없다고. 그러나 이왕 불교로 출가하여 뿌리 내렸으니 그 안에서 뜻을 펴리라고 했다. 법명도 따라서 처음에서 '지혜를 본다'는 뜻이었지만 지금은 '지혜를 굳힌다'는 한문자를 쓰고 있다.  스님이라고 특별히 받들고 어려워하지 않는 나의 태도를 참 좋아해서 격이 없이 지냈다.

 

 

 

드디어 국보 49호인 대웅전 전면이다. 언뜻 무미건조한 것 같지만 마름모꽃 사방연속무늬의 창살은 이 집의 정숙한 기품을 더욱 살려준다. 부안의 내소사의 창살문을 흔히 말하며, 꽃창살 무늬로 유명한 사찰도 많지만, 이 대웅전의 창살문의 격조를 비교할 수는 없다.

사찰 건축의 대표적인 지붕 형식은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백제계 사찰이지만, 고려 충렬왕 34년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까지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나무로 지은 집이다. 철근을 써도 100년을 넘기지 못하는 건축물이 많은 현대로서는 나무로 된 집이 700년 이상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귀중한

건축사의 한 몫이다. 단순하고 화려한 장식과 단청도 없는 저 간결한 모습이 어째서 그리도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는가. 눈길을 확 끌게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눈이 위둥그래지는 현대인에게 이 단순성이 보여주는 간결한 것의 아름다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런 수식이 가해지지 않은 필요미는 얼른 다가오지 않는다고 유홍준도 말했다. 그는 다시 말한다. "그러나 안정된 정서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덕사 대웅전의 저 간결미와 필요미가 연출한 정숙한 아름다움에 깊은 마음의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도 가벼운 밑화장만 한 중년의 미인을 만났을 때 느기는 감정 같은 것이다."

 

 

나는 절집을 가면 반드시 주 건축물의 뒷 모습을 본다. 절집의 후원을 두러보는 맛이 참으로 고즈넉하기 때문이고 뒷산의 울창한 숲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덕사 대웅전 뒤는 덕숭산총림을 가늠할 수 있기에 이 가람이 저 숲을 이루는 각가지 나무들처럼 모인 승려들의 수행처가

될만한 까닭이지 않은가. 백제시대 국보 343호인 산경문전 전돌의 원관념이 이 대웅전 뒷산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바로 이 맛배지붕의 옆면, 한 장의 현대 회화 한 폭을 보는 것 같다. 건축물 부재가 그대로 바깥으로 노출되어 골격을 드러낸 채 간결한 면분활과 비례미를 나타낸 그림. 색채도 단순한 갈색톤 자체로... 우리의 전통 조각보가 조각천을 사용하다보니 아름다운 면분할의 디자인이 되었다. 조상들의 손맛이 담긴 조각보가  몬드리안의 추상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하듯이 대웅전의 옆면 또한 몬드리안의 추상화 같은 단순하고 경쾌한 초현대적인 맛도 느껴진다.

20세기 신조형주의를 창시한 화가 몬드리안, 클레의 그림과 우리의 전통 조각보는 직선의 비례와 색의 조화를 통해 조형미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많이 닮아 있다.

건축물의 외형은 각 부재들이 이루어내는 면분할의 조화 여부에 성패가 걸린다고 한다. 수덕사 대웅전의 면분할은 무엇보다도 건물의 측면관에 멋지게 구현되었다. 우리 시대 건축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간결성의 멋과 힘이 거기 있다는 것이다. 튼튼한 부재의 정직한 드러냄이야말로 이 집이 천년이 가도 끄떡없음을 자랑하는 견실성의 핵심요소라고 한다. 오래 된 미래가 전통의 가치가 아닌가.

"둥근나무와 편편하게 다듬은 나무가 엇갈리면서 이루어낸 변주는 우리의 눈맛을 더없이 상큼하게 열어준다. 그리하여 수덕사를 답사했을 때 내가 가장 오랜 시간 머무는 장소는 저 대웅전의 측면이 한눈에 들어오는 오른쪽 곷밭 한귀통이로 되었다."

 

이번 문학기행 중에 고건축박물관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는 한옥의 구조에 대하여 배운 바가 있다. 이 지방에 고건축박물관이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산에는 이렇게 건축미가 뛰어난 사찰과 유교식 조선의 한옥 등이 즐비하기 때문에 고건축을 연구하기 좋은 고장이기도 하다. 전통 한옥의 지붕 모양에는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세 가지의 기본형이 있다. 이 지붕 형식을 우리는 이번에 전통건축박물관에서 기본 세 형식의 지붕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수덕사 대웅전은 '주심포집의 맞배지붕' 앞면과 뒷면의 지붕을 사람 인人 자 모양으로 배를 맞대었다고 해서 맞배지붕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목조건축의 대종은 맞배지붕이었다고 한다. 새로운 형태인 팔작지붕이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고려중기 쯤 된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가장 오랜 팔작지붕의 목조건축물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로 유명하다.

공포를 기둥 위에만 장식하는 것이 주심포이며, 건물을 화려하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장식하는 것이 다포형식이다. 맞배지붕에는 주심포가 팔작지붕에는 다포지붕이 어울린다. 다포형식이 전해진 이후에도 주심포가 세워진 것은 단순히 고식이거나 조촐한 집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수덕사 대웅전이 바로 그런 맞배지붕이다.

 

이 대웅전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배흘림 기둥이다.

배흘림 기둥은 기둥의 가운데가 배가 슬쩍 부풀러 팽팽하고  위를 좁게 마무리 한다. 지붕이 기둥을 누르지 않게 보이게 한다. 마치 살아 있는 물체가 힘 안 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멀리서 보는 사람의 시각도 안정감을 갖게 한다.

문학기행이라서 답사보다도 문우들과 시간을 함께 한다는 특성 때문에 우리는 수덕사의 여러 면모를 살필 수 없었다. 그래도 수덕사에 오면 여기만은 꼭 감상하고 가야한다고 빨간 점퍼 차림의 이 여인의 손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수덕사 대웅전이 건재하는 한 몇 번이라도 여기 올 수 있다면'수덕사는 슬프지 않다.'

 

그러고 보니 수덕사에는 여인들의 사연이 많다.  김일엽 문인이 '청춘을 불사르고' 스님이 된 사연으로 유명해진 이후로 만공스님이 비구니 선방을 창건한 까닭도 있다. 그 후 많은 비구니들의 제일 선방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일엽스님은 1896년생으로 본명은 김원주, 목사의 딸이었던 일엽은 조실부모한 후 23세에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심일운동 후 일본에 건너가 동경영화 학교에 다니다 구국하여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시인으로서 신문화운동, 신여성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신여성 나혜석 만큼이나 화려한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고 한다.

 

"으셔져라 껴안기던 그대의 몸/ 숨가쁘게 느껴지던 그대의 입술 / 이 영역은 이 좁은 내 가슴이 / 아니었나요? / 그런데 그런데 / 나도 모르게 / 그 고운 모습들을 싸안은 세월이 / 뒤담을 넘는 것을 창공은 보았다잖아요. <그대여 웃어주서서> 김원주 (일엽스님이 한창일 때의 작품이란다.)

 

그리고 또 한 여인의 애달픈 사연이 이 수덕여관과 수덕 미술관에 서려 있다.

수덕여관은 본래 수덕사 일주문 밖에 있었지만 십여 년 전 쯤, 불사를 일으켜서 일주문이 더 밑으로 내려 왔고 수덕여관을 지키던 할머니가

돌아가심으로 헐고 복원하였다.

 

수덕사미술관에는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의 전통문양이 베어나온 현대화도 있었지만, 생각나는 그림 한 점은 우람한 나무를 우러르고 있는 사람이다. 나도 많은 나무들을 올려다보고 왔기 때문일까. 1957년,고암 이응노씨가 자신의 예술을 국제무대에서 펼쳐볼 의욕으로 독일을 거쳐 파리로 건너갈 때 그는 이화여대 제자였던 박인경여사와 함께 갔단다. 오래 전부터 본부인을 버리고 그렇게 살았단다. 버림받은 고암의 본부인은 초가집 수덕여관을 지어 운영하면서 수절하고 살았단다.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섭섭함이 조금도 얼굴에 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1968년 이른바 '동백림공작단사건'으로 고암이 중앙정보부원에게 납치되어 1년여를 옥살이할 때 교도소 옥바라지한 분은 이 버림받은 본부인었다. 그리고 그는 이내 파리로 돌아갔다. 조선여인의 체념어린 순종을 나타낸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김일엽스님의 일화를 화려하다고 해야 한다면 고암의 본부인의 이야기는 슬프다고 해야할지. 슬픈 이야기를 만들게 된 고암의 자세는 예술가적 기질로 면죄되는 것인가. 예술은 좋아하지만 삶은 미워해야 하는 것인지 두 가지를 수용할 수 있다면 이상적일텐데 말이다.

 

감옥에서 풀려나서 고암은 이 수덕여관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고 있다.

수덕여관 뒤의 개울 가의 너럭바위에 암각화를 새겨 놓고 갔다. 전각자의 이름도 선명하게 '이응노 그림'이라고 새겨져 있다. (아래)

 

유홍준은 내포 땅을 답사할 때 으례 수덕여관에서 하룻밤 묵는 것이 하루의 마지막 일정으로 잡았다. 수덕여관 뒷뜰 고암의 암각화가 새겨진 너럭바위에 올라 앉아 술상을 차려놓고 답사객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고 한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인지 솔바람소리인지 구별이 안 가는 가야산 덕숭산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내포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미움을 돼개셔보는 것은 그 밤의 일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항시 그 술자리는 길지 못했다. 다음날 예산 다음 서산으로 이어지는 답사일정이 많기 때문이었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의미심장하고 아름다운 문자추상도라고 할 수 있겠다.

미술사가는 이 문자도를 고암의 西道東器서도동기식 그림 중 최고작으로 꼽는다.

어쨌던 어떤 의미가 서린 추상문자는 보기에도 돌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 같기는 하다.

 

 

 

 

이제 수덕여관과 너럭바위의 암각화는 문화유물이 되었다.

옛날의 슬픈 사랑이 이루어낸 예술품이 되어 관광객의 방문을 받고 있다.

'아! 슬프다 수덕사여!'

 

 

 

 

진짜

숲속으로 내려 비치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노란 개나리와 진달래는

더 이상 수덕사를 슬퍼 하지 않는다.

'영상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의 절, 봉암사 가는 길  (0) 2011.05.15
한국인장박물관  (0) 2011.04.26
예덕상무사와 충의사  (0) 2011.04.24
국립전주박물관의 봄  (0) 2011.04.21
암향 (산청의 삼고매)  (0) 2011.04.04